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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노래와 문화는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소소한 일상이지만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6월항쟁에 대한 나의 기억 (2)

 도대체 시간은 얼마나 흐른걸까? 내가 붙잡힌 건 해가 지기 전 6시 정도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캄캄하다. 경찰들은 그 선배를 검거하는 걸 당연히 실패하고 투덜거리며 돌아왔다.

아주 조그맣게 내가 "저는 이제 풀어주세요"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이들은 내가 둘러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조금 늦게 갔으니 그가 낌새를 채고 튀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어떤 결과였어도 내 운명은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달라지는 걸까?

다시 눈을 가리고 아까 있던 그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를 혼자 방안에 앉혀두고는 모두들 나갔다. 다른 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긴 어딘지, 시간은 얼마나 됐는지... 좀 지나면서 주위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까의 그 욕조엔 여전히 물이 채워져 있고, 그 옆에 세면대와 변기가 있다. 그리고 병원에 있는것 같은 침대 하나... 창문이 있었다. 세로로 길쭉한... 여긴 지하는 아닌 거 같다.

물을 계속 틀어놔 버려 물바다를 만들어 볼까... 그럼 무슨 일인가 일어나지 않을까?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찬찬히 생각을 해봤다.

언젠가 내가 속한 언더조직 선배가 끌려가 당한 여러가지 고문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요령도 이야기해주었더랬다. 더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리바이를 생각했다.

언더조직에 있던 우리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알리빠따라는 걸 설정해놓는다.

잡혀가게 되면 다 누구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거다. 나도 있었다. 그 사람은 이미 작년에 빵에간 선배다. 그리고 나는 오픈써클인 노래패 활동만 이야기하면 된다.

나는 딴따라다.. 그냥 노래가 좋아서 써클활동을 하는 거고, 그 써클 선배가 나를 꼬셨고, 이것저것 부탁했다. 그 형과 나는 애인사이다. 머리속으로 되뇌이고 되뇌었다.

 

엄마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휴학할 때 엄마 아빠와 엄청 싸웠다. 나는 학교를 때려치겠다고 했고, 두분은 절대 안된다였다. 싸우다가 합의를 본게 1년간 휴학이었다. 내가 엄마한테 아주 모진 소리를 했었다. 아빠한테 난생처음 따귀를 맞았다. 그 이후로 계속 냉전상태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미안했다. 눈물이 흘렀다.


문이 열리더니 나이가 좀 든 남자가 들어왔다. 울고 있는 나를 위로했다.

처음엔 내가 하도 체구도 작고 어려보여서 십대쯤 되는 여공인 줄 알았단다. 그런데 내 가방을 가서 다 뒤져보고 내가 대학생인 걸 알았단다. 잘만 하면 금방 나갈거라고...

누군가 문을 열고 쟁반과 속옷, 칫솔을 가져왔다. 옷갈아입고 밥 먹으라며 나갔다.

쟁반엔 무슨 해장국같은게 있었다. 그리고 포장된 팬티와 러닝이 있었다.

여기는 전부 카메라 장치가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속옷을 갈아입었다.

밥을 먹었다. 그래도 먹어야 하니까... 먹어두자...우걱우걱 쑤셔넣으며 또 눈물이 났다.


다시 그 남자가 들어왔다. 학생수첩을 펼쳐 적힌 일정들을 읽으며 물어봤다.

내가 속한 조직이 어디냐고...나는 울림터라는 노래써클을 한다고 했다. 그거 말고 다른 조직 없냐고, 그런 게 뭐냐고 내가 다시 물었다.

수첩에는 바로 며칠전 5.3 인천 집회가 적혀있었다. 종5(종합관 5층)이라고 적힌 내 세미나 일정을 종로 5가 집회로 생각했는지 그것도 물었다. 난 모른다고 했다. 종합관 5층 수업이라고...

그자는 갑자기 여기가 어딘지 아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여기가 그 유명한 남영동 블랙박스...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란다.

그 와중에 나는 진짜요? 라고 물었다. 그렇단다. 난 다시 거짓말 마세요. 저 겁주려고 그러는 거죠? 했다. 그 사람이 서랍에서 무슨 서류같은 걸 꺼내 보여준다. 거기에 그렇게 써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는 너 같은 건 죽어나가도 모른다고 했다. 자기들은 그런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곤 나보고 잠깐 나오란다. 나를 데리고는 옆의 어느 방으로 데리고 간다. 그 방문을 열었다. 거기엔 내가 잘 아는 83선배가 얼굴이 퉁퉁 붓고 피멍이 든 상태로 앉아 조사를 받고 있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서로 깜짝 놀랐다. 아까의 비명소리가 저 형이었을까?

문을 닫더니 다시 원래 있던 방으로 데려갔다. 그 사람 아냐고.. 알아요. 우리 써클 아래층 마당패에 있는 선배예요. 이름 아냐고... 별명밖에 몰라요.

"저는 그냥 나가도 되는 거 아닌가요? 저 좀 내보내 주세요."

"협조만 잘하면 금방 나갈 수 있으니까 걱정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잘해"

아까 생각해 두었던 대로 나는 나의 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자는 내말을 믿는 듯 했다.

나는 정말 그게 사실이라고 내 대학 생활은 그러하다고 굳게 믿었다.


이젠 잠을 자란다. 그리곤 여경이 하나 들어왔다. 그는 나가고 여경은 간이 침대를 펴고는 누웠다. 양치질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 긴 하루가 끝난건가? 피곤했다. 꼭 수영을 하고 난 뒤처럼 몸도 뻐근하다. 아프다는 생각은 안들었다.

며칠 전 5월 1일 메이데이, 가투가 끝나고 연대앞 다리네(실내포장마차같은) 술집에 앉아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는 동기들은 내 성년식 파티를 해주었다.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그 해가 만 스물이 되는 생일이었다. 동기들은 재수하고 온 경우 나보다 두살이 많았다. 파티라고 해봐야 쵸코파티같은 거에 굵은 양초에 20이라고 쓰고 그냥 술이나 먹는거지만... 그리곤 인천 5.3 집회에 갔었다. 거기서 전경이 던진 돌에 맞아 허벅지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다시 사흘뒤 학교 대동제 공연 때 혈서를 썼고, 이틀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료를 정리해서 막내 방 침대 매트리스 밑에 깔았다. 막내에겐 아빠한테도 이야기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인 동생은 며칠전 공연 때 내가 혈서를 쓰는 걸 보고 대충 눈치를 챘는지 아무말 없었다.


눈을 떴다. 또 쟁반에 아침밥을 가져왔다. 그래도 어제보단 잘들어간다.

어제의 그 자가 또 들어와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성심성의껏 대답을 했다. 내가 믿고 있는 것만큼.

지루한 하루가 또 지나갔다. 저녁밥을 먹고나니 경찰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웅성웅성 지들끼리 뭐라뭐라 하는데 우리집을 털었나보다. 식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젠 어쩌나...

그들이 나가자 다시 그자가 앉아 이야기를 한다.

아버님도 점잖으시고 아주 훌륭하신 분이더라고...집도 괜찮게 살더구만 왜 이런 짓을 하냐고...

"집에 갔었어요?" 식구들의 안부를 묻고 싶었다. 내가 무슨 일 터질 때마다 집에 안들어가곤 했으니 별로 이상하게 생각은 안할거라 여겼는데... 얼마나 다들 놀랬을까 싶었다. 미안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우리 할머니 제삿날이다. 친척들이 전부 와계셨을텐데. 온 동네 소문은 다났을 거고, 난리난리칠 아빠와 고모얼굴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월북을 하시고 빨갱이 집안이라고 아빠 식구들은 무지하게 수모를 당하며 사셨고, 결국은 마을을 떠나 주민등록까지 위조해 살기도 했었단다. 아직도 빨갱이라면 치를 떤다. 아니 집안 다 말아먹고 사람들 다 죽이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틀을 더 있었다. 특별히 더 진전된 조사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지 그 자는 나에게 애인하고 키스는 해봤느냐, 여관은 몇 번이나 갔었냐...

이런 질문들을 해댔다. 그런 거 모른다고 딱 잡아땠다. 별로 말 섞고 싶지 않았고, 화를 내고 싶기도 했지만, 뒷감당할 자신도 없고, 그저 가만히 고개만 저었다. 그 자는 철없어 보이는 나에게 성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개XX!) 뭔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대꾸도 없이 듣고 앉아 있었다.


그날 아침은 어수선했다. 사람들이 왔다갔다하고... 그러더니 나보고 짐 챙겨서 나오란다. 어디로 또 가는걸까? 운명에 맡긴다는 마음으로 아무생각없이 따라나갔다. 이번엔 눈을 가리지 않았다. 어떤 사무실 같은 방에 들어갔다. 아빠가 앉아계셨다. 깜짝 놀랐다. 아빠는 앉아서 신병인수서 라는 걸 쓰고 계셨고, 조서도 다 읽고 있었나 보다.

앞으로 쓸데없는 데 좆아다니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그 자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 나가는 거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빠랑 나가는데 그자가 다시 불렀다.

당분간은 수시로 더 만나야 한다고... 연락하면 그 때 그 때 나오라고... 했다. 역시 아무생각이 들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빠는 아무말 없이 내 어깨를 감싸며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푹 자라” 하셨다.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렀다.

집에 들어가자 마자 엄마는 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벌겋게 부어오른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무슨 일 없었냐고 물으셨다. 그런 일은 없고...그냥 많이 맞았다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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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항쟁에 대한 나의 기억(1)

한 몇 년 전만해도 6월항쟁 기념행사, 혹은 이한열 열사 추모행사는 늘 참석했던 것 같은데

근래들어서는 굳이 일부러 가서 참여하는 일은 없어진 것 같다.

올해가 87년 20주기인데...

지금 나에게는 6월항쟁보다 7,8,9 노동자 투쟁 관련 고민들이 더 커서인지 웬지... 와 닿지가 않는다.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6월항쟁은 관주도의 행사가 되어 버린 느낌도

영향이 없다 할 수 없겠지.

2000년, 광주항쟁 20주기 때 5.18이 기념일이 되고 정부 주도의 행사가 되어버리던 날

나는 광주에 있었다. 그래도 그 때까지는 5.18이 되면 광주에 내려가 행사참여도 하고

망월동 묘역도 참배하는 일정은 당연한 나의 삶의 일부였는데...

그날 본 광주의 신묘역과 기념행사는 너무 기가 막혔다.

완전히 유원지가 되어버런 신묘역, 광주의 그날의 기억들은 그저 사진 몇장으로

기념 코스가 되어 버렸고, 기념행사는 내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 같은 축제의 분위기 였다.

그날 같이 갔던 선, 후배들과 나는 이제 5.18 주간에 광주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 모양을 보는 것이 너무 아팠다. 

어제 저녁에 KBS 스페셜에서 87년 2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를 했다.

6.10도 기념일이 되고 또 관 주도의 행사를 한다. 5.18이 그랬듯, 6

.10도 이렇게 내 기억 속에만 간직해야 하는가...

 

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하고 학생운동을 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와 광주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이 시대에 대학생이었던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게 해주는 큰 사건이었다.

그렇게 학생운동을 하던 나에게 87년의 기억은 뭐랄까 공포와 흥분... 그런 느낌이 교차하는 사건이다.

87년은 다 알고 있듯이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공개되면서 시작되었다.

나에겐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엄청난 공포였다.

한 해 전 86년 나는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수배중인 어떤 선배의 부탁으로 그 집에 갔던 적이 있다. 골목을 들어서는데

골목어귀에 포니 승용차가 한대 서있었다. (그 당시에 대부분의 승용차는 검은색 포니였다. )

운전석엔 어떤 남자가 신문을 보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전봇대 옆에서 또 다른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동물적인 본능이랄까 나는 이들이 경찰이라는 걸 느꼈다. 걸음이 빨라졌다.

조금 앞쪽에 또 다른 남자가 서있었다. 뒤따라오는 발자욱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다.

뛰었다. 다다다닥... 찻길에 다다랐을 때 남자들은 내 뒷덜미와 허리춤을 잡아챘다.

왜 그러냐고 했지만 저항할 힘이 모자랐다.

승용차에 태워지고 수갑이 채워졌다. 고개를 숙이라며 뒤통수를 눌렀다.

그리곤 그 위에 양복 윗도리를 덮었다.

정말 경찰일까? 아니면 납치범? 온갖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사람들의 얼굴도 스쳐갔다.

얼마나 갔을까... 철문소리같은게 들렸다. 차가 멈췄다.

내 눈을 가리고는 나에게 내리라고 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구두발자욱 소리만 들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려가는지 올라가는지...

다시 약간을 걸어 또 문 소리가 났다. 웅성거리는 소리...

눈을 덮었던 건 누군가 벗겼다. 갑작스런 빛에 잘 보이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대여섯명의 남자들은 다짜고짜 온갖 욕설을 하며 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 가방을 뒤지던 한 남자가 소리쳤다.

"이 X 완전 빨갱이 아냐?" "야, 이거 완전 골수야 골수!" 그러더니 다시 이어지는 구둣발과 손찌검.

나는 아픈 줄 몰랐다. 머리속에서는 계속 어떤 일이 꼬였을까...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또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하나... 누구를 갖다 대야 하지?

"좋은 말 할 때 이야기해. 000 이 어딨어?"  "제가 어떻게 알아요?"

"어쭈? 이게? 그럼 그집엔 왜갔어?"

"학교에서 어제 우연히 만났어요, 뭐 좀 갖다달라고 하기에 간거예요"

"지금 어딨어?" "몰라요" "어디서 만나기로 했을 거 아냐?"

"아니예요, 학교에 가면 알아서 연락한다고 했어요" 

"이거 안되겠네... 너 잠바 벗어!" "왜요?" "벗으라면 벗어"

남자들이 내 팔을 잡고 일으키더니 잠바를 벗겼다. 그리곤 내 팔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

무슨 소린가 들려 돌아보니 이미 욕조에 물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아... 선배들한테 말로만 듣던 일들이 드뎌 내게 닥친거구나. 어떡하지? 어떻게 하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나를 물속에 쳐박았다.

