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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8/02/02 13:09

사람들은 보통 '함께' 하고자 할 때 서로간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론 자신의 모든 부분을 한번에 쏟아내기도 하고,

때론 잘 보이기 위해 허점과 빈 구석을 완벽히 메운 채 다가가려 한다.

 

그러나 '함께 한다'는 건 그렇게 녹녹한 일이 아니다.

무게감에 질려, 가식에 질려 오히려 다가가고픈 거리만큼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바라보기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 다가가고픈, 함께 하고픈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자체로는 실체가 없지만 실체만이 가지는 '그림자'를 통해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을 묘사한다.

그 형식 속에서 살포시 감추어진 듯, 노골적이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지만, 

상당히 공감 가고 진정성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지고 있다.

언뜻 보기엔 매우 건조해보이는 느낌은 오히려 관람자인 나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호기심과 이야기의 상상 기회를 부여한다.

거리 두기를 통한 편안함, 이것이 '함께'의 척도를 고민해볼 여유를 부여하는 듯 하다.

 

물론 그 다음은 무엇인가에 대해 해답을 준다고 볼 수는 없을 듯.

 

[축구]

겹쳐있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축구공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바보들의 대행진처럼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캔버스 자체를 접어 만든 실루엣이 뭔가 역동감을 더해주는데, 안내지에 의하면 '중요하지 않은 일에 목숨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ㅋㅋ



[바보]

이 그림은 '바'라는 글자로 그려져있는 왼쪽 사람과 '보'라는 글자만으로 그려져있는 오른쪽 사람의 대화나 숨결이 얽혀있다.

둘의 대화는 잠시 스치거나 또는 잘 아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행하곤 하는 허무와 가식과 무시의 전제가 마치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된 듯한 모습이다.

 


[연꽃을 부는 사람]

순수한 도의 상징인 연꽃을 부는 사람.

뭔가 불어서 도를 완성한다거나 파괴하는 것 같다는 개념보다

그저 도 자체에 관심없고 무지한 사람의 야사시한 행위같은 느낌이 강하다.


 

* 그림 출처 : 성곡미술관 (http://sungkokmuse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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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2 13:09 2008/02/0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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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10/21 14:41

* 밝은집 님의 한국현대사진의 풍경 에 관련된 글

 

한국 현대 사진계 원로, 중견, 신진들의 사진을 총망라해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별로 3섹터로 나뉜 전시의 구획은 3세대간 구분이기도 하지만, 사진을 통해 바라보는 피사체와 카메라에 대한 작가의 위치같기도 하다.

 

희한하게도 실제 피사체와의 물리적 거리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원로에서 신진으로 갈수록

피사체는 사람-자연-사물(또는 투영되는 사회)로,

피사체와의 거리는 다가옴에서 멀어짐으로,

카메라와의 거리는 도구에서 친구로 변하는 느낌이다.

 

 

1.

1880년대 사진이 도입된 이후 1960년대 프로사진가 개념이 정착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는 1세대들의 사진에서는 대체로 피사체 내부까지 꿰뚫어 사진이라는 정지화면에 담아내고자하는 엄청난 욕망이 느껴진다.

 

육명심 [백민-강원도 강릉](1983)

 

 




주명덕 [논산](1971)

 

심지어 극히 거리감을 두고 싶은 피사체에게조차 바라봄의 거리에 대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러한 거리감 개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만병통치가 아닌- 가벼운 두통을 동반할만큼 피사체에 대한 진중한 고민을 하게끔 유도해낸다.

 

황규태 [만병통치](2000)

 

 

 

2.

중견 집단들은 사진전을 안착화시킨 세대이기도 하다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요인도 많겠지만- 사진의 크기가 커지면서 화면 안에 자연이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혹여 사람이 주요 피사체라 하더라도 주변화하거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묻어나는 피사체에 대한 거리는

피사체의 중심이 사람에서 자연으로 옮겨지면서 보다 드넓은 시야를 선사하는 자연을 닮아가고 있다.

 

민병현 [SNOWLAND.SL165](2006)

 

배병우 [소나무](1992)

b

 

김아타 [ON-AIR Project 056-1](2004)

 

 

 

3.

중견 작가들이 새로이 확장시킨 피사체가 자연이라면,

신진 작가들이 새로이 확장시킨 피사체는 사회다.

