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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지식경제부 장관이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할 때 최대한 노동계와 협의하겠다고 약속했다.”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이 24일 기자들과 만나 “공기업 민영화는 노사정 협의를 통해 추진돼야 한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특히 한나라당과 맺은 정책연대를 공기업 민영화와 연계하겠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그는 “정책연대는 한국노총 조합원이 선택한 것이고, 위원장은 이를 경영할 책임이 있다”면서도 “지금까지는 정부에 협조적이었지만 앞으로 태도를 봐서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장 위원장은 “정부가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작심하고 추진하는 것 같다”며 “다음주부터 공공부문 대책위를 가동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고 협의하겠지만 이해시키지 않고 강행할 경우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 뿐”이라고 강조했다.
정책연대 추진이 지지부진한 것에 대해서는 에둘러 섭섭함을 표시했다. 장 위원장은 “정책연대라는 단초가 마련됐지만 지지부진한 게 사실”이라며 “정책협의기구를 가동하고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15일부터 6박7일 간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일본 순방길에 동행한 것을 두고 그는 “비판받을 부분이 있으면 받겠다”며 “전 집행부부터 해왔던 일이고 국익 차원에서 다녀온 것으로 이해해달라”고 해명했다. 이어 그는 “경제살리기에 동참한 것”이라며 “한미FTA를 측면지원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품는데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한편 장 위원장은 “일본노총 위원장을 만나 한일FTA 추진이 구체화하면 공동대응을 모색기로 얘기를 나눴다”며 “오는 7월 일본노총 위원장이 방문하면 구체적인 논의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영주 기자 www.yyjoo.net / 2008년04월28일 9시34분
유영주 기자 www.yyjoo.net / 2008년04월28일 9시17분
이꽃맘 기자 iliberty@jinbo.net / 2008년04월28일 15시23분
▲ 25일, 17개 노동사회단체는 '이명박 정부 공공부문 사유화에 대한 대응방안 토론회'를 열었다. |
▲ 이태기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민영화저지특위 부위원장, 이종훈 공공노조 정책국장,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 이철호 범국민교육연대 정책실장(왼쪽부터) |
▲ 성은미 민중복지연대 활동가, 이영수 운수노동정책연구소 연구원, 김동준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실장, 이한진 진보금융네트워크 준비위원(왼쪽부터) |
최인희 기자 flyhigh@jinbo.net / 2008년04월28일 18시53분
더 이상 숨어있지 않기로 했다.
내 상처를 더 이상 뒤에 숨어서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거리낌없이 말하고 다닐테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긴 했지만.
"이혼 축하합니다~"
마지막 스캔들이라는 드라마에서 정준호가 최진실에게 불러준 노래.
이 노래를 들으면서 뭔가 통쾌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우리에게는 이런 노래가 좀 있어줘야 돼.
슬픈 일이겠지만
아무튼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저런 노래.
나도 요즘 나에게 상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피스, 가방, 귀걸이, 팔찌 등을 사들였다.
귀걸이, 팔찌는 천원짜리.. 훗.
다 합해서 5만원 정도 쓰고 나니까
더 이상 필요한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없더라.
소심하기 이루말할 데가 없구나.
왜 나 혼자서 이런 아픔들을 견뎌내야 하는 걸까?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는 생각보다 매력적인 것이라는 걸 알았다.
비현실적이지만
나쁜 놈을 응징하는 구도.
나름대로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나쁜 놈들이 응징받는 사례는 정말 드물다는 거.
TV에서 이런 말도 나왔드랬다.
"행복해져야 합니다~"
엄마가 옆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눈물을 감출 수가 없더라.
하품하는 척 했지만.
나는 지금 과연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다.
내가 해왔던 활동들이 모두 부질없게 느껴지고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
마지막 스캔들에 나왔던 것처럼
근사한 케잌에 촛불을 꽂으며 누군가 나에게 이런 노래를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낙태 축하합니다~"
너무 잔인한가?
