본문
과학기술에 몰두하며, 자본은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다.
파국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기술혁신이 지속해서 진전되고 있는 반면에 이른바 ‘사회적·경제적 진보’는 후퇴하고 있다. 시장의 세계화는 생산적인 ‘발전’을 잠시 겪은 후, 전 세계 수억 명 프롤레타리아 노동과 생활 조건의 악화를 가져왔고, 이제는 실업자 또는 불완전 취업자의 꾸준한 증가를 가져왔다. 예전의 조립 설비에서 노동 분업은 자동차부터 텔레비전, 가전제품, 기계, 화학, 제약, 섬유, 제조업, 식품 산업까지 생산 모든 영역을 침범해 온 마이크로 전자공학, 통신, 생명공학이 발전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점진적인 노동자 감소를 유도하며, 모델과 제품의 지속적인 다양화와 적기생산시스템(just-in-time)으로 재고를 줄여 자본이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수십 년 전, 컴퓨터 기술(통합회로기술부터 시스템 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에 투자된 거액의 자본은 미국의 실리콘 밸리 공장들과 하이테크 분야 전체에 혁명을 일으켰다. 따라서 미국의 평균이윤율은 기술혁신이 확산함에 따라 다른 산업 부문에서 발생한 ‘이윤율 하락’을 초기에는 상쇄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컴퓨터 기술 적용은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했고, 이는 먼저 제조업의 고용을 감소시켰고, 현재는 서비스업에 대한 고용을 줄였다. 지난 40년 동안 미국에서 7백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생산되는 상품 양은 매년 증가해 결국 시장이 왜곡되고, 어떤 경우에는 남겨진 노동자에게 더 많은 시간을 더한 노동 강도로 일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기술발전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났다. 마르크스는 기술발전이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킨다고 말했다(「자본론」 3권, 이윤율 하락의 법칙). 그 결과 자본의 유기적 구성(고정자본인 생산수단과 가변자본인 노동력과의 관계)이 고도화하여 결국 이윤율(잉여가치와 투자된 총자본의 비율)은 감소한다. 즉, 더 발전된 기술이 생산 과정에 적용되어 노동생산성은 향상하지만, 동시에 노동생산성 향상은 노동자의 노동일 가운데 자본가가 착취하는 상대적 잉여가치를 늘리고, 임금으로 보상받는 부분은 줄인다. 그러나 이는 ‘물리적’ 한계(어떤 경우에도 고용된 노동자 수에 항상 좌우된다)에 도달할 때까지만 자본에 이익을 허락한다. 최종적으로 상품은 반드시 판매되어야 한다. 만약 상품 판매가 증가하지 않는다면, 생산은 주로 산 노동의 이용 축소를 목표로 하는 경쟁 전략을 따르기 때문에 ‘임노동자’의 수는 감소하게 된다.
직장이 있는 사람들에게 임금 삭감, 직·간접적인 세금 인상, 공공지출(연금, 교육, 건강)의 삭감이라는 극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충분하다. 막을 수 없는 ‘탄압’이 전 세계 수억 명의 남녀를 목 졸라 죽이는 사슬을 더욱 조인다. 자본가계급은 자동화 기계와 기술로 달성되는 생산성 향상을 자극하지만 동시에 상품 판매는 감소한다. 그리고 산 노동의 사용이 줄면서 자본주의의 위기는 심화한다. 로봇은 임금을 받지 않고(로봇은 일정한 기간 비용으로 변할 기계들이다) 상품을 사지 않는 결함을 갖고 있다. 로봇은 ‘소비자’가 아니다. 로봇의 생산능력은 지급 능력이 있는 구매자를 찾을 수 없는 많은 상품을 만든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좋은 자본주의’가 부를 창출하기 때문에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는 소수 사람만이 누릴 수 있기에 ‘나쁜 자본주의’가 된다. 세상에는 유용한 상품에 대해 많고 긴급한 요구가 있지만, 수억 명의 남녀는 그런 상품을 살 수 없다. 금융시스템을 통한 신용은 상품에 대한 부분적인 수요를 제공할 수 있을 뿐, 신용은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훨씬 더 심각하고 깊은 위기에 빠뜨리는 데 도움을 주고, 공적 부채와 사적 부채를 증가시킨다. 이는 일개 국가적 차원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 비용’의 감소로 국제적 경쟁력이 강화되기 때문에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다.
