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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독일 혁명과 코뮤니스트좌파

  • 독일 혁명과 코뮤니스트좌파

    남궁 원

     

     <편집자 주> 이 글은 독일혁명(1918-1923) 100주년 맞아 교훈을 얻고자 남궁원 동지가 [코뮤니스트 창간호]에 발표한 글을 보완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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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식 - 세계혁명 분기점, 독일 혁명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세계혁명으로 발전하느냐는 서유럽, 특히 독일 혁명(1918-1923)에 달려있었다. 특히 레닌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수행하면서,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를 돕지 않는다면, 러시아의‘일국사회주의’는 성공할 수 없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독일 프롤레타리아 혁명 패배 이후 스탈린과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은 ‘일국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밀어붙였다.

     

    독일 혁명을 둘러싸고, 레닌과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 계열은 심각한 대립을 빚고 있었다. 레닌은 1920년 코뮤니스트인터내셔널 (이하 코민테른) 제2차 대회 소집에 맞춰,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Left-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 팸플릿을 작성하면서 독일 급진 좌파를 비판한 바 있다. 이 문건은 레닌이 각국의 노동운동 및 코뮤니스트 운동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좌익 편향을 비판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레닌이 지칭한 좌익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독일 공산당 내의 급진좌파였기 때문이다. 레닌이 볼 때 노조와 의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직 후진 노동자를 그들의 반동적 리더의 영향 아래 남겨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레닌의 이 문건은 볼셰비키의 경험을 혁명의‘보편적 모델’로 일반화한 것이며, 즉각적으로 전 세계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략, 전술의 방침이 되었다.

     

    이에 독일 급진 좌파를 대표하는 안톤 판네쿡과 헤르만 호르터는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레닌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작성하면서, ‘러시아 혁명을 모방하고, 노조와 의회 활동’을 권고하는 레닌에 강력히 반대한다. 판네쿡과 호르터는 러시아와 서유럽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의회와 노조 참여를 통해 계급의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레닌의 강조에 반대한다. 이들은 평의회, 공장조직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의식을 형성하는 좌익공산주의 전술을 거듭 주장한다. 또한,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일한 종류의 기회주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차르의 후진 러시아와 선진 서유럽 상황에서 혁명의 전략과 전술이 과연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또한, 독일 혁명을 둘러싸고, 좌익공산주의 정치조직 흐름인 스파르타쿠스단(Spartakus Bund), 독일코뮤니스트당(KPD),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대립은 무엇이었고, 코뮤니스트좌파 계열은 어떠한 혁명관과 조직관을 갖고 활동했는가? 독일 혁명 과정에서 코민테른 지도부와 코뮤니스트좌파 사이의 논쟁은 무엇이었나? 이 글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흐름을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로자 룩셈부르크, 헤르만 호르터, 안톤 판네쿡, 오토 룰레, 칼 코르쉬, 폴 매틱 등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의 자세한 이론적 쟁점은 생략한다.

     

     

    평의회를 둘러싼 논쟁과 분화: 독일코뮤니스트당 창당

     

     당시 독일의 주요 정치세력은 사민당과 독립사민당, 스파르타쿠스단, 브레멘 좌파라고 할 수 있다. 사민당과 독립사민당의 연립정부 구성이란 안정 속에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국민의회 소집을 뜻한다. 여기서 레테(평의회)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 혁명 발발 직후 카우츠키가 이끄는 독립사민당 지도부는 레테(평의회)체제냐 국민의회체제냐 사이에서, ‘국민의회와 레테체제’ 입장을 취한다. 국민의회 소집은 곧 부르주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뜻한다. 1918년 12월에 열린 노동자병사 레테(평의회) 전국총회는 국민의회 결정을 내린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민당 내에서 패배하고 당을 혁명적으로 개혁하는 데에 한계를 느낀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민당을 탈퇴한다. 현장을 중심으로 공격적인 평의회 활동을 전개한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그룹은 급진좌파의 통합을 요구받고 있었다. IKD그룹의 제안으로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적 노조그룹과 통합 대신에 IKD그룹과 함께 1918년 12월30일 독일코뮤니스트당을 창당한다.

     

    독일코뮤니스트의 강령은 노동계급의 규칙을 확립하고 생산의 사회화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밟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일련의 실천적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첫째, 경찰과 군 간부의 무장해제, 노동자평의회에 의한 모든 무기와 화약의 접수, 노동자 군대의 창설.

    둘째, 군대 통솔구조의 해소, 군사평의회의 일반화.

    셋째, 혁명 법정의 창설.

    넷째, 전국의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에 의해 선출된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 중앙의 회 설립, 모든 옛 시의회 및 국회의 해산.

    다섯째, 6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

    여섯째, 모든 인민의 의식주를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의 몰수.

    일곱째, 토지, 은행, 광산, 그리고 주요 산업 및 상점 기업의 몰수.

    여덟째, 공장과 기타 작업장의 관리를 과업으로 하는 기업평의회 건설이다.

     

    그러나 독일코뮤니스트당은 창당 직후 내부논쟁에 휩싸였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일코뮤니스트당이 국민의회 선거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말로만 투쟁하는 것은 아니라, 국민의회에 들어가 부르주아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이에 대해 급진좌파 대표로 나온 오토룰레(Otto Rühle)는 국민의회 연단 대신에 거리연단에서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혁명세력은 14일 이내에 곧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낙관적인 혁명 전략을 피력했다. 국민의회를 둘러싼 당 대회의 격렬한 논란 끝에 62:23으로 선거불참이 결정됐다. 이 결정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와 노동자평의회에 대한 판단 차이가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의회선거 참여를 주장한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단의 한계가 나타난 것이다. 창당대회 당 조직 문제는 중앙집권적 방식이 아니라 연방제적 원칙을 결정했다.

     

    이후 독일코뮤니스트당은 베를린 1월 봉기, 루르 광산지역, 중부지역 노동자총파업과 사회화운동 등 혁명을 진전시키려는 시도를 감행하다 정부군에 의해 무력진압 되었다. 독일 노동계급 내에서, 특히 루르지방과 브레멘에서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당원은 20만 명이나 되었다. 1920년 초 우익의 카프반란이 시도되었을 때, 코뮤니스트좌파 활동가는 루르지방을 단시간에 점령한 적군 사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1월 봉기 기간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암살되고, 이후 독일코뮤니스트당의 조직세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새로운 당 지도부는 당내 급진좌파를 겨냥한 내부투쟁에 돌입한다. 독일코뮤니스트당은 2차 전당대회에 ‘코뮤니즘의 근본원칙과 전술에 관한 기본원칙’을 채택하면서 독일코뮤니스트당을 혁명투쟁의 지도자로 규정하고, 당의 볼셰비키적 중앙집권적 조직형태를 결정한다. 이른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볼셰비키화’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활동방침을 지지한다. 독일코뮤니스트당과 노동조합은 의회주의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틀 내에서의 계급투쟁에 적합한 노동운동의 조직형태로 자리매김 된다.

     

     

     

    코민테른 지도부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대립 :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판네쿡뿐만 아니라 유럽 코뮤니스트 운동의 좌파들은 대부분 열렬한 레닌주의자였고,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원자였다. 그런데 그들은 볼셰비키의 강점을 조직구조에서 보지 않고 공격적 전투성과 맑스주의 원칙의 확고한 헌신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15년 찜머발트 좌파에서 드러난 레닌과 판네쿡의 차이는 한 마디로 국제주의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3월 코민테른이 결성되고 서유럽의 공격적 맑스주의자들은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만든다. 판네쿡과 네덜란드, 브레멘(독일) 좌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에 열광적 주창자였지만,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승리로 인해 코민테른은 러시아 주도하에 결성되었다고 보았다.

     

    1920년 2월 3-6일 암스테르담 국제대회에서는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서유럽 인터내셔널로서의 역할로 규정하고 의회주의,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분명한 비판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조직으로서 노동자평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코민테른 지도부와 네덜란드 좌파 사이의 전망 차이의 첫 번째 표시였다. 암스테르담 서기국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입장을 채택했고, 1920년 4월 30일 모스크바 지도부는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폐쇄하고 베를린 서기에게 할당했다고 방송했다.

     

    1919년 말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를 이유로 독일코뮤니스트당으로부터 축출된, 판네쿡, 호르터, 오토 룰레 등 독일‘코뮤니스트좌파는 (투쟁 정신과 영향력에서 자신들의 ‘관료적’ 경쟁자를 순식간에 넘어선) 새로운 당,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을 결성했다. 당시 당원은 4만 명이었다.

     

    KAPD 강령을 검토하면 맑스주의의 명료성을 볼 수 있다.

    첫째, 무정부주의에 반대하면서, 강령은 세계자본주의의 객관적인 역사적 환경에 기초하고 있다.

    둘째, 러시아혁명과의 연대와 세계적 확장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셋째,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반대는 도덕주의와 형식에의 집착이 아니라 의회와 노조가 계급의식에 봉사하는 조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넷째, 공장조직과 노동자평의회의 주창은 소수의 혁명가가 꿈꾸는 가공적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계급 운동의 구체적 조직적 표현이다.

    다섯째, 반(反)당의 입장과 달리, 코뮤니스트 투쟁의 핵으로서 당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여섯째, 강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맑스주의 개념을 방어하고 있다.

     

    1920년 4월 KAPD의 창립은 코뮤니스트좌파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 단계를 가져왔다. KAPD는 레닌주의 전술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의 존재이유에 대해 존중했으며, 창립 후 KAPD는 야펠(Appel)이 이끄는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 코민테른에 당 가입을 협상하고자 했다. 5월 초 도착한 대표단을 레닌이 마중 나왔다. 대표단-코민테른 집행부의 회합 후, 지노비에프는 KAPD 구성원에게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4가지 조건을 담은 공개서한을 건넨다. (울프하임, 라우펜베르그, 오토 룰레 즉각 제명, 2차 대회 결정의 무조건적 복종, 독일코뮤니스트당과 재통합을 위한 화해위원회 설치, KAPD가 2차 대회에 참가할 것). 야펠 대표단이 독일로 돌아갔지만, 오토 룰레의 2차 KAPD 대표단은 1차 대표단의 토론 내용과 지노비에프의 서한을 읽을 기회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오토룰레는 레닌과 코민테른의 다른 지도자들과 오랜 토론 끝에, 2차 대회 개회 전날 밤 7월 18일 극적인 성명발표를 한다. KAPD는 회의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

     

    KAPD가 2차 대회에 불참하였지만, 대회에서 코뮤니스트좌파가 제기한 주요 쟁점들이 대두되었다. 대표자들에게 논쟁의 배경 설명을 위해 판네쿡과 레닌의 글이 배포되었다. 이는 코민테른에 의해 외국 반대파의 저작이 배포되었던 마지막 경우였다. 가장 극적인 대립은 보르디가가 좌파의 반-의회주의 관점을 재확인하는 테제를 제시했을 때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와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도 인터내셔널에 대한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동구에서 볼셰비키의 경험은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 마지막에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2차 대회 직후 KAPD내에는 제3 인터내셔널과의 장래 관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오토 룰레가 취했던 소수 입장은 코민테른과의 어떠한 협력도 거부하는 것이었지만, 오토 룰레는 2차 대회에서 돌연한 이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받았다. KAPD 다수의 감정은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려고 했다고 자신의 의도를 발표했던 호르터가 대변했다. 호르터는 코민테른 전략의 오류에 대해 레닌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면서, KAPD 지도자들과 함께 코민테른 집행부와 토론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레닌은 개인적으로 호르터를 만났지만, 그의 설득, 충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는 보다 직선적으로, 서유럽 혁명개념에 대한 호르터의 방어에 대해 아이러니한 경멸을 가지고 반응했다. 이 같은 대화의 결과는, KAPD를 독일코뮤니스트당과 재통합을 추진한다는 조건 아래, 협의적인 지위를 갖는 “동조자 당”으로 KAPD를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같은 조정이 많은 단서조항을 가지고 있었지만, KAPD는 제3 인터내셔널 내에 혁명적 반대파를 형성할 수 있다는 기대 하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KAPD는 1921년 5월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기 위한 과업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것은 야펠(Appel), 슈바브(Schwab), 몌이에르(Meyer)로 구성된 또 다른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보내고, 다가오는 3차 대회에 참가하는 대표단 가운데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다수 국가의 좌파경향의 대표단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KAPD는 대회에서 응집된 반대파 분파를 조직할 수 없었다. 이때 코민테른 집행부는 KAPD에 KPD와 통합, 아니면 제명이라는 양자택일의 최후통첩을 보냈고, KAPD는 즉각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9월 공식적으로 코민테른에서 방출된다.

