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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68혁명 50주년 :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와 노동계급의 부활

68혁명 50주년 :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와 노동계급의 부활

 

 <우리는 1968년 투쟁을 '혁명'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대적이고 급진적인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부활했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1960년대 말 무렵이 되자, 전후 호황이 사라지고,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일상생활이 동과 서를 막론하고 가난과 위선임이 밝혀지고, 두 제국주의 블록 간 대리전쟁이 베트남에서 아프리카까지 계속됨에 따라, 부모세대가 겪었던 패배와 트라우마를 경험해 보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 제기는 다른 층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1968년 5~6월 프랑스에서 거대한 대중 파업으로 터져 나왔고, 이 운동은 반혁명의 시대가 끝을 고하는, 모든 대륙에서 노동자 투쟁의 국제적 물결을 알리는 신호였다. 68년 5월 프랑스, 그 운동의 정점에서 거리 곳곳, 학교, 대학, 그리고 작업장에서, 존 리드(John Reed)가 1917년 10월 이전 러시아에서 관찰했던 바와 똑같은 깊이 있는 정치적 토론의 신호를 관찰할 수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자는 생각이 노동자와 학생들 가운데 중요한 소수파 사이에서 심각하게 논의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동요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혁명적 정치 조직의 새로운 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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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0년대 세계학생운동의 전개과정

 

 미국에서는 1964년부터 가장 대대적이고 가장 격렬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에서 학생들의 항의가 최초로 대규모 확대되었다. 학생들이 주요하게 제기한 것은 대학에서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을 위한 ‘자유로운 발언 운동’의 요구였다.

미군 신병모집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베트남전 반대, 인종 분리 반대를 선동했다. 처음에 당국은 학생들의 평화로운 점거에 경찰력을 동원해서 억압했고, 1965년 초 대학 측은 학교 내에 경찰의 활동을 허가했으며 그로 인해 버클리 대학은 미국 학생 저항운동의 주요중심지가 되었다. 동시에 로널드 레이건이 ‘버클리에서 무질서를 일소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자, 운동은 강한 자극을 받았고, 그다음 해에 인종 분리 반대, 여성권리 옹호 그리고 특히 베트남전 반대 항의시위를 벌이면서 과격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항의운동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1967년 말 952명의 학생이 베트남 신병소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68년 2월 8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시민권을 위한 시위 도중 3명의 학생이 살해당했다. 운동은 1968년에 가장 강력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불만과 과격화는 4월 4일 마틴 루터 킹의 암살로 한 층 더 증폭되었는데, 이 사건은 그 나라의 흑인 게토에서 수많은 폭력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컬럼비아대학의 점거는 미국 학생운동의 최고정점 중 하나로 다시 새로운 충돌을 불러왔다.

 

 미국 대학생들의 반란은 같은 시기에 많은 다른 나라로 퍼졌다. 아메리카 나라들 가운데서는 브라질과 멕시코 학생들이 가장 활동적이었다. 1967년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정부와 미국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지속해서 발생했다. 당국의 엄청난 진압과 대대적인 검거에도 브라질 학생들은 1968년 10월까지 거의 날마다 시위를 벌였다.

몇 달 뒤에는 멕시코가 휩쓸렸다. 7월 말 멕시코시티에서 학생반란이 일어났다. 경찰은 탱크를 투입했다. 경찰 총수는 올림픽 대회를 명분으로 잔인한 진압을 지시했고. 9월 18일 대학캠퍼스가 경찰에 점령되었다. 마침내 10월 2일 정부는 멕시코시티의 3문화광장에서 만 명의 학생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도록 했는데, ‘틀라텔롤코의 학살’로 기억되는 이 진압에서 최소 200명이 살해당하고 5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으며 2,0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그렇게 올림픽을 조용하게 치를 수 있었지만, 학생들은 올림픽이라는 강제된 휴식이 있은 뒤에도 몇 달 동안 투쟁을 계속해나갔다.

 

 당시 학생 운동 물결은 아메리카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 모든 대륙을 휩쓸었다. 아시아는 일본에서 극적인 운동이 나타났다. 1963년 이래 미국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폭력시위가 발생했는데, 주로 전학련(전국일본학생자치위원회연합)이 주도했다. 1968년 봄의 끝 무렵, 이 학생운동은 수많은 학교로 퍼졌고, 노동자들이 운동에 가담한 1968년 10월에는 절정에 달했다. 반봉기법이 통과되자, 8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했다. 도쿄대학 점거를 경찰이 진압하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했다. 하지만 1969년 1월 중순 학생운동의 마지막 요새였던 도쿄대학이 무너졌다.

 

 아프리카에서는 세네갈과 튀니지에서 학생들의 투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렇게 모든 대륙을 휩쓸었던 운동은 유럽에서 가장 거대하고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1966년 말에 런던경제학교(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시작하여 점거 운동이 퍼져나갔고, 1967년 3월에는 5일간의 점거가 있었는데, 미국의 예를 따라 ‘자유대학’이 만들어졌다. 가장 극적인 시위는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1967년 3월과 10월, 1968년 3월과 10월에 일어났는데, 모두 경찰과의 폭력적인 충돌이 있었다. 벨기에에서는 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하고 교육부문의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1968년 4월부터 수차례 거리로 나섰다. 5월 22일에는 브뤼셀 자유대학을 점거하여 ‘민중을 위해 열린 대학교’라고 선언했다.

이탈리아에서는 1967년부터 여러 대학을 점거했고, 경찰과 학생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프랑코 지배하의 스페인에서는 1966년부터 노동자 파업과 대학 점거의 물결이 전개되었다. 1967년에 그 운동은 더욱 강하게 성장했고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 학생과 노동자는 서로 연대를 표시했다.

당시 유럽의 모든 나라 중에서 독일의 학생운동이 가장 강력했다. 독일에서는 1966년 말, 사회민주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의회 외부의 반대파(APO)’가 출현했다. APO는 특히 학생들의 총회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그 회의에서는 저항의 수단과 방법에 관한 열띤 논쟁이 이루어졌다. 많은 대학에서 미국의 모범을 따라 토론그룹이 만들어졌고, 기성의 부르주아적인 것에 대한 반대로 ‘비판적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 논쟁의 오랜 전통, 즉 공개적인 총회에서의 토론 전통이 일부 부활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극적인 행동에 대한 충동에 이끌리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론과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출현했고, 더불어 자본주의 극복을 생각할 용기도 다시 나타났다. 독일의 저항운동은 국제적으로 ‘가장 이론적이며, 토론에 있어서 가장 깊게 파고들었고, 가장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토론에 병행하여 수많은 항의시위가 있었다. 베트남전 문제는 확실히, 미국의 군사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부가 있는 나라와 2차 대전의 영향이 계속 남아 있던 나라에서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1968년 2월 17일과 18일 서베를린에서 국제 베트남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에 뒤이어 12,000명이 참가한 시위가 있었다. 1965년 이후 시위는 모두 ‘비상사태법령’의 제정을 반대했는데, 이 법령은 독일의 내부적인 군국주의화와 진압에 대한 강화된 권리를 국가가 갖는 것이었다. 1966년 대연정에 참가한 사회민주당(SPD)은 이러한 법령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유혈진압을 지휘했던 1918~1919년과 같은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이어갔다.

 

 프랑스의 학생반란은 1968년 3월 22일 파리 서편 근교인 낭트에서 시작되었다. 그날의 사건은 그 자체로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파리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해 많은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졌던 시기에 낭트 대학 소속 극좌파 학생 한 명의 검거에 대항해 그의 동료 학생들이 대학위원회 건물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대학위원회 건물을 점거한 142명은 건물을 떠나기 전에, 3월 22일 운동(M22)의 성립을 결정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LCR)과 아나키스트들이 초기에 속해있던 비공식적 운동의 하나였다. 4월 말에는 맑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청년연합(UCJML)의 마오주의자들이 가담했다. 그에 뒤이어 대략 1,200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대학교 벽면에는 점점 더 많은 현수막과 낙서가 등장했다. ‘교수들, 너희는 낡았고 너희의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삶을 살자’, ‘너희의 꿈을 실현하라’ 등. 3월 22일 운동(M22)은 3월 29일을 ‘비판적인 대학교’의 날로 선언하면서 독일 학생운동의 전철을 밟는다.

낭트 캠퍼스에서는 극좌파 학생들과 ‘볼셰비키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파리에서 원정을 온 옥시당(Gruppe Occident) 그룹 소속 파시스트들 사이에 점점 더 자주 충돌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총장은 학교를 다시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경찰이 학교를 봉쇄한다. 낭트 학생들은 대학 폐쇄에 반대하고 M22 구성원에 대한 대학위원회의 징계에 항의하기 위해 다음날 소르본 대학 광장에서 집회를 갖기로 한다. 그 집회에는 300명만이 참가했지만, 학생 시위가 끝나기를 바라던 정부는 경찰에 라탱지구(파리의 대학가)를 점령하고 소르본을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경찰이 수백 년 이래 처음으로 소르본 대학에 난입했다. 자유로운 귀가를 약속했던 경찰은 남학생들을 연행했다. 이에 분노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소르본 광장에 모여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의 진압이 강압적일수록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충돌은 그날 저녁 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다음 날 경찰은 소르본 일대를 완전히 봉쇄했다. 하지만 정부의 단호한 진압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시위를 끝내기는커녕 점점 더 대대적으로 확산되어갔다. 4만5천 명의 학생이 ‘소르본은 학생들의 것이다’, ‘경찰은 라탱지구에서 물러나라’, ‘우리의 동지를 석방하라’라는 투쟁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대에 점점 더 많은 학생, 선생, 노동자, 실업자가 동참했다.

5월 7일 시위행렬은 센강을 건너 샹젤리제를 따라 이동했고 대통령궁 근처까지 나아갔다. 평소에 라 마르세예즈나 장례의 조종이 들리던 개선문 아래에서는 인터내셔널가가 불리기 시작했다. 몇몇 지방 도시에서도 시위가 번져나갔다. 정부는 자신들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5월 10일 낭트 대학을 개방했지만, 그날 저녁 만 명의 시위대는 라탱지구에 모여 소르본을 봉쇄했던 경찰과 대치했다. 몇몇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치기 시작했고, 새벽 2시에 CRS(경찰기동대)는 최루탄을 발사하며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격했다. 그 충돌은 매우 폭력적이어서 양측에서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대 중 5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라탱지구에서는 많은 주민이 학생들에게 호의적이어서 경찰의 공격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집으로 피신하게 하거나 거리에 물을 뿌려주었다. 이 모든 사건들, 특히 진압세력의 잔인성에 관한 보도는 사람들을 자극했다. 5월 11일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서 분노가 거세졌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이러한 시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업의 수십만의 시위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와 학부모가 참여했다. 지방에서도 많은 대학을 점거했고, 곳곳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사람들은 토론하기 시작했고 진압세력의 만행을 비난했다.

 

 시위의 전개는 이제 극좌파 학생들을 비난했었던 CGT를 포함한 노동조합 중앙조직과 몇몇 경찰노동조합까지 강경 진압과 정부 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5월 13일의 파업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5월 13일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2차 세계대전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노동계급은 학생들 곁에서 대대적으로 참가했다. 가장 널리 확산된 구호 중 하나가, ‘10년(드골이 권력을 잡은 기간),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었다. 시위의 결과는 거의 모든 대학을 학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점거한 것이었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발언을 했고, 토론은 대학 관련 문제나 진압에 관한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 노동조건, 착취, 사회의 미래 등 가능한 모든 사회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토론은 많은 직장에서 계속 진행되었고 노동자들은 자발적인 파업에 들어갔고 작업장을 점거하기로 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운동을 추진했다. 드디어 노동계급이 다시 계급투쟁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2.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

 

 196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베트남전쟁 반대에 있었다. 이 운동은 1950년대 초 한국전쟁 동안의 반전운동처럼 소련-스탈린주의 당과 연계된 운동이 주도권을 쥘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들은 사실상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자주 그 운동과 대립했다. 이것이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특징 중의 하나였다.

 

 베트남전에 반대한 미국에서의 저항이 서방 세계 모든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확산된 동인이었다면, 학생반란이 주요한 나라들에서 일어난 건 확실히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의 젊은 세대는 징집으로 인해 전쟁문제와 직접 대면했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은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명이 부상당해 돌아왔으며, 수백만 명은 그곳에서 겪은 경험으로 평생 후유증을 앓았다.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공포를 제외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공식적으로 그들은 ‘민주주의’, ‘자유 세계’ 그리고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그곳에 파견되었지만,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건 공식적인 것과 완전히 모순되었다. 그들이 이른바 방어해야 할 정권, 즉 사이공의 정부는 민주적이지도 문명적이지도 않았다. 그 정권은 군사독재로서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다. 현지에서 병사들은, 비무장의 가난한 농민, 여성 그리고 아이와 노인에게까지 폭력을 가하고 살해하도록 요구하는 현실에서, 자신들이 ‘문명’을 수호한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국 정부가 제시하는 ‘문명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공식적인 말과 베트남에서 실제 행동 사이의 엄청난 모순은 미국 부르주아지의 권위와 전통적인 가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러한 반란은 처음에는 히피 운동과 함께 비폭력적이고 평화주의 운동의 하나였다. 그러나 1968년 프랑스에서와같이 버클리에서의 진압은 그 운동이 과격화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비폭력운동에 잠시 함께했던 제리 루빈(Jerry Rubin)이 국제청년당(Youth International Party)을 창립한 이후, 반란운동은 자본주의에 대항한 일종의 혁명적인 전망을 스스로 부여했다. 이제 운동의 새로운 영웅들은 더 이상 밥 딜런이나 조안 배스가 아니라, 체 게바라와 같은 사람이었다. 이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었다. 여기에는(자유 숭배, 특히 섹스의 자유나 마약 소비의 자유와 같은) 아나키스트적인 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쿠바와 알바니아를 모범으로 찬양하는) 스탈린주의적인 면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1960년대 미국에서 확산된 저항운동의 주요 특징은 베트남전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에도 반대했으며, 성차별에도 반대하고, 미국의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에 반대했다. 이 운동은 결코 노동계급의 운동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세력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다른 사회계층, 즉 인종차별의 희생자인 흑인, 제3 세계의 농민, 반항하는 지식인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1960년대 학생운동은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이 베트남에 관여하는 것에 대한 비난, 권위(특히 대학의 권위)에 대한 거부, 권위주의 일반에 대한 거부, 전통적인 도덕(특히 성도덕)에 대한 반란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스탈린주의 당들이 비록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강력히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자들 사이에서 전혀 반향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1960년대의 반란자들은 호치민(오랜 당원이었지만 훨씬 더 모범적이었고 영웅적인 것처럼 보였던)의 포스터를 걸어놓기를 더 좋아했고, 체 게바라(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이었지만 이국적으로 여겨졌다)나 안젤라 데이비스(미국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이었지만 흑인 여성이라는 이미지와 체 게바라와 같이 낭만적인 외모로 인해)의 낭만적인 사진을 걸어두기를 가장 좋아했다.

베트남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자유스러워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독일에도 나타났다. 1965년 이래 독일의 대학에서 전개된 토론 과정에서 ‘반권위주의적인 진정한 맑스주의’에 대한 모색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당시 평의회주의 운동의 많은 글이 다시 회람되었다.

프랑스에서 1968년 전개된 학생운동의 주제와 요구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했던 저항은 상황주의적이거나 아나키스트적인 일련의 슬로건에 밀리게 되었다.

 

 특히 아나키스트적인 영감은 아래와 같은 슬로건으로 표현되었다.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자유는 모든 범죄를 포함하는 범죄이다“

“선거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함정이다“

“불손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은 새로운 혁명 무기이다“

 

 상황주의의 영향은 이렇게 반영되었다.

“소비사회 타도”

“볼거리의 상품사회 타도“

“소외를 타도하자“

“절대로 일하지 말라“

“지루함은 반혁명적이다“

“현실적으로 되자, 비현실적인 것을 요구하자“

 

 다른 세대에 대한 표현은 이러했다.

“달려라 동지, 낡은 세계가 네 뒤에 있다“

“젊은이들은 섹스를 하고, 늙은이들은 음란한 몸짓을 한다“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던 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나왔다.

“바리케이트는 거리를 차단하지만 길을 연다“

“모든 생각의 결론은 경찰의 주둥이에 짱돌을 처넣는 것이다”

 

 이시기의 가장 큰 혼란은, 다음의 두 가지 슬로건으로 표현되었다.