자동화와 로봇
로봇은 많은 노동자보다 상품을 더 빨리 생산하지만, 상품을 구매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이 상품 판매가격에 포함하는 잉여가치(이익)가 실현되는 것을 막는다. 심지어 상품 가격이 내려도 살 소비자는 없다. 로봇과 소프트웨어 때문에 ‘과잉’ 노동자가 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보면 거의 3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수백만 명 이상이 더 증가할 것이다. 자동화는 이미 슈퍼마켓, 콜센터, 은행의 현금자동입출금기에 침투했으며, 컴퓨터가 트럭과 버스를 운전하고, 로봇이 음식을 준비하고, 행정 사무소를 장악한다. 모든 곳에서 직원들의 대폭적인 감원이 일어난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컴퓨터 네트워크 설비인력 업무 절반도 정보기술과 전자 분야에서 혁신적 자동화된 기술로 인해 필요가 없어진다. 산업 부문과 상업 부문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결정적인 측면인 동시에 이윤율이 감소함에 따라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증명되었다. 즉,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 발달과 지금 존재하는 사유재산제에 기초한 생산 관계 모순은 더욱 악화한다.
자본주의는 그 자신을 ‘합리화’한다.
‘산업혁명 4.0’은 자동화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을 완성하고 작업 속도를 높이는 또 하나의 도약대가 될 것이다. 오류와 시간 낭비는 ‘부가가치’의 극대화를 목표로 해 최소화될 것이다. 수치제어기계는 희미해지는 기억이 된다. 유연한 자동화를 통해 모델과 제품이 조립 설비에서 직접 변경되며, 시장의 수요에 따라 실시간으로 재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 자원의 조직적 ‘합리화’는 낭비와 재고를 없앤다. 세계경제포럼의 연구는 로봇과 지능형 프로그램의 발전이 모든 직업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한다. ‘업무 기술 보고서 2.0’에 따르면, 2025년까지 영국 노동자의 35%, 미국 노동자의 47%, OECD 국가 노동자의 평균 57%가 자동화로 대체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는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세계적으로 산업 부문에서 로봇은 약 6천만 개의 일자리를 없앨 것이다. 현재 일본 자동차 회사의 조립 설비에서 사용되고 있는 로봇들은 유지·보수 없이 최소 30일 동안 일한다. 로봇 팔은 생산 설비에 배치될 것이다. 컴퓨터에 의해 제어되는 자동운영은 감독할 사람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로봇 비용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개인 서비스 로봇은 미국에서 25,000달러 이하의 비용이 든다. 중국과 일본에서 가정용 청소 로봇은 싼 가격에 살 수 있다. 산업 부문에서 로봇 비용은 수십만 달러도 되지 않지만 ‘살아 있는’ 노동 ‘창조’는 50만 달러 이상의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컴퓨터, 3D 프린터, 전자두뇌를 장착한 수치제어기계는 어디서나 판매되고 있다. 또한, 농업에서는 자동화 씨앗 파종기와 추수기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 그것들은 인공위성의 안내를 받기까지 한다. 마지막으로, 커피머신, 식품 판매용 자판기, 책과 기기, 은행카드를 이용한 자동 수납 서비스 등이 상업 활동에서 확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중국의 ’자본가적 사회주의‘가 자동화와 로봇 기술에 강력한 투자를 하며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현재 산업용 로봇, 컴퓨터 그리고 다른 복잡한 자동조정장치 기계들의 가장 중요한 시장이다. 사용되는 로봇의 수에 따라 한국, 일본, 독일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살아 있는 기계’인 노동자는 ‘그들에서 독립된 죽은 기계’로 대체되고, 노동자는 인간 부품으로 합쳐진다 (마르크스, 「자본론」).
멈출 수 없는 기술 진보
마이크로칩은 2년마다 두 배씩 속도가 향상한다. 소프트웨어, 컴퓨터, 로봇은 인공지능을 향상하고 있다. 수만 명의 노동자를 대체하기 위한 소프트웨어가 발전하고 있다. 맥킨지 보고서(2017년 1월)는 앞으로 10년 이내에 현재 ‘임금’ 노동 50%가 자동화할 것이라고 했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 최근 분석은 아시아(중국, 일본, 한국)에서 정점을 찍을 것이라고 해, 앞에서 말한 인력 감축을 확인시켜 준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이러한 ‘지진’을 주도할 것이며, 이탈리아 산업에서도 로봇 설치가 매년 수천 건씩 진행된다. 고정자본(기계, 에너지, 원자재, 반제품)이 증가하고 있고, 가변자본은 비례적으로 감소하며, 문제가 다시 발생한다. 제품의 각 단위는 잉여가치를 점점 더 적게 포함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양의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해야 한다.
