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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노래와 문화는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소소한 일상이지만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3)

3. 5月17日(平和行進2日目・西コース) 행진 2일째 서쪽코스

 요미탄에서 카데나까지 10Km 카데나에서 동쪽 코스와 합류

 

 오전 7시 출발. 오자와상과 히나타상이 일찍 숙소로 오셔서 방에 짐을 풀어놓고는 같이 출발했다. 오늘부터는 이곳에서 묵을 예정이시다. 

 요미탄손 시청 앞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제 공연 시간을 제대로 예측못해 늘어졌다고 생각했는지 오늘은 사전 공연이란다. 부랴부랴 더늠 치배들은 옷을 갈아입고, 사민당 방송차 앞에서 풍물공연을 했다. 역시나 풍물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지 중간에 끊으라고 하여 또 약간의 당혹스런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후 꽃다지가 두곡을 불렀는데 하나(꽃)라고 오키나와 민요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하나라는 곡은 7,80년대 활동가들이 잘 아는 노래라 오자와씨와 치바나 쇼이치씨를 비롯한 활동가들이 따라 불렀다.

 야기 상의 사회로 집회가 시작되었는데 여러 사람이 나와 연설을 했다. 사민당 후보인 사토루씨와 오키나와 출신 국회의원 등.

 오자와씨는 20년 전에 오키나와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고 하신다. 그러나 최근까지 동경에서 헤노꼬 투쟁 지지집회를 방위성 앞에서 매주 한 번씩 하는데 이 집회에 연대를 계속 해와서인지 자세히 알고 계셨고, 덕분에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이해를 도와주셨다. 

 요미탄 시청이 있는 자리는 예전에 미군기지였는데, 시장을 포함한 지역주민들이 열심히 싸워서 결국은 반환이 된 땅이라고 한다. 그 때 시장을 지내며 끝까지 투쟁한 분이 현재 국회의원인데, 이 날 연설을 하셨다고, 매우 재밌게 연설을 잘 하는 것 같았다. (정광훈 의장님과 비슷)


 

9시가 조금 넘어 행진을 시작했다. 대오 제일 앞에 별모양으로 큰 상징물을 만들고 거기에 반전평화라고 써서 수레로 끌고 갔고, 또 황소의 탈을 쓴 사람도 있었는데,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사민당 후보인 사토루 씨가 그 소를 끌고 갔다.

어제와는 달리 아이들을 데리고 온 주민들도 많았고, 한적하고 벌판이 펼쳐져 있는 기분좋은 길로 행진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곧 엄마 아빠에게 안기거나 업혀서 갔는데, 그 엄마 아빠들이 끝까지 행진을 계속 했다. 정말 대단한 의지, 체력이다. 

 카데나 근처로 가면서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카데나 미군기지 철망을 따라 계속 걸었는데, 정말 길게 계속되는 철망을 보며 걸어야 하는 것은 괴로웠다. 그러니 상점하나 보기도 힘들고, 맥주 한 캔을 못사먹었다는 거...


 역시 기차박수, 8박자 구호 등을 외치며 걷는데 오늘은 일본인들도 구호를 많이 외쳤다. 주로 오키나와의 신기지 건설 반대, 000 반대등의 구호가 많았는데 앞부분은 어쩌구저쩌구 하다가 뒷부분 한따이! 만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뭐, 같이 동참하는 의미이니까...

 히나타 상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자 많은 오키나와, 일본인들이 따라했다. 목소리가 정말 끝내준다.

 한참을 걷다보니 역시 우익이 출현했다. 우익은 항상 행진대오 우측에 출현한다.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차량(7~8대)이 정말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정말 시끄러웠다. 하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우리만 또 씩씩거리고...

 오자와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동경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동경에서는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에 경찰이 우익을 통제한다고 했다. 이시카와에게 풍물을 치면서 가자고 했다. 우익들 소리가 안 들릴테니 신나게 풍물치며 가자고. 이시카와가 우리차의 기사아저씨께 전화를 했다. 차가 막혀서 그런지 금방 온다고 했는데 도통 나타나질 않는다. 11시쯤 휴식을 위해 어딘가 주차장으로 들어가자 우익 차들이 에워싸고 난리가 났다. 다시 출발하려 하는데 그 때서야 우리버스가 도착했다. 잽싸게 악기를 내려서 메고 풍물을 치면서 대오를 따라갔다. 이시카와는 “재밌다”고 한다. 우익들이 출현했지만 우리의 풍물소리가 더 컸고, 대오 앞쪽과 뒤쪽으로 인도를 따라 왔다갔다하면서 풍물을 치지 몇몇 사람들이 웃으면서 우리에게 박수를 보냈다.

우익들은 몇 번 왔다갔다 하더니 도저히 안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사라졌다. 우리는 나름 의기양양해 하며 오후엔 더 신나게 쳐보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덕분인지 어제보다 걷는 게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점심 식사를 하고 난 뒤 이시카와가 와서 주최측에서 우익에 대해서는 무시가 기본 입장이라고 하며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하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특히 인도로 올라가는 일은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절대 안된다고...

 점심 이후 출발할 때 잠깐 풍물 공연을 하고, 다시 행진 시작하면서는 악기를 차에 실었다. 지루한 오후 행진... 우익들은 다시 나타나 계속 떠들어 댔다.(유턴을 해서 왔다 갔다 하며 계속 방해함) 기지 입구에서 잠시 항의집회를 했다. 그냥 서서 구호만 열댓번 외쳤다. 

정리집회 장소인 아메리카 타운의 공원입구까지 거의 다 와서 행렬이 멈추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침 가게가 있어서 맥주나 사자고 들어가려는데 이시카와가 우익들이 있기 때문에 따로 행렬과 떨어지면 안된다고 해서 포기하고 앞쪽으로 가봤다. 그랬더니 우익들이 흥분해서 차량들로 공원 입구를 막고 있었다. 경찰이 출동을 하고 우익 몇 명이 대오 쪽으로 달려들려 하자 자기네 일행들이 말리는 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충돌이 생길 뻔 했던 거 같다. 

 우리일행은 무시라는 전술이 가장 힘든 전술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며 지쳐 있었지만, 오키나와인들과 행진 대오들은 익숙한 듯 보였다.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36년을 지속해 오지 못했을 것이고, 충돌을 하거나 하면 바로 경찰이 출동하여 잡아간다고 했다. 어쨌든 5.15 평화행진을 해마다 계속 진행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둔 방침일 것이다. 뭔가 끈질기게 버텨온 힘이 있긴 있는 듯도 하다.

 

공원에 들어서자 팥죽(?)과 음료, 사탕을 나눠준다. 동코스 (어제 헤노꼬부터 걸어 내려온)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바닷가를 잠시 산책하며 산호를 줍기도 했다.

 그러다가 맥주라도 먹고있자는 제안에 더늠의 세움이와 정기가 사러갔다. 그런데 간지 삼사십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걱정하던 이찬영이 찾아다니고 했으나 못찾았다. 큰일이다 싶어 다시 몇 사람이 찾으러 가려는데 나타났다. 길을 잃고 헤맸으나 결국은 그래도 스스로 찾아온 것이 다행이다.

 뒷부분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정리 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시카와상이 급하게 공연 팜플렛 원고를 보내줘야 한다고 먼저 출발하자고 하여 버스로 이동했다. 가까운 휴게소 피씨방 앞 공터에서 이시카와가 작업을 마칠 때까지 30분 가량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7시. 메구미 언니와 나가이 상이 와 계셨다. 메구미언니는 일찍 도착했지만 어차피 행진대로에 결합할 수 없으니 몇군데 관광을 했다고 한다. 언니도 오키나와가 처음인데 건물도 경치도 전부 너무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확실히 일본이 아니라고 했다.  

 밤 9시 40분쯤에 빨래를 돌려놓고 (한 번 돌리는데 100엔이다) 조성일, 박미영, 이찬영, 김영택, 이은진, 메구미, 요오꼬 상이 함께 극장 답사 갔다. 극장은 숙소에서 시장길로 10분 정도만 걸으면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영화극장이기 때문에 조명도 별로 없고, 음향은 따로 셋팅을 한다고 했다. 예상대로 무대는 상당히 좁았다. 그러나 현장에 강한 우리 아니던가... 어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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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2)

2. 오키나와 평화행진 1일차

5月16日(平和行進1日目・東コース) 평화행진 1일차. 동쪽 코스로 헤노꼬에서 킨까지 18 Km (9시부터 17시까지)를 걷기로 되어 있었다.


 6시 30분에 미리 빌린 버스를 타고 출발하였다.

