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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9/01/29 23:35

 

80세 노인.
평생 농사로 인해 겹겹이 쌓인 주름과 백발 이외에도
10대에 침을 잘못 맞아 힘줄의 성장이 멈춘 관계로 그 굵기가 오른쪽 다리의 절반 밖에 안되는 왼쪽 다리.

 

77세 노인.
경운기도 안 쓰고 농약도 안 치는 꼴통 남편에게 시집 와 오랜 세월에 걸쳐 남겨진 주름과 꼬부랑 허리.

 

그리고 여러가지 의미에서 이 둘보다도 더 눈에 띈 존재인 40대 소.
평균 소의 수명은 10년이지만 무려 4배가 넘은 세월을 살면서 비쩍 말라 살은 없고 뼈에 그냥 털만 씌워놓은 것 같은 형상의 몸. 그리고 귀를 찌를 듯 자라서 몇번이고 갈았던 뿔.

 

영화 [워낭소리]는 이 3명이 평생을 거쳐 다져온 삶의 소중한 보물들을 모은 것 같은 - 여러 의미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몹시도 운 좋은 - 이야기다.

 



 

 

꽃같은 부자집 도령들이 수두룩 빡빡 등장하는 드라마가 유행하는 요즘,
매끄러움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주름투성이 몸에 흙이 덕지덕지 묻은 옷은 결코 매력적인 아이템이 될 수 없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화면은 꽤 매력적이다.
세 주인공을 감싸고 있는 푸르디 푸른 자연은 관객석까지 그 풀향기를 전달해줄 것만 같고,
그 안에 언뜻언뜻 보이는 주름과 굽은 허리와 소의 흙딱지는 당연히 거기 있어야만 할 필요충분조건들이었다.

 

할아버지가 데려온 젊은 일소가 늙은 소를 괴롭히는 에피소드도,
끊임없이 할아버지에게 투덜대는 할머니와 일언반구없는 할아버지의 에피소드들도
유쾌하기 그지없는 삶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소가 잘못 먹고 죽을 지도 모르니 논밭엔 일절 농약을 치지 않고, 매일같이 시원찮은 다리를 끌고 언덕에 올라 소 먹일 꼴을 베는 할아버지.
네다리가 꼬일 듯, 지금이라도 쓰러질 듯 싶지만, 느릿느릿 걸으면서 할아버지가 잠들 정도로 안정감을 주는 소.
소가 마지막 생명을 다한 후에도 밭 한가운데 고이 묻어주고 절에 가서 안녕을 빌어주는 관계.
생명이 생명을 위해 하는 행동이야말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감을 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대한민국에선 다시 못 볼 골동품같은 삶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는 꽤나 흥미로운 삶들을 본 것 같아 즐겁기 그지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종종 웅장해지려는 사운드와 엔딩컷의 '...에게 바칩니다'는 완벽한 실수처럼 보였다.

 

굳이 감동을 강요하지 않아도 좋았다.
영화의 생각(?)만큼 아련하거나 골동품같거나 철저히 남의 삶 같지도 않았다.
때론 유쾌하고 때론 감동적이고 때론 행복했던 이야기.
이런 삶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영화야말로 두번 다시 볼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이야기.


* 사진출처 : 다음(http://www.daum.ne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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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9 23:35 2009/01/29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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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10/29 13:27

아는 이가 극찬을 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스토리도 알려주지 않았다.

동네 방네 벨소리가 영화 속 삽입음악들로 바뀌어가고 있단다.

 

그래서 오랜만에 부푼 기대를 안고 영화관을 찾았다.

 

 

포털을 뒤지다보니 어느 블로거가 '음악 하나는 최고로 잘 만든 것 같다'라고 썼는데,

'음악 하나 잘 만든 건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 명확한 사실에 동의하는 것이 '영화 또한 그러했다'고 포괄적 동의를 해주는 건 아니다.

영화적 기법이 딸려서냐고? 그 반대같다.

 

분명 거친 화면, 튈 것 없는 장면들인데, 인공조미료 냄새가 풀풀 난다.

음악이 주인공을, 그들의 감정이입을, 스토리를 다 잡아먹어버린 느낌이다.

음악으로 표출하고자 하는 감정은 영화 녹아들지 못하고 혼자 과잉되어 스크린 위에 둥둥 떠다니는 듯 했다.

이걸 누구나 흔히 깨닫는 멜로의 한 코드로 감싸 해소하려하니

나중에는 저 어설퍼보이는 화면조차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구나에게 익숙한 향수를 통째로 뒤집어 쓴 느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뮤직비디오 10편 쯤 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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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9 13:27 2007/10/29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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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6/17 21:50

여러 주인공들을 시켜 감정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영화는 수습하는 데 한참을 헤매게 된다.

