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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1/10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
    풀소리
  2. 2008/11/06
    마늘심기(4)
    풀소리
  3. 2008/11/03
    당원 북한산행(4)
    풀소리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

 

1.

 

어떤 재수없기까지 한 시인은 얘기했지 자신을 키워온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고...

나를 키워온 것은?

적어도 8할은 '자존심'이었던 것 같다.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고 자존심을 지키고자 애써왔다.

그래서 지킨 자존심이 뭐요? 하고 묻는다면 별로 답해줄 말이 없다.

 

일반적으로 자존심이 센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 앞가림을 재수없을 정도로 잘 하니 그런 사람들에게 나를 견준다면 아마도 '웃긴 X이네' 하는 이들도 있을 거나.

암튼 이거나 저거나 나도 재수없긴 하다.

더욱이 자기애로 뭉쳐졌으니 얼마나 재수없을까...

 

근데 말이야.

나는 나를 사랑하는 거 만큼 남들도 사랑하고 싶어.

근데 받는 쪽에선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나봐...

어차피 받는 쪽의 느낌이 중요하다면 욕먹어도 싸지...

 

 

2.

 

자존심을 형편없이 잃는 일이 계속 겹쳤다.

물론 그래도 다 잃을려면 아직도 멀었겠지만, 중심추를 잃은 오뚜기처럼 중심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 상실의 속도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3.

 

매월 제출하는 과제인 독후감을 썼다.

너무 시간이 없어 매우 성의없이 쓰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기에 남들에게 보이기도 부끄럽지만, 책은 오랫만에 만나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어서 받아서 읽는 내내 즐거웠기에 그냥 올린다.

 

이 책은 일본의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의 짧은 단편 2편과 중편 2편을 묶은 것으로, 말하자면 소설집이다. 명진숙이 옮겼고, 이철수가 그림을, 신영복이 추천 및 감역을 했다. 다섯수레에서 출판했다. '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이라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감정의 조합을 간직한 한 사내의 얘기로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집은 소재부터 매우 색다르다.

야만적인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제국주의 전쟁통에 그 전쟁의 중심축 중 하나인 일본에서 살았던 한 양심의 외로움이 오롯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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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일본의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의 짧은 단편 2편과 중편 2편을 묶은 것으로, 말하자면 소설집이다

 

명진숙이 옮겼고, 이철수가 그림을, 신영복이 추천 및 감역을 했다. 다섯수레에서 출판했다.

1. 

 
.
 
 
여러 편이 묶였지만,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끝없이 묻는 것 같은 느낌이 일관한다는 측면에서는 한권이라고 얘기해도 무방할 정도다.
 
같은 느낌이 일관되게 묻어나는 것은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카지마 아츠시는 1909년에 태어나 1942년에 죽었다.
 
제국주의 전쟁이 전세계를 휩쓸던 시대를 살았던 작가다. 양심이 실종된 야만의 시대에, 더욱이 지식인들마저 대부분 야만에 동조하는 시대에 살아야만 했을 이 양심적인 작가는 주로 중국 역사상 인물을 끌어들여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세상에 내놓는다.
 
「산월기」에서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이능(李陵)」에서는 국가권력에 휘둘리면서 겪는 고뇌를 담고 있다.
「명인전」에서는 하나의 기예(技藝)에서 궁극(窮極)을 추구하고, 「제자(弟子)」에서는 우직한 신의(信義)의 궁극을 보여주고 있다.
 
 
2.
 
「산월기(山月記)」는 나중에 호랑이로 변한, 젊어서 과거에 급제한 수재 이징(李徵)의 이야기다.
 