    호르터는 독일노동자총연합(AAUD)과 함께 본격적인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전개한다. 호르터는 당의 주요 목표는“평의회 사고”를 선전하고, 평의회가 나타나면 당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호르터가 러시아와 서유럽의 정치 경제적 차이를 강조한다면, 판네쿡은 러시아와 달리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사고에 미친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영향이 크다고 판단한다. 반면 레닌이 쓴 <좌익공산주의 : 유아적무질서 (좌익소아병은 잘못된 번역)>에서는 이 부분(러시아와 유럽 차이에 대한 좌익공산주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보편성만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 3월 판네쿡은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을 좌익공산주의의 교과서로 제출했다. 판네쿡은 여기서“의회의 활동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으로 분할되고, 진정한 국제주의적 개입이 불가능해지며 국제자본에 대항하는 대중 행동에 있어서 민족분할로 나아간다.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조합은 이전의 부르주아 국가와 같이 동일한 발전 경향을 갖는 거대한 단체가 되었다. 그들 속에는 관료 계급이 생기고, 그 관료주의는 자금, 언론, 경영 등 모든 조직의 자원을 통제한다. 혁명당의 기능은 앞장서서 명확한 이해를 선전하고 대중이 올바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계획, 슬로건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판네쿡은 또한 서유럽의 전술선택이 생디칼리즘과는 다른 것이라고 차별화했다. 즉 생디칼리즘의 목적은 조합관료주의와 옛날 국가기구의 급진 부분에 기반을 둔 정부를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국가를 존속시키게 하며, 자본주의 지배의 물질적, 정신적 요소를 구별 못 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레닌의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라는 전술의 방어는 국민국가로서의 소련의 역할과 코민테른의 역사적 사명 사이의 모순에 있다고 보고 결국 소련이 서유럽정치에 개입하는 도구로 코민테른을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판네쿡과 호르터는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레닌의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 이념적 몰입, 공장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통제를 생산력 증진이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의 도구로만 협소하게 이해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노동조합을 국가 행정기구에 통합시킴으로써 혁명 후 혁명 사회의 기초기관으로 자리 잡아야 할 노동자통제는 당과 국가에 의해 억압되어 소멸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는 대량생산체제와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레닌의 집착이 불러온 필연적 결과로 파악했다.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착수했다. 판네쿡은 처음 러시아 코뮤니즘이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련은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조건은 (크론슈타트 반란처럼)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1921년 7월 판네쿡은 두 달 전에 진단한 바가 현실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관료주의적 엘리트 지배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 아니라, 생산체제에 대한 자본가 지배에서 당 독재로 그 정부가 변화하였을 뿐 자본가는 노동자 통제에 의해 단지 제약되고 있을 뿐인 상태라는 것이다. 판네쿡은 이 같은 변화가 부분적으로는 러시아에 침투한 서유럽 자본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전 과정은 서유럽과의 화해를 향한 소비에트 대외 정책의 변모와 그 정책의 코민테른 전술로의 확장에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지도부의 관점에서 볼 때,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는 소비에트 경제의 재구축을 위협할 수 있는 파괴,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코민테른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과거 운동의 통제를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서유럽 노동자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의 주요 임무가 그들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대신 자본주의 경제를 재형성하는 것을 도와 소련을 방어하는 것에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적대감은 코민테른으로부터 KAPD가 축출된 이후 보다 많이 나타났다. 1921년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판네쿡은 러시아 코뮤니스트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뮤니스트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판네쿡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가 최근 배운 것을 잊어버려할 필요성이 지금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한편, 러시아를 방문한 오토 룰레는 소련 사회가“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소련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이후 “노동자평의회 외에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기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평의회주의자로 흘렀다.

     

    오토 룰레는 당과 독일노동자총연합의 단일조직을 주장하면서 독일노동자총연합-단일조직 (AAUD-E)를 창설한다. 오토 륄레는 일반노조로 재조직된 혁명적인 공장조직이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며, 혁명적 평의회와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를 주장1)하였다.

    1920년 이후 독일 코뮤니스트좌파들은 이후 마침내 볼셰비키와 관계를 끊었다. 유럽 내에서, 1923년 이후 계급 갈등의 상대적 안정화는 코뮤니스트좌파 경향 추종자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고립되면서, 남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들은 그들의 정치적 관점을 천천히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정립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 역할 테제 (축약)

     

    KAPD(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당 역할 테제는 1921년 7월에 작성됐으며, KAPD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안에서도 토론되었다.

     

    1.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과제는 지구적 부(富)처분을 노동 대중의 손에 넣게 하는 것이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따라서 독립된 착취, 지배계급의 존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정치 권력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사회 경제의 자유로움을 포함하며, 또한 세계적 수준에서 제기하는 과제다.

     

    2. 자본주의 생산 양식을 종식하고, 이 생산을 인수해서 노동계급의 수중에 넣고, (부르주아) 정치 제도들을 분쇄하고, 계급 분할을 모두 없애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개별적 순간들을 정확히 예견할 수 없는 역사적 과정이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역사적 과정에서 정치 폭력의 역할이 취하는 행동은 여전히 어떤 순간에서는 결정적이다.

     

    3.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동시에 정치 경제적 과정이다. 정치 경제적 과정도 아닌 것은 일국적 수준에서 풀 수도 있으나, 세계 코뮨 건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의 권력을 최종적으로 파괴할 때까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한 지역은, 가능한 반(反)혁명의 정치 폭력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여전히 정치폭력을 필요로 한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한 부분을 위해서 정치 폭력의 필요성을 만드는 이러한 근거들은, 혁명의 내부 발달과 관련해서 추가적인 이유가 있다. 정치적 과정에서 바라보는 혁명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확실히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경제적 과정에서 바라보는 혁명은 앞서 언급한 결정적 순간이 없고, 프롤레타리아트 일부분이 경제 방향을 떠맡고, 이윤 동기를 없애고, 필요의 경제로 대체하는 오랜 작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확실한데, 이 기간에 부르주아지는 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윤을 방어할 목적으로 권력을 다시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발전된 민주적 이데올로기 국가들은 - 다시 말해, 발전된 산업 국가들- 민주적 슬로건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잘못 이끌기 위한 방안을 찾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강력하고 확고한 정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본질적인데, 이 기간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5. 혁명의 정치적 승리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 권력을 유지할 필요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6. 정치적 노동자 평의회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권력과 행정부의 모든 형태를 수용하는 역사적 결정이다. 항상 노동자 평의회는 계급투쟁의 개별적 요소를 통과하면서 완벽한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7. 가장 의식적이고 준비된 프롤레타리아 투사로 함께 분류되는 역사적으로 확고한 조직 형태는 당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과제는 코뮤니즘이기 때문에, 이 당은 자신의 강령과 이데올로기로서만 코뮤니스트 당이 가능하다. 코뮤니스트 당은 강령적 기초를 철저하게 해결해야 하며, 통일된 의지로서, 전체적으로 아래로부터 조직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은) 혁명의 머리와 무기가 되어야 한다.

     

    8. 코뮤니스트 당의 주요 과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혼란과 변동 사이에서, 코뮤니스트 당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 모든 상황들에서 대중에게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권력 장악 이전 정치투쟁의 모든 이슈들에서, 개량과 혁명 사이에 차이들을 명확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적 개량주의 - 어떤 가면을 쓰고 선택하든지 - 는 오늘날 혁명에 큰 장애물이며, 지배계급의 마지막 희망이다.

     

    9. 따라서 코뮤니스트 당은 자신의 강령에서, 언론에서, 전술과 활동에서, 동일한 결정으로 개량주의와 기회주의 모든 현상에 가차 없이 반대해야 한다.

     

    10. 전체뿐만 아니라 개별적 순간에서도 혁명은 변증법적 과정이다. 혁명 과정에서 대중들은 불가피하게 동요를 겪는다. 가장 의식 있는 요소들로 구성된 조직인 코뮤니스트 당은 이러한 동요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자신들의 슬로건을 명확하고 원칙적인 본질을 통해서, 말과 행동의 통일, 투쟁의 책임자라는 위치에서, 예측의 올바름을 통해서, 코뮤니스트 당은 프롤레타리아가 각각의 동요를 빠르고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의 전체 활동을 통해서, 심지어 대중의 반대하는 순간적인 비용을 치르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발달시켜야 한다. 혁명적 투쟁 과정에서, 오직 이러한 의지를 가진 당이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광범위한 사람들의 혁명적 교육을 달성할 수 있다.

     

    11. 코뮤니스트 당은 대중과 접촉을 잃어서는 당연히 안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칠 줄 모르는 선전의 명백한 의무는 제쳐놓더라도, 경제적 필요로 야기되는 노동자 운동의 개입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은, 당이라는 이름하에 개량주의적 요구가 떠오르는 기회주의 정신을 강화해서는 안 된다.

     

    15. 혁명의 정치 승리 이후 당의 역할은 국제 상황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발달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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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강령2) (*공장조직과 정치조직 부분)

     

    공장조직은 KAPD와 긴밀히 결합하여 그 임무를 수행한다.

     

    정치조직은 당 강령의 기초위에서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요소와 함께할 임무가 있다.

     

    · 공장조직과 당의 관계는 공장조직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이 조직 내에서 KAPD의 일은 투쟁의 기치를 밀고 나갈 뿐만 아니라 지치지 않는 선전을 하는 것이다. 공장에서 혁명 간부는 당의 움직이는 무기가 된다. 나아가 당은 항상 더욱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게 하고 밑으로부터의 독재에 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임무의 둘레가 더 커지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지원이 요구된다. 달성해야 하는 것은 승리(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권력 장악)가 계급독재로 끝나고 소수의 당 지도자나 정파의 독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장조직은 이의 보증자이다.

     

    ·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 권력 장악의 단계는 자본주의 부르주아 운동에 대한 가장 견결한 억압을 요구한다. 그것은 정치적-경제적 권력의 총체를 행사하는 평의회조직을 만듦으로써 성취될 것이다. 이 단계에서 공장조직은 공장을 통해 수행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요소가 된다. 이는 더 나아가 평의회 경제체제의 기초단위로 변혁되는 임무가 있다.

     

    · 공장조직은 코뮤니스트 공동체(Gemeinwesen) 건설의 경제적 조건이다. 코뮤니스트 공동체조직의 정치형식은 평의회 체제이다. 공장조직이 개입함으로써 정치 권력은 평의회 지도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 이처럼 KAPD는 최대 혁명 강령의 실천을 위해 투쟁하고 다음에 포함된 구체적 요구를 위해 투쟁한다.

     

    정리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주>

     

    1) KAPD가 평의회를 선전하는 것은 내용 없고 선동적인 미사여구였다. 왜냐하면 KAPD는 당이었으며, 당은 관료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의 구호인 “ 정치적 노동자평의회를 선출하라!”는 구호 역시 선동적인 속임수이다.

    이 구호의 이면에는 난파한 당에서 사라지는 관료의 권력을 허구적인 평의회의 구명보트라는 안전지대로 옮겨, 관료제의 축복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한 시도 외에는 다른 것이 숨어 있지 않다.

    평의회는 공장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당의 성격을 완전히 극복한 그리고 당에 대한 종속을 벗어던지고, 가능한 평의회 체제를 만들어나가면서 구체화하는 조직에 의해서만 준비될 수 있다.

    오늘 날에 이러한 조직은 단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공장조직, 노동자 총연맹이 그것이다. <평 의 회 - 오토룰레> 중에서

    2) 1920년 5월에 채택한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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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삼성공화국-최고 권력과 싸우는 투사들 : 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상수 동지 인터뷰

삼성공화국-최고 권력과 싸우는 투사들 :

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상수 동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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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재용과 박근혜 재판 판결은 한국 사회가 "삼성 공화국"임을 증명했습니다. 삼성 권력이 사법 판결도 좌우하는데, 이렇게 거대한 권력에 맞서 직접 싸워오신 주체로써 느끼는 현실은 어떠신지요?

A. 법리적으로는 이재용을 집행유예로 풀어주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법률가들의 전망이 있기도 했지만, 전임 양승태 대법관이 퇴임 직전 급조한 항소심 재판부에 배당된 점, 항소심 재판부와 이재용 변호인과의 특수관계, 이재용을 옹호하는 언론의 총공세 등 선고가 다가올수록 불안한 상황이긴 했습니다. 무엇보다 촛불 항쟁의 열기가 거리에서는 사라진 상황이었고, 시민사회가 대응하는 힘도 조금 줄었었고요.

삼성은 정말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작업환경측정결과를 공개하라는 법원의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국민권익위원회, 산자부 등 국가기관과 언론을 총동원해서 보고서 공개를 막고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이 싸움은 작은 성과들을 쌓아오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대 덕분입니다.