그러다가 감정선 하나라도 놓치면 진짜 별볼일 없는 영화가 된다.

처음엔 그런 영화가 아닌가 싶었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부부 중 부인이 아프게 되고,

건물 관리인인 한 남자는 건물에 근무하는 근사한 여자를 - 남모르게 - 쫓고,

한 고등학생은 채팅으로 만난 동성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다 바람맞게 된다.

 

그러다가 그 여인, 쳉이 은근슬쩍 화면에 끼어든다.


 

 



쳉은 어릴 때부터 귀가 먹고 눈이 먼 사람이다.

세상과의 소통이 매우 어려울 듯 보이는 그녀는 그러나, 화면 안의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학교의 선생이다.

그녀가 등장할 때는 배경음악이 전혀 없다.

그녀가 말하지 않을 때, 즉 그녀가 타인과의 소통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녀의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가 자막으로 흐른다. 처음엔 '영화 자막 잘못 나온 것 아니야?' 싶을 정도로 고요 속에 흘러가는 것이라곤 그녀의 움직임과 자막뿐이었다.

감독은 마치 그녀가 사는 고요의 세상을 맛보게 해주려는 듯 하다.

 

 

이렇게 열정적이지만 고요의 바다에 사는 그녀의 삶이 지나가는 중간중간,

아프던 부인은 죽었지만 남편A는 부인을 위한 식사를 여전히 준비하고 있고,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쫓아다니던 관리인B는 드디어 그녀를 위한 편지를 준비한다.

자신을 버리고 남학생에게 가버린 연인을 위해 여고생C는 끊임없이 문자를 보낸다.

 

아, 짧은 시간안에 흩날리는 감정들...

게다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가슴 먹먹한 감정들이다.

도대체 이 영화는 어떤 결말을 준비해놓고 있길래 이렇게 가슴의 응어리를 계속 쌓게 만들어 놓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 영화랍시고 중간에 '뚝!' 끊 듯 끝나버리면 '그저 그런 영화 봤다'며 화낼 생각도 살짝 들었다.

그렇게 영화는 결말을 내야 하는 시간에 가까워가고 있었다.

 

A는 우연한 기회에 부인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쳉에게 먹이게 된다. 그리고 쳉은 생전 처음 본 A지만 그에게서 받은 음식의 기운을 그녀 특유의 행복한 기운으로 되돌려 보내준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 순간 A는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오랜 시간 곁에 머물길 애원했으나 부인은 편안한 긴 잠을 소원하였고, 실제 그렇게 하였다.

아무리 희구하여도 얻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이제 A는 '보내야함'을 매우 매우 확실하게 깨닫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완벽하게 깨닫는 이 순간은 쳉에게서 행복의 기운을 받은 바로 그 순간이다.

쏟아지는 서러운 눈물의 A를 쳉은 소리없이 보듬어 안아준다.

 

한편 B는 결심의 결심을 거듭하고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그녀에게 전하러간다. B를 한번도 보지 않은 그녀에게로 가는 길, B는 신바람이 나지만 스크린을 쳐다보는 관객들에겐 위태 천만 그 자체이다.

C는 역시나 자신을 버린 연인에 대한 미련을 접어버리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애정을 날려보내던 핸드폰을 옥상에서 바닥으로 날려보낸다. 그리고 핸드폰과 함께 자신도 날려보내고 만다.

그런데 C가 옥상에서 떨어지는 순간, 행복의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던 B와 쿵!

B는 사방에 번지는 자신의 선혈 속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편지를 보며 죽어갈 수 밖에 없었고,

B와 부딪치는 바람에 '죽음'이라는 선택을 완수하지 못한 C는 병원에 실려 새로이 인생을 시작해야하는 처지를 맞이한다.

 

결국 A,B,C 모두

아무리 애틋했던 감정도, 절절했던 소원도, 상대방에게 닿지 못하였고,

그들의 감정을 추스리려는 노력은 무엇하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숨막히게도 영화는 이렇게,

늘어놓기 시작한 감정선들을 느려보이지만, 매우 자연스럽고 확고하게 정리한다.

 

씨네21의 어떤 글을 보니

고요하게 감정을 뒤흔들어놓고는 배경음악도 안깔아줘서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괘씸해한다.

맞는 말이다.

아무도 외치거나 울지 못하게 만들면서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게 만든다.

