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만화영화책 - 2004/09/14 19:38

* 이 글은 님의 [요코와 해프닝]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오노요코 회고전...

벌써 1년도 더 되었나보다.

나도 그 회고전 봤었는데, 보고 난 감상기 비스므리한 글의 날짜로 봐서는 2003년 7월...

사다리 위의 'Yes'... 나도 왠지 삶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



내가 아는 오노 요코는 존레논의 부인이었고, 오래전 TV에서 퍼포먼스했던 장면을 봤던 것 같고, 영국사람들에게 더럽게 욕 많이 먹었겠다라는 것이다.
이번에 회고전을 한다길래 TV에서 봤던 도도해보이던 요코가 떠올랐고, 일생 너무나도 유명했던 남편 그늘 뒤에 있던 그녀의 진짜 모습이 궁금해졌다.
언뜻 봐도 겉멋들어 보이는 상류층 여인으로 내머리속에 남은 그녀를 알아보기 위한 전시회 관람, 이번엔 정말 망치로 몇대 맞은 것 만큼이나 머리속이 많이 깨져버렸다.
실존주의 철학에 심취해있었다던 그녀, 작품 하나하나가 행동만으로 구현해도, 생각만으로 구현해도, 과정만 해도, 결과만 봐도 되는 놀라운 것들이었다.
삶이 심심한 당신 옆에 은근슬쩍 재미있어 보이는 지시문을 한장 날리는 그녀, "너도 해봐, 재미있다"라는 미소를 머금고 손을 내미는 당당하고 따뜻한 그녀, 내가 찾은 그녀는 관람자 옆에 서서 함께 하고, 부담스러워하면 그림자가 되는 그런 사람이다.







들어서자마자 "집을 지으시오"라는 제목의 이 작품을 접할 수 있다. 사람키가 넘는 아크릴(맞나?) 벽집은 미로처럼 통로가 나있다. 이런 작품을 보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가서 서성거리고 싶은 생각이 들거다.
그래도 식상하다. 이런 작품, 이미 누군가 해본거 아닌가?
그런데 작품설명에 적힌 오노요코의 지시문를 읽어보니 "일몰이 만들어 내는 특별한 프리즘 효과만으로 존재하는 벽으로 이루어진 집"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이 벽은 빛으로 지어진 벽. 해변가 언덕에 일몰의 햇빛을 받아 이런 벽이 지어져있고 반사되어 무지개가 보인다면?
상상만 해도 멋진 장면이다.

본격적으로 통로에 들어가면 한쪽 벽면에 일본어로 쓰여져 있는 지시문들이 잔뜩 붙어있다.
지시문은 말그대로 그녀의 지시가 적혀있는 글들로, 많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방식이 채택되고 있었다.
지시문들을 "Grapefruit"이라고 부르던데 이유는 모른다. 설명이 없다!

지시문 한장에는 제목과 활동내용이 있고, 활동내용은 1. 2. 3. 과 같은 번호를 붙여 해야 할 행동의 순서대로 적어놓았다. 예를 들어 "1. 담배불로 종이에 구멍을 내라", "2. 꽃을 심어라" 등등..
다 읽어보고 싶었는데, 사람에 치여 결국 한장도 제대로 못봤다.
벽이 끝나갈 쯤에는 지시문대로 행동한 결과물이 사진으로 찍혀져 있고, 두툼한 "Grapefruit"가 묶여져 책으로 만들어져있었다. 작품이니 복사본이 나올리 없고, 해리포터의 마법책과 같아 보여서 정말 한권 갖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지시문들에 둘러싸여 있는 사다리 작품은 "천장회화(예스회화)"라고, 사실은 사다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천장이 더 중요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매달려있는 돋보기로 천장으로 보면 아주 작게 "YES"라고 쓰여져있다. 이 회고전의 정식명칭도 "YES ONO YOKO" 인데, "YES"란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주지하는 그녀의 중요 모티브중 하나다.
이 작품의 제목은 "못박기 회화"로 오노요코가 작성한 지시문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중 하나이다. 여기 박힌 못은 61년도에 진짜 관람자가 함께 작업한 것이다.
그러나 오노요코의 작품은 결코 전시회에 와야지만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시문에는 "매일 아침 못을 거울에, 유리 조각에, 캔버스에, 나무 또는 금속에" 박으라고 되어 있으니...