“혁명적인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인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할 말이 있지만, 그것이 무언지 모른다“

 

 이러한 슬로건이 다른 나라에서 유포된 대부분의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보여주는 건 1960년대 학생운동은 비록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 투쟁으로의 가교를 만들려는 의지가 있었을지라도, 노동계급의 본질을 반영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접근방식은 잘 못 이해한 맑스주의 고전 문서에서 영웅이었던 육체노동자에 대한 매혹과 뒤섞여 노동계급에 대한 오만을 반영했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성격은 쁘띠부르주아적 이었다. 아나키스트적인 표현 이외에 가장 분명한 것은 삶을 즉시 변혁하려는 의지였다. 이러한 조급함과 ‘모든 것을 지금 당장’이라는 주장은 쁘띠부르주아의 계급적 특징이다. 이 운동 지도부의 혁명적인 과격주의 그리고 운동 일부의 폭력 미화는 쁘띠부르주아적인 본질을 반영한 것이었다. 1968년 학생들의 혁명적 관심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옳았지만, 운동은 혁명을 일으키는 노동계급 운동의 실질적인 발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혁명에 관한 낭만적인 관점만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혁명적이라고 여겼던 프랑스의 학생들은 68년 5월 운동이 이미 혁명이었다고 믿었고, 날마다 세웠던 바리케이트를 1848년과 1871년 코뮨의(바리케이트) 유산으로 묘사했다.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특징 중 또 하나는 세대 간의 갈등 즉 새로운 세대와 그들이 비난하는 부모세대 사이에 존재한 아주 큰 간극이었다. 특히 부모세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가난과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했다는 이유로 오로지 물질적인 번영에만 신경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그래서 소비사회에 관한 환상과 ‘절대로 일하지 말라’와 같은 슬로건이 성공을 거두었다. 반혁명을 철저히 경험한 세대의 자녀들로서 1960년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자본주의의 요구에 무릎을 꿇고 순응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조건을 자녀에게 안겨주려고 치를 수밖에 없었던 희생에 대해 자녀들이 경멸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기도 힘들어했다.

 

 하지만, 1960년대 학생반란에는 진정한 경제적인 요인이 있었다.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할 때, 당시에는 대학 졸업 후 실업으로 인한 또는 불안정한 노동조건으로 인한 큰 위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대학생들의 주요한 근심은, 자신들이 그 이전 세대의 대학졸업자와 같이 동일한 사회적인 지위 상승을 더는 이룰 수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1968년 세대는 이른바 ‘사무관리직 인력의 프롤레타리아화’ 현상에 직면한 최초의 세대였다. 이 현상은 학생 수가 현저히 늘어나자마자 위기가 공공연하게 시작했다. 이러한 증가는 경제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긴 했지만, 또한 그 부모들이 자신의 경우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사회적 처지를 자녀들에게 부여하려는 의지와 능력에도 부합했다. 특히 학생 수의 대규모 증가는 불편의 증대를 초래했다. 이는 대학의 구조와 관행이 단지 엘리트들만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강한 권위주의적 구조가 지배했던 시대의 소산으로서 그대로 존속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 시작된 학생운동이 자본주의의 번영 시대에 전개되었던 반면, 경제적 상황이 벌써 매우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그래서 학생들의 불편도 더 커졌던 1967년의 상황은 이미 달라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그 운동이 1968년에 그 절정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왜 1968년 5월에 노동계급이 무대 위에 등장하여 운동을 이끌어나가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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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68년 5월 노동계급의 부활

 

 낭트에서는 학생 또래의 노동자들이 운동에 동참했다. 그들의 논거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학생들이 결코 파업을 통해서 압력을 가할 수 없음에도 정부를 강제하여 승복하도록 할 힘을 가지고 있다면, 노동자들도 정부를 승복하게 만들 수 있다.’ 낭트의 학생들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했다.

5월 14일 저녁 총 3,100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했다. 5월 15일에는 노르망디의 클레옹에 있는 르노 작업장과 다른 작업장으로 운동이 확산되어 총파업과 무기한 공장점거가 이루어졌고 공장 정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저녁 무렵에는 파업노동자가 11,000명에 달했다. 5월 17일에는 총 215,000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 물결은 이제 프랑스 전역, 특히 프로방스에 도달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생적인 운동이었고 노조들은 그 꽁무니를 뒤따랐다. 모든 지역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선두에 섰다. 빈번하게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이 연대했다. 젊은 노동자들은 학생들이 점거한 대학교로 가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공장 구내식당에 식사하러 오라고 권했다.

5월 18일 정오에 CGT의 파업호소가 알려지기 전에 이미 10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에는 200만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5월 20일에는 6백만 명이, 5월 21일에는 6백50만 명이 작업을 멈추었다. 5월 22일에는 8백만 명이 무기한 파업에 참여했다. 그것은 국제 노동운동 사상 최대의 파업이었다. 이 파업에는 모든 부문이 포함되었다. 산업, 운송 및 교통, 에너지, 우편 및 텔레커뮤니케이션, 교육, 행정(정부의 여러 기관들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언론매체(국영 텔레비전이 파업을 했고, 종사자들은 특히, 강요된 검열을 비판했다), 연구소 등등. 그리고 장례사업장마저도 파업을 했고, 심지어는 프로 스포츠 선수도 그 운동에 동참했다. 프랑스 축구협회 건물에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예술가도 참여해서 칸 영화제가 감독들의 권유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점거된 대학은(파리의 오데옹극장과 같은 다른 공공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정치적 논쟁 공간이 되었다. 많은 노동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이러한 토론에 참여했다. 노동자들은 혁명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점거한 공장을 방문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찬가지로 거리에서도 보도에서도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68년 5월에는 날씨마저 매우 좋았다). 토론은 매우 즉흥적으로 생겨났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 가 슬로건이었다. 곳곳에서 축제 분위기가 지배했지만, 예외적으로 부유층 구역에서는 공포와 증오가 쌓여갔다. 프랑스 전역에서 도시구역에서, 몇몇 큰 작업장이나 인근 구역에서 행동위원회가 출현했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 혁명적 전망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했다.

 

 이러한 상황에 지배계급은 방황하게 되었고, 이는 혼란스럽고 효과적이지 않은 발의를 통해 나타났다. 우파가 지배하는 의회는 좌파가 2주 전에 제시한 검열안을 토론한 후 거부했다.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적인 제도권들은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도 마찬가지여서 같은 날, 독일로 출국했던 다니엘 콘벤디트의 재입국을 금지하기로 했다. 이 결정은 한층 더 불만을 들끓게 했다. 5월 24일 이에 항의하기 위해 더 많은 시위가 있었고,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시위에 합류했다. 이날 저녁 드골 대통령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상황을 그보다 더 잘못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 담화문은 소귀에 경 읽기였고, 정부와 부르주아지의 전반적인 혼란스러움을 나타냈다.

거리에서 시위대는 담화문을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고, 즉시 분노가 더 고조되었다. 파리 시내 전체에 그리고 몇몇 지방 도시에서 폭력적인 충돌이 일어났고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수많은 쇼윈도가 깨졌고 자동차가 불탔다. 이 때문에 여론의 일부가 학생들에게 등을 돌렸는데, 이들은 이제 폭도로 비춰졌다. 시위대 중에 드골주의 민병대원이나 경찰이 섞여 있었으나, 많은 학생들은 바리케이트를 세우거나 소비사회의 상징인 자동차를 불태움으로써 자신들이 혁명을 만들 거라고 믿었던 것은 분명했다. 이러한 행위는 특히, 역사상 최대의 파업 물결에 대한 당국의 한심스럽고 도발적인 반응에 대해 시위대, 학생들, 젊은 노동자들이 갖는 분노를 드러냈다. 체제에 대한 이러한 분노의 표현으로 자본주의의 상징인 파리 주식거래소가 화염에 휩싸였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그다음 날에야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했다. 토요일인 5월 25일에 노동부에서 노동조합, 고용주들 그리고 정부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고용주들은 노동조합이 기대했던 것 이상을 제공할 용의가 있었다. 부르주아지가 겁에 질려 있는 건 명백했다. 5월 26일 밤 그르넬협정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협정은 이 운동의 강력함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하는 도발에 지나지 않았다. 5월 27일 총회는 그르넬협정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이 협정을 거부한 가장 좋은 증거는 5월 27일 파업자 수가 9백만으로 증가한 것이었다.

 

 5월 28일은 좌파당의 작전과 조치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에 ‘좌파 민주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연합’(사회당, 과격당 그리고 서로 다른 작은 좌파그룹을 대표하는)의 총수 프랑스와 미테랑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보기에 권력의 진공상태가 존재하며, 그래서 자신이 공화국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오후에는 CPF의 지도자 발덱-로쉐는 공산주의자들의 참여를 포함하는 정부를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혼자서 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 관건이었다. 5월 29일에 큰 시위가 있었는데, CGT가 그것을 주관하고 국민정부를 요구했다. 우파들은 즉시 공산주의의 음모에 대해 경고했다.

 

 이날 드골 장군이 사라졌다. 그가 퇴위할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실 그는 독일로 날아가서 그곳 프랑스 점령군을 지휘하고 있던 마수(Massus) 장군의 지지와 군대의 충성을 확실히 하려 했다. 5월 30일은 부르주아지가 상황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려는 시도에서 결정적인 날이었다. 드골은 다시 담화문을 발표했다. ‘지금 상황에서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 나는 오늘 국회를 해산한다. ……’

 

 동시에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드골을 지지하는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부유층 구역에서, 잘 사는 교외 지역에서, 그리고 시골에서 군용트럭으로 ‘국민’이 운송되어 왔다. 겁먹은 자들과 가진 자들, 서민들, 부유층 자제들을 위한 지역 학교 대리자들, 자신들의 우월함을 의식하고 있는 지도층들, 쇼윈도가 파괴될까 조바심내는 작은 상점 주인들이 모두 한곳에 모였다. 국기에 대한 공격 때문에 격노한 참전용사들, 은폐물 아래서 지하 세계와 더불어 잠복하는 비밀경찰들 그리고 알제리 정착민들, 파시스트적인 옥시당 그룹의 젊은 회원들인 OAS와 비시(Vichy)에 향수를 느끼는 늙은 추종자들이(이 모두는 드골을 경멸하지만) 함께 모였다. 이 모든 사람들이 노동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와 ‘질서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그 목요일부터 조업이 재개되긴 했지만, 이것은 느리게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6월 6일에도 여전히 약 6백만 명이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업은 매우 분산적으로 재개되었다. 6월 10일 플랭스의 르노 작업장을 경찰이 점령했다. 경찰에게 폭행을 당한 고등학생 중의 한 명이 센강에 추락해서 익사했다. 6월 11일에는 소쇼의 푸조 작업장에 CRS가 개입해 2명의 노동자가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전역에 다시 한번 엄청난 시위가 발생했다. ‘그들이 우리 동지들을 살해했다’며 노동자들의 결연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CRS는 소쇼 작업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조업은 그 후 10일이 지나서야 재개되었다.

 

 그러한 분노가 다시 파업의 부활(아직 3백만이 여전히 파업 중이었다)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CGT를 그 선두로 한 노동조합과 CPF를 선두로 한 좌파정당은 선거가 실시될 수 있고, 노동계급의 승리를 위해서 조업이 재개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노동조합에 의해 5월 20일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파업 호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운동을 통제해서 덜 전투적인 부분에서 조업 재개를 손쉽게 이뤄낼 수 있도록 했고, 다른 부문으로 그러한 사기저하를 확산시킬 수 있도록 만들길 원했다’ 발덱-로쉐는 선거운동 동안 자신의 연설에서, ‘공산당은 질서의 당’이라고 선언했다. 사실상 부르주아적인 질서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6월 30일 결선투표에서는 우파의 역사적인 승리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라디오 및 TV 방송국이 7월 12일에 업무를 재개했다. 업무가 재개된 후 많은 이들이 해고당했다. 곳곳에서 질서가 다시 회복되었고, 특히 국민을 설득하는데 중요한 언론매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은 CGT와 CPF의 주장과는 반대로 패배로 끝났다. 그 심각한 패배는 그 운동 동안 분노와 경멸을 샀던 당과 권위의 복귀로 확실히 증명되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패배와는 상관없이 1968년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도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반혁명의 시대, 기나긴 암흑의 침체기를 거쳐 1968년 드디어 노동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원문 ㅣ국제코뮤니스트흐름

정리 ㅣ국제코뮤니스트전망

 

<원문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804/15127/fifty-years-ago-may-68

 

*68 투쟁 50주년을 맞아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에서는 팸플릿을 발행했다. 「코뮤니스트」에서는 토론과 함께 다음 호에 한국어 번역본을 실을 예정이다. 이 글은 토론의 연속성을 위해 ICC의 문제의식을 담은 글을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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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반(反)성폭력 규정

  • 코뮤니스트 반(反)성폭력 규정

     

     

    제1조 목적

     

    이 규정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서 발생하는 성차별, 성폭력, 가정폭력 사건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제반 사항을 규정하며, 성차별, 성폭력, 가정폭력의 근절과 예방을 통해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실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정의

     

    1. 성차별이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성별과 성 정체성을 이유로 행해지는 모든 차별, 배제, 제한을 말하며, 성별과 성정체성에 관계없이 표현하더라도 특정 성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간접차별)도 성차별로 본다. 또한, 물리적이고 언어적인 폭력과 위협 상황 안에서도 그것이 성이나 성 정체성의 차이를 바탕으로 발생한 경우에는 성차별로 본다.

     

    2. 성폭력이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언어적, 정신적, 물리적, 환경적 폭력을 의미하며, 동성 간 성폭력에 대하여도 같게 적용된다. 또한, 개인의 성정체성을 본인이 원하지 않는 대상에게 폭로(아우팅)하는 행위나 성정체성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행위 역시 성폭력으로 본다.

     

    3. 가정폭력이란 현재 혹은 과거의 법적, 비법적(동거) 가정 구성원 사이의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또는 재산상 피해를 수반하는 폭력 행위를 말한다.

     

    4. 2차 가해란 사건 이후 피해자에게 직․간접적인 또 다른 가해와 고통을 주는 일체의 언행(언어적인 폭력, 정신적인 협박이나 물리적 강압, 집단적인 따돌림, 괴롭힘, 피해자 신변 공개, 사건과 관련 없는 피해자의 과거 경력이나 행동, 성격 등을 문제 삼는 행위 등)을 하거나 피해자와 조직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는 것을 막거나 방해하는 행위를 포함하며, 본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

     

    5. 대리인이란 피해자가 그의 권리를 대리하도록 선임한 자연인을 말한다.

     

     

    제3조 적용 범위

     

    이 규정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 회원에게 적용되며, 피해자, 가해자, 제소자, 피제소자 어느 한쪽만 회원인 경우도 이 규정이 적용된다.

     

     

    제4조 사건처리의 원칙

     

    1. 사건처리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란 피해자의 권리를 확보하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 처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사건처리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의 내용은 아래와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1) 사건의 성립과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의 구체적인 진술에 바탕을 둔다.

    2) 사건의 처리 과정과 결론에서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다.

    3) 피해자가 제2의 피해를 보지 않도록 조직이 각종의 조치와 노력을 한다.

    4) 피해자의 치유와 복귀를 목적으로 하며, 최대한 신속하게 해결한다.

     

    2. 사건의 처리는 공식적 해결을 원칙으로 한다.

    사건의 해결은 공식적 해결을 원칙으로 하며, 필요한 경우 가해자의 실명, 사건의 처리결과, 조직의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공개할 수 있다.

     

     

    제5조 피해자 권리 및 보호

     

    1. 피해자는 사건의 조사와 처리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가지며, 조직과 대책위원회는 피해자에게 다음과 같은 권리가 있음을 알려야 한다.

    1) 피해자 대리인을 동반하거나 선임할 권리

    2) 특정인의 대책위원회 참여를 요청하거나 거부할 권리

    3) 필요 이상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할 권리

    4) 증인이나 참고인 등을 신청할 권리

    5) 임시조치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

    6) 사건 해결의 전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알 권리

    7) 가해자 처리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권리

     

    2. 이 규정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책위원회는 피해자 보호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기타의 조처를 할 수 있다.