 

고황유미님의 아버지 황상기님이 싸움을 시작한 지 11년이 넘었습니다. 혼자서 외롭게 고군부투하시던 당시 얘기를 지금도 아버님이 종종 얘기하시곤 하는데요. 그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러저러하게 인연이 닿아 도움을 주신 분들, 연대를 아끼지 않는 분들 덕분에 싸움을 이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삼성의 거대한 권력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싸움을 시작할 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힘과 끈기로 삼성과 잘 싸워왔다고 생각합니다. 삼성은 강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싸우면 결국 변화는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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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근 폭로된 노조파괴 문건으로 이재용 부회장을 다시 구속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는데, 막대한 권력을 가진 삼성이 노조파괴까지 하면서 반노동자적, 반인권적 경영을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 삼성이 지금까지 성공해 온 이유, 발 딛고 서 있는 토대 자체가 불의와 불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해 온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과급 등으로 많이 부풀려져 있지만, 사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전자업계는 임금수준과 복지, 과도한 노동 등의 노동조건이 천문학적인 이익을 내고, 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산업과는 거리가 있는 편입니다. 사실, 엄청난 속도로 일본과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자리 잡는 과정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강도의 착취와 노동자 통제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소리소문없이 대규모 해고를 일상적으로 자행하기 때문에 삼성에 40대 중반 이후의 노동자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불법파견으로 고용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노조가 없어서 이런 사실들은 다른 기업들에 비해 잘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삼성전자가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전자산업계 전반에 무노조경영이 일반적이기도 합니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불법 비자금을 폭로했을 때 드러난 바 있듯이, 삼성이 총수 일가를 위해 저지르는 불법은 일상적이고 규모도 엄청납니다. 이런 불법적이고 불의한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노동조합 같은 내부감시자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삼성에게는 매우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삼성이 가진 거대한 권력 자체가 노동조합 같은 건강한 비판자, 감시자와 양립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Q. 뇌물공여, 노조파괴, 산업재해 등 헤아릴 수 없는 삼성의 범죄행위는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절대권력을 가진 재벌의 잘못된 사회 지배, 노동자 통제 시스템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현재와 반대로 사회가 기업을 지배하고, 노동자가 일터를 통제해서 스스로 안전과 인권을 보장받아야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삼성이 가진 거대한 권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충기 문자가 얼핏 보여준 것처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행정, 입법, 사법 권력뿐만 아니라, 언론과 학계까지 삼성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Q. 박근혜를 연인원 1,700만 명이 넘는 촛불 투쟁이 계기가 되어 끌어내렸듯이, 삼성도 전 사회적인 투쟁이 있어야 작은 승리라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싸워오셨습니다만, 앞으로도 긴 싸움이 계속될 것 같은데, 오랜 기간 싸우시면서 바뀐 상황(삼성, 정부, 주체)은 있습니까?

 

한국 사회에서는 삼성의 사회적 책임보다는 긍정적인 기업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싸움의 과정에서 삼성의 본질은 얼마나 폭로되었나요?

 

A. 지난 촛불은 정말 위대했습니다. 촛불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부분에서 방향을 바꾸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성직업병 문제에 한정하면, ‘사과, 보상, 예방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삼성의 주장이 우리 사회의 상식처럼 자리 잡았었는데, 촛불 이후에 ‘직업병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라는 진실이 우리 사회의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 같습니다. 여전히 삼성을 포장해주는 기사들이 포털사이트를 도배하지만, 대부분의 댓글은 예전과 달리 불법세습, 삼성직업병, 노조탄압 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삼성직업병 싸움 10년을 거치며 삼성 공장의 위험을 알리는 다양한 결과들이 쌓이고, 직업병 인정 사례도 늘어나고, 일부 기업의 전향적인 변화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지난 촛불을 계기로 급격히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직업병 인정판결이 훨씬 더 많아져 이제 대법 판결까지 나왔고, 반도체 전자회사의 보상과 예방대책도 조금씩 진전되고 있습니다.

 

 

Q. 한국사회에서 삼성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삼성노동자의 문제는 전체 노동자의 문제이고, 삼성 작업장의 직업병 문제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조합원을 비롯한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삼성 투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A. 최근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에 대한 불법도급을 중단하고 정규직화한다는 삼성과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합의가 있었습니다. 물론 삼성이 두 손 놓고 이제 마음껏 노조 활동하라고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만, 삼성의 ‘무노조경영’을 정말로 무너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황상기 아버님이 입버릇처럼 하시는 얘기가 있습니다. 삼성에 노조가 있었다면 삼성에서 이렇게 계속 노동자들이 병들고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많은 노동안전 활동가들도 얘기합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안전규제를 만들고 감시해도, 회사 내부에 감시하는 눈이 없다면 한계가 뚜렷하다고요.

 

매년 2500명 가까이 산업재해로 죽는 나라, 병들고 다쳐도 눈치 보느라 산재신청도 못 하는 나라를 바꾸는데 노동조합이 할 일이 많습니다. 삼성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해서 더 이상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일터를 만드는 데 함께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Q. 마지막으로 그동안 반올림 투쟁에 연대했던 분들께도 한마디 해주십시오.

 

A. 반올림은 사실 피해자 가족과 몇몇 활동가들, 연대단체들로 구성된 작은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라는 잘 보이지 않았던 문제를 드러내고 바꾸는 데에는 함께 연대해준 분들의 힘이 컸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삼성이라는 한국사회 최고권력과 맞서 싸우고 있는 반올림 활동가의 인터뷰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과 다를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2차 조정에 대한 합의 서명에 대한 반올림 입장글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의 첫 매듭이 만들어졌습니다”

 

1. 오늘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2. 2013년 2월 삼성으로부터 교섭제안을 받은 지, 5년 7개월이 지났습니다. 2015년 7월 조정위원회로부터 1차 권고안을 받은 지는, 꼭 3년 하루가 지났습니다. 2015년 10월 삼성전자의 거부로 그 권고안에 대해 논의 한번 해보지 못하고 거리에 나와 대화 재개를 기다린 지는, 1,022일째입니다. 

 

3. 이처럼 지난한 시간을 거쳤음에도 당사자들의 직접 대화가 아니라 중재라는 방식으로 마무리하게 된 점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조차 저 길고 힘든 시간들이 없었다면 결코 내딛지 못했을 소중한 한 걸음입니다.

 

4. 짧지 않은 시간,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주고 계시는 조정위원회에 감사합니다. 사실 아직 상세한 내용을 모르는 채 중재안에 사전 합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희는 조정위원회가 처음 출범할 때부터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마련하겠다 하신 약속을 믿기로 했습니다. 이번 2차 조정 제안서에 담긴 말처럼 ‘우리 사회 공동체가 지향해 나가야 할 미래가치의 하나로 구현될 수 있도록’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을 잠재적 피해자와 향후 미래에 나타날 잠재적 피해자에게도 적절한 구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합리적 방안’을 고민하겠다는 그 약속, 꼭 지켜주시리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5. 중재합의는 삼성전자에게도 힘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 어렵게 도달한 약속인만큼, 기업의 규모와 위상에 걸맞게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가라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요구와 바람이 삼성에게 가 닿았기를 희망합니다.

 

6. 변변한 바닥도 지붕도 없이 시작한 노숙농성장에 찾아와, 두 번의 겨울과 세 번의 여름이 지나는 동안 함께 혹한과 폭염, 비바람을 맞아 준 지킴이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들 덕분에 별 다섯 개 호텔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7. 고통, 절망, 분노의 시간들을 홀로 견디면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은 피해 노동자와 가족 여러분, 당신들의 인내에 경의를 표합니다.

 

8. 오늘 서명한 합의에 따라 이제 저희는 내일 저녁 문화제를 끝으로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농성장을 닫으려 합니다. 2015년 10월 7일, 간절했던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시작한 농성이었습니다. 첫째는 삼성 직업병 문제가 끝나지 않았음을 세상에 알려야 했고, 둘째는 삼성에 의해 중단된 협상이 다시 열리도록 해야 했습니다. 길 위에서 천일을 버틴 끝에 결국 모두 이루어냈습니다. 응원하고 연대해 주신 모든 분들과 함께 일궈낸 소중한 승리입니다.

 

9. 이제 우리는 천일 넘는 노숙농성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기다리겠습니다. 오늘 합의를 통해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매듭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매듭이 단단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중재안이 완성되고 실행될 때까지 모두 한마음으로 지켜보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018년 7월 24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http://cafe.daum.net/samsunglabor/MHzN/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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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삼성 공장에서 또 사람이 죽었습니다. 새로운 게 하나도 없는 너무나 ‘낯익은 비극’입니다” (반올림 활동가 이상수 씨)

9월 4일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이산화탄소 누출로 노동자 1명이 숨지고 2명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삼성전자 공장의 유해 화학물질 누출로 인한 노동자 사망사고는 몇 년째 반복되고 있다.

 

반올림, 청년전태일, 화성환경운동연합, 다산인권센터 등 시민단체들이 6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앞에 모였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반복되는 화학물질 누출 사고로 하청업체 노동자가 사망함에도 이를 방치하며 ‘위험을 외주화’하는 삼성을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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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이 사회운동에 던지는 의미

  •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이 사회운동에 던지는 의미

     

     2월 1일, 알바노조 선거 중이었다. 위원장 후보로 출마한 이가현 조합원이 SNS에 올린 폭로가 삽시간에 화제가 되었다. 알바노조, 청년좌파, 평화캠프, 노동당 등 여러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소속된 ‘'언더'’라는 비공개 조직(이하 ‘'언더'’)이 존재하고, 이 조직의 비선을 통해 여러 단체 결정에 개입했다는 폭로였다. 비선이란 말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이들이 이른바 이석기가 통솔했다는 통진당의 RO나 최순실-박근혜로 비화된 비선 게이트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으로 공개된 글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곧바로 기사화되었다. 연이어 수십 건의 폭로 글이 뒤를 이었다. '언더'의 존재를 바라보는 동료 시민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비판. 동시에 진보라 하는 사회운동, 진보정당, 노동조합 어디 한군데 믿을 곳이 없고 상식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없다는 한탄이 이어졌다. 사회운동에 대한 불신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더' 문제는 불신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불신의 결과로 심증을 확증으로 굳히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해당 조직 내부로 들어갔을 때 해결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알바노조와 노동당에서는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어떤 경로를 거쳐 언제, 어떻게 해결될지 미지수다. 조직을 방어하려는 내부의 논리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법적/제도적 해결 과정으로 들어가면 문제는 더 복잡해지는데 사회운동 단체의 문제해결 방식은 사법 기구와 달라 단순하게 유무죄를 결정하거나 징계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이 무수히 많은 조직 사건인 데다 형태를 파악하기 힘든 '언더'라는 조직 자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도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난해한 제도적 해법과 무관하게 사회운동의 차원에서는 더 밀도 높은 분석과 성찰이 뒤따라야 한다. 결국, 제도적 해법으로 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정치, 문화, 운동의 관점에서 성찰하고 바꿔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더'와 관련된 내부고발자들의 폭로는 충격적이었다. 단지 비공개로 조직을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 수 있는 강력한 혁명가를 기른다는 명목으로 말도 되지 않는 요구가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미행을 따돌리는 연습을 하며 비공개로 운영되는 안가에 모이면 첫 모임에서 혼전순결, 낙태금지를 포함한 문서를 읽힌다. 수시로 관련 단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임무를 부여하고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비판을 받는다. 연애와 성생활을 포함한 모든 일상생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하며 일상적으로 다른 멤버들과 비교, 평가한다. 보수적이고 금욕적인 도덕관, 가부장적인 조직구조, 전체주의와 비슷한 상향 피라미드식 조직구조 속에서 토론이나 이의제기는 혁명가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으로 비판받는다. 이 외에도 내부고발자들 글에 드러난 수많은 문제 제기는 읽는 이의 숨통을 조여 올 정도로 힘겨운 내용이 많다.

     

     어떤 이들은 그냥 단지 비공개 모임이었을 뿐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런 모임은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느냐고. 그냥 공부 모임일 수도 있다고. 한심한 이야기다. '언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피상적인 정보를 통해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미 수없이 많은 내부고발이 나온 상황에서 '언더'가 어떤 작동원리를 갖고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언더'는 도대체 왜 문제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이 지양해야 할 지점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지향해야 할 지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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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미더노동당>(https://www.facebook.com/showmethelaborparty/)이란 공개 프로그램을 통해 '언더' 조직의 문제점을 차별, 반민주주의, 재정, 노동 네 가지로 요약했다.