물론 1세대도 인물이 있으니 주변의 사회를 담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 '사람'으로부터 파생된 공간을 담은 것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반면, 신진들은 사회 자체가 핵심 피사체로써 사람이나 사물, 간혹 자연이 그 공간안에 배치되어진 느낌이다.

때론 작가가 아닌 카메라가 원하는 대로 찍은 것 아닐까 싶은 사진도 있다. 그만큼 사물을 대한 감정의 깊이가 달라짐을 느끼게 한다.

 

김옥선 [Alex and Eric](2004)

 

 

아래 사진은 너무 작게 축소되어 놓칠 부분이 있는데,

실제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전화박스 바닥에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작은 병정인형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백승우 [Real World II](2006)


 

대체로 감정 투여의 대상을 사람과 자연까지 봐준다 하더라도 사물로 확장시키는 건 이상한 거부감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물과 그 사람으로 구성되는 것이 사회이고,

사회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다보면 사물에 대한 '바라보기'는 당연한 결과치다.

 

확실히 상대를 꿰뚫어 표현하고싶고 관계 맺고 싶은 욕망이 21세기가 된 우리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지금의 시대에 대뇌의 명령을 무시하고 간뇌의 감성을 증폭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젝트일 수 있다.

 

현대인들은 조금씩 사회가 할퀴고 간 상처를 품고 있는 일종의 정신병자들이며, 소외라는 현상의 핵심 대상들이다.

따라서 뭣 모르고 상대방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을 풀가동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는 순간이 오면 - 물론 계속 제정신이 아니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 상대방이 요구하는 감정의 홍수에 휩쓸려버리게 된다.

실제 요즘은 누구를 만나든 마치 정신과 상담 치료를 원하는 사람마냥

끊임없이 말을 한다. 그러나 어떻게 듣는 지를, 관계의 진정성을 잊은 존재들 같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조금씩 감정의 경계선을 긋는다. 

동시에 생존 전략 차원에서 사회를 통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진실,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진리를 찾고자 한다.

 

 

* 사진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한국현대사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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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1 14:41 2007/10/2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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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10/14 12:16

나의 '서커스'에 대한 인상은 정지화면이다.


누군가 몸을 꺾든, 코끼리의 발을 올리게 하든, 어떠한 묘기를 보여주는 과정 후반에는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잠시간의 정지 장면이 연출된다.
이상하게도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이 순간적 적막에 긴장감을 느끼며 '서커스'의 전부 내지는 백미인양 여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커스는 환상적이고 화려한 무대와 사람들이 펼치는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사진에 담아내기 좋은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 속 서커스는 역동성의 발현이 아니라 흡사 발현된 역동성의 박제, 내지는 동(動)을 품은 정(靜)의 숨겨진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왠지 사라져가는 문화로써의 서커스에 대한 아련함까지 겹쳐지는 감정으로...

 

로나 비트너(Rhona Bitner)가 담은 서커스의 모습은 내가 받은 느낌을 그대로 옮겨준 것 같은 정적인 미의 극치다. 

검은 바탕에서 오로지 서커스를 펼치는 주인공들만 존재하는 것 같은 사진들은 상당히 동적인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고요와 테잎 늘어진 동영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서커스에선 동물들의 역할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사라 문(Sarah Moon)의 [앵무새]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붉은 바탕과 검은 링에 너무나 그림같은 앵무새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발타자르 부르카르트(Balthasar Burkhard)의 [사자]는 125*197cm의 거대한 화면에 멍하니 입 벌린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인 나머지,

서커스단에 갇힌 속박감, 자유가 박탈된 자의 비존재감,

서커스 자체가 갖는 우울한 느낌 등을 한꺼번에 표현해주는 것 같다.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가 찍은 크리스텐 멕메나미(Kristen Mac Menamy)의 사진들은 이미 과장된 서커스에 대한 이미지를 한번 더 과장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인물과 공이라는 사물의 배치는 과도한 소형화나 대형화를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3차원적 공간감을 무너뜨린다.

