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만화영화책 - 2006/06/17 21:50

여러 주인공들을 시켜 감정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영화는 수습하는 데 한참을 헤매게 된다.

그러다가 감정선 하나라도 놓치면 진짜 별볼일 없는 영화가 된다.

처음엔 그런 영화가 아닌가 싶었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부부 중 부인이 아프게 되고,

건물 관리인인 한 남자는 건물에 근무하는 근사한 여자를 - 남모르게 - 쫓고,

한 고등학생은 채팅으로 만난 동성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다 바람맞게 된다.

 

그러다가 그 여인, 쳉이 은근슬쩍 화면에 끼어든다.


 

 



쳉은 어릴 때부터 귀가 먹고 눈이 먼 사람이다.

세상과의 소통이 매우 어려울 듯 보이는 그녀는 그러나, 화면 안의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학교의 선생이다.

그녀가 등장할 때는 배경음악이 전혀 없다.

그녀가 말하지 않을 때, 즉 그녀가 타인과의 소통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녀의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가 자막으로 흐른다. 처음엔 '영화 자막 잘못 나온 것 아니야?' 싶을 정도로 고요 속에 흘러가는 것이라곤 그녀의 움직임과 자막뿐이었다.

감독은 마치 그녀가 사는 고요의 세상을 맛보게 해주려는 듯 하다.

 

 

이렇게 열정적이지만 고요의 바다에 사는 그녀의 삶이 지나가는 중간중간,

아프던 부인은 죽었지만 남편A는 부인을 위한 식사를 여전히 준비하고 있고,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쫓아다니던 관리인B는 드디어 그녀를 위한 편지를 준비한다.

자신을 버리고 남학생에게 가버린 연인을 위해 여고생C는 끊임없이 문자를 보낸다.

 

아, 짧은 시간안에 흩날리는 감정들...

게다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가슴 먹먹한 감정들이다.

도대체 이 영화는 어떤 결말을 준비해놓고 있길래 이렇게 가슴의 응어리를 계속 쌓게 만들어 놓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 영화랍시고 중간에 '뚝!' 끊 듯 끝나버리면 '그저 그런 영화 봤다'며 화낼 생각도 살짝 들었다.

그렇게 영화는 결말을 내야 하는 시간에 가까워가고 있었다.

 

A는 우연한 기회에 부인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쳉에게 먹이게 된다. 그리고 쳉은 생전 처음 본 A지만 그에게서 받은 음식의 기운을 그녀 특유의 행복한 기운으로 되돌려 보내준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 순간 A는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오랜 시간 곁에 머물길 애원했으나 부인은 편안한 긴 잠을 소원하였고, 실제 그렇게 하였다.

아무리 희구하여도 얻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이제 A는 '보내야함'을 매우 매우 확실하게 깨닫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완벽하게 깨닫는 이 순간은 쳉에게서 행복의 기운을 받은 바로 그 순간이다.

쏟아지는 서러운 눈물의 A를 쳉은 소리없이 보듬어 안아준다.

 

한편 B는 결심의 결심을 거듭하고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그녀에게 전하러간다. B를 한번도 보지 않은 그녀에게로 가는 길, B는 신바람이 나지만 스크린을 쳐다보는 관객들에겐 위태 천만 그 자체이다.

C는 역시나 자신을 버린 연인에 대한 미련을 접어버리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애정을 날려보내던 핸드폰을 옥상에서 바닥으로 날려보낸다. 그리고 핸드폰과 함께 자신도 날려보내고 만다.

그런데 C가 옥상에서 떨어지는 순간, 행복의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던 B와 쿵!

B는 사방에 번지는 자신의 선혈 속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편지를 보며 죽어갈 수 밖에 없었고,

B와 부딪치는 바람에 '죽음'이라는 선택을 완수하지 못한 C는 병원에 실려 새로이 인생을 시작해야하는 처지를 맞이한다.

 

결국 A,B,C 모두

아무리 애틋했던 감정도, 절절했던 소원도, 상대방에게 닿지 못하였고,

그들의 감정을 추스리려는 노력은 무엇하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숨막히게도 영화는 이렇게,

늘어놓기 시작한 감정선들을 느려보이지만, 매우 자연스럽고 확고하게 정리한다.

 

씨네21의 어떤 글을 보니

고요하게 감정을 뒤흔들어놓고는 배경음악도 안깔아줘서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괘씸해한다.

맞는 말이다.

아무도 외치거나 울지 못하게 만들면서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게 만든다.

그리하여 느끼게 되는 먹먹함, 뭔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의 소용돌이,

그러나 감독은 '그게 사는 거'라고 '그렇게 사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느날 A,B,C 모두 (B는 확인할 수 없겠군-_-)

인생의 모든 경험과 감정과 노력을

쳉과 같이 행복의 기운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게 되길 빌며...

그러나 지금의 가슴 아픔 또한 일생에 여러번 갖기 힘든 소중한 감정임을 잊지 말길 바라며...

지금의 이 가슴 저릿함, 꽤 오랫동안 내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 출처 : 씨네21(http://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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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7 21:50 2006/06/1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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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그녀의 따뜻한 손길

    Tracked from 2006/06/20 13:50  삭제

    jineeya님의 [내 곁에 있어줘... 닿지 않는 마음, 남아버린 마음] 에 관련된 글. 유행가 가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 상투적인 제목의 영화는 정말 기적처럼 우리를 찾아왔다. 깨끗하고 엄격한 도시

  1. Tori~ 2006/06/20 0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인생에서도 정말 베스트 영화가 될 것 같은 영화에요.
    정말 감동TT;

  2. jineeya 2006/06/20 14: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Tori~/그래, best라 할만 하지. 이런 식으로 잘 만들긴 정말 어려울텐데. 열받는 천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