     '언더' 조직 내에서는 일상적인 차별이 횡행했다. 조직 자체가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이었다. 일상적인 성차별과 언어 성폭력이 벌어졌고 제대로 해결되지도 않았다. 이 외에도 청소년, 장애인,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행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심지어 어떤 내부고발 글에는 '언더' 조직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를 회원으로 받을지 말지 심각하게 토론했다는 내용도 있다. 한마디로 혁명을 지향하는 조직에서 이들의 존재는 대단히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지나치게 감성적인 존재라 혁명가가 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인식도 보인다. 이런 심각한 반여성주의적이고 반인권적인 사고방식은 혁명을 위해 최고의 효율과 조건 없는 충성이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을 통해 정당화된다.

     이런 차별적인 조직에 몸담는 활동가들은 일상적인 자기분열에 시달린다. '언더'에서는 여성주의를 부정할 것을 요청받으며 동시에 공개된 공간에서는 여성주의 운동을 하니 사람이 어떻게 제정신으로 이 모순된 상황을 견뎌 나간단 말인가. 낙태금지를 요구받으며 동시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운동에 동참한다. 이런 모순적 상황은 너무 자주 발생하고 이의제기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활동가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질책하며 출구가 보이지 않는 숨 막히는 상황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게 된다. 내부고발자 글을 보면 정신과 치료를 포함해 일상적인 정신질환으로 파생되는 고통에 시달렸다는 내용이 거의 모든 글에 등장한다.

     

     이런 위기는 이견을 수용하지 않는 비민주적 구조 속에서 더욱 증폭된다. 그리고 '언더' 내부의 비민주적 구조는 구성원들이 활동하는 여러 사회단체로 이식된다. 오로지 지침을 관철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공개활동 영역에서도 좀처럼 토론을 하지 않는다. 이견은 방해요소로 파악한다. 건강한 조직은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고 민주주의는 형식적 다수결로 유명무실해진다.

    끝으로 노동과 재정 문제를 언급해야만 한다. 아직 내부폭로에 많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글을 통해 '언더'의 작동원리, 그 가운데 노동과 재정 문제를 어떻게 다뤘는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차별적이고 비민주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동과 재정의 관점에서 이 문제가 사회운동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서는 대부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내부고발에 따르면 '언더' 구성원들은 일상적으로 과도한 초과노동에 시달렸다. 단체활동은 직장 이전에 활동공간으로 규정되어 끊임없이 성과를 비교·평가당했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고통의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은 내부고발 글에서조차 이는 자신이 원했던 것이기도 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계약서조차 쓰지 않는다. 돈은 현금으로 받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돈을 받기도 한다. 때에 따라 비'언더' 구성원과 차별된 액수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소위 돈 많고 마음씨 좋은 후원자라고 알려진 '언더'의 지도부는 상근자 채용과정에도 일일이 개입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분열이 시작된다. 내부고발자 다수가 알바노조 조합원이었음을 상기해보자.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면서 말도 안 되는 노동윤리 속에서 살며 자신을 갉아먹는 존재들. 이 '언더'가 아주 악질인 것은 자본주의와 맞선다면서 자본의 통제 기술을 골고루 다 써먹고 있다는 점이다.

     

     나도 한때 '언더'에 있었다. 2003년 사회당을 탈당하기 전까지 그 조직과 함께하던 구성원이었다. 물경 십 년도 더 지난 지금 당사자들의 폭로를 보는 내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너무 아프고 서글프고 화가 난다. 사회를 제대로 바꿔보겠다는 선의를 가진, 열정적인 활동가들을 소모품처럼 쓰다 버리는 조직이 혁명을 운운하니 수십 년을 살아남아 사회운동을 망치고 있다니. 노동당 당원으로서 나는 '언더'를 넘어 진보정당을 혁신해야 하는 과제를 내 문제로 온전히 받아안기로 한다. '언더'는 단지 '언더'만의 문제가 아니라 단절해야 할 과거로 상징되는 운동 내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래로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하고픈 말이다. 우리가 극복하고픈 세상에 대해. 우리 삶 자체가 우리가 만들고픈 미래 사회 그 자체를 닮아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각자는 모두 중요한 자기 삶의 주체가 아닌가. 누구도 함부로 소모품처럼 쓰이거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는 이런 조직은 세상을 바꾸는데도 효율적이지 않다.

     

     끝으로 내부고발자들에게 애정 어린 연대의 마음을 담아 건네는 말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피해자 프레임 넘어서야 한다. 이건 민주주의 상식에 관한 문제다. 이를테면 MBC 노동자들의 파업 같은 것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국민을 향해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도 MBC 일부였기에 미안하고, 그래서 공영방송을 제대로 바꾸는 것으로 사죄하겠다고 했다. 제대로 바꾸기 위해 자신들을 꾸짖더라도 외면하지 말아달라 했다. 그렇게 해야 우리 모두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다. 진정한 치유도 될 수 있다. 

     

     나는 노동당에서 싸울 것이다. 함께 노동당 안에 있을 때는 내부고발자들과 의견 차이로 대립할 때도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이제 탈당했다. 밖에서 함께 싸우자. 그런 한에서 우리는 그래도 동시대에 조금이라도 사회운동, 진보정당 운동의 한 걸음을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노동당 내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과 발언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당사자들이 꼭 이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노동당 마포당협 사무국장 ┃ 나동혁

     

     

    <편집자 주>

    이 글은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에 대해 내부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지의 기고 글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과 다를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운동 사회에서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중요한 내부투쟁이기에 코뮤니스트에 실었으며, 이와 연관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은 코뮤니스트 7호에 실린 「다시 혁명조직을 말하다」, 「노동계급과 혁명조직」을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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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노동당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

    http://www.laborparty.kr/bd_member/1756873

     

    [진조위] 알바노조 내 ‘언더조직’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 보고 2차

    http://alba.or.kr/xe/news/27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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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에서의 집단이성과 관료주의의 대결

  •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에서의 집단이성과 관료주의의 대결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노동자민주주의를 지지하며-

     

    1.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운영위원회의 관료적 결정

     

    지난 2월 24일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충남지부(이하 충남지부) 2월 정기모임에서는 민주노조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집단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모든 증거와 정황이 계획적인 집단테러임을 증명하고 있고, 노동조합(충남지부)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사건이라서 신속하고 엄중한 처리가 필요했다. 이에 충남지부 조합원들은 3월 10일 비상총회를 열어 '노조파괴에 대한 전 조합원과 함께 하는 집단대응 대책의 건'을 압도적인 찬성으로(90.69%) 통과시켰다. 또한, 충남지부는 사건의 엄중함을 고려하여 민주노총 규율위원회(이하 규율위원회)에 제소했고, 규율위원회는 가해자에 다한 사전조치를 명령했다. 즉, 충남지부는 테러 피해자와 조합원, 그리고 노동조합을 2차 가해로부터 지키기 위해 민주적인 절차와 규약에 따라 "정당한 조치"를 했다.

    이러한 조치는 조합원들을 보호할 임무가 있는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이하 플랜트노조)에서 먼저 해야 한다. 하지만, 플랜트노조 운영위원회에서는 충남지부의 정당한 조치를 방어하고 더욱 엄격히 적용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조합원들의 뜻을 거스르는 결정을 했다. 운영위원회는 테러 사건이 "명백한 범죄행위", "사전에 계획된 노조파괴 행위"이었음에도 총회 결정사항 집행을 유보하라는 결정을 했다.

    민주노조운동의 상식에서 충남지부의 총회 결정사항은 조합원들의 안전하고 민주적인 노동조합 활동 보장을 위해 가해자들에게 해야 하는 필수적인 조치였다. 따라서 이러한 최소한의 조치마저도 무력화시키는 운영위원회의 결정은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민주적 의사결정을 부정하는 반민주적 행위이자, 조합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반인권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플랜트노조 운영위원회의 관료적 행태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운영위원회는 회계부정, 집단테러 세력에게 신속하고 단호한 징계를 내리는 대신 그들에 맞서 싸우면서 노동조합을 지켜낸 충남지부장을 징계하겠다고 나섰다. 노동조합 안의 부패-폭력세력을 조합원의 힘으로 몰아내는 일은 민주노조 운동에서 존경받고 교훈으로 삼을 일이다. 더욱이 충남지부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집단이성과 노동자 민주주의"로 대응했다.

    그런데, 플랜트노조 운영위는 이러한 충남지부를 지원해주기는커녕, 사사건건 방해하면서 부패-세력을 방어하더니, 급기야 "조합원들이 직접 선출한 지부장"을 징계하겠다고 나섰다. 게다가 “부당한 징계”를 위해 노동조합규정마저 일방적으로 바꿔가면서 조합원들의 뜻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조 조합원은 이 정도의 부당한 압력으로 물러서지 않는다.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농성장에서 현장에서 자본의 부당한 압력과 탄압에 맞서 싸우고 있다. 독재정권의 엄혹한 시기에도 부당한 권력과 자본에 맞서 싸워온 것이 노동자들이었고, 그것이 민주노조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한 전통을 가진 민주노조 조합원들에게 "노조 권력"을 악용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민주노조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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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집단이성과 관료주의의 대결

     

    노동조합의 주인은 조합원이며, 총회는 조합원 전체로 구성되는 노동조합 최고의 의사결정기구이다. 총회는 조합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구이며, 노동자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모든 조합원은 노동조합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정보에 대해 알 권리가 있으며, 총회는 노동조합 관련된 현안 보고와 정확한 정보제공, 그리고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조합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곳이다.

    노동조합에서의 "집단이성"이란 부당한 지시나 명령에 수동적으로 따르지 않고, 특정세력의 사적 이익에 이용당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의 기준을 세워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결정에 대한 책임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집단이성이다. 이것이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반이 된다. 충남지부 조합원들이 비상총회에서 결정하고 집행한 것은 바로 집단이성이자,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반이었다.

     

    그런데 지금 플랜트노조에서는 집단이성과 노동자민주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불순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운영위원회의 관료적 결정이 그것이다. 그들은 충남지부 조합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하자, 관료적으로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특정세력의 사익(私益)을 위해 노동조합 조직질서를 악용해 조합원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그래서 충남지부 조합원들의 투쟁은 패권적 관료주의, 부패한 노동조합 조직질서와 전면적으로 싸우는 "노동운동 바로 세우기" 투쟁이기도 하다. 전선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집단이성 대 반민주적 관료주의 세력, 민주노조 세력 대 부패세력의 전선이 그것이다. 충남지부 통지들의 투쟁에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노동자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노동자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노동자의, 토론하는 노동자의 발전하는 계급의식이다. 대의제-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투쟁하는 노동자의 원칙이 존중받고 토론과 논쟁과 실천적 검증을 통해 언제든 소수가 다수가 되고, 다수와 소수 모두 왜 다수와 소수가 되었는지 인식하고 더욱 깊게 연대하고 단결하면서 투쟁을 확산하고 발전시키는 민주주의다.

    노동조합 안에서 집행부(간부)와 조합원들의 판단이 다를 때, 위로부터의 조직질서와 상층부 회의체계를 통해 조합원 위에 군림하며 통제하려는 것이 관료주의이고, 조합원들과 직접 토론하고 설득하고 자신도 설득당하면서 공개적으로 검증받고, 결정한 것을 직접 실천하면서 조합원 스스로 행동이게 하는 것이 노동자민주주의이다.

