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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바보이고, 누가 똑똑한 사람인가?

어디서든 희망은 자란다.

 

누가 바보이고, 누가 똑똑한 사람인가?
 
  “준비해, 말해!” 오늘도 실패다. 이젠 “레디, 큐!” 라며 제법 폼나게 외쳐 볼 때도 되었건만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는 J여고의 방송부 기장이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PD로서 점심 방송을 책임진다. 멘트의 순서와 선곡을 확인하고, 볼륨을 살피어 보조믹서를 조절한다. 금요일은 조금 더 특별하다. 금요일은 나만의 무대가 된다. 손수 멘트를 쓰고, 노래를 고르고, 직접 마이크 앞에 앉는다. 나만의 독점적인 시간이다.
  “안녕하세요? 아나운서 김선아입니다.”

  “너 어제 밤 샜어?”
  “거의.”
  “왜? 컴퓨터 했어? 그럼?”
  “보면 알아.”
  “안녕하세요? 아나운서 김선아입니다. 저는 어제 날이 밝는 줄도 모르고 전태일평전이라는 책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전태일역사에 대해선 알고 계시죠? 노동운동을...”
  방송은 생각보다 싱거웠다. 어제 그 감동. 왈칵 눈물까지 쏟게 했던, 쭈뼛쭈뼛 머리털까지 곤두 세웠던, 한여름의 태양보다 더 뜨겁던 나의 심장이 어디로 달아나 버린 것일까? 마이크 앞에서 나는 무기력했다.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앵무새처럼 읽어갔다. 방송에 나의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이 담겨선 안 될 것만 같았다. 한 권이라도 더 팔기 위해 책의 감동을 부르짖던 어느 책장사만도 못해 보였다. 방송은 불만족스럽다 못해 화가 나기까지 하였다. 그날 점심은 물 건너 갔다.
  “밥 맛 없어? 그래도 좀 먹지... 야, 그런데 책 소개는 좀 그렇...”
  친구가 말을 꺼낸다. 나도 묻는다.
  “너 전태일이 누군지 알아?”
  “노동운동을 위해 분신자살한 사람.”
  “너라면? 너라면 그렇게 할 수 있어?”
  “내가 바보냐.”
  어! 이 친구가 전태일을 바보라 불렀다.
  사실 친구의 말이 옳았다. 책 소개는 학생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 신인가수의 소식이나 한주간 이슈들을 모아 방송한다면 훨씬 인기 있는 방송이 될 것이다. 60, 70년 당시 언론들의 모습. 일개 가십거리 기사들을 실어야 신문이 잘 팔린다. 노동운동이라든지, 열악한 작업현장은 풍부한 소재가 되지 못한다. 일명 골치 아픈 기사거리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보충학습을 희망사항이라 해놓고 실제로는 강요하는 현실을 방송에서 말해달라는 친구의 부탁이었다.
  “나도 잘 알지만, 그건 좀 어려워...”
  언론이 노동청과 기업주의 눈치를 보아야 했듯, 방송실의 에어컨이 좀 더 근사해지고, 새로운 기기들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우리도 학교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우리의 이익에 따라 진실된 학생들의 목소리를 과감히 묻어버리는 우리는 참으로 똑똑한 사람이다.
  익명성을 확실히 이용하는 것도 좋다. 김선아는 흔한 이름이고, 학교 또한 J여고이다. 언제부턴가 솔직함을 담고 싶을 때, 나를 숨기는 버릇이 생겼다. 나라면 바보회 명함에 이름 석자 대신 이니셜을 새기지 않았을까. 위험으로부터 도망갈 구멍을 미리 만들어 놓는 자, 역시 똑똑한 사람이다. 반면에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두발 자율화를 위해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눈총을 받는 아이, 보충학습의 강제성에 비판을 가하다 심한 꾸지람을 받는 아이, 더 나아가 노동운동이라는 하찮은 일을 위해 불꽃이 되어버린 사나이.
  여름방학 보충이 시작되었다. 나의 독점적인 방송은 참으로 교과서다운 멘트를 남겼다.
  “여름방학 보충이 시작되었습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 보람찬 방학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내게 보충수업에 관한 진실의 방송을 요청했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방송 멋졌어. 잘했어.”
  누군가 나에게 “누가 바보이고 누가 똑똑한 사람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고.”

  “오늘 방송 멋졌어. 잘했어.”


김선아 / 전주중앙여자고등학교 3학년
(제2회 전태일청소년문학상 독후감부문 전태일기념사업회이사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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