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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가 노조위원장이라고?

“신데렐라가 노조위원장이라고?”

[사실은] 다시 읽는 동화이야기 (2)

2008-02-12 09시02분

 

다시 읽는 이야기 '혁명가 백설공주' 편을 재밌게 보셨는지. 실력 없는 글쓰기로 오히려 누가 됐는지는 모르겠다. 이번에도 지난번에 이어 공주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신데렐라 이야기.

예전이나 지금이나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 캐릭터를 보면, 대략 능력은 있으나 혹은 외모는 남들보다 뛰어나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걸로 묘사한다. 한마디로 궁상맞게 산다. 그러다가 우연히 남자를 만난다. 처음에는 나쁘게 만나고 그래서 싸우고 앙숙이 되다가 나중엔 친해진다. 그리곤 사랑하게 된다. 얼마 후, 그 남자가 재벌가 아들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여자는 몰래 떠나고 남자는 뛰어다니면서 다시 사랑하다는 스토리가 있고, 반면에 남자에게 이전부터 사귀던 혹은 따라다니던 여자가 있어서 그 사이에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티격태격하면서 남자 주변인물 들에게 굴욕을 당하다가 결국엔 남자품에 안기는 스토리 등으로 묘사된다. 결국엔 궁상 맞는 그러나 예쁘고 착한 여자는 백마 탄 멋진 남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다.

예전 MBC에서 방영하였던 ‘별은 내 가슴에’ ‘신데렐라’, SBS ‘파리의 연인’ 등의 프로그램이 그런 류가 아닌가 싶은데, 대다수 시청자들이 "식상하다", "이제 그만" 하면서도 나름의 시청률을 올리는 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빠져서이지 않나 싶다.

하지만 본래의 신데렐라 이야기도 돈 많고 멋진 남자를 동경하고 따라가는 여자의 이야기일까?

 

옛날에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내가 죽자 재혼했는데, 새어머니는 소녀를 하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거만한 의붓언니들이 무도회에 가고 피아노를 치며 연애를 하고 다니는 동안, 소녀는 더러움과 잿더미 속에서 끝도 없이 고되게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얼마 동안 이런 굴욕적이고 고된 생활을 한 뒤에, 소녀는 무엇인가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소녀는 마을 우물가에서 매일 아침 다른 집 하녀들과 만나게 되는데, 서로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는 대신에 하녀의 처지에 관한 보고서를 쓰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기로 하였습니다. 소녀는 그 보고서를 어머니 무덤에서 열린, 그 구역 모든 하녀들의 비밀집회에서 발표했습니다. 소녀가 그 장소를 택한 것은 그 곳이 하녀들이 방해받지 않고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상황 보고서에 관해 충분히 얘기를 한 후에,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겨울이 다가왔으므로, 그들은 크리스마스를 기해 일주일의 휴일과 10마르크의 보너스 그리고 밤일을 더 이상 시키지 말 것을 요구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거부당했습니다. 파업의 날(그 당시에는 그렇게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개념은 나중에 영국으로부터 건너왔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시민의 집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녀들은 일제히 일손을 놓았고 주인들은 바쁜 크리스마스 전날 파업을 일으킨 하녀들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면서 아이들을 친지의 집에 보내 이틀이나 사흘 동안 한두 명의 하녀를 좀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보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대답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미안하지만, 우리집 하녀들도 일손을 놓았답니다.’ 그렇게 해서 단결된 부엌데기 신데렐라들의 연대는 첫 번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주인들은 어쩔 수 없이 하인들의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주어야만 했습니다.

