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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23
    촛불집회 - 그 충격과 희망(6)
    풀소리
  2. 2008/07/21
    비가 내린다.(3)
    풀소리
  3. 2008/07/18
    봉숭아(6)
    풀소리

촛불집회 - 그 충격과 희망

풀소리님의 [퇴화하는 지능, 발달하는 촉수] 에 관련된 글.

-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기관지에 글을 싣겠다고 "촛불문화제와 노동조합운동" 라는 주제로 촛불집회에 참가하였던 후기를 써달라고 부탁을 했다. 글을 쓰다보니 2005년에 썼던 트랙백을 건 위 제목의 글이 생각났다. 세상은 엄청 변하고 있는데, 그 포스팅을 보니 우리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

 

 

촛불집회 - 그 충격과 희망

 

지금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촛불문화제, 촛불집회는 그 의미를 떠나 분석 자체도 매우 다양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 간부로써 노동조합 운동 측면에만 한정해서 촛불문화제 참가기를 쓰고자 한다.


여중생, 여고생들이 청계광장에서 촛불을 들기 시작했을 때, 그 파장이 이렇게까지 크게 번질지 예측하는 이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재개를 발표하고, 분노한 시민들이 대규모 촛불문화제를  개최하면서 촛불집회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촛불집회에 참석하면서 나뿐만이 아니고 노동조합 운동을 하는 사람들치고 당혹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 ‘당혹’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게 그것은 무엇보다도 ‘뻘쭘’함이었다. 이른바 ‘선수’ 또는 ‘꾼’으로 불리는 노동조합 간부들인데, 촛불문화제에선 낄 자리가 마땅치 않았고, 깃발 드는 것조차 어색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민들은 초기에 깃발을 거부하기도 했다.)

구호도, 노래도, 집회 방식도 어느 하나 생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몇 만 명이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모습도 감동이면서도 충격이었다. 거침없는 발언은 또 어떤가. 무질서한 것 같으면서도 생동감 있는 질서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더더욱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을 새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완강함은 또 어떠한가.


우리도 활기찬 집회를 했었던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것이 먼 옛날의 추억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지금은 형식만 남아있는 듯한 우리의 집회는 왜 이런 모습을 띄게 된 것일까.

자발성, 소외되지 않는 다수의 참여, 지적인 공유, 완강함 이런 단어들로 정리될 수 있는 촛불집회를 보면서 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노총 소속으로 진보의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이 사회의 가장 앞에서 서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촛불집회를 보면서 우리가 시민들보다 저 멀리 처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뒤처져 있는 것일까. 우리를 뒤처지게 한 동인은 무엇일까. 그동안 끊임없이 당해왔던 정부의 탄압과 보수언론의 뭇매에 주눅이 들고, 자신감을 상실해서인가. 아님 우리 내부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인가. 우리는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진전시켜나가야 할 것인가.

난 외부의 문제보다는 내부의 문제를 중시하는 편이다. 우리 자신이 떳떳하고, 당당하다면 비록 한 때 외부의 탄압에 의해 위축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내가 경험했던 80년대가 그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담 가장 큰 내부 문제는 무엇인가. 80만 조합원이라는 적지 않은, 그것도 다양한 투쟁을 경험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조직화된 조합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다 할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만나는 이들마다 해석이 다양했다. 다양한 해석 속에 내 가슴에 가장 와 닿는 말은 ‘진정성의 상실’이었다. 그래. 우리의 문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진정성의 상실’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지긋지긋한 정파의 대립. 다양성의 공존이나, 타협이 아니라, 승자독식이라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의사구조. 비전을 보이고, 설득을 하고, 포용을 하고자 하는 이성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이 돼버렸고, 단지 정파의 이익이라는 적절한 페르몬 분비와 그것을 감지할 촉수만 발달시키면 되는 구조. 우리 조직구조의 슬픈 모습이다. 그 속에서 세력을 키우고 혜택을 보는 건 ‘기회주의’와 ‘출세주의’일 뿐이고, 조직의 힘은 내부로부터 소모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번 촛불집회는 그 귀결이 어떻게 될 것인지 난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일정 성과를 내고 종료되든, 설령 성과 없이 종료된다고 하더라도 촛불집회가 남긴 영향은 우리 사회 깊숙이 파고들 것이라는 것은 분명할 것 같다.

촛불집회에서 보여주었던 자발성, 소외되지 않는 다수의 참여, 완강함. 무엇보다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활발한 상호 토론과 지적인 공유는 우리 사회 의사결정구조와 정치결정구조를 예전과 매우 다른 구조로 바꿔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노동조합운동으로 돌아오자. 그렇다면 노동조합운동은 이번 촛불집회로부터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진전시킬 수 있을까.

과연 노동조합운동은 촛불집회의 세례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난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선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은 외부의 영향이 내부로 전달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내용이 온전하게 전달되지도 않는다. 나쁜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라 구조 자체가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집회의 영향이 당장 온전하게 노동조합 내부로 미칠 것 같진 않다. 그렇게 되기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란 얘기다.


여기까진 조합원들 얘기다. 그렇담 노동조합 운동을 주도하고 상대적으로 외부와 밀접하게 소통해야 하는 임원들이나 간부들은 어떠한가.