어찌됐든
난 어깨를 들썩이며 펑펑 울어제껴야 한다.
내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어떻게 기록을 남겨야 할까.
지난 1년의 시간을 되돌아본 결과
연애 관계 속에서 나는 성적 대상화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괴롭다.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알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연애에 푹 빠져서
연애 지상주의 분위기에 물들다보면
언젠가 절벽으로 뚝 떨어져 버리기 십상이다.
앞으로 맺게 될 수많은 관계들을 어떻게 맺어나가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연애가 끝나고 나서 수많은 여성주의 서적들을 읽으며
나의 과거를 객관화시키고, 사회구조화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을 한다는 것이, 연애를 한다는 것이
'가족', '결혼'이라는 것과 맞물려서
순식간에 비참하고 형편없는 것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은 사람과 충돌한다면
그 때 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선택했을 때 나는 그 충격과 외로움을 온전히 버텨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LSD를 선택한 히피족 |
히피문화 속 ‘여성’의 의미-1 |
<’성 해방’의 기치를 내걸었던 히피운동 속 여성들의 위치는 어떠했을까. “모든 반문화 운동이라는 것이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외 받는 계층들의 특별한 경험들에 대한 자리를 마련해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세일라 휘틀리의 지적은 과거의 문화운동뿐 아니라 오늘날 진보적 운동들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말이다. 일다는 3회에 걸친 연재를 통해 사랑과 평화를 갈구했던 히피운동에서 여성의 위치와, 그 안에서 여성뮤지션들의 고민은 어떠했는지 조망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는 머리에 꽃을 꽂아요.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다정한 사람들을 만날 거에요/ …거기에는 모든 세대와 새로운 설명이 있어요.” 스콧 맥켄지(Scott McKenzie)가 부른 노래 ‘샌프란시스코(San Fransisco)’의 가사처럼, 196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는 머리에 꽃을 단 히피들의 낙원처럼 보였다. 덥수룩하게 늘어뜨린 머리칼과 수염, 인디언처럼 총 천연색의 복장에 장신구를 하고, 느릿느릿 무리 지어 걸어 다니고 있는 이들은 처음에는 기성세대의 눈에 위협적이라기보다는 한심하고 철없는 젊은이들처럼 보였다. ‘사랑’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는 지금까지 기성세대의 가치에 반기를 들고 노골적으로 저항을 해 오던 반항적인 젊은이의 공격성은 없었다. 으슥한 거리를 걷고 있는 현명한 중년의 신사라면, 파키스탄인들에게 발길질을 가하는 스킨헤드족에게 충고를 늘어놓는 것보다는 모르는 채 지나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런던의 카나비 스트리트에서를 허름하게 차려 입고 지나갔다가는 깔끔하게 차려 입은 모드족들의 삿대질을 당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미국에선 오히려 일반노동자들이 머리가 긴 사람만 보면 “꽃이나 좋아하는 호모새끼들”이라며 폭력을 가하곤 했다. 이 “계집애 같은” 히피들이 무슨 저항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가진 것은 낭만적인 구호들과 거세된 듯한 표정, 그리고 LSD(환각제) 뿐인 것처럼 보였다. 하위집단이 선택한 약물의 ‘남성성’ 히피족과 LSD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1960년대 초중반 런던에 나타난 모드족과 그들이 애용한 진정제, 암페타민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모드족(Mods)은 1950년대 영국의 경제적 급성장의 시기를 거쳐 나타난 ‘풍요의 아이들’이었지만, 부모세대의 가치관에 반감을 가지고 모든 일에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들이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도시문명이나 산업화를 거부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낭만적인 기대감을 가지며, 속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강박증적으로 외모에 신경을 썼다. 프랑스 댄디풍의 줄무늬 양복에, 스프레이로 짧은 머리를 부풀린 이들은 말 그대로 “패션 잡지에서 그대로 튀어 나온”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들은 항상 길거리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매만졌고, 옷을 더럽힐 염려가 없는 유선형디자인의 이탈리아제 베스파 스쿠터를 몰고 다녔다. 