이 단합된 행동이 성공하자 새로운 단원들이 가입하게 되었고, 몇 주 안 되어 신데렐라는 하녀 노동조합의 사무실을 열기 위하여 집안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이 노동조합은 잘 조직된 집단행동을 통해 그들의 처지를 훨씬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성공담은 곧 여기저기에 퍼져나갔습니다. 신데렐라는 지방신문과 이어서 중앙신문에까지 나고, 시장에서는 그의 사진과 연설문이 새겨져 있는 조각품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신데렐라는 “단결은 힘이다”라든가, “우리 팔이 쓸기 싫어하면, 모든 빗자루는 멈추어 선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마침내 신데렐라네 조합에 대한 소문은 왕실에까지 미쳤고 마음 착하고 국민을 걱정하던 황태자는 신데렐라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여섯 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신데렐라의 작업장에 나타났습니다. 온 국민들은 왕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평범한 하녀 신데렐라를 방문하러 온다는 것을 들었을 때 놀라움에 입이 벌어졌습니다. 신데렐라의 의붓언니들은 시기심 때문에 창백해져서 그동안 끊어진 친족관계를 재빨리 다시 이으려고 했습니다. 몇 번 신데렐라와 깊은 대화를 한 왕자는 그에게 반하여 정말로 청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데렐라는 신분 차이가 아닌 이해관계와 정치적 신념의 차이는 결코 좁혀질 수 없다는 확신 때문에 거만함 없이 청혼을 거절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마음과 용감한 변신을 높이 평가하지만, 저는 당신의 가족, 신분과 재산이 당신이 이상에 따라 행동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아마 내가 당신 뜻을 따라 나의 지금의 의무에 불충실하게 되던가, 아니면 지금 하는 것보다 한층 더 마음 아픈 이별을 해야 될 것입니다. 당신이 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저와 결혼하지 않고도 인간적이고 진보적인 행위를 통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슬픔에 빠져 왕자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신데렐라는 대답했습니다.
"당신 아버지를 졸라 모든 직종의 노동자들의 연대활동을 허용하고, 중세적인 하인법을 철폐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하십시오“

왕자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능란하고 사업에 밝은 자문가들의 의견에 따라서 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올 것이 드디어 왔습니다. 화창한 어느 날 왕의 병사들이 신데렐라를 체포하였습니다. 노동조합 작업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곳곳에서 판사와 성직자들은 “한 신분이 다른 신분에 대항하여 그들을 협박하기 위해 결집하는 것은 범죄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아름다운 단어 ‘자유’를 큰소리로 외쳤지만 신데렐라는 왕실 모독과 하인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하여야 했습니다. 왕자는 그가 실행하고자 하던 첫 번째의 진지한 정치적 임무에서 실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까지 살아서 아버지가 올바른 생각을 하기를 희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가. ‘혁명가 백설공주’에 이어서 황당한가?

지금의 신데렐라로 변형시킨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지배계급에게 있어서 대응하는 민중들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지금도 다수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노동자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 과거는 어떨까? 거기다가 왕이 지배하는 시대에 민중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왕의 통치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해 반란을 꿈꾼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계급에게 있어서는 모종의 방치가 필요했을 거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외치면서 북한 괴뢰군에게 총 맞아 죽었다는 이승복 어린이의 이야기가 당시 박정희 정권이 반공 사상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가상의 이야기였다는 것처럼, 여성은 사회적 지위에서 낮으며, 나약한 존재임을 계속적으로 강조하여, 그저 여성은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로 포장한 것이 아니런지...

미국의 저널리스트 콜레트 다울링(Colette Dowling)의 말을 빌리자면,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본인 스스로는 자립할 수 없는 여성이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서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 주길 기대하는 심리”를 일종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설명한다.

오랜 세월동안 누적된 억압과 차별의 벽을 허물고 자립하고 세상과 맞서야 할 때, 오히려 반대적인 생각을 주입시킴으로써 스스로 자기 비하나 열등감에 빠져서 억압과 차별적인 사회요소를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다.

겨울방학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요즘, 아이들에게 그냥 동화책을 내밀게 아니라 그 속에는 성차별 요소는 없는지 조리요리 살펴보고 새롭게 아이들에게 들려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릴 적 이런 생각해 본 적 없는가?
예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항상 ‘철수와 영희 그리고 바둑이’로 표기하냐고...

 

 


* 참조 - 누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웠는가? (이링 페처. 1991. 철학과 현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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