비가 많이 내려 비옷과 우산등을 준비하고,

또 더늠은 공연을 위해 악기와 의상들을 준비하느라 짐이 하나 가득이었다.

서둘러 차로 출발하고 차내에서 주먹밥과 삼각김밥을 먹고 8시 헤노꼬 도착하였더니

비는 간데 없고 뜨거운 뙤약볕으로 바뀌어 있었다.

헤노꼬 기지 반대 투쟁 농성장으로 들어서니

미찌루라는 젊은 여성 (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다)이 삼신을 들고 맞아준다.

미찌루는 만월(滿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삼신(일본에서는 샤미센이라고 하는 비슷한 악기를 오키나와에서는 삼신-세개의 선-이라고 함.

일본에서는 고양이 가죽으로 만들고, 오키나와는 뱀가죽으로 만든다고 함))으로

아리랑도 연주를 했고, 또 오키나와 민요도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꽃다지 성일이의 기타를 꺼내서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미찌루는 19일에 있을 콘서트 때 긴조시게르씨의 타이고(오키나와 북) 연주를 한다.

 헤노꼬 농성단은 보통 아침에 모터보트를 타고 나가 시위 및 감시를 하는 데

지금은 태풍이 와서 배가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오키나와는 이 맘 때가 우기인데 올해는 우기가 조금 늦게 오고 태풍이 오는 중이라고 한다.

9시가 조금 안되서 바닷가로 자리를 옮겨 집회를 시작했다.

더늠은 미리 차에서 옷을 갈아있고,

한국에서 주로 하는 것처럼 멀리서부터 악기를 치면서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왔다.

주최측은 이런 공연을 처음보기 때문에 공연단을 자꾸만 앞으로 나오라고 했고,

또 중간에 끊으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흐름이 있는데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고만...

하여간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그런 후에 꽃다지가 공연을 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고 두곡이었다가 한곡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바위처럼 한곡을 같이 불렀는데 방송차량의 음향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마이크가 하나 밖에 없어, 결국은 그냥 모두 기타 반주에 생소리로 불렀다. 

집회에 참여한 대오들은 수도국 노조 조합원들이 많았고,

헤노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참석하셔서 많은 격려와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헤노꼬 분들은 농성장을 지켜야 하므로 행진은 하지 않았다.

집회는 주로 연설로만 계속 될 뿐 다른 프로그램은 전혀 없었다.

워낙 그렇게 진행을 해와서인지 사람들은 그냥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9시 반이 좀 넘어서 행진을 시작했는데, 진행차선 한 차선을 따라 행진을 하고

자원활동가들인지 단체티를 입은 젊은 이들이 깃발을 들고

차선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질서유지를 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언덕들이 많이 있는데다가 아침에 비가 와서

땡볕에 대응할 준비를 못했기에 우리들은 무척 힘들었다.

다들 조용히 걷는데 한국 행진단은 8박자 구호와 기차박수를 치면서 행진했다.

(주요 구호 : 평화헌법 사수하자. 오키나와에 신기지 건설 반대한다.

미국놈들 물러가라 등등... 김창곤, 박선봉이 주도)

그러나 그도 잠시 모두 지쳐서 묵언 수행을 하듯이 걷기만 했다.


  ** 평화헌법이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 자체 반성을 하면서 군대를 갖지 못하도록 하는 평화헌법을 제정 (9조)했으나 오키나와는 이 헌법에서 예외로 미군지기가 몰려 있는 곳임. 오키나와에서도 평화헌법을 지키자 라는 의미와 이 조항을 최근 개악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이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는 것임. 

 

 11시 쯤 어딘가 주차장 같은 공터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바나나와 음료,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햇빛은 쨍쨍한데 약간의 비가 오락가락 한다.

잠시 휴식하고 또 행진. 사람들이 많이 지쳐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계속 행진을 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힘든 것 같았다.

서울에서 사전 점검회의를 할 때는 걷진 않아도 되고 차로 이동하면서

중간 중간에 공연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전달 받았었다.

점심 식사 시간. 어딘가의 시청 혹은 구청 이었는데 주차장 바닥에 앉아

주최측에서 준비해 준 도시락을 먹었다.

리는 밥을 먹으면서 오후에 꼭 걸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도 맨날 길바닥에서 사는데... 여기까지 와서 굳이? 뭐 이런 기분들이었다.

하지만 이시카와는 단호했다. 평화행진에 참가하기로 했고,

전체 일정을 같이 해야 하므로 걷는 건 의무라는 것이다. 뭐... 사실 굳이 할 말이 없다.

기양 걸을 수 밖에... 사실은 내가 정말 허리가 많이 아파 도저히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 쉬기가 미안해서 다같이 걷지 말 것을 제안한건데 어쩔 수 없었다. 참을 만큼 참아보기로 했다.

중간 중간에 상점이 나타나면 맥주를 사서 마시면서 걷기도 했고,

잠시 앉아 마시고 출발하기도 했으나 대오가 곧 사라지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이 참 힘들었다.

식사 후에는 그냥 밋밋하게 걷지 말고 풍물을 치면서 행진을 하기로 했다.

풍물을 치기 시작하면서 대오는 다시 행진을 시작했다.

뭐 특별히 공연을 보거나 집회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행진을 하면서 풍물을 계속 치자 조용하던 마을에서(오전에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음)

사람들이 튀어나와 지지하는 손짓과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특히 초등학교를 지날 때에는 아이들이 행진 대오를 보려고 담장을 따라 뛰면서 환호하고

“아리가또~~”(고맙다)라고 외쳤다. 초등학생들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이럴 걸 왜 조용히 걷기만 하는지 좀 의문이 들었다.

대 시민 홍보도 아니고, 각자의 실천 중에 하나인 걸까?

오전 내내 걸으면서 특히 더 힘들었던 게 바로 그런 이유였던 것 같기도 했다.

땡볕에서 더늠이 한 시간 넘게 공연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나서

장구 가락에 맞추어 박선봉이 민요를 몇 곡 불렀다.

그 이후에도 악기를 차에 실어놓고 계속 행진을 했는데

나는 허리가 아파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차에 타고 이동을 한 후 우익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방송차 한 대와 검은 찝차 한 대에 천황의 군대라는(菊軍) 표시와

일장기(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기운이 뻗쳐 나가는)를 두르고 시끄럽다는 둥,

북한으로 가라는 둥 계속 방해를 하면서 왔다갔다 했다고 한다.

다른 행진대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우리들 일행은 열받아 욕하고 난리가 났었다고.

힘들다가도 우익들이 출현을 하면 기운이 펄펄 났다나 뭐라나... 이구구..

킨에 도착하여 정리집회를 한 후 5시 정각에 해산을 했고, 모두들 차에 올랐다.

숙소로 돌아와서 식사당번을 정했다.

첫 번째 식사 당번은 나와 정혁, 그리고 선봉형.

준비된 게 없었기 때문에 라면을 끓여 햇반을 몇 개 사서 먹었다.

이후에는 각자 알아서 돌아다니며, 혹은 숙소에서 술자리를 벌였다.

이시카와를 집에서 쉬고 푹 자라고 보냈는데 8시도 안되어 신문에 난 기사를 가지고 달려왔다.

어제 인터뷰한 것도 나왔고, 오키나와 타임즈에도 꽃다지 사진이 아주 크게 나왔다.

이시카와하고 술집에 갔다. 이시카와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러면서 취해서는 “내가 없었으면 이 행사 못했겠지?” 한다.

맞어... 네가 아니었음 어떻게 여기를 오겠다고 했겠니. 그리고 어떻게 성사가 가능했겠니...

고맙다. 또 미안하다. 하지만 이번 계기를 기회로 너도 오키나와에서 너의 자리를 찾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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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오끼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1)

사실 갔다온지는 한참 지났는데...

그 동안 바쁘기도 했지만 마음도 잡히지 않아 미루다가 이제사 쓰기 시작합니다.

2008년 5월 15일부터 5월 22일까지의 오끼나와 일정.

평화행진에 참가해 걷고, 또 19일 콘서트에 농성장 방문에... 아주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아주 의미있고, 또 많이 느낀 시간들이었습니다.

 

1. 출발, 그리고 우라소에

 

 3, 4년 전 10년지기 일본인 친구 이시카와가 한국어 공부를 하러 서울에 왔었다. 

그리곤 6개월정도를 지내고 갔다. 그 때 이시카와는 오키나와에 가서 살 거라고 했다. 

그러니 언제든 꼭 한 번 놀러오라고...

그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오키나와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96년 꽃다지와 동경에 갔을 때 ‘마요나카 싱야’ 씨가 게스트로 출연을 했었다.