 

 

올리비에 르뷔파(Olivier Rebufa)의 [조종]은 줄을 잡고 있는 사람과 줄에 매달린 인형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사진이 주는 인상은 오히려 줄과 무관하게 무대를 이끌어나가는 주체가 인형이고, 인간이야말로 위태로운 줄에 매달려 상황에 휩쓸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식화된 관계들이 변화 또는 역전되고, 흡사 액자 구조의 문학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위대한 서커스]라는 전시 제목을 들었을 때 속으로 생각한 감상 포인트는 '화려함, 역동성, 고독감'정도가 아니었나 싶었다.

확실히 부합하는 작품이 없지 않다.

아련한 과거에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면도 있고, 피에로의 고독과 카리스마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히 화려함이나 역동성보다는 정적인 아름다움,

고독감보다는 세상에 대한 관조나 이중삼중으로 가려진 풍자 등으로 읽히는 것들이 많다.

 

정(靜)에 숨은 동(動)보다 더욱 광대한 열정과 고요함이 만들어가는 느리고 작은 변화.

 

* 사진출처 : 대림미술관(http://www.daelim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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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4 12:16 2007/10/14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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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10/03 16:51

* 해멍님의 [전시회 다녀왔다]

민중언론 참세상[참세상 기자들이 추천하는 명절 보내기 비법!] 에 관련된 글.

이 가을, 일민미술관에서 세 작가에게 '미술은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봤다.

그중 한명인 전영찬 작가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림의 진화를 시도중.

 

작품들 중 하나의 제목이자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인 'Inside Out'은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분류하지만

사실은 '당신이 이상해'서 라든가 '당신이 독특해'서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답한다.

그래서인지 애니메이션 하나하나가 때론 비범하거나 때론 비참한 반전들을 준비하고는,

그 이질감에 대해

1) 별거 아니니 크게 놀라지 말라고 토닥거리면서

2)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라고 속삭인다.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





1) 별거 아니니 크게 놀라지 말라고 토닥거리기

 

예를 들면 이런 건데,

[Falling]이란 작품은 침통한 감정으로 빌딩 위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두팔을 들고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화면이 상하 역전되면서 자살자 이외의 모든 이들을 -화면에선 아래가 된- '하늘'로 떨어뜨린다. 그 모습을 본 자살자는 자신을 자살로 몰아넣은 사회인들을 바라보며 크게 웃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하늘로 떨어졌던 사람들이 -화면 위가 된- 바닥으로 다시 올라오면서 두팔로 걷기 시작한다.

아래인 땅에서 두발로 걷던 모든 이들은 이제 위가 땅이 된 곳에서 두 팔로 걷기 시작했지만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는 자 없이 또다시 일상의 쳇바퀴는 돌기 시작한다.

 

[Identity Crisis]에서는 바나나로 원숭이를 약올리면서 폭력을 일삼는 아이와 그 아이의 약을 올리려고 아이스크림으로 꼬시는 원숭이가 나온다.

그리고 아이가 아이스크림의 유혹을 못이겨 원숭이를 따라 들어간 동물들의 세계는 어른들이 모든 동물들을 연기하는 인간의 세계였다.

사실 여기까지면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이나 설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여기서 또한번, '원숭이들이 아이를 징벌하려는 순간 밝혀지는 아이의 진실'이라는 반전을 준비한다.

 

[Identity Crisis]

 

 

2)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는 고양이와 쥐가 조금만 움직여도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질 쪽배 안에서 감격의 포옹을 통해 배의 전복을 막을 중도(中道)를 찾아간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고양이의 먹이사냥은 약자와 강자 사이의 중도란 결코 평등한 길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더불어,과연 고양이와 쥐가 가장 행복했던 그날의 그 순간은 언제였을지, 남은 고양이는 내내 행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Show]라는 작품에서는 몰래카메라로 촬영된 장면을 보는 아이, 그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 그 엄마를 지켜보는 아빠, 그리고 그 아빠를 도청하고 있는 정부기관, 그들을 내려다보는 외계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화면에 잡힌다. 이를 통해 관음증에 사로잡힌 건 한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라는 사실이 조망된다.

 

 

5천만 또는 전세계인 모두 '나는 극히 정상'이라고 외치고 속으로는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시대,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덕분에 우린 겉으로는 원숭이를 약올리던 아이가 쓰고 있던 가면을 쓰거나, 서로의 관음증을 숨기기 급급하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예외없이 누구나 소외되고 갑갑함을 느낀다.

