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_1997 - 2004/12/26 16:11

함께 중국여행 가기로 했던 친구는 여행가기 3개월전부터 "우리 스터디나 해볼까?"하고 절 잡았죠...-_-;;;

 

그래서 얼떨결에 봤던 책중에 하나가

[바로보는 중국 현대사] - 20세기초에서 천안문 사태 이후까지 -

(찰리호어 지음/조남선 옮김. 풀무질 신서)

입니다.

겉표지가 빨간 벽돌모양이라 우리끼리는 벽돌책이라고 불렀었어요.

이제 보니 그때 요약해놓은 자료도 남아있었네요.



. 중국사회의 개화 -

1840년대 아편전쟁과 함께 시작. 아편전쟁의 시작으로 제국주의가 중국에 침탈. 청조정부는 제국주의의 확장을 지지하는데 철저히 무능력. 자신의 조세권조차 상실.


 

. 1911년의 유산된 민족주의 봉기 [신해혁명으로 이어진 무창봉기] -

노쇠한 제정 몰락. 공화정부 수립.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지방군벌들에 의함. 기근과 내전, 비격단의 역할이 만성화. 혹독한 과세와 군벌의 가렴주구로 농민 핍박. 농민들의 도시이동

 

.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도시화의 가속화 -

식량과 피복에 대한 교전국의 수요증대로 1913~19년 시기동안 40%나 수출증가. 중국과 일본의 자본가 번창. 공업기계류의 수입이 1915~21년동안 13배 증가. 산업노동자계급도 비례증가. 약 150만명 도시 산업노동자 출현. 이들은 가족이나 촌락출신의 끈에 의해 수공업노동자와 운송노동자, 실업자와 연결

 

. 1차대전후의 5.4운동(1919) -

젊은 지식인들은 서구 사상에 영향을 받아 중국 구원의 길로 '과학'과 '민주주의'를 주장. 구래전통을 진보의 장애물로 간주. 그러나 베르사이유 회담에서 일본의 무력점거 협약을 승인한 서구세력에 배신감을 느낀 그들은 1919년 5월 4일 3,000여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집회. 서구열감 비판. 중국의 이익을 팔아먹는 북경정부 비판. 중국 최초의 민족주의 시위. 중국사회의 뿌리깊은 관행과 관습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 여학생들이 중심적 역할을 수행. 여성의 남성에 대한 복종에 도전. 지식인들 주도로 도시의 대중을 운동속으로 끌어들임. 최초의 노동자 파업. 주슬로건: 일본상품 배격, 북경정부의 무기력 비판, 파업으로 체포된 학생 석방, 친일장관 해임.

 

. 중국 공산당 창당(1921) -

지식인이 창당 멤버. 노동자 계급속에 영향력 확대. 노동조합 조직화. 군벌과 적대관계(군벌==중구자본가). 1919년 군소군벌들과 동맹한 국민당 정부(신해혁명 이끔)가 재조직. 국민당은 수동적인 대중기반을 가짐. 국민당과의 합작 결의. 독자적인 공산당 세력이 아닌 국민당의 가장 활동적인 분자로 작업하며 당의 현장기반 구축. 중국 공산당은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음. 노동자 독자당이라기 보다는 제국주의에 대항한 민족주의가 주 슬로건.

 

. 1925년 노동자 혁명 -

임금인상, 파업으로 시작해 공안부대의 노동자 살해사건 발발로 정부와 외세에 대항하는 총파업 확대(공산당 주도). 그러나 중국 부르조아지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외국인 소유공장에 한정하려 했지만, 중국인 소유업체까지 미쳐 제국주의 반대 투쟁이 아닌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독자적인 노동운동으로 확산. 지식인이나 공산당도 노동자세력에 따라가게 됨.

외세에는 반대하나 국가권력의 지도권을 쥐고자 하던 국민당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노동운동을 등에 업었으나, 은밀하게 서방과의 공동이익을 교섭. 농촌에서도 농민봉기(이 봉기로 농민을 유린했던 구관습이 분쇄되고, 여자와 아이의 인신매매가 금지, 아편과 비용이 많이 드는 종교의식 금지, 전족의 악습폐지, 고리대금업자와 지주 추방, 지대와 토지세 중단). 이는 국민당의 이익과 대립되어 국민당은 농촌노동자 탄압 시작. 중간에 낀 공산당은 '악덕지주'와 '선량지주'를 구별해줄 것을 요구. 이는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모순. 노동자, 농민의 반발로 공산당은 중립을 지킴.

혁명기간동안 성장한 공산당은 노동자 대중에 영향력이 막강해졌고, 공산당과 제휴한 국민당은 상해에 입성. 입성후 공산당과 노동계급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 민족주의적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보유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파괴. 이 노동자 패배는 공산당의 노동운동을 철저히 파괴시킴. 그러나 지역국부적으로 노동운동이 계속. 공산당은 체제노선전환(국민당에서 완전독립, 독자적 노동계급조직으로의 전환)하지 못해 예전 역량을 거의 잃음. 공산당이 살아남기 위해 '광동꼬뮌'을 일으켰으나, 이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당의 사업으로 노동자계급과 완전히 고립되어 수행된 모험. 이로 공산당과 노동계급사이의 끈이 완전히 끊김. 위의 공산당은 소련 스탈린에 의해 영향받은 조직.

 

. 모택동의 대장정 -

잔존하는 공산당 세력중 국민당 지방군벌의 힘이 미약함. 척박한 영토를 중심으로 농민집단을 중심으로 확장. 1932년 국민당에 위협세력으로 성장. 국민당의 탄압. [대장정]으로 대응. 모택동 정부의 근거지에 탄압이 들어오자 자구책으로 본거지를 중국 서부의 오지로 옮김. 이 대장정은 1년을 지속. 살아남은 사람이 2% 정도로 고된 여정. 이 대장정의 성공으로 게릴라 근거지 구축. 또한 핍박받는 농민들에게 인간적 대접을 해 농민의 지지를 얻음

 

. 모택동 공산당의 권력 구축 -

대장정이 끝날 때쯤 일본의 침투로 국민당과의 대립을 접어두고, 민족주의 운동을 하기 시작. 같은 일본타도를 내세운 국민당과의 통일전선 구축. 농민의 지지를 받던 독점지주폐지가 없어지고, 투쟁초점은 항일애국연합이 됨. 효과적인 게릴라전으로 일본에 저항 지도 권력을 구축(대장정과정에서 고통스럽게 체득한 게릴라전의 교훈들이 화북평원과 구릉지대에서 눈부시게 적용).

모택동의 공산당은 대중적 농민 민족주의위에서 권력 구축. 대중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잔인한 일본군대의 행동이 농민의 민족주의를 부추겼고, 일보군대를 막아준 모택동군을 의지. 이에 향신세력의 절대권력을 꺾음으로써 더욱 지지받음. 일본군에 승리하자마자 국민당과의 내전이 다시 시작. 이 내전은 게릴라전이 아니라 대중을 구경꿈으로 하는 두 정규군사이의 일반적 전쟁.

두 군대의 근본적 차이는 모택동의 홍군은 자신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신념으로 움직였지만, 국민당 군대는 자동인형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이어야 했으나, 민족 상황에 힘입은 대중과 연결고리가 없는 공산당의 권력장악이 중국 현정부의 수립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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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6 16:11 2004/12/2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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