때는 양귀비로 유명한 당나라 현종(玄宗) 시절 학식이 많고 재능이 뛰어난 이징은 남과 쉽게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인데다 자신의 실력에 비해 너무 낮은 관직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 당장 갈 곳도 없으면서 관직을 박차고 물러나 버린다.
하급관리로 남아 속물스런 윗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내기보다는 시인이 되어 후세에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은 생각처럼 쉽게 얻어지지 않았고 생활도 날로 궁핍해졌다.
몇 년 후 이징은 가난을 못 이긴 나머지 처자의 의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개를 꺾고 지방 하급관리로 봉직하게 된다.
자신의 시작(詩作) 생활도 절망했고, 자신의 동년배는 이미 높은 자리에 있고, 예전에 우습게 여겨 상대도 않던 자들은 위에서 명령을 내리니, 왕년의 수재로 이름을 날리던 이징은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모든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남을 거스르기만 하다가 급기야 더 이상 자신을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년 후 공적인 일로 여행을 떠났다 여수 강가에서 결국 발광을 하였다.
어느 날 한밤중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 길로 어둠 속으로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주변을 모두 수색해 봐도 이징은 보이지 않았다.
 
이듬해 이징의 친구였던 원참이 감찰어사(監察御使)의 칙명을 받고 영남지방으로 가는 길에 상어(지명) 땅에서 묶게 되었다.
이튿날 날도 새지 않은 이른 새벽에 출발했다.
새벽 달빛에 의지해 숲 속 길을 지나는데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풀숲에서 뛰쳐나와 원참에게 달려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획 돌려 풀숲으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인간의 목소리로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구나’ 하고 되풀이하여 중얼거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징이었다. 이때부터 이징은 자신의 사연을 친구 원참에게 들려주었다.
 
여수 강가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한없이 달리다보니 자신이 호랑이가 되어 있었고, 때로는 사람처럼 사고할 수도 말할 수도 있다가 때로는 호랑이로 돌아가는데, 사람처럼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고 했다.
이징은 자신의 시(詩) 중에 외우고 있는 30여 편을 친구에게 구술해줬다.
호랑이라는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시집이 장안 풍류인들 책상 위에 놓인 모습을 꿈꾸고 있다고도 했다.
 
원참이 보기에는 이징의 시는 매우 비범했기에 소질에서는 일류임이 틀림없지만 일류작품이 되기에는 뭔가 미묘한 모자라는 데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징은 말한다.
자신이 시로 명성을 얻으려 하면서도 스승을 찾아가려고도, 친구들과 어울려 철차탁마(切磋琢磨)에 힘을 쓰지도 않고, 속인들과 어울려 잘 지내지도 않았음을...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 존대한 : 학식, 인격 따위가 크고 높음)
 
세상과 사람들에게 차례로 등을 돌려서 수치와 분노로 점점 자신 안의 ‘겁 많은 자존심’을 먹고 자신 안의 맹수를 살찌우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고 이징은 말한다.
그 맹수가 바로 ‘존대한 수치심’이었다고...
 
겁 많은 자존심, 존대한 수치심은 무엇을 이루기엔 짧기만 한 인생을 재능을 허비하게 만드는 우리 마음속의 맹수이고, 자양분이겠지...
 
이징의 얘기는 어쩌면 제국주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드러내고파 갈등하는 나카지마 자신의 고뇌이기도 하고, 강력한 자기억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현 시기는 인간을 노골적으로 수단화한다는 측면에서 제국주의전쟁과 다름없는 야만의 세계로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다. 이징의 얘기는 또한 현 시기를 사는 또 많은 사람들의 고뇌이기도 하고, 억제해야할 거울이기도 할 것이다.
 
 
3.
 
「이능(李陵)」 한(漢)나라의 강력한 황제 무제(武帝) 시대를 이야기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나라 전설적인 장군 이광(李廣)의 손자이면서 유능한 장군인 이능, 패전하여 포로가 된 이능을 변호하다 궁형(생식기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전설적인 역사서인 사기(史記)를 저술한 사마천(司馬遷), 흉노에 인질로 잡혔다가 19년 만에 극적으로 귀환하는 소무(蘇武)라는 3명의 이야기다.
 
