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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04
    기흥저수지(7)
    풀소리
  2. 2008/07/04
    좀 조용히 살자(4)
    풀소리
  3. 2008/07/02
    연행 그리고...(22)
    풀소리

기흥저수지

- prologue

제목을 무심코 '강동냉장'이라고 쓰려다가

수없이 댓글이 달렸던 지난 포스팅이 생각나 바로 바꿨다.

뭐하는 짓인지...

 

닭장차로 사방 바리케이트를 친 강동냉장 창고

 

 

1.

다시 지난 6월 30일 얘기다.

9시 30분 쯤 우리가 도착했을 땐

경찰 숫자는 말할 것도 없고, 취재진들 숫자도 우리보다 많은 것 같았다.

 

이래저래 회의를 거치고 하면서

오후 2시 조합원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결론을 내리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2시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연행은 예상되었지만 마음은 한가로웠다.

 

난 몸 상태도 별로인지라 해바라기를 할 겸

좋아하는 산책을 할 겸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안 되는 우리 일행과 건너편 취재를 준비중인 많은 기자들이 대조적이다.

 

냉동창고 바로 옆에는 커다란 개울이 있었고

다리에서 내려다보니 커다란 부들이 꽃이 이제 막 진채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생각같아선 내려가보고도 싶었지만,

투쟁하러 와서 다들 보는 앞에서 뭐하는 짓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다리를 천천히 건너며 느릿한 눈길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맑지 않은 물길이지만, 그 물을 먹고 자라는 풀들은

왜 그리도 싱그럽게 자라는지...

 

 

2.

문득 고개를 들어 반대편을 보니

조그만 동산 사이로 높다란 탑들이 보였다.

뭔가 하고 보니 그건 탑이 아니라 수문이었다.

 

오호라. 수문이라.

그럼 저 위는 뭐가 있을까?

저수지?

 

기흥저수지 오르는 길목의 비포장길

 

짬을 보아 수문 쪽으로 길을 잡았다.

입구는 전경들이 가득 있었는데,

굳이 가려면 갈 수 있었지만 부딪치는 것 자체가 싫어서

슬며시 돌아 올라갔다.

 

 

3.

조금 오르니 비포장길이 나왔다.

그래. 이 근처 길들이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모두 이런 모습이었겠지...

 

비포장길 옆 야산에는 외래종인 자리공 등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기도 하지만,

여러종류의 잔대들이 듬성듬성 길 바로 옆까지 자라고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간섭이 없나보다.

 

좀 더 오르니 커다란 집이 나오고,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은 끊겼다.

 

관리사무소 옆 샛길

 

커다란 집은 저수지 관리사무소였다.

사무소 간판 덕에 드디어 저수지 이름을 알아냈다.

'기흥저수지'

 

사무소 옆으로 작은 샛길이 하나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커다란 저수지가 나왔다.

자세히 보니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늘 보던 저수지였다.

고속도로에서 보는 모습하고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물은 언제 보아도 매혹적이다.

다만 가까이 하지 못함이 안따까울 뿐이다.

 

둑에서 바라본 기흥저수지/ 배를 띄워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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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조용히 살자

아 젠장...

내가 뭐랬다고 내 블로그에서 이런 난리들이냐...

 

난 정말 말 섞고 살고 싶지 않은데,

왜들 이러냐고요...

 

못난 나는 좀 제발 그냥 냅두시길!!!

잘난 당신들! 당신들끼리 나가노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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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 그리고...

1.
촛불집회를 보면서 많은 시민들 뿐만아니라,
정치권은 또 정치권대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충격을 받은 것으로 하면 어쩌면 민주노총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누구 못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들이 이 사회를 바꾸는 데 가장 앞에 서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는데,
촛불집회는 자신들이 일반 시민들보다 한참 뒤쳐져 있는 현실을 뼈저리게 실감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됐든 지금 민주노총은 그 특유의 뚝심도, 자신감도 잃어버린 것 같고,
촛불정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게 현실이었습니다.

그나마 내가 속한 운수노조는 화물파업 등을 거치면서 수송거부 등으로 시민들로부터 과분한 관심과 찬사를 받았을 뿐입니다.

미국쇠고기 수입이 고시되고,
검역이 끝나고, 이제 공공연히 출하를 하겠다는 상황에서 우리는 용인에 있는 강동냉장 창고앞으로 갔습니다.

강동냉장은 아시다시피 360여톤에 이르는 수도권에 두번째로 많은 미국쇠고기가 냉장되어 있는 창고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일행이 겨우 20여명에 불과했고,
경찰은 닭장차만 20대정도 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간부 중심으로 100여명의 조합원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모두 잡혀갈 것을 각오하고 일전을 불사할 것인가.
아니면 소수의 희생자만 나오는 전술을 쓸 것인가 선택만 남았었습니다.

물론 100여명이 일전을 불사하고 덤벼도 진압되는 것은 순식간이었을 것입니다.
소수의 희생자만 나오는 전술을 쓰는 것은
어쩌면 몰락한 종가집에서 체면치례 제사를 준비하는 것처럼 구차하고, 한편 가슴 아픈 것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소수의 희생자를 내자는 안이 결정되었고,
상대적으로 깨끗한(?) 이력을 가진 사람을 뽑다보니 저도 뽑혔습니다.
몸이 몹시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마디 외치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제압.
각오는 했었지만 쪽팔리는 일이었습니다.


2.
체포된 후 성남 중원경찰서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형사들 참 싹싹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간부들이라 미리 그렇게 지침을 받았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나를 조사한 형사계장은 경찰대학을 나온 20대 뽀송뽀송한 청년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죄지은 것처럼 말을 낮추는데,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었습니다.

형사과장은 오종렬 의장의 고동학교 제자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자주만난다며 괜히 말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조사를 마쳤습니다.
조사 끝나고 약도 사다줬고요.

저녁 8시쯤 유치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유치장은 오랫동안 쓰지 않았었다고 하였습니다.
냄새나는 담요, 먼지쌓인 바닥, 막혀있는 환기창
말 그대로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래도 치솔, 치약, 수건을 제공하고,
책도 마음대로 볼 수 있도록 많은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간수(?)들은 커피도 주겠다며 친절하게 굴었습니다.
우리 일행도 대부분 이런 환경에 이골이 난지라 서로 능숙하게 상황을 넘겼습니다.

나는 몸살로 냄새나는 담요를 덮어쓰고 먼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3.
연행되기 전에 동료들이 '푹 쉬었다 오세요.' 하며 일면 부러움을 보였습니다.

사실 환경만 좋다면 1박2일 또는 48시간 구금되는 것도 나같은 상근자들에게는 나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함께 연행된 이들도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랫만에 맘놓고 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구금 24시간을 넘기면서 서서히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갇혀있다는 부자유를 몸이 느끼나 봅니다.

어찌됐든 저녁 7시쯤 석방된다는 통보가 왔고,
7시 30분쯤 수속을 받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일행은 술먹기 좋은 시간이라며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는데,
저는 몸이 안 좋아 그냥 집으로 왔습니다.


4.
별일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소식을 전해왔고, 면회를 왔습니다.
심지어 빠리에 가있는 김해근으로부터 위로 문자가 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면회를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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