     

    조합원 다수가 이러한 민주주의에 익숙해졌을 때,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는 다른 조직보다 훨씬 우월한 의식수준과 조직력을 갖게 되고, 자본과의 싸움에서도 강력한 무기가 된다. 또한, 조합원들의 의식적이고 민주적인 토론 능력과 집단이성만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노동조합 내부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수 있다. 이것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노동조합은 반민주적 요소와 관료주의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지금 충남지부 조합원들은 관료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집단이성을 지켜내고 있다. 어떠한 오류도 집단이성으로 교정하면서 노동자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동지들은 승리할 것이다. 누구보다 제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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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과 평의회에 대한 문제의식 (남궁원, 윤웅태)

  •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과 평의회에 대한 문제의식

     

    <편집자 주>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에서 현재까지도 토론될 만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당과 평의회>에 대한 문제를 먼저 가신 남궁원, 윤웅태 동지의 운동을 평가하는 차원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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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운동의 좌초와 평의회의 복권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계급해체, 인간해방을 향한 매우 힘든 투쟁을 벌여왔다. 이론적 사회주의로부터 러시아 혁명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평등한 생산양식을 창조해 나가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과 투쟁의 역사였다.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혁명의 좌절 등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패배를 딛고 선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승리, 그리고 뒤이은 중국 혁명의 승리는 사회주의운동에서 ‘광범위한 노동조합과 이를 토대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당’의 종말을 선언한 것에 다름없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시도된 ‘노조-당’과 이후 ‘산별노조-사회민주주의당’의 형태는 오래지 않아 개량주의로 경도돼 그 역할이 급진적 개혁당 수준으로 떨어졌고 당의 관료화와 비대화는 ‘당 위기론’을 불러왔다. 바로 그때 러시아 혁명이 대안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러시아조차 곧바로 반혁명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러시아 사회주의는 결과론적 국유화, 노동자민중에 대한 독재, 야만적 국가 패권주의 등을 생채기로 남긴 채 노동대중의 희망과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며 몰락해갔다. 역사적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와 노동자민중을 억압, 통제하는 당 권력화 문제를 여전한 숙제로 남겼다. 이제 당 위기론은 사회주의운동 내부에서 절박한 화두가 되었다. 나아가 자본주의와 역사적 사회주의 모두에게서 나타난 당의 오류는 당 무용론을 강화했다. 특히 68년으로 대표되는 좌절한 사회혁명은 당 무용론을 더욱 심화시켰다. 68혁명은 자본에 포섭된 자본주의 내의 ‘노조-사회민주주의당’과 역사적 사회주의의 ‘당 독재’로 확인된 배신에 대한 투쟁이었다. 노동자 민중은 자본주의와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 모두를 반대하고 국가와 모든 권위에 대해 투쟁했으며 이후 일상으로부터 제기되는 미시 조건에 대한 집착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68년의 경험은 무정부적 자율주의 경향과 민중주의, 그리고 비판적 정치 분파로서 ‘좌파’ 개념을 강화했다.

     

     이러한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는 오늘날 비판적 정치 분파로서 ‘좌파’가 자본주의 체제 위기극복의 보조단위로 기능하고 있는 것을 용인하게 하였다. 이제 사회주의운동과 사회주의자는 설 곳을 잃고 비판적 정치 분파로서의 ‘좌파’만이 남게 되어 사회주의운동은 좌파운동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회주의운동은 혁명적 사회주의니 변혁적 노동계급운동이니 하는 갖가지 수사가 붙게 되었다.

     

     이처럼 20세기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하위파트너로 종속됐던 노동조합운동과 사회민주주의당, 그리고 이의 반대 관념인 무정부주의에 의해 주도됐다. 이러한 가운데 전투적 노동조합운동이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아 오기는 하였으나 오늘날 자본주의의 개량적 조치와 자본의 유연화 전략으로 인해 그조차 위기를 맞고 있다. 경험한 대로 전투적 노동조합운동과 전투적 노동운동이 사회주의운동의 주체세력으로서 전화/발전되지 못하고 자본주의 내에 포섭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제기되는 ‘평의회-사회주의당 운동’의 복원은 이미 자본주의에 포섭된 노동조합운동과 사회민주주의당 파트너쉽 극복을 의미한다. 즉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동자 평의회건설은 20세기 사회주의운동의 좌초와 분화 위에서 제기되고 있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한계와 오류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사상으로 현대적으로(탈근대주의 운운의 역편향이 아니라) 복권하는 것이다.
     

    현 한국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부분적 비판

     

     한국사회에서 맑스주의 운동진영은 현장실천가(활동가)들, 투쟁하는 노동자민중들,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뇌리에 대안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세를 놓치지 않는 계급투쟁의 전위를 자임한다면 다음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현실적인 역량을 넘어서는 선도적 투쟁의 길을 열어감에 있어 다양한 수준의 투쟁과 조직, 나아가 운동미래에 대한 전략수립의 문제. 이어-, 현실 변혁운동단계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민중주의와 중도주의를 근절시키고 맑스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이다. 중도주의는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이라 봐도 무방하며 그 실체는 자유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중도주의는 변혁전략과 이행문제, 그리고 주체형성에 있어 변혁운동의 수준 높은 발전을 현실내부로 가두려는 그야말로 당면투쟁의 급진성만으로 변혁운동의 장래를 제한하려는 경향을 띤다. 현실에서 중도주의는 대기주의, 전위적 질서와 역할의 신비화, 그리고 현실 변혁운동에서의 무기력과 자기 보존의 패권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민중주의는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요구를 절대화하여 대중추수주의와 무정부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민중주의는 노동자민중의 투쟁과 각성을 제한하여 변혁운동의 주체적 성과를 유실시키고 노동자민중의 이익집단화를 용인하여 결국 자본가 권력에 모든 것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그들의 따뜻한 시선과는 하등 관계없는 것이다. 여기에다 ‘사회주의’라는 개념을‘자유주의적 사회성 강화’로 사용하는 흐름이 노골화되면서 사회주의 자체가 희화화되기까지 한다. 이처럼 한국사회주의운동은 한편 과거 유물로서 자유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경계, 또 한편의 경제투쟁과 무정부성의 경계에서 새로운 모색을 힘겹게 진전시키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중요한 과제는 비판적 정치분파로서의 ‘좌파’의 색채를 걷고 자본주의의 하위파트너로 자리하고 있는 ‘노조-사회민주주의당’의 개량논리를 걷어치우고 사회주의운동을 다시 세워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를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주체형성-재조직화를 위한 노력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맑스-꼬뮤날레도 그러한 노력일 것이며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주체형성 논의도 그러한 노력의 일부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사회주의운동은 계급해방, 인간해방이라는 목표가 가지는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이행전략의 측면에서 전면적인 논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이러한 논의를 책임있게 시작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평의회운동>>, 윤웅태,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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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 평의회 조직문제를 중심으로

     

      나는 이 글에서 레닌의 1902년「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보여준, 외부로부터 계급의식 도입을 통한 당 이론이 1905년 소비에트 투쟁 경험 속에서 변화했다고 본다. 즉 당은 계급의 일부이며, 대중의 계급투쟁 속에서 변화된 것이다. 당은 대중의 혁명적 투쟁기구로 나타난 평의회 내에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 이후 레닌은 당과 새로운 국가기구 사이에 관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관료화와 프롤레타리아 반혁명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국가의 위험성을 보지 못했다. 레닌은 내란의 위기가 가속화되고, 도시에서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자, 당기구의 중앙집권화를 가속화시켰다. 아울러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의는 노동대중에서 나온 계급적 성분보다 혁명에 대한 헌신성, 당성에 의해 내려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혁명 이후 레닌의 당론은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당의 독재로 변질됐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대중의 자발성에 기초한 투쟁에 근거하는 당의 역할은 유의미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독일 좌익공산주의자와의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혁명적 대중투쟁 기관으로서,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화 기구인 평의회에 대한 동요를 보였다. 이것은 룩셈부르크가 독일공산당내 논쟁 지형에서, 자신이 그렇게 반대했던 국민의회 개입을 선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기에 자본주의 질서의 전복을 위한 새로운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를 창조했다. 독일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의회의 이용불가능성, 사회민주주의의 배반과 반동적 본질,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국가의 옹호자이자 제국주의 전쟁의 신병모집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새로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소비에트와 동일한 원칙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공장안에 갇힌 노동자 투쟁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조직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반면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통일전선, 민족해방 투쟁을 지지하는 코민테른 입장에 반대하고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그룹은 당을 계급의식의 능동적 인자이자 동시에 계급 전체 내에서의 의식 발전의 표현으로서 파악했다.

     

    계급투쟁의 역사적 조건의 변화는 계급조직의 형태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한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체제, 자본의 세계화에 따른 ‘위기의 세계화’는 노동계급운동을 전지구적 투쟁이라는 새로운 지평으로 끌어올리고 있고 노동계급의 국제주의 관점은 더욱 요구되고 있다. 맑스주의는 세계노동자의 혁명적 연대를 통해서 자본주의 전복을 의도한다. 따라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독일혁명 (1918-23) 중심으로 한, 레닌과 유럽 맑스주의 내부논쟁을 되새기는 것은, 우리 사회 혁명적 맑스주의 실천운동 복원과도 연관돼 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 운동은 1997년 역사적인 총파업투쟁 이후 점차 자본과 국가기구에 포섭되고 있다. 진보정당-산별노조의 낡은 구도를 벗어나 이제 노동자평의회, 혁명당 문제가 새로이 제기되어야 한다. 당과 평의회 관계는 지속해서 연구해야 할 주제다. 여기서는 앞에서의 논쟁에서 시사점을 받아 한국 사회에서의 당과 평의회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정리해본다.

     

    첫째, 부르주아당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당은 국가를 접수하거나 국가 운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은 전체로서의 계급이 이행국가를 통하여 그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계급이 당 없이 존재한 시기도 있었지만, 계급 없는 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 모든 노동자에게 열려있는 대중조직과 정치조직인 당 사이에는 진화의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 상승기에는 당면 경제이해를 방어함으로써 영구조직인 노동조합이 존재한다. 하지만 당은 그렇지 않다. 당의 존재는 계급투쟁의 상태에 의존하는데, 상승기에는 나타나고 후퇴기에 사라진다. 자본주의 쇠퇴기에는 영구조직인 노조가 프롤레타리아 내용을 상실하고 국가기구의 부분이 된다. 그리하여 이때는 대중파업, 와일드캣 파업이 일어난다.

     

    셋째, 노동자평의회에 의한 투쟁이 절정에 이르기 전에 당은 나타난다. 왜냐하면, 당의 존재는 부상하는 계급투쟁의 시기 때문에 조건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의 역사적 진화와 함께 당 기능은 변한다.

     

    넷째, 당은 계급의식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주장할 수 없다. 계급의식은 전체로서의 계급 속에 있다. 당의 활동은 계급의 방향을 제시하고 투쟁에 비료를 주는 것이지, 계급대신에 결정을 하는 지도자가 아니다. 계급에 여러 개의 일관된 혁명 경향이 존재하는 것처럼 강령 틀 내에 차이와 경향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공산당은 일괴암적 관념을 거부한다. 당은 투쟁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에 구체적으로 답하는 처방을 낼 수 없다. 그것은 계급의 기술적 행정기관도 아니고 집행기관도 아니다. 당의 역할은 봉기의 “참모부”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 평의회 조직문제를 중심으로>>, 남궁원,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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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복간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실천지 복간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사회실천연구소의 『실천』지가 복간되었습니다. 2012년 내부 사정으로 발행이 중단된 『실천』지가 회원들의 논의를 거쳐 복간이 결정됐고, 2018년 6월 15일(금) 자로 복간호가 발행됐습니다.

이번 복간호는 크게 [특집]으로 68혁명 50주년, <정세> 스페인 여성총파업과 한반도 정세, [기획번역] 베네수엘라, 터키의 새 좌파정당, 블록체인, [사실연 지상강좌] 노동자 정치학, 과학으로 읽는 자본론, 노동자를 위한 회계 등이 실렸습니다. 그 외에도 만평과 그림판, 서평, 인터뷰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됐습니다.

권두언에서 회원인 오세철 선생은 “ 맑스주의 연구자와 혁명적 실천가가 이론적 실천을 뛰어넘어 우리 사회 그리고 나아가 세계 사회의 변혁을 일구어내는 구체적 행동을 포함한 실천운동에 앞장서겠습니다... 6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복간되는 『실천』지가 우리 연구소의 밝고 힘찬 미래를 드러낼 징표임을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복간의 변을 밝히셨습니다.