백인노동자 계층이 주를 이루었던 모드족은 평일에는 자본의 ‘맹목적인 연료로 소비되는 것을 묵묵히 감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삶을 증폭하여 노동의 과정에서 나온 자본의 상품들의 적극적인 소비자가 되기를 원했고, 상류층의 사교파티에서나 어울릴 옷들을 자신들의 뒷골목으로 끌어내렸다. 모드족은 20세기의 모던 드럭(modern drug)이라고 할 수 있는 암페타민을 이용했는데, 암페타민은 불면증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잠과 게으름을 경멸하는 모드족들이 6일간의 지루한 노동이 끝나고 난 후, 48시간 동안의 주말을 잠을 자지 않고 즐기는 데 몰두할 수 있었다. 이는 남성다운 청년이 주말 내내 어머니의 영역에서 벗어나 거칠고 추운 공간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암페타민은 여성에 대한 성욕은 억제시키고 공격성과 속도감을 증대시킴으로써 그들의 남성주의적인 성향에 영향을 미쳤다. 모드족들은 여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남자친구들의 눈에 띄기 위하여 멋을 부렸다. 히피족들에게 사랑의 행위는 하나의 목적이었지만, 모드족들의 연애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모드족의 우상이 된 ‘더 후(The Who)’의 공연장에서는 “늙기 전에 죽어버리고 싶다”는 노랫말과 함께 기타를 때려 부수는 일이 연례가 되어가고 있었다. 평화를 가져오는 약물, LSD 모드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하위문화 집단이 선택한 드럭이 남성성과 공격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평화주의와 자연에의 회귀, 그리고 자유로운 사랑을 주장하는 히피족들에게 환각제인 LSD는 최고의 선택으로 보인다. 히피족이 만약 암페타민이나, 사람을 차분하게 진정시켜 내면으로 파고들게 하는 코카인같은 드럭을 선택했다면 그들의 성향은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을 지도 모른다. 가장 강력한 환각제 중의 하나인 LSD(Lysergic Acid Diethlamide)는 호밀에 생기는 곰팡이인 맥각에서 추출되는 화학물질로, 1938년 스위스 화학자인 앨버트 호프만이 처음으로 곰팡이에서 추출해냈다. 호프만은 1943년 LSD의 성질을 연구하는 실험을 하던 중 실수로 피부에 LSD액 소량을 주입시켰다가 이상한 의식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LSD를 복용하면 혈관 수축물질인 세로토닌의 반응에 이상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이 뇌에 어떻게 작용하는 지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미량만 복용해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이한 왜곡과 심한 환각과 망상을 불러일으키거나, 충동적인 개방성, 혹은 사랑의 감정상태를 끌어온다. LSD는 주로 기분 좋은 각성효과를 가져온다고 알려져 있지만,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약을 복용하거나 다른 약과 함께 복용하면 극심한 우울증 등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LSD는 대부분의 다른 약물들과는 달리 중독성이 없다. 초기에 LSD는 각종 심리 치료, 특히 성기능 장애 치료 등 의학 분야에서만 연구, 활용됐으나 LSD의 환상적인 효과에 대한 소문은 급속하게 퍼져서 점차 많은 사람들이 LSD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히피공동체에서 찾은 낙원의 세계 LSD를 본격적으로 대중화한 사람은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였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티모시 리어리는 LSD의 효능에 흠뻑 빠져, 대학에서는 LSD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 신비의 약물이 ‘정신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사물의 진리를 깨닫게 하여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또 ‘자기애가 아닌 집단에의 소속감’과 ‘타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약물이 평화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티모시 리어리는 스스로가 LSD를 복용한 후 처음 만난 여성과 하루 만에 결혼식을 치렀으며, 그의 이런 모습과 여러 히피들이 집단으로 LSD를 복용하고 환각에 빠져들어 집단적인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 TV를 통해 공개되면서 수많은 청년들이 히피공동체를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모여들었다. 