욕조 바닥에 흙과 녹 조각들이 보였다. 그 와중에도 더럽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참을수 있는 만큼 참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발버둥을 쳤다. 욕조 밖으로 머리를 꺼냈다.

컥! 케엑! 쿨럭쿨럭...켁!!

"어딨어? 빨리 얘기해" "몰라요, 진짜 몰..." 다시 물속으로 쳐박혔다.

그러길 몇차례, 나는 정말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이렇게 죽을 수 있는 거였구나...

팜에서 읽고, 이야기로만 듣던 그런 일이 결국 나에게 일어나는 거였구나.

무서웠다. 엄마, 아빠의 얼굴과 몇몇 친구들의 얼굴들이 스쳐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에 물이 가득차 몸이 퉁퉁 부어가는 것 같았다.

"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엉엉 울었다. 공포에 싸여 나는 아이처럼 펑펑 울고 말았다.

"다 말할께요. 다, 살려주세요"

"진작 그럴 것이지, 000 어딨어?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

근데 정말 난 그가 어딨는지 몰랐다. 약속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야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학교앞 00 주점에서 8시에 만나기로 했어요." "어? 시간 다됐잖아? 데리고 나와"

그리곤 한 남자가 뛰어 나갔고 다른 남자는 내 수갑을 풀어주며 옷을 입으라고 하곤 수건을 주었다.

하두 발버둥을 쳐서인지 온몸이 젖어있었다. 

잠바만 걸치고 젖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닦으며 그 남자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여기는 도대체 어딜까? 서대문경찰서? 마포경찰서? 내가 아는 동네면 도망갈 수 있을까?

다시 이리로 들어온다면 정말 죽을 거 같았다.

나가서 거짓말이었던게 탄로나면 나는 이사람들 손에 죽을 거야.

이번엔 수갑을 앞으로 채웠다. 승용차에 타고 신촌 뒷골목까지 갔다.

서대문 경찰서나 마포경찰서는 아닌거 같다. 이렇게 멀지는 않을테니까.

운전자와 뒷자석에 나만 남겨두고 세 남자가 술집을 향해 갔다.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양손을 잡아빼니 손이 수갑에서 빠진다. 한 손을 반쯤 빼고 앞자리를 살핀다.

문이 열리진 않을거 같았다. 발로 세게 걷어차면 열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이 돌아와 문을 열때 밀고 뛰어나갈까? 그런 건 영화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그랬다가 실패하면? 아... 상상하기도 싫다. 이렇든 저렇든 결국 난 이들 손에 죽을 거 같았다.

 

휴우~~ 안되겠다... 힘들어서 더 못쓰겠다. 눈물이 난다.

기억해내는 게  너무 힘들다.

그리고 지금은 밤이라 깊게 생각하면 잠을 못잘거 같다.

근데... 언젠가는 한 번 털어내 버리고 싶은 이야기인데...

어젯밤 KBS 스페셜을 보고 잠을 또 못잤다. 그냥 눈물이 흘렀다.

어떻게 해야 가벼워질까? 털어내고 싶은데.

일단은 그만 써야 겠다. 쓰던 원고나 마저쓰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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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할인마트 안가기

 

결혼하면서 12년을 시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단순히 우린 집을 얻을 돈이 없었고, 경기도 고촌에서 시부모님은 두분이 살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서 살겠다고 했다.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역할 분담은 필요했고 나는 활동을 하니까 집안 살림은 어머님이 다 해주셨다. 그런데 생활비가 문제였다.

어머니께 한달에 생활비가 얼마나 드냐고 여쭤보니 잘 모르신단다.

어머니는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 전체 생활비를 운영해보신 경험이 없다. 독특하게도 아버님이 돈을 쥐고 필요한 걸 사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지금은 돈벌이를 하지 않으시는지라 자식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용돈을 얻거나 물품을 사오라고 하셨단다.

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일단 30만원을 드렸다. 쓰시다가 떨어지면 이야기하시라고...

우리도 형편이 넉넉지 않으니 조금씩 쓰면서 한달 생활비를 계산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돈이 다 떨어졌다고 하신다. 네? 그 돈 다 뭐하셨어요?

어머니는 추궁을 받으신 거라 생각하셨는데 조목조목 이야기를 해주신다.

파마하고.. 교회 헌금내고... 반찬사고... 신발도 바꾸고...집에 필요한 뭐 사고... 등등...

어머니는 용돈과 생활비를 구분하지 못하신다. 그렇게 살아보신 적이 없어서인 것 같다.

그렇게 하니 안되겠다 싶었다.

용돈은 용돈대로 형제들이 나누어서 드리도록 해야 하고 생활비는 생활비로 따로 정리를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시도한 것... 장을 같이 보기.

한 달에 두 번, 혹은 세 번을 장을 보러 같이 갔다. 어차피 열흘치나 보름치를 사야하니 차를 타고 싸다는 대형할인마트에 가서 필요한 걸 이것 저것 넉넉하게 사고 뭐하고 하니 두시간이 훌쩍 간다. 계산을 하니 20만원 정도가 나왔다. 헐~~

다리도 아프고 정신도 없고... 집에 와서 물건 산걸 열어보니 이런.. 별로 산게 없다. 남편이 좋아하는 술과 술안주거리... 약간의 찬거리... 생필품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또 장을 보러 가게 되었다. 결국은 마찬가지...

꼭 필요하지 않은 것도 참 많고, 한꺼번에 많이 사게 되니까 버려지는 것도 많다.

뭔가 대책이 필요한데....

며칠 뒤 친정에 제사가 있어 갔는데 엄마와 오빠가 장을 보러 이마트를 간다고 한다. 엄마는 이마트 가는게 영 못마땅 하다신다.

집앞에 재래시장이 있는데 거기가면 단골 아줌마들이 다 알아서 잘 챙겨주고 물건도 좋단다.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시장상인들도 먹고 살아야지, 맨날 무슨 마트가고.. 가봐야 정신만 없고, 봉투도 따로 사야하고, 물건도 좋지 않고, 별로 싸지도 않단다.

우리엄마 시골서 자랐고, 청주서 고등학교 나왔다. 그리고 살림만 하다가 아빠와 늦게 결혼해서 서울서 산지 벌써 30여년이다. 선거 때마다 싸운다. 나 꼴보기 싫어서, 운동권들 설치는 거 싫어서 당나라당 찍는다고...

그런 우리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 이게 출신성분 차인가?

나는 엄마한테 맞장구를 쳤다. 맞어... 그치?

대형할인마트 물건값 정말 싼가? 물건을 10개 20개 들이로 사면 어디서 사든지 싸게 해준다. 대형할인마트는 물건 값을 낮추기 위해 하청업체에게 무자비한 가격 횡포를 강요한다. 누구는 그런 이야기한다. 이마트는 교환, 반품을 군소리 없이 해준다고... 너무 좋다고...

자기네들이 전혀 책임지지 않고 물건 납품한 중소업체들한테 책임 물리면 그만이니 당근 교환, 반품 군소리 없이 해주지...

그리고 사실 별로 싸지 않다. 대형할인마트가 물건 값을 조금씩 올리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분가해서 둘만 사는 지금 우리는 일주일에 당근 1개, 호박 1개, 양파 2개, 무 1개. 이만큼의 재료도 필요하지 않다. 남는다. 마트가서 물건 살 일이 없다.

그치만 마트는 이제 더 이상 할인매장이 아니다. 오빠네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간다. 1층에 놀이방도 있고 아이들 이것 저것 구경시키고 사주고, 또 같이 먹고.

먹거리 외에 가구며, 살림살이며 옷이며, 미용실에 병원에 문화센터까지...없는 게 없고, 모두 너무 싸단다. 아니 이제 굳이 싸다는 건 이유가 되지 않는다. 집 가까이에 저렴한 백화점과 문화센터를 겸비한 공간이 생긴 거니까.

분가하고 우리는 마트가지 않기로 약속했다. 노동자 탄압하지, 영세상인 다 죽이지, 또 중소업체에 횡포부리지, 주변 교통 마비시키지, 사람들을 소비 풍조에 물들게 하지, 자원 낭비하게 하지.. 뭐 이유를 대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고, 또 이런 배경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잘난척하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몰라서 이용하는 게 아니라는 거.

노동자 탄압하고 착취하고.. 그래서 불매운동 하자고 해도 사실은 거의 가능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옛날 낙동강에 폐수 방류한 두산 불매운동 할 때만 해도 약간 영향력이 있었지만 요즘은 별로 실천되지 않는다.

롯데 노조에 공권력 투입되고 롯데 불매운동 할 때 대학에 초청강의를 간적이 있는데 학생회 간부가 나한테 롯데 음료를 가져다 주었다. 내가 롯데 불매운동하기 때문에 안마신다고 하니까 당황하며 다른 걸로 바꾸어 주었다.

배달호 열사 돌아가시고 두산 불매운동할 때 내가 유일하게 마시는 청하도 두산 계열사 상품이라해서 눈물 머금고 소주마시거나 선배꼬셔서 백세주 마셨다. 뭔들 그런 실천에 동참을 안해봤겠는가... 그치만 역시 잠시 뿐이다. 어떤 상품엔 또 어떤 노동자의 피눈물이 배어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문래동 사무실 옆에 홈플러스가 있다. 사무실에 차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홈플러스 주차장을 이용하라고 한다. 24시간 무료... 크으~~ 아주 넓은 대형주차장을 완비한 사무실이라고, 마치 우리 땅인 양 맘대로 쓴다.

가끔씩 뭔가 급히 사야할 때, 사무실에 커피가 떨어졌을 때 갈등을 한다. 내가 그런 곳 안다닌다는 거 알고 옆자리 친구는 물건 살 때 꼭 자기가 간다. 생각해보면 참 얌체같은 짓을 한다 싶다. 나만 안가면 그만인가? 쩝~~ 그러면서 또 갈등...

나는 그냥 내 생각이 그렇고 우리 남편과 내가 약속했다고 알려주는 게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고 이야기 한 건데... 그렇다고 주변사람들을 죄인 취급하긴 싫고, 또 강요하기도 싫다. 없는 살림에 조금이라도 싼 물건을 사다놓고 두고 두고 쓰겠다는 건 어쩔 수 없는 강요된 선택이고 어찌 이를 탓할 것인가 말이다.

그러니 이 약속도 얼마나 지켜질 지는 잘 모르겠고, 또 어떤 식으로 타협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갈 때까지 가보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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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비우기

집안 살림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고 자란 나의 남편.

뭐 곱게 자라서 손에 물 안묻히고 자랐다는게 아니라 워낙 집에서 내논(?) 자식처럼 밖으로만 돌고 집에서 있던 날이 거의 없었단다.


결혼하고 시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가끔 집에서 대화를 나누면 남편의 입담에 어머니가 유난히 너무 재밌어 하신다. 그래서 내가 여쭤봤다. “이 사람 어릴 때부터 이렇게 농담 잘했어요?“ 우리 어머니의 진지한 답변. ”난 몰라... 난 얘랑 같이 살아본 기억이 없어...“

참내, 결혼 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집에 들어갈까 했단다. 그럼 어디서? 누나네, 형네, 친구네... 누구네 집이 빈다고 하면 그 집 가서 자고  냉장고 뒤져 먹고 씻고, 옷 다 갈아입고 나오고 했단다. 그러다 보니 밥조차 한 번 해 본 적이 없다는 거.

그럼, 놀러가서도 안했나? 캠핑이나 여행도 안갔나?

친구들과 놀러가면 자기는 주로 텐트치고 땅파고, 대형 튜브 불고, 뭐 놀 거리 만들고, 나무해오고, 숯불 피우고, 무지하게 바빠서 밥이나 음식할 틈이 없었단다.


하여간 그래서 살림은 커녕 밥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남편과 내가 1년 반 전에 13년간의 시부모님과의 동거를 끝내고 분가를 했다.

더 이야기하기 전에 가슴에 손을 얹으니 살짝 찔려서 고백하자면, 나 역시 시부모님과 살면서 살림은 몽땅 시어머니가 다해주셨기 때문에 거의 뭐 할 기회가 없었다고나 할까.

분가하니까 청소, 빨래는 어떻게 주말에 몰아서 하든지, 대충 미뤄두고 살 수 있는데 13년간 시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 먹던 습관 때문에 밥 해먹는게 젤 큰 일이었다.

밥은 밤에 쌀 씻어서 예약해놓고 아침에 일어나 국만 얼른 대충 아무거나 끓여서(이것두 아는 게 없어서 네가지 정도만 정해놓고 돌아가며 해먹는다) 먹으니 설거지는 주로 남편의 몫.

때문에 어디가면 자기 손에 물기 마를 날이 없다는 둥, 주부 습진이 점점 심해진다는 둥 앓는 소리를 한다. 설거지도 이젠 습관이 되었지만 첨엔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갠적으로 난 설거지가 정말 싫다)


특히 남편은 음식찌거기를 손으로 만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 

어느 정도냐면 돌이 좀 지난 조카들에게 밥을 먹여줄 때 밥풀과 국물을 질질 흘리는 걸 보면 보통 사람은 가서 닦아주거나 기다렸다 닦아 주거나 아님 그냥 지켜보거나 하겠지만 남편은 으으윽... 이상해...어떻게 좀 해봐... 하면서 도망간다.

(어릴 때 음식 흘린 거에 혹은 찌꺼기에 뭐 상처받은 일이 있는 게 틀림없다. 음식물찌거기에 의한 트라우마?)


하여 남편은 절대 음식찌꺼기 처리를 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화를 버럭!! 누군 좋아해? 싱크대 수채 구멍에 있는 거 누군 만지고 싶냐고!!

그러자 남편은 몇 번 나한테 구박을 받더니 묘책을 생각해 냈다. “앞으로 음식은 절대 남기지 말고 다 먹자.”

흠... 그건 또 내가 고민하던 건데... 음식물 남기는 건 농사짓는 분들과 요리를 한 사람에게 죄악이고, 자원낭비고, 환경오염이고...

그래서 우리는 찌개나 국을 끓여서 국물까지 다 마시는 전술을 쓴다.