 

가격 : 15,000원
구입문의 : sopractice@jinbo.net
홈페이지 : http://blog.daum.net/sopractice

 

주요 목차

특집: 1968년 혁명 50주년
다른 1968: 덜 알려진, 주변부의 1968 / 우고 베제티 외 
68혁명/운동의 정치적 재해석을 위하여 / 원영수

정세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스페인 3.8 여성총파업 / 원영수
요동치는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볼 것인가 / 배성인

기획번역
베네수엘라의 허약한 혁명 / 스티브 엘너
터키의 새 좌파정당 / 칭귀즈 귀네쉬 
블록체인과 사회주의 / 스티브 허클 & 마틴 화이트

사실연 지상강좌 
노동자를 위한 정치학(1) 국가란 무엇인가 / 배성인
과학으로 읽는 자본론(1) 왜 『자본론』을 썼을까 / 김진업
노동자를 위한 회계(1) 노동자에게 회계란 무엇인가 / 한형성

연구노트
한반도 전쟁위기와 미중 제국주의 패권쟁투 / 홍수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운동사 / 최규진
책 읽어주는 남자: 바네겜 『일상생활의 혁명』 / 김종원 
인터뷰: 김수행 선생과 “실천”으로 다시 만나기/ 이형로

 

『실천』지는 독자들과 소통하는 잡지입니다. 『실천』지를 읽고 의견을 주실 분들은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실천』의 모든 문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독자 의견 : sopractice@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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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의 계급적 의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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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의 계급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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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68혁명 50주년 :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와 노동계급의 부활

68혁명 50주년 :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와 노동계급의 부활

 

 <우리는 1968년 투쟁을 '혁명'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대적이고 급진적인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부활했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1960년대 말 무렵이 되자, 전후 호황이 사라지고,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일상생활이 동과 서를 막론하고 가난과 위선임이 밝혀지고, 두 제국주의 블록 간 대리전쟁이 베트남에서 아프리카까지 계속됨에 따라, 부모세대가 겪었던 패배와 트라우마를 경험해 보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 제기는 다른 층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1968년 5~6월 프랑스에서 거대한 대중 파업으로 터져 나왔고, 이 운동은 반혁명의 시대가 끝을 고하는, 모든 대륙에서 노동자 투쟁의 국제적 물결을 알리는 신호였다. 68년 5월 프랑스, 그 운동의 정점에서 거리 곳곳, 학교, 대학, 그리고 작업장에서, 존 리드(John Reed)가 1917년 10월 이전 러시아에서 관찰했던 바와 똑같은 깊이 있는 정치적 토론의 신호를 관찰할 수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자는 생각이 노동자와 학생들 가운데 중요한 소수파 사이에서 심각하게 논의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동요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혁명적 정치 조직의 새로운 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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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0년대 세계학생운동의 전개과정

 

 미국에서는 1964년부터 가장 대대적이고 가장 격렬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에서 학생들의 항의가 최초로 대규모 확대되었다. 학생들이 주요하게 제기한 것은 대학에서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을 위한 ‘자유로운 발언 운동’의 요구였다.

미군 신병모집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베트남전 반대, 인종 분리 반대를 선동했다. 처음에 당국은 학생들의 평화로운 점거에 경찰력을 동원해서 억압했고, 1965년 초 대학 측은 학교 내에 경찰의 활동을 허가했으며 그로 인해 버클리 대학은 미국 학생 저항운동의 주요중심지가 되었다. 동시에 로널드 레이건이 ‘버클리에서 무질서를 일소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자, 운동은 강한 자극을 받았고, 그다음 해에 인종 분리 반대, 여성권리 옹호 그리고 특히 베트남전 반대 항의시위를 벌이면서 과격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항의운동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1967년 말 952명의 학생이 베트남 신병소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68년 2월 8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시민권을 위한 시위 도중 3명의 학생이 살해당했다. 운동은 1968년에 가장 강력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불만과 과격화는 4월 4일 마틴 루터 킹의 암살로 한 층 더 증폭되었는데, 이 사건은 그 나라의 흑인 게토에서 수많은 폭력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컬럼비아대학의 점거는 미국 학생운동의 최고정점 중 하나로 다시 새로운 충돌을 불러왔다.

 

 미국 대학생들의 반란은 같은 시기에 많은 다른 나라로 퍼졌다. 아메리카 나라들 가운데서는 브라질과 멕시코 학생들이 가장 활동적이었다. 1967년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정부와 미국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지속해서 발생했다. 당국의 엄청난 진압과 대대적인 검거에도 브라질 학생들은 1968년 10월까지 거의 날마다 시위를 벌였다.

몇 달 뒤에는 멕시코가 휩쓸렸다. 7월 말 멕시코시티에서 학생반란이 일어났다. 경찰은 탱크를 투입했다. 경찰 총수는 올림픽 대회를 명분으로 잔인한 진압을 지시했고. 9월 18일 대학캠퍼스가 경찰에 점령되었다. 마침내 10월 2일 정부는 멕시코시티의 3문화광장에서 만 명의 학생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도록 했는데, ‘틀라텔롤코의 학살’로 기억되는 이 진압에서 최소 200명이 살해당하고 5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으며 2,0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그렇게 올림픽을 조용하게 치를 수 있었지만, 학생들은 올림픽이라는 강제된 휴식이 있은 뒤에도 몇 달 동안 투쟁을 계속해나갔다.

 

 당시 학생 운동 물결은 아메리카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 모든 대륙을 휩쓸었다. 아시아는 일본에서 극적인 운동이 나타났다. 1963년 이래 미국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폭력시위가 발생했는데, 주로 전학련(전국일본학생자치위원회연합)이 주도했다. 1968년 봄의 끝 무렵, 이 학생운동은 수많은 학교로 퍼졌고, 노동자들이 운동에 가담한 1968년 10월에는 절정에 달했다. 반봉기법이 통과되자, 8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했다. 도쿄대학 점거를 경찰이 진압하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했다. 하지만 1969년 1월 중순 학생운동의 마지막 요새였던 도쿄대학이 무너졌다.

 

 아프리카에서는 세네갈과 튀니지에서 학생들의 투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렇게 모든 대륙을 휩쓸었던 운동은 유럽에서 가장 거대하고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1966년 말에 런던경제학교(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시작하여 점거 운동이 퍼져나갔고, 1967년 3월에는 5일간의 점거가 있었는데, 미국의 예를 따라 ‘자유대학’이 만들어졌다. 가장 극적인 시위는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1967년 3월과 10월, 1968년 3월과 10월에 일어났는데, 모두 경찰과의 폭력적인 충돌이 있었다. 벨기에에서는 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하고 교육부문의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1968년 4월부터 수차례 거리로 나섰다. 5월 22일에는 브뤼셀 자유대학을 점거하여 ‘민중을 위해 열린 대학교’라고 선언했다.

이탈리아에서는 1967년부터 여러 대학을 점거했고, 경찰과 학생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프랑코 지배하의 스페인에서는 1966년부터 노동자 파업과 대학 점거의 물결이 전개되었다. 1967년에 그 운동은 더욱 강하게 성장했고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 학생과 노동자는 서로 연대를 표시했다.

당시 유럽의 모든 나라 중에서 독일의 학생운동이 가장 강력했다. 독일에서는 1966년 말, 사회민주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의회 외부의 반대파(APO)’가 출현했다. APO는 특히 학생들의 총회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그 회의에서는 저항의 수단과 방법에 관한 열띤 논쟁이 이루어졌다. 많은 대학에서 미국의 모범을 따라 토론그룹이 만들어졌고, 기성의 부르주아적인 것에 대한 반대로 ‘비판적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 논쟁의 오랜 전통, 즉 공개적인 총회에서의 토론 전통이 일부 부활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극적인 행동에 대한 충동에 이끌리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론과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출현했고, 더불어 자본주의 극복을 생각할 용기도 다시 나타났다. 독일의 저항운동은 국제적으로 ‘가장 이론적이며, 토론에 있어서 가장 깊게 파고들었고, 가장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토론에 병행하여 수많은 항의시위가 있었다. 베트남전 문제는 확실히, 미국의 군사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부가 있는 나라와 2차 대전의 영향이 계속 남아 있던 나라에서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1968년 2월 17일과 18일 서베를린에서 국제 베트남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에 뒤이어 12,000명이 참가한 시위가 있었다. 1965년 이후 시위는 모두 ‘비상사태법령’의 제정을 반대했는데, 이 법령은 독일의 내부적인 군국주의화와 진압에 대한 강화된 권리를 국가가 갖는 것이었다. 1966년 대연정에 참가한 사회민주당(SPD)은 이러한 법령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유혈진압을 지휘했던 1918~1919년과 같은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이어갔다.

 

 프랑스의 학생반란은 1968년 3월 22일 파리 서편 근교인 낭트에서 시작되었다. 그날의 사건은 그 자체로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파리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해 많은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졌던 시기에 낭트 대학 소속 극좌파 학생 한 명의 검거에 대항해 그의 동료 학생들이 대학위원회 건물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대학위원회 건물을 점거한 142명은 건물을 떠나기 전에, 3월 22일 운동(M22)의 성립을 결정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LCR)과 아나키스트들이 초기에 속해있던 비공식적 운동의 하나였다. 4월 말에는 맑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청년연합(UCJML)의 마오주의자들이 가담했다. 그에 뒤이어 대략 1,200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대학교 벽면에는 점점 더 많은 현수막과 낙서가 등장했다. ‘교수들, 너희는 낡았고 너희의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삶을 살자’, ‘너희의 꿈을 실현하라’ 등. 3월 22일 운동(M22)은 3월 29일을 ‘비판적인 대학교’의 날로 선언하면서 독일 학생운동의 전철을 밟는다.

낭트 캠퍼스에서는 극좌파 학생들과 ‘볼셰비키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파리에서 원정을 온 옥시당(Gruppe Occident) 그룹 소속 파시스트들 사이에 점점 더 자주 충돌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총장은 학교를 다시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경찰이 학교를 봉쇄한다. 낭트 학생들은 대학 폐쇄에 반대하고 M22 구성원에 대한 대학위원회의 징계에 항의하기 위해 다음날 소르본 대학 광장에서 집회를 갖기로 한다. 그 집회에는 300명만이 참가했지만, 학생 시위가 끝나기를 바라던 정부는 경찰에 라탱지구(파리의 대학가)를 점령하고 소르본을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경찰이 수백 년 이래 처음으로 소르본 대학에 난입했다. 자유로운 귀가를 약속했던 경찰은 남학생들을 연행했다. 이에 분노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소르본 광장에 모여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의 진압이 강압적일수록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충돌은 그날 저녁 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다음 날 경찰은 소르본 일대를 완전히 봉쇄했다. 하지만 정부의 단호한 진압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시위를 끝내기는커녕 점점 더 대대적으로 확산되어갔다. 4만5천 명의 학생이 ‘소르본은 학생들의 것이다’, ‘경찰은 라탱지구에서 물러나라’, ‘우리의 동지를 석방하라’라는 투쟁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대에 점점 더 많은 학생, 선생, 노동자, 실업자가 동참했다.

5월 7일 시위행렬은 센강을 건너 샹젤리제를 따라 이동했고 대통령궁 근처까지 나아갔다. 평소에 라 마르세예즈나 장례의 조종이 들리던 개선문 아래에서는 인터내셔널가가 불리기 시작했다. 몇몇 지방 도시에서도 시위가 번져나갔다. 정부는 자신들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5월 10일 낭트 대학을 개방했지만, 그날 저녁 만 명의 시위대는 라탱지구에 모여 소르본을 봉쇄했던 경찰과 대치했다. 몇몇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치기 시작했고, 새벽 2시에 CRS(경찰기동대)는 최루탄을 발사하며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격했다. 그 충돌은 매우 폭력적이어서 양측에서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대 중 5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라탱지구에서는 많은 주민이 학생들에게 호의적이어서 경찰의 공격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집으로 피신하게 하거나 거리에 물을 뿌려주었다. 이 모든 사건들, 특히 진압세력의 잔인성에 관한 보도는 사람들을 자극했다. 5월 11일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서 분노가 거세졌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이러한 시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업의 수십만의 시위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와 학부모가 참여했다. 지방에서도 많은 대학을 점거했고, 곳곳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사람들은 토론하기 시작했고 진압세력의 만행을 비난했다.

 

 시위의 전개는 이제 극좌파 학생들을 비난했었던 CGT를 포함한 노동조합 중앙조직과 몇몇 경찰노동조합까지 강경 진압과 정부 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5월 13일의 파업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5월 13일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2차 세계대전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노동계급은 학생들 곁에서 대대적으로 참가했다. 가장 널리 확산된 구호 중 하나가, ‘10년(드골이 권력을 잡은 기간),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었다. 시위의 결과는 거의 모든 대학을 학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점거한 것이었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발언을 했고, 토론은 대학 관련 문제나 진압에 관한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 노동조건, 착취, 사회의 미래 등 가능한 모든 사회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토론은 많은 직장에서 계속 진행되었고 노동자들은 자발적인 파업에 들어갔고 작업장을 점거하기로 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운동을 추진했다. 드디어 노동계급이 다시 계급투쟁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2.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

 

 196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베트남전쟁 반대에 있었다. 이 운동은 1950년대 초 한국전쟁 동안의 반전운동처럼 소련-스탈린주의 당과 연계된 운동이 주도권을 쥘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들은 사실상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자주 그 운동과 대립했다. 이것이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특징 중의 하나였다.