많은 임원들과 간부들이 촛불집회의 세례를 노동조합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조합원들이 한명이라도 더 촛불집회에 참여하여 직접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려고 애쓰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렇담 희망적이란 말인가. 나는 자신할 수 없다. 어떤 조직이든 조직관성이 있는 것이고, 그 관성은 쉽게 변형되지 않는다. 민주노총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임원들과 간부들이 이번 촛불집회를 계기로 많은 반성과 각성을 하였고, 앞으로도 하겠지만, 과연 기존의 조직관성을 바꿀 수 있는 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미 촛불집회 참여와 미국 쇠고기 수송저지 및 총파업 등에서 민주노총은 이전과 획기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내부의 한숨소리도 여전하다. 많은 간부들은 떠나고 있다. 획기적인 변화는 집권세력의 자기반성과 혁신에 힘입든지, 또는 집권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대안세력의 출현으로 가능하다. 어찌됐든 지금 당장은 두 가지 방식 모두 불가능한 것 같다.

 

하지만, 촛불집회의 성과가 사회에 골고루 퍼지고, 조합원들이 그 성과에 널리 공감한다면 그 힘은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그때가 언제쯤 가능할 지는 나로선 예측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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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1.

어제는 비가 내렸다.

몇날 며칠을 내릴 것처럼

한결 같이 내렸다.

 

방안에서 무심히 빗속을 거닐면서

난 이미 비에 푹 젖어 심장에 까지 물기가 배인 것 같았다.

 

행주산성 들머리에 있는 커다란 반송

 

이미 비에 푹 젖었음에도

난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우산을 든 것은

순전히 남들의 도드라진 시선을 불편해 하는 내 소심한 성격 탓이다.

 

차창 밖 풍경은

번진 듯, 흔들리는 듯 흐릿했다.

 

알 수 없는 것...

아니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지 않은 것...

내 마음도 흐릿하고, 흔들리지만

그렇게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었다....

 

텅빈 산책길로 안개가 내려오고 있다.

 

 

2.

비오는 토요일

그러나 행주산성엔 아무도 없었다.

 

자연이란

그 자체로 무수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고,

심지어 드라마도 가지고 있다.

 

토성 위로 난 산책길/ 칡향이 싱그럽다.

 

숲은 때로 내 얘기를 대신 해주기도 하고,

나를 자신들의 얘기 속에 숨겨주기도 해준다.

 

행주산성 커다란 문을 들어섰다.

비에 젖어 더욱 검게 보이는 아스팔트길을 천천히 올랐다.

몇 걸음 더 오르니 안개가 다가왔다.

몽롱하고 편안했다.

 

숲은 깊고 서늘했다.

 

 

3.

봄꽃이 지고, 가을 단풍이 오기 전이지만

행주산성 숲은 그대로 포근하다.

 

행주산성에는 유난히 칡덩쿨이 많다.

 

넝쿨 속엔 꽃대가 소복이 올라오고 있다.

 

햋볕이 거칠 것 없는 한 여름 낯

숨을 헐떡거리며 이파리들이 축축 느러지도록 왕성한 광합성을 할 때면

칡꽃 뿐만 아니라 칡넝쿨에서도

몽롱하고 들큰한, 말 그대로 농염한 향기가 진동한다.

 

만약 8월에 2차선 산길을 간다면

에어콘을 끄고, 창문을 열고 천천히 달려보시라

어디선가 유혹적인 향기가 스쳐지나간다면

십중팔구 그것은 칡향일 것이다.

 

아직은 칡꽃이 피기엔 이르다.

그래도 칡에선 향기가 난다.

농염함 대신 푸릇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위의 나무자락을 걷어내지 못하는 사진도 내 소심한 성격을 반영하고 있구나...

 

 

4.

행주산성 토성길 위로 난 산책길은

마사토가 그대로 드러난 흙길이다.

빗물에 튕긴 모래알들이

샌들 속으로 들어와 날바닥을 걷는 느낌을 준다.

 

안개에 쌓인 숲속은

깊고 서늘하다.

큰 숨을 들이쉬고 깊이 바라보지만

이내 시선은 흐려지기만 한다.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넓고 잔잔한 한강

 

넓은 잔디밭이 나오고 온갖 기념조형물들이 나오면

그곳이 정상이고,

넓은 한강이 제법 보인다.

 

이곳에서 옆으로 난 샛길 끝에는 진강정이 있다.

천길 낭떨어지 위에 호젓이 자리잡았다.

나는 이곳에서 맥주 한캔을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무수한 유흥시설이 밀집한 산밑 마을에는 구멍가게조차 없었다.

 

행주산성에서 가장 호젓한 곳에 자리한 진강정

 

 

5.

나는 행주산성을 올랐다가

한강변으로 난 산책길을 지나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멀리멀리 가고 싶었다.

 

그러나 ...

난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안개에 잠긴 산책길...

 

달라졌기 때문도 아니다.

달라지길 바래서도 아니다.

강과 풀과 나무들이 주는 위안이 불필요해서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멈추고 싶었다...

그냥 그렇게 모든 걸 유보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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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볼품없는 블록 담장 밑에

누군가 봉숭아를 심어놨구나...

 

위태로운 한줌 흙 속에서도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구나...

 

-----

 

그대, 봉숭아 물을 들이고 싶으시다면

조금 참으시라...

 

씨앗을 맺고 남은 꽃잎으로도 충분할 것이니...

그래야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 끝에 남아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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