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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9/26
    밤코스모스(4)
    풀소리
  2. 2006/09/16
    귓병(5)
    풀소리
  3. 2006/09/14
    버스노동자와 죽음...(2)
    풀소리

밤코스모스

지난 주 목요일이었던가. 선배로부터 모처럼 전화가 왔다. 시간 되면 일 끝나고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모처럼 선배가 온다기에 최근에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배와도 연락을 했다. 여러모로 가늠한 끝에 여의도에서 술자리를 잡았고, 선배와 후배 그리고 나, 또 다른 멤버 2명, 이렇게 모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밤길에서 본 코스모스

 

옛날 정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선배와 후배, 그리고 온순하고 사려깊은 성격들... 술자리의 분위기는 오랜만에 너무나 좋았다.

 

어디 1차에서 그칠 우리들인가! 2차는 인사동 천강으로!

천강 주인은 선배가 아는, 아주 친한 후배다. (친한 후배라는 게 독이 되었는지 나중에 내온 '백초술'의 가격이 5만원이다. ㅠㅠ)

 

연대앞 정류장 가로등 위에 걸린 꽃화분

 

술자리를 파하고 종로에서 우리는 헤어졌고, 난 광화문까지 걸어가기 싫어 연대앞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연대 앞에서는 집앞까지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버스를 갈아타고부터 술기가 점점 퍼지면서 잠이 스르르 들었다. 깜빡하고 눈을 뜨니 집에서 두어 정거장을 지난 허허벌판을 달린다.

 

얼른 내렸다. 걸어서 15-20분이면 갈 거리지만 캄캄한 밤이라 택시라도 타고 가려고 했지만, 빈 택시도 서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선 길이 호젓하고 참 좋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고, 바람은 한없이 시원하고 상쾌하다.





밤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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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병

한 열흘쯤 됐나보다. 귀에서 진물이 흐르기 시작한 지가 말이다. 어떨 때는 ‘줄줄’이라는 의태어가 어울릴 정도로 흐르기도 했다. 병원에 가지 않는 날 보고 사람들마다 한 마디씩 하곤 했다.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왜 병을 키우냐고 말이다.


그 동안 사실 병원에 갈 시간이 없었다. 설마 병원 갈 시간이 아주 없었겠냐만, 어쨌든 바빴던 것은 사실이다. 거기다 병원가길 싫어하고, 자신의 몸(건강)에 대하여 무관심인 편인 성격이 맞물려 시간을 질질 끌었다.


오늘 지방 출장에서 돌아오는데, 귀가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일은 일요일이다. 오늘 병원에 가지 못하면 월요일까지 참아야 한다. 주 5일제 병원도 많은데 어떻한담.


일단 인터넷 검색을 했다. 다행이 집에 가는 길에 있는 화정에 좋은 이비인후과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추천하는 의사가 있었는데, 마침 그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았다.


막상 병원을 가기로 결심하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큰 병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말이다. 돈과 시간도 문제지만 병원 가는 것, 병원 사람 만나는 게 나에겐 고역이기 때문이다.


병원 진료 의자에 쫄아서 앉아 있는데, 의사 하는 말이 고막에 구멍이 있단다. 언제 다쳤냐며, 일단 나아도 또 진물이 날 수 있단다. 고막에 구멍이 날 정도로 다쳤다면... 바로 생각나는 게 고등학교 2학년 수학시간이었다.


수학만큼은 곧잘 하는 난 그날은 웬일로 평소 잘 하지 않던 예습까지 해 갔다. 그러니 수업시간이 너무 심심했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고 해서인지 새로 산 구두 뒷금치가 책상 밑 발을 올려놓는 2개의 가로막대 사이에 끼어 잘 빠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발을 빼는데 갑자기 사악한 기운이 엄습했다. 수학선생이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다짜고짜 뺨을 때린 것이다. 그 순간 너무나 어이없고, 부끄럽고, 뒤 이어 화가 나고, 하여튼 기분이 무지 나빴는데, 문제는 고막이 너무 아프고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선생은 내가 맨 앞자리에서 앉아 있으면서도 잔 것으로 착각했는지 모르지만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다짜고짜 뺨을 때린 건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하여간 그 때 고막이 잘 못된 것 같다. 그리고 병원에 가보지도 않았고...