세상을 살다보면 봄날처럼 온화한 볕이 드는 날이 있는가 하면, 비바람 거센 폭풍우나 눈보라 몰아치는 견디기 힘든 혹한을 맞을 수도 있다.
단지 날씨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상황, 개인의 조건 등도 날씨처럼 때로 온화하기도 하고, 혹독하기도 하다.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듯하지만, 그 직접적인 혜택과 피해가 누구에게 집중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기도 한다.
이 세 사람에게 직접적 가해자이기도 한 강력한 황제 한무제(武帝)도 흉노의 선우도 어쩌면 단지 삶에서 만나는 혹독한 날씨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무리 혹독했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측면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한나라 장군 이능은 단 5천의 보병을 이끌고 강력한 흉노를 치러 원정길을 나선다. 원정길에서 흉노 선우(흉노 황제)가 거느리는 10만에 가까운 강력한 기병대와 맞서 선전을 하지만, 무기가 모두 떨어져 전멸하여 겨우 400여명만이 귀환하고, 이능은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이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한나라 궁정은 대책회의를 하고, 유일하게 사마천만이 이능을 변호한다. 사실 10만에 가까운 흉노의 강력한 대부대에 맞서 5천의 보병이 싸운다는 것은 이미 승산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더욱이 고립무원의 적진 깊숙이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능은 비록 포로가 되었지만, 빛나는 전투를 했다. 그런 그를 당연히 변호해야 함에도 일신의 안전과 처자만을 생각하는 대다수 신하들은 황제에게 아첨하여 이능을 벌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들에게는 포로가 되어 멀리 있는 이능보다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마천이 더 문제였다. 사마천에 대한 형벌은 매우 신속하게 결정되었고, 시행되었다. 결과는 궁형(宮刑)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에게는 죽음보다 더욱 비참한 형벌이었다. 결국 한나라는 이능의 가족을 늙은 어머니로부터 어린 자식들까지 모두 죽이는 보복을 한다. 이에 이능은 한나라로 향한 충성을 접고 흉노의 왕이 되어 선우의 딸과 결혼한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뒤에도 묵묵하게 사기(史記)집필에 몰두한다. 마치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이유인양 말이다. 또 한사람의 주인공이 있다. 한나라의 화친 사절로 흉노에 갔다가 부사(副使)가 흉노 내분에 관계했기 때문에 억류되었던 소무(蘇武)이다. 소무는 끝내 흉노의 항복요구를 거절했고, 자결을 하고자 시도하였다. 일체의 항복 권유를 거부한 소무는 먹 북방 바이칼 호수 주변에 버려진다. 이능은 소무와 친구사이이기도 하다. 흉노 선우는 이능에게 소무를 한 번 더 설득해볼 것을 권한다. 이렇게 해서 이능은 소무를 만난다. 그러나 이능은 소무에게 항복을 권유하지 않는다. 소무는 먼 북방에서 자신의 존재를 누구하나 아는 이 없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소무를 보면서 이능은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흉노의 계속 남은 이능과 19년 만에 귀환하여 한나라의 전설적인 영웅이 되는 소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 된 사기(史記)를 저술하였지만, 당대엔 존재감도 없었고, 사기를 쓰고 나서 다 타고 난 촛불처럼 스러져간 사마천, 결국 세 사람의 운명은 이렇게 끝이 난다. 한 인간으로써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맞이했던 세 사람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에 의미를 두고 그런 시련을 이겨나가야 할까. 특히 이능의 삶은 더욱 애처롭다. 변방의 향기 나는 풀꽃으로 묵묵히 시들어가는 소무에게 열등감을 느끼지만, 이능 또한 노모로부터 어린 자식까지 죽인 조국이지만, 끝내 마음속에서 한나라를 떠나지 못했다. 아침부터 황혼이 질 때까지 초원을 달리고 또 달리며 가슴속 뜨거운 분노와 갈등을 식혀야만 했던 그다. 피로만이 유일한 위안이 된 그의 삶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이 책은 일본의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의 짧은 단편 2편과 중편 2편을 묶은 것으로, 말하자면 소설집이다. 명진숙이 옮겼고, 이철수가 그림을, 신영복이 추천 및 감역을 했다. 다섯수레에서 출판했다. 여러 편이 묶였지만,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끝없이 묻는 것 같은 느낌이 일관한다는 측면에서는 한권이라고 얘기해도 무방할 정도다. 같은 느낌이 일관되게 묻어나는 것은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카지마 아츠시는 1909년에 태어나 1942년에 죽었다. 제국주의 전쟁이 전세계를 휩쓸던 시대를 살았던 작가다. 