그녀의 지시문은 그야말로 "지시적"이다. "***하시오"라는 지시와 "*** 끝납니다"라고 끝나는 시점까지 다 정해버린 이 문장들에 "네가 뭔데 이런 걸 시켜?" 라고 버티면 예술의 향유는 끝난다.
그냥 즐긴다고 생각하고 따라하면 그녀가 본 세상을 같이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대단히 훌륭하게도 굳이 때와 장소를 가리게도 하지 않고, 직접 행동을 옮겨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속으로 순서대로 상상만해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 작품은 "자르기"로, 예전에 내가 TV 에서 본 퍼포먼스가 바로 이거다. 아마 존레논의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는 자료화면으로 나왔던 것 같다.
그당시 나의 감상은 서구의 자유주의를 향유하고자하는 동양 여자의 만용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40분정도 분량이라는 퍼포먼스 비디오를 10분정도 지켜봤는데, 완전 쇼크였다.
관람자는 돌아가면서 무대에 올라와 가운데 앉아있는 오노요코의 옷을 가위로 잘랐다.
오노요코는 무표정하게 움직임이 거의 없지만, 간혹 취하는 움직임은 사진과 같이 가슴이 보일까봐 손을 올리거나 다리를 꼬아 몸을 움추리는 행동등이었다.
이건 만용이 아니라 두려움이고 공포였다. 어디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가위의 습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정말 울고싶어지게 만드는 작품이다. 오노요코 작품중에 가장 따라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며,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이었다.
벽의 설명문에 보니, 페미니즘 퍼포먼스 역사상 아주 중요한 작품이라고 적혀있었다.
원래 평화주의자였던 오노요코는 존레논과 만나면서 둘이 함께 평화를 위한 각종 예술 행사를 많이 한 모양이다.
이건은 69년도에 암스텔담 힐튼 호텔에서 한 "침대시위" 사진으로 당시 신혼여행중이었고, 기자들을 초대해 비폭력 저항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이거 말고도 뉴욕인가에 어느 건물에 "War is Over"라는 반전평화 간판을 제작하기도 했고, 콘서트도 하고 상당히 다양한 평화운동을 행했던 것 같다.
오노요코는 전남편도 일본인 작곡가여서 음악에도 조예가 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존 레논과의 공동작품에는 카메라 촬영과 음악을 통해 자연으로의 회귀를 갈구하거나 평화를 외치는 작품도 몇가지 눈에 띈다.
전시회 끝무렵에 나타난 이 거대한 체스판 작품의 제목은 "신뢰를 갖고 하시오". 작품 설명에 적힌 지시문은 정말 걸작이다.

1) 자리선택 : .....높거나 낮은 자리를 고르시오 (사다리를 이용하거나......
2) 게임진행
3) 당신의 생각을 경기자들에게 전달하려 하시오 .......

높거나 낮은 자리라니? 20석인 의자들은 높낮이가 모두 동일하다. 그나마 친절하게도 사다리를 이용하거나 등등 의 방법을 적어놓았다.
하긴, 어디서 봐도 나와 가장 가까운 의자가 제일 높고, 가장 먼 의자가 제일 낮구나.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도 플래카드에 적거나 크게 외치거나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된다.
사실 거대한 순백색의 체스판이 10개에 역시 순백색의 의자가 20개나 있으니, 그 아름다움에 취해 갖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원래 전시회 입구에 똑같이 생긴 체스판 1개와 의자 2개가 있었는데, 한가족이 앉아서 열심히 체스놀이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이거 둘다 흰말이네. 이걸로 어떻게 놀지?"
평화주의자였으니 적군도 아군도 없는 상태에 대한 해석일수도 있고, 생각으로 구현하는 작품의 완성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긍정적인 사고의 발현일수도 있다.
우습게도 나는 그녀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다. 그냥 이 체스판으로 연습하면 머리속으로 앞의 몇십수를 내다본다는 이창호만큼 뛰어난 체스선수가 될수 있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림, 조형, 설치, 영화촬영, 퍼포먼스, 문장등 실로 다양한 영역을 섭렵하며 관람자와 함께 하는 작업을 해온 그녀는 매우 자유로워보였으나 언제나 자유를 꿈꾸는 자였던 것 같다.
그럼 결론은 "자유롭지 못한 자"였던 건가?
작품 대부분이 지시적이지만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건 바로 관람자에게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옆에 앉아서 또는 뒤에 서서 "이거 해봐라, 저거하면 끝난다"라고 했지만, 내가 뭘 느껴야 하는지 정해주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품은 비폭력적이며 자유를 희구하는 자의 것이다. 느낌의 강요를 만드는 거대하고 웅장한 작품들 내지는 그런 미술평론들 에서 다소 자유롭다.

* 전시장에 대한 뒷다마 :
이 전시회는 시청역 삼성생명빌딩안에 있는 R갤러리에서 한다.
삼성생명빌딩의 웅장함과 앞의 넓은 보도블럭에 감동받은 나는 R갤러리에도 환상을 품고 들어갔는데, 상대적으로 과천의 H 미술관이 얼마나 좋은 미술관인지 깨닫고 나왔다.
공간이 너무 좁아서 주말 사람 북적거릴 때 갔던 걸 매우 후회해야 했고,
퍼포먼스와 설치가 많은 오노요코의 작품에 맞지 않는 옷이라고 몇번이고 머리속에서 외쳐야 했고,
나가는 길에 상품점을 들려야하는 구조에 삼성이라는 회사 이미지가 겹쳐져 버렸고,
구석구석 웅장함을 더하기 위해 설치된 헛된 공간 낭비에 눈쌀 찌푸려야 했다.

비록 소심하지만 평생 S 라는 기업과는 관계 없을테고 내 글 때문에 관람객 수가 떨어질리도 없으니,
혹시나 전시회 관람후 위에 열심히 적은 나의 감상평은 "뻥카"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시는 분에게
책임의 반이상은 전시장이라고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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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19:38 2004/09/1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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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류 2004/09/15 0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 전시회 참 즐거웠어요. 특히, 지시문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복작대는 전시장에서조차 평화를 느낄 수 있게 하는 힘에 무척 놀랐답니다. 저는 새벽이 오기전 어둠을 조각내었다가 다시 새벽에 내어보이라는, 뭐 그런 지시문이 인상적이었는데... 오랜만에 기억이 나네요. ^^

  2. jineeya 2004/09/15 1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아요~! 그거 전시관 들어가자마자 있던 거죠? '집을 지으시오'. 모든 지시문들이 정말 '지시'이긴 한데, 자유를 주는 기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