     

    3. 대책위원회와 회원은 피해자와 그 대리인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며, 피해자 또는 대리인의 동의 없이 신원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제반 내용을 타인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

     

    4.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이나 처리된 이후 3항을 위반하여 피해자나 대리인에게 부당한 피해가 발생할 경우 그 사건 역시 이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

     

    5. 조직은 피해자의 치유와 복귀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피해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 상담, 치료, 쉼터 이용 등에 필요한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우선 지원하고 이후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제6조 사건의 성립

     

    1. 국제코뮤니스트전망(회원)에 사건을 신고/제소함과 동시에 사건이 성립되며, 사건을 접수한 조직은 사건의 조사 및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 구성을 10일 이내에 완료하여야 한다.

     

    2. 사건의 신고/제소는 피해자, 피해자의 동의하에 피해자 대리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다.

     

     

    제7조 적용시한

     

    제소기한은 따로 두지 않는다.

     

     

    제8조 임시조치

     

    1. 조직은 신고/제소 직후, 대책위원회가 구성되기 전까지 피해자의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피제소자를 피해자로부터 격리하거나 활동중단 등의 조처를 할 수 있다.

     

    2. 조직은 피해자가 1항과 같이 청구할 시 48시간 이내에 임시조치 여부를 결정하여야 한다.

     

    3. 조직은 임시조치를 결정한 때에는 이를 피해자, 피해자 대리인, 대책위원(장)에게 통지해야 한다.

     

    4. 피제소자가 조직의 임시조치 결정을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 피제소자를 이 규정에 따라 규제한다.

     

     

    제9조 대책위원회

     

    1. (구성)

    1) 조직은 사건이 신고/제소된 직후 10일 이내에 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2) 조직은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3) 대책위원회에는 피해자 대리인이 참여할 수 있다.

    4) 대책위원회에는 성폭력 전문교육을 받은 자를 참여시켜야 한다.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성소수자일 경우 성소수자 전문위원을 둘 수 있으며, 대책위 성원으로 외부 전문위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5) 대책위원회는 7인 이내의 홀수로 구성한다.

     

    2. (위상과 역할)

    1) 대책위원회는 사건 처리를 위한 한시적인 기구이다. 사건의 처리란 가해자의 징계 및 피해자의 치유를 위한 일정한 조치를 완료함을 의미한다.

    2) 대책위원회 해소 이후에도, 필요한 경우 재소집할 수 있다.

    3) 대책위원회는 신고/제소된 사건 처리에 대한 제반 활동을 수행한다.

    4) 대책위원장은 직권 또는 피해자 또는 피해자 대리인의 요청으로 이 규정에 따라 가해자에 대한 징계 절차 종결 시까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간분리 및 접근금지(전화, 온라인 접속 등을 통한 접근금지 포함),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가해자에 대한 활동중단 등에 해당하는 조치를 조직에 청구할 수 있다.

    5) 대책위원회는 가해자와 2차 가해에 대한 처리 방법을 조직에 요청할 수 있다.

    6) 대책위원회는 활동내용과 결과를 피해자와 피해자 대리인, 조직에 보고한다.

     

    3. (권한) 대책위원회는 사건의 처리를 위해 모든 회원과 조직에 필요한 자료의 제출과 관련인의 소환을 요청할 수 있으며, 모든 회원과 조직은 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제10조 가해자에 대한 조치

     

    1. 조직은 조사결과에 따라 다음과 같은 조처를 한다.

    1) 가해자 교육 등 성평등에 대한 재교육 프로그램 이수

    2) 가해자의 피해자와의 공간 분리 및 접근금지

    3) 피해자의 치료, 상담, 쉼터 이용 등에 드는 비용의 부담

    4) 조직 규약에 따른 징계

    5) 기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항

     

    2. 사회적으로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가해자의 경우 회원 여부와 상관없이 국제코뮤니스트의 행사에 참여시키지 않는다.

     

    3. 조직은 2차 가해를 한 사실이 명백할 경우 제10조에 근거하여 처리한다.

     

     

    제11조 공동해결

     

    1. 피해자, 가해자, 제소자, 피제소자 중 어느 한쪽이 회원이 아닌 경우 또는 사건의 사회적 해결을 위해 당사자의 소속집단들과 공동해결의 원칙에 따라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

     

    2. 조직은 가해자가 회원이 아닐 경우, 가해자의 소속집단에 가해자에 대한 처리나 징계를 요청할 수 있다.

     

     

    제12조 예방

     

    1. 성폭력의 근절과 예방,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정립하기 위하여 성폭력 예방 교육 및 성평등 교육을 신입 회원 및 회원 교육에 포함하여 실시한다.

     

    2. 조직은 연 1회 이상 소속 회원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한다.

     

    3. 성차별, 성폭력, 가정폭력 예방을 위해 회원이 전문교육을 이수할 시 조직에서 비용 일부를 지원한다.

     

     

     

    부칙

     

    1. 이 규정은 제정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

     

    2. 이 규정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공식적인 온라인 공간에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게시한다.

     

     

    2018년 6월 1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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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에 부쳐 :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 6.13 지방선거에 부쳐 :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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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의 삶과 투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2018년 <6.13 지방선거>를 맞이하여 "선거 환상을 넘어선 노동자 투쟁"을 촉구하며 코뮤니스트 입장을 다시 공유합니다. 부르주아 선거에서 노동자계급의 입장은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투표는 속임수일 뿐이다. 우리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실업자이든 퇴직자이든 현재의 선거는 노동자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지난 4년 전에도, 8년 전에도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수많은 약속을 해왔다. 노동자들이 조금 더 참고 함께 위기를 극복한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생활과 노동조건은 좋아질 것이라 약속했었다. 말 그대로 4년 후, 8년 후 변화된 상황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나빠지는 쪽으로의 변화였지, 개선이 아니었다. 끝 모를 경제위기는 모든 노동자에게 중압감을 느끼게 했고, 그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었다. 복지와 연금은 줄어들고, 주거와 생활비용은 비싸져만 가고, 상시적인 해고 위협과 불안정한 일자리, 장기적인 실업, 불안정 노동자의 증가와 저임금은 다수의 노동자들이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정도만 허락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약속한 변화의 전부였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그리고 1991년 부활하어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치러진 지방선거 이래 19년에서 27년이라는 기간,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노동자 출신이 정치무대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퇴하거나 안정적인 삶을 누구도 보장받을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여전히 생존권 위협과 각종 차별에 직면해 투쟁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해결책도 없으며, 투쟁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이제 지키지 못할 약속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거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른바 진보-노동정당들이 자신들에게 투표하고 집권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노동자를 팔아 정치판에 뛰어들어 엄청난 재정적, 인적 자원과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투쟁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환상과 좌절만 안겨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르주아 선거를 ‘서커스’나 ‘환상’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선거에 참여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정치인에게 권력을 위임했다고 생각하며, 투표행위로 자신들도 권력 일부로 참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선출된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으며 선거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권자와 분리되어 행동한다. 즉, 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은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선거라는 이벤트에서만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부르주아 선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지배질서를 강화하거나 재편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지배질서 자체를 바꾸거나 착취와 억압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선거라는 무대에서는 원래 무대의 주인인 ‘대중’이 아니라 무대의 설치 관리자인 ‘국가권력’이 이를 주도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한 시간과 장소, 그들이 정한 순서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대중들도 무대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정치세력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차려놓은 서커스 공연에 곡예사로 참여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들이 선거에 참여하면서 선거를 통해 투쟁을 확산시킨다거나 후보를 내세워 투쟁의 구심을 세우겠다는 발상 역시 또 다른 ‘환상’에 불과하다.

     

     유권자의 측면에서도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투표하는 행위는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주장이나 목소리 없이 정해진 규칙과 객관식 선택지 안에서의 수동적인 개인들로 축소시킨다. 개별의 투표함과 투표소 안에서 노동자계급은 작업장, 회사의 동료들과도 투쟁현장의 동지들과도 차단된 채, 자본가를 포함한 얼굴도 모르는 지역주민들과 섞여 분간하기도 힘든 1개 정당이나 정치인을 자신들의 대표로 뽑아주어야 한다. 즉,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판의 투표 속에서는 그 어떠한 계급연대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투표행위를 두고 지배계급은 ‘우리 국민(주민)’들이 이 정부를 위해 투표했으니 따르라’는 것을 임기 내내 홍보하고 협박해 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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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계급의 정치는 투표소가 아닌 투쟁하는 현장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의 민주주의 규칙과 선거제도에 복종하고 놀아나는 한,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이거나 투표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선거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계급적인, 그리고 삶에 직접 도움이 되는 투쟁을 위한 파업위원회,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투표(결의)와 행동에 나서야 한다. 노동계급의 미래는 노동자계급 스스로 일어서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에 누가 대리해 주거나 다른 계급과의 뒤섞임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선거운동과 선거정책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동원되거나 힘을 낭비하지 말고, 투표소가 아닌 지역의 투쟁사업장과 투쟁의 현장에 가서 투쟁의 쟁점을 걸고 파업을 위한, 연대를 위한, 저항을 위한 행동을 준비하자. 고립되거나 장기간 투쟁으로 지쳐있는 우리의 노동자 투쟁에 하나의 계급으로 연대하자.


    2018년 6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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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를 내면서

  • 코뮤니스트 7호를 내면서

     

     

    촛불 투쟁이 만든 정권교체 이후 대중 투쟁은 급격하게 후퇴하고 있다. 이에 대한 분석과 위험성은 지난 호에 실었다. 이제는 대중 투쟁과 무관하게 외부에서 몰아치는 정세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급변하는 정세는 주도권을 쥔 세력이 이끌고 있다.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정세를 따라가기에도 바쁜 운동세력은 조급함과 무기력한 대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운동 사회 내부를 돌아보려는 노력도 존재한다. 이미 무너져버린 운동은 반성과 성찰보다는 구태의 반복과 자기합리화로 소수를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반면, 미투 운동과 같이 오랜 기간 억눌렸던 사람들의 ‘용기’와 ‘연대’는 사회 전체를 흔들어 놓고 있다.

     

    지금 정세의 배경에는 장기간 깊어지고 있는 세계자본주의 체제 위기와 급증하는 제국주의 대립 격화가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동북아에서는 더욱 심각한 위기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제국주의 충돌, 전쟁위기 고조라는 최악의 결과와 평화적(정치, 경제, 군사적 거래를 통한) 해결책이 늘 공존했다. 김정은의 남북, 북미 정상 회담이라는 파격적인 카드 뒤에는 체제 안전보장과 비핵화라는 불안정한 거래가 전제되어 있다. 이것과 상호보완적인 것이 경제적 거래이고, 한반도 평화로 포장된 제국주의 자본의 북한 진출(개방)이 가장 큰 거래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정세에서 극우 보수세력뿐 아니라 평화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민족주의 세력과도 계급적인 입장으로 맞서야 한다. 평화협정을 추진하면서도 사드를 철거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의 위선에 맞서 싸워야 하고, 종전과 한반도 평화를 주장하면서 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는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와 정치사상의 자유, 집회 시위, 파업의 자유를 위해 계급으로 투쟁해야 한다. 노조할 권리를 넘어 자본가계급, 자본가국가와 투쟁해야 한다.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종전과 평화 다음은 자본주의적 통일이 아니라 계급전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혁명을 통해 평화로!’가 노동계급이 가져야 할 슬로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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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7호에서는 현실 운동의 쟁점을 가장 우선으로 다루었다. 우리가 바로 ‘운동 사회 내부를 돌아보려는 노력’에 앞장서 왔기 때문이다.

     

    □ 쟁점 1. 에는 삼성에 맞서 싸우고 있는 반올림 활동가와 삼성전자 서비스지회 조합원의 인터뷰를 실었다. 최근 박근혜와 이재용 재판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최고 권력-삼성공화국의 실체와 노조파괴 등 삼성의 범죄 행위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다.

     

    □ 쟁점 2. 에는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에 대해 내부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지의 기고 글과 관료주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플랜트노조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노동자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글을 실었다. 두 사건 모두 운동 사회에서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중요한 내부투쟁이다.

     

    □ 코뮤니스트 정치에서는 128주년 메이데이를 맞아 퇴색해가는 메이데이 정신과 민주노총의 책임을 촉구하면서 노동자 국제주의를 강조했다. ‘정권교체 쇼, 적폐청산 쇼, 헌법개정 쇼, 노동존중 쇼, 평화통일 쇼... 쇼는 화려하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자리에 서 있다. 더는 노동자들의 눈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 혁명 특집에서는 68혁명 50주년을 맞아 코뮤니스트 좌파의 관점에서 작성한 팸플릿 발행(ICC 작성, 본지에서 한국어로 출간예정)을 앞두고, 토론의 연속성을 위해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의 과거 글을 재구성해서 실었다. 또한, 작년에 이어 러시아혁명 100주년의 교훈을 찾는 글과 독일혁명 100주년(1918~1923)을 맞아 독일혁명에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역할을 서술했던 남궁원 동지의 글을 보완하여 다시 실었다. 아직도 혁명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은 세 개의 미완의 혁명에서 반드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코뮤니스트 좌파와 계급투쟁 100년에서는 코뮤니스트 좌파 경향의 양대 국제조직인 ICC와 ICT의 논쟁적인 문건을 번역하여 실었다. 두 주제 모두 국제코뮤니스트전망과 코뮤니스트 지지 동지들이 계속 토론해 왔던 내용이고, 5월 중에는 같은 주제로 집담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우리는 현재의 비관적인 상황과 우리의 능력을 과대하게 포장하거나 반대로 축소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고, 언제까지나 혁명조직의 책무를 다해 나갈 것이다.

    “오늘날 코뮤니스트 좌파는 극단적으로 감소했고, 분산되어 있으며 정치적 명확성을 찾는 광범위한 요인들은 거대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오늘날 작은 혁명운동에서 미래의 대중 계급 운동의 진정한 전위로 행동할 역량을 갖추는 것까지 나아가는 데에는 갈 길이 매우 먼 것이 명백하다.

    시간은 더는 노동계급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1917년 이후뿐만 아니라 1968년~89년의 투쟁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오늘날 혁명적 조직의 책무는, 1930년대 코뮤니스트 좌파인 이탈리아 분파가 가장 명쾌하게 정교화한, 코뮤니스트 분파의 책무와 유사하다.”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에서는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회의> 소개와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 기념행사와 코뮤니스트 계승 운동의 의미를 담은 글을 실었다.

     

    이 외에도 코뮤니스트의 정치와 일상을 담은 글을 여러 편 실었다. 이번 호는 현실 쟁점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가고 운동 내부의 모순까지 깊게 들여다보고자 하였으나, 우리의 역량만큼 책이 만들어졌다. 다음 호에는 더욱 운동에 이바지하는, 실천을 끌어내는, 토론을 심화시키는, 코뮤니스트를 발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맑스 탄생 200주년

    메이데이 128주년

    독일혁명 100주년

    68혁명 50주년

    그리고 끊임없는 계급투쟁!

     

    혁명을 통해 평화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세상, 코뮤니스트 평화 세상 쟁취하자!!!

     

    2018년 4월 30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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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통해 평화를!!! 코뮤니스트 7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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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을 통해 평화를!!! 코뮤니스트 7호가 나왔습니다.

     

     

    [코뮤니스트] 2018년 _7호

     

    - 목차

     

    코뮤니스트 7호를 내면서   

     

    □ 쟁점 1. 삼성공화국-최고 권력과 싸우는 투사들

    ‣ 반올림 활동가 인터뷰 

    ‣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 인터뷰

     

    □ 쟁점 2. 우리안의 권력과 민주주의

    ‣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이 사회운동에 던지는 의미 

    ‣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에서의 집단이성과 관료주의의 대결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를 지지하며- 

     

    □ 코뮤니스트 정치

    ‣ 128주년 메이데이, 노동을 새로 쓰기 전에 노동자 투쟁부터 제대로 하자!

    ‣ 세월호 참사 4년과 국가의 책임  

    ‣ 민중당은 민주노총 조합원과 조직에 위해(危害)를 가한 당원을 즉시 징계하라!!! 

     

    □ 국제 정세 

    ‣ 시리아 : 미국 폭격의 진정한 의미

     

    □ 혁명 특집 

    ‣ 68혁명 :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와 노동계급의 부활  

    ‣ 독일 혁명과 코뮤니스트좌파  

    ‣ 러시아혁명 :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혁명적 소수의 복원   

     

     

    □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 해설

    ‣ 다시 혁명조직을 말하다.    

