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생각_펌 - 2006/04/13 09:54

월요일에 서울여성영화제 국제포럼에 갔었다.
주제는 이름하여 [여성의 생식력을 둘러싼 국가와 문화권력 : 가족계획에서 저출산까지].

언제나 대한뉴스 말미를 장식하던 출산억제 구호의 향연.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60년대 구호로부터
국가가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어떻게 통제해왔는 지를 감지해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듯 싶다.

오히려 어려운 점은 권리로 주장하기 위해 확립한 개념이 우리의 발목을 덥썩 잡아버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재생산권이라는 명칭

여성에게 가해지던 차별과 폭력을 확연히 드러내고자 주장된 각종 권리들의 명칭들.
즉, '재생산권리',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등과 같은 명칭들은 새삼 재정립이 요구됨을 깨닫게 된다.
아니, 명칭에 대한 재정립이라기보다 여성 자신이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 자체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하는 지에 대한 개념이나 입장이 맞을 것이다.

이번 포럼의 기조발제에서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지점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다들 알고 있었는 데 나만 뒷북인가?^^;;)
분명 재생산권리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여성이 스스로의 몸에 대한 통제권 확보에 상당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황우석 사태 속에서 발견된 난자 매매라든가 대리모, 성매매 등의 현실은 이러한 권리들이 여성의 몸을 대상화시키는 자본주의 논리와 맞닿았을 때 우리가 취할만한 의식의 혼선을 초래한다. 그저 그녀의 선택이라 치부하기엔 매우 부족한, 자본주의 모순의 벼랑에 놓인 그녀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재생산권리는 우리에게(또는 나에게) 적절한 해석을 부여하기는 커녕 자본을 위한 명쾌한 논리를 제공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확실히 재생산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것
처럼 보인다.
Petchesky라는 사람이 1995년에 말했단다. '여성이 자기 몸을 소유한다'는 생각은 현실적 서술이 아닌 수사학적 성취라고...

미국에서 70년대 낙태권 이야기를 했어도 아직 임신중절이 불법인 주도 존재하고, 낙태권 확보를 위해 2,30년전에 만든 투쟁 영상이 아직도 유효한 지금,
일본 공주 하나가 임신하면 여성천황제 도입 이야기가 쑥 들어가는 지금,
한국은 낙태와 피임의 천국이라지만 기실 낙태가 불법이므로 '할 수 있되 사고 시 책임질 수 없는' 불안전의 지금,
대리모가 아이를 키우겠다고 나서도 계약법 위반으로 키울 수 없는 지금,
여성이 재생산권을 확보하는 일은 여전히 완료되지 못하였고 그러기에 유효해보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현실조차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많아져버렸다.
이제 재생산의 권리들은 여성들이 처한 다양한 처지만큼이나 다양해졌고 심지어 서로 대립각을 이루기도 한다.
따라서 기존의 재생산권리를 여성 스스로 정치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뭔가 새로운 개념의 확장이나 발굴을 꾀하는 건 꽤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보인다.


(이 아래는 정말 답도 의견도 없는, 질문과 고민만 있는 스포일러라고나 할까?)

모성, 재생산의 진정한 인식이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성'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중간 토론자 중에는 현대사회를 모성의 아노미로 규정한 사람이 있었다.
대략 박정희식의 발전주의 논리가 지속화되면서 모성을 '가치'가 아닌 '도구'로 이용해왔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바꿔말하면 모성의 진정한 가치는 '있다'고 보는 입장일 것이다.

이후 종합토론 때 floor의 한 참가자가 모성이라는 개념을 끄집어내는 것이 마치 여성을 모성으로 환원시키려는 듯 싶어 심기가 불편했나보다. 모성을 가지고 어떻게 재생산권의 확대를 꾀할 수 있는 지, 모성도 생식력으로 환원되는 것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또다른 토론자는
과연 70년대 초 미국에서 분 낙태권, 비혼임신 등의 권리는 70년대 미국여성들의 생리적 현상(굳이 붙이자면 모성의 발동?)이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몸에 가해져있는 제한적 규정으로 인한 역발산이라 할 수 있을까?
라고 발언했는데,
즉, 모성을 인식하는 것조차도 몸에 대한 규제를 해제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기반한 것 아니었을까라는 혐의를 두고 있는 듯 하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이제쯤 뭔가 남아있는 일말의 거리낌을 벗어던지고 '모성은 없다!'고 선포해버려야 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런데 선언하기엔 정리가 모자란다.
포괄적 범위에서 재생산에 포함되는 돌봄 역시 근본적인 돌봄의 발동 기원에 대해 정의내리기 쉽지 않은데, 특히 열악한 현실이 겹치면서 현실 대응과 근원 찾기 사이에서 위험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사실 이 줄다리기가 그닥 논리적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사람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지라 매우 합당하게 느껴지기는 한다.

문화인류학을 공부해야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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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3 09:54 2006/04/1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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