그리하여 느끼게 되는 먹먹함, 뭔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의 소용돌이,

그러나 감독은 '그게 사는 거'라고 '그렇게 사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느날 A,B,C 모두 (B는 확인할 수 없겠군-_-)

인생의 모든 경험과 감정과 노력을

쳉과 같이 행복의 기운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게 되길 빌며...

그러나 지금의 가슴 아픔 또한 일생에 여러번 갖기 힘든 소중한 감정임을 잊지 말길 바라며...

지금의 이 가슴 저릿함, 꽤 오랫동안 내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 출처 : 씨네21(http://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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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7 21:50 2006/06/1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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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2/22 23:55

요즘 열나 바쁜데... 그런데... 그래서그런가?

보고싶은 영화가 많다.

 

어제 본 영화 [Time to leave].

죽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날, 과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누군가들과 어떠한 관계를 정리해나갈까?


 

 



젊은 나이에 꽤 잘 나가는 사진작가, 로맹은 암이 퍼져 시한부 3개월을 선고받는다.

의사는 그에게 항암치료를 권하지만 그는 좀 다른 일을 해나간다.

 

끊는 시간

부모와 여동생에겐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거울을 보며 열심히 연습한다. "저 곧 죽는데요."

하지만 그는 가족과의 저녁식사에서 여동생에게 "그러니까 남편이 널 떠나지"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동거중인 애인 사샤에게 애정이 식었다며 나가라고 한다.

할머니를 만나러가던 길에 있던 식당의 불임부부가 제안한 정자 기증, 아기는 딱 질색이라며 단번에 거절한다.

 

이렇게 주변의 모든 관계를 끊음으로써 죽음을 준비하는 듯한 로맹.

그러던 로맹이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알린 존재는 바로 할머니다.

할머니가 묻는다. 왜 나에게는 알렸냐고?

로맹이 답한다. 당신은 나와 똑같으니까.

 

다시 맺는 시간

몸이 조금씩 안좋아지고 구토와 약이 반복되는 어느날, 동생에게서 화해의 편지가 도착한다.

로맹은 핸드폰으로 동생에게 사과하고 동생은 이내 오빠를 용서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만나자는 제안을 일이 바쁘다며 회피한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다시 만난 사샤. 격했던 감정은 이내 차분해졌다.

그날 로맹은 마지막으로 섹스를 부탁했지만 사샤는 거부했다.

로맹은 사샤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대고 잠시 누웠다. 그렇게 자신이 (아직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물론 사샤는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다음엔 바로 불임부부를 찾아가 3명이 아기를 갖기 위해 함께 섹스를 한다.

 

그리고 드디어, 떠날 시간

로맹은 유언장을 작성하고 유산 상속자를 곧 태어날 아기로 하였다.

그리곤 이불 한장, 물안경 하나를 들고 해변가로 찾아간다.

열심히 수영을 하는 그. 왠지 숨을 쉰다는 것이 굉장히 고귀한 행위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

모래사장으로 나와 이불 위에 누운 그는, 그러나 모두가 해변을 떠나고 노을이 지고 해가 지도록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혼자 가는 시간, 혼자 죽는 장면.

이런 장면은 왠지 고독하고 서글픈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Time to leave]가 보여준 죽음은 뭔가 색달라 보인다.

 

로맹의 애인 사샤는 이런 말을 했다. "애인이 생긴거지? 너는 혼자서 못살잖아."

그러나 혼자서 살지 못했던 로맹은 오로지 혼자서 죽음을 준비해나간다.

그는 처음에 고독과 서글픔이 배어나는 방식으로 주변의 관계를 끊어갔으나,

이내 끊은 관계들을 아주 조금 회복해나갔다.

마치 그들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충분히 확인시켜주면서도, 결코 자신의 죽음에 몰입하지 않도록 배려하듯.

 

죽음을 준비하면서 점점 더 혼자가 되어가는 로맹.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의 죽음은 외로워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 지는 해를 뒤로 한 그의 모습조차 오히려 편안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시간, 떠남을 준비했던 시간은 꽤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이 두렵고,

- 인간이란 워낙 혼자 사는 존재라지만 - 특히 혼자 맞이하는 죽음에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로맹을 보면서 어쩌면 혼자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것에 편견이 있었던 건 아닌 지,

과연 나는 죽음을 잘 준비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 사족

음... 그런데 로맹은 왜 아기를 남겨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을까나?