양심이 실종된 야만의 시대에, 더욱이 지식인들마저 대부분 야만에 동조하는 시대에 살아야만 했을 이 양심적인 작가는 주로 중국 역사상 인물을 끌어들여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세상에 내놓는다. 「산월기」에서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이능(李陵)」에서는 국가권력에 휘둘리면서 겪는 고뇌를 담고 있다. 명인전」에서는 하나의 기예(技藝)에서 궁극(窮極)을 추구하고, 「제자(弟子)」에서는 우직한 신의(信義)의 궁극을 보여주고 있다. 2. 「산월기(山月記)」는 나중에 호랑이로 변한, 젊어서 과거에 급제한 수재 이징(李徵)의 이야기다. 때는 양귀비로 유명한 당나라 현종(玄宗) 시절 학식이 많고 재능이 뛰어난 이징은 남과 쉽게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인데다 자신의 실력에 비해 너무 낮은 관직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 당장 갈 곳도 없으면서 관직을 박차고 물러나 버린다. 하급관리로 남아 속물스런 윗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내기보다는 시인이 되어 후세에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은 생각처럼 쉽게 얻어지지 않았고 생활도 날로 궁핍해졌다. 몇 년 후 이징은 가난을 못 이긴 나머지 처자의 의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개를 꺾고 지방 하급관리로 봉직하게 된다. 자신의 시작(詩作) 생활도 절망했고, 자신의 동년배는 이미 높은 자리에 있고, 예전에 우습게 여겨 상대도 않던 자들은 위에서 명령을 내리니, 왕년의 수재로 이름을 날리던 이징은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모든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남을 거스르기만 하다가 급기야 더 이상 자신을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년 후 공적인 일로 여행을 떠났다 여수 강가에서 결국 발광을 하였다. 어느 날 한밤중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 길로 어둠 속으로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주변을 모두 수색해 봐도 이징은 보이지 않았다. 이듬해 이징의 친구였던 원참이 감찰어사(監察御使)의 칙명을 받고 영남지방으로 가는 길에 상어(지명) 땅에서 묶게 되었다. 이튿날 날도 새지 않은 이른 새벽에 출발했다. 새벽 달빛에 의지해 숲 속 길을 지나는데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풀숲에서 뛰쳐나와 원참에게 달려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획 돌려 풀숲으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인간의 목소리로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구나’ 하고 되풀이하여 중얼거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징이었다. 이때부터 이징은 자신의 사연을 친구 원참에게 들려주었다. 여수 강가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한없이 달리다보니 자신이 호랑이가 되어 있었고, 때로는 사람처럼 사고할 수도 말할 수도 있다가 때로는 호랑이로 돌아가는데, 사람처럼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고 했다. 이징은 자신의 시(詩) 중에 외우고 있는 30여 편을 친구에게 구술해줬다. 호랑이라는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시집이 장안 풍류인들 책상 위에 놓인 모습을 꿈꾸고 있다고도 했다. 원참이 보기에는 이징의 시는 매우 비범했기에 소질에서는 일류임이 틀림없지만 일류작품이 되기에는 뭔가 미묘한 모자라는 데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징은 말한다. 자신이 시로 명성을 얻으려 하면서도 스승을 찾아가려고도, 친구들과 어울려 철차탁마(切磋琢磨)에 힘을 쓰지도 않고, 속인들과 어울려 잘 지내지도 않았음을...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 존대한 : 학식, 인격 따위가 크고 높음) 세상과 사람들에게 차례로 등을 돌려서 수치와 분노로 점점 자신 안의 ‘겁 많은 자존심’을 먹고 자신 안의 맹수를 살찌우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고 이징은 말한다. 그 맹수가 바로 ‘존대한 수치심’이었다고... 겁 많은 자존심, 존대한 수치심은 무엇을 이루기엔 짧기만 한 인생을 재능을 허비하게 만드는 우리 마음속의 맹수이고, 자양분이겠지... 이징의 얘기는 어쩌면 제국주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드러내고파 갈등하는 나카지마 자신의 고뇌이기도 하고, 강력한 자기억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현 시기는 인간을 노골적으로 수단화한다는 측면에서 제국주의전쟁과 다름없는 야만의 세계로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다. 이징의 얘기는 또한 현 시기를 사는 또 많은 사람들의 고뇌이기도 하고, 억제해야할 거울이기도 할 것이다. 3. 