그 때 오키나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남쪽으로 튀어(South Bound)>를 읽으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일본의 식민지로 태평양 전쟁 때의 격전지였고 미국이 점령했다 다시 일본에 반환된,

그러면서 일본의 미군기지는 죄다 오키나와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어찌보면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그런 섬이다.

해마다 반환일을 전후로 해서 평화행진이 열리는데

어떤 해에는 본토에서 몇 만명이나 가서 결합한다고도 했다.

2005년 1월에 동경에 또 갔을 때도 헤노꼬 투쟁을 담은 비디오 [Marine, Go home!!]을 봤다.

정말로 아름다운 섬이었고, 매일 주민들이 보트를 몰고 나가 작업을 방해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2006년 3월 우리(?)는 큰 맘먹고 오키나와로 갔다.

이시카와의 집에서 일주일을 살면서 배타고 토카시키 섬에도 가고,

바다도 질리게 보고, 또 슈리성과 유리공장, 히메유리 등등의 관광지와 유적지들도 보고,

바닥이 유리로 된 배도 타고, 이것저것 신나게 놀면서 즐겼다.

그치만 꼭 한 군데 가고자 했던 곳이 있었다.

그게 바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였다.

오키나와 평화센터의 야마시로 사무국장을 소개받고

그 분이 차로 우리를 안내해 주며 설명도 자세히 해주셨다.

한국의 평택 대추리 투쟁이 한창이던 때라 참가단이나 공연단을 조직해서

한 번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침 그럴 기회가 만들어졌다. 물론 여러 가지로 어려움도 많았다.

이시카와 역시 아직 오키나와에서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을 조직하기 어려웠고, 예상했던 국제연대기금도 나오지 않아 진행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시카와의 도움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일본활동가들이 도움을 주셨다. 고맙고, 또 미안한 일이다.


우여곡절끝에 어찌되었거나 2008년 5월 15일 오전, 일정이 있어 늦게 오는 몇몇 사람을 빼고

17명은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나하공항에 도착해서 이시카와에게 전화를 하자 오전 근무를 하고 오느라고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다고 곧 도착한다고 했다.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서자 너무나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다.

올해 초부터 일본에 입국할 때 지문날인과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오키나와도 물론 일본령이니까 예외는 아니었다.

울화가 치밀고 잠시 갈등을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일본 방문도 쉽진 않을 것 같다.

그 와중에 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인천노동문화제 집행위원장인 조광배가

금속노조에 있던 재작년에 홍콩 WTO 반대집회에 참석했다가

홍콩 경찰서에 연행되었던 사실이 인터폴을 통해

오키나와 공항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이를 문제삼아 이것저것 조사를 하는 바람에 모두가 나가고 나와 광배만 따로 사무실에 남아

1시간 반 가량을 억류되어 있었다.

홍콩에서 왜 경찰서에 가게 되었나, 여기는 왜 왔나 하는 것들을 꼬치꼬치 물었다고 한다.

일본인인 이시카와가 계속 통화를 하면서 바꿔 달라고도 하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결국 예정되어 있던 첫 번 행사인

[‘아시아에서 기지를 없애자’ 오키나와 행동] 3시 집회는 참석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일단 숙소로 이동했다.

선봉형과 일본어를 잘하는 미영이가 택시로 큰 짐을 싣고 가고,

나머지는 모노레일로 숙소로 이동하였다.

숙소는 나하에서 가장 큰 거리이고 관광객들이 몰리는 국제거리 중간에 있는

송미관(마쯔오 깡). 국제거리는 온갖 상점들과 음식점, 술집들이 모여있고,

뒤편으로 시장이 몇 개의 블럭을 형성하고 있다.

모노레일 현청앞역(켄조마에 에끼)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갔다.

숙소는 인터넷으로 봤던 그림보다는 훨씬 좁았다.

하지만 감상은 나중. 우선 짐을 넣어놓고 시외버스를 타고 우라소에로 이동했다.

 나하에서 15분 정도면 되는 거리라고 했는데 차가 많이 막혔다.

일본 본토와 다르게 전철이 없고, 버스만 있는데다가 매우 더운 날씨이기 때문에

(대만 옆 쪽에 있다.) 대부분 자가용을 타고 다니므로 차가 항상 많이 막힌다고 했다.

4시 10분 경 도착해 서둘러 우라소에 사회복지센터로 걸어가자

류큐신보 기자가 4시에 인터뷰를 하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기자가 바쁘다고 우선 사진촬영을 먼저 하고 몇사람 인터뷰를 했다.

꽃다지 이태수, 더늠 이찬영, 노조를 대표한 김창곤이 준꼬상과 이시카와상의 통역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사람들은 주변을 서성거리다 술을 찾아 떠나기도 하고

꽃다지 식구들은 행사장을 보러 올라갔다.

 *준꼬상 : 고야 준꼬 - 98년 한국에 놀러왔었다고 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오키나와에서 가는 국제선 직항이 대만과 한국밖에 없는데 대만은 가까우니까 한국을 한 번 가보자고 해서 간 것인데. 그 때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성공회 교회 목사님이신 아버님의 소개로 노숙자 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한국에 관심이 많아지게 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오게 되었다고 한다. 5년간 어학연수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대학 때 전공은 법학이었다고 한다) 재작년에 오키나와에 돌아왔는데 그 이후로도 몇 번 한국을 왔다 갔다고 한다. 유학시절 꽃다지를 알게 되었고, 공연도 보았고, 이번 우리의 오키나와 일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기내식을 먹은 이후로 점심도 먹지 못하고 서둘러 여기까지 오다보니 배가 무지하게 고팠다.

주변에 식당같은 건 보이지 않았기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사회복지센터 내 구내 식당이 5시쯤 문을 열었고, 거기서 첫 번째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오키나와 소바와 카레를 먹었는데 단무지 하나 없는 식사에 처음인 사람들은

좀 놀라긴 했겠지만 적당히 적응을 하는 듯 했다.

우리가 20명 정도 앉아서 밥을 시키니 주인 아주머니께서 서비스로 돼지 내장탕을 주셨는데

이런 일은 매우 드문 일로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데

오키나와에서는 가능한 가보다 싶었다.  

 

 18시부터 [아시아에서 기지를 없애자 오키나와 시민행동] 행사가 시작되었다.

이 시민행동은 한 단체가 아니라 여러 진보적인 단체들이 모여 함께 하는 것으로

구성하는 각 단체들의 주요 투쟁내용들을 한 분씩 나와서 연설을 하였다.

사회는 토미야마 상이 봤는데 소아마비 장애가 있으신 분인데 휠체어를 타고 다니시면서

한쪽 다리로만 깽깽이로 뛰면서 왔다갔다 하시는 모습이 참 대단해 보였다.

그 분은 평택 투쟁에만 30여 번 정도 오셨다고 한다.

 여는 공연으로 마요나카 싱야씨가 노래를 불렀고,

연설이 계속되던 중간 쯤 꽃다지 15분정도 공연을 했다.

그런 후에 한국에서 전날 도착한 이시우씨가 강연을 했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새벽부터 잠 설치고 오키나와로 온 첫날인데다가 점심도 못먹고,

비도 오고 하면서 사람들은 지쳐서 밖에서 주로 잡담을 하면서 잠을 쫒고 있었다.

마무리는 다같이 인터내셔날가를 부르는 것으로 정리했다.

행사가 9시를 넘어 좀 지체되어 끝나고 다같이 뒷풀이를 갔다.

  동경에서 오신 분들도 계시고, 오키나와에서 활동하는 분들, 그리고 이시우일행과 우리들...

천황의 오키나와 방문때 일장기를 불태운 지바나 쇼이치상, 토미야마 상, 마요나카 싱야 상,

그리고 사회복지센터 사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무슨 코스요리를 시킨건지 처음엔 회가 나오더니 그 담엔 계속 볶은 면 요리 종류가

몇가지 나왔는데 정말 먹다먹다 아깝게 많이 남겼다.

재작년에 오키나와를 와본 경험이 있는 정혁은 사람들에게

그동안 오키나와 음식에 대해 많은 자랑을 했었다. 술안주로 정말 좋다고...

이날도 사람들에게 하는 말

“오키나와 음식은 술안주라고 생각하면 정말 좋은 맥주안주야.

근데 밥이라고 생각하면 술없인 절대 먹을 수 없는 음식이지...” 라고.

술은 오키나와 전통식 소주인 아와모리 1.8L 대병을 여러 병 시켜 얼음과 물을 섞어 마셨다.

혹은 생맥주... 오키나와에서 만드는 맥주는 오리온 맥주이다.

12시가 거의 다되어 정리하고 일어나니 비가 계속 흩뿌리고 있었다.

