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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화하는 지능, 발달하는 촉수

* 이 글은 뻐꾸기님의 [당과 나] 에 관련된 글이기도 하며, 공공연맹 이근원 동지의 글 '기관지 후원회원을 탈퇴하며'라는 글에 관련된 글이기도 하다.
뻐꾸기님의 '당과 나'는 나의 글
'긴 하루였다.'를 트랙백 한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트랙백이 어떤 것인지 시험하는 글이기도 하다.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성공하여 업그레드된 블로거가 되길 희망할 뿐이다.


퇴화하는 지능, 발달하는 촉수

 

오늘 또 다시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무산되었다. 파행으로 끝난 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를 보면서, 민주노동당의 실질적 최고기관인 '중앙위원회' 회의를 보면서 이성적 토론과 설득이 사라지고, 서로의 편가름만이 판단의 유일한 근거가 되가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해하는 이는 비단 나 하나 뿐이 아닐 것이다.

 

대학시절부터 이른바 운동권이었던 나는, 그러나 운동권에 대한 좋은 추억보다 나쁜 추억이 훨씬 많다. 사상투쟁이라는 차원 높은 실천활동이 실제로는 '사상' 없이 '투쟁'만 남아 나를 비롯한 다수를 괴롭혔다.
물론 사상투쟁이 살인으로까지 간 일본 '전공투' 정도는 아니었지만, 때론 각목으로 무장(?)하고 토론에 임해야하는 사태까지는 발전하였다.
문건이나 당시 유행하던 대자보는 서로의 차이를 좁히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자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생각, 내 조직의 생각이 다른 이, 다른 조직보다 우월한가를 입증하는 강박의 공간이었고, 그런 만큼 독자와 대중이 배제된 '그들'만의 공간으로 전락해갔다.

 

나이가 들고, 소비에트가 붕괴되고, 현실 전망으로써 '사회주의'가 상상의 공간을 벗어났을 때, 우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적개심에 불탔던 '과거'를 속죄(?)라도 하듯, 또는 서로의 치부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고, 인정한다는 듯이, 무조건 감싸주고, 차이를 묻어버리고, 좋은 게 좋다는 '온정주의' 속에서 '위로'를 주고받았다.

 

매번 선거에 나와도 1% 내외의 득표에 그쳤는데,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권영길 후보가 100만표 가까이 얻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비록 4%도 안 되는 지지율이었지만 말이다.

 

2004년 4.15 총선을 앞두고 나는 의기투합한 당원들과 모여 '총선기획단' 모임을 하였다. 모두 월급쟁이들이라 겨우 1주일에 한번씩 모이는 모임이었다. 밤늦도록 토론하고, 그 와중에 뒤풀이하고, 주중에는 각자 자료를 모았다. 돌이켜 보면 힘든 일이었지만 그땐 힘든 줄 모르고 즐겁기만 했다. 모두 의욕에 차있었고, 투지에 넘쳤다. 고양시에서 1명의 후보를 내자는 게 다수 당원들의 생각이었고, 몇몇은 아예 후보를 내지 말자고 했지만, 우리는 그동안 모은 자료와 토론되고 정리된 자료를 근거로 2명의 후보(안)을 제출했고, 당원들을 설득했다.

 

전국 지구당 중 유일하게 2명의 국회의원 후보를 냈지만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은 선거를 치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후회 없는(?) 선거운동이 끝나고, 우리는 선거사무실에 대형 TV를 설치하고, 당원들이 모두 모여 함께 개표방송을 봤다.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했고, 민주노동당은 지역에서 2석, 비례대표 9석으로 11석을 예측했다.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꿈에도 그리던 '노동자 국회의원'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13.1%의 전국적인 지지를 받았다. 놀라웠다. 그리고 감격했다. 그러나 그것이 즐거워만 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불과 몇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우리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의 내용을 갖지 못한 진보정당이다. 말하자면 선언적 강령 수준을 가지고 있는 정당이다. 그렇다보니 진보정당의 내용성에 대하여 당원들이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떻게 보면 뭔가 보다 의미 있는 활동을 하자고 모인 사람들이 당원이 되고, 현 사회상황에 대한 극단적 반감이 표가 되어 민주노동당으로 쏠렸을 뿐이다.

 

그러나 13.1%는 대단한 숫자다. 난 민주노동당이 안정적 15% 지지를 받으면 기성정당들은 개헌을 시도할 것이라고 늘 얘기했었다. 일본처럼 간선제 효과가 있는 내각책임제로 말이다.
난 최소한 8년 정도 지나야 안정적 15%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 개헌을 예상하면서도 사실은 먼 훗날의 얘기일 뿐이었다.
13.1% 지지는 총선의 일시적인 효과라고 생각했다. 또 다시 한자리수로 내려갈 것이라고...
어찌되었든 13.1%라는 숫치는 감격은 할만한 것이지 이 숫자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 우려의 숫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3.1% 지지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것이지만, 반대로 민주노동당으로 보면 그 지지를, 그 지지에 의해 주어지는 정치적 지분을 감당할 준비와 자신이 있는가 라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주어졌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거인이 된 아이가 성인의 판단과 행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런 상황이랄까?

 

그러나 정치와 권력에 민감한 사람들은 13.1% 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불행(?)하게도 정확히 간파했다. 그리고는 조직적으로 당권을 장악하였다. 당원들 중 10%밖에 당의 사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 상황(평당원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겸손과 순수성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고 난 생각한다.)에서 5%의 결속은 이미 과반의 영향력을 획득한 것이었다. 더욱이 불행한 것은 그들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당권을 장악할 것이라고 판단한 당원이 소수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원하던 대한민국의 권력에 있어 노동자들의 정치적 지분은 이렇게 하여 특정 정파의 정치적 지분으로 전락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니 내부의 충돌이야 오죽하랴.

 

난 불행인지 다행인지 2004년 총선이 끝나고 바로 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첫 번째 중앙위원회의부터 삐걱거렸다. 당시는 경기도지부 지부장 선거문제로 시끄러울 때였는데, 어쨌든 격돌이 심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많은 토론을 하였고, 설득력 있는 주장은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성원확인하는 대의원>

 

그러나 중앙위원회 회수가 지나가면서 반대로 토론은 줄어갔다. 설득력 있는 간절한 호소조차 고정표의 높은 언덕을 넘지 못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마지막 중앙위원회에서는 아무리 간절한 호소를 해도 집행부의 표는 '118표'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이성은 마비되고, 지능은 쓸모 없는 것이 되었고, 순식간에 발달된 촉수로 내 정파의 목소리와 페르몬에 따라 손을 드는 거수기만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마치 페르몬을 쫓아 '길'을 찾고, '먹이'를 찾는 개미들처럼 일사분란했고, 어쩌다 방향을 잃은 자가 있지만 집단을 붕괴시키는데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었다.

 

지도부에서는 토론을 회피했고, 의도를 가졌든지, 아니면 자포자기했든지 중앙위원들은 토론을 포기한 채 표결에 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회의시간이 줄어들지 않은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진보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의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성문을 박차고 전투에 나갔다 귀환해 보니 우리 '성'에는 이미 남의 깃발이 꽂혀있는 꼴이랄까. 허전하고 허망하고 막막하다.
2005년도 중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아직 단 한 차례도 회의가 없었다. 이번 중앙위원회는 어떠려나?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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