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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1/29
    방학시작(6)
    풀소리
  2. 2008/11/27
    sein(4)
    풀소리
  3. 2008/11/16
    진정한 용기는(2)
    풀소리

방학시작

어제 소학시험을 끝으로 길고 긴 방학이 시작되었다. 이번 학기는 한편으로는 매우 어수선하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법 알차게 보냈다. 무엇보다도 이제 공부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된 듯하다는 게 제일 큰 수확이다. 그래서 겨울방학 목표는... '맹자잡기'다. 우리 교육원 성백효 교수가 낸 번역서/ 이것이 올 겨울 내 텍스트다. 한문은 익숙하게 쓰였던 조선사회에서도 물론 외국어였다. 조선 사람들은 이 외국어를 어떻게 익혔을까? 물론 잘 아시다시피 무식하게 외우는 거다. 논어나 맹자 같은 책을 3,000번씩 읽어 통째로 외워버리는 거다. 그 방법이 가장 좋다고 하더라도 내가 사용할 수는 없다. 조선의 선비들은 기본적으로 유한계급이라 공부 이외에 다른 것을 할 필요가 없는 족속들이었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3,000번을 읽고, 외우고 해도 시간이 남아돈다. 나? 나는 이미 나이도 지나 주어진 시간도 별로 없고, 유한계급도 아니니 적어도 돈벌 궁리도 해야되고... 그래서 결심한 것이 있다면!!! '한놈만 패는 거'다!!! 그 한놈이 바로 '맹자'다. 물론 한문공부를 매우 많이 한 분의 조언이 이런 결심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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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n

1. 1990년대 초반이었던 거 같다. 소비에트가 붕괴되고 신념을 상실한 주변 사람들이 각자 살길을 찾아 여기저기로 떠날 때 최인훈은 이미 예고했던 장편소설 [화두]를 내놓았다. 때는 하 수상한 시절이었는지라 나도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책을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다. 이 진지한 작가에게,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세상에다 내 놓고자 하는 '화두'란 게 도대체 뭐일까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책이라면 설렁설렁 대충대충 읽는 나는 최인훈의 화두는 마치 소풍가서 보물찾기 하는 초등학생처럼 열심히, 아주 열심히 읽었다. 도대체 최인훈이 내놓는 '화두'는 뭘까 하고... 그래서 찾은 화두는? 모르겠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면 '있음'과 '없음'에 대한 한 단락이었다. 2. 원작과 관계없이 순전히 기억만으로 되살린다면 이런 것일 게다. (이미 10년도 훨씬 넘었으니 이해하시라...) 무대는 두망강을 끼고 있는 함경북도 회령 만주와 가까우니 그곳은 벌판이 넓은가보다... (순전히 작품을 읽으면서 나의 추측이었다.) 어린 작가(최인훈)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엄마랑 단 둘이서 넓은 벌판을 걷고 있었다. 작가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어린 작가는 엄마한테 떼을 썼다. 어린 작가는 엄마에게 떼를 쓰며 때로는 휭하니 앞서 가기도 하고, 때로는 멀지감치 엄마에게서 쳐져서 멀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순간 거짓말처럼 갑자기 엄마가 사라졌다. 작가는 이 순간을 이렇게 기억한다. 주변의 산하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뿐 아니라 주변 풀 한 포기까지도 나이가 60이 다 된 지금까지 기억이 생생한데, 그 순간에는 마치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고... 아무 것도 없는 진공의 세계는 아들의 생떼에 지치고, 또 놀려주고 싶던 엄마가 숨어 있던 곳으로부터 나왔을 때야 비로소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갔다고... 3. 있음과 없음은 어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삶. 뭐 이런 것이야 모르겠지만, 정말 있어도, 정말 생생해도, 삶을 지탱하는 절실한 뭔가가 빠지면... ... 없는 거라는... 어쩜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었던 건 말이다... 12시를 훨씬 넘겨 새벽이 가까이 오는 밤 하늘엔 동녁에 반달이 된 그믐달이 떠 있었다. 겨울의 맑은 공기 탓인지 검푸른 하늘은 서늘하게 투명했다. 반달에 비친 얇은 조각구름은 하얗고 맑았다. 반달 옆으론 샛별이 등대처럼, 보석처럼, 연인의 얼굴처럼 그렇게 밝게, 그렇게 또렷하게 떠 있었다... 어쩜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일별로 끝낸 건 말이다... 지지대가 무너진 마음은 남은커녕 내맘조차 감당하지 못하는구나... 미친듯이 빠져들 만한 그 아름다운 풍경조차 일별로 끝내고 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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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용기는

[고전명구 35] 진정한 용기는 기세를 부려 억지소리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허물 고치기에 인색하지 않고 의리를 들으면 즉시 따르는 데 있는 것이다 眞勇 不在於逞氣强說 而在於改過不吝 聞義卽服也 진용 부재어령기강설 이재어개과불린 문의즉복야 - 이황(李滉), 서답기명언논사단칠정(書答奇明彦論四端七情)/ 《퇴계집(退溪集)》 <해설> 위 글은 사단(四端)·칠정(七情)과 이(理)·기(氣)의 문제에 대해 변론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편지에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이 답한 글에 있는 구절입니다. 고봉이 자신의 논의를 굽히지 않자 퇴계는 주자(朱子)의 용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주자는 조금이라도 자기 의견에 잘못이 있거나 자기 말에 의심스러운 곳이 있음을 깨달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남의 말을 받아들여 즉시 고쳤으니, 비록 말년에 도(道)가 높아지고 덕(德)이 성대해진 뒤에도 변함없었습니다.” 하물며 성현의 도를 배우는 길에 갓 들어섰을 때에는 어떠했겠느냐고 고봉에게 반문하며, 퇴계는 20여 년 아래의 젊은 후배에게 위와 같이 타일렀던 것입니다. 옮긴이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 옛날 매우 뛰어났던 분들도 자기의 의견이 잘못됐음을 알고 바로 고치는 것이 용기고,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언제든지 자신의 의견이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열린 마음'을 갖는다는 것 또한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위의 글은 내가 다니고 있는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주기적으로 보내주는 메일에서 인용한 것이다.) --------- <사족> : 나는 한문을 공부하지만, 유학을 실천윤리 이상으로 신봉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 유학이 '관념론'이기 때문이다. 성선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람마다 지극히 선한 본성이 있다'라는 것인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성인'만 알 뿐이다. 사람마다 마음 속에 진리를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음에도 그 사람은 진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단지 그 지극히 선한 본성이 드러나도록 노력해야 하는 존재다. (반면 맑스는 '진리(지극한 선)는 실천이다'라고 설파했다. 순간순간 스스로 올바르다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 자체가 진리라고 하였으니, 나이가 어리든 많든, 학식이 있든 적든, 자리가 높든 낮든 관계없이 평등한 관계가 설정될 수 있다.(더 나아가면 안 되겠지???)) 둘째, 지나친 윤리관 때문이다. 이 부분만으로도 긴 포스팅 하나를 할 수 있으므로 근거는 다음에 얘기하자. 다만 지나친 윤리관을 개인이 갖는 것은 취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통치자는 그래야 한다'든지, 나아가 '사람은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간 세상은 로비에스삐에로나 스탈린 시대와 같은 가혹한 독재체제가 되든지, 아니면 소모적인 당파싸움으로 번진 송나라나 조선처럼 가식적인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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