요즘 저출산 얘기를 하도 많이 듣다보니 잠시 '홍보영화?'가 아닐까하는 생각이...ㅋㅋㅋ

 

* 사진 출처 : 씨네21(http://www.cine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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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2 23:55 2006/02/2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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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12/25 00:01

극장가에선 해리포터와 다가올 '태풍'에게 밀리고,

운동권에선 총파업과 WTO에 밀린

그런 다큐 한편이 있다.(지금쯤이면 있었다인가?)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다큐 한편.

서울에 사는 나는, 결국 시네아트(맞나?)에서 할 때를 놓치고 인천까지 가서야 볼 수 있었다. 일본인이 갖는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생각, 지도자들이 단절시킨 민중의 알 권리,

요즘 황우석을 비롯한 APEC, WTO 등을 다루는 언론의 모습을 보면서 알 권리, 생각할 권리가 조작됨으로써 사람들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 지 깨닫게 된다.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수백만명의 사망자를 낸 소위 '대동아전쟁'.

아시아를 유럽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이 전쟁에 대해 일본인들은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 수많은 아시아 민중들을 학살하고, 강간하고, 징병하고, 굴욕을 안겨주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국인은 이희자라는 50대 아줌마.

그녀는 태어난 지 13개월 만에 아버지가 일본군에 징병당했다.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재혼하였다.

그녀가 새삼스레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나서게 된 동기는 다소 궁금하지만,

어떻든 수많은 세월이 지나 1995년부터 아버지의 존재를 찾아나선 그녀는 3년만에 아버지가 중국의 난징에서 죽고, 천황을 위한 전쟁에 위대한 죽음을 맞이한 일본군으로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진 걸 알게 되었다.

 

또 한명의 주인공인 일본인 후루카와 마사키.

그는 공무원으로 사회운동과의 인연이 나름대로 있는 사람 같다.

우연한 기회에 고베에서 이희자씨를 만난 그는, 그녀의 일본에 대한 엄청난 분노에 놀라고 만다.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고베 지진에 대해 그 당시 희자씨는 안되었지만 받을 만한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후루카와 마사키씨는 희자씨의 아버지 찾기에 상당히 많은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 조력자 중 하나가 되었고, 그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신뢰감과 안정감이 느껴진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본 장면 중 하나는 제2의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난징대학살 박물관 장면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내가 영화를 본 다음날인 12월 18일 새벽 MBC에선 난징대학살에 대한 다큐를 방영하고 있다.

거기엔 [안녕사요나라]에서 이희자씨가 기겁을 하며 봤던 박물관의 모습이,

내 키보다 높은 흙더미 사이엔 빼곡하게 묻힌 뼈들의 단면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한 지역에서 200여명이 넘게 발견된 시체엔 번호표가 붙어있었고, 성인 키의 1/3도 안될 것 같은 작은 시체는 아이들이었다.

중국까지 함께 날아갔던 또다른 영화의 주인공 후루카와 마사키씨는 연신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되뇌이고 있다.

 

또 하나의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야스쿠니 신사 앞 시위.

한 20대로 보이는 여성이 연신 일본어로 야스쿠니신사의 문제점에 대해 지나가던 일본인들에게 외치다가 경비원인지 보수쪽 인물인지 모를 아저씨에게 정통으로 얼굴을 가격당했다. 싸가지...-_-;;;

당연히 모를만한 일, 몰라도 누가 뭐라하지 않을 일에 당당히 나선 그녀의 벌개진 얼굴을 희자씨가 어루만져주었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미안합니다'를 외칠 뿐이다.

 

두 주인공을 번갈아 보여주고 일본 내 야스쿠니신사에 대해 반대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희자씨의 굳은 표정 속에서 그녀의 분노를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조센징은 가라!" 고 외치는 일본 우파들 앞에서 '그런 조센징을 왜 야스쿠니신사에 모셔놓았냐? 내놔라!'라고 외치는 그녀의 말엔 재치를 넘어서 늘상 당하는 폭력들에 단련된 강인함과 분노가 잔뜩 서려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분노가 녹아내리고 강인함 속에 갇혀있던 여린 마음의 벽이 부서지는 그 순간은 그녀와 뜻과 생각을 나누는 일본인들과 어울려 있을 때였다.

그렇게, 이 영화는 희망을 말한다.

 

 

* 여기서 여차저차 끝냈으면 좋겠지만 몇마디 뱀발을 달자면,

이희자씨의 다양한 감정선을 따라가본 것은 매우 좋았지만 후반으로 갈 수록 화면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심지어 보여주는 공간조차 여러번 반복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차라리 공분 또는 슬픔, 전쟁의 처절함을 느끼게 할만한 다양한 정보가 제시되었으면 하는 욕심도 좀 생긴다.

