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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밤나무

1.

 

기말고사가 끝났다.

정상적으로는 오늘부터 방학이어야 하지만, 보충수업이 있기 때문에 담주 수요일까진 연수원에 나가야 된다.

그래도 뭐 방학인 셈 치자...

 

 

2.

 

기말고사를 준비하면서 도서관 다니는 길을 바꿔봤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덜 만나는 길을 고를까? 하는 고민에서 선택한 길인데,

다니다 보니 너무 좋다.

다름 아닌 철로를 따라 가는 길이다.

 

이제는 여객열차가 다니지 않고, 역사도 폐쇠된 원릉역/ 나는 이번 기말고사를 준비하면서 원릉역을 지나 기차길을 따라 도서관을 다녔다.

 

 

3.

 

우리 동네 고양시 원당은 지금은 새도시 고양시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이기도 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현대적 의미의 새도시로써 최초에 가깝게 설계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원당가는 길'로 유명한 허수경 시인이 살았던 동네이기도 하다.

 

기차는 간다.

    - 허수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닮아 있었구나

 

허수경의 시에서 나오는 밤꽃의 주인공은 이 나무인 것 같다. 밤나무만 보면 대단히 큰 거목인데, 고층 아파트에 끼어 커보이지 않는다.

 

 

4.

 

원릉역 앞에는 커다란 밤나무가 있다.

나는 이 나무를 참 좋아한다.

 

산뜻한 봄날씨처럼 달콤한 향내가 진동하던 아카시아꽃에 비해

초여름의 후텁지근한 날씨처럼 결코 좋다고만 할 수 없는 비릿한 밤꽃 냄새가 진동을 하지만,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한, 내가 좋아하는 감성을 지닌 허수경 시인도 이 나무와 밤꽃과 기차와 철로를 보면서 많은 사색을 했을 거라는 생각에 나도 많은 애착이 간다.

 

그래서 이 나무를 오랫동안 보존했으면 하고,

나아가 이 나무에게 '허수경 밤나무'라는 이름도 붙여주고 싶다.

 

좀 더 예산을 쓴다면 비록 폐역이 됐지만, 원릉역도 '허수경 역'으로 바꿔 조그마한 기념관으로 꾸몄으면 한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못 할 것도 없는데, 고정관념에 가득 찬 기성 정치인들에게는 참 잘 안 되는 게 이런 일 같다.

하긴 산오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소진로'도 시에서는 공식적인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원릉역 플랫폼/ 여객기차가 끊긴지 오래되어 풀랫폼은 여기저기 깨져있고, 기찻길엔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잔뜩이다.

 

철로변 땅들은 이런 짜투리 땅을 포함해 모두 알뜰하게 개간되어 있다. 역시 자연보다 인간이 더 경이롭기도 하다.

 

허수경의 시 '원당가는 길'에 나오는 '757 버스' 종점 터/ 얼마 전까진 텅빈 빈터였는데, 지금은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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