「이능(李陵)」 한(漢)나라의 강력한 황제 무제(武帝) 시대를 이야기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나라 전설적인 장군 이광(李廣)의 손자이면서 유능한 장군인 이능, 패전하여 포로가 된 이능을 변호하다 궁형(생식기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전설적인 역사서인 사기(史記)를 저술한 사마천(司馬遷), 흉노에 인질로 잡혔다가 19년 만에 극적으로 귀환하는 소무(蘇武)라는 3명의 이야기다.  세상을 살다보면 봄날처럼 온화한 볕이 드는 날이 있는가 하면, 비바람 거센 폭풍우나 눈보라 몰아치는 견디기 힘든 혹한을 맞을 수도 있다. 단지 날씨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상황, 개인의 조건 등도 날씨처럼 때로 온화하기도 하고, 혹독하기도 하다.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듯하지만, 그 직접적인 혜택과 피해가 누구에게 집중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기도 한다. 이 세 사람에게 직접적 가해자이기도 한 강력한 황제 한무제(武帝)도 흉노의 선우도 어쩌면 단지 삶에서 만나는 혹독한 날씨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무리 혹독했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측면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한나라 장군 이능은 단 5천의 보병을 이끌고 강력한 흉노를 치러 원정길을 나선다. 원정길에서 흉노 선우(흉노 황제)가 거느리는 10만에 가까운 강력한 기병대와 맞서 선전을 하지만, 무기가 모두 떨어져 전멸하여 겨우 400여명만이 귀환하고, 이능은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이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한나라 궁정은 대책회의를 하고, 유일하게 사마천만이 이능을 변호한다. 사실 10만에 가까운 흉노의 강력한 대부대에 맞서 5천의 보병이 싸운다는 것은 이미 승산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더욱이 고립무원의 적진 깊숙이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능은 비록 포로가 되었지만, 빛나는 전투를 했다. 그런 그를 당연히 변호해야 함에도 일신의 안전과 처자만을 생각하는 대다수 신하들은 황제에게 아첨하여 이능을 벌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들에게는 포로가 되어 멀리 있는 이능보다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마천이 더 문제였다. 사마천에 대한 형벌은 매우 신속하게 결정되었고, 시행되었다. 결과는 궁형(宮刑)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에게는 죽음보다 더욱 비참한 형벌이었다. 결국 한나라는 이능의 가족을 늙은 어머니로부터 어린 자식들까지 모두 죽이는 보복을 한다. 이에 이능은 한나라로 향한 충성을 접고 흉노의 왕이 되어 선우의 딸과 결혼한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뒤에도 묵묵하게 사기(史記)집필에 몰두한다. 마치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이유인양 말이다. 또 한사람의 주인공이 있다. 한나라의 화친 사절로 흉노에 갔다가 부사(副使)가 흉노 내분에 관계했기 때문에 억류되었던 소무(蘇武)이다. 소무는 끝내 흉노의 항복요구를 거절했고, 자결을 하고자 시도하였다. 일체의 항복 권유를 거부한 소무는 먹 북방 바이칼 호수 주변에 버려진다. 이능은 소무와 친구사이이기도 하다. 흉노 선우는 이능에게 소무를 한 번 더 설득해볼 것을 권한다. 이렇게 해서 이능은 소무를 만난다. 그러나 이능은 소무에게 항복을 권유하지 않는다. 소무는 먼 북방에서 자신의 존재를 누구하나 아는 이 없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소무를 보면서 이능은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흉노의 계속 남은 이능과 19년 만에 귀환하여 한나라의 전설적인 영웅이 되는 소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 된 사기(史記)를 저술하였지만, 당대엔 존재감도 없었고, 사기를 쓰고 나서 다 타고 난 촛불처럼 스러져간 사마천, 결국 세 사람의 운명은 이렇게 끝이 난다. 한 인간으로써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맞이했던 세 사람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에 의미를 두고 그런 시련을 이겨나가야 할까. 특히 이능의 삶은 더욱 애처롭다. 변방의 향기 나는 풀꽃으로 묵묵히 시들어가는 소무에게 열등감을 느끼지만, 이능 또한 노모로부터 어린 자식까지 죽인 조국이지만, 끝내 마음속에서 한나라를 떠나지 못했다. 아침부터 황혼이 질 때까지 초원을 달리고 또 달리며 가슴속 뜨거운 분노와 갈등을 식혀야만 했던 그다. 피로만이 유일한 위안이 된 그의 삶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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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심기