물론 나는 손이 매우 작아서 음식을 할 때 무지하게 조금하고 한 두끼면 싹 먹어치울 수 있게 한다.

그래도 가끔은 건더기가 남기도 하고 냉장고 속에서 상하기도 하니 음식쓰레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절대로!! 는 잘 안된다.)

하여간 그래서, 물론 나랑은 약간 다른 생각에서 시작한 거지만, 우린 음식물 남기지 않기를 둘이 약속했다. 그것도 우리의 작은 실천이다.


그러다 보니 절대 냉장고에 뭐 쟁여놓을 일도 없다.

우리집 냉장고...분가하면서 시누네랑 바꿨다... 별 생각없이 그냥 무거운거 두번 옮기기 그래서... 무지 크다... 여름에 더울 때 거기 들어가 있어도 충분할 만큼.

처음 이사와서 반찬 한두개와 물병을 빼고 냉장고를 채우고 있던 건 밥솥이 없던 상태라 비상식량 같은 국수, 라면... 양념... 등등 이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김치통이 들어간 거 빼고는...

상상하시라, 문을 열면 뒷벽이 하얗게 다 보이는 시원한 냉장고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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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 -87년 다시보기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

이렇게 주장하기 시작한 건 2000년 노문센터를 만들고 그해 메이데이 땐가, 아님 노동문화일꾼캠프 땐가... 하여간... 노동문화운동의 큰 방향에서 슬로건을 내걸었다.


나름대로 사랑방 토론회를 2년간 진행하면서 일상의 다양한 부분들을 새롭게 보고자 했었고, 그것을 구체적인 프로그램 기획으로 연결해서 교육도 하고 캠프도 하고...

노동문화를 문화예술로만 바라보지 말고 삶 전체로 바라보자고 주장도 하고 교육도 했었다.

그러면서 내 삶을 다시 돌아보고...


그러다 어떤 술자리에서 열심히 떠들고 있었는데(원래 내가 술먹으면 논쟁하듯이 주장을 내세우는 편이라 ^^;;) "일상의 모든것과 싸우자는 문제의식으로 내 일상을 뜯어보니 첨부터 끝까지 너무나 싸울게 많아... 정말 고민은 많은데 그걸 다 생각하려니 살 수가 없어... 너무 힘들어..."라고 토로하자

어떤 문화활동가가 듣고 있다가 피식 웃으면서 하는 말,

“넌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 운동은 좀 사람들이 편해지려고 하는 거 아냐?”

앗... 문화활동가들 조차도 이런 문제의식을 못 받아들이나?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애인들의 문화권에 대해 교육을 하러 갔을 때 노동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결국은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되고 분반 토론을 붙였다.

토론 결과를 발표하는데 난 정말 부끄러웠다.

언어 소통이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 통역(?) 하는 분이 옆에서 말을 옮겨주었다.

- 왜냐하면 가까이서 일대일로 천천히 대화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데 마이크로 여러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라 잘 알아듣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

나 역시 말로만 떠들고 다녔을 뿐인데 이들을 삶으로 바로 연결시켰다. 전부 다 기억은 못하는데... 인상적인 부분만 옮겨보면.

“우리 장애인들도 경증 장애인들을 중심으로 좀 편하게 활동을 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중증 장애인들과의 결합이나 소통에 대해 소홀해 왔다.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차별당해 본 사람이 차별당하는 사람 심정을 안다고?

꼭 그렇지는 않다. 내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교육하면서 느낀 건데, 차별 당하는 사람이 자기보다 낮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또 차별하더라고.

물론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곧 알게는 되지만...


나는 노동문화운동을 하지만 그것은 큰 범주에서 노동운동이라는 생각을 떼어내 본적이 없다. 여러 영역 중에서 노동문화운동이 나의 주요한 역할로, 또 내가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길로 선택한 것일 뿐.


노동운동이 편해지려고 하는 거라고? 천만의 말씀.

모두가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거라고? 만만의 말씀.

너무 편해지는 거. 많이 벌어 잘 사는 거 좋아하지 마시라.

그건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발상이고, 자본주의적인 일상을 재생산 할 뿐이다.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

그 당시 일어섰던 노동자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투쟁에 동참을 했을까?



무슨 거창한 이유나 잘 조직되고 단련되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어서...

기계나 노예가 아닌 인간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40년, 50년, 60년을 그것이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이며 숨죽이고 살았지만 그 억눌려왔던 분노가 터지면서 50여년을 길들여 온 삶을 떨쳐내며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소박한 마음 아니었을까?

그 처절한 분노와 소박한 마음들이 모여서 민주노조를 세운 거 아닐까?


87년 노동자투쟁 20주년에 다시 생각해보자.

인간답게 산다는 게 뭔지... 그 때 주장했던, 그 때 열망했던 인간다운 삶이 지금도 유효한지... 그 당시의 인간다움은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노동조합운동으로 확대 발전하면서 그 동안 잘 먹고 잘 사는...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해 온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러한 가치가 이미 자본의 가치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을 새로운 노동자의 가치로 다시 설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일상의 모든 것과 싸우는... 내용적 토대와 구체적인 실천들을 만들어 가보는 작업을 올해 해보고 싶다.

이제부터 하나씩 내가 고민해온 작은 실천들이라도 하나씩 풀어볼까 한다.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 하고 교육을 하면 간혹 마지막에 물어보는 교육생이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무나 막연하지만... 나의 모든 일상을 꼼꼼히 되짚어 보고, 다르게 생각해보고... 그래서 내 몸에 내재되어 있는 자본의 가치들과 싸우는 겁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과...” 라는 궁색한 답변을 하고만다.

그러면서  빨리 정책 대안과 구체적 실천과제들, 그리고 프로그램 기획들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수억 고민만 해왔는데 결국 아무것도 못내고 우린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래서 뭔가 큰 대안을 내는 것 말고...(역시...실력이 모자란다는 걸 실감하고... ㅠㅠ)

그냥 내가 최근 몇 년간 생각하고 해왔던 일과 또 놓치고 있는 소소한 일상들을 하나씩 뜯어보는 작업을 해보려고...

올해 인천과 울산에서(지금까지 노동문화제라는 이름을 걸고 지역에서 꾸준히 문제의식을 유지해온 지역은 이렇게 둘 밖에 없지만) 87년 7,8,9 투쟁의 정신을 되짚어보는 노동문화제를 준비하고 있다.

마침 내가 두 지역의 사업에 살짝 혹은 깊이 발을 들이고 있다보니 대체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고, 이 참에 좀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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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주40시간 사업장 노동자의 여가는?

[민예총 일일문화정책동향]

노동자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

기획연재 > 주 40시간 사업장 노동자의 여가는?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이 단축되면서 노동자의 여가시간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이 늘어난 여가시간을 그들의 문화를 실천하는 것이 아닌 ‘자본의 논리가 더욱 확대된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소비만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에 일일문화정책동향에서는 이번 기획을 통해 현재 한국 노동자 문화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모든 노동자들의 문화적 동질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탐색하여,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노동자의 삶으로서 문화, 일상 문화를 만들기 위한 정책방향과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 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 총론

② 현장체험수기 Ⅰ

③ 현장체험기 Ⅱ

④ 노동자문화의 방향과 대안


[주40시간 사업장 노동자의 여가는?-① 총론]

 

이성철 _ 창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sclee@changwon.ac.kr


‘현대해상’으로 가버린 ‘그날이 오면’


  문화에 대한 정의는 문화를 말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므로 문화 개념은 ‘정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문화에 대한 정의는 개인 또는 집단(계급)의 정체성이 투영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을 지녀야 할 노동자문화의 현재 상태는 어떠한가? 1970년대 이후 탈춤 등을 비롯한 민중문화운동을 시작으로 1980년대의 마당굿, 마당극, 노가바, 그리고 노동문학, 노동극 등 다양한 노동자문화운동들이 폭발적으로 고양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많은 이들이 문화의 시대라고 일컫는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오히려 노동진영의 문화적 실천은 그 양적 비중과 질적 내용에 있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문화운동이 노동운동의 성장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우리 사회의 지배 집단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관점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시종일관 철저히 관철시키고 있다. 첫째, 생산 내의 정치를 매우 효과적으로 생산의 정치로 확대ㆍ재생산한다. 둘째, 노동과 여가, 생산과 소비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현 국면의 이데올로기적 블록을 견고히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노동진영의 대응은 어떠하였는가? 탈춤은 ‘박카스’ 광고로, 사물놀이는 제도화된 연행으로, ‘천리길’은 ‘SK 엔크린’으로, 그리고 ‘그날이 오면’은 ‘현대해상’으로 가버렸지 않은가?


노동자의 문화적실천은 자본의 문화전략에 대한 동의·저항 등을 포함한 관계적 개념


  현 시기 우리나라 노동자문화의 성격들에 대한 고민들은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민중문화 또는 노동자문화의 내용을 과거 시제로만 회고할 것인지, 아니면 그 시절의 부활을 단순히 희망하고만 있을 것인지의 문제를 넘어서서,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상황에서 노동자문화의 실천적인 전략들을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가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실천은 경제적인 재화에 대한 단순한 소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문화정책 및 자본의 문화전략과 그 산물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수용과 배척, 동의와 저항 등을 아우르는 관계적인 개념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적 관점이 문화실천의 영역에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문화화나 문화적 노동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를 생활양식의 총체라고 단순하게 정의하더라도, 노동운동을 통한 계급적 전망의 확대는 노동자문화의 형식과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별 노조주의 관행에서 벗어나 지역문제에 대한 관심과 내부문화 교정노력 있어야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실천이 보다 근본적이면서도 그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기업별 노조주의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의 기업별 노조주의의 관행이란 단지 노동조합의 조직형태나 경제주의적 운동방식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동안의 노동운동에 잠재해 있을 수 있는 단위 기업이나 단위 노조 중심의 운동관행이나 의식, 그리고 가치관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작업장 바깥의 지역문제에의 개입과 관심,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및 정치적ㆍ사회적 개혁 투쟁으로서의 운동의 외연과 내포의 확장은 계급적 문화실천의 내용을 희석시키거나 운동의 중심성을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계급적 헤게모니를 더욱 공고히 다지는 것이 된다.


끝으로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실천전략을 고민함에 있어, 노동자계급이 처한 현실의 상황으로부터 곧장 당위적인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점을 낳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문화가 지녀야 할 건강성과 연대성, 그리고 실천성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 못지않게 노동자들이 현실적으로 안고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적 내용들(가부장적 권위주의, 지나친 혈연 및 학연주의, 화투 문화, 자기 문화에 대한 과소평가 등)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교정의 노력들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40시간 사업장 노동자의 여가는? - ② 현장체험기 Ⅰ]

'투쟁'역시 노동문화의 소중한 결과

  

지민주 _ 노동가요 가수 jiminjoo@hanmail.net


나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다. 그 중에서도 노동가요를 부른다. 노래를 통해 그들의 삶 속에 뛰어 들어가 부대끼며 살고 있다.

이렇게 노래를 한지도 벌써 10년을 훌쩍 넘다보니 처음 현장에서 만난 숫기 없는 노동자가 이제는 중견의 노조간부가 되어 악수를 청한다.

바다 같은 세월은 아니더라도 강산이 한번 변한다는 시간동안 그렇게 현장에서 버티고 단련되는 모습을 보면 고마운 마음이 먼저 든다.

처음 그 동지를 만났을 때는 노동가요를 처음 접하고 자신의 이야기라며 상기된 모습인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세월 속에서 그 상기된 얼굴은 집회니까 조합원들이 아는 노래를 두어 곡 부탁한다고 얘기를 한다. 왠지 씁쓸한 마음이다. 조합원이 아는 노동가요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의 투쟁가로 집회는 진행되어지고 있었다.

투쟁을 얘기하고 투쟁을 선동하고 투쟁을 도모하는, 바로 그 자리에 어울릴만한 곡들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투쟁가를 부른다고 투쟁의 마음이 고취되는지는 알 수 없다. 객관적으로 그랬던 시절이 있긴 하였지만...글쎄...지금은 그렇다라고 단정 짓기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어차피 그 시대의 음악이나 예술은 사회현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함께 배고프고 분노하던 시절에는 그것을 떨쳐내고자 하나로 뭉쳐 싸우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변화된 노동자들의 조건(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간의 이질감, 노동자 여가생활의 활성화와 그 혜택으로부터 배제된 노동자들, 단사조합주의에 매몰된 관료적 노조운동 등)들은 더 더욱 노동자간의 일치된 단결을 막고 있다.


노동자의 문화란 무엇일까? 단지 그런 여가생활을 풍족히 하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정도의 경제력인가?.. 아니면 10만원쯤 되는 오페라표를 선뜻 끊을 수 있는 여유로움일까?.. 아니면 집회장에서 투쟁가를 힘차게 부르고 정렬된 자리에서 빨간 조끼에 머리띠를 묶은 우리의 모습일까?....

그것으로 노동문화를 경험했다고 얘기한다면 정말 좁고도 얕은 경험의 한계일게다!

어차피 살아가는 각각의 모습이라면......


노동자라는 이름에서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로 착취라는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건 여러 제도권과의 싸움이 될 것이다.

‘그것이 노동자의 운명이다.’

물론 싸우는 것만이 그들의 문화라고 할 수는 없으나.. 현 시기 노동자의 문화를 보자면 어영부영 자본에 그리고 노동에 양다리 걸치는 식은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부처로 보이고 온화한 로맨티스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아직도 낭만이 있는 살만한 곳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노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온갖 비리가 가득해도 권력만 있으면, 돈만 있으면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세상! 근로기준법이 있어도 혜택을 받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한, 불법해고를 당해도 어디 하나 내편 들어주지 않는 세상이라면 과연 노동자인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떤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하는가?


우리가 착목해야 될 노동자의 문화는 여기에 있다.

조금 더 나아진 연봉으로 어떤 차를 끌고 어디를 여행갈 수 있느냐가 아니다.

차이가 있어도 차별이란 말은 아니다. 노동자면 노동자인 것이다.

여러 매체들과 사회적 상황들 때문에 노동자라는 말속에는 붉은 머리띠의 긴장된 얼굴을 떠올리게 되지만. ‘투쟁’ 역시 노동문화의 소중한 결과이다.

