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_1997 - 2004/12/26 22:06

. 문화혁명(1960년대) -

지배계급의 권력투쟁이 거리로 연장을 위한 명분. 모택동이 희박해진 권력기반을 정비하기 위해 선동한 캠페인.

자유적인 자신의 적들을 "자본주의적 길을 걷는 권력내부의 사람들"로 공격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하다" (지배자가 허용하는 반란은 정당한 것으로 취급되는 아이러니를 당시 대개의 사람들은 알지 못함)란 구호.

의식적으로 조작된 군대 상층부와 홍위병을 기반으로 적들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정권을 다시 잡음. 그러나 문화혁명은 이제 모택동의 의도에서 벗어나 대중의 자생성에 의해 전국으로 확산. 파업까지 이름.

모택동은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군부 투입(혁명위원회). 내전 일어남. 이 혼란으로 하급관리들은 평화와 안정을 원했고, 산업은 심각한 타격받음. 몇년동안 입은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필요.

과학,기술 발전이 완전히 정지(학교 졸업자가 4년동안 아무도 없었고 지식인들은 은둔). 소련과의 국경분쟁압력. 그러자 미국과 일본에 경제개방을 해야 경쟁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옴(문화혁명기간동안 비난받은 사람들이 이들임). 이에 반대하는 분파간의 복잡한 권력 투쟁 양상. 모택동은 그 권력투쟁위에 군림. 주 투쟁은 4인방(보수)과 현대화분파간의 투쟁. 현대파의 임표 제거. 4인방 득세. 노동자 파업으로 이를 막은 등소평 등장(현대파). 4인방에 분노한 등소평지지자들에 의해 천안문소요 발발.


 

. 1976년 4월 천안문소요 -

현대파 지지자의 4인방에 대한 도전. 주은래 추모식으로 발발. 이로 인해 4인방은 권력에서 고립. 모택동의 죽음으로 4인방 체포. 1978년 등소평의 등장. 반대파 제거. 서방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에 문호개방이 모택동시대의 유산인 정체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 '시장사회주의'발전. 포위경제 포기.


<문화혁명의 종말>

 



*참고1.

핑퐁외교(1971) -

베트남전에서 패한 미국은 중국과 소련의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차단하려 함. 중국은 국내의 비판적 여론을 탄압하고 관심을 돌리기 위해 외교긴장 강화. 소련과의 충돌. 모택동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과의 대립 완화를 위해 미국과의 외료를 함. 이로 미국의 예상대로 중국의 베트남 원조 중단.

*참고2.

중소대립 -

소련은 중국 원조 중단. 중국은 대약진구호를 내걸고 자력으로 갱생하려함. 소련이 '미국을 앞지름'을 내걸자 중국은 '영국을 앞지름'을 목표로 내걸음. 그러나 농업국인 중국은 공업화를 위한 자본과 기술 부족. 이 부족분을 노동력과 정신력으로 극복. 자력으로 원폭 개발. 그러나 전근대적 방법으로는 성공 못함. 농업만 황폐화. 이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공산당내 실권 잃음. 문화혁명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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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6 22:06 2004/12/26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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