4명씩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한 후 숙소에서 몇사람은 술을 마셨고,

결국 토미야마 상과 이시카와는 거실에서 자고 말았다.


   ** 일장기 소각 사건 : 일본 복귀 15주년에 복귀 반대론의 등장하는 등 일본 본토 · 일본 지배계급 · 천황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강해졌다. 복귀 무렵 천황에 대한 호감을 가졌던 오키나와인은, 복귀 15년뒤에 천황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1987년 오키나와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천황이 참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천황의 오키나와 방문 소식을 들은 5개의 노동단체가 만든 5者 연락협의회가 1987년 9월 11일 ‘천황의 (오키나와 전쟁에서의) 전쟁책임을 묻고 國體(전국체전)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노동자 총궐기 대회’를 개최했다.

한편 오키나와에서 전국체전을 개최하는데 있어서 일장기와 기미가요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당시 오키나와의 학교에서 일장기와 기미가요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요미탄손(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집단자결 장소임)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학생들이 단상의 일장기를 제거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요미탄손에서 열린 전국체전 소프트 볼 대회장에 일장기가 휘날렸고....이런 사실을 알게 된 요미탄손의 주민 지바나 쇼이치(知花昌一) 씨가 일장기를 끌어내린 다음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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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커플 음주가무 밴드를 결성하다.

 기관지 노힘 139호 삶글 <노동자의 취미, 여가.> 에 실린 원고입니다.

계획하고 글을 쓴 이후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즐거움이 생깁니다.

참, 그 사이에 드럼과 일렉 기타 포지션이 서로 맞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공연 때는 객원만 30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ㅎㅎㅎ

마담 졸라가 주제가를 쓰고 있다고 하니 자뭇 기대가 됩니다.


[쌍커플 음주가무 밴드를 결성하다.]

연말연시 음주가무에 몸과 마음이 노골노골 해지던 시점, 2008년엔 뭔가 개인적으로 즐거운 목표를 세우자는 생각 중에 역시 술자리에서 우연찮게, 또 술김에 밴드를 하나 결성했으니 그 이름하여 [쌍(Two, Double) 커플(couple) 음주가무 밴드]라. 밴드 결성의 계기는 이처럼 아주 단순하지만, 이의 배경에는 다년간의 놀기 경험과 문화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먼저 구구절절하게 멤버 소개를 좀 해보겠다.

먼저 드럼머인 마담 졸라(여, 35세). 잘나가는 출판 편집, 기획자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 단체 후원회의 노래 소모임에서 다년간 모임을 주도했다. 음감과 리듬감이 좋지만 조절되지 않는 고음역대의 엄청난 목청을 자랑하며 노래방 가기를 즐긴다. 그럼에도 주변의 호응이 없어 늘 억울해 하고, 또 막상 노래방을 가서 각광을 받는 건 템버린을 휘두르는 그녀의 막춤되시겠다. 최근 2,3년간 꾸준히 재즈댄스 교습을 받았음에도 실력에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춤을 배운다기 보다는 운동삼아 하는 것이 확실하다.

다음으로 트럼펫과 일렉기타 주자인 놀쇠(남, 41세). 한 때 출판업에 몸담았으나 잡다한 일들을 하면서 고정적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그럼에도 노는 일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으로 노는 걸로 월급 주는 직업이 있다면 떼돈을 벌었을 테지만 절대 그런 일이 생길 수 없는 현실을 개탄하며 산다. 평소 인라인, 자전거, 탁구, 당구, 테니스, 등산, 헬스, 거기다 소설책과 만화책까지 두루 섭렵하고, 최근 다른 멤버인 자동머리를 따라 트럼펫을 배우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다. 혹자는 이 자를 보고 “진정한 자유인” 혹은 “영혼이 자유로운 자”라느니, “놀 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느니 하며 격려를 하는 통에 늘 일관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베이스기타와 건반을 치기로 한 나, 찌니(여, 42세). 한 때 전문음악단체에 몸담아 노래에서 건반, 기타, 편곡과 노래지도, 기획, 정책까지 올라운드 플레이어였으나, 그 당시엔 뭐든지 시키면 한다는 정신으로 임했던 터라 뭐하나 잘하는 게 없이 결국 전문활동을 접었다. 어린 시절 꿈인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고자 여러 계획을 세우지만 활동가를 자처하여 항상 공사가 다망했기에 한 번도 뭘 시도해 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어쿠스틱 기타와 코넷(트럼펫과 비슷하나 약간 짧은 악기)주자인 자동머리(남, 38세)는 멤버 중 유일하게 전문 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10년 넘게 전문음악활동을 하고 있으나 주 종목은 보컬이기 때문에, 코넷과 기타의 경우 아마츄어밴드로 결합하는 것이 맞다고 나머지 멤버들이 박박 우기며 끌어들였다. 

참고로 놀쇠와 나, 자동머리와 마담졸라는 부부이지만 자동머리와 놀쇠가 붙어있는 시간이 부부끼리 있는 시간보다 더 많다는 사실. 또 두 부부는 동네에서 자주 만나 음주가무를 즐기거나 철마다 건수 잡아서 여행을 다니곤 한다.


 밴드 결성을 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 보겠다. 나는 노동자문화에 대해 교육을 갈 기회가 종종 있는데, 항상 건강한 노동자문화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욕구를 찾아내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러면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라고 하는데 문제는 여기부터다.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잘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최근 문화예술교육을 하면서 설문조사를 해보니 도대체가 자신을 위해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고, 그래서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니까 특별히 배우고 싶은 게 구체적일리 만무했다. 주 5일제도 시행되고 여가시간이 늘어나 노동자문화운동에서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있는데, 실제로 주 5일제가 시행되고 나서 노동자들은 노동 외의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 잔업, 특근을 하거나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한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요즈음엔 쉬는 시간에 조합사무실에 올라가 주식동향을 파악하는 게 일이라고도 한다. 어쩌다 주말에 시간이 나면 패스트 푸드점이나 요상한 이름의 식당에서 외식을 하고, 또 놀이 공원에 간다. 외국으로 골프여행을 하거나 하는 일도 이제는 자본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카드를 긁거나 빚을 내서라도 더 비싼 아파트로 옮기고 멀쩡한 가구나 전자제품은 최신형으로 바꾸고, 고급스런 음식을 먹는 일로 욕구를 충족하고 있다.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는 생활이 진정 내가 바랬던 삶의 가치였다는 듯이 말이다.

더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바램을 꼭 나쁘다 할 순 없지만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렇게 삶의 방식과 욕구, 취향조차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삶을 꼼꼼히 되돌아 봐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임금인상 투쟁해서 따낸 성과를 고스란히 대자본에게 갖다바치는 소비적인 삶을 풍요로운 삶이라고, 성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본에 의해 포섭당하지 않는 취향과 욕구를 계발, 증진시켜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문화를 만들어가도록 프로그램 기획과 조직을 하는 나와 내 주변의 여가와 취미활동은 또 어떠한가? 앞서 소개한 이력에서 보여지듯 우리 두 부부의 취미활동은 다양하고도 왕성했고, 술자리에서의 대화도 주로 그런 주제였다. 그런데 이 역시도 관성에 젖어들어 어느 순간 그저 좀 더 맛있는 안주거리에 술을 먹게 되고, 점점 씀씀이도 커져가고 있었다. 어떤 취미활동을 같이 하더라도 이는 그 다음 술자리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 정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관계도 식상해지고 재미도 없어졌다. 남편과 이 문제를 놓고 여러 번 토론 아닌 토론을 하면서 반성도 많이 했다. 좀 더 생산적이고 건강한 공동의 취미를 만들어 갈 순 없을까? 고민 끝에 구체적이고 뚜렷한 목표의식과 실천이 뒷받침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고, 앞으로 의미없이 먹어대는 술자리는 자제하기로 하였다. 별로 대단한 결심은 아닐지 모르지만 술먹고 사람들과 노는(?) 게 일이면서 여가면서 낙이었던 우리에겐 아주 간단한 일은 아니기에 이 결정은 대형할인마트 안가기, 최소한 집에서는 음식 남기지 않기, 무엇이든 적게 사기에 이어 남편과 내가 다짐한 실천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그런 결정을 내리고 나니 많이 심심해졌다. 뭘하지? 집에서 책읽고 영화보고, 간식 해먹고. 뭔가가 좀 부족하고 재미가 없었다. 탁구를 같이 칠까? 둘만하면 좀 심심하지 않나? 누군가들과 시간 맞춰 같이 하려면 또 그런 취향이 맞아야 하는데 참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이것저것 고민하던 차에 역시나 그동안 어울려 놀던 장단이 맞는 자동머리 부부와 조촐한 송년회를 하며 이런 이야기를 꺼내니 바로 죽이 맞아 악기를 하나씩 배우기로 했고, 결국은 밴드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야기는 바로 진척되어 구체적으로 연말에 공연을 하기로 결정했다. 연주를 못하면 어떻고, 완성된 공연이 아니면 또 어떠리. 연주실력이 부족하면 일어나 춤도 추고 같이 놀아도 좋고. 관객이 많이 안와도 좋고, 돈이 부족하면 후원도 조직하고. 물론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지만 조만간 시작할거라는 다짐에 우리의 송년회는 환호성으로 들떠있었다. 드디어 밴드 이름을 정할 시간. 우리는 둘다 아이가 없는 부부니까 ‘애무부부’로 하자는 첫 번째 의견은 너무 에로틱해서 19금(19세이하 관람불가)이 될지도 모르다는 우려에 바로 탈락하고, 두쌍의 부부인 ‘쌍커플’에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음주가무’를 붙이자는 의견은 굳이 누구의견이랄 것도 없이 일사천리로 이어지면서 낙찰을 보았다. 그.리.하.여... “쌍커플 음주가무 밴드”가 탄생했다.