우리는 노동자이기도 하지만 한 가족의 가장일 수도 있고 사랑스런 딸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하나 하나 고립된 채 해일처럼 몰려드는 자본주의의 문화들, 자본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 놓은 많은 시스템 속에서 혼자로는 너무 벅찬 싸움이다.

우리는 그것을 지금까지 노동자들의 역사를 보면서 배워왔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역사가 그랬고, 그 이후 많은 역사들이 그것들을 증명하고 있다.

싸워서 이기기도 하고 때론 밀리면서도 조금씩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알았고 동지를 알아가는 시간들이었다.


그 속에서 함께 울고 웃던 노동자의 노래는 다 어디로 숨어버렸나?

함께 거리를 뛰며 외쳤던 우리의 구호들은 어디로 숨어버렸는가?

한 개씩은 가지고 있음직한 노동가요 테잎은 책꽃이 어느 한켠에 아니면 자가용 앞 수납칸에 먼지가 쌓인 채 뒹구는 건 아닐까 ? 

마치 우리가 얘기하는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무용담처럼 잊혀지기 전에 안주삼아 조금씩  조금씩 내보이는 것에 뿌듯해 하는 건 아닌지..

각자의 단사안에 갇혀서 자신의 이기적인 구호 때문에 힘들어하는 다른 노동자들의 모습은 혹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고 실천해 보아야한다

노동자의 문화! 주 5일제를 맞이하는 시기의 노동자의 문화,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시대의 노동자의 문화..멀리 볼 것도 없다.

조금씩 던져주는 미끼를 먹고 있으면 언젠가 노동자의 문화가 아닌 노예의 문화만이 우리 앞에 와 있을 테니 말이다.


더 늦기 전에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 스스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인공임을 자각하여야 한다. 어차피 누가 대신 살아주지도 않는 세상이라면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권리를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주40시간 사업장 노동자의 여가는? - ③ 현장체험기 Ⅱ]

 

최기수 _ 인천지역 문화실천단 gulipae@hanmail.net


며칠 전, “비정규직 철폐, 생존권 사수, 8시간 노동문화 쟁취”를 기조로 했던 올해의 마지막 거리공연이 끝났다. 여느 해보다는 좀 짧다 싶은 10회로 거리공연을 마무리하다 보니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년에 좀 더 나은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휴지기를 가진다는 생각으로 아쉬운 마음을 접기로 했다.

위에서도 확인이 되겠지만, 필자가 일하고 있는 단체는 지역 순회 거리공연을 통해 노동, 정치, 사회, 인권 등의 문제를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IMF 사태이후 수많은 노동자들이 정든 일터로부터 쫓겨나 노숙자로 전락해 빈곤에 허덕이던 1998년, 지역의 노동문화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리라’라는 주제 아래 시작하였으니 대략 7년의 시간이 흘러온 셈이다. 그 기간동안 분명 나아진 것도 있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이 오히려 악화만 되어가는 것도 있었다. 여기서 필자는 몇 년간 거리공연의 경험을 통해 얻은 노동자 문화의 위기와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거리공연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 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거리공연, 그 시작의 소중함


1998년, 주요 언론들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래 가장 큰 국가적 위기”라고 떠들어대던 IMF 경제 위기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현장에서 거리로 강제로 퇴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재벌들의 끊임없는 사세 확장 욕망과 전 세계적 투기자본의 농간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의 방관이 야기한, 그래서 명확히 자본가와 정치인들의 책임이랄 수 있는 경제위기를 이들은 4대 주요 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실제 주요 내용은 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해고)이라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이식하는 명분으로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전국 곳곳의 역사와 광장에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 노숙자로 전락한 노동자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고, 현장의 분위기는 언제 어떻게 잘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삭막해져만 갔다.

이렇게 엄혹한 상황에서 어떻게 보면 거리공연의 시작은 필연적이었다. 대중들의 바쁜 걸음과 삶의 소통들이 이어지는 곳, 사회변혁의 욕망이 꿈틀되었던 곳, 그러나 지금은 자본주의 체제에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마지막 안식처를 제공하는 곳...... 거리공연은 노숙자로 전락한 노동자와 함께 ‘노동자였기에 현실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노동자이기에 현실속에서 당당히 요구하며 대중적인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목표로 시작되었다. 해고로 인한 빈곤과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가득 차있던 거리를 다시금 희망을 만들어내기 위한 투쟁의 공간으로 바꾸어냈던 것이다. 이렇듯 처음 시도된 거리공연은 지역적 차원에서 당시 자본가와 정부로부터 철저하게 공격당하던 노동자들을 결집하고 새로운 투쟁의 전선을 만들어내는 데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노동현장의 변화, 노동자 문화의 위기


자본가와 정부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던 노동자들에게 다가오는 2000년대는 뭔가 새로운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확인되지 않는 희망을 주는 듯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IMF로부터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학습을 받은 자본가와 정부는 나아진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한 번 현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에게 전과 동일한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노동자군이 현장에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후 정규직에 대한 정리해고가 대대적으로 단행되기 시작하면서 노동현장의 분위기는 다시 급격히 냉랭해져만 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빈곤한 삶의 지속을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고용의 불안정을 부채질한 이 같은 시도는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며, 주체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여유를 빼앗아 가버렸다. 그나마 어렵사리 유지되던 현장 문화패들의 활동은 당장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생존의 위협과 고용의 불안으로 하나, 둘씩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노동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며, 노동의 과정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과 정서를 함양하던 노동자 계급만의 고유함이 희미해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만의 문화라 할 수 있는, 노동자의 정체성과 정서가 물씬 배여 있는 문화가 싹틀 수는 없다.

이와 같은 고용과 생존에 대한 불안감은 점차 노동자들을 투쟁의 역사를 통해 성립된 공동체로부터 분리해내 개인으로 존재하게 만들었고, 그 사이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노동자에 대한 분열책동과 노동자들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욕구를 개별적인 문화상품 소비로 충족시키기 위한 문화산업이 위치했다. 말 그대로 자본에 의해 기획된 체제지향적이며 소비지향적인 상품문화가 노골적인 표현으로 노동자를 교란시켜 역사적으로 쌓아왔던 노동자 문화의 고유한 성격인 연대성과 건강성, 창조성과 민주성, 투쟁성 등을 말살시킴으로써 노동자 문화의 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공연의 위축


위와 같은 노동현장의 변화와 노동자 문화의 위기는 노동자와 함께 하기 위해 기획되고 진행된 거리공연의 기조와 형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초기 ‘구조조정 철회와 정리해고 반대, 김대중 정권 퇴진’은 올해 ‘비정규직 철폐, 생존권 사수, 8시간 노동문화 쟁취’라는 좀 더 절박한 요구로 변화되었고, 노조 문화국·문화패·문화단체 활동가들이 공동으로 기획하고 공연했던 방식은 상당히 협소화되었다.

또한, 거리공연을 통해 노동자와 함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야기되는 수많은 삶의 문제들을 대중들과 소통함으로써 급격하게 확장되는 자본에 대한 경계와 반대를 이끌어내겠다는 목표는 문화산업을 이용한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로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이 상태에서 머물 수만은 없다. 작은 실천은 작은 변화를 만들고, 작은 변화는 다른 실천들을 만들어내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형성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워왔다. 그렇기에 더욱 문화적 실천을 통한 변화의 희망을 놓을 수가 없다.


거리공연을 통한 노동자 문화의 일상화를 도모하자


그렇다면, 희망의 씨앗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답은 어렵지만 바로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 주 5일제가 되었든, 8시간 노동문화가 되었든 가장 첫 번째는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여가를 자본이 만들어낸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데 그침으로써 또 다른 착취 구조에 빠지는 것에 대한 경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문화활동가를 비롯한 노동운동진영이 머리를 맞대고 노동자들의 문화욕구를 정확하게 분석해 그에 걸맞는 프로그램과 공간 등의 제반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두 번째는 거리공연의 양식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이슈 중심의 공연에서 벗어나 노동자의 일상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해 과감하게 접근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다양하게 체득한 문화적 표현들을 할 수 있는 살아있는 체험의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에 더 욕심을 붙이자면 장기적으로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공연을 기획하고, 다양한 공간과 영역에서 문화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문화적 제도들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위한 경제요소나 착취의 대상으로만 존재해왔던 노동자도 고유한 인권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정치, 경제, 사회 등 사회 총체적인 권력관계에도 반영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 40시간 사업장 노동자의 여가는? ④]

노동자문화의 방향과 대안 

 

이은진 _ 노동문화활동가 / (사)디지털노동문화복지센터 상임이사 mayjini@freechal.com


아직은 일부에서 시행되면서 노동자 내부의 차별화와 착취구조로 악용되는 경향이 있어 여전히 문제가 많이 남아있음에도 올 7월부터 시행된 주5일제가 노동문화에서 화두로 제기되는 것은 시행사업장을 중심으로 늘어난 여가시간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늘어난 여가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이 노동자 문화를 올바로 세우는 해결책일까? 몇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노동자문화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갈 것이지 같이 고민해 보고자 한다.


주 5일제의 이면


몇 년전에 주40시간이 먼저 시행되었던 전문직종인 D사업장과 제조업인 C사업장을 사례를 통해 노동자들의 일상을 고찰한 적이 있는데, 미혼인 남성노동자들의 경우 매일 잔업과 주말의 특근을 신청한다고 했다. 특별히 주말에 쉬어봐야 할 일도 없고하니 돈이나 벌자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잔업, 특근을 열심히 하는 입사 3년차인 노동자와 잔업, 특근을 하지 않는 16년차 노동자의 임금에서 잔업, 특근을 하는 경우의 급여가 훨씬 많은 경우가 발생하고 월급날이 되면 화장실에 가서 월급명세를 확인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중년인 남성노동자의 경우도 가족들과 같이 주말에 하는 일은 패스트 푸드 점에서 아이들과 외식을 하거나 가끔 놀이공원에 가는 일이 전부라고 한다. 잔업, 특근을 하지 않으려 해도 생활이 쪼들리기도 하거니와 한 아파트에 사는 다른 아이들이 누구네 아빠는 월급을 많이 받았다더라, 누구네 아빠는 뭘 사줬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되면서 투정을 듣게 되니 어쩔 수 없이 잔업이나 특근을 하게 된다고 했다.


사무직의 경우도 사정이 다르진 않은데, 상대적으로 임금이 많기 때문에 무리하게 잔업이나 특근을 신청하지는 않지만 업무 성격상 노동시간이 늘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때 자기계발에 투자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기개발이라는 게 대체로 자신의 노동력에 부가가치를 올리기 위한 자격증 취득, 영어공부 등이었다.

결국은 자본을 살찌우고, 자본이 원하는 인간형이 되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이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여가활용, 혹은 노동시간 단축 이후의 꿈인 것이다. 물론 5년 전 이야기이고 또 일부 사업장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지금도 노동자들의 여가로 접근을 하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의 여가생활을 위한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일상 - 여가 혹은 나머지?


그러나 이러한 여가를 메꿀만한 의미있는 놀꺼리를 제시한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그것을 향유하고, 자신의 문화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93년 일상이라는 화두가 문예운동내에 제기될 때의 일상은 투쟁의 현장이 아닌 나머지 시간이었다. 파업이나 집회 현장에서 노동자문예를 접하는 데에 한계를 느꼈고, 또 예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동문예를 접할 시공간이 줄어들면서 노동문예단체들은 소극장으로, 거리로 자신의 활동 공간을 확장시켜갔고, 현장에서는 노동자이지만 현장 밖으로 나가면 일반 대중과 별반 다름이 없기에 창작물을 소통함에 있어서도 제도권의 유통구조를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확장된 노동자의 범주로 연령, 의식, 사업장 등이 다양해 졌고, 그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다양한 창작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작업장이나 집회 공간 외에서의 문화향유 방식과 삶의 방식은 자본의 것과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경쟁력을 키우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상업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한 편으로 비슷한 맥락의 고민 속에서 창작물 역시 기존 대중예술이나 고급예술의 형식이나 언어를 적극 받아들이는 경향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노동자 문화를 문예의 내용이나 창작주체의 문제로만 인식해서는 노동조합의 문화에 대한 도구주의적인 인식만 키워줄 뿐이었다. 노동조합 체계는 건강한 노동문예창작물을 보급하고 다양하고 새로운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시도를 더 이상 하지 않고 기존과 같은 유통구조의 역할도 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총체적인 삶을 바꾸어 가는 역할을 하도록 접할 수 있는 시공간과 유통구조가 무너졌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일 것이다.

  

다시 일상투쟁을 고민한다.


다시 96년 즈음 노동자문화운동 진영에서 “문예에서 문화로!”라는 기치로 그간의 문예중심의 노동자문화운동을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삶의 총체로서 바라보며 그에 따른 문화운동 진영의 대응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2000년에 들어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 라는 문화운동 내부의 과제를 이끌어 냈다. 앞서 말한 대로 늘어난 여가시간을 때워줄 대안으로 노동자문화의 프로그램 못지않게 우리들 몸과 생각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하나씩 쳐내고 노동자의 관점에서 올바른 가족관계나 일상생활을 재규정하고 실천방침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확산시켜 가고자 함이다.