지지난 주 성연이가 목욕탕에 가자고 졸라 미안한 마음에 함께 갔다. 성연이는 목욕보다 물  속에 노는 걸 좋아한다. 성연이는 수경에 스크롤을 가지고 신나라 하며 목욕탕에 갔고, 그곳에는 냉탕이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은 냉탕이 있어 더 좋아라 했다. 나도 성연이를 따라 냉탕에 들어간 김에 수영을 하고 놀았는데, 그때 중학교 아이들이 물장난을 너무 심하게 해 물 파도가 갑자기 귀를 때렸고,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날인가, 다다음 날인가부터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어찌됐든 고등학교 수학선생이 저지른 만행(?)이 여전히 내 기억뿐만 아니라 몸에도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니 또 다시 화가 난다.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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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노동자와 죽음...

뻐꾸기님의 [버스운전사의 직업병은 어떻게 예방해야 하나?] 에 관련된 글.

뻐꾸기님의 버스 현장에 관한 글을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들이 넘쳐났다.

그 중에서도 죽음에 관한 것이다..

 

내가 버스노조나 버스노조 민주화를 위한 단체에서 일한 것은 1990년 1월 전노협이 출범하던 날이다. 전날에는 눈이 참 많이 왔었지...

 

벌써 16년 째다. 여러 기억들이 있지만 주변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자본에 항거한 죽음. 과로로 인한 죽음. 억눌리고 짓밟히다 주변의 관심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

 

그 중 몇 사례만 얘기하면...

 

1. 과로로 인한 죽음(1)

 

서울 B사에 근무하던 50대 노동자의 죽음이다. 그 분은 자식들이 많아 어떻게 하든 돈을 많이 벌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일을 너무 많이 했다.

 

시내버스는 주 6일 근무를 할 때에도 대당 2.44명을 고용해야 한다. 보통 1대를 2명의 기사가 오전반과 오후반을 나눠 하루 18시간을 절반씩 운행한다.

 

그런데 그분은 차 1대를 혼자서 운행했다. 우리는 반나절(9시간) 운행하는 것을 1개라고 호칭한다. 보통 월 26개가 만근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보통 월 57개 전후를 한다. 그러니까 월 30일 동안 하루도 안 쉬고 가끔씩 오전이나 오후에 한번씩 쉴 뿐이다.

 

난 이 사람을 직접 보지 못했다. 전해 들은 바로는 이 양반이 반 나절을 쉬고 일을 시작하면 얼굴이 하얀 게 아주 정상(?)적으로 보였다고 한다. 그러다 일(하루 18시간씩 꼬박)을 시작하면 하루가 다르게 얼굴이 검어졌다고 한다. 흑백 사진으로 날짜별로 찍어 늘어 놓으면 명도를 보정한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러다 얼굴이 까매질 즈음 한 나절을 쉰다고 한다. 그러고 다음에 일을 나오면 다시 얼굴이 하얘지고, 밝아지고...

 

그러다 어느날 반나절을 쉬기 위해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하다가 쓰러져 죽었다. 그분이 남긴 재산은 광명 하안동 임대아파트가 전부였다.

 

2. 과로로 인한 죽음(2)

 

90년대 후반 쯤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현장 동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료가 운전대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산재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당연히 산재를 받아야 한다. 난 제반 조치를 일러 두고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다. 정 필요하면 현장으로 달려가겠다고...

 

그러나 다음날도 연락이 없었다. 너무 궁금해 다다음날 연락을 했다. 그랬더니 하는말..