    ‣ 노동계급과 혁명조직  

     

    □ 코뮤니스트 좌파와 계급투쟁 100년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혁명당과 노동계급   

     

    □ 문화예술 

    ‣ ‘사랑의 급진성’을 읽고서    

    ‣ 장애인문화공간과 함께하는 2018년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회의로 전환하며   

    ‣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    

     

     

    - 가격 : 1만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메이데이 집회에서 판매)

     

    - 홈페이지 : http://communistleft.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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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독일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계급투쟁 방해 활동 - 로자 룩셈부르크

  • 독일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계급투쟁 방해 활동

     

     

    <편집자 주> 노동조합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참고할만한 글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주었던 <독일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계급투쟁 방해 활동>울 소개한다. 이 글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작인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에 실려 있다.

     

    사회민주당이 보여준 태도의 또 다른 한 측면은 당쟁중지, 즉 전쟁 기간 계급투쟁의 중지를 받아들인 점이다. 8월 4일 제국의회에 제시된 원내분파의 선언 그 자체는 이미 계급투쟁을 포기하는 최초의 행위였다. 그 선언의 내부적인 표현 수위는 제국 정부와 부르주아 정당 대표자들과 사전에 합의되어 있었다. 8월 4일의 엄숙한 행위는 이미 비밀리에 준비된, 국민들과 외국에 내보인 애국주의적 연극이었다. 그 안에서 사회민주당은 이미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른 참가자들 곁에서 연기했다.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원내분파는 전쟁차관을 승인함으로써 노동자운동의 모든 주요 요구들에 구호를 제공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당장 모든 임금투쟁을 중지하였고 이를 당쟁중지라는 애국적 의무와 분명하게 관련지으며 기업가들에게 공식적으로 전했다. 자본주의의 착취에 대항한 투쟁을 전쟁 기간 스스로 포기했다. 바로 그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도시노동자들을 농민들에게 보내 이들이 방해받지 않고 추수 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사회민주당 여성운동 지도부는 공동의 ‘국민여성봉사’를 위해 부르주아 여성들과 동맹을 선언하여, 동원령 이래 국내에 남겨진 당 작업 역량이 사회민주당의 선동 대신 수프 배급과 상담 등의 국민구호 임무를 하도록 지휘했다. 사회주의자법i)이 있던 그 당시에 우리 당은 의회선거를 최대로 활용해서 사회민주당 언론에 대한 그 모든 탄압과 계엄 상태에도 자신의 견해를 널리 알리며 계몽하고 주장했었다. 지금 사회민주당은 제국의회 보궐선거, 주의회와 지방의회선거에서 공식적으로 모든 선거운동, 말하자면 의회주의 계급투쟁의 의미에서 모든 선동과 계몽을 포기하고 선거를 단순한 부르주아적 내용, 즉 의석의 확보로 축소했고, 이 점에서 부르주아 정당들과 평화롭게 협력했다. 프로이센과 알자스-로렌 주의회를 제외한 모든 주의회와 지방의회들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당쟁중지를 엄숙히 환기하며 예산안에 동의한 점은 전쟁 발발 이전 관행과 엄격한 단절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기껏 몇몇 예외를 제하면 사회민주당 신문들은 국민단결원칙을 거창하게 독일민족 사활이 걸린 이해관계로 만들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곧 그 당 언론은 은행에서 저금을 되찾는 것에 대해 경고했고, 그럼으로써 온 힘을 다해 국내 경제생활의 불안정화를 막고 저축금을 전쟁차관으로 손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당 언론은 프롤레타리아 부녀자들과 자녀들의 곤궁에 대해 그리고 국가의 불충분한 배급에 대해 전쟁터의 남편들에게 전하지 말도록 경고했고, 전사들에게 사랑스러운 가족의 행복을 서술하고 ‘지금까지 보장된 원조를 우호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안정적이고 고무적인 영향을 끼치도록’ 권했다.1) 그 당 언론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예에서 현대 노동자운동의 교육 사업을 전쟁 수행의 탁월한 보조수단이라 칭송했다.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는 곤란에 처했을 때 알아볼 수 있다. 이 오랜 격언은 이 순간 진실이 된다. 억눌리고 학대받고 난폭하게 취급당했던 사회민주당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향토방위에 나섰고, 프로이센-독일에서 종종 괴롭힘 당하던 독일 노동조합 중앙은 그들의 가장 좋은 재목들이 나라를 위해 함께 투쟁하고 있음을 한목소리로 보고하고 있다. 일반 신문부류의 기업가 신문들도 이 사실을 보도하며 덧붙여, 이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완수할 것임을 확신한다고 그리고 아마도 가장 치열한 격전지에서 이들이 싸우고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의 단련된 노동조합원들이 ‘내려치기’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현대의 군대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장군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3천 미터까지, 정확히는 2천 미터까지 ‘적중’시킬 수 있는 현대의 포탄 사격 때문에, 군대 병력을 가지런히 늘어선 행진 대열로 전진시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이전에 ‘분산’시켜야 하고, 이러한 분산은 다시 훨씬 더 많은 수의 정찰병과 대단한 규율과 시야의 명료함을 부대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요구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얼마나 교육적으로 작용했는지를 이 전쟁에서 진정으로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훈육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냉철하고 침착하게 숙고해 보면, 러시아와 프랑스의 군인들이 기적적인 용맹을 떨칠지언정 독일 노동조합원들이 그들보다 한 수 위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조직된 사람들은 국경 지역을 마치 자기 바지 주머니 속처럼 잘 알고 있으며, 어떤 노조 간부는 외국어 능력도 갖추고 있다. 1866년 프로이센 군대의 전진이 선생들의 승리였다면, 이번에는 노동조합 간부들의 승리라 말할 수 있다.”(1914년 8월 18일 자 프랑크푸르트의『민중의 소리』)

     

    당의 이론지『새 시대』(1914년 9월 25일 자, 제32호)의 설명에 따르면,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가 중요한 이상, 모든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된다. 심지어 전쟁의 목적조차도. 그러니 군대 내에서 그리고 국민 내에서 모든 정당들, 계급들, 민족들의 차이도 당연히 부차적으로 된다.”ii) [강조 –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바로 그 이론지는 1914년 11월 27일 자 제8호의『인터내셔널의 한계』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대전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진영으로, 특히 서로 다른 민족진영으로 분열된다. 인터내셔널은 이것을 막을 수 없다. [강조 – 로자 룩셈부르크] 즉, 그것은 전쟁에서 효과적인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평화기구이다.”iii) 그 ‘위대한 역사적 임무’는 ‘평화를 위한 투쟁, 평화 시의 계급투쟁’이라고 한다.

     

    계급투쟁은 그렇게 사회민주당에 의해 1914년 8월 4일에, 그리고 미래에 있을 평화체결까지는 없다고 선언되었다. 크룹사의 대포가 벨기에에 첫 번째 천둥을 내리침과 더불어 독일은 계급연대와 사회조화의 기적의 나라로 둔갑해버렸다.

     

    어떻게 이 기적을 상상해야 할까? 알려져 있듯이, 계급투쟁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라는 시기에 마음대로 그냥 특정 시기 동안에 중지시킬 수 있도록 사회민주당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사회민주당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계급사회의 기본적 산물로서 그것은 유럽에 자본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이미 부상했다. 사회민주당이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투쟁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 자체가 계급투쟁의 여러 서로 다른 공간적 시간적 파편들 속에서 목적의식과 단결을 이루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쟁 발발과 함께 그 점에서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설마 사유재산, 자본주의적 착취, 계급지배가 없어졌단 말인가? 설마 가진 자들이 애국주의의 도취 속에서, 이제 전쟁을 앞에 놓고 그 기간 생산수단, 토지, 공장, 작업장을 공공의 소유로 내주고 상품의 단독 사용과 이익을 포기하며 모든 정치적 특권을 폐지하고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는 동안은 그 모든 것을 조국의 제단 앞에 희생하겠노라고 선언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러한 가정은 극히 씁쓸한 동화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을 중지한다고 뒤이어 선언할 수 있을 논리적으로 유일한 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 어떤 일도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 반대로 모든 사적 소유 관계, 착취, 계급지배, 그리고 다양한 프로이센-독일식의 정치적 권리 박탈도 그대로 유지된 채 있다. 독일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구조에서 벨기에와 동프로이센에서의 대포의 천둥이 변화시킨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계급투쟁의 폐지는 그래서 완전히 일방적 조처였다. 노동계급의 ‘내부의 적’인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인,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은 애국적인 아량으로 노동계급을 이러한 적에게 전쟁 기간 투쟁 없이 내어주었다. 지배계급이 그들의 소유권과 지배권으로 완전무장한 채 있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무장’해제를 명령받았다.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모든 계급의 형제 결의의 기적, 계급조화의 기적은 이미 한번 경험되었다. 그것은 1848년 프랑스에서였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재정 귀족과 부르주아지를 도대체 혼동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생각 속에는, 계급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기껏해야 입헌군주제의 결과 정도로 생각하는 공화주의적인 우직한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는, 그리고 지금까지 지배자들 편을 들었던 부르주아 분파들의 위선적인 문구들 속에서는 부르주아의 지배는 공화국의 도입과 더불어 폐지되었다. 모든 왕당파는 그때 공화파로 둔갑했고, 파리의 모든 백만장자는 노동자로 둔갑했다. 이렇게 상상된 계급 관계의 폐지에 해당하는 문구는 박애iv), 즉 일반적인 형제결연과 의형제였다. 계급적대를 이렇게 기분 좋게 추상해서 없애버리는 것, 서로 모순되는 계급 이해관계들을 감상적으로 상쇄해버리는 것, 계급투쟁 위로 꿈꾸듯이 날아올라 버리는 것, 박애, 이것이 2월 혁명의 원래 구호였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런 관대한 박애에 흠뻑 취해 있었다.… 공화국을 자신의 창조물로 여긴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이 부르주아사회 안에서 더 손쉽게 제자리를 잡도록 만들어주는 임시정부의 모든 행위에 당연히 갈채를 보냈다. 파리의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코시디에르는 경찰 임무에 그들을 기꺼이 활용할 수 있었고, 루이 블랑은 일반 노동자와 장인 사이의 임금 격차도 없앨 수 있었다. 유럽의 눈앞에 공화국의 부르주아적 명예를 고이 유지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명예의 문제로 여겨졌다.”v)

     

    1848년 2월 그렇게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순진한 환상 속에서 계급투쟁을 중단했지만, 자신들의 혁명 행동을 통해 7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강제한 뒤 그랬다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1914년 8월은 거꾸로 된 2월 혁명이었다. 즉, 공화국이 아니라 군사 왕정 아래에서, 반동에 대한 민중의 승리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반동의 승리 후에,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아니라 계엄령과 언론자유의 질식 그리고 헌법철폐를 공포하면서 계급대립이 폐지된 것이다! 정부는 당쟁중지를 엄숙하게 선언했고 모든 정당으로부터 이를 성실히 지킬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정부는 노련한 정치가로서 그 약속을 그대로 믿지 않고 명백한 군사독재의 수단을 통해서 이 ‘당쟁중지’를 확고히 했다. 사회민주당 원내분파는 이것마저도 아무런 항의와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8월 4일 그리고 12월 2일에 있었던 원내분파의 제국의회 선언은 계엄령이라는 따귀에 반대하는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당쟁중지와 전쟁차관과 더불어 계엄령도 잠자코 승인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조국 방어를 위해서 계엄령이, 민중에게 재갈을 물리는 것이, 군사독재가 필요함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쪽에서만 저항, 곤란 및 전쟁에 대항한 항의 행동이 기대될 수 있었던 점으로 보아, 계엄령은 바로 그 사회민주당을 겨냥한 것이었다. 사회민주당의 동의하에 당쟁중지, 계급 적대의 폐지가 선언됨과 동시에 그 자체, 즉 사회민주당이 계엄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투쟁이 그 가장 첨예한 형태, 즉 군사독재의 형태로 선언되었다. 결연히 저항하다 패배한 최악의 상황에 맞았을 것, 즉 계엄령을 사회민주당은 스스로 항복의 결과로 받은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의 엄숙한 선언은 차관승인의 근거로 민족자결권vi)이라는 사회주의 원칙을 거론한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독일민족의 “자결”의 첫 단계가 사회민주당에게 입힌 계엄령이라는 결박 조끼였다! 한 당에 이보다 더 큰 자기기만은 역사상 거의 전례가 없었다.

     