난징을 남경이라고 표현한 것도 차라리 중국인의 발음으로 해주는 것이 맞지 않았나 싶다. 그 '남경대학살'이 '난징대학살'인 거 파악하는데 좀 걸렸다...-_-;;;

 

근데 참 희한하지? '이희자'씨 성함을 적는데, 계속 '김지희'라고 적고 있다.

 

* 안녕사요나라 홈페이지 - http://www.annyongsayonara.net

* 한겨레 리뷰 - 야스쿠니신사의 재조명, <안녕, 사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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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5 00:01 2005/12/2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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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10/25 16:37

단 한번의 폭발 굉음도 없고,

테러리즘에 대한 어떠한 입장도 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에 관한 내용을 담은 영화가 있다.

 

말레이지아의 감독 우밍진(Woo Ming Jin)은 2002년도 발리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 영화 [월요일 아침의 천국 / Monday Morning Glory ]을 만들었다고 한다.

감독이 밝히는 이 영화는 '테러리즘이 아닌 테러리스트에 대한 영화'이며,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빈곤하고 실업 상태에 놓인 말레이지아 청년이 선택한 직업에 관한 영화이다.

 

처음엔 낚시터를 운영하는 두 형제가 청년 두 사람을 일터에 채용한 줄 알았는데,

왠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고 서로 심각하게 대화 나누고 하는 폼이 영 심상치 않다.

어느덧 제조된 폭탄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더니 두 청년이 오토바이로 폭탄을 운반하다가 터져버리고, 결국 한 청년 A(이름 까먹었다-_-;;)만 살아남는다.



장면이 바뀌어 그들은 이미 경찰에 붙잡혀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포박된 채 사건 재현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살아남은 한 청년 A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경찰청장 비슷한 사람은 연신 폭탄테러범 생포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고 있다.

사건 재현의 순서에 따라 화면은 과거를 오고가며

실제 낚시터의 두 형제와 그들 조직의 지도자, 청년 A와 새로 채용된 또 하나의 청년이 행했던 폭탄 제조, 테러 장소 물색, 예비 연습 등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간간이 낚시터 두 형제와  지도자가 있을 때는 이번 투쟁의 의의를 언뜻언뜻 언급하고 청년들의 의지를 확인한다.

하지만 청년들끼리 있을 때는 이번 일의 위험성과 이번에 벌 수 있는 돈, 어디에 쓸까에 대한 대화가 오고간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즈음이 되어 청년 A는 그들이 테러 목표로 정한 미국인이 많이 있을 것 같은 나이트클럽 화장실 변기에 폭탄 가방을 놓고 잠시 세면대에서 얼굴을 씼으면서 심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화장실을 나오려는 순간, 클럽 손님 중 하나가 그에게 가방을 놓고 갔다면서 다시 건네준다.

잠시 후 낚시터 두 형제가 클럽에서 나오고 등뒤로 들리는 폭발음,

그리고 청년 A의 애인이 청년A가 일한다고 데리고 온 적 있는 낚시터에서 물끄러미 물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스친다.

 

 

우밍진 감독은 처음엔 폭발 장면을 넣어볼까 고민을 했다가 예산도 없고 오히려 극을 이끌어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을 듯 싶어서 폭발 장면 전혀 없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폭탄을 실고 가는 오토바이에서 한 명의 사망자가 나올 때에도 일어난 당시의 폭발은 자르고 그 이후 길가에 내팽겨쳐진 청년 A와 얼굴에 붕대를 덕지덕지 붙인 청년 A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도 테러리즘보다는 테러리스트에게 초점을 맞춰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지를 잘 드러낸 방식같다.

 

한편 이 영화는 내가 알고 있던 테러리스트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깼다. 간혹 중동에서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자살폭탄테러를 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마음으로 와닿지는 않았는데, 실제 생활고와 실업을 맞이하면서 직업처럼 선택하는 청년 A를 보니 그야말로 '실감이 난다'.

 

부가적으로 말레이지아 경찰이 테러리스트를 다루는 관행일지도 모르는 행위에 대해서도 언뜻 엿볼 수 있었다.

테러범으로 붙잡힌 낚시터 두 형제와 폭탄제조자, 지도자 등은 이번 테러의 정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역설한다. 그 와중에 경찰은 지도자를 풀어주고, 다음 날 지도자는 강가의 사체로 발견된다. 언론에 '도주'라고 표현된 이번 사건 이후로 낚시터 두 형제는 테러에 대해 자신들의 죄로 규정짓는 기자회견을 갖게 된다.