지난 토욜(11. 1) 드디어 마늘을 심었다. 이로써 2년차 농사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 ㅇㅎㅎ 일주일 전에 마늘을 심기 위해 알타리무를 뽑았다. 알타리무는 매우 튼실했다. 마늘심기가 오래된 계획이 아니었기에 씨마늘 구하는 게 문제였다. 주변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원당시장에도 접마늘 파는 집이 하나밖에 없다. 할머니 마늘심으려고 하는데 뭐가 좋을까요? 6쪽마늘이 좋긴 한데 우리집 껀 너무 커서 비싸. 일산장에 가서 싼 마늘 사다 심어. 이 6쪽마늘은 얼만데요? 2만 8천 원이야. 그 비싼 걸 어떻게 심어. 어찌됐든 2만 8천 원짜리 마늘을 심었다. 2만 8천 원어치는 캘 수 있을까요? 그거야 더 캐겠지. 그거야 더 캐겠지? ㅋ 마늘심기 위해 다듬어놓은 밭. 일주일 전에 퇴비를 주고 밭을 한번 뒤집어줬다. 마늘 쪽 나누기 마늘심기/ 빛 때문에 골과 이랑이 잘 구분이 안 된다. 마늘심기/ 골과 이랑이 선명하게 구분된다. 마늘심기/ 모처럼 지주도 머습들처럼 즐겁게 참여했다. 마늘은 약 1만 5천 원어치 정도 심었다. 설마 2만 원어치는 나오겠지? ㅋ 마늘을 심고 왕겨나 짚 대신에 굵은 톱밥을 덮어줬다. 마늘 심은 밭에 덮은 톱밥 이쪽 이랑에 덮은 톱밥은 많이 썩어서 퇴비에 가깝다. 마늘심기가 끝난 뒤에는 배추를 묶어줬다. 큰 기대를 걸고 심은 배추가 각종 벌레와 특히 진딧물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다. 1/3 정도는 죽거나 뽑아냈다. 남은 배추라도 잘 커줬으면 좋겠다. 지주네가 김치를 담그기로 했으니 우리도 혜택을 볼 것이다. ㅎ 배추밭 묶어놓으니 배추밭이 허전하다. ㅋ 배추를 묶다보니 끈이 형편없이 모자랐다. 임시방편으로 주변의 칡을 이용해 묶었는데 너무나 좋았다. 배추를 다 묶고 고추대를 뽑았다. 올해 고추농사는 실패다. 잘 안 되서가 아니라 맛이 지난해보다 훨씬 떨어졌기에 난 별로 관심이 안 갔기 때문이다. 고추밭 고추대를 뽑고 내년 봄을 위해 밭을 갈았다. 내년 봄을 위해 퇴비도 주고... 부로농원에도 가을이 가고 있다. 가을은 참 쓸쓸한 계절이다. 모든 게 가고 있음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부로농원의 가을 부로농원의 가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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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 북한산행