  

이에 대해 일상이라는 측면을 작업장과 분리된 나머지, 여가로만 바라보는 이들은 일상이 아니라 현장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삶의 전 영역에 들어와 우리의 의식과 습성까지 장악하고 있는 자본과의 투쟁으로 바라본다면 전 삶의 영역에서 자본과 맞서 싸우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노력들이 필요하며 일상의 영역 역시 주체적인 투쟁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일상 투쟁의 과정을 통해 보다 내 안의 건강한 욕구를 끌어내고 삶의 주체로서 주변과 관계를 맺어가는 그런 삶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노동자문화가 노동자의 삶을 담은 예술을 창작하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적인 수용과 참여를 통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 할 때 삶의 총체로서 문화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노동자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작은 실천


신자유주의시대에서 자본은 갈수록 인간적인 탈을 쓰고, 보다 풍요로운 미래를 약속하면서 우리들의 욕구와 취향, 선택까지 강제하면서 삶의 전 영역을 유연한 전략으로 지배해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건강하고 질 높은 삶에 대해서도 웰빙이나 환경친화적인 척하는 다양한 이미지 작업을 통해 상품으로 소비하게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지향하는 진보적인 세상에 대한 염원까지도 모두 가져가 자신들의 상품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고,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신자유주의에 맞서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보다 구체화 시켜 내가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데 자본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어떤 것과 어떻게 싸울 것이가를 세밀하게 나누어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즉, 일상에서의 다양한 시도들을 만들고, 그것을 서로 공유하고 나누면서 작은 공동체를 꾸리고, 실천을 확산시켜 일상투쟁을 확대재생산 하는 일이다. 이렇게 노동자 문화를 스스로 만들고 지켜가는 노력들이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나고 소통될 때 노동자 문예창작물도 역시 그 속에서 대중과 소통하며 재생산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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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문화행동과 메이데이의 유래

 [메이데이 문화행동 제안문]


 우리는 [노동시간단축투쟁]이 노동자의 일상적 삶을 자본으로부터 바꾸어 내는

 [8시간 노동문화투쟁]과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890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메이데이] 투쟁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권리 선언입니다.

  2000년!

대한민국의 메이데이 투쟁은 이제 110년 전의 메이데이 투쟁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투쟁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시간 단축투쟁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시간이 단축된다고 삶의 질이 무조건 향상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본은 노동자의 삶과 생활까지도 장악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노동자 주체는 사라지고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노동자로 길들여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자의 노동문화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노동시간 단축의 문제는 그로 발생하는 문화 생활에 대한 분명한 대책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합니다. 노동자의 삶이 자본문화의 구조 속에 그대로 방치될 때, 우리가 투쟁으로 쟁취해내는 노동시간단축의 성과는 그야말로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노동자의 삶에 박혀있는 자본의 문화와 투쟁해야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만 믿고, 일단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자본의 노예로 살아가는 세상,  꿈도 없고, 희망도 없는 자본주의 세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메이데이 ! 8시간 노동문화 쟁취 투쟁! 모두가 주체로 나서야 합니다. 우리는 [8시간 노동문화쟁취를 위한 메이데이 행동위원회]를 통해 노동자의 일상적인 삶에서 자본과 싸워나가는 문화투쟁의 중요함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자본으로부터 나의 삶을 주체로 세워나가는 그 첫발을 내딛는 [8시간 노동문화쟁취를 위한 메이데이행동위원회]에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어떻게?

1) 전국의 노동문화일꾼들이 중심주체로 서며, 일상문화투쟁의 중요함에 동의하는 모든 노동자, 단체들이 함께 선언하는 자리로 만들어 낸다.

2) 가능한 지역에서는 권역별 행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국적 움직임이 될 수 있도록 한다.

3) 메이데이는 민주노총의 전국 권역별 집회를 진행하는 날이다. 문선대로의 결합과 전체 집회 속에 묻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문선대 활동과 일정하게 분리하여 추진한다.

 - 민주노총의 메이데이집회 문선대 활동과는 분리하여, 각 지역내에서도 역할분담을 한다.

 - 단 몇 명이 모이더라도 그에 맞게 행동, 실천을 조직한다.


* 문화행동

  ⊙ 인터넷/PC 통신/소식지/신문 등을 통한 선전행동

  ⊙ 버튼달기 운동 전개 (몸에 달고 다니기, 홈페이지에 달기)

  ⊙ 정책토론회 개최(노동자일상과 문화정치)

  ⊙ 전국동시다발 거리공연

  ⊙ [~메이데이 행동위원회] 행동의 날 ( 집회 및 퍼포먼스와 행진)


[메이데이의 유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 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단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는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 사형선고 받은 미국 노동운동 지도자 스파이즈의 법정 최후진술 -

1. 메이데이의 유래


1) 미국 시카코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 쟁취 투쟁

 1886년 미국

 놀기만 하는 자본가들이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해 넣고,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울 때,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 장시간의 노동에 일주일에 7-8달러의 임금으로 월 10-15달러하는 허름한 판잣집의 방세내기도 어려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의 기계소리, 망치소리가 멈추고, 공장굴뚝에서 솟아오르던 연기도 보이지 않고 상가도 문을 닫고 운전수도 따라서 쉬었다.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으면 세계가 멈춘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날이었다. 노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힘에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경찰은 파업 농성중인 어린 소녀를 포함한 6명의 노동자를 발포 살해하였다. 그 다음날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30만의 노동자 시민이 참가한 헤이마켓 광장 평화 집회에서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폭탄이 터지고 경찰들이 미친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이후 폭동죄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억울하게 폭동죄를 뒤집어 쓴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장기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바로 세계 노동운동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긴 헤이마키트 사건이다.


마지막 재판에서 노동운동 지도자 파슨즈는 이렇게 최후진술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은 비록 임금을 받아먹고 사는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노예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 되어 남을 부리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내 이웃과 내 동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중에 하나다. 만약에 인생의 길을 달리 잡았다면 나도 지금쯤 시카코 시내의 어느 거리에 호화로운 저택을 장만하고 가족과 더불어 사치스럽고 편안하게 살수 있었을 것이다. 노예들을 나 대신 일하도록 부려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내 죄인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말한 것이 누구인가? 독점 자본가들이 아닌가? ... 그렇다. 그들이 주모자들이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바로 그들이다. 8시간 노동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뉴욕에서 특파된 음모자들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재판장, 우리는 단지 그 더럽고 악랄무도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당시 구속 또는 사형된 노동운동가들이 모두 무죄였던 것이 증명되었다. 그들에 대한 유죄판결은 조작된 허위였던 것이다.


2) 5월 1일 미국노동자의 투쟁을 전세계 노동자의 기념일로


1889년 7월 세계 여러나라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모인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미국 노동자의 투쟁을 전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5.1을 세계 노동절로 결정하고,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의 확립을 요구하는 국제적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1890년 세계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며 각 국의 형편에 맞게 제1회 메이데이 대회를 치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세계 여러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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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노동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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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예술지에 실었던 글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노동자문화]

                                                                            이은진

“…조중동의 입이 곧 정권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체제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셨습니까? 효리에게 알몸을 보여 달라는 스포츠신문들을 돈 내고 사보면서 세상이 바뀌길 바라셨습니까? 삼성해복투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도 라이온스를 응원하는 노동자가 있는 한, 울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줄줄이 개죽음을 당해도 현대 호랑이 축구단이 이기는 날 축배를 드는 노동자가 있는 한 우리는 저들의 손바닥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조남호만 나쁜 놈입니까? 김문기만 죽일 놈입니까? 착한 자본가는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는 단 하루도 살아보지 않은 자만이, 남의 눈에서 쏟아지는 피눈물을 달게 마시는 자만이 자본가가 될 수 있고, 그게 자본주의입니다…”
2003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낭독된 민주노총 부산본부의 김진숙 지도위원 추도사 중 일부이다. 당시 이 글을 필자가 만난 몇몇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읽어주고 동의하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때 그들은 뭐라 똑 부러지게 답변하지 않았고, 필자가 받은 인상으로 정리하자면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 어쩌라고…”였다. 노동자에게 문화는 아직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고 나서야 찾는 여가 혹은 놀이정도거나 집회 혹은 투쟁시기에나 필요하고 또 써먹을 수 있는 매체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노동자의 현실은 그만큼 일하고 잠자고 밥 먹고 사는 것 말고는 도대체 다른 것을 돌아 볼 수도 없고 다른 욕구를 가져볼 수도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회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는 어떤 지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보다 민주적인 형식으로 운영되어 누구나 잘 사는 사회가 되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를 단지 예술행위로만 사고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의 일상 삶의 형태와 의식구조 전반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하여 생각한다면, 우리들에게 자본의 문화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보다 중요한 의미로 노동자를 둘러싼 문화환경과 노조운동과 노동자문화운동 내부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 문화운동 내부의 문제
과거 투쟁의 문화를 중심으로 이야기해왔던 노동자 문화는 이제 일상 삶에서 부딪히는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선에 맞닿아 있다. 이미 우리의 의식과 일상 삶, 그리고 가치관과 무의식적인 행동 안에 자본의 이데올로기는 침투해 있고, 그래서 마치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한 것 같지만 그것은 대부분이 자본이 준 범주 안에서 그들의 시나리오에 맞춰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1987~88년을 기점으로 급속도로 확장된 노동자 문화는 투쟁이 고양되는 시기의 특성상 문선적인 부분이 강조되었고, 문화에 대한 도구주의적 인식이 다시 지지를 받으면서 노동자 문화 활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왔다. 그러나 기업문화전략이 도입되고 가시화되면서 이러한 도구주의적 관점으로는 기업문화적 전략에 전혀 대응할 수 없음이 누차 강조되어 왔지만 장기적인 정책부재와 조건의 문제, 그리고 항상 시급한 사안에 신속히 대응해야 하는 노조운동의 현실 등을 이유로 일부 노조를 제외하고는 거의 고민을 담아내지 못하였다.
또한 문화운동 내부의 논의에서도 90년대 이후 투쟁이 상대적으로 침체되면서 일상 공간 속에서 노동자 대중과의 접점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되는 가운데 노동자의 대중성 문제가 화두로 제기되고, 문화산업과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들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용자 주체의 수용태도와 그들의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한 추측들이 장르정책에 제시되고 반영되어 왔다.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선언한 정부 문화정책은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문화산업의 육성을 강조하면서 스펙터클한 소비사회 이미지를 보다 부각시키고 전 삶에 걸쳐 상품 소비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도는 대규모 자본들이 더 높은 수익을 노리면서 주식과 화폐시장으로, 문화시장으로 몰리고 있는 흐름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확장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을 기회로 초과 이윤을 향유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자본의 논리가 대중들의 문화향유를 통제하면서 이미 검증된 대중 취향에 부합되는 상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 낸다. 우선, 제작비 외에도 홍보에 거대자본을 투자하여 이미 그 상품이 대중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는 이미지를 각인시켜 이에 편승하고자 하는 대중의 심리를 자극한다.
그리고 안정된 이윤을 창출하는 시스템으로 스타를 만들고, 이미 익숙해진 이미지를 계속 팔아먹기 위한 모방작품들이 많아진다. 또 빠른 시간 안에 자본을 회수하기 위해 상품의 라이프 사이클을 점점 빠르게 바꾸어 새로운 투자와 가치증식의 기회를 확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산업은 그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항상 정치권력의 통제 아래 놓여 있어 특정 성향의 문화상품들은 배제하거나 자기 검열적인 방송기피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현실임에도 대중문화, 혹은 문화를 기분 전환이나 오락으로서 향유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이런 문제들이 보이지 않기도 하고 알게 되더라도 굳이 기피해야할 영역은 아니다. 일상의 힘든 노동과 책임 속에서 몸과 마음이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상생활의 부담과 고된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구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대리만족과 체념을 거쳐 순종적인 인간이 되어가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매스미디어로 보여지는 문화산업만이 아니라 광고, 거리의 배치, 작업장 공간, 일상공간 모두를 포함하여 자본은 노동자의 밥상과 잠자리까지의 시간에도 깊이 파고들어 노동자의 머리를 좀먹고 노동자의 주머니를 털어내고 노동자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 각종 광고와 상업 매체를 통해 카드사용과 소비를 부추기며 우리 노동자들을 자본의 먹이로 생각하고 열심히 노동해서 받은 임금과 여가시간을 자본을 살찌우는 일에 쏟아 붓게 만든다.
노동자문화 운동은 그동안 집단성, 투쟁성으로 대표되는 노동예술의 수용을 통한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 그리고 노동자라는 동질성으로 문화적 포섭을 해왔다. 그것은 다른 어떤 누구도 대변해  주지 않았던 노동자의 이야기와 정서를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입을 통해 표현하도록 해왔고, 독자적인 유통 체계를 통해 나름대로의 토대를 형성해 왔다. 과거에는 기피하던 작업복을 입고 자랑스럽게 거리에 나올 수 있게 했고, 신문이나 방송의 도움없이 집회나 파업을 통해 수백만 노동자들이 같은 노래를 부르며 동질감을 느끼게도 했다. 금기의 영역들을 치고 들어가 거리와, 광장, 작업장을 파업을 통해 재배치함으로써 노동자의 해방공간으로 만들어냈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삼호중공업의 경우 파업시기 배를 타고 작업공간에 들어가 평소에는 금지되어 있던 낚시를 한다든가, 사무직 노동자들이 정장이나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출근을 한다거나 어떤 공간은 노래패 연습공간으로, 어떤 공간은 놀이의 공간으로 재배치한다든가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랜 세월동안 그 문화 속에서 위계가 생기고 획일화되어 또 다른 권력과 차별을 양산시키기도 했다. 자랑스럽게 입은 대기업 노조의 조끼가 영세사업장 미조직 노동자들을 위축되게 하여 어떤 지역의 경우 정규직은 노조 혹은 회사에서 지급한 작업복을 입고 공장 밖으로 나가면 1급 대우를 받고 안주까지 공짜로 나오는 반면, 같은 공장 비정규직의 경우는 작업복은 비슷해도 마크가 달라 작업복을 입고는 공장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회의 높은 연단도 언제부터인가 권위를 과시하게 되었고, 집회에 참가하는 개개인을 대상화시킨다. 광화문 촛불집회에서도 작년 여중생 추모집회 때는 굳이 연단이나 대형 엠프 시스템 없이도 자율적으로 진행하면서 각자가 준비를 하고 돌아가며 발표와 제안을 하거나 하며 채웠는데, 탄핵정국에서의 광화문 촛불 집회는 잘 준비된 연단과 멀티 비전, 음향 시설을 통해 참가자들을 통제하고 주체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내용들을 차단시키고 있었다. 또한 획일적인 문선활동으로 대부분의 집회는 비슷하게 느껴지고 지루해지면서 대중문화의 요소들을 향유하는 것으로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욕구를 채워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몇 가지 사례이다.
“현장에서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반말을 한다.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임금을 적게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임금이 같다면 아마 정규직들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역시 2차 하청, 3차 하청 노동자들을 대할 때는 무시하는 게 사실이다. 우리보다 임금도 적게 받고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2~3차 하청의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에게 반말을 하거나 성질을 부린 적이 많이 있다.”
“차별철폐를 위한 100일 행진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울산에서 행진에 결합하기 위해 30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왔다. 비정규직 노조를 결성한 그들은 조끼를 맞춰 입고 깃발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제일 앞부터 세줄로 줄을 맞춰 앉는다. 양 옆에서는 조직의 간부인 듯한 자가 일어나서 노래가 나올 때마다 손을 위로 올려 박수를 치는 시늉을 하거나 팔을 흔들었고, 그러면 앉아있는 조합원들은 그들을 따라 움직인다. 흥겨운 노래가 나올 때도 줄을 맞춰 앉아 손동작만 열심이던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몇몇 사람들이 마구 뛰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제야 노동자들은 일어섰고 노래에 맞추어 신나게 뛰며 머리를 흔들었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젊은 남성들이 자기의 존재를 찾은 듯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흔들며 자유롭게 휘청대면서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주노동자들이 계속 공동 투쟁을 하면서 초기에는 각기 제 나라의 문화와 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기를 1년여, 요즘 이주노동자들은 투쟁가에 같이 부르며 노래에 맞춰 손을 들어 흔들고 있다.”
“메이데이 문화행동에서 노동문화 활동가 및 문화단체 성원들이 모여 독자 집회를 하고 행진에 결합을 했다. 행진을 하며 이들은 준비된 작은 트럭 위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노래에 맞추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런저런 구호를 외치다 영등포 로터리에서 정리 집회를 할 때 한쪽 옆에서 따로 정리 집회를 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앉거나 서있었는데, 민주노총 간부가 와서 빈정거리듯이 이야기를 했다. 줄 좀 맞춰서 대오를 정리하고 있지… 이게 뭐냐… 난잡하게…”
위의 사례를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문화운동이 투쟁을 통해 쟁취하고 확고히 한 것일지라도 이미 형성된 기득권이나 방식에 안주하여 다시 일상 속에서 권력으로 존재하고 관성이 된다면 이것은 극복 과제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현장에서는 늘 원칙을 생각하는 뛰어난 활동가이고 주위 동지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가정으로 돌아가면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경우가 많고, 또 입으로는 늘 연대를 외치고 자신의 이해와 같을 때는 연대하지만 정작 자신의 이해와 직접 맞닿지 않을 때는 연대하지 않는 현실은 최근에 노조운동의 조건이 어려워지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현상이 아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면 그것으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나는 내 욕심보다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만 남자아이니까 발레나 이런 것은 쫌… 나중에 먹고살기도 어렵고…그런 것만 아니라면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해 주겠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우리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현장에 같이 있는 형님들을 모시고 아가씨가 나오는 단란주점을 갈 때가 종종 있다. 형님들은 그런 데를 가고 싶어 하는데 그런 그들의 욕구를 무시하면 만나서 사업을 이야기하거나 하기 어렵다.” - 문화활동가 교육 중에서
“…제 자식이 ‘진보적인 엘리트’가 되길 바랄지언정 고등학교나 마친 노동자가 되길 바라는 좌파 인텔리를 본적이 있는가? 제 자식이 이른바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걸 꺼리거나 적어도 진지하게 부끄러워하는 좌파 인텔리를 본 적이 있는가? ‘적의 가치관’, 즉 ‘혁명의 대상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상태에서 진행하는 모든 혁명 운동은 그저 ‘혁명 게임’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도 존경해 마땅한 좌파 인텔리들 가운데 제 자식 문제에까지 연결되는 ‘다른 가치관’을 갖는 이는 거의 보지 못했다. 오늘 우리가 얼마나 천박한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단 한명도 보지 못한 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김규항의 『야간비행』 중 「가치관」의 일부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문화욕구 창출
신자유주의의 분리와 차별을 통한 분할지배 정책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강조하면서 비정규직의 양산, 숙련위계, 성, 이민노동자 등으로 노동자들을 분리하고 배제할 뿐만 아니라 연령, 태도 등 다양한 차별, 분리를 복합적으로 동원하여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문화는 노동자들의 문화적 동질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탐색하고 강화하는 한편,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문화욕구 창출을 통해 노동자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다. 노동자의 삶의 방식, 의식과 행동양식, 노동예술, 생활양식, 조직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노동자문화를 확장하고 노동과 생활 속에서 문예적 사업을 뛰어넘어 일상적인 문화 작업과 사업을 통해 의식발전과 조직력 강화, 삶의 질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이미 50%를 넘어서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을 중심에 놓고 기존 노동자 문화의 장점으로 동질성을 획득하게 하면서 그들의 주체적 문화욕구를 계발하고 창출하여 새로운 노동자문화의 풍토와 토양을 만들어 가는 것은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되는 시점에 와있다. 비정규 노동자, 이주 노동자들의 작업 공간, 지역, 일상 시공간 속에서 일상의 문화를 만들고 노동자들을 단련시켜나가는 형식과 내용개발이 시급하다.