 

그냥 일반인과 하등 다를 것 없는 테러리스트의 삶과 생각에 대한 고찰.

테러리스트에게 테러는 이념의 실현, 체제의 저항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내지는 누군가에게는 - 타인과 자신의 목숨을 담보했음에도 불구하고 - 밥벌이의 수단이요, 삶의 한 꼭지이다.

 

왠지 자본주의와 미제국주의에 맞서는 테러리즘이

자본주의 사회의 빈곤과 실업의 심화를 통해서 

목숨조차도 걸고 흥정할 만큼 나락으로 떨어진 현실을 통해서

기존과는 좀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모순의 도출로써 작동하고 있는 듯 하다.

체제의 저항이었을 테러는 체제의 모순을 통해 점차 체제 내에 속한 일상의 하나로 재생산되고 있다.

 

* 사진출처 : PIFF (http://www.pif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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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5 16:37 2005/10/2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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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10/03 02:17

그러고보니 서극의 영화는 꽤 본 것 같다.

일단 [황비홍] 시리즈는 다 봤을테고, [요수도시], [청사], [금옥만당], [칼(刀)], [촉산전] 등...

헉, 명절 때 TV의 압력으로 [넉오프]와 [더블팀]도 봤다.-_-;;

 

내가 본 영화중에서...

무협을 좋아하는 지라 현대물은 별로지만 [금옥만당]은 재미있게 본 듯...

그런데 황비홍 시리즈와 청사, 금옥만당은 아무리 봐도 소품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현대물 빼고 소품 느낌 빼면 남은 영화들이 [칼(刀)]과 [촉산전], 그리고 이번에 본 [칠검]인데...

 

걔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칼(刀)].




 

원래 이연걸과 견자단에 비해 조문탁의 무술은 기계적일 뿐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느낌이었다.

( 그래봤자 다 이소룡 kids 고, 연기 자체는 별 평가 못 받을 지라도 무술만은 (--)b )

 

그런데 [칼]만은 틀렸다.

그의 외팔도, 거대한 칼도, 무술도 이때만큼 수려하고 가슴 아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거기에 스토리도 분명 감성적이고 탄탄했다. 

이 모든 건 감독 서극의 힘이었다고 본다.

 

 

 

그러다가 [촉산전]이 나왔는데, 무술만 부족할 뿐 나머지 모든 것이 오버였다.

이 당시 서극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보려고 한 것 같다.

이연걸이나 과거 이소룡, 성룡등의 무술로 넓혀진 스크린의 시계를

CG로 보다 획기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지평을 열기에 정이건은 역부족이었다.

넘쳐나는 CG속에 홍금보조차 가려지는 상황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서극은 스크린 속의 인물들에게도 미련이 남아있어 매우 엉성한 영화가 되었다.

 


 

그러다가 [칠검]이 나왔는데, 이연걸도 무술 안하겠다고 나온 마당에 이제 무협계엔 견자단 밖에 안 남았다!

서극과 견자단이라... 이 정도면 [칼]을 꿈꿔도 되지 않을까?

우선 [칠검]에는 CG가 사라졌다. 인물에 집중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검이 7개나 되었다.

이렇게 검이 많아지면 제1검에 완전 초점 맞춰주셔야 한다.

(황비홍에서도 주변 훌륭한 제자 많으나 언제나 주인공은 황비홍일 뿐이다.)

그런데 [칠검]의 (무술) 주인공 자리는 견자단과 여명 사이에서 줄타기가 심하다.

여명이 축소하기엔 나름대로 무게가 있는 캐릭터라도, 무협인데 과감히 조연에 충실했어야 주연, 조연 모두 부각되었을 것이다.

검이 7개나 되니 서생 차림(여명) 1명 정도야 멋지게 봐줄 수 있지만, 

투톱으로 세우고 싶었으면 둘을 적당히 라이벌로 만들던가 했어야지.

하지만 견자단과 여명... 기본적으로 너무 멀다.

 

단 하나 건진 장면, 견자단과 적이 1m 남짓되는 공간에서 칼부림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머지는 자꾸 끊기고 마무리가 이상한 느낌이다.

게다가 첫 장면부터 유혈낭자, 잔인참혹극... 리얼리티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이건 과잉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너무나 단순 희망 만발한 얼빵 결말과의 댓구도 영 맞지 않는다.

 

[칼]에서 느낀 서극은 무술 장면을 통해 사람을, 감성을 불어넣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촉산전 찍으면서 많이 멀어졌다.(그래도 갈때까지 간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새로운 실험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곤 [칠검]으로 돌아오려나 싶었는데 아직 덜 왔다. 어정쩡하다. 아니, 사실 좀 불안하다. 과연 서극은 [칼]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칠검]에서 사라진 스토리와 화면의 일관성이, 왠지 안어울렸던 유혈낭자가 마음에 걸린다.