이야기를 풀다보니 무지 쑥스럽기도 하고 또, 참으로 별일 아닌 사소한 일을 거창하게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일상이나 여가가 사소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재미있고 즐거운 일을 끊임없이 찾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믿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운동도 재미있게 해야 의욕도 높아지고 성과도 더 쌓이지 않는가 말이다. 나에게 운동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또 내가 변화하지 못하면 남들도, 세상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2008년 새해엔 모두가 하나씩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혹은 그동안 해보고 싶었는데 미루어두었던 것을 찾아내어 지금부터 실행에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 그럼 우리들 인생도 더 재미있을텐데 말이다.

자, 기대하시라... 연말에 열릴 우리 밴드 공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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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결, 깔끔한 생활?

이상하게 나는 물을 보면 좀 맛이 가는 것 같다.

술취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을때도 나는 물을 찾아 간다고 했다. (본 사람들 이야기에 의하면)

목욕을 할때도 계속 물을 뿌려대고 있다보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샤워꼭지를 쥐고 있는 걸 발견한다. 또 설거지를 하다가도 그릇하나를 들고 계속 물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도 있다. 뭐 정신차리고 한다 해도 난 살림을 빨리 잘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예전에 MT를 가도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후배들이나 동기들이 그릇 껍질 벗겨지겠다고 할 정도로 뽀득뽀득 소리나게 닦곤 했다.

그런 내 모습에 대해서 나는 두가지로 진단을 했었다. 하나는 나의 결벽증 때문이고 또 하나는 엄마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내 결벽증에 대해서는 왜 그런게 생격는지는 원인을 알듯도 하지만 확신은 없으니...

내 결벽증은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부분부분 나타난다. 평소엔 청소 안하고 먼지가 데굴데굴(먼지는 왜 쌓이면서 지들끼리 동그랗게 뭉칠까? 그것도 한 번 연구해 볼일...) 굴러다녀도 후후 불어놓고 살다가 어떤 때는 갑자기 뽀득뽀득 소리나게 청소를 해대는데 거의 자폐라 할 정도로(김해자 선배는 가끔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자폐라고 했다) 심하게 집착을 하고, 보이는대로 머리카락을 주워댄다. 말하면서도 움직일때마다 떨어진 머리카락과 먼지를 손으로 휴지로 쓸어 계속 치운다. 중고등학교 때엔 화장실 갈 때 꼭 휴지를 넉넉히 가지고 가서 화장실 문을 열때 손잡이를 휴지로 감싸쥐고는 했다.

우리 엄마의 영향력에 대한 부분은 약간은 반발심에서 나온 건데...

엄마는 충청도 시골에서 자랐다. 꼭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설거지를 할 때 세제를 거의 쓰지 않고 대충 닦는다. (가끔은 못쓰게 된 밀가루를 모았다가 그걸로 닦는다.) 그러다 보니 그릇 아래쪽 바닥면엔 오래된 때가 찌들어있다. 나는 어릴 때 그게 참 싫었다.

화장실 갈 때는 불을 켜지 않는다. 그리곤 살짝 문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가끔씩 벌컥 문을 열고 엄마가 앉아 있는 걸 보면 벌컥 화를 냈다. 음식물이나 재료 사다 놓은 것이 좀 상해도 거의 버리지 않는다. 어떻게든 잘 손질해서 먹곤한다. 또 오래동안 먹지 않는 음식들은 어느날 잡탕찌게가 되어 상에 올라온다. 그럴 때 우리들의 반응은 짜증과 빈정이었다.

어린 시절 그런 게 왜 그리 궁상맞아 보이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는지... 나는 반대급부적으로 뽀득뽀득 닦는 습관이 생겼고, 나중에 결혼해서 살림을 해도 반짝반짝 광내면서 살거라고 결심했었다.


결혼하고 11년을 같이 산 우리 시어머니는 내가 원했던 ‘아주 깔끔한 살림살이’를 유지하려 애쓰시는 분이다. 그런데 같이 살다보니 어려운 살림에 조금만 시들거나 지저분하면 식재료나 물건을 가차없이 버리는 모습에 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일주일에 서너번씩 빨래를 돌리고 지저분한 거는 딱 질색이신 우리 어머니를 보면서는 어쩌면 저렇게 어려운 살림에도 저렇게 사실까... 하는 당혹감이었다.

그러다 보니 뭐가 더 좋은 건지 헷갈리곤 했다. 어떤 때는 화가 나다가 또 우리 친정엄마를 생각하면 나도 그런 생활을 원하는 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요즘 나는 웬만하면 세제를 쓰지 않는다. 아주 기름기가 많은 그릇을 닦을 때도 친환경 세제를 조금만 쓰려고 노력한다. 또 집에서 낮에 화장실을 갈 때는 불을 켜지 않고 들어간다. 식재료도 아주 조금만 사서 절대 남기거나 버리지 않도록 한다. 절대로 아무리 싸도 집에 있는 물건은 사지 않는다. 즉, 쟁여놓지 않는다. 뭐 어찌보면 버는 게 별로 없으니 쓰는 것도 적게 쓰는 건 당연한 일인 것도 같고, 집도 좁으니 뭘 쌓아놓을 공간도 없는 게 당연한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청결은 이데올로기다. TV 상품광고에는 끊임없이 청결한 삶이 더 가치있고 좋은 생활이라고 강조한다. 비데, 세탁기, 냉장고, 아파트, 청소기... 온갖 가전제품과 생활용품,그리고 집까지도 청결 이데올로기로 강요한다. 지저분한 삶은 비인간적이고, 덜 문명적이고, 또 가난을 상징한다.

물론 어느 정도 청결하여 위생적인 생활은 인간의 건강을 지켜주기도 하니까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놈의 이데올로기는 상품 판매를 강요한다. 그런 상품을 갖지 못하고 또 청결하지 못한 삶은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것처럼 조장한다.

이왕이면 좋은 향기가 나고 깔끔하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건 자연스러운 거겠지만, 너무 깔끔한 거, 향기로운 거 좋아하지 마시라는 말씀. 누구에게나 자기와 다른 냄새가 나고, 외국인들도 다 냄새가 달라 우리가 생각할 땐 비위가 상할 수도 있겠으나, 그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거고, 지저분해 보이는 자기 문화도 문화이니. 자칫하면 타인을 배타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 가지로 모든 것을 다 재단하거나 싸잡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서 나는 되도록 나름대로 나 자신에게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고 나니 엄마의 그간의 모습이 이해도 되고 또 삶의 지혜라는 생각도 든다.  어쩔 수 없이 난 엄마의 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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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상 콘서트 소식

서기상... 내가 그를 안건 90년 봄 민예총 주최로 열린 "자, 우리 손을 잡자" 공연의 뒷풀이였다.

그 당시 나는 삶의 노래 예울림 가수로 공연무대에 서고, 지방 순회공연을 같이 다니곤 했다.

물론 단체 내에서 기획을 담당했기 때문에 종종 노래를 하면서도 공연기획단 활동도 했다.

출연진도 많고, 기획단도 많고, 관계자들도 많은 공연인지라 뒷풀이를 할라지면 5,60명정도가 모이고,

지방 순회를 하게 되면 여관을 거의 통채로 빌려 방방마다 흩어져 술자리가 벌어져

이방저방 넘나들며 이사람, 저사람과 격없이 술을 먹곤 했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2년 정도 된 22살의 앳되보이는 친구가 뒷풀이자리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참으로 우렁차고 고음도 잘 올라가길래 뭐 하는 친구인지 궁금했다.