파리예술가들이 점거해 살고 있는 건물 외관
마지막으로 작년 초 노동문화 탐방을 위한 유럽 기행에서 느낀 점을 이야기 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파리의 예술가들이 점거해 살고 있는 건물은 시청에서 10여미터도 안되는 도심 한 복판에 있었다. 6층짜리 빌딩에는 14명이 숙식을 하고, 총 32명의 예술가들이 같이 운영을 하고 있었다. 외국인들도 같이 활동을 하는 세계적인 곳이며 각종 미술 관련 자료와 정보가 풍부한 공간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간이 파리에만도 몇 십 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운동이 만들어진 배경은 매우 중요했다.
1981년부터 시작된 스콰팅(점거) 운동의 배경에는 60년대부터 국가가 문화예술의 영역을 공공영역화 하면서 지원, 육성을 하다가, 그 지원이 감소되면서 예술가들이 자체적으로 작업을 하거나 먹고 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프랑스 북동쪽 금속 산업지역에 독특한 노동자문화가 있었는데, 그런 노동자 밀집 지역이 정리해고와 공장 이전으로 해체되면서 노동자의 문화활동이 사라졌다고 했다.
1936년 인민전선이 주도한 엄청난 파업과 시위로 거의 국가가 뒤집어질 뻔한 사태가 벌어졌는데 국가와 자본은 체제전복을 피하기 위해 주 35시간 노동 및 복지 정책을 파격적으로 제시하면서 막았다고 한다. 그 이후 대부분 문화의 영역을 공공화하여 국가가 가져갔고, 노동자들의 투지가 저하되었는데, 이는 프랑스 노조운동의 활동이 저조해진 결과로 온 것이라고 한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기에 아주 깊이 있게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런던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마찬가지로 노동문화의 흔적을 찾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그 원인들을 찾아가면서 공통으로 느낀 점은, 노동자문화는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치열한 투쟁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 단련되는 것이지, 절대로 국가가 대신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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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리포터 인터뷰 글 (2002년)

하니리포터 > 문화

 


찌니의 노래이야기①

 

9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은 민중가요 노래책 '희망의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그때 많이 불려졌던 민중가요와 더불어 고전으로 불리는 명곡들을 빼곡이 담고 있던, 말 그대로 '희망의 노래' 책 말이다. 이 노래책은 도서출판 민맥에서 그 당시 노동가요 노래패 '꽃다지' 대표였던 이은진씨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그런데 96년에 국가보안법의 올가미가 '희망의 노래'에도 씌워졌고, 결국은 이은진씨와 출판사 대표였던 원용호씨가 구속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었다. 그 당시 선거와 임금인상 시기에 맞추어 진행된 듯한 인상을 주어 말도 많았던 이 사건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은진씨는 그 후로 노동문화운동에 앞장서 왔다. 최근에는 노동문화정보정책센터 홈페이지'클릭 사이버문화'에 '찌니의 노래이야기'를 개설해서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벌써 6회를 기록한 이 방송은 민중가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민중가요 판에서 잔뼈가 굵은 이은진씨가 노래에 대해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녀의 경험에서 묻어난 이야기는 노래와 함께 진실되다. 그리고 민중가요가 갖는 의미를 역사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찌니의 노래이야기'는 단순히 민중가요를 틀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들의 근황도 알려주기 때문에 노동계 정보창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요즘 '찌니의 노래이야기'와 그 외 강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은진씨와 이메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용이 많아 2회로 구성한다. 짐작 가능하듯이 '찌니'는 이은진씨의 아이디이다.

 

- 방송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는데, 최근에 어떻게 지내시고 계십니까?

 

꽃다지에 있으면서 계속 가져왔던 고민들, 즉 유통에 대한 고민들을 노동문화 기획과 교육으로 풀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월례문화마당 세상만사'를 매월 셋째 금요일에 진행하고 있고, 메이데이 행동위원회 기획, 6월 말경으로 예정된 민중가요Festival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상적 노동문화기획의 소통체계인 기획자 네트워크를 활성화해 노동가요 창작기금 사업을 하려고 고민중이고요.

한편으로는 교육방송을 지향하는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고, 가끔씩 노동조합이나 문화패, 대학문화패 등에서 요청이 있으면 노동문화 일반, 혹은 노래에 대한 강의를 나가고 있습니다. 노동교육센터를 준비하고 있는 선배님들(김진순, 신재걸 -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민주노총에서 교육과 문화를 담당했던 분들입니다.)과 노동문화 일반에 대한 교육내용 정리를 같이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꽃다지 10주년 사업에 함께 하고 있지요. 작년부터 시작하려던 일인데, 작년에는 고민만 많았고 본격적인 진행을 못했기 때문에 올해는 좀 빡빡하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 방송이 민중가요를 교육적인 목적으로 하나씩 정리해 나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찌니의 노래이야기'를 하게 된 연유는 무엇입니까?

 

노래패 '삶의 노래 예울림' 시절에 서울지역노동자문예운동단체협의회(서노문협)에 소속되어 활동을 했었는데 대중문예교육이라고 하는 영역이 노동문화에 중요한 한 측면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직접 강습도 하고 강의도 했지만 일정하지 않아서 교육체계나 교육내용이 정돈되지 못했고, 이전에 비해 많이 줄었습니다. 꽃다지로 통합한 뒤에도 노동문화예술 교육체계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는데, 강사들을 모아서 해보려고 몇 가지 시도를 했었는데, 잘 되지 않더군요. 혼자 정리하려니 너무 방대한 작업이라 작년 6월부터 방송을 진행하면서 내용을 정리하자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계속 고민만 했고, 올해부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대중적인 방송이라기보다는 84년부터 노래운동을 하면서 느낀 것,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그리고 교육을 다니면서 했던 내용들을 천천히 정리하는 게 우선 입니다. 굳이 방송을 택한 것은 책임성과 객관성을 좀 더 갖기 위한 것이랄까? 그를 통한 교육효과도 한 편으로 기대가 됩니다.

또 굳이 제가 직접 하는 건, 아무도 안하고, 또 제가 정리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해서이고, 정리해서 다른 사람에게 진행하라고 하려니 그게 더 어렵고 해서입니다. 원래 남들하고 같이 일하는 것보다는 혼자 하는 게 손쉽잖아요. 좀 가볍게, 손쉽게, 편안한 마음으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 지난 3월 30일 '신자유주의에 반격을 선언하는 연합공연'은 어땠습니까? 그날 비가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진행에 무리는 없었는지요? 그리고 공연을 평가하신다면?

 

한동안 가물고 황사가 심해 비나 한 번 좍좍 내렸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래도 공연날 올 줄은 몰랐습니다. 일기예보를 계속 확인했거든요. 덕분에 진행에 무리가 많았습니다. 일단 비 때문에 노동자들과 발전노조동지들, 가족들이 많이 못 오신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이라고 하는 대중조직이 주최를 하면서 공연이라는 형식을 가진 것도 처음 있는 일이고, 내부적인 결의도 꽤 높았습니다. 발전투쟁을 통해 많이 고무되어 있기도 했고요.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비가와도 세팅부터 리허설까지 준비하고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이번 공연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의미에 동의하고 직접·간접적으로 결합해서 판을 만들어 가는 대중적인 문화집회였습니다. 기획과정에서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합)이라고 하는 조직이 공동주최로 선 것에 대해 민예총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 무엇을 해왔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만 저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노조라고 하는 조직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의하는 모두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자가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판을 만드는 것이 올바른 기획이 아닐까 싶거든요.

작품의 측면에서는 그 동안 해왔던 연합공연(89년부터 저는 거의 같이 해왔습니다.)에 비해 아주 잘 엮어진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연합공연에서 실패하기 쉬운 새로운 양식에 대한 실험과 장르별 발전전망을 모색하도록 하는 데에 연출단이 신경을 많이 썼고, 그만큼 성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좋은 작품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점, 그리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연극장면을 뺀 점이 무척 아쉽습니다. 또 하나, 공연에서 노동조합 조직을 믿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불식시키지 못한 점. 정말 못 믿을 곳이고 앞으로는 이런 사업을 같이 하면 안되나 하는 반복된 실망감에 괴롭습니다.

 

- 학생운동이 많이 약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반학생들은 취업 때문에 더욱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과거 민주주의를 위해 큰 역할을 했던 대학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입니다. 지금의 대학사회를 어떻게 보십니까?

 

한총련 등의 학생운동 조직이 계속되는 탄압과 신자유주의 전략들 속에서 전처럼 조직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학생운동, 진보적인 지식인 운동이 주축이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현재는 노동자, 빈민, 농민을 비롯하여 장애인, 이주노동자, 여성 등 다양한 층위의 대중조직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학생운동의 빈자리가 작게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대학은 끊임없이 사회인을 배출하는 공간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해 나오게 됩니다. 건강한 대학문화와 학생운동 풍토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대학사회는 기성사회와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젊은이로서의 패기나 열정, 그리고 실험정신, 진보적인 사고들이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신자유주의 문화전략인데, 대학생들,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가 이런 측면을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상업적인 기성의 문화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주체성을 찾아가려는 노력들이 대학 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 대학 내 노래패들이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거나 아예 사라지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노래패들이 풀어야 할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동아리는 스스로 민중가요라는 이름을 붙이길 거부했다고도 합니다. 대중창작과 비전문집단의 전문성에 대한 이야기를 곧 방송에서 다루겠지만 이 두 측면은 노래패 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런데 '화려한 기교, 익숙한 음악이 신나는 음악, 재미있는 음악이다.'라고 사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록이라는 양식을 좋아하는 대학생들이 이미 많을 텐데, 그 언어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단성의 힘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도 중요하고요.