 

* 사족 - 이연걸이 무술에서 은퇴했다. 이제 [영웅]의 기원 scene 같은 건 다시 못보는 건가? T.T 누가 견자단과 이연걸 한번만 더 붙여줘~~!

* 사진출처 : http://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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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3 02:17 2005/10/03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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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08/28 02:03

무위님의 [펭귄 - 위대한 모험] 에 관련된 글.

만약 내가 이 영화를 뜯어고칠 수 있다면, 성우 빼고 나레이션도 빼고
찰리 채플린 영화식으로 화면 중간중간 간단한 설명 깔아주고 끝내고 싶다.
물론 펭귄들의 소리와 근사한 배경음악은 필수~!

 

어디서 읽은 바로는
영화감독 자신이 성우를 꼭 썼으면 했다고 하고 프랑스판 역시 성우가 나온댄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동물의 의인화에 반대하여 실제 나레이션만 넣다고 한다.
감독의 의도는 대략 알 것도 같은데 동의는 안되고, 매우 미안하지만 차라리 미국판 구해보고 싶다 -.-#



인간의 음성들을 제외하고 화면만 평하자면 그야말로 장관.
내 평생 영하 40도의 남극과 살을 애는듯한 겨울바람, 한번이라도 만져보고 싶은 황제 펭귄과 오로라를 체험하지 못할 것이며,
펭귄들이 물 속에서 얼마나 멋진 새처럼 날아다니는 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할 것이며,
그들이 새로운 생명을 위해 자신에게 닥쳐오는 생명의 위협을 몇 고비나 넘기는지 지켜보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를 보지 못했더라면
같은 하늘 아래 그다지도 지독하게 아름다운 곳이 존재함을, 펭귄의 아름다움을, 그들이 함께 뭉쳐 이루어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이 영화의 컨셉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어느덧 스며들어 있는 인간 중심의 사고, 편협한 정상가족 개념에 대한 집착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4살이 넘으면 짝짓기를 위해 추위와 천적을 피해 얼음이 단단히 어는 오모크까지 한참을 걷는다.
그리고 짝짓고 알 낳고 품고, 수컷에게 알 넘겨주고, 암컷은 먹이 구하러 가고, 수컷은 자기들끼리 몸을 촘촘히 붙여 바람을 막고, 암컷이 돌아올 때쯤 새끼 펭귄이 나오면 먹이 주고, 수컷은 또 떠나고...
이 사이에 칼날같은 겨울 바람이, 물표범이, 새가 시시때때로 그들을 위협하고 목숨을 앗아간다.

 

그들은 이 모든 과정을 함께 한다. 뭍에서 걸을 때도, 짝짓기할 때도, 추위를 막을 때도, 바다에서 먹이를 구하고 새를 쫓을 때도 그들은 언제나 무리지어있다.
늦가을에 만나 초여름에 모두 뿔뿔이 헤어질 때까지 그들은 거대한 공동체 그 자체이다.
함께 모여 무언가 헤쳐나가는 모습, 감격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들의 1부1처제에 주목하고 아빠, 엄마, 아기 펭귄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옆집 아저씨 펭귄이 없었다면 과연 추위에 살아남았을까?
앞집 아줌마 펭귄이 없었다면 아빠,엄마가 모두 먹이 구하러 간 아기 펭귄은 새의 먹이가 되지 않았을까?


실제 새끼가 적당히 자라 각자 제 갈 길 떠나는 걸로 위대한 한 단락을 마친 펭귄들의 모습에 (매우 폭력적인) 정상가족 개념을 각인시키고 가족애를 환기시키는 것은 감정이입을 완전! 방해하신다.
왠지 위대한 자연의 섭리를 인간의 잣대로 재다가 뭔가 제대로 된 모습을 못 보게 된 꼴이라고나 할까?

 

기간동안 펭귄이 보여준 모습은

그저 삶을 치열하게 살아나가는 존재들의 위대함이며,
그야말로 '모험'이라 불리울 만한 거대한 노정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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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8 02:03 2005/08/28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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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07/18 00:30

처음엔,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본 직 후의 솔직한 나의 심정은 바로 권태로움이었다.

영화의 주제로써의 '권태'가 아닌 나의 느낌으로써의 '권태'였다.

 

17세의 풋풋한 아름다움을 가진 누드모델과 40대의 이혼한 철학 교수라니..