그냥 아는 형 부탁으로 공연기획을 도와준 거란다.

특별히 자신의 진로나 운동에 대해 입장이 서있지는 않았지만 

성격도 싹싹하고 누나, 형, 하며 잘도 좆아 다녔기에 귀여운 후배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그 해 가을 쯤인가... 기상이는 예울림 사무실에 찾아와 가수로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때 대표였던  안종호 선배가 그럼 다음날 부터 나오라고 했다.

(그 땐 뭐 오디션이니 하는 절차가 불분명했고, 별 의미가 없었다.)

다음날... 전날 공연이 늦게 끝나 다들 뒷풀이까지 하고는 점심 넘어 출근을 했더니

기상이가 혼자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리 일찍 나왔냐고 했더니 종호형이 앞으로 신입회원이니 10시에 출근하라 했단다.

헐~~~

이렇게 기상이는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운동을 조직에서 체계적으로 하거나 학습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가 지닌 타고난 가창력으로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기 시작했고,

또 그의 타고난과 성실함은 현장을 뛰며 많은 것을 몸으로 체득하게 하면서 

자신의 취약점을 스스로 극복하게 해주었다.

꽃다지로 통합을 하고 남자가수들이 모두 생계문제로 그만두었을 때

여자가수 5명과 같이 남성 혼자로 공연을 다니면서 웬만한 노래는 다 소화를 해냈다.

물론 변변한 솔로곡 하나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조직에서 시키면

무엇이든 일순위로 놓고 성실하게 하는 기상이는 어찌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대견하기도 한 친구였다.

그렇게 학교 때 노래운동을 한것도, 민중가요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들어와

산전수전 다겪은 그는 그 당시에 활동했던 많은 가수들이 떠나갔음에도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꽃다지 출신의 솔로로는 공식적으로 첫 발을 내딛은 탓에 우여곡절도 많았다.

솔로로 활동을 하면서 참 많은 어려움을 겪고, 또 많이 외로울테지만

그래도 알아서 자기 처신도 하고 주변인들을 스스로 조직해 밴드도 꾸려나가고 있다.

툭하면 전화해서 별것아닌 것들을 물어본다.

쉬운 문제라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하고 물어볼 줄 아는 친구다.

이번 공연은 아마도 기상이가 하는 솔로 공연으로 세번째가 되는 것 같다.

늘 이 시대 아픔을 노래로 표현하며 노동현장과 일상의 곳곳에서 함께 하는 활동이 계속되길...

축하하며... 많은 이들이 함께 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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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노동자투쟁 20주년 울산창작뮤지컬

노동자들이 직접 창작 뮤지컬을 제작해서 무대에 올렸다.

당연 배우로 출연한 이들도 노동자...

"~ 하여도"  라는 제목으로 울산의 노동자 문화패들이 만든 이 뮤지컬은

지난 토욜 울산 동천체육관에서 87년 노동자대투쟁 20주년 행사의 마지막 행사로 이루어졌다.

 

"~하여도 ~하여도 ~그래서 그렇다 하여도, 나는 그렇게 못한다.

같이 싸우는 사람 놔두고 나 혼자 몸빼는 짓 못한다.

남의 조합 사정 자기 일처럼 챙겨주고 함게 싸우는 사람들 봐서라도 나는 그렇게 못한다.

내 손으로 밥이라도 챙겨 먹여야재." - 주제곡 <하여도> 중 (우창수 글,곡)

 

 

인천에 이어 울산에서 노동자 투쟁 20주년 노동문화제를 열었다.

지난 번 이야기했듯 노동문화제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인천과 울산.

게다가 창작 뮤지컬을 올린다니... 당근 가봐야쥐... 했고

또 대부분의 문화활동가들이 내려갈거라 생각했다.

근데... 참, 미리 미리 사람들을 채근하고 챙겼어야 하나?

막상 닥치니 갈 수 있는 사람이 없단다. 헐?!!

토욜 당일이 되서야 부랴부랴 갈사람 다시 확인하니 영석이 뿐.

둘이 기차표를 어렵사리 예매하고 빗속을 뚫고 가니 공연은 이미 시작했다.

체육관 가설 무대에 조명을 받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엥? 김형균동지? 박종진 동지? 김삼곤 동지? 아니 저사람은 김해정 동지? 어라? 범헌이네?

환한 웃음으로 식판을 들고 노래하며 춤을 추는 저들이 정녕 내가 아는 그들인가?

재밌었다.  그 밝은 모습이, 그 신나하는 모습이...

물론 내용은 즐겁고 유쾌하기만 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치만 무대에 선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 난 무척 즐거웠다.

연습도 참 많이 하고 공도 참 많이 들였다 싶다. 연기가 예상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용역업체가 운영하는 대공장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통고된 절망.

이들은 지하식당에서 농성에 들어가고 이렇게 고립된 듯 보였던 그들의 싸움이

20년 전 노조결성에 참여하고 또, 20년 동안 상처받고 외로웠던 이들이 연대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자 한다.

 

우창수의 주제가와 좋은친구들 경아가 만든 춤곡과 울산의 문화활동가들의 밥과 노가다,

극단 새벽의 이성민 선생님과 새벽 단원들의 헌신적인 노력들이 보태지고

사전 제작자들 200여명과 후원 단체들의 지원으로 성공적(?)으로 공연은 끝났다.

어렵게 시간을 만들어가며 연습하고 갈고 닦은 40대의 문화패들이

대사와 춤과 노래를 진지하게 몰입해서 연기했다.

몸도 굳었지만 연습하면서 감정이 메말라있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도 놀랐다는 그들.

그렇지만 할 수 있었다는 거...

 

노동자 문화패가 창작공연을 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대개는 집체극 형식으로 매체별 문화패들이

각각의 파트를 맡아 결합시켜가는 것이었다면

이번 창작 뮤지컬은 노래패들이 연기와 춤을 다 소화해 낸 뮤지컬을 제대로 했다는 점에서

아마 노동자 문화운동 사상 최초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

또 기획부터 창작, 연기와 스텝 모두를 이들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무 아까와서 서울이나 인천에서 이 공연을 받아서 할 수 있다면 또 해보고 싶다는...

인천공연과 서로 교류했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그건 나의 마음에서 자신이 없었던 거 아닐까?

그까짓 돈 몇 푼 더든다고... 아니... 과연 사람들이 이런 공연에 와줄까?

하는 소심함과 부담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 제작자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220여명의 개인들이 자신의 전화번호와 메시지를 적어주었다는 건 어쩌면 모두을 오래전부터 목말라 있었던 건 아닐까?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일상으로부터 혁명을 이루어낸 이들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더 찾아 발굴하고 일상의 혁명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움츠렸던 내 마음을 들여다 본다.

울산에도 얼마나 오랜만에 간건지... 뒷풀이 자리에 온 동지들 중 반 정도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울산 동지들이 왜 이렇게 안왔냐고 했을 때 난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요' 라고 했지만

내 스스로가 안 움직이고, 안 돌아다닌 걸 인정해야 했다.

인천 문화제를 하고, 또 울산 문화제를 다녀오고 나서 이제 정말 나 자신을 추스려야 함을 깨달았다.

남의 탓 하지말고, 내가 그냥 움직이면 되는 거라는 걸.

한 선배님과 늦게 까지 이야기하고 다음날도 이야기 하면서 많은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고

또 많은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아~~ 난,  정말 자~~알 살고 싶다.  청명한 가을하늘만큼 내 맘이 맑아졌다.  난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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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노동자투쟁 20주년 인천공연

인천에서 해마다 열리는 인천노동문화제.

노동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여는 지역은 아마 인천하고 울산 밖에 남지 않았을거다.

88년 연대 노천에서 열렸던 노동자 대회,

그 88년부터 지역별로 노동자 대회에 앞서 가을 문화제를 열었었다.

물론 87년에도 조그맣게 자체 행사를 한 곳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물론 서울이 주 활동 무대였으니까 서노협 가을 문화제를 참여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곤 인천 해방가요제 때 심사를 봤던 기억도 있고...

꽃다지 활동을 하면서 지노협 문화제를 여기 저기 갔었다.

 

그 당시의 노동자 대회의 전야제는 각 지역의 노동자 문화패들의 경연대회 방식으로 진행되었었다.

지금처럼 경품걸고, 뭐 요란하게 하지는 않지만 그저 단결상, 투쟁상... 뭐 이런 식으로

지역에서 1년동안 투쟁의 현장에서 자신의 일상속에서 함께 쌓아온 기량을 모아

그 시기의 이슈나 지역 사안을 주제로 해서 다양한 양식의 공연들이 올라왔다.