 

 베트남전에 반대한 미국에서의 저항이 서방 세계 모든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확산된 동인이었다면, 학생반란이 주요한 나라들에서 일어난 건 확실히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의 젊은 세대는 징집으로 인해 전쟁문제와 직접 대면했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은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명이 부상당해 돌아왔으며, 수백만 명은 그곳에서 겪은 경험으로 평생 후유증을 앓았다.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공포를 제외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공식적으로 그들은 ‘민주주의’, ‘자유 세계’ 그리고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그곳에 파견되었지만,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건 공식적인 것과 완전히 모순되었다. 그들이 이른바 방어해야 할 정권, 즉 사이공의 정부는 민주적이지도 문명적이지도 않았다. 그 정권은 군사독재로서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다. 현지에서 병사들은, 비무장의 가난한 농민, 여성 그리고 아이와 노인에게까지 폭력을 가하고 살해하도록 요구하는 현실에서, 자신들이 ‘문명’을 수호한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국 정부가 제시하는 ‘문명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공식적인 말과 베트남에서 실제 행동 사이의 엄청난 모순은 미국 부르주아지의 권위와 전통적인 가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러한 반란은 처음에는 히피 운동과 함께 비폭력적이고 평화주의 운동의 하나였다. 그러나 1968년 프랑스에서와같이 버클리에서의 진압은 그 운동이 과격화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비폭력운동에 잠시 함께했던 제리 루빈(Jerry Rubin)이 국제청년당(Youth International Party)을 창립한 이후, 반란운동은 자본주의에 대항한 일종의 혁명적인 전망을 스스로 부여했다. 이제 운동의 새로운 영웅들은 더 이상 밥 딜런이나 조안 배스가 아니라, 체 게바라와 같은 사람이었다. 이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었다. 여기에는(자유 숭배, 특히 섹스의 자유나 마약 소비의 자유와 같은) 아나키스트적인 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쿠바와 알바니아를 모범으로 찬양하는) 스탈린주의적인 면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1960년대 미국에서 확산된 저항운동의 주요 특징은 베트남전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에도 반대했으며, 성차별에도 반대하고, 미국의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에 반대했다. 이 운동은 결코 노동계급의 운동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세력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다른 사회계층, 즉 인종차별의 희생자인 흑인, 제3 세계의 농민, 반항하는 지식인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1960년대 학생운동은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이 베트남에 관여하는 것에 대한 비난, 권위(특히 대학의 권위)에 대한 거부, 권위주의 일반에 대한 거부, 전통적인 도덕(특히 성도덕)에 대한 반란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스탈린주의 당들이 비록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강력히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자들 사이에서 전혀 반향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1960년대의 반란자들은 호치민(오랜 당원이었지만 훨씬 더 모범적이었고 영웅적인 것처럼 보였던)의 포스터를 걸어놓기를 더 좋아했고, 체 게바라(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이었지만 이국적으로 여겨졌다)나 안젤라 데이비스(미국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이었지만 흑인 여성이라는 이미지와 체 게바라와 같이 낭만적인 외모로 인해)의 낭만적인 사진을 걸어두기를 가장 좋아했다.

베트남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자유스러워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독일에도 나타났다. 1965년 이래 독일의 대학에서 전개된 토론 과정에서 ‘반권위주의적인 진정한 맑스주의’에 대한 모색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당시 평의회주의 운동의 많은 글이 다시 회람되었다.

프랑스에서 1968년 전개된 학생운동의 주제와 요구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했던 저항은 상황주의적이거나 아나키스트적인 일련의 슬로건에 밀리게 되었다.

 

 특히 아나키스트적인 영감은 아래와 같은 슬로건으로 표현되었다.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자유는 모든 범죄를 포함하는 범죄이다“

“선거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함정이다“

“불손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은 새로운 혁명 무기이다“

 

 상황주의의 영향은 이렇게 반영되었다.

“소비사회 타도”

“볼거리의 상품사회 타도“

“소외를 타도하자“

“절대로 일하지 말라“

“지루함은 반혁명적이다“

“현실적으로 되자, 비현실적인 것을 요구하자“

 

 다른 세대에 대한 표현은 이러했다.

“달려라 동지, 낡은 세계가 네 뒤에 있다“

“젊은이들은 섹스를 하고, 늙은이들은 음란한 몸짓을 한다“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던 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나왔다.

“바리케이트는 거리를 차단하지만 길을 연다“

“모든 생각의 결론은 경찰의 주둥이에 짱돌을 처넣는 것이다”

 

 이시기의 가장 큰 혼란은, 다음의 두 가지 슬로건으로 표현되었다.

“혁명적인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인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할 말이 있지만, 그것이 무언지 모른다“

 

 이러한 슬로건이 다른 나라에서 유포된 대부분의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보여주는 건 1960년대 학생운동은 비록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 투쟁으로의 가교를 만들려는 의지가 있었을지라도, 노동계급의 본질을 반영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접근방식은 잘 못 이해한 맑스주의 고전 문서에서 영웅이었던 육체노동자에 대한 매혹과 뒤섞여 노동계급에 대한 오만을 반영했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성격은 쁘띠부르주아적 이었다. 아나키스트적인 표현 이외에 가장 분명한 것은 삶을 즉시 변혁하려는 의지였다. 이러한 조급함과 ‘모든 것을 지금 당장’이라는 주장은 쁘띠부르주아의 계급적 특징이다. 이 운동 지도부의 혁명적인 과격주의 그리고 운동 일부의 폭력 미화는 쁘띠부르주아적인 본질을 반영한 것이었다. 1968년 학생들의 혁명적 관심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옳았지만, 운동은 혁명을 일으키는 노동계급 운동의 실질적인 발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혁명에 관한 낭만적인 관점만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혁명적이라고 여겼던 프랑스의 학생들은 68년 5월 운동이 이미 혁명이었다고 믿었고, 날마다 세웠던 바리케이트를 1848년과 1871년 코뮨의(바리케이트) 유산으로 묘사했다.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특징 중 또 하나는 세대 간의 갈등 즉 새로운 세대와 그들이 비난하는 부모세대 사이에 존재한 아주 큰 간극이었다. 특히 부모세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가난과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했다는 이유로 오로지 물질적인 번영에만 신경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그래서 소비사회에 관한 환상과 ‘절대로 일하지 말라’와 같은 슬로건이 성공을 거두었다. 반혁명을 철저히 경험한 세대의 자녀들로서 1960년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자본주의의 요구에 무릎을 꿇고 순응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조건을 자녀에게 안겨주려고 치를 수밖에 없었던 희생에 대해 자녀들이 경멸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기도 힘들어했다.

 

 하지만, 1960년대 학생반란에는 진정한 경제적인 요인이 있었다.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할 때, 당시에는 대학 졸업 후 실업으로 인한 또는 불안정한 노동조건으로 인한 큰 위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대학생들의 주요한 근심은, 자신들이 그 이전 세대의 대학졸업자와 같이 동일한 사회적인 지위 상승을 더는 이룰 수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1968년 세대는 이른바 ‘사무관리직 인력의 프롤레타리아화’ 현상에 직면한 최초의 세대였다. 이 현상은 학생 수가 현저히 늘어나자마자 위기가 공공연하게 시작했다. 이러한 증가는 경제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긴 했지만, 또한 그 부모들이 자신의 경우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사회적 처지를 자녀들에게 부여하려는 의지와 능력에도 부합했다. 특히 학생 수의 대규모 증가는 불편의 증대를 초래했다. 이는 대학의 구조와 관행이 단지 엘리트들만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강한 권위주의적 구조가 지배했던 시대의 소산으로서 그대로 존속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 시작된 학생운동이 자본주의의 번영 시대에 전개되었던 반면, 경제적 상황이 벌써 매우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그래서 학생들의 불편도 더 커졌던 1967년의 상황은 이미 달라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그 운동이 1968년에 그 절정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왜 1968년 5월에 노동계급이 무대 위에 등장하여 운동을 이끌어나가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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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68년 5월 노동계급의 부활

 

 낭트에서는 학생 또래의 노동자들이 운동에 동참했다. 그들의 논거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학생들이 결코 파업을 통해서 압력을 가할 수 없음에도 정부를 강제하여 승복하도록 할 힘을 가지고 있다면, 노동자들도 정부를 승복하게 만들 수 있다.’ 낭트의 학생들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했다.

5월 14일 저녁 총 3,100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했다. 5월 15일에는 노르망디의 클레옹에 있는 르노 작업장과 다른 작업장으로 운동이 확산되어 총파업과 무기한 공장점거가 이루어졌고 공장 정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저녁 무렵에는 파업노동자가 11,000명에 달했다. 5월 17일에는 총 215,000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 물결은 이제 프랑스 전역, 특히 프로방스에 도달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생적인 운동이었고 노조들은 그 꽁무니를 뒤따랐다. 모든 지역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선두에 섰다. 빈번하게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이 연대했다. 젊은 노동자들은 학생들이 점거한 대학교로 가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공장 구내식당에 식사하러 오라고 권했다.

5월 18일 정오에 CGT의 파업호소가 알려지기 전에 이미 10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에는 200만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5월 20일에는 6백만 명이, 5월 21일에는 6백50만 명이 작업을 멈추었다. 5월 22일에는 8백만 명이 무기한 파업에 참여했다. 그것은 국제 노동운동 사상 최대의 파업이었다. 이 파업에는 모든 부문이 포함되었다. 산업, 운송 및 교통, 에너지, 우편 및 텔레커뮤니케이션, 교육, 행정(정부의 여러 기관들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언론매체(국영 텔레비전이 파업을 했고, 종사자들은 특히, 강요된 검열을 비판했다), 연구소 등등. 그리고 장례사업장마저도 파업을 했고, 심지어는 프로 스포츠 선수도 그 운동에 동참했다. 프랑스 축구협회 건물에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예술가도 참여해서 칸 영화제가 감독들의 권유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점거된 대학은(파리의 오데옹극장과 같은 다른 공공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정치적 논쟁 공간이 되었다. 많은 노동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이러한 토론에 참여했다. 노동자들은 혁명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점거한 공장을 방문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찬가지로 거리에서도 보도에서도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68년 5월에는 날씨마저 매우 좋았다). 토론은 매우 즉흥적으로 생겨났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 가 슬로건이었다. 곳곳에서 축제 분위기가 지배했지만, 예외적으로 부유층 구역에서는 공포와 증오가 쌓여갔다. 프랑스 전역에서 도시구역에서, 몇몇 큰 작업장이나 인근 구역에서 행동위원회가 출현했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 혁명적 전망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했다.

 

 이러한 상황에 지배계급은 방황하게 되었고, 이는 혼란스럽고 효과적이지 않은 발의를 통해 나타났다. 우파가 지배하는 의회는 좌파가 2주 전에 제시한 검열안을 토론한 후 거부했다.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적인 제도권들은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도 마찬가지여서 같은 날, 독일로 출국했던 다니엘 콘벤디트의 재입국을 금지하기로 했다. 이 결정은 한층 더 불만을 들끓게 했다. 5월 24일 이에 항의하기 위해 더 많은 시위가 있었고,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시위에 합류했다. 이날 저녁 드골 대통령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상황을 그보다 더 잘못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 담화문은 소귀에 경 읽기였고, 정부와 부르주아지의 전반적인 혼란스러움을 나타냈다.

거리에서 시위대는 담화문을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고, 즉시 분노가 더 고조되었다. 파리 시내 전체에 그리고 몇몇 지방 도시에서 폭력적인 충돌이 일어났고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수많은 쇼윈도가 깨졌고 자동차가 불탔다. 이 때문에 여론의 일부가 학생들에게 등을 돌렸는데, 이들은 이제 폭도로 비춰졌다. 시위대 중에 드골주의 민병대원이나 경찰이 섞여 있었으나, 많은 학생들은 바리케이트를 세우거나 소비사회의 상징인 자동차를 불태움으로써 자신들이 혁명을 만들 거라고 믿었던 것은 분명했다. 이러한 행위는 특히, 역사상 최대의 파업 물결에 대한 당국의 한심스럽고 도발적인 반응에 대해 시위대, 학생들, 젊은 노동자들이 갖는 분노를 드러냈다. 체제에 대한 이러한 분노의 표현으로 자본주의의 상징인 파리 주식거래소가 화염에 휩싸였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그다음 날에야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했다. 토요일인 5월 25일에 노동부에서 노동조합, 고용주들 그리고 정부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고용주들은 노동조합이 기대했던 것 이상을 제공할 용의가 있었다. 부르주아지가 겁에 질려 있는 건 명백했다. 5월 26일 밤 그르넬협정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협정은 이 운동의 강력함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하는 도발에 지나지 않았다. 5월 27일 총회는 그르넬협정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이 협정을 거부한 가장 좋은 증거는 5월 27일 파업자 수가 9백만으로 증가한 것이었다.