선배들도 신입생이 들어오면 억지로 투쟁가요를 부르게 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재미를 붙이고, 의미를 알아가도록 이끌어 줘야 합니다. 알아서 판단하도록 열어두고 말입니다. 제대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대선 이야기가 빠질 수 없겠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일으키는 바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진보정당이 이번 대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보십니까?

 

젊고, 패기 있고, 경력도 깨끗하고 정치개혁을 이루어낼 주자로 노무현씨가 국민들 정서에 어필하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진보진영에서 노무현씨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연합전술 등을 운운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어도 조만간 신자유주의 구도를 완성하는데 앞장을 설 것이고, 그런 약속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아마 아무리 인기를 끌어도 당선약속은 미국으로부터 못 받아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은 하나도 달라질 것이 없는데, 한두번 속아온 것도 아니면서 왜 들러리를 서려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겁니다. 특히 민주노동당 안에도 '노사모' 회원이 많다는 것이 말입니다.

진보정당은 이미 너무 기성 정당 흉내를 내고 있어서 그때까지 제대로 후보전술을 구사해 낼 지 의문입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진보정당에서 후보를 단일화해서 낸다면 썩 내키지 않아도 그 사람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후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고 누구를 밀어주면서 정책연합을 펼치니 뭐니 한다면 무효표를 만들거나 거부를 하겠지요. 아마도 운동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저처럼 생각할 겁니다.(노무현 지지자들 빼고) 진보정당은 상반기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투쟁에 더 긴밀하게 결합하면서 후보전술을 구사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을 겁니다.




찌니의 노래이야기②

 

20세기 최고의 명저 중의 하나로 꼽히는 「계몽의 변증법」(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공저)에서는 문화산업을 '계몽의 종점'이라고 표현한다. 즉 "문화 산업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 구성원을 남김없이 자신 가운데로 포섭해 들이기 위해 자신이 제시하고 있는 도식적 규범들을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의 내면 가운데 정착시키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한다. 문화 산업의 목적은 사회 체계 아래로 인간을 완전히 포섭해 들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철저히 계산된 상업적인 목적만이 판을 치는 2002년 대한민국의 가요계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찌니의 노래이야기' 두 번째를 시작하면서 위와 같이 말한 이유는 민중가요의 저항성을 상기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민중가요는 일반 방송에서 쉽게 접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클릭! 사이버문화는 소중하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노래들과 더불어 최근에 발표된 민중가요까지 이곳에서는 다양한 노래를 접할 수 있다. 또한 민중가요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찌니의 노래이야기'를 적극 권한다. 아래는 첫번째 글에 이어 나눈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이은진 님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 방송에는 찾아보기 힘든 옛 앨범들의 노래들도 나오는데요, 개인앨범을 사용하고 계신 건가요? 그리고 방송은 어디에서 녹음이 됩니까?

 

84년부터 걸어 다니는 노래 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노래를 많이 알고 있고, 또 잘 외웁니다. 필요한 노래에 대한 정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고 할까요. 오랜 기간 활동을 하다보니 소장하고 있는 음반도 좀 되고요. 그렇지만 빌려주고 못 받은 것도 많아서 아직은 들려드리고 싶은 음악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음반에 그 노래가 있는지는 아는데, 음반의 상태가 너무 안 좋거나 아직 못 받은 경우, 민중가요 사이트 자료실에서 가끔 다운 받아 사용하기도 합니다.

방송 녹음은, 첫 회는 '꽁알방송실'에서 했습니다. 근데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듯하고 작업시간이나 동선의 문제도 있어 그냥 제 사무실에서 밤에 녹음을 합니다. 전문적인 음악방송이 아니라, 교육방송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다보면 작업이 늦어질 것 같아서 그냥 질은 담보가 안되지만 올리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지요.

 

- 민중가요에서 장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과 어떻게 교감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최근 민중가요에 힙합과 랩을 도입한 ZEN의 활동은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ZEN은 아직 뭐라고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계속 지켜보면서 동지로서 잘 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단계입니다. ZEN의 음악은 우리한테나 대중들한테나 새로운 음악은 아닙니다. 이미 방송에서 질리도록 보고들은 것이고 그들에 비해 별로 뛰어난 팀도 아닙니다. 그리고 힙합 댄스, 랩이라고 하는 장르가 아직은 우리 것으로 언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기한 어떤 것 정도로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한 편으로는 그들이 워낙 열심히 파업현장을 돌아다니니까 고맙기도 하고요. 스스로 노동자대중과 함께 하고자하는 사람들은 프락치나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는 수작이 아니라면 우린 동지로 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ZEN의 음악이 집회나 파업시기 노동대중들에게 수용이 되는 것은 그만큼 그들 안에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높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근거 없이 전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우리들 안에 쌓여 있는 것들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쌓아놓은 성과를 무시하거나 폄하 하면서 등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예전에 몇몇 새로운 시도를 했던 집단이 80년대의 성과를 폄하 하고 무시하면서 관심을 끌려고 했다가 실패를 했었어요. 그 지점을 노동대중이나 조합 간부들, 음악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봐야 합니다. 다양한 실험들,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자신들의 문화로 싸안고 가는 노력들이 병행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은 ZEN은 그 단계일 뿐이라는 겁니다. 음악이 문제가 될 순 없고, 다만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것을 음악에 반영시키며, 대중과 교감을 하는가 이니까요. 다만 아직 2집은 못 들어 봤지만 이전에 해온 <파업가>나 <그날 그 자리에서>, <동지> 등을 음반에 수록하지 않았다는 것이 좀 아쉽습니다. 무엇으로 대중들에게 평가를 받으려고 하는 지 노파심이 좀 들더군요.

 

- 인터넷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도 하나의 문화게릴라 운동이겠는데, 이런 문화운동이 앞으로 가져야 할 지향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전에 장애인 문화권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도 느낀 것이지만 노동문화의 개념은 억압되고 소외된 자들의 의식을 바꾸고 그들이 당당해지며, 그들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차용해서 개발해야 합니다. 특히 소통체계가 거의 없기 때문에 다양한 소통체계를 만들어 가야겠지요. 유통구조가 제대로 서야 창작도 활성화하고 재생산도 잘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방송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요.

 

- 민중가요의 구조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수록 좁아지는 유통체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혹시' 있을까요?

 

유통은 사실 대중과 창작자, 대중과 대중이 만나는 접점입니다. 이전에는 우리음악이 집회나 파업현장, 거리, 소모임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접점들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만들어 낸 접점들이 공연, 음반, 거리공연 등입니다. 일단은 대중운동의 흐름과 같이해온 민중가요, 노동가요이기 때문에 대중운동이 활발한 때에 더 많이 유통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 외에 일상적인 접점들을 만들어 가는 방안은 운동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저 활동을 열심히 하면 만나지는 노래, 집회 몇 번 참석하고, 공연 몇 번 봐서 익숙해지고 좋아하게 된 노래가 아니라 그런 문화를 목적 의식적으로 접하고 만들어내고 주변을 조직하여 일정한 블록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운동적 마인드가 있어야 합니다. 80년대 후반 '서노문협(서울지역노동문화단체협의회)'에서는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과 함께 노동자 문화패와 전문단체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정리를 하면서 노동문화운동의 3주체를 전문단체, 노조 문화부(정책단위로서), 노동자 문화패(수용자이면서 대중창작을 하는)로 정리를 한 바 있습니다. 지금은 그 의미가 확장되어 생산, 유통, 수용(향유) 전과정이 구조를 포함하는 개념이 되었기 때문에 수용자 주체의 운동이 매우 중요한 한 축입니다.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스스로가 개입하고, 적극적으로 운동을 해야만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시 창작단위와 소통을 하면서 영향을 주고, 창작에 반영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도 많이 있긴 하지만 예전에 그 많던 전문활동가들이 이 판을 떠나게 된 것은 먹고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도구적인 발상이 팽배한 곳에서 비전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노래를 도구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문화운동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그들이 일정한 토대를 형성하는 방법이 유일하면서도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터넷상의 엠피쓰리 문제는 어떻게 접근을 해야할까요? 민중가요도 나오자마자 엠피쓰리로 유통되는 등 그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민중과 향유를 해야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창작자로서의 저작권문제도 분명 있을 겁니다.

사실 저작권이라는 개념은 우리 것으로 가져와서는 안 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개념을 설정하는 순간 노래의 소유자가 저작권자가 되면서 CF에 팔려가든, 공익광고에 팔려가든 개인의 문제로 떨어져 버리고 최근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게 될 때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오히려 창작자들의 생계와 활동, 재생산을 보장하고 지켜내는 개념으로 바뀌어야 그 음악의 권리를 모두가 같이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바로 전 질문에 대한 답변처럼 말입니다.

민중가요는 무조건 민중의 것이라고 공짜로 들으려고 한다면 당연히 창작자 입장에서는 저작권을 따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라도 주장해야 자신의 활동기반이 유지가 되는 현실에서 말입니다. 엠피쓰리는 저작권보다는 음원의 소유권 문제인데, 이 역시 엠피쓰리가 음반시장을 잠식하고 있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음악을 정말 좋아한다면 엠피쓰리로는 듣는 것보다는 음반으로 듣게 될 겁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음원을 가지고 만드는 짜깁기 음반이겠지요.

대중음악의 음반시장이 이 때문에 망가져 가고 있고, 우리 역시도 엠피쓰리 보다는 짜깁기 음반이 주는 폐해가 더 심각합니다. 스스로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조합에서 일방적으로 선곡한 곡들을 부르는 사람과 단체에 상관없이 한 음반에 실어 무료로 배포하고 있는 것은 그 음반을 듣는 사람에게 이것이 노동가요의 전부인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하고 단지 집회 때, 파업 때만 듣는 음악으로 생각하게 하니까요.

그렇지만 현재 엠피쓰리를 무분별하게 올려놓고 마구 배포하는 사람들의 생각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건 무조건 곡 하나를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에서겠지만 그 결과는 앞서 이야기한 것 같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이든 더 많은 사람이 듣기 위해 광고에도 팔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노래가 창작자의 몫이 아니라 대중의 몫이라는 의미는 그 노래가 만들어질 때 창작자의 의도보다는 불려지면서 대중과 함께 만들어지는 질감과 정서가 그 노래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민중가요가 민중의 것이고, 노동가요가 노동자, 민중의 것이라면 그 노래를 그렇게 돌릴 수 있는 사람 스스로가 민중이고, 노동자로서 과연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군요. 그리고 정말 노동문화운동으로 민중가요를 노래문화로 사고하고 이 후 발전 전망에 대해서 계획을 갖고 있는지도 물어보고 싶고요.

 

- 방송 중 어려운 점은 없는지요? 방송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아직까지는 내용을 구성하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아서 그런 것이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것도 방송이라고 약간은 단어 선택이나 해설에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한테 잘 전달이 될까하는 고민도 되고요. 저 혼자 녹음하면서 목이 메어오기도 하고 울컥 흥분하기도 하는데, 생방송이 아니니까 다시 녹음하고 편집하고 하니까 좀 밋밋한 감도 있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은 차차 되는 만큼 하자는 생각이어서 별로 욕심은 없습니다. 단지 제 컴퓨터가 좀 구식이라 용량이나 처리 속도 때문에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게 좀 속상하고 갑자기 편집을 하다가 다운되고 작업해놓은 것이 날라 갈까봐 조마조마 하는 것을 빼면요.

녹음을 사무실에서 하다보니까 잡음이 많습니다. 이 동네가 좀 시끄럽거든요. 바로 앞에 아파트 건설현장이 있고, 옆 사무실에 왔다 갔다 하거나 바로 앞에 있는 화장실에 사람들 오가는 소리를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저녁 늦게 창문을 꼭꼭 닫아놓고 녹음을 하는데, 기차지나갈 때, 위층 화장실 물 내릴 때 녹음을 하다 중단을 하고 그 소리가 다 멎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편집을 하고, 음악을 받아서 붙이고 뭐 그런 거지요. 사무실을 같이 쓰는 남편과 조민제 군이 협조를 잘 안 해주지만(어떤 날에는 늦게 까지 바둑을 두면서 안나가고 방해를 합니다.) 그럭저럭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 각 시대마다 민중가요의 조류가 있었습니다. 2000년 초에 살고 있는 지금, 민중가요는 어떤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중가요가 민중가요가 되기도 하고 민중가요가 상업적인 음악이 되기도 합니다. 과거에도 그럴 소지는 많았고, 현재는 더 합니다. 저는 교육을 다니면서도 대중가요를 듣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의미로 노래를 해석해서 받아들이고 문화와 구조를 비판의식을 갖고 바라보라고 할뿐입니다. 대중가요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니까요. '꽃다지'가 만든 음악이라고 무조건 좋은 음악이고, 당연히 노동가요가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어차피 선별해서 부르게 되지요. 상대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비판하고, 동지로서 그의 시각과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고요. 사람도 다 각각이고 취향도 제각각, 살아가는 모습이 다양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듣는 음악도 비슷하고 입는 옷도 비슷비슷하고 먹는 거, 말하는 거, 이미 대중매체를 통해 익숙해 진 것들뿐입니다.