요즘은 밤 11시만 되면 서울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느라 대오가 빠지기 시작하니까

12시전엔 끝내야 한다고 하지만

그땐 그저 어차피 밤새고 담날 행진하고 노동자 대회에 참석하니까

새벽 2시고, 3시고 이어지곤 했다.

노동자 대회 전야제에 서기 위해 지역문화제에서 예선을 거치기도 했었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지역별 문화제가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 했다.

물론 문화패도 많이 줄었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대회 전야제 때 이제 더이상의 발전된 양식은 등장하지 않았다.

노래는 대부분 단결투쟁가나 가자 노동해방 등의 대합창 편성이 올라왔고,

그런 노래가 아닌 경우에는 풍물과 연극, 율동, 깃발춤 등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집체극 양식을 선호했다.

어느 순간 대부분 지역에서 만든 공연은 비슷비슷해서 굳이 우열을 가리는 것이 불필요해졌다.

96년을 마지막으로 경연대회 방식은 정리를 했다.

그게 노동자문화의 창작 활성화에 기여를 했는지 악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하게 평가되고 분석되지는 못했다.

 

2000년 즈음... 어쨌든 지역에서 문화제를 하는 곳은 3, 4군데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 노동문화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거는 곳은 인천과 울산 뿐이다.

인천 노동문화제는 그 즈음 부터 민주노총의 지역본부 행사가 아닌

독자적인 조직위원회를 꾸려서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계기와 과정은 무지무지 머리아프고 맘도 아프다...(나중에 정리할 수 있을까나?)

 

어쨌든 올해 87년 노동자 대투쟁 20주년을 맞아서

울산과 인천에서 노동문화제를 의미있게 진행한다.

인천은 지난 주에 마쳤고... 난 조직위원이기도 하지만 사업단에 참여해서 같이 행사를 준비했다.

총 20회의 기간동안 해방가요제 초청공연을 하기도 하고,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행사 연출로 참여하기도 하고 하면서 인천 노동문화제와의 인연은 너무나 질기고 깊기에.

이번 행사에는 연출로 참여하기보다는 기획단으로 참여해서 같이 행사 전반을 논의하고

함께 만들어가고자 했다.

나의 역할은 역시 기획공연 이었고, 87년 노동자 투쟁의 정신을 담아내는 공연을 만들자고 했었다.

고민은... 무엇이 정신이냐는 거였다.

과연 87년 노동자 투쟁 대오에 함께 한 노동자들은 각자 무슨 생각을 했고,

또 무엇을 원했었나 하는 질문으로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다운 삶... 진정 원한 건 인간다운 삶이었다.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강한 욕망과 의지.주체적인 움직임.

그것이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들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렇게 바랬던 인간다운 삶이 지금의 삶일까?

내가, 우리가 원했던 인간다운 삶이라는 게 바로 이런 삶일까?

인간다운 삶의 가치는 더 많이 벌어서 더 풍족하게 소비하고, 점점 더 편안한 삶을 사는

그런 삶은 분명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기획공연에 이런 고민들이 잘 드러났는지는 모르겠다. (아직 평가를 못했다.)

 

지난 주 일요일에 사흘간의 노동문화제 행사와 전시,

그리고 주요기간 외에 이루어진 토론회나 체게바라 공연 등이 모두 끝났다.

처음에 고민은 인천과 서울, 울산을 연결하는 노동문화 활동가들의 문제의식들을 만들어가자고 했는데

결국은 서울은 취소되고 울산과 인천도 각자 자신들이 준비한 사업에만 충실하기로 하였다.

이제 이번 주말 울산 노동문화제를 참가하려한다.

그리곤 평가를 하고, 또 자신의 일상에서 실천들을 조직해야겠지.

남은 산적한 문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해결해 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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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정신, 누가 또 가져가려나

스무살, 어린 날의 상처였다고 지금은 머리로도, 또 어느정도 감정으로도 정리가 된 기억들이고

어느 덧, 20년이 지났다.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어마어마한 힘을 느꼈고, 그처럼 벅차고 또 신났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세상이 곧 바뀔거라 믿었다.  그 시기에 대학을 다녔고, 또 운동을 하고 그래서 지금도 내가 사는 방식에 대해 어떤 의심도 해본 적이 없다.

정작 그 시대를 움직인 사람들은 민중이고, 노동자인데 마치 몇몇 이름있고 잘나가는 사람들이 다 만든 것처럼 이야기되는 요즘이다.

군정시대가 끝나면서 우르르 정치권에 줄을 서고, 그 언저리에서 뭔가 하나씩 꿰차려고 하는 자들이 80년대를 움직이고 또 민중을 조직한 것처럼 보여지는 기가막힌 세상이라는 거다.

 

나는 그들을 믿지 않는다.

언더팀에 있을 때 친했고, 또 나한테 많은 이야기를 해준 훌륭하고도 날리는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김영삼 정권 때 청와대 비서실에 있었고,

96년 내가 다시 구속되어 구치소에 있다가 나왔을 때 공연장에 찾아와

나보고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사냐고 했다.  그냥 조용히 고생했다...하고 갈 것이지...

 

정신 못차린 사람들 내 주변엔 무지하게 많다. 그 당시 활동했던 사람들이 모두 정치권에서 성공하고 이제는 세상이 바뀐 것 같고, 또 운동도 바뀌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 말고 학생운동 때도 이름 없이 밑에서 활동하고 현장에 들어가

20년동안 꾸준히 자신의 성공이 아니라 노동자 삶의 변화시키고 세상을 제대로 바꾸기 위해 싸워온

멋진 선배들이 내 주변엔 훨씬 많다.

그런 선배들, 활동가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두 자기들 세대에서 끝난 것처럼 떠들지 말아주길...

 

정신차린 자들이 정권에 붙어 6월 항쟁이 자신들의 성과인 양 지들끼리 축배를 드는 꼴을,

정신 못차린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으로 바라본다.

그들만의 잔치에 끼고 싶지도 않다는 거지.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저 깊은 어둠 밑바닥에 묻혀있던 오래된 상처를 끄집어 내는 건

내 기억 속의 6월 항쟁이 그냥 저렇게 미화되고 박제화되는 게 싫어서였던 것도 있다.

물론, 20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생각도 들었지만

 

96년에도 구속되었었기 때문에 나는 사실 작년 2006년에 못내 불안했다.

10년 주기로 한 번씩 들어갔다 나오는 징크스가 있는 거 아닐까 하고...

꿈도 많이 꾸었다. 경찰한테 쫒기는... 도망가도 찾아내고 다시 탈출해서 도망가면 또 바로 뒤따라 오고 

계속해서 내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은 불안감에 쫒기며 뛰고 뛰어도 꿈이라 발이 내맘대로 안 움직이는...

앞으로도 가끔씩 악몽을 꾸겠지만  

그 상처도 나를 만들어 온 과정이라는 걸 조용히 생각하면서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에게 추모의 마음을,

그리고 용기있는 시민, 노동자들에게 연대의 마음을 보내며

그냥 나는 내 일상을 고민하며 6월을 기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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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에 대한 나의 기억 (3)

 하루 종일 잤다. 집이라는 게 꿈같았다. 저녁에 막내가 방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사실은...” 경찰들이 찾아와서 집을 막 뒤지고 했다고... 자기 방도 들어왔었다고...자기가 화를 냈다고, 왜 그러냐고... 하지만 정말 겁났었단다. 침대 밑에 있는 자료들을 들킬까봐... 그 사람들 웃긴다고 했다. 언니 책꽃이에서 책을 다 집어갔는데, 난쏘공도 가져가더라고, 그 책은 자기네 반 학급문고에도 있는 책인데...

밤에 무서워서 아빠한테 이야기를 했단다. 아빠가 그 자료를 꺼내서 뒤적거리더니 전부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 보일러통에 넣어 모두 불살랐단다.

기가 막혔다. 몇 년간 써온 일기책들도 전부 있었는데... 하지만 동생이나 아빠를 탓할 순 없었다. 혼자 몰래 지하실에서 가슴 졸이며 책들을 태웠을 아빠의 마음을 생각하곤 아무소리 안했다.


 하루를 쉬고 학교에 갔다. 이미 소문은 나있었다. 몇몇 선배가 물었다. 어디까지 불었는지, 무슨 낌새는 없는지.. 그저 나는 알리대로 말했고, 별 일 없을 거라고 했다. 당분간은 사람들 만나지 말라고 했다. 써클 후배들하고 술 한잔 간단히 하고 집에 왔다. 집에 오니 그 형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오후에 만나잔다. 명동 로얄호텔 커피숍에서...