이미 2주 전에 공지된 산행이었다. 진보신당 고양시위원회에서 당원들의 여러 모임이 있었지만, 당원들과 함께 하는 본격적인 산행으론 이번이 처음이었던 거 같다. 차윤석 의장이 이번 산행에서 내게 북한산과 관련된 역사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나는 꼼짝없이 산행에 얽히게 되었다. 어쨌든 같은 시간 돌잔치를 한 남희에게 미안하다... 단풍이 든 북한산/ 쪽두리봉 근처에서 이북5도청 쪽을 바라본 풍경. 저 끝에 내가 다니는 연수원도 있다. 준비를 마치니 약속장소에 겨우 시간을 댈 수 있을 정도로 빠듯했다. 그래도 마침 나오는 밥상이 미안해서도 아침밥을 챙겨먹었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가, 마을버스도 잘 오지 않는다. 전철도 10분이상 기다려야 했다. 결국 15분 정도 약속시간보다 늦었다. 차윤석의장 부부, 인혁이 인명이 두 아들, 오동식, 유진, 박태하, 이순명, 최경순 얼추 계획했던 대로 10명에 가깝다. 차윤석 의장 가족 독박골에서 쪽두리봉으로 길을 잡았다. 처음부터 급경사다. 힘들다. 요즘 난 등산개념 보단 산책에 가까운 산행에 익숙하다. 완경사 산길을 넉넉하고 길게 걷는 걸 더 좋아한다. 그래도 일단 올라가보자. 멀리 쪽두리봉이 보인다. 볼록 나온 바위가 쪽두린가 보다. 열흘만에 다시 온 북한산이다. 이미 단풍이 다 졌을 줄 알았는데, 단풍이 아직도 한창이다. 다만, 내가 즐겨가는 북한산성길이 단풍나무가 많아 붉은색조라면, 이쪽은 떡갈나무 등 참나무류가 많아 노랑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차이 뿐... 떡갈나무의 노랑단풍이 한창이다. 산을 좋아하고, 자주가는 오동식은 보는이에게 무게감을 못느낄 정도로 가파른 산길을 가쁜가쁜하게 오른다. 중1 인혁이도 젊어서(?) 그런지 못지 않다. 오동식과 차인혁 오동식/ 자기 블로그에 올리겠다 한다. 그래서 오동식 사진은 다 올리기로 했다. 쪽두리봉을 올랐다. 급경사가 이어진 길이었지만, 그래도 올랐다. 정상에서 바라본 쪽두리 사색에 잠긴 이순명 점심은 사모바위에 가서 먹기로 했다. 산행 속도는 점점 더 벌어졌다. 시간은 12시를 훌쩍 넘겼고, 향로봉을 지나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일행이 도시락을 풀었다. 선두 그룹은 후미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이순명이 사온 막걸리는 얼름이 서걱서걱 씹히는 게 시원했다. 음식을 다 먹고, 과일 후식도 먹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니 후미가 왔다. 배가 몹시 고풀 터인데도 사모바위에 가서 점심을 먹겠다고 한다. 2차 점심 사모바위/ 연인을 기다리다 바위로 변했다는 어느 청년이란다... 하산길로 접어들자 멀리 백운대 암군이 보인다. 북한산은 다른 봉우리에 가서 백운대를 바라보는 게 제일 멋있다고 오동식은 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자. 멀리 백운대 암군이 보인다. 일행들 기념사진 오동식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1시간이면 내려가고, 밑에 막걸리집도 있다고 오동식은 유혹한다. 길도 평탄하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오동식의 말은 그져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한 수사이든지 아님 자신의 탁월한 등산실력을 기준으로 한 것일 뿐이라는 게 곧 밝혀졌다. 하산길에 요런 곳이 수시로 나타났다는.../ 그래도 풍경은 너무나 좋았다. 밝은 햇살아래 드러난 북한산 단풍 산길에서 만난 은은한 단풍/ 사진으론 표현이 덜 되었는데, 너무 좋다... 예정보다 많이 지체된 산행이었다. 모처럼 코스를 제법 탔고, 왁자지껄한 산행이었다. 나는 산을 다 내려와서도 그렇게 지치지 않은 상태였다. 노랑빛이 이글대는 풍경이 오래도록 내 기억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구파발 포장마차에 들려 소주잔을 기울이며 해산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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