 

'마, 신경쓰지 마세요. 저도 신경쓰고 싶지 않아요.'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사실은 이랬다. 죽은 이는 40대 초반으로 몸이 건장했다고 한다. 트럭을 몰다 시내버스를 하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시내버스 일이 너무 쉽다며 1달에 40개 이상씩 무리한 근무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운행나가려고 종점에서 차에 시동을 걸고 준비하다 운전대를 잡고 죽은 것이라고 한다.

 

동료들이 시신을 병원으로 옮기고, 산재나 장례를 상의하기 위해 부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5시간 쯤 후에 나타난 부인은 몸에 딱 달라붙는 빽바지에 화장을 진하게 하고 나타났더란다.

 

알고보니 죽은이는 부인과 별거 상태였다고 한다. 운전기사들이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또는 동료 처지가 남다르지 않아서였는지 도무지 덧정이 떨어져 후속 수습을 하기 어렵웠다고 한다. 그래서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뒀다면서 40개씩 했으니 산재보상과 퇴직금이 얼마겠냐고...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그렇게 일만 하다 갔냐고... 한 마디를 했다.

 

 

3. 회사의 탄압에 의한 죽음.

 

서울 S사에 근무하고 있는 B형이 있었다. 그 양반은 풍모부터가 '양반'이었다. 서글서글하고,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참으로 좋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난 당연히 이분과 친했다. 건모형이랑 친한 것처럼...

 

그러던 96년인가 하는 어느 월요일 저녁이었다. 갑자기 연락이 왔다. 그 형이 죽었다고...

 

너무 놀라 달려가보니 오전 일을 마치고 샤워를 하다 목이 뻐근하다고 하여 쉬는 것만으로 안 될 것 같아 병원에 갔고, 그곳에서 의식을 잃어 큰 병원으로 옮기자마자 죽었다는 것이다.

 

난감했다. 죽음이 억울하기도 했지만, 산재조차 받지 못할까봐 안타까웠다. 그 형은 만근 이상을 아예 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적게 일을 했으면 했지 많이 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일요일이 지정휴일인데, 하루 쉬고 나온 다음날 죽었다니 산재라도 옳게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 형은 그 회사 노조 민주화운동의 핵심이었다. 버스 회사로서는 큰편에 속하는 그 회사로 볼 때 눈의 가시였다. 그래도 조합원들에게는 인기가 있어 회사와 어용노조의 견제 속에서도 대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해왔다.

 

회사에서 이 형에 대해 (무서워서였겠지만) 직접 탄압은 못하고, 그 형과 친한 사람들을 탄압하는 수법을 취했다. 그렇게 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은 불이익을 당했고, 이것이 그 형에게는 자신이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했다는 것이다. 내게는 자기 고통을 별로 얘기하지 않았으니 나중에 안 사실이 더 많았다.

 

죽은 다음날부터 우리는 여러명이 달라붙어 병원 의사 등을 만나 산재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운동을 하다 노무사를 하던 후배가 또 한 축을 맡았다. 그 후배 하는 말이 상식과 달리 휴일 다음날이 산재가 더 많다는 것이다. 조금은 안도가 되었다.

 

결국 산재를 받았다. 당시 돈으로 8천 5백만원 정도 받았다. 그리고 집이 있고 퇴직금이 있으니 형수가 좀 노력한다면 아이들 대학은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우리들은 조금은 안심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들려오는 소리... 그 형수가 젊은 사람을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이나마 들을 수 없게 소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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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런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그냥 여러 생각을 하면 분노도 분노지만 서럽기도 하다.

처지가 서럽고, 서러운 처지이기에 의식도 처지고, 배려도 처지고, 모든 게 처지는 게 서럽다.

노동조합을 통해 그 서러움을 풀어보고, 풀어주려 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게 힘들다.

 


천국을 가는 길을 인도하겠다는 교회가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묘사한 고흐의 그림처럼,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도, 심지어 나도 노동자의 앞길을 막고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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