구조에 어긋나는 것들에 자꾸 '이상하다'는 딱지를 붙이면서, 딱지가 많아질수록 격리, 거세시켜버리는 것은 세상이고 사회일 뿐이다.

격리와 거세의 두려움으로 사람을 호령하는 세상에 우리의 딱지를!

 

 

* 그림 출처 : 일민미술관(http://www.ilmi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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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3 16:51 2007/10/0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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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9/29 14:48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19세기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등장할 때까지,

아니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등장한 이후에도,

유클리드가 정리해놓은 기하학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의 주요 이론적 발현체였고,

수학이라는 학문을 공리계의 핵심으로 배치시켜주는 가장 확실한 근거였다.

그러했던 만큼 

알고보면 인간 사고의 결정체라든가 직관에 의거했다기보다 오히려 경험치의 발현이었고, 그 경험이 결코 신뢰할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혼란이란

세계관의 붕괴, 대재앙 그 자체였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적이고 변화와 흐름 자체에 집중하는 동양의 철학에 비해

정적이고 고정된 물체 자체에 집중하는 서양의 철학의 모든 특성을 부여받은 듯한 유클리드 기하학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깨어버리고 싶은 실체없는 거대한 '틀'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 [유클리드의 산책]은 르네 마그리트의 1955년 작품명이기도 하는데,

당시 마그리드는 유클리드의 평행선법칙을 원근법으로 가볍게 어겨주는 예술가적 표현으로, 규정된 상황과 세상의 체계에 대한 논리의 돌파을 보여주었다 한다.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기라도 하려는 듯 경계나 한계를 넘어서기나 hybrid, 기존 논리로 구분된 영역간의 관계나 교류에 대해 모색해보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손정은의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은 세이머스 히니의 시집 제목이라고 한다.

작가는 시집의 시구를 하얀 종이들에 분절하여 적어놓았는데, 관객이 무작위로 종이 하나를 뽑아든 순간 이미 그 시들은 더이상 시인의 그것이 아닌 관객만의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된다.

마치 진보블로그의 모든 글을 탐독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특정 블로거의 특정 포스트를 접하면서 개인이 변화할 수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 개인은 해당 포스트를 접했을 때나 블로그글 모두를 읽었을 때와는 분명 다른 개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전시회 설명글에도 있었지만 저 종이 하나하나가 마치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를 나타내는 듯 하다. 종이 하나를 집었을 때 머리 속을 퍼져나갈 오만가지 생각들이 마치 클릭하면 링크 따라 만날 수 있는 마구 펼쳐질 세상을 의미하기라도 하듯이.




정재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 기록 9]는 한국의 버려진 현수막을 중국, 파키스탄, 인도, 네팔 등지의 현지인들에게 자율적으로 활용하도록 건네고, 일정 기간 경과 후 쓰임새를 관찰한 것이다.

결과물은 사진에 담겨져 있으나 아래의 붉은 천은 작가가 입수한 모양이다. 꽤나 훌륭한 차양으로 변신한 모습 속에서 형태, 문양 등의 문화적 hybrid 를 체감할 수 있다고나 할까?

기와지붕 위에 이슬람문자 프린트가 있다면 보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이중근의 [super nature]는 위에서 바라보면 벌집 모양일 것 같은 공간 내부에 밀림의 사진과 산수화를 오버랩시킨 작품이다. 2미터가 넘을 것 같은 병풍들에 둘러쳐져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보는 지점은 한 곳인데도 여러가지 풍경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박소연의 [Story Telling and Listening Series]는 특정 공간과 소품의 세팅과 주제(story)를 동참하는 관객들에게 부여하여 참여자들끼리 말하기와 듣기를 통한 정서 교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화면에 비춘 모습은 [어머니와 딸의 장소]라는 주제를 주고 '움'으로 끝나는 한글단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단어에 맞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다소 작위적, 또는 유치하다고 생각되는 세팅과 행동규칙들이 때론 생각의 정돈과 집중을 유도하여 감정의 풍요를 유도할 수 있다.

 

김현숙의 [플라모델]시리즈들의 조각들은 매난국죽같은 전통적 코드를 현대의 기성품 생산문화(ㅋㅋ)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왠지, 진짜 조립해보고 싶다.