많은 유·무형 직업에서 형태와 내용은 점점 더 최소한의 사회적 관계에서 멀어지고, 자본주의 손아귀와 부르주아 사회의 지배적인 관계에서 기술발전은 정신적으로는 소외 과정을 심화시키며 노동력이라는 상품 구매가 일어나는 상황과 조건 모두를 악화시킨다. 자본이 노동력 착취로부터 잉여가치를 얻지 못하면 실업 예비군은 팽창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동화는 생산 과정에 남겨진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준다. 우리는 국가 경제 경쟁력을 해치는 노동 관련 규제의 ‘과도한 경직성’에 대한 불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노동자는 더 낮은 가격에 자신을 팔려는 생각이 있는 실업 예비군으로 대체될지 모른다는 협박을 받게 될 것이다.
막을 수 없는 과정
마이크로 전자기술 때문에 보다 커진 생산 유연성은 포드주의, 테일러주의, 토요타주의 같은 상품 생산에 대한 관리 시스템들보다 시간과 품질을 더 엄격히 통제할 수 있게 한다. 새로운 응용 분야(3차원 프린팅 기술, 나노 기술, 지식 기술)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현재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현대화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는 전체 시스템을 폭파할 준비가 된 폭탄이 되어가고 있다. 기계와 공장 그리고 시스템 유지를 위해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상품의 지속적인 생산 주기를 유지하는 것이 기본적인 의무가 되었다.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현대화는 시장의 공급과잉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고, 확실히 인류 고통과 절박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인류는 기술혁신과 자동화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고 있는데, 기술혁신은 자본의 지휘 아래에서 그들의 조직과 생산 주기를 매우 유연하게 분리할 수 있다. 상품 생산과 이동은 최대 속도까지 빨라져 종종 지속 가능하지 않고 고갈되는 작업 이동과 리듬을 요구한다. 그리고 ‘부가가치’는 감소한다. 통신, 생명공학, 제약, 항공, 민간용 드론 뿐만 아니라 소위 ‘성숙한 산업 분야’(철강, 운송 수단, 기계 도구, 식품 가공 등의 산업)에서도 ‘부가가치’는 감소한다. ‘부가가치’의 상승을 목표로 새로운 소재와 대체에너지가 도입된다. 그러나 평균이윤율이 하락함에 따라 상품 가치는 불가피하게 감소한다! 그 결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윤을 되살리려는 자본의 필사적인 노력은 심지어 아동 노동의 착취로까지 확대된다. 1억 6천 5백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전 세계 자본에 의해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상품 생산이 로봇에 의존한다면 자본주의는 사멸할 것이다. 실제로, 잉여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자본주의 삶과 죽음의 문제인 이익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잉여노동과 그에 따른 잉여가치를 만드는 노동자가 더 충분하지 않다면 누가 그 상품을 ‘구매’하겠는가? 노동자들은 영구적으로 ‘과잉’이 되고, 다시는 자본에 의해 그 자신의 재생산이나 심지어 미래를 위한 ‘노동력의 회복’으로서 이용되지 않을 것이다. 자본의 피할 수 없는 의무가 된 생산성 향상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많은 노동력을 불필요하게 했다. 또한, 개별 자본은 생산 과정의 기계화 및 재편성을 통해서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에 모든 것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임금 억제와 삭감, 노동 강도의 증가, 여전히 고용되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초과 근무 등을 통한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통해 더 큰 경쟁력을 추구한다. 그러나 결국 자본은 소위 노동시장에서 넘쳐나는 노동자들의 공급을 흡수하기 위한 생산적 투자 기회를 더는 찾지 못한다. 노동자의 계급적 활동이 진행 중인 곳에서는 자본이 임금 노동의 수요를 결정한다는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어, 여전히 노동의 역동성이라는 ‘합리화’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임금 노동에 대한 수요는 자본주의 위기와 생산과 유통 방식의 구조조정에 직면해서 붕괴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무역에서도 점점 더 치열해지는 국가 사이의 경쟁 때문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지속해서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자연적이고 역사적으로 발전된 필수적 필요’는 최근 수십 년 동안 확대하여 왔지만, 자본주의는 이제 세계 각지의 수억 명의 사람에게 필수적 필요를 부정하게 되었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향상되었지만, 노동자 수는 계속 감소하여 노동력에서 추출할 수 있는 잉여가치는 감소할 것이다.