    당쟁중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민주당은 전쟁 기간 계급투쟁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사회민주당은 그 자체의 존재 기반을, 그 자체의 정치 기반을 부정했다. 이 당을 숨 쉬게 하는 것이 계급투쟁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자기 삶의 원칙인 계급투쟁을 희생한 뒤 이제 전쟁 동안 그 당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계급투쟁을 부인함으로써 사회민주당은 전쟁 기간 스스로 활동적인 정치 당으로서, 노동자 정치의 대리인으로서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또한 그 가장 중요한 무기, 즉 특히 노동계급의 입장에 서서 이 전쟁을 비판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것은 “조국 방어”를 지배계급에 내맡기고 노동계급을 지배계급의 휘하에 제공하며 계엄령 아래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즉 노동계급에 대한 경찰 역할을 하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또한 그의 태도를 통해, 원내분파의 선언에 따르면 지금 크룹의 대포가 그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독일의 자유 문제를 지금 이 전쟁의 지속기간보다 훨씬 더 장기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위험 속에 빠뜨렸다. 사회민주당의 지도부는 전쟁 이후 노동자계급의 자유가 의미 있게 확대될 것이고, 전쟁 중에 노동계급이 보인 조국 사랑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부르주아적인 평등권이 제공되리라 전망했고, 많은 주장의 바탕에는 이러한 전망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역사상 지금까지 정치적 권리들이 피지배계급에, 지배계급의 마음에 드는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결코 팁으로 주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쟁발발 전에 엄숙하게 했던 약속마저도 지배계급이 그 뒤에 거만하게 깨어버린 예들이 역사에는 널려 있다. 사실, 사회민주당은 그것이 취한 태도를 통해 독일에서 장래의 정치 권리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 전쟁 전에 가졌던 권리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독일에서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그리고 공공 생활의 폐지가 계엄 상태와 마찬가지로 몇 달 동안 그 어떤 투쟁도 없이, 심지어 부분적으로는 바로 그 사회민주당의 갈채2)를 받으며 용인된 방식은 현대사회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다. 영국에서는 전적으로 언론의 자유가 지배하고, 프랑스에서도 언론은 독일에서처럼 그렇게 완전히 재갈 물리지 않았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독일에서와 같이 여론이 그렇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단순히 ‘거의 공식적이나 다름없는 견해’에 의해, 정부의 명령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도 반대파의 의견을 지워버리는 혐오스러운 검열의 붉은 펜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반대파 언론들이 정부가 제공한 완결된 기사들을 찍어내야 하고 어떤 기사들에서는 정부 당국이 ‘언론과 비밀리에 상의하여’ 불러주고 지시하는 특정한 견해들을 대변해야 하는 것과 같은 제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 자체에서도 1870년의 전쟁 동안에 언론이 지금 상태와 비슷한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않았다. 그 당시 언론은 아무 제한 없이 자유를 즐겼었다. 비스마르크가 왕성한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로 언론은 그 전쟁 사안을 주시하면서 부분적으로 날카롭게 비판하며 특히 전쟁목적과 합병문제 그리고 헌법 문제 등등에 대해서도 활기차게 의견투쟁을 했었다. 그리고 요한 야코비가 체포되자, 분노의 폭풍이 독일 전역을 휩쓸었고, 비스마르크 자신도 반동 세력의 그 뻔뻔스러운 범행을 하나의 중대한 실책으로 여기며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며 자신 옹호했다. 이것이 바로,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이 독일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지배적인 맹목적 애국자들과의 그 어떤 연합도 일절 거부한 뒤 독일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4백 2십 5만 명의 유권자를 거느린 애국적인 사회민주당, 당쟁중지라는 화합의 축제, 그리고 사회민주당 원내분파의 전쟁차관 동의, 이 모든 것이 있고 난 뒤, 성년의 그 어떤 한 민족이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극심한 군사독재가 시행되었다. 그와 같은 일이 오늘날 독일에서 가능하게 된 것은, 즉 부르주아 언론뿐만 아니라 꽤 발전하고 영향력이 큰 사회민주당 언론의 아무런 투쟁도 없이 그럴듯한 저항의 시도조차 없이 감수된다는 이 사실은 독일의 자유 운명에 불운한 의미가 있다. 이는 그렇게 쉽게 아무런 저항 없이 정치적 자유의 부재를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 독일 사회가 자체 내부에 정치적 자유를 위한 어떤 기반도 갖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쟁 전 독일제국 내에 존재했던 하찮을 정도의 정치 권리들은, 거대하고 반복된 혁명투쟁의 결과로서 그런 권리들이 그러한 투쟁 전통을 통해 민족의 삶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프랑스나 영국에서와는 달리, 20여 년 동안 승승장구하던 반혁명 이후 비스마르크 정책의 선물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일 헌법은 혁명의 펜대 안에서 성숙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 군사 왕정의 외교적인 게임 안에서, 이 왕정이 오늘날의 독일제국으로 증축되는 데 도움을 준 시멘트로서 였다. 그래서 ‘독일에서 자유가 발전’하는 데 있어 위험은 제국의회 원내분파가 말하는 것처럼 러시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자체에 있다. 특히 그런 위험은 독일 헌법의 반혁명적인 기원에 있다. 제국창립 이래 그 보잘것없는 ‘독일의 자유’에 대항해 끊임없이 조용한 전쟁을 치러 온 독일 사회의 반동적 권력 분파들에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로, 엘베강 동쪽의 융커체제, 대산업적 모함자들, 철저히 반동적인 중앙파, 독일 자유주의의 타락, 사적인 통치 그리고 이 모든 요소로부터 유래한 군사지배, 전쟁 직전에 독일에서 승리를 거둔 군사적 강경노선 등이다. 이것들이 바로 독일의 문화와 ‘자유의 발전’에 대한 진정한 위험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의 각각을 지금 전쟁이 강화하고 있다. 계엄령,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태도가 가장 극심하게 강화하고 있다. 오늘날 독일이 교회의 묘지처럼 조용한 점에 대해 진짜 자유주의적인 핑계가 있긴 하다. 즉, 이는 단지 전쟁 진행 기간만 ‘잠정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정치적으로 성숙한 국민은 살아있는 사람이 숨쉬기를 포기할 수 없듯이 정치 권리와 공공의 삶을 ‘잠정적으로’라도 포기할 수 없다.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전쟁 기간은 계엄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그런 국민은 그럼으로써, 정치 권리가 전혀 없어도 되는 그런 것이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사회민주당이 오늘날 계엄 상태를 감내하며 동의한 것은, 무조건 전쟁차관을 승인하고 당쟁중지를 받아들인 것과 함께, 지배계급 반동들, 즉 헌법의 적들에게 강력하게 고무적 영향을 미친 그만큼 독일 헌법의 유일한 지주인 민중들의 기상을 약화하는 효과를 가져왔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계급투쟁을 포기함으로써 우리 당은 그와 동시에 전쟁 지속과 관련하여 그리고 평화체결과 관련하여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중단했다. 여기에서 그 자체의 공식적 해명을 내팽개친 셈이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그 전쟁이 유리하게 진행되는 한 불가피한 논리적 귀결이기 마련인 모든 합병에 엄숙히 반대한 바로 그 당이 동시에 당쟁중지를 수용했다. 그럼으로써, 당 자체의 의지에 따라 민중과 여론을 동원할, 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압력을 행사할, 그래서 전쟁을 통제하고 평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모든 수단과 무기를 내어주었다. 당쟁중지를 통해 오히려 사회민주당은 군국주의의 배후 안정을 보장해 줌으로써 그 군국주의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이외의 어떤 다른 이해관계에도 구애됨이 없이 제 갈 길을 가도록 허용했다, 바로 합병을 모색하고 또 합병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억제되지 않은 내부의 제국주의적 경향을 해방시켰다. 다시 말해, 사회민주당은 당쟁중지를 수용하고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무장을 해제함으로써 결국 모든 합병에 대한 그것의 엄숙한 반대가 무력한 문구로 남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다른 하나, 즉 전쟁의 연장이 이뤄졌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익숙히 잘 알려진 도그마 안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에 있어 얼마나 위험한 함정이 놓여 있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준다. 즉, 전쟁에 반대한 우리의 저항은 우선 전쟁의 위험이 존재하는 동안만 요구되는 것이지,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사회민주당의 정치적 역할은 끝나고, 이때는 오직 승리냐 패배냐만 문제라는, 즉 계급투쟁은 전쟁 기간 중지된다는 그 도그마 안에. 하지만 사실은 사회민주당의 정치에서 가장 큰 과업은 전쟁발발 뒤에 시작된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대회vii)에서 독일당 대표자들과 노조 대표자들이 만장일치로 승인하고 1912년 바젤회의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된 결정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신속한 종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 총력을 기울여 노력하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책무이다. 전쟁이 초래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민중을 일깨우는데 활용하고 이로써 자본주의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가속하는 것이 책무이다.”viii[강조 –R.L.]

     

    이 전쟁에서 사회민주당은 무엇을 했는가? 사회민주당은 슈투트가르트 대회와 바젤회의의 계명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즉, 당은 차관을 승인하고 당쟁중지를 준수함으로써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막는, 그 전쟁으로 인해 대중이 동요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전쟁이 가져온 무질서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를 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노력’했고, 그럼으로써 전쟁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지속하도록, 전쟁의 희생자 수가 더 늘어나도록 했다. 제국의회 의원들이 종종 하는 말에 따르자면, 사회민주당 분파가 전쟁차관을 승인하든 그렇지 않든 전장에서 병사가 한 명이라도 덜 죽어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다. 아니, 그런데 우리 당의 신문들이 전반적으로 대변한 견해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 전쟁의 처참한 희생자들의 수를 줄일 수 있는 한 줄이기 위해 우리는 바로 이 ‘조국 방어’에 동참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실행된 정책이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 온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애국적’ 태도를 통해서야 비로소, 배후에서의 당쟁중지 덕분에야 비로소 이 제국주의 전쟁은 거리낌 없이 광포함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내부적인 동요에 대한 두려움 궁핍 속의 민중 분노에 대한 두려움이 항시적인 악몽이었고 그렇게 해서 지배계급의 전쟁야욕을 묶어놓는 효과적인 고삐였다. 지금은 사회민주당이 두려워서 그 어떤 전쟁이라도 되도록 미루려 애쓴다고 한 뷜로프의 말은 유명하다. 로어바흐가 그의『전쟁과 독일정치』의 7쪽에서 쓴 것에 따르면, “근본적인 재앙이 발생하지 않는 한, 독일에 평화를 강요할 유일한 것은 가난한 자들의 굶주림이다.” 그는 분명히, 징후를 보이고 점점 더 뚜렷해져서 마침내 지배계급이 이를 참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러한 굶주림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전쟁의 탁월한 군인이자 이론가인 폰 베른하아디 장군이 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지금의 전쟁에 대하여』라는 그의 대작 속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렇게 현대의 대규모 군대는 여러모로 전쟁 수행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 밖에도 그 자체도 과소평가돼서는 안 될 위험 동인이다.

     

    그러한 종류의 군대의 메커니즘은 매우 위력적이고 복잡해서, 톱니바퀴들 전체가 대체로 충실하게 움직이고 강한 내적 동요가 더 넓은 범위에서 방지될 때만 작동하고 조정할 수 있게 유지된다. 그런데 변화가 많은 전쟁에서 그러한 종류의 현상들이 완전히 제거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투가 명백하게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기대하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들이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영향력을 갖는다면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하게 결집한 대중이 일단 지휘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 곳에서는, 그들이 공포 상태에 빠진 곳에서는, 더 큰 범위에서 보급이 실패하고 부대 내에 불복종 정신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그러한 대중은 적에 저항하기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군율의 끈을 끊어버리고 작전 진행을 제 맘대로 교란함으로써 그리고 지도부에게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부과함으로써 그들 자체가 스스로 그리고 군 지도부에게 위험이 되어버린다.

    대규모 군대로 치르는 현대의 전쟁은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그 국가의 인력과 재력을 극도로 요구하는 위험한 게임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일단 발발하면, 그 전쟁을 신속히 종결지을 수 있고 전체 국민의 동원으로 인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그 엄청난 긴장을 재빨리 해소할 수 있을 지시들이 곳곳에서 내려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강조 – 로자 룩셈부르크]

     

    이렇게 부르주아 정치가들과 군 권위자들은 대규모 군대로 치르는 현대의 전쟁을 일종의 ‘위험한 게임’으로 보았고, 이 점이 오늘날의 권력자들이 전쟁을 책모하지 못하도록 막고 또 전쟁이 발발한 경우에는 재빠른 종결을 생각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동인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어느 모로 보아도 “엄청난 긴장”을 억누르는 작용을 한 사회민주당의 행태는 그러한 걱정거리를 없애버렸고 군사주의의 억제되지 않은 폭풍에 대항해 서 있던 유일한 댐을 부숴버렸다. 그래, 베른하아디나 그 어떤 부르주아 정치가도 꿈속에서도 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었던 그 어떤 것이 등장해야만 했다. 즉, 사회민주당 진영으로부터 인류학살 “감내하기”, 즉 계속하기라는 구호가 울려 퍼진 것이다. 그리고 몇 달 전 이래 전장을 뒤덮는 수천의 희생자들이 그래서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주>

     

    1) 1914년 10월 6일『함부르크의 메아리』에 재수록 된 뉘넨베르크 당 기관지의 기사를 참조

     

    2) 캠니츠의『민중의 목소리』는 1914년 10월 21일 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 “어쨌든 독일의 군사검열은 전반적으로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더 점잖은 편이다. 종종 그 배후에 전쟁에 대한 확고한 입장의 부족을 숨기고 있는, 검열에 반대한 아우성은 독일의 적들이 하는 거짓말, 즉 독일이 제2의 러시아라는 거짓말이 유포되는 것을 도울 뿐이다. 지금의 군사검열 아래에서 마음대로 쓸 수 없다고 진정으로 믿는 자는 펜대를 놓고 침묵하라.”

    --------------------------------------

    i) Sozialistengesetz, 독일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제국 수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입안되어 1878년부터 1890년까지 시행되었다. 이 법에 따라 노동조합, 노동자단체 및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 등이 불법화되었다.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제국의회나 주의회 등에 선출될 수는 있었다.

     

    ii) K. Kautsky, “Wirkungen des Krieges”, in: Die Neue Zeit, 32. Jg.1913/14, Zweiter Band, S.975

     

    iii) K. Kautsky, “Die Internationalität und der Krieg,” in : Die Neue Zeit, 33.Jg.1914/15, Erster Band, S.248

     

    iv) fraternité

     

    v) Karl Marx, “Die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48 bis 1850,” in :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s. Bd. 7, S.21/22.

     

    vi) Das Selbstbestimmungsrecht der Nationen

     

    vii) 1907년 8월 18일부터 24일까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사회주의자 인터내셔널대회(Der Internationale Sozialistenkongress)가 열렸다.

     

    viii) Erste Beilage zum Periodischen Bulletin des Internationalen Sozialistischen Bureaus, Brüssel 1912, S.7

     

    번역 ┃ 국제코뮤니스트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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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노동조합주의 - 안톤 판네쿡

  • 안톤 판네쿡

    노동조합주의

     

     

    생산을 수중에 장악하고 생산을 조직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임무가 먼저 다루어져야 한다. 투쟁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분명하게 보고, 우리 앞에 놓인 노선을 뚜렷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생산에 대한 권력의 장악하기 위한 투쟁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이러한 투쟁을 거치며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해방을 위한 노동자 투쟁의 미래 형태들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사회적 조건들에 달려있고 노동계급의 힘이 증대함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어떻게 투쟁해왔고, 변화하는 환경에 대항하여 어떤 행동 양식을 적응시켰었는지를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오로지 우리의 선행자들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헤아려봄으로써만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 시대의 요구에 맞는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다.

     

    지배계급에 의한 노동계급 착취에 의존하고 있는 모든 사회에서는 전체 노동 생산물의 분배, 다른 말로 하면, 착취의 정도를 둘러싼 지속적인 투쟁이 존재한다. 따라서 중세시대뿐만 아니라 그 후의 세기는 지주들과 농민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과 격렬한 투쟁으로 가득 찼다. 동시에 우리는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얻기 위해 신흥 시민계급이 귀족과 군주에 대항해 투쟁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기술, 산업, 상업의 발전으로부터 인한 새로운 생산체제의 발흥과 연관된 다른 계급투쟁이었다. 이는 토지의 주인들과 자본의 주인들, 즉 몰락하는 봉건체제와 부상하는 자본주의 체제 사이에서 수행되었다. 일련의 사회변동, 정치혁명과 전쟁 속에서 영국, 프랑스 및 여타의 나라들에서 자본가 계급은 지속해서 사회에 대한 완벽한 지배를 획득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계급은 자본에 대항하여 두 가지 종류의 투쟁을 수행해야 했다. 노동계급은 가혹한 착취와 억압을 완화하고, 임금을 인상하고, 전체 생산량 중에서 그들의 몫을 확대하려는 지속적인 투쟁을 유지해야 한다. 그 외에 노동계급의 힘이 증가함에 따라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새로운 생산 체제를 세우기 위한 사회적 주도권을 획득해야 했다.

     