 

조덕현의 [in/finite 1Channel Projection]은 풍경을 찍은 영상과 거울을 통해 -사실은 한정되어 있으나- 무한한 화면을 제시하고 있다. 원래 작품을 만들 때 고고학적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잘 섞는다는 작가가 택한 풍경도 가야금의 명인으로 알려진 우륵이 태어났다고 추정되는 신화의 장소이기도 한 거창군의 한 마을을 담고 있다.


 

 

윤영석의 [표본실A]는 복제양 둘리 성공에 충격을 받았다는 작가가 인간복제에 대한 공포를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 계산된 수치들과 칩 모양의 돌기들이 생명에 대한 인간의 통제 욕구를 반영하는 듯 하다.

 

 

좀 약올리는 것 같지만, 이 전시... 9월 30일에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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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9 14:48 2007/09/2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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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6/24 19:36

난지도 내 유휴시설인 침출수처리장을 활용한 미술창작스튜디오가 생긴 이래 1기 입주작가들의 작품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미 다른 전시에서 눈에 띄었던 작가들의 작품도 상당수.

보통 미술관 구경 가면 자그마한 노트에 빼곡히 뭔가를 적어오곤 하지만

이번엔 과정 생략.

왠지 이번 전시는 그저 바라만 봐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관계로 작품 설명 생략. 사용재료나 설치형태만 간단히...ㅋㅋㅋ

 


 



'悅樂'의 일부. 천에 그려진 것 같은데 천장에 엄청 크게 걸려있다.

 

5명을 위한 안경. 비디오 설치 작품.

 

 


 

 


 

 


 

 

뭔가 '거'한 작업의 흔적이..

 

그 결과는 ...

 


 

조형물과 천장에서 쏘여진 -하늘에서 촬영된 - 도시 모습

 

이거, 수묵화라네... 허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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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4 19:36 2007/06/2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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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5/24 15:48

잊을 수 없는 기억, 그래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

동독 출신 작가인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그림을 거꾸로, 또는 옆으로 눕혀놓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림이 반드시 올곧게 걸려 있을 필요는 없겠지.

가장 확실한 사실은 눕혀놓은 그림이 사람의 집중도를 월등히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들여 하나하나 보게 된다.

 

이번 전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나 사진 등의 이미지를 작가가 다시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본래의 [연단 위의 레닌]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으나,


 

작가가 재해석한 그림은 이런 것.

새로이 작성된 그림은 다양한 의미를 뜻할 수 있는데,

(특히 작가가 동독 태생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땅으로 쳐박힐 듯 한 얼굴과 이마의 주름으로 인해 원판보다 훨씬 피로하고 늙어보이는 레닌의 모습이 찬란한 혁명의 좌절을 나타내주는 듯 하다.

 

 





토카네프의 [카자흐 여인]을 다시 그린 그림에서,

물동이를 운반하는 억세보이는 여인은 콘크리트같은 회색으로 표현되어 오래된 추억과 같은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 위, 즉 캔버스의 바닥에 깔린 붉은 별은 지금도 사그라들지 않는 혁명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아래 그림의 원본인 코르제프의 [전쟁의 나날들]은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었는데

[전쟁의 나날들 I]에선 그림 속 화가가 붓을 든 채 캔버스 하나 가득 스탈린의 당당한 모습이 차있었다.

반면 [전쟁의 나날들 II]에서는 그림 속 캔버스가 텅 빈 상태에서 화가 역시 붓조차 들고 있지 않은 망연자실한 모양새였다.

 

바젤리츠는 이 두개의 그림을 합쳐 화가가 붓을 들고는 있으나 무엇을 그려야 할 지 알 수 없을 만큼 텅빈 캔버스를 표현하였다.

마치 혁명이라는 커다란 백지에 더이상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느낌으로...


 

 

전시공간 한켠에는 바젤리츠를 인터뷰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데,

솔직히 그림보다 그 영상이 더 재미있다.

작가가 무슨 생각을 품었는 지 어떤 원본에 대한 추억 더듬기인지 직접 들을 수 있다.

 

작가는 혁명에 대한 좌절을 가슴 절절 공감하기엔 너무 당사자였다.

그는 이미 꽤 유명하고 성공한 신표현주의 화가이다.

 

그의 그림이 품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추억에서는 건조함이 묻어난다.