잉여가치 희소성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썼듯이 기계는 항상 "마모와 찢김을 통해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더하지 않는다." 즉,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사회적 노동만이 교환가치 생산에서 유일하게 생산적 요소로 남아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로봇 활동은 이러한 목적을 촉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기술 및 정보통신과 같은 고정자본에 대한 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엄청난 자본의 중앙 집중화가 이루어지며, 금융 자본은 노동자 축소를 대가로 고도의 기술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게 된다.
이윤율 하락은 불가피하게 되고, 따라서 기생적 금융 자본 일부는 주식시장의 게임으로 눈을 돌린다. 주식, 채권, 파생상품으로 향한 자금 흐름이 상품 생산부문으로 향하던 자금 흐름을 대신하며, 축적률이 반전하기보다 둔화가 더 분명해졌다. 투자 펀드에 자금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하지만 펀드가 상품을 생산하는 산업부문의 잉여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면, 펀드에 조달된 자금은 정지되어 있으며, M에서 M´로 변화시켜야 하는 이윤을 만들지 못한다. 생산적 산업에 투자가 안 된 화폐는 무(無)에서 더 많은 화폐를 버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거의 20억 명의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는 이자, 배당, 연금, 지방세, 서비스 직원과 공무원의 임금, 경찰, 군대 등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잉여가치의 자본화
자본주의 성장은 자본축적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상품 생산에서 잉여가치의 지속적인 ‘추출’이 필요하다. 즉, 점진적으로 투자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잉여가치의 흐름이 끊임없이 지속해야 한다. 그러나 고정자본과 기계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고 가변자본에 대한 투자가 감소함에 따라 고용의 상대적 감소가 동반된다면, 축적도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산 노동의 이용과 착취에 따라 추출 가능한 잉여가치의 양은 투하자본의 양을 증가시킬 만큼 충분히 증가하지 않는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력을 가진 노동자 수는 일정 시점까지만 노동생산성 향상과 함께 늘어난다. 게다가, 잉여가치율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자본회전에 걸리는 시간은 감소해야 하고 상품은 판매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본은 상품 유통시간을 줄여서 상품이 오랫동안 창고에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윤율
기계 사용은 고용 감소와 더불어 이윤율 경향적 감소의 원인이다. 이는 직장에 남아 있는 노동자로부터 착취하는 잉여가치의 지속적인 증가가 필요하다. 이윤율은 잉여가치를 총자본(공장, 기계, 원자재 같은 고정자본에 대한 투자와 가변자본인 임금에 대한 투자를 더한 값)으로 나누어 계산한다. 로봇에 대한 투자 증가로 분모가 커지는 동안 발전의 일정 시점에서 분자인 잉여가치가 증가를 멈춘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축적은 멈추고 위기가 시작된다. 자본은 과학을 적용해 생산성 향상을 사회화한 노동력의 생산력 때문이 아닌 고정자본에 속하는 생산력 때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이다. 실제로 육체노동과 지적노동 모두에서 산 노동은 불필요해졌기 때문에 버려지거나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현재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을 분야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는 알고리즘 침입으로 흔들리는 데이터 분석, 절차 개발 및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회계사, 변호사, 은행 관계자, 이사, 재무 분석가, 기자 등의 사무직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편, 세계 각지에서는 가난과 굶주림의 늪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한편, 자본가와 연합한 ‘과학자’들은 상품 비용과 가격 사이의 ‘올바른’ 균형에 관한 가설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지불할 수 있는 ‘소비자’가 없다면, 생산과 소비 사이의 ‘중재자’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현재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심지어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포섭시켰다며, 프롤레타리아트 소멸까지도 발명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기술과 자본은 하나이며, 하나가 된 기술과 자본은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모두를 위해 자본주의를 완성하는 ‘유일한 자동 주체(마르크스)’라고 설득한다!
새로운 소비?