    처음으로 방적기계, 나중에 직조기계들이 도입된 영국에서의 산업혁명 초기에, 우리는 기계들을 파괴하기 위해 봉기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노동자, 즉 임금취득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전에는 독립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저가로 상품을 생산하는 기계의 경쟁 때문에 굶주리게 되자, 자신들의 궁핍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던 영세 장인들이었다. 훗날 그들이나 그들의 자녀들이 임금노동자가 되어 그들 스스로 기계를 다루게 되었을 때, 그들의 위치는 그전과는 다른 것이 되었다. 산업의 성장이 이루어졌던 19세기 내내 좋은 임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도시에 몰려든 많은 시골 출신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현대에는 더욱 많은 노동자의 후손들이 공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들 모두에게 더욱 좋은 노동조건을 위한 투쟁이 가장 시급한 것이었다. 고용주들은 경쟁의 압박 하에서 그들의 이윤을 늘리기 위해 임금은 내리고, 가능한 한 노동시간은 늘리려 했다. 처음에 노동자들은 굶주림의 압박에 무력하게 묵묵히 순응해야만 했다. 그 후 유일하게 가능한 저항 형태인 노동 거부 즉, 파업의 형태로 저항이 폭발했다.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그들의 힘을 발견했고, 파업에서 그들의 투쟁력을 높여갈 수 있었다. 파업으로부터 공장, 해당 산업 부문, 나라 전체의 모든 노동자의 결속이 발생하였다. 파업으로부터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의 연대와 협동심, 전체 계급의 통일성의 꽃이 활짝 피어났다. 벽두의 여명이 새로운 사회를 밝게 비추는 태양으로 발전한 것이다. 처음에는 자생적이고 우연적인 모금 활동의 상호 협조는 곧 노동조합의 지속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노동조합의 순조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들이 필요했다. 대부분 자본주의 이전 시기에서 물려받은 거친 무법, 경찰들의 독단과 금지의 토대들은 견고한 건축물이 세워지기 이전에 제거해야 했다. 보통은 노동자들 스스로 이러한 조건들을 확보해내야 했다. 영국에서 이는 차티즘의 혁명적인 캠페인이었다. 반면 반세기 후에 독일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적 승인을 얻어내기 위한 사회민주주의 투쟁이 노동조합의 성장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오늘날에는 전국의 같은 직종을 가진 노동자들을 포괄하고, 다른 직종과 연계를 이루며, 전 세계의 노동조합들을 아우르는 국제적인 노동조합이 될 정도로 강력한 조직들이 설립되었다. 정기적으로 납부되는 높은 조합비는 파업 시, 파업을 꺼리는 자본가들이 노동조건을 크게 낮췄을 때, 이로부터 파업자들을 버텨줄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양의 자금을 제공하였다. 때때로 이전 투쟁에 대한 적의 분노의 희생물이 되었던 동료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대변자들로서 자본가 고용주들과 협상할 수 있는 봉급을 받는 관료들로 임명되었다. 파업의 적절한 시기에, 노동조합의 모든 힘의 지원을 받은 협상은 더 향상된 획일화된 임금을 얻어내고 또한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닌 한 더욱 공정한 노동시간을 얻어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더는 굶주림 때문에 어떤 가격으로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무력한 개인들이 아니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노동조합, 자신들의 연대와 협력 때문에 보호받고 있다. 모든 구성원은 동료를 위해 자신 수입의 일부를 내놓을 뿐만 아니라 조직과 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해 직업을 잃을 각오도 되어있다. 그 때문에 고용자들의 권력과 노동자들의 권력 사이에 어느 정도의 균형상태가 이루어졌다. 노동조건은 이제는 전능한 자본가들의 이해에 따라 규제되지 않는다. 노동조합들은 점차 노동자들의 이해 대표들로서 인정받아갔다. 비록 계속 투쟁을 해야 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권력이 되어갔다. 물론 모든 곳에 노동조합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고, 단번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보통은 숙련공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노동조합을 설립하였다. 더욱 강력한 고용주들에게 대항하여야 했던 대공장에 있는 비숙련 대중은 대체로 뒤늦게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대공장에서 비숙련 노동자 노동조합들은 종종 갑작스러운 커다란 투쟁을 거치면서 출범하곤 했다. 그리고 거대 기업의 독점적 소유자에 대항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막강한 자본가들은 절대적인 주인이 되기를 원했고, 비굴한 어용노조 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과는 별도로, 심지어 노동조합주의가 완벽하게 발전하여 모든 산업을 통제하더라도 이는 착취가 폐지되었음을, 즉 자본주의가 억압받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억압받은 것은 다만 개별 자본가들의 독단성일 뿐이고, 폐지된 것은 최악의 착취의 남용일 뿐이다. 그리고 불공정 경쟁에 대항해 그들을 보호했던 것은 동료 자본가의 이해,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이해 안에서였다. 노동조합의 권력에 의해 자본주의는 정상화되었다. 즉 특정한 착취의 규준이 보편적으로 제정되었다.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굶주림으로 인한 봉기를 일으키지 않도록 가장 적당한 생활을 허용하는 임금 수준이 방해받지 않는 생산을 위하여 필요하였다. 비록 노동시간의 감축은 대체로 노동 속도의 가속화와 노동 강도의 강화를 통해 중화되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미래의 착취 토대로서 이용 가능한 노동계급의 보전하기 위하여, 노동계급의 생동성을 완전히 고갈시키지 않도록 노동시간의 규준을 정하는 것은, 자본주의 그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그들의 탐욕의 편협성에 대항해 표준적인 자본주의의 조건들을 제정하도록 싸운 것은 노동계급이었다. 그리고 노동계급은 이 불확실한 균형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계속해서 싸워야 했다. 이러한 투쟁에서 노동조합은 그 수단이었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에 필수불가결한 기능을 했다. 편협한 고용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더 멀리 볼 수 있는 그들의 정치 지도자들은 노동조합이 자본주의를 위한 기본적인 요소라는 점을, 즉 정상화하는 기능을 하는 권력으로써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완벽해질 수 없을 것을 잘 알았다. 비록 노동자들의 고통과 노력으로 유지된 투쟁의 산물인 노동조합은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의 기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상황들은 점차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갔다. 대자본은 성장했고, 권력을 느끼고, 편안한 주인이 되기를 원했다. 자본가는 단결력을 이해하고 배웠다. 즉 그들은 고용주 연합을 조직하였다. 그래서 힘의 균형 대신에 자본의 새로운 우세가 발흥하였다. 파업은 노동조합의 기금이 고갈되도록 봉쇄되었다. 노동자들의 자금력은 자본가들의 자금력에 맞설 수 없었다. 임금 및 노동조건에 대한 협상에서 노동조합은 그들의 적립금을 고갈시키고, 이로 인해 조직 및 그 관료들의 존재 보장을 위협할 수 있는 대투쟁들을 두려워했고 그것들을 회피하려고 노력해야 했기에, 이전보다 더욱 연약한 협상 당사자가 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노동조합 관료들은 종종 투쟁을 피하고자 노동조건이 하락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에게 이는 불가피했고 자명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변화된 조건들에 따라 그들 조직의 투쟁력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더 어려운 노동 조건과 생활 조건을 말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투쟁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관점의 충돌이 발생했다. 관료들은 공통된 감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즉 그들은 조합이 불리한 상황이며, 투쟁은 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대투쟁의 저력들은 아직 사용할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아직도 대중들 속에 숨어 있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양보한다면 그들의 처지는 더 나빠질 것이며, 오로지 투쟁을 통해서만 막을 수 있다는 점을 올바르게 깨닫고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 내부의 관료들과 조합원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조합원들은 고용주들에게만 이로울 뿐인 새로운 임금(배상금)에 대해 저항했다. 반면 조합 관료들은 오랜 시간이 걸려 어렵게 타협에 이른 이 협상안을 옹호했고, 비준하려 했다. 이렇듯 그들은 종종 노동자들의 이익에 대항해 자본의 이익의 대변자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조합들의 영향력 있는 지배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노동조합 역시 모든 권력과 권위를 내던지고 자본의 기관으로 변해갔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성장, 노동자들의 수적인 증가, 연합의 시급한 필요성은 노동조합을 더욱 많은 관료과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는 거대한 조직들로 만들었다. 모든 권력 요소가 관료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모든 사업을 관리하고 모든 조합원을 지배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전문가로서 관료들은 모든 일을 준비하고 관리했다. 예컨대 그들은 재정 및 다양한 목적을 위한 자금 지출을 관리했고, 노동조합 신문의 편집자였기 때문에 조합원들에게 자신들의 관점과 생각을 주입할 수 있었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널리 유포되었다. 마치 국민이 의회와 국가에서 정치를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합원들은 회합을 통해 의회에 나가 의사를 결정해야 할 대표자들을 선출했다. 하지만 오히려 의회와 정부가 국민의 주인이 되었듯이, 이와 똑같은 일이 노동자 의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그들은 전문 관료들로 이루어진 관료제를 일종의 노동조합 정부로 변형시켰고, 조합원들은 그들의 일상적 활동과 보살핌에 의해 흡수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덕목인 연대가 아니라, 규율, 결정에 대한 복종이 그들에게 요구되었다. 따라서 관점의 차이,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대립하는 의견들이 발생했다. 이는 생활조건의 차이에 의해 강화되었다. 즉, 노동조합 일들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관료들에게는 안전이 보장되었던 반면 노동자들의 직업의 불안정은 실업과 경기침체로 항상 위협받았다.

     

    그들의 결합하고 통합된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을 무력한 비참함에서 나아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위를 얻어내는 것이 노동조합주의 임무이자 기능이었다. 그것은 자본의 더욱 증가한 착취에 대항해서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했다. 이제 대자본은 은행과 산업 콘체른(재벌)의 독점력으로 이전보다 더욱 통합되어가고 있으므로, 노동조합주의의 이러한 이전의 기능은 끝이 났다. 자본의 엄청난 권력에 비할 때, 노동조합의 힘은 불충분하게 되었다. 노동조합은 이제 사회에서 그 지위가 인정되는 거대 조직이 되었다. 그것들의 위상은 법에 따라서 규제되며, 그들의 임금협정은 전체 산업에 구속력을 가진다.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산업 조건을 지배하는 권력의 한 부분이 되고자 열망하고 있다. 그들은 독점 자본이 그들을 통해 전체 노동계급에 자신들의 조건을 부과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이처럼 막강한 자본은 독재의 발가벗은 야만성을 다 드러내기보다는 보통은 자신들의 지배를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형태들로 위장하기를 더욱 선호한다. 노동자들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노동조건은 거만하게 부과된 명령의 형태보다는, 노동조합과 합의한 형태를 취할 때보다 쉽게 받아들이고 굴복시킬 수 있다. 첫째, 노동자에게는 자신이 자신 이해의 주인이라는 환상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 스스로가 투쟁하고, 희생해가면서 만들어낸 것이 노동조합이라는 사실이 오늘날에는 그 주인들에게 굽실대는 노동조합에 대해 애정을 갖도록 하고, 노동조합이 자신들을 위한 조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의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이 전 어느 때보다 노동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독점 자본의 기관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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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판네쿡의 저서 <<노동자평의회>> 중 오늘날 더욱 중요해진‘ 노동조합주의’를 소개한다.

     

     <출처> https://www.marxists.org/archive/pannekoe/1947/workers-councils.htm#h13

              <<노동자평의회>>, 빛나는 전망,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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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나아가자.

  •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나아가자.

     

     

     1. 문재인 정부와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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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소한의 기계적 중립도 무시한 채 노골적으로 자본가 계급 편에서 노동운동을 탄압하던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내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다. 정권이 바뀌고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노조 운동 상층부와 노동운동가 출신 명망가 시각으로는 많은 게 변했을지 모르지만, 대다수 노동자의 현실에서 본다면 그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았다.

    10월 24일 문 대통령은 민주노총이 불참한 가운데 노동계를 청와대로 초청해 “노동계를 국정 파트너로 삼는 노정관계로 복원하는 게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명박-박근혜 정권과의 차별을 내세우며 “지난 10년간 노동은 소외되고 배제됐으며 국정 파트너로 인정받지 못했다”라며 “노동정책이 정부에 의해 일방 추진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로 인해 노조 조직률이 떨어지고 노동자의 삶이 나빠졌으며 경제 불평등이 심해졌다”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9월 25일, 고용노동부는 박근혜 정부의 노동적폐라는 ‘2대 지침’을 폐기했다. 또한,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기본권 보호 관련 인권위 권고도 수용한다고 했다.

     

    민주노총은 이와 관련해 "2대 지침 폐기는 환영하지만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건 지나치다"라고 선을 그었고,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기본권 보호 관련 인권위 권고 수용은 환영한다고 했다. 민주노총은 ‘노조 할 권리와 노동법 전면 제·개정을 위한 대정부 5대 우선요구’를 선포했다. 노조법 2조 개정 등 ‘5대 우선 요구’는 노동 적폐 청산, 노조 할 권리 보장, 노동법 전면 제·개정을 위한 수많은 요구 가운데 가장 절박하고 핵심인 현장 노동자의 요구라고 했다.

     

    이러한 일련의 소식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지난 정권에서 부정적 이미지였던 ‘노동’이라는 용어가 정권이 바뀌면서 이 사회에서 중요한 부분 즉, 정부 파트너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계에서도 말뿐인 노동 존중이 아니라 실질적인 권리와 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노조 조직률’ 하락을 우려하고 노동조합에서는 ‘노조 할 권리’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정부와 노동계의 이해관계(노동정책-대정부 요구)는 시간과 절차의 차이는 있어도 같은 방향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아니다.

     

    첫째, 자본주의 국가는 행정부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므로 문재인보다 더 친노동 인사가 권력의 수장이 된다 해도 사회 시스템(체제)이 변하지 않으면 ‘노동’은 존중받지 못한다. 수많은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가 참여한 촛불 투쟁을 발판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권도 계급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선출된 자본가 정부일 뿐이다. 그가 관리하는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수호자로서 정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가기구와 사적인 자본의 권력과 폭력으로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가치법칙이 작동하는데, 이것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을 동시에 존중하는 계급적 중립은 불가능하다. 현 정부의 노동존중은 생산현장과 노동자의 일상에서 불평등하고 야만스런 착취체제를 그대로 놔둔 채 단지 국정 파트너로 들러리를 세우겠다는 의미이다. 이것도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과 저항 대신 자본주의적 ‘타협’과 ‘양보(상생)’만을 허용하는 테이블에서의 ‘대접’ 또는 ‘존중’으로 다수 노동자를 대표하라는 의미이다.

     

    둘째, 노조 조직률이 떨어지고 노동자의 삶이 나빠진 게 일방적인 정책 추진 때문이라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낮은 노조 조직률과 비정규직 양산 그리고 실업으로 노동자의 삶이 어려워진 건 그 뿌리가 노무현 정부 그리고 더 이전 정부에서부터였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또한, 수십 년째 변하지 않는 자본가계급과 사법기관의 반(反)노동자적 태도 그리고 그에 맞선 노동조합 투쟁의 실패와 후퇴에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변하지 않는 자본의 거대한 세력에 맞서 노동조합이 가장 크게 후퇴한 건 힘이 없어 패배한 게 아니라 타협과 배신으로 자본과 정부에 투항한 일이다. 이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처럼 노동조합이 국가에 통합되지는 않았지만, 노동조합의 실제 역할이 노동자 투쟁을 통제하고 전체 노동자의 이익이 아닌 부분 노동자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걸로 자리 잡게 해 결과적으로 자본가계급에 도움을 주는 역할로 바뀌었다는 의미이다. 다음 단계는 자본주의 위기관리에 노동조합이 참여해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데 완충 역할을 하고, 투쟁 회피를 넘어 노골적으로 투쟁을 방해할 수도 있다. (이미 일부 정규직 노동조합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대한 개입은 회피를 넘어 방해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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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노조 할 권리가 보장되어 노조하기 좋은 나라가 된다면 노동자에게는 당연히 좋은 일이다. 침체된 노동자 운동에도 활력소가 되고, 새로운 주체 탄생도 기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가 정부인 문재인 정부에는 노동조합이 어떠한 도움이 되기에 대통령이 나서서 낮은 노조 가입률을 걱정하는가? 우선은 현 정부의 탄생 배경인 반(反)박근혜 촛불 투쟁에 수많은 노동자가 나섰고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며, 정부에서 추진하는 주요정책에도 그들의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 대표로서 적당히 정부를 비판하면서 노동자 투쟁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노동조합이 많아지고, 조직률이 높아진다면 정부로서는 큰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다. 잘 조직되어 통제되는 노동자 세력이야말로 자신의 정책에 대한 지지뿐 아니라 자본주의 위기 상황을 모면하는데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10월 25일 정부가 밝힌 ‘2020년까지 중앙정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지방공기업·국공립 교육기관 853곳에 속한 비정규직 20만5천 명 정규직 전환’ 약속은 규모에서 절반인 14만 명이 전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내용으로도 그동안의 사례를 보면 실질적인 정규직화가 아니라서 양대 노총이 모두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노동자들은 현상 문제에 대한 비판에 머무르면 안 되고 본질을 봐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리에는 ‘희생과 양보’라는 칼날이 숨어있기 때문에, 그 뒤에는 사회적 대화 참여와 정규직 노조의 양보, 그리고 더 큰 위기극복을 위한 희생 강요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미 노동운동 내 노사협조주의-조합주의 세력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부의 방향대로 움직이고 있다. ‘노조하기 좋은 나라’란 이들이 노동자를 조직하고 노동조합을 장악하여 공식적인 정부의 파트너로 정부에 포섭, 통합되어 ‘노동자를 통제하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 앞으로 개별 자본가와의 싸움도 타협과 양보라는 투쟁 회피 세력의 ‘노동개혁’ 논리가 지배하고, 총자본-대정부 투쟁 또한 ‘노동 적폐 청산’이라는 개량화 한 요구를 넘어서지 못할 수 있다. 원칙적이고 타협 없는 투쟁, 급진적이고 계급적인 요구는 다수를 차지하게 될 내부 협조자와 노동조합 조직 질서에 의해 차단당하고 고립될 수 있다. 민주노총의 새로운 집행부는 당선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대통령 면담을 진행했고 결국 1월 13일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

     

    2017년은 87년 대투쟁 30주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는 해였지만, 반성과 성찰 그리고 반격을 준비하기 보다는 정권교체 환상에 이어 ‘노조하기 좋은 나라’ 환상에 갇혀 버렸다. 이것이 한국 노동자 운동의 현실이자 노동계급 위기의 본질이다. 이에 우리는 노동조합에 대한 본질을 밝히고 태도를 분명히 하는 정치원칙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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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노동조합, 노동조합주의 역사와 역할 변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해당하는 노동조합주의는 오늘날 새로운 게 아니라 노동조합 초기부터 존재했다. 노동조합주의는 자본주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노동자 활동이다. 그것의 목표는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 양식으로 교체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내에서 좋은 생활 조건을 보장하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노동조합주의의 특징은 혁명성이 아니라 ‘보수성’이다.