자본이 항상 '너만 특별해, 너를 위한 차, 너만을 위한 옷, 당신만의 독특한 삶의 형태' 이렇게 이미지를 만들어 주지만 그건 다 대량생산되는 상품일 뿐인 것처럼 노래도 어쩌면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듣고 부르고 하는 것 아닐까요? 굳이 시대적으로 보자면 대중운동의 중심 축이 움직임에 따라 변화해 온 것은 있습니다. 음악형식이나 가사 말 등도 그렇게 약간씩은 변화해 왔고, 대부분은 투쟁가요를 보면서 그 흐름을 구분합니다. 지금은 일상 속에서 다름을, 일탈을 꿈꾸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노동운동 안에도 차별이 존재하고 노조운동 내 대다수를 차지하는 대기업 정규직 중심이어서 문화 역시 그들에게 의존을 하고 있는 것이 컸습니다. 지금은 비정규직, 이주, 장애인, 여성 등 각각은 소수이고 그 안에도 여러 갈래가 존재하지만 이러한 불안정 노동과 함께 하는 음악, 그들과의 접점을 만드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그러자면 지금보다도 더 기성의 관념을 깨는 예술이 나와야 할겁니다.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 역사에서도 늘 비정규, 불안정 노동이었고, 늘 일탈적인 삶을 살아왔고, 늘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삶과 일치시켜 그들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알 것 같은데......

노동가요는 더 다양해져야 하고, 한 노래로 전체를 아우르기보다는 각각의 이야기를 따로 따로 하는 그런 노래들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가 당당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그 이야기를 다른 기준의 전문성을 가지고 창작하는 것, 그런 음악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 앞으로의 방송도 노동·민중가요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을 담을 예정인가요?

 

주로 그럴 생각입니다. 제가 그 동안 고민해왔던 것들, 경험한 것들을 다 정리하려면 아직도 20-30회 정도는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관적일지라도 일단은 제가 알고 있는 모두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아직은 이론화작업도 부실하고 어느 누가 학교를 만들어 그 내용을 정리하게 될지 요원한 상태에서 더 늦기 전에 제 기억 속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객관화 해놓은 것 그 자체로 의미를 두고 있고, 그것이 다시 어디선가 활용되고 재구성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안이 먼저 정리된 채 진행되는 것이 아니니까 이슈가 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을 다루면서 융통성 있게 진행을 할 예정입니다. 그 이후엔 아직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기능적인 부분의 교육 내용을 정리할 수도 있겠지요(이 부분은 혼자는 어렵겠지만).

 

-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아하는 민중가요가 있는지요? 아니면 최근에 많이 듣는 노래가 있다면 추천해주십시오.

 

저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성악 공부를 했기 때문에 고급음악도 무척 익숙하고 편합니다. 그리고 나서 대중가요와 외국의 팝송이라는 걸 접했고, 민중가요는 대학에 와서 접하게 되었지요. 사실 어떤 음악이든 다 좋아합니다. 나름의 맛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모든 음악에 제 삶을 연결시켜 상상하고 느낍니다. 그래서 특히 더 모든 음악을 좋아하지요.

그래도 음악이라고 하는 전문분야를 통해 노동문화운동을 하는 사람이니까 노동가요, 민중가요를 더 많이 접하고 더욱 좋아합니다. 사연이 있는 노래를 좋아하는 데 가장 좋아하는 건 <행복한 인생>이라는 노랩니다. 그 전에는 비장한 노래들을 더 좋아했었는데 96년 구속되었을 때, 바깥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하루에 한 번 면회 오는 남편을 통해 매일매일 진행되는 꽃다지 식구들의 탑골 앞 거리공연과 농성 이야기,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러 사람들의 편지를 받으며 거의 매일 입가를 맴돌던 노래이고, 매일 눈물을 흘리며 부르던 노래입니다.

최근 특별히 많이 듣는 음악이라고 할 만한 건 없는데, 일단 새로운 음반이 나오면 대체로 노래를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듣는 편입니다. 요즘은 비전문집단에서 만든 음반이 몇 개 있는데 그 음반이 참 재미있고 풋풋한 게 좋습니다. 천지산업 노래패 '노래벗', 인천의 '세 여자' 음반, 그리고 발매된 건 아니지만 오철수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들을 모아 놓은 음반이 있고, 정세현(범능스님)의 먼 산이라는 음반. 대중가수 중에서는 이상은의 최근 곡들을 즐겨듣고, 자우림 1, 2집, 윤도현, 안치환, 강산에 등을 좋아하고 언제든지 꽃다지, 서기상, 윤미진, 연영석, 박창근, 유정고밴드 노래는 다 좋아하죠. 너무 많은 걸 좋아하고 즐겨듣나요. ^^

 

- 지금 밖에 비가 오는데, 이런 날 어울리는 민중가요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지금 나오고 있는 범능 스님의 [먼 산] 에 수록된 <푸른 학으로>와 서기상 1집 [세상속으로] 중에서 <새2>를 권하고 싶네요. 듣고 나면 비오는 날 더 궁상맞다고 하실 지 모르겠지만 원래 구질구질한 날은 더 궁상맞은 느낌으로 오히려 빠져드는 것이 좋거든요.

 

<푸른학으로> 청학스님 작사/ 범능 작곡 / 박문옥 편곡
사색을 먹고사는 눈 푸른 운수 납자 구름에 쌓여 노는 인간사 속진을 떠나
나 여기 한 마리 꾸밈없는 푸른 학으로 무심천을 날아가리
뜬구름 같은 인생 청산을 닮아가며 자연의 순리 따라 한 삶을 살으다가
어느 날 문득 지는 석양에 내 모습을 불태우리니

 

- '찌니의 노래이야기'를 듣는 청취자들에게 한마디?

 

편하게 일하면서 듣는 방송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이야기도 많이 낯설고 개념도 어려운 말이 좀 많지만 그것도 같이 익숙해지면 뭐 괜찮더라고요. 일단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제 맘대로 정리하는 거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면 더 잘 해보렵니다. 많이 참여해 주세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6회 방송을 하면서 정말 20년 가까이 활동하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 할 수 있는 방법이 이 정도밖에 안되나 싶어 반성도 되고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많은 후배들에게 미안하고 하네요.

노동가요를 나의 문화로 생각하고, 제대로 알고 들을 수 있으면 좋겠고 그런 면에서 제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네요. 그리고 주변에도 많이 이야기를 해주세요. 제 방송을 이야기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같이 나눠보시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꾸 같이 이야기를 해야 좋은 방안도 나오고 할겁니다. 원래 낯선 건 무섭고 거부감이 들고 재미없지만, 뭐든지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잘하면 잘할수록 더 하고 싶다니까요.

 

하니리포터 김재호 http://my.dreamwiz.com/y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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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학보사 인터뷰 (99년)

99년 동국대 학보사 인터뷰

 

1. 민중가요의 음악적 흐름의 변화

 

70년대는 주로 포크였다고 하지만 실제로 민중가요를 생성시키고 수용한 층은 지식인과 학생들로서 포크풍과 고급음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찬송가나 가곡풍이었죠. 느린 장조 행진곡 풍도 사실은 찬송가와 같은 화성구조를 취했었구요. 포크풍 역시 번역곡이나 미국식의 음악형식을 가져다 쓴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70년대 민중가요는 민중가요로 태어났다기 보다는 기존에 있었던 대중가요(김민기의 노래도 처음엔 대중가요로 음반화 되었던 것을 음반이 판매금지되면서 학생운동권에 수용되기 시작했습니다.)와 찬송가들을 수용자들 즉 학생운동권이 재해석하여 민중가요화 했지요. 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단조의 행진곡(전형적인 행진곡의 시작)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84년 학내 자율화 조치 이후에 학내 대중공간이 열리면서 노래패들이 많이 생겨나고 전문적으로 노래운동을 하는 새벽(민중문화운동협의회 소속)이라는 단체가 결성되면서 의식적인 창작활동도 이루어집니다. 이 때의 노래들도 주로 70년대 전통을 이어받는 가곡풍(스탠다드)들이 많았으며, 민요운동도 시작되어 민요풍의 노래도 약간 불려지곤 했습니다.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되면서 지식인 중심이 아닌 기층 민중들의 정서를 노래에 담게 됩니다. 즉, 발라드 풍, 뽕짝 풍, 군가 풍의 노래들이 그것입니다. 노래운동의 중심 역시 노동자로 옮겨가게 되고요.


이러한 흐름들이 90년대 중반을 넘어오면서 대중운동이 상대적으로 침체되고, 또 그러면서 노동자라는 범주도 제조업 중심에서 사무직 등으로 확장되고, 그들의 일상공간으로의 접근이 시작되면서 다양한 음악적 형식을 차용하게 되는데 그 중 두드러진 양식이 록풍입니다. 민중가요는 그 시대 운동을 주도하던 주요 수용자층의 정서에 따라 변화하면서 수용자들의 선택하고, 재해석하여 새로운 정서를 담아내 왔습니다. 그에 따라 노래의 내용과 형식이 변화한 것입니다.


민중가요는 어떤 장르여야 하는가 하는 논쟁은 이미 오래 전에 진행되어 정돈된 문제입니다.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과 어떻게 교감을 하고, 수용자들이 어떤 시,공간에서 어떤 질감으로 만들어내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음악적 경향과 그 과제를 보면 민중가요라는 독특한 어법을 발전시켜 자신들만의 색깔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대중과의 교감속에서 말입니다.

 

2. 민중가요라는 개념

 

그래서 민중가요는 수용자들의 자발적 선택과 재해석, 그리고 재창조해온 영역입니다. 민중가요라는 단어보다는 그러한 개념으로써 여전히 필요하고 아니 어쩌면 요즘같은 시기에는 주체적인 문화향유를 위해 확대 발전시켜야 하는 영역이라고 봅니다,
현시기의 민중가요나 민중문화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가고 있고, 이전의 개념에 더 근접하고 여전히 진보적인 영역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노동가요, 노동문화일 거라고 보여지는 군요. 대중매체를 통한 대중문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문화운동은 아닐테니까요.
오히려 독자적인 문화의 생산, 유통, 수용의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3. 민중가요의 가사의 변화

 

민중가요는 그 시기 대중운동과 항상 함께 해 왔기 때문에 가사 역시 대중적 투쟁의 내용들을 주로 형상화 하고 있었습니다. 90년대 초반까지 예술작품에서 구현하고자 한 것이 투쟁하는 전형적인 인간상이었다면 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는 생활하는 노동자상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재도 주제도 다양한 삶을 담기 위해 생활영역으로 넓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불려지는 공간도 집회공간으로부터 일상공간에서 향유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소재와 주제가 넓혀진 점 외에는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가사들이 많았다고 봅니다. 그건 생각보다 집회나 투쟁의 현장에서 보여지는 인간상에 비해 일상의 영역은 쉽게 읽혀지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집회현장처럼 접하고, 수용하게 하는 구조가 없기 때문이지요. 창작단위들은 그런 고민으로부터 시작하여 콘서트라든지, 거리공연이라든지 음반이라든지하는 다양한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에 비해 대중가요는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규제들을 일정하게 풀어주고, 심의 철폐 및 다양한 대중적 요구에 맞추어 소재도 대담해지고, 구체적인 가사들도 많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현상들을 보면서 마치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경계가 무너진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었을 겁니다. 그러나 문화는 어떤 구조에 놓여 있는가가 가사말이 어떠하고 어떤 장르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규정합니다.
이러한 구조들이 제대로 만들어질 때만이 창작자들도 노동자와 민중들의 구체적인 삶을 접하고 그것을 창작으로 이끌어 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창작자들도 보다 인간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보고 생활의 느낌이 살아있는 구체적인 가사말과 곡을 쓰기 위한 노력들을 더 기울여야 겠지요.

 

4. 공동체적 가치관의 복원

 

문화는 사실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일정한 동질감을 갖는 것, 그리고 그것의 표현으로서의 문화가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인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다 질이 높아진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된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보다는 개인의 자유가 더 보장되어야 풀뿌리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는 것이라고도 생각되고요. 이런 이야기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변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의해 더 탄압받고, 비인간화, 개별화 되어가는 겁니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전략중에 하나이지요. 그러나 예술창작은 개인적인 작업이 아닙니다. 그 사회를 살아가면서 자기 대중들의 삶의 모습들을 작품에 담아내는 것이지요. 그러니 예술은 사회적일 수 밖엔 없습니다.


그리고 문화 역시 사적 영역으로 개인들이 알아서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좋은 작품들을 누구나 접할 수 있고, 스스로 선택하여 재창조하고,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문화라는 영역은 공공의 영역이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공동체적 가치관을 복원시키고, 더불어 사는 인간다운 삶을 구현하는 것이 문화와 예술의 중요한 기능이기도 하고요.
노래가사에도 그것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에는 추상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현상이 그렇다고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램과 지향이 함께 들어 있는 노래여야 겠지요?

 

5. 상업적 대중가요와의 관계

 

앞서 말한 것처럼 내용이라는 것의 본질적인 것은 이념과 지향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는 분명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같은 음악형식에 비슷한 가사말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히려 이런 면에서는 수용자들의 주체적 문화향유 훈련과 실천들이 더 중요할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건강한 문화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토대를 형성시키는 것이 수용자들이 해야 할 역할 일 것입니다.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것은 운동이 아닙니다. 대응할 수 있는 힘으로서 토대를 구축하고 전선을 형성하는 운동이어야 할 것입니다.


민중가요이기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자본에 의해 지켜지는 구조속에 대중문화가 놓여 있다면 그와 다른 우리의 구조는 창작자와 수용자들이 함께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음반을 파는 행위, 공연 티켓을 파는 행위가 상업적이라고 해서 민중가요가 무료로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영역이기위해 먼저 토대를 만들 방안을 우리가 마련해야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6. 노래운동 단체들의 역할

 

창작단위들은, 아니 문화운동 진영 대부분이 예술 작품을 어떻게 만들것인가를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을 해왔습니다. 노래에 어떻게 노동자의 삶을 반영할 것인가 하는 고민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문화운동을 해야합니다.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삶을 바꾸고, 생활을 재구성할 수 있는 문화운동의 관점으로 노래운동을 바라보고, 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구조의 문제를 포함해서 대중들과의 접점을 제대로 형성하고 일정한 힘으로 작용하도록 하는 방안입니다.


요즘 창작물이 잘 안나와 고민이 많지만 단지 좋은 창작물을 만드는 것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창작이 되어질 수 있는 Feedback 구조를 어떻게 설정해 갈것인가를 고민해야 그 속에서 더욱 삶과 밀착된 좋은 창작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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