좀 웃긴 비유일지도 모르는데 하버드대는 멀리 있는 곳에서 더욱 유명하다고,

그 도가니 속 한 존재에겐 실패에 대한 낭패감이 좌절까지 갈 필요가 전혀 없는 그 무엇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민중을 표현할 때는 사뭇 다르다.

스탈린이니 레닌이니 하는 소위 알려진 인물에 대한 작품은 다소 명백한 패러디적 성향이 강한 반면,

(인터뷰를 들으니 레닌을 독재자로 부르더만)

공장 직공이나 물동이 들고 가는 여인, 이사하며 기뻐하는 여인 등의 모습은 좀 낡고 오래된 사진첩같이 아련하기도 하고, 여전히 내재된 힘을 느끼게 해주는 강인함을 풍기기도 한다.


 

* 사진출처 : 국립현대미술관(http://www.moca.go.kr) 팜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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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4 15:48 2007/05/2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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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5/10 17:17

예술가 부부. 서로가 서로에게 삶과 예술의 동반자이자 경쟁자인 사람들.

각별한 주문이었을까? 아니면 큐레이터의 마술일까?

각 쌍들은 예술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도

유독 비슷한 분야에서 함께 활동하는 이가 많은 것 같다.

 

원성원+이배경의 10년지기 개와 고양이

 

사진이 너무 작아 아쉬운데,

아래 그림들은 이배경의 [100개의 꿈 드로잉]이라는 작품으로,

100개의 -주로 다양한 사람 군상의- 스케치가 들어있다.

이 그림을 가지고 원성원은 [IT answers us]라는 상호작용적 영상 설치 작품을 만들었는데,

관람객이 정신을 집중하고 콩을 상자안에 던지면 앞의 스크린에 100개의 드로잉들이 마구 움직이다가 점괘를 내준다.

마치 타로카드를 볼 때 자신의 정신을 집중하여,

실상 타로점을 누군가 봐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게 만드는 원리와 비슷하다.

내 점괘는 '서로 화합하다'래네..ㅋㅋ

역시 상호작용적 작품이 정말 재미있다.

 



강미선+문봉선의 동상이몽

 

이 커플은 한지에 먹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전시된 작품만으로 본다면

강미선 - 작은 작품 -    채색

문봉선 -    큰 작품 - 무채색

같이 분류할 수 있으려나?

 

 

문봉선의 [관조]는 무채색의 수묵이지만 오래 보고 있으면 햇빛이 강물에 닿는 반짝거림으로 눈을 잠시 감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과 더불어 [임진강]이라는 722cm 길이의 수묵화가 걸려있는데,

첩첩산중을 배경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가 진정 임진강이라면 그 시간대를 물어 꼭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정+신치현의 무한 이중주

 

이 두사람의 작품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김민정의 [숨쉬는 벽]은

마치 거울이 공간을 두배로 만들어주는 시각적 효과를 만들듯,

벽에 영상을 통해 벽 뒤의 공간을 창조하였다.

그런데 비단 공간을 창조하는 데서 멈춘 것뿐만 아니라 점점 더 커졌다가 한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거대한 숨소리를 내기도 한다.

 

아래 작품은 실제 각진 벽 모서리에 비추던 [모서리]라는 설치 영상작품으로,

[숨쉬는 벽]과 마찬가지로 공간의 창조와 능동적 변조가 독특한 작품이다.

 

한편 신치현의 작품은 기존의 입체조형물을 컴퓨터로 스캐닝한 후 아크릴 판을 마치 픽셀을 상징하듯 사각으로 잘라 3D로 재창조한다.

 

 

 이소영+김건주의 we are sailing

 

이 둘의 공통점은 꽤나 현대적 소재로 만든 조형물이다.

전시된 작품 중에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빨간 선반과 그안의 일기 같은 기록들이었다.

그냥 멍하니 보고있자니

마치 보내고 싶었으나 보내지 못했던 글과,

우체통 역할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빨간 선반의

암울한 기운이 그대로 몸 속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박소영+김지원의 still life 시리즈 중에

김지원의 다양한 회화와 사진이 어우러진 작품군을 봤는데,

그 중 부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2장 있었다.

하나는 88년도 청첩장에 활짝 웃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찍은 데 각자 팔짱 끼고 벽에 기대어 카메라를 바라보는 모습의 사진.