배우들이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앞으로의 스토리의 전개를 알려주는 듯 하다.



역시나 40대 교수 마르땅은 '책을 쓴다'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활동을 통해 일상의 권태를 날리고 변화를 꿈꿔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소녀, 세실리아.

그녀는 만날때마다 섹스만 하고, 대화를 해봐도 별로 관심있는 것도 없고, 심지어 자신이 뭘하고 지내는 지조차 별 관심이 없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다.

처음엔 몇 번 자고 헤어질 생각이었지만 결국 끊어내지 못하게 된 건 마르땅.

뒤를 밟고, 지켜보고, 추궁하고, 결국 원하는(?) 답을 듣게 된다.

세실리아는 다른 애인도 사귀고 있었고, 얼떨결에 들키긴 했지만 마르땅과 헤어질 생각도 없다. 이런 관계가 못마땅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마르땅.

영화가 끝날 무렵, 그는 심기일전을 다짐하지만, 그게 그녀를 단념하겠다는 소리인지 죽을때까지 그녀를 붙들 것이라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다.

 

한참 섹스를 즐기고 다른 사물에 별 관심없어 보이는 나이인 세실리아는 그저 그 나이스러운 매우 평범해보이는 캐릭터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녀를 쫓아다니는 마르땅은 비현실적이지만 어쩐지 유럽의 권태로운 분위기를 나타내는 인물이 아닌가 싶었다.

 

왠지 프랑스영화를 보면서 언젠가는 보았을 법한 설정과 내용 전개.

그래서 나는 매우 권태롭게 보았고,

다만 마르땅의 너무나 진지하여 매우 코믹스러운 연기만이 업그레이드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 좀 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마르땅은 교수인 주제에 가르침에 대한 기쁨도 잊어가고 있고, 6개월 전엔가는 부인과 이혼했다. 일단 책도 써보려고 시도는 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보면 그는 어느새 40 평생을 살면서 단 1분 1초도 권태로움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련해놓은 삶의 공간인 가정과 학교가 모두 무료해진 그 때를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책쓰기라는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침 바로 그 당시 그때의 그에게 그런 방식은 맞지 않았고, 우연히 만난 세실리아가 바로 새로운 변화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이 변화를 자신이 알고 있는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무리하고자 노력한다.

즉, 세실리아를 소유하고 독점한다는 마무리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만만치 않다.

그녀에게 일상은 원래 권태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뭣할 만큼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오늘 누구와 만나, 어디서 식사를 하고, 무슨 구경을 했는 지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옆에서 마르땅이 추궁할 때만 겨우 기억이 날 정도다.

그녀에게 일상의 권태로움은 그다지 처참하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며, 꽤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득 마르땅이 필연적으로 세실리아가 필요했던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난 그저 마르땅이 변화가 필요한 그 시점에 때마침 세실리아가 끼어들어왔던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르땅에게 있어서  책쓰기나 세실리아는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만약 그 당시 책쓰기에 필(feel)이 꽂혔다면 탈고하기 전까지는 권태로울 일이 없었겠지.

다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건대 책쓰기와 세실리아가 다른 점이 있다면

세실리아는 마르땅이 알고 있는 연애나 사랑의 방식에 맞춰 들어올 가능성이 거의 없어보이기 때문에,

마르땅은 이번 변화의 필요성에 있어서 시작점을 가지긴 했으나 종착점을 얻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마르땅 입장에서도 그다지 나쁜 상황만은 아니지 않나 싶다.

어떻든 마르땅은 변화가 필요했는데 뭔가 변화의 필요성이 완료되면 결국 또다른 변화의 필요성이 도래하게 된다.

변화의 필요성이 완료되는 시점, 종착점, 권태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세실리아가 마르땅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어떠했을까? (심지어 청혼도 했다.)

결국 몇개월, 몇년 후에 마르땅은 또다른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무언가를 찾아 헤매게 되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삶에 대해 점점 달관하게 된다던데 잘 모르겠다.

나도 왠지 마르땅처럼 어느새 한 순간도 권태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 고민된다.

물론 권태로움을 참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고 그닥 나쁜 일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을 느긋하고 여유롭게 지내는 데는 참~ 도움이 되지 않을 듯 싶어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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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8 00:30 2005/07/18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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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4/09/30 23:03

* 이 글은 [영화[연인]은 코메디였다?] 에 대한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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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맞아~! 이 장면도 엄청 웃겼었다.(아~~ 나 이러면 안되는데...-_-;;;)


출처 : 씨네21 헌즈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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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30 23:03 2004/09/30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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