‘전문가’들의 몽롱한 생각은 ‘스마트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쌓여 있는 환상적인 ‘대량 소비의 새로운 물결’을 예측한다. 그들은 엄청난 이익을 꿈꾸며 말한다. “우리는 몇백만 개의 일자리, 즉 소비자를 잃게 될 것이지만, 이것은 진보를 위해 지급해야 할 대가입니다!”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최소한 인류 절반(현재 35억의 인간!)에게 문을 닫은 채 점점 더 위기에 처한 상품과 서비스 시장을 보면서 방황하고 있다. 실업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도 평균 임금의 60% 이하를 받으며 ‘빈곤 노동자’ 수를 늘린다. 그리고 우리는 엄청난 양의 고정자본(기계, 에너지, 원자재, 반제품)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가변적이고 생산적인 자본은 비례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제품 각 단위에 포함된 잉여가치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자본은 더 많은 양의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본주의에서 선에서 악으로 변한 생산성
자본주의에서 생산성 향상은 새로운 자본(화폐)이 될 수 있는 상품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필요하다. 그러나 더는 구매자를 찾지 못하는 상품 더미들은 산더미처럼 쌓인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정치학자들도 오랜 침체에 빠진 세계 경제를 애도한다. 초기에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던 걱정스러운 ‘경제적’ 상황은 디플레이션으로 변했고,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서 참을 수 없는’ 상태이다. ‘공식과 수학적 모델’은 공개되자마자 엉망이 되며, 모든 것이 예측과는 반대로 작용하는 현재 상황에서 적용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적용을 시도할 때마다 무너졌던 케인즈식 해결책(양적 완화, 무이자, 재정지출)의 신화처럼, 이제 우리는 모든 위기 근원인 자본의 이윤 저하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제는 경제 회복의 가능성은 없다. 이 시점에 자본주의는 전체 시스템을 폭파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지뢰들 위에 있다. 이른바 ‘성숙한 산업 분야’(철강 산업, 운송 수단, 기계 공구, 식품 가공 등)와 통신, 생명공학 및 제약, 항공 및 민간 드론 분야 그리고 신소재와 대체 에너지 분야가 지뢰들이다. 오직 하나의 목표는 ‘부가가치’를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부가가치는 평균이윤율이 하락하면서 줄어든다!
자본주의에서 "기계는 노동자들을 굶주리게 하고 지치게 한다." "생산력과 우리 시대 생산 관계 사이 이러한 적대감은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할 압도적인 증거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자기 활동은 그것에 이질적인 힘이 되고, 그 힘은 지배당하는 대신 지배한다." 이러한 "사물의 인격화 및 생산 관계 객관화"에서, 사적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는 지구상 모든 생물 종에 대한 완전한 착취와 지배를 실행했다. 그러나 정확히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노동력의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이 자본 활동이고, 이 활동이 생산에서 ‘무한하게 작은 것’으로 축소되었을 때, 어떠한 관계도 사라진다. 자본은 "사회적 두뇌의 일반적인 생산력인 과학과 능력의 축적을 흡수한다." 그리고 "노동자는 자본이 필요에 따라 조건화되지 않는 정도까지 불필요하게 된다. (중략) 작업과 작업량은 상품 생산의 결정적 원리에서 사라진다." 일은 순수한 추상으로 환원되고, 자본은 가치 기반을 상실한 생산 공정의 감시 아래 최소한으로 일하는 시간을 단축했고, 이제는 모순적이게도 자본은 "어떠한 잉여 생산물도 착취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기술의 현대화
결론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1845년)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다른 생산력(기계)을 낳고 현재의 교환수단(화폐)을 확대한다고 썼다. 이런 상황에서 기계와 화폐는 파괴적인 힘이 된다. 기술발전은 자본주의 노동력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산 노동’의 노동시간을 지속해서 감소하게 한다. ‘산 노동’은 자본주의에서 ‘재산의 측정과 원천’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이용 가능한 모든 생산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지구의 모든 거주자 대다수가 빈곤과 야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사회 질서에 반대한다. 자본주의는 사회·경제적으로 그 자신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인류 미래에 대한 걸림돌이 되었다.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기본 구조와 기본 범주들(가치, 임노동, 상품과 화폐)을 관찰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과 분배 구조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분명한 쇠퇴 징후를 보인다.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범주들은 영원하지 않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생산은 인류 요구가 아닌 자본증식과정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루어진다. 자본은 잉여가치 추출을 위한 과정의 ‘자동적 주체’가 된다. 자본 대부분은 오로지 자본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력을 발전시킨 후에 허구의 자본이 된다. 그러나 자본은 세계적인 축적을 위해서 인간노동력을 이용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실패한다면, 점점 더 정교한 기술사용으로 일반적인 이윤율의 양적인 감소가 촉발된다. 자본가는 이러한 모순을 노동계급에 항상 적대적인 일시적 처방을 통해서 완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생산성을 높인다는 것은 더 많은 양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을 줄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금융시장이 추구하는 잉여가치의 ‘창조’가 이제는 자본 성장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생산체계에 더는 통합할 수 없는 ‘잉여’ 인구 증가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2020년 1월 15일
프로메테오(Prometeo)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옮긴이 | 우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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