     

     

    노동조합주의는 처음에 산업 자본주의가 최초로 발전한 영국에서 등장했다. 이것이 다른 나라로 널리 퍼진 후에, 자본주의 산업에 자연스럽게 경쟁자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현재 거의 모든 노동조합을 지배하고 있는 노동조합주의는 초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가치, 곧 조직된 투쟁 정신인 노동자 연대를 배우는 최초의 학교였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된 힘의 최초 형태를 구현했다. 하지만 초기 영국과 미국 노동조합에서 이런 가치는 종종 잘못 적용되어, 결국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인 협소한 동업조합으로 전락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노동조합주의의 형태는 자본주의 발달 차이에 따라, 국가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그것은 모든 국가에서 같은 양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자의 투쟁 정신은 때때로 그것을 변형시키거나, 새로운 조합주의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기 때문이며, 새로운 계급의식과 불안정 노동계급이 증가할수록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조합주의를 만들었고, 더욱 발전된 자본주의에 적응해 나갔다.

     

     

    노동조합 형식은 자본주의 상승기인 19세기의 구조적 조건뿐만 아니라 국가-계급-노동조합 관계에서도 노동계급 투쟁의 실제 표현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노동조합은 그러한 형태의 특성을 상실했는데, 이러저러한 노동조합 지도자의 실수 혹은 배신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본질 때문에 ‘제도화된 노동조합’이 되었다.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 분할을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이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이다. 일부를 제외한 사회주의당, 사회민주주의자, 개량주의자 모두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데 도움을 주면서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원하기 위해 줄을 섰다. 사회민주당에 의해 지도되었던 노동조합은 ‘자신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지했다. 이것은 ‘민족국가 체제’를 지키기 위한 상황에 있는 노동조합 최초의 분명한 사례였다. 노동조합은 부르주아 국가인 조국의 방어자 역할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착취 구조 안에서 효과적인 부역자 역할을 하게 된다. (편집자 주 - 로자 룩셈부르크의 <<유니우스 팸플릿>> 참고)

     

     

    1914년 이후 노동조합은 수적 증가와 함께 사회적 힘도 계속 커졌다. 전쟁으로 노동조합이 줄어든 나라에서조차 노동조합의 중요성은 점차 커졌다. 1914년 노동조합이 조국방어라는 명분으로 전쟁에 찬성한 제국주의 전쟁의 참사는 노동조합이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게 한 사건이었다. 그 전까지 자본가계급은 노동조합의 파괴적인 힘을 두려워했고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국가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제국주의 전쟁에 협력한 1차 세계대전 이후 공장에서 ‘노동조합의 노동자 통제’ 경험은 자본가들을 만족시켰다. ‘노동조합의 노동자 통제’는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을 약화해왔고, 공장의 공정을 단축하고, 무엇보다도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이제 노동조합은 조국의 방어자로서 뿐만 아니라 착취의 구조 안에서 효과적인 부역자로서 눈에 띄게 된다.

     

     

    그 후 지금까지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타협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노동조합은 이제 자본주의 착취 경제를 합리화하고, 노동력 판매를 조정하며 착취를 강화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의 노력에 협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노동계급 내부에서 투쟁을 방해하고 계급투쟁이 자주적으로 발전하고 급진화 하는 걸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노동조합은 자신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노동계급이 다시 장악할 수 없고, 혁명적인 소수가 혁명적인 활동을 할 영역을 제공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1950년대 이후 많은 나라에서 노동자가 점점 부르주아 국가의 구성 요소가 되어버린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생존 조건의 위기에 몰린 노동자 투쟁은 노동조합 외부 또는 노동조합에 대항한 와일드캣 파업(비공인 파업)을 지향했다. 그것은 노동조합 대신 항상 투쟁하는 노동자의 총회에서 선출되어 언제나 소환되며 총회에 책임을 지는 파업 위원회(총회) 형식으로 나타났다. 와일드캣 파업 투쟁과 파업위원회 속에서 노동자평의회의 조직 기초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투쟁만이 노동조합의 한계와 작업장, 업종 울타리를 넘어 자본주의 국가와 정면 대치까지 이를 수 있다.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노동자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가고 있고, 노동조합은 이제 노동계급의 기본생활 방어도 포기하고 있다. 자본의 공격은 노동조합 존재 여부,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철저한 계급 분리 속에서 노동계급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희생시키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공격과 희생을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 없이는 막아낼 수 없다. 계급의 분업과 분리를 용인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노동조합을 통해서는 계급 전체의 단결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 시대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는 노동계급을 분리하고 눈을 가림으로써 무장 해제시킨다. 노동계급은 그 힘과 의식을 노동조합 안팎에서 노동조합주의와 때로는 노동조합 자체와 맞서 싸우지 않고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이미 한국 노동조합 운동은 급속도로 체제 안으로 통합되고 관료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점진적 개량과 의회주의에 몰입된 노동운동 상층 관료는 노동자 대중의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선 대안은 무엇인가?

     

     

    3.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대하여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출범선언문에서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강조했다.

     

    “지난 수십 년간 사민주의(의회주의), 민족주의, 조합주의 등 노동자계급 내부의 걸림돌은 노동계급 고유의 무기인 단결력과 전투성, 그리고 계급투쟁에서의 창발성을 무력화시켰다. 자본의 공격은 강화되는 반면 노동계급의 저항과 투쟁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자본가, 그리고 계급 내부의 적들에 의해 여전히 여러 장벽에 막혀있다. 우리는 낡은 조합주의, 의회주의 세력 운동의 쇠락 속에서도 새롭게 소생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전망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분출을 촉진하는 아래로부터 실천을 제안한다."

     

    1) 제도권 노조운동을 넘어서는 자립적 노동자운동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노조/현장운동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 만들어내고 관료화된 노조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조합원. 비조합원을 구분치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 모두를 평의회적으로 포괄하는 ‘수평적 노동자 직접행동’, 노동자투쟁과 실업자, 빈민, 청년, 소수자들의 직접행동이 결합하는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행동(연대)’을 제안한다.

     

    2)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직형식은 내용과 형식이 통일되는 노동자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투쟁하는 주체들에 의해 직접 선출/소환 가능한 대중총회, 파업/투쟁위원회, 노동자평의회의 형식과 같아야 하며, 노동자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과 노동자 국제주의에 기반을 둔 직접행동만이 계급투쟁의 확산과 자기 조직화를 보장해줄 수 있다.

     

    3) 현재의 자본주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분출하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은 운동의 주체와 최종목표가 불분명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를 분명히 밝혀주는 코뮤니즘(공산주의)을 전망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노동자투쟁과 계급의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사민주의, 조합주의, 중도주의 정치세력들이 아닌,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전망하는 코뮤니스트 정치와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직접행동이 만나야 한다.

     

    코뮤니스트 정치조직과 계급조직(노동자평의회)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코뮤니스트 직접 정치운동을 실천하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제안하며>>,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출범하면서,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012년 10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핵심은 낡은 노동조합운동과 사민주의(의회주의) 정치를 넘어서는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과 코뮤니스트(공산주의) 정치가 직접 만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 경로와 주장을 통해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운동과 실천을 주장해왔다.

     

    먼저 가신 남궁원 동지는 이른바 ‘좌파 노조’를 비판하면서 노동자평의회 정신을 추구하자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역사적인 대공황과 쇠퇴의 정세 조건은 노동자 임금. 생활조건의 악화, 자본의 구조조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계급의 자연스러운 투쟁과 대중의 자기조직화는 파업위원회나 행동위원회로 등장한다. 이러한 흐름은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는 ‘공식적 노조운동’에 대한 대중적 거부다. 전체 운동의 계급투쟁 효과로서 나타나는 노동조합의 전투성은 오직 노동자 대중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데, 좌파정당이나 좌파 노동조합 리더십에서 강화될 수 없다.

    좌파노총이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노동자평의회 정신을 추구할 때다. 노동자 권력의 조직적 구조의 맹아적 형태는 여기서 시작한다.

    <<우파에 대항하는 ‘좋은 노조’, 좌파노총 건설? [새로운 시대의 총연맹, 좌파노총] 비판>>, 붉은글씨, (남궁원, 2012년)

     

    오늘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평의회 운동은 대공장 사업장 노동조합(현장조직)이 아니라 비정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불안정노동 계급의 직접행동과 지역 연대투쟁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 대공장 조직노동자가 계급성과 연대를 회복하려면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평의회 체계 속에서 새로운 주체와 만나 기존 노동조합 운동을 압박하고 포위해나가야 한다. 노동조합을 버리거나 이용한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어느 곳에서든 새로운 노동자 투쟁과 평의회 조직형태를 결합해야 한다. 앞으로 노동자평의회 운동은 혁명시기 노동자 권력을 지향하는데 한정되지 않고, 일상에서 새로운 주체형성, 새로운 계급투쟁 창출, 계급의식 발전에 이바지하는 운동으로 확대하여야 한다. 새로운 계급투쟁 창출은 현장에서 어용세력과의 비타협 투쟁뿐 아니라 그들이 장악한 노동조합 조직 질서 자체를 넘어서려는 급진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노조 집행부를 장악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본과 협력-상생해가는 조합주의 한계를 넘어 계급적으로 투쟁하는 ‘직접행동’을 제안하고, 실제 ‘노동자 행동그룹’이 출현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코뮤니스트 노동자는 노조와 대중운동의 배후정치가 아니라 대중 ‘운동’과 만나 직접 코뮤니스트 정치를 펼쳐 나가야 한다. 코뮤니스트 혁명을 염원하고 그 운동을 지지하는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작업장,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을 뛰어넘어 기존 현장조직과는 질이 다른 코뮤니스트 노동자 그룹을 형성해야 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라난 노조운동은 풍성한 가지를 번창하며 민주노조운동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관료주의, 노사협조주의, 노동조합주의라는 병에 걸렸고, 대부분 열매는 의회주의, 민족주의, 사민주의 세력이 가져갔다. 노동자에게 해로운 세력은 여전히 건강한 가지를 훼손하고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마저 자신이 취하려 이전투구 중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를 잘 보호해 결실을 얻을 것인가? 썩은 가지 쳐내고 쓸만한 가지만을 되살릴 것인가? 아니면 뿌리부터 튼튼히 하여 새싹을 틔울 것인가?

     

     

    아직도 노동조합이 계급 단결과 연대 투쟁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제는 노동조합운동을 과감히 뛰어넘어 노동계급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 실업자, 퇴직자, 모든 장벽을 없애고 노동계급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직접행동, 그리고 노동자평의회와 코뮤니스트 노동자 운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계급투쟁의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자!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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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2017 승리와 실패의 교훈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 2

  • 1917~2017 승리와 실패의 교훈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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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반혁명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단호한 지지, 그리고 혁명 패배의 교훈과 이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의 조건을 찾아내는 것은 혁명적 소수의 필수임무이다. 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비에트 국가는 노동자권력 아래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스탈린주의 반혁명 이후에는 노동계급에게 더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 이후 몇 달 안에 이루어진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의 제도적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1917년 신분제 폐지, 철도노동자 노동시간 1일 8시간 실시, 군대 계급 폐지, 1,886개 전략산업부문 회사 몰수, 종교의식을 하지 않는 결혼제도 시행, 낙태법 제정, 모자보호 연구소 개소, 1918년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공화국 선포, 사회주의 적군의 창설을 위한 법령 선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혁명적 조치에도 소련의 노동계급은 생산과 권력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1차 대전 패배와 내전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러시아는 일부 자본주의적 이행 형식을 들여온다. 1918년 봄 테일러주의의 재도입과 1인 경영의 강제 그리고 혁명의 성과를 방어하려는 임시조치들, 즉 정치반대의 분쇄, 차르 관료의 재고용,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인센티브 제도는 노동계급의 실질적 권력을 깨뜨리고 ‘노동자정부’와 노동자 사이의 틈새를 벌려놓았다. 이러한 틈새의 가장 비극적인 표현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볼셰비키당에 의한 진압이었다.

    그것은 3년간의 내전 동안 혁명적 노동계급의 죽음으로 더욱 굳어졌고, 세계혁명 물결의 연이은 실패는 볼셰비키를 고립시켰고, 이러한 조건은 후진적인 저개발 경제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이를 이어받은 스탈린은 5개년 계획 도입과 농업 집산화로 소련이 사회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발표했지만, 노동자 권력이 아닌 당 독재의 강화를 가져왔다. 당이 곧 계급이라는 잘못된 결정에 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하는 사회가 시작되었다.

    1917년~1920년은 러시아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봉기가 일어나는 시기였고, 러시아혁명은 세계혁명의 첫 단추였다. 하지만 독일 등 주요 유럽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물결이 패배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좌절된다. 레닌의 죽음과 세계혁명의 명백한 침체에 힘입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선언은 국제주의와의 공개적 단절이었으며 세계 제국주의 권력으로 러시아를 건설하는 약속이었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세계혁명의 열매임을 주장한 1917년의 볼셰비즘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었다.

     

     소련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필요를 생산하기 위해 일하지 않았고 임금을 위한 교환을 위해 일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소외시켰고 자본을 생산했다. 자본주의 사기업의 형식으로 자본에 노동력을 파는 대신, 소련 노동계급은 단순히 국유화 기업의 형식으로 자본에 그들의 노동력을 팔았다. 소련의 이러한 현실은, 생산수단 및 생존수단이 국가 소유로 되었다고 해서 자본과 임노동의 사회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소련의 지배적인 사회관계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에 기초했다. 결국, 국가와 그 관료조직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집중화와 계획화는 소유의 폐지를 향한 한 걸음 진전이 아니라, 단지 착취 강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공산주의(코뮤니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양립할 수 없지만, 사적 소유의 부재가 (공산주의 경제 창조를 위한 필요 불가결한 전제조건임에도) 곧 공산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계급투쟁의 역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매번 성공하지는 못했다. 제1 인터내셔널은 상승하는 자본주의의 능력 때문에, 제2 인터내셔널은 혁명주의의 포기와 민족주의 때문에, 그리고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 때문에 실패했다.

    1차 제국주의 전쟁의 과정과 결과는 러시아와 유럽에서 혁명의 물결을 넓혀나갔고, 세계 노동계급에 자본주의의 타도라는 역사적 과제를 최초로 시도하는 흐름을 형성하게 했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의 유혈과 폐허에서 나온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에서 극적으로 입증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경험은 제국주의 전쟁에서 자신의 국민국가를 지지해서 노동계급 간의 상호 살육을 묵인, 방조함으로써 사회배외주의로 전락한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을 명확히 폭로했다. 이것으로 제2 인터내셔널 다수당들은 파산을 맞이했고, 새로운 유형의 혁명 정당, 코뮤니스트 정당의 시기가 열렸다.