“왜요?” “학교 생활 잘 하나 당분간 만나서 확인해야 하니까... 낼 나와” “네”

학교에 갔다가 그 이야기를 하고 명동으로 갔다. 그 자는 학교 동향을 물었다. 그 선배 봤냐고... 안 나타난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란다. 알았다고 했다. 그는 사우나 갔다 들어간다고 나보고 먼저 가란다. 그러기를 한 달 정도... 불쑥 불쑥 전화를 집으로 걸어 만나자고 하거나 내가 없으면 엄마나 아빠한테 다음날 약속을 전하기도 했다. 만나서는 별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가끔은 술한잔 하자고도 했고, 이상한 술집같은 데 들어가자고도 했다. 나는 번번히 순진한 척 이런 델 왜 가냐고, 도망치듯 헤어지곤 했다. 

집에서는 서로 눈치를 봤다. 학교에선 사람들을 만나기가 겁났고, 또 힘들었다. 모든 선이 끊어졌다. 무슨 수를 써야 했다.

어느 날 작정을 하고 아빠한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놈 때문에 못살겠다고... 학교가도 친구들이 형사따라붙으니까 이상하게 보고, 또 만나면 자꾸만 이상한 데 데려가려고 한다고... 아빠가 전화오면 이야기 좀 하라고, 나 이제 그런 거 안하니까 그만 만나라고 하라고. 아빠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음 날 또 나오라고 해서 이번엔 남영동 쪽에서 만났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학교 생활 열심히 하고, 이런 짓은 절대 하지말라고... 어쩌구... 하더니 마지막인데 술 한 잔 하고 헤어지 잔다. 아빠가 전화를 하셨나 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조금 걸어나오니 술집이 즐비하다. 숙대 입구니까... 아무데나 들어가자고 했더니 이런 분위기는 싫고 어쩌고 하면서 자꾸만 걸어간다. 널린 게 호프집인데 뭘 찾는지... 용산 쪽으로 걸어가다가는 술집들은 사람도 많고 번잡하니 여관방을 잡아서 조용히 술을 한 잔 하잔다. 기가 막혔다. 미쳤냐고... 그런 델 왜가냐고. 벌컥 화를 냈다. 내가 그 자에게 처음으로 화를 낸 것 같다.

그게 아니고... 하면서 길에서 실갱이를 벌이다가 화가 나서 그냥 가겠다고 인사하고 돌아서서 뛰어왔다. 따라오면 어쩌지? 이판 사판이지 뭐...하면서 뛰었다.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그 사건은 끝이 났다. 그런데 학교에서 다시 선을 연결해 뭘 하기가 힘들었다. 한창 사투가 치열하게 벌어질 때라 문건을 구해 읽어야 하는데 힘들었다. 가끔씩 어렵게 선배에게 문건을 몇 개 받아서 집으로 가져가 침대 밑에 숨겨놓고 읽었다.

어느 날 밤 아빠가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내 방 문을 열었다. 난 읽고 있던 자료를 이불 속에 넣었다. 아빠는 화를 냈다. 이런 짓을 또 하다니.. 네가 정신을 못차렸구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결국은 또 싸우고 말았다. 아빠는 돌아서며 “차라리 나보고 죽어 없어지라고 해라.” 하셨다.

혼란스럽고 괴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학교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집에서도 늘 서로 눈치만 보고... 동기들 몇 명과 가끔씩 술을 한 잔 하며 학내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갔다. 동기와 술 한잔 하고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집으로 들어왔다. 그날따라 친구가 데려다 준다해서 버스 정류장에서 같이 걸어 올라가고 있는데, 저 앞에 막내가 뭔가를 가슴에 끌어안고 내려오고 있었다. “야, 어디가?” 하고 내가 불렀다. 막내는 날 보자마자 엉엉 울었다. “왜 이제와? 어디갔었어? 아빠 돌아가셨어” “뭔 소리하는거야, 너 왜 그래?” “아빠가 아까 돌아가셨단말야!!!”

친구한테 인사도 안하고 나는 동생과 택시를 잡아탔다. 서안복음병원 영안실...

어이가 없었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다. 엄마는 들어서는 날 붙잡고는 “에고,에고... 이 박복한 것들...” 하고는 오열을 토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멍 할 뿐.

조금 있다가 작은아빠가 들어와 아빠의 유서를 내게 주었다.


장례를 치르고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빚이 많아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다. 이사를 하던 날 큰 고모가 오셨다 가시며 나를 불렀다. 내 손을 꼭 잡고는

“느이 아빠가 네 걱정을 젤 많이 했다. 너 거기 붙잡혀 갔을 때 네 아빠, 회사일 다 팽개치고 너 찾는다고 여기저기 안알아보고 다닌 데가 없다. 니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때 느이 아빠가 거기 병원 공사 시작할 때 잖니? 그 중요한 일을 다 팽개치고 다녔으니 회사 일이 문제가 생겨도 생겼지. 그것 때문에 밤잠을 못잤다. 오죽하면 그 자존심 강한 니 아빠가 고모부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겠니. 그런데 고모부도 안좋을 때라서, 진작 이야기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결국...훌쩍, 아뭏튼 잘 살아야 한다. 네가 집안 잘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

회사가 부도나기 하루 전 아빠는 바로 아래 동생과 엄마에게 시장을 보고 오라고 했다. 날도 많이 덥고 하니 입맛도는 맛난 것 좀 사오라고... 애들 좋아하는 것 좀 많이 사오라고.

엄마와 동생은 시장을 보러 갔고, 그날따라 통닭을 먹고 싶다는 동생의 말에 닭 튀기는 동안 이것 저것 구경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아무리 벨을 누르고 두들겨도 문을 열어주질 않았단다. 잠이 깊이 드셨나 싶어 옆 집에 이야기를 하고는 들어가 담을 타넘어 동생이 대문을 열었단다. 현관에 들어서 안방으로 가도 아빠는 안계셨고, 이방 저방 열어봐도 안계셨다. 구두도 그대로 있으니 슬리퍼 신고 요 앞에 담배 사러 나가셨다 싶어, 동생이 화장실에 갔다. 문을 열자마자 동생은 비명을 지르고 자지러졌다. 아빠는 화장실에서 목을 매셨다.

유서는 짧았다. ‘미안하구나, 못난 아빠를 용서해라. 엄마랑 부디 다들 행복해라’


87년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공개되면서 학교 안팎이 술렁거렸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탁! 하고 책상을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했다. 숨이 컥 막혔다.

아빠의 죽음 이후 난 학교에 복학을 했고, 반 년간 조직생활을 하지 않고(못하고) 살았었다.  그런데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접하고 전기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나는 살아남았고, 박종철 열사는 돌아가셨다.

나는 살아있고, 아빠는 돌아가셨다.

잊고 있던, 아니 잊을 수 없었던, 그러나 깊이 묻어버리고 싶었던 기억들이 치솟아 올랐다.

살아있는 게 너무 비겁하고, 미안했고, 또 부끄러웠다. 죄책감도 들었다.

술을 왕창먹고 대성통곡을 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그 동안 틀어막아놓았던 소리를 터뜨렸다.


나 때문이야, 내가 아빠를 죽였어, 아빠가 그날 '차라리 아빠보고 죽으라고 해라' 하고 돌아설 때, 아니야, 아빠, 나 사실 아빠 좋아해, 사랑해... 근데 아빠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라고 가서 아빠를 안고 이야기를 했더라면,

아니, 세상 모든 고민 혼자 떠 안은 듯 잘난 척, 밖으로만 돌고 심각한 척 하지 말고, 한 마디라도 같이 나눴더라면,

아니, 그날... 내가 술 먹지 말고 그냥 집에 일찍 들어만 갔더라면,

아니야... 내가 그 때 죽었어야 해. 물 고문 받다가 콱 죽어버렸어야 해. 비겁하게 살고 싶어 울며불며 매달리지 말고 그냥 버티다 죽었어야 해.

그러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지도 모르잖아.

난 원래 죽고 싶어했었어. 늘 죽고 싶다고 해놓고 고작 그 정도도 못견디고 살겠다고 비겁하게, 살려 달라고 구차하게...

내가 죽었어야 해. 내가 죽었어야 한다구...


술집 바닥을 데굴 데굴 구르고 발버둥을 치며 울었다. 그리곤 정신을 잃었는지, 필름이 끊겼는지...

나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 전에 학생운동 안에서 조직 선을 맡았던 언더 팀 선배들은 대부분 구속되었다. 수소문 끝에 써클 선배가 소개를 해주었다. 문화운동단체의 언더 조직을 만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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