 

 5월 28일은 좌파당의 작전과 조치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에 ‘좌파 민주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연합’(사회당, 과격당 그리고 서로 다른 작은 좌파그룹을 대표하는)의 총수 프랑스와 미테랑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보기에 권력의 진공상태가 존재하며, 그래서 자신이 공화국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오후에는 CPF의 지도자 발덱-로쉐는 공산주의자들의 참여를 포함하는 정부를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혼자서 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 관건이었다. 5월 29일에 큰 시위가 있었는데, CGT가 그것을 주관하고 국민정부를 요구했다. 우파들은 즉시 공산주의의 음모에 대해 경고했다.

 

 이날 드골 장군이 사라졌다. 그가 퇴위할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실 그는 독일로 날아가서 그곳 프랑스 점령군을 지휘하고 있던 마수(Massus) 장군의 지지와 군대의 충성을 확실히 하려 했다. 5월 30일은 부르주아지가 상황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려는 시도에서 결정적인 날이었다. 드골은 다시 담화문을 발표했다. ‘지금 상황에서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 나는 오늘 국회를 해산한다. ……’

 

 동시에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드골을 지지하는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부유층 구역에서, 잘 사는 교외 지역에서, 그리고 시골에서 군용트럭으로 ‘국민’이 운송되어 왔다. 겁먹은 자들과 가진 자들, 서민들, 부유층 자제들을 위한 지역 학교 대리자들, 자신들의 우월함을 의식하고 있는 지도층들, 쇼윈도가 파괴될까 조바심내는 작은 상점 주인들이 모두 한곳에 모였다. 국기에 대한 공격 때문에 격노한 참전용사들, 은폐물 아래서 지하 세계와 더불어 잠복하는 비밀경찰들 그리고 알제리 정착민들, 파시스트적인 옥시당 그룹의 젊은 회원들인 OAS와 비시(Vichy)에 향수를 느끼는 늙은 추종자들이(이 모두는 드골을 경멸하지만) 함께 모였다. 이 모든 사람들이 노동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와 ‘질서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그 목요일부터 조업이 재개되긴 했지만, 이것은 느리게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6월 6일에도 여전히 약 6백만 명이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업은 매우 분산적으로 재개되었다. 6월 10일 플랭스의 르노 작업장을 경찰이 점령했다. 경찰에게 폭행을 당한 고등학생 중의 한 명이 센강에 추락해서 익사했다. 6월 11일에는 소쇼의 푸조 작업장에 CRS가 개입해 2명의 노동자가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전역에 다시 한번 엄청난 시위가 발생했다. ‘그들이 우리 동지들을 살해했다’며 노동자들의 결연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CRS는 소쇼 작업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조업은 그 후 10일이 지나서야 재개되었다.

 

 그러한 분노가 다시 파업의 부활(아직 3백만이 여전히 파업 중이었다)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CGT를 그 선두로 한 노동조합과 CPF를 선두로 한 좌파정당은 선거가 실시될 수 있고, 노동계급의 승리를 위해서 조업이 재개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노동조합에 의해 5월 20일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파업 호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운동을 통제해서 덜 전투적인 부분에서 조업 재개를 손쉽게 이뤄낼 수 있도록 했고, 다른 부문으로 그러한 사기저하를 확산시킬 수 있도록 만들길 원했다’ 발덱-로쉐는 선거운동 동안 자신의 연설에서, ‘공산당은 질서의 당’이라고 선언했다. 사실상 부르주아적인 질서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6월 30일 결선투표에서는 우파의 역사적인 승리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라디오 및 TV 방송국이 7월 12일에 업무를 재개했다. 업무가 재개된 후 많은 이들이 해고당했다. 곳곳에서 질서가 다시 회복되었고, 특히 국민을 설득하는데 중요한 언론매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은 CGT와 CPF의 주장과는 반대로 패배로 끝났다. 그 심각한 패배는 그 운동 동안 분노와 경멸을 샀던 당과 권위의 복귀로 확실히 증명되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패배와는 상관없이 1968년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도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반혁명의 시대, 기나긴 암흑의 침체기를 거쳐 1968년 드디어 노동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원문 ㅣ국제코뮤니스트흐름

정리 ㅣ국제코뮤니스트전망

 

<원문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804/15127/fifty-years-ago-may-68

 

*68 투쟁 50주년을 맞아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에서는 팸플릿을 발행했다. 「코뮤니스트」에서는 토론과 함께 다음 호에 한국어 번역본을 실을 예정이다. 이 글은 토론의 연속성을 위해 ICC의 문제의식을 담은 글을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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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반(反)성폭력 규정

  • 코뮤니스트 반(反)성폭력 규정

     

     

    제1조 목적

     

    이 규정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서 발생하는 성차별, 성폭력, 가정폭력 사건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제반 사항을 규정하며, 성차별, 성폭력, 가정폭력의 근절과 예방을 통해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실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정의

     

    1. 성차별이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성별과 성 정체성을 이유로 행해지는 모든 차별, 배제, 제한을 말하며, 성별과 성정체성에 관계없이 표현하더라도 특정 성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간접차별)도 성차별로 본다. 또한, 물리적이고 언어적인 폭력과 위협 상황 안에서도 그것이 성이나 성 정체성의 차이를 바탕으로 발생한 경우에는 성차별로 본다.

     

    2. 성폭력이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언어적, 정신적, 물리적, 환경적 폭력을 의미하며, 동성 간 성폭력에 대하여도 같게 적용된다. 또한, 개인의 성정체성을 본인이 원하지 않는 대상에게 폭로(아우팅)하는 행위나 성정체성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행위 역시 성폭력으로 본다.

     

    3. 가정폭력이란 현재 혹은 과거의 법적, 비법적(동거) 가정 구성원 사이의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또는 재산상 피해를 수반하는 폭력 행위를 말한다.

     

    4. 2차 가해란 사건 이후 피해자에게 직․간접적인 또 다른 가해와 고통을 주는 일체의 언행(언어적인 폭력, 정신적인 협박이나 물리적 강압, 집단적인 따돌림, 괴롭힘, 피해자 신변 공개, 사건과 관련 없는 피해자의 과거 경력이나 행동, 성격 등을 문제 삼는 행위 등)을 하거나 피해자와 조직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는 것을 막거나 방해하는 행위를 포함하며, 본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

     

    5. 대리인이란 피해자가 그의 권리를 대리하도록 선임한 자연인을 말한다.

     

     

    제3조 적용 범위

     

    이 규정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 회원에게 적용되며, 피해자, 가해자, 제소자, 피제소자 어느 한쪽만 회원인 경우도 이 규정이 적용된다.

     

     

    제4조 사건처리의 원칙

     

    1. 사건처리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란 피해자의 권리를 확보하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 처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사건처리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의 내용은 아래와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1) 사건의 성립과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의 구체적인 진술에 바탕을 둔다.

    2) 사건의 처리 과정과 결론에서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다.

    3) 피해자가 제2의 피해를 보지 않도록 조직이 각종의 조치와 노력을 한다.

    4) 피해자의 치유와 복귀를 목적으로 하며, 최대한 신속하게 해결한다.

     

    2. 사건의 처리는 공식적 해결을 원칙으로 한다.

    사건의 해결은 공식적 해결을 원칙으로 하며, 필요한 경우 가해자의 실명, 사건의 처리결과, 조직의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공개할 수 있다.

     

     

    제5조 피해자 권리 및 보호

     

    1. 피해자는 사건의 조사와 처리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가지며, 조직과 대책위원회는 피해자에게 다음과 같은 권리가 있음을 알려야 한다.

    1) 피해자 대리인을 동반하거나 선임할 권리

    2) 특정인의 대책위원회 참여를 요청하거나 거부할 권리

    3) 필요 이상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할 권리

    4) 증인이나 참고인 등을 신청할 권리

    5) 임시조치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

    6) 사건 해결의 전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알 권리

    7) 가해자 처리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권리

     

    2. 이 규정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책위원회는 피해자 보호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기타의 조처를 할 수 있다.

     

    3. 대책위원회와 회원은 피해자와 그 대리인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며, 피해자 또는 대리인의 동의 없이 신원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제반 내용을 타인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

     

    4.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이나 처리된 이후 3항을 위반하여 피해자나 대리인에게 부당한 피해가 발생할 경우 그 사건 역시 이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

     

    5. 조직은 피해자의 치유와 복귀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피해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 상담, 치료, 쉼터 이용 등에 필요한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우선 지원하고 이후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제6조 사건의 성립

     

    1. 국제코뮤니스트전망(회원)에 사건을 신고/제소함과 동시에 사건이 성립되며, 사건을 접수한 조직은 사건의 조사 및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 구성을 10일 이내에 완료하여야 한다.

     

    2. 사건의 신고/제소는 피해자, 피해자의 동의하에 피해자 대리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다.

     

     

    제7조 적용시한

     

    제소기한은 따로 두지 않는다.

     

     

    제8조 임시조치

     

    1. 조직은 신고/제소 직후, 대책위원회가 구성되기 전까지 피해자의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피제소자를 피해자로부터 격리하거나 활동중단 등의 조처를 할 수 있다.

     

    2. 조직은 피해자가 1항과 같이 청구할 시 48시간 이내에 임시조치 여부를 결정하여야 한다.

     

    3. 조직은 임시조치를 결정한 때에는 이를 피해자, 피해자 대리인, 대책위원(장)에게 통지해야 한다.

     

    4. 피제소자가 조직의 임시조치 결정을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 피제소자를 이 규정에 따라 규제한다.

     

     

    제9조 대책위원회

     

    1. (구성)

    1) 조직은 사건이 신고/제소된 직후 10일 이내에 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2) 조직은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3) 대책위원회에는 피해자 대리인이 참여할 수 있다.

    4) 대책위원회에는 성폭력 전문교육을 받은 자를 참여시켜야 한다.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성소수자일 경우 성소수자 전문위원을 둘 수 있으며, 대책위 성원으로 외부 전문위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5) 대책위원회는 7인 이내의 홀수로 구성한다.

     

    2. (위상과 역할)

    1) 대책위원회는 사건 처리를 위한 한시적인 기구이다. 사건의 처리란 가해자의 징계 및 피해자의 치유를 위한 일정한 조치를 완료함을 의미한다.

    2) 대책위원회 해소 이후에도, 필요한 경우 재소집할 수 있다.

    3) 대책위원회는 신고/제소된 사건 처리에 대한 제반 활동을 수행한다.

    4) 대책위원장은 직권 또는 피해자 또는 피해자 대리인의 요청으로 이 규정에 따라 가해자에 대한 징계 절차 종결 시까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간분리 및 접근금지(전화, 온라인 접속 등을 통한 접근금지 포함),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가해자에 대한 활동중단 등에 해당하는 조치를 조직에 청구할 수 있다.

    5) 대책위원회는 가해자와 2차 가해에 대한 처리 방법을 조직에 요청할 수 있다.

    6) 대책위원회는 활동내용과 결과를 피해자와 피해자 대리인, 조직에 보고한다.

     

    3. (권한) 대책위원회는 사건의 처리를 위해 모든 회원과 조직에 필요한 자료의 제출과 관련인의 소환을 요청할 수 있으며, 모든 회원과 조직은 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제10조 가해자에 대한 조치

     

    1. 조직은 조사결과에 따라 다음과 같은 조처를 한다.

    1) 가해자 교육 등 성평등에 대한 재교육 프로그램 이수

    2) 가해자의 피해자와의 공간 분리 및 접근금지

    3) 피해자의 치료, 상담, 쉼터 이용 등에 드는 비용의 부담

    4) 조직 규약에 따른 징계

    5) 기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항

     

    2. 사회적으로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가해자의 경우 회원 여부와 상관없이 국제코뮤니스트의 행사에 참여시키지 않는다.

     

    3. 조직은 2차 가해를 한 사실이 명백할 경우 제10조에 근거하여 처리한다.

     

     

    제11조 공동해결

     

    1. 피해자, 가해자, 제소자, 피제소자 중 어느 한쪽이 회원이 아닌 경우 또는 사건의 사회적 해결을 위해 당사자의 소속집단들과 공동해결의 원칙에 따라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

     

    2. 조직은 가해자가 회원이 아닐 경우, 가해자의 소속집단에 가해자에 대한 처리나 징계를 요청할 수 있다.

     

     

    제12조 예방

     

    1. 성폭력의 근절과 예방,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정립하기 위하여 성폭력 예방 교육 및 성평등 교육을 신입 회원 및 회원 교육에 포함하여 실시한다.

     

    2. 조직은 연 1회 이상 소속 회원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한다.

     

    3. 성차별, 성폭력, 가정폭력 예방을 위해 회원이 전문교육을 이수할 시 조직에서 비용 일부를 지원한다.

     

     

     

    부칙

     

    1. 이 규정은 제정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

     

    2. 이 규정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공식적인 온라인 공간에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게시한다.

     

     

    2018년 6월 1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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