     

     1919년은 세계적으로 혁명 물결의 정점이었고, 코민테른 창립총회의 입장은 당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 사회-애국주의 반역자와의 단호한 단절,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에 요구되는 대중행동 방법,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 등 강령의 명확성은 거대한 혁명 물결을 반영했다. 또한, 그것은 낡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내부 혁명적 좌파(이후 코뮤니스트 좌파로 자리매김했다.)의 투쟁과 공헌으로 준비된 결과였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의 고립과 관료주의 반혁명의 공세, 이에 맞선 코뮤니스트 좌파의 패배, 중국 상하이 및 관동에서의 노동자 봉기의 잔인한 진압으로 마무리되는 1927년의 혁명적 물결의 비극적 패배는, 전 세계에 걸친 노동계급의 장기간의 일련의 혁명과 패배의 시대를 종결했다. 코민테른의 혁명적 원칙은 반혁명 과정에서 변질되는데, 코민테른은 소속 당에 러시아 국가 방어를 요구했고,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전술로 후퇴하도록 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코민테른은 결국 코뮤니스트 좌파, 혁명운동 세력을 배제하고, 국제주의를 포기한다. 타락해가는 코민테른에 맞서 코뮤니스트 좌파들은 투쟁했으나 분리해 나왔고3), 독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 등장과 함께 반혁명의 시기가 열린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무게에 눌려 결국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패배한다. 반혁명 과정에서 수많은 코뮤니스트와 프롤레타리아트를 학살한 스탈린주의 범죄는 사실은 세계 부르주아계급과의 공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4)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은 국가가 주도하고 명령하는 특수한 형식을 취했고, 이것은 10월 혁명의 이행과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핑계로 민족경제의 재조직화로 나타났다. 이 과정은 그 후 중국, 동유럽, 쿠바, 북한 등에서 추진되었고, 이들 모든 국가는 사회주의적인 요소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계급적인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회주의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를 참칭하며 자본과 관료의 독재가 가장 쇠퇴한 형식으로 지배하고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이들의 이데올로기 모두는 자국 자본의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희생시키면서,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는 것에 사용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세계적인 혁명 물결이 패배한 후, 이른바 사회주의, 코뮤니즘(공산주의), 그리고 맑스주의라는 용어만큼 더 왜곡되고 남용된 사례는 없다. 과거 동유럽 스탈린주의 체제, 그리고 현재 중국, 쿠바, 북한과 같은 나라가 사회주의, 코뮤니즘과 연관되어 있다는 건 역사상 가장 큰 ‘거짓말’이다. 거짓의 핵심은 스탈린주의 국가가 ‘10월 혁명의 연속선상’ 에 있다는 것과 자신들의 체제가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되어 거짓이 진실인 듯 오랫동안 유지된다. 또한, 스탈린주의 정권이 아무리 타락하고 변질되었더라도 그것이 노동자 국가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동자 국가론자들도 거짓을 응원했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실제로 자본주의였지만, 왜곡된 형태의 자본주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다른 사회를 대표하는 거로 보였다. 스탈린주의 정권을 특징짓는 비참함, 결핍, 그리고 억압이 자본주의를 더욱 높은 형태의 사회로 바꿀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경쟁, 제한 없는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 이런 것이 인간 본성의 본질이라는 걸로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련과 동유럽 정권이 몰락했을 때 그 정권의 실패가 맑스주의 또는 코뮤니즘의 실패였다는 ‘거짓말’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코뮤니즘에 대한 오해와 반감(증오)은 더욱 커졌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거짓 선전은 노동계급 일반에 심각한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왔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식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투쟁을 정치화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역량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계속>

  • <주>

     

    3)  코민테른 내에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전투는 특히 노동자 운동의 가장 끔찍한 시기, 1920년대 말에 시작한 역사 속에서 가장 길고 가장 끔찍한 반혁명의 시기 동안 싸웠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반혁명의 상황 속에서, 노동자 운동의 강력한 쇠퇴기 속에서 코민테른의 좌파 혁명가는 잊지 못할 투쟁을 수행했다. 당과 코민테른을 바로 세우는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도 스탈린주의의 철권으로부터 그를 구하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이 투쟁은 기껏해야 최소화되고, 처음의 의견 불일치로 조직을 떠나거나 “상처뿐인 영광” 때문에 떠난 인자들에 의해 완전히 잊혀졌다. 이러한 태도는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이며 때로는 생명을 희생한 노동자와 혁명가 세대의 어려운 투쟁에 대한 소부르주아의 경멸을 나타내고 있다.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직면한 혁명가의 책임 >>, ICC (International Review, 1997, 4th Quarter)

  • 4) 혁명의 실패 이후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제도는 자본주의의 한 가지 변형일 뿐이었고 반혁명의 첨병이었다. 그 제도가 불과 몇 년 전 소비에트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맹렬히 싸운 세계 여러 나라의 부르주아계급으로부터 열렬한 지원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1934년에는 실제로 이와 같은 부르주아계급이 레닌이 설립 당시 ‘도적들의 소굴’로 묘사했던 국제연맹에 소련이 가입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것은 1917년의 볼셰비키를‘야만인'으로 보았던 세계 여러 나라의 지배계급이 스탈린을 ‘존경할만한’ 인물로 인정한 상징적인 일이 되었다.

     

    제국주의자들이 스탈린을 자신들 동료의 일원으로서 인정한 것이다. 그 후로 전 세계의 부르주아계급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사람은 바로 스탈린주의에 반대했던 수많은 코뮤니스트와 혁명가들이었다. 그것은 1917년 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트로츠키를 전 세계에서 추방자 신세로 만들었고, 수많은 코뮤니스트를 살해위협에 시달리게 했다. 트로츠키는 1929년 소련에서 추방되어 상시적인 경찰의 감시 아래 여러 나라로 쫓겨 다녔는데, 스탈린주의자들이 실행하고, 유럽과 미국의 부르주아계급이 은근히 즐겼던, 혁명가에 대한 가장 비열한 중상모략 캠페인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스탈린은 1936년부터 비열한 ‘모스크바 재판’을 계획했고, 고문에 의해 처참히 무너진 레닌의 옛 동료들은 가장 경멸할만한 수많은 범죄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 본보기로 가혹한 징벌을 스스로 요구했을 때, 부르주아계급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며 스탈린을 지지했다. 그리고 스탈린이 비인간적인 각종 범죄를 저지르며 강제 수용소에서 10만 명 이상의 코뮤니스트와 천만 명 이상의 노동자와 농민을 처형한 것은, 이와 같은 세계 부르주아계급과의 공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파산한 제도이다.>>, 이형로, (코뮤니스트 4호, 2014.4)

  • 2017.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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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2017 승리와 실패의 교훈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 1

1917~2017 승리와 실패의 교훈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

 

 

 2017년 가을,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은 우리는 ‘10월 혁명’이 준 자유와 평등의 실패한 '약속'을 달성시키기 위해 다시 혁명을 꿈꾸는 노동계급과 붉은 계절을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소수가 모였다. 지난겨울 촛불은 거대하게 타올랐지만, 어디에도 혁명의 불씨는 보이지 않았다.

1919년 3월 2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1차 회의 개회에서 레닌은 “소비에트 체제는 많은 나라에서 일상어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노동자 투쟁에서 아주 흔한 형태”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 노동자들에게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는 낯선 용어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접한 세대에게는 전체주의(스탈린주의) 체제를 상징하는 용어로 잘못 각인되어 있다. 1917년~23년까지의 세대에게 너무나 익숙했던 소비에트가 지금 세대에게는 아주 낯설거나 본래 의미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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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지워진 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은 노동계급에 세계혁명의 길고 험난한 과정을 깨우치게 했다. 반면에 지배계급에는 혁명의 위협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했고, 혁명을 억누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게 했다. 1917~1921년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패배한 이후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을 학살하며 직접 공격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파시즘과 반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길고 깊은 계급투쟁의 암흑기1)이다.

이후 1945~1989년 미-소 제국주의 블록의 냉전 시대에는 서로 간의 대립과 경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왜곡하고 음해했다. 동유럽에서는 러시아 자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탈린주의 국가를 10월 혁명의 연속선상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왜곡’했고, 서구권에서는 ‘소비에트 전체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면서 제국주의 간 대립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소련의 붕괴가 ‘공산주의의 사망’, ‘맑스주의의 파산’ 심지어는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을 의미한다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인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로 혁명운동은 강력한 타격을 받는다. 그리고 지금은 지배계급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된 노동계급 내부의 억제력으로 혁명의 불씨는 물론 일상적인 계급투쟁까지 잠재우고 있다.

 

‘공산주의(코뮤니즘)의 붕괴’에서 포퓰리즘의 등장까지 지난 수십 년간, 아직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좋게 봐도 세상과 관계없는 괴짜, 멸종 위기에 처한 희소 동물로 비치고 있다. 현재 노동계급의 다수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대해 대부분 잊었고, 혁명 전통의 일부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망각 과정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그 이전보다 생산 수단에서뿐만 아니라 소비의 대상에 이르기까지 더욱 ‘새로운 것’에 의존한다. 무엇이 ‘구식인가’, 무엇이 진정한 역사적 경험인가에 대한 왜곡은 노동계급에 기억상실을 유발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의존은 소비뿐 아니라 노동계급 혁명의 기억도 구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교훈까지 잊게 하는 데 유용했다. 이렇게 노동계급은 미래의 투쟁에 적용할 진정한 교훈까지 버리면서 자신의 혁명적 전통을 망각할 위험에 처해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여전히 인류의 미래와 함께하는 계급이며, 과거 투쟁에서 교훈을 끌어내 공산주의(코뮤니즘)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시킬 역량을 가진 유일한 계급이다. 따라서 역사적 과거에 대한 교훈을 찾고 혁명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지워진 혁명의 기억을 되살릴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현재 위기를 돌파해 낼 첫걸음이다.

 

 

문재인 정부와 정권교체 환상의 대가

 

지배계급은 자신에 불리한 혁명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지배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거짓 환상을 퍼트린다. 특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승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에는 ‘(시민)혁명’이라는 단어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회주의/공산주의(독재)에 대한 승리, 계급 간 분열을 넘어선 부르주아 국가-시민사회의 승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연인원 1,700만 명이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혁명과는 거리가 먼 촛불투쟁을 현 정부에서 먼저 ‘촛불혁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상과 일터 어디에서도 혁명을 하지 않았는데, 촛불혁명의 수혜자들은 가만히 새 정부의 적폐청산 쇼를 지켜보며 기다리라고 강요한다.

한편 촛불투쟁 내내 노동자의 요구는 ‘정권교체’ 환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촛불투쟁의 근본 원인인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사회에 대한 불만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분출하지 못했다. 촛불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저항의 수준은 낮아지고 분출의 힘은 통제당했다. 촛불투쟁 이후에도 주류 노동자 운동은 근본적인 반성과 쇄신보다는 ‘정권교체-적폐청산’ 환상에 기대어 ‘노조하기 좋은 나라’라는 ‘국가적’ 캠페인에 나선다. 촛불투쟁 기간 작지만 정권교체 환상을 지속해서 비판한 세력이 있었고, 촛불투쟁과는 다르게 소수의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계급의 현안으로 공동투쟁을 벌여나갔지만, 노동자운동 내부의 거대한 대중추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아래와 같은 현실은 거짓 환상을 막지 못한 대가를 치르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 정권이 바뀌었어도 노동자 현실은 그대로이고, '노동존중'을 내건 문재인 정부에서도 농성장 폭력 철거, 폭력 진압, 불법연행 등 노동자 민중 탄압이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18일 청와대 100m 앞에서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이 속한 투쟁사업장공동투쟁위원회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여전히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전국 곳곳 노동자들은 다시 고공농성에 오르고 있다’며 ‘정치 권력이 바뀌었어도 노동자 현실은 그대로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검찰, 경찰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를 규탄하기 위해 결의대회를 열었다’는 취지를 밝혔다.

공동투쟁위원회 김혜진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노동존중이 실현되려면 박근혜 정부 때 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이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며 “그런데 문재인 정부 경찰은 지난 8월 농성장을 폭력 철거하고, 2명을 불법 연행했다. 기자회견도 집회라며 출석요구서를 남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참세상, 11.18>

“국방부가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기지에 공사 장비를 반입했다. 경찰은 공사 장비 반입을 반대하던 주민과 연대단체 회원을 강제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주민 20여 명이 다치고, 1명이 연행됐다.” <뉴스민, 11.21>

 

- 촛불투쟁의 성과물을 전취한 문재인 정부에 입성한 노동운동 출신 명망가의 '사회적 대화' 참여 주장 : '노조'를 국가기구로 통합시키겠다는 의도와 이를 벗어난 ‘계급적’ 투쟁은 고립될 것이라는 협박

 

“지난 10일 정부서울청사 노사정위원장실에서 만난 문성현은 ‘산적한 노동현안을 풀기 위해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새로운 사회적 대화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며 생각이 달라도 함께 논의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숙의 민주주의’가 노동에서도 실현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최저임금 문제는 사용자나 정부만 바라볼 게 아니라 노동운동이 연대정신을 발휘해 풀어야 한다.’며 SK이노베이션 노조가 기본급 일부를 갹출해 협력업체 지원 등 상생기금에 출연하기로 한 사례에 주목했다.

노동을 존중하는 대통령이 나왔으니 내 모든 걸 던져 풀어보고 싶다. 노조가 광장으로 나와 합리적 토론을 거쳐 국민들이 바라는 것을 하나라도 풀어나가 봤으면 한다.” <경향신문, 11.17>

 

민주노총 선거에서 ‘사회적 대화’가 쟁점이 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선거 공약과는 별개로 사회적 합의주의로 이어지는 ‘사회적 대화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거부 흐름’이 ‘정권교체-적폐청산-노동존중/노조하기 좋은 나라’ 환상에 가려 사라지고 있는 현실.

 

“민주노총 2기 임원직선제가 한창이다.

선거 쟁점과 관련해 ‘사회적 대화’가 부상했다. 지난 1기 직선제에서 한상균 후보는 ‘민주노총을 투쟁사령부 체계로 재정비하고 즉각적인 총파업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1기 직선제 쟁점은 박근혜 정부에 맞선 ‘총파업’으로 모아졌다. 반면 2기 직선제에 나선 4개 후보조는 출마의 변으로 ‘사회적 대화’를 강조해 1기 직선제의 쟁점과 차별화했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 사회를 이루겠다고 공약했다. 민주노총 선거 쟁점도 이를 반영한 셈이다.“ <매일노동뉴스, 11.17>

 

이러한 현실은 100년도 아닌 불과 10~20년 전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교훈을 잊은 노동자 운동이 같은 성격의 자본가 정부에 전면적으로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며, 앞으로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 당시보다 훨씬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혁명적 소수의 문제

 

올해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자 세계혁명의 미래’를 꿈꾸게 했던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날의 계급투쟁과 러시아혁명의 교훈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혁명적 상황과 무관한 지금의 노동자투쟁은 러시아혁명의 엄청난 경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더욱이 지금은 러시아혁명과 같이 혁명적 투쟁이 분출하는 시기가 아니라서, 그런 대중행동을 예측할 수도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없다. 하지만 모든 정세에서 일관된 목표를 갖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혁명적 소수’의 문제는 러시아혁명의 교훈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이다.

1905년 자발적으로 출현한 소비에트를 촉진시켰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도 혁명적 소수의 역할이었고, 1917년 소비에트를 다시 등장하게 만든 것도, 부르주아의 도발과 함정에 맞서 참을성 있게 대중을 설득하고 계급의 원칙을 고수하며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한 것도 혁명적이고 계급적인 소수였기 때문이다.

 

혁명적 소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최종목표와 혁명의 전망을 갖게 된 인자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부터 나오고 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기 때문에 ‘계급의 일부’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계급의 소수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투쟁에서 계급적 소수파도 운동의 최종목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계급투쟁에 원칙적이며 가장 활성화된 부분을 차지한다. 계급투쟁의 확산과 계급의식의 발전은 바로 이들이 얼마나 계급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상승시키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이들이 대중행동을 대신할 수 없고, 정세와 무관하게 대중의식을 고양할 수는 없다. 따라서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소수가 계급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투쟁이 일어나기까지 끊임없이 투쟁을 자극하고 전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오랜만에 분출된 투쟁은 우리 희망과는 다르게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좌절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수파 운동의 존재이유며, 단순히 소수라서 항상 다수를 추종하고 계급투쟁의 최종 승리보다 다수파가 되기 위한 운동은 혁명적 소수의 운동이 아니다.2)

지금의 암울한 현실에서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끌어내면서 혁명적 소수의 복원에 중점을 두는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계속>

 

<주>

 

1)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의 말에 따르면, 1930년대는 "그 세기의 자정"이었다. 혁명 물결의 마지막 파고- 1926년 베를린에서의 총파업, 1927년 상하이봉기-는 이미 소멸하고 말았다. 공산당들은 민족수호의 정당이 되어 버렸고,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적 테러는 혁명운동이 최고점에 도달했었던 나라들에서 가장 극심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전체가 또 다른 제국주의적 대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되는 고립에 직면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투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2) "계급에 대한 당의 궁극적 목표는 계급을 혁명적 의식으로 무장시키고, 그들이 다수가 되어, 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혁명을 만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상시기(계급의식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못하고 균질화되어 있지 못했을 때) 당의 역할은, 이러한 상태의 계급안에서 다수를 획득하거나 국면적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수가 되더라도 혁명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은 계급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당장의 인기와 계급 대중의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판단하여 “미래에 계급이 얼마나 혁명적으로 변화되었나”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계급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것도 혁명적 정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일상시기 또는 침체기에 혼란스러워하는 다수의 계급의식과 타협하는 영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수에 대한 영향력을 잃더라도, 혼란에 대해 단호하게 단절하도록 밀어붙이는 것이 노동계급에 진정으로 공헌하는 길이다. 혁명조직이 노동계급에 근거하고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끈기 있는 인내만이 아니라, 오히려 조직의 모든 활동의 방향이 진정으로 노동계급을 변화시키고, 계급적 단결을 도모하고, 코뮤니스트 혁명에 실질적인 공헌을 하는 것에 있다." <<사노위 실패의 교훈과 혁명당 건설 투쟁의 연속성>>, 이형로, (마르크스21 제11호, 2011.9)

 

 

20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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