그때나 최근이나 부부는 왠지 닮았다.

그런데 젊은 시절의 모습이 더욱 편안하고 넉넉해보인다.

최근 사진은 뭔가 프로페셔널해졌으나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없을 정도로 무장된 것 같은 표정이다.

 

마치 인간이 가진 관용과 즐거움을 더욱 풍부히하는 영원한 '유머'를 잊고

돌아가는 정세를 읽고 항상 날카로움을 지닌 상황에서 나오는 '위트'를 선택한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 세계는, 그들이 걸어온 세월의 예술은

한 시대를 잠시 풍미한 언어적 유희가 아닌

인간적이고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위트가 아닌 유머같은 것이길 빈다.

 

 

* 사진출처 : 금호미술관(http://www.kumhomuse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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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17:17 2007/05/1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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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4/3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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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7/03/19 20:26

오~ 은근히 기대했었나보다.

생각보다 재미없다.

뭔가 재미있긴 한데 뭔가 조금씩 빠진 기분이 들고, 반복도 많고, 작품도 적다.

그래서인가?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요렇게 추가하면 어떨까?', '이런 컨셉이라면 좋지 않을까?'하면서 구경했다.

어떻든... '꼭 봐라'는 못 하겠다.

어쩐지 인터넷 전시가 더 효과적이었을 것 같기도 하고...

 

작가들이 나랑 연배가 비슷한가비?

현대 대중문화의 우상들이라는 캐릭터가 태권브이, 이소룡, 배트맨, 엘비스 뭐 이렇다.

왠지 '현대'가 맞긴 한데 다소 진부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음...

가장 최신은 '비'와 '제시카 알바'정도?

다들 아직 '우상'까지는 못되어서 그런가?

같은 연배라도 안젤리나 졸리나 장동건 정도는 어때? 괜찮지 않나?ㅋㅋ




물론 그 와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다.

내 키만한 크기의 배트맨 패러디 작품이 천장에 매달려있는데,

잡지를 0.5cm 정도 두께로 잘라 붙였기 때문에 저리 나풀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작가가) 지대로 편집증 환자인 게지.

이 작품은 사실 그냥 스쳐지나갈 법도 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얼굴을 나타내는 살색 부분의 0.5cm 종이 하나마다 전화번호, 주민번호, 이메일주소 등 온갖 종류의 개인 정보가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시장에서의 이 작품의 제목이 [배드맨(bad man)]이었던 점과 완전 남발된 개인정보들을 보면서, 왠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신종 판매업자의 구체적인 상을 보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대빵 귀여운 얼굴:몸통 = 1:3 엘비스.ㅋㅋ

 

아... 태권브이 시리즈, 진짜 아쉬운 작품들이다.

(작가의 엄청난 의도에 대해 잘 모르는 관계로 그냥 막 얘기한다...-.-;)

'한산도 달 밝은 밤'에 태권브이의 탈을 쓴 이순신이 무심결에 던진 '광'이라...

이 정도 되면 왠지 태권브이 이마에 식은탐이라도 몇개 그려줘야 '리얼리티'가 사는 게 아닌감?ㅋㅋ


 

수묵 모란 꽃마다 피어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얼굴들.

사실 가운데 빨갛고 파란 모란꽃은 반짝이를 사용해서 굉장히 화려하고 눈에 띈다.

왠지 수묵에 이런 화려한 기운을 더욱 불어넣었다면,

엘비스를 반짝이게 했더라면 더욱 재미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이 작가는 주로 이소룡(왼쪽)과 작가 자신(오른쪽)이

나쁜 무리(?)들을 무찌르는 내용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이 그림의 경우 엘비스가 가세하여 '지옥의 불길과 죽음의 늪 한가운데 악마의 세력에 맞서 환상의 연주'를 하는 중이다.^^;;

물론 내 눈엔 멋들어진 붉은 벽지에 빌로드 빨의 청록색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연주하는 표정으로 보이지만...ㅋㅋ

 

 

사진이라 착각할 만한 이 그림들.

실제로 봐도 왠만큼 가까이 가지 않으면 사진 확대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교하다.


 

 

 

* 그림출처 : 충무아트홀(http://www.cma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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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9 20:26 2007/03/1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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