베트남전, “상대가 자본주의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공산주의자로 없애버려야 한다”는 덜레스(1953년 D.D.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 반공주의자)식의 광적인 공산주의 혐오, 그리고 이기적인 소비지상주의에 지쳐있던 젊은이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이 히피공통체에서 이상적인 낙원의 모습을 발견했다. 히피족들은 이 낙원을 미래의 어떤 상상의 공간이 아닌, 언어가 존재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상정했다. LSD에 취한 이들은 환각 상태에서 이성적인 언어가 무너지고, 시간과 공간 등 모든 견고해 보이는 것들이 왜곡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데, 히피들은 꿈을 꾸는 듯 느리게 공중을 부유하는 듯한 이 상태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가 있는 경험과 다름없다고 느꼈다. 모든 자연의 근본과도 같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울려오는 무의식의 메시지와 접촉하려고 했는데 이 메시지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 완전한 자유와 사랑이 있는 세계였다. 히피의 남성들은 스스로를 아버지의 폭압에서 벗어나 어머니의 손길에 의해 순화되고 중성화된 인간으로 보았으며, 거친 남성성 과시하는 행위를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곤 했다. 또한 성 억압적인 당시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프리섹스주의를 실천하면서, 자신들의 ‘성의 해방’을 통하여 ‘성의 평등’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구체적인 문제를 무시한 프리섹스주의적인 성의 해방이 성의 평등과 동의어가 될 수 있었을까. |
히피운동의 여성주의적 한계 |
히피문화 속 ‘여성’의 의미-2 |
1969년 8월, 뉴욕 근교의 한 농장에서 사흘간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유토피아와 같은 사랑과 평화의 황홀경을 보여주었다. 애초에 유료콘서트로 기획되었으나 모든 표가 매진되고 표를 구하지 못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자 주최 측은 무료공연을 선언한다. 히피들은 지금까지 음반기획사들이 꾸려 온 비싼 공연들에 불만을 표시해 왔고, 물질주의를 배격하고 공유정신을 내세웠던 히피들이 공연티켓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구걸이나 도둑질, 대마초를 키워 파는 방법들뿐이었다. 따라서 이번 무료축제는 그들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것이기도 하면서, 타인이 기획하고 마련한 축제에 초대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축제를 만들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과 음식이 부족하고 화장실도 엉망인데다가 사흘 내내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등 객관적인 상황은 엉망이었지만 우드스탁의 젊은이들은 음식과 약 등을 서로 나누어 쓰면서 평화의 제전을 만들어 낸다. 우드스탁의 평화와 알타몬트의 폭력 30만~40만의 젊은이들이 뿜어대는 대마초의 연기와 LSD의 기운 가운데 슬라이 앤 패밀리 스톤은 대표적인 드럭송 ‘나는 너를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고 싶어’(I want to take you higher)를 부르고 크로스비 스틸 내시 앤 영은 ‘나무 배’(Wooden Ship)를 통해 불만스러운 나라를 버리고 (노아의 방주와도 같은 나무배를 타고) 유토피아로 떠나자고 노래한다. 반전의 메시지도 빠지지 않았다. 컨트리 조 맥도널드는 ‘I feel like I'm fixing to die rag’에서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관에 실려 돌아오는 첫 번째 부모가 되라”고 말하면서 베트남 전에 찬성한 사람들을 향해 냉소적인 저주를 내뱉었다. 그룹 Byrds의 데이빗 크로스비는 “만약 정치가들이 LSD를 맛본다면 전쟁은 끝나게 될 텐데”라며 자신들의 천국이 모든 공간으로 전이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말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의 보컬 그레이스 슬릭(Grace Slick)은 그녀를 둘러싸고 음악을 듣는 젊은이들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공연에서 “우리는 자유, 그 중에서도 프리섹스를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관중들 사이에서는 “성적인 반응이나 남성성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으”며, “LSD에 취해 서로에 대한 사랑에 빠져있는 공동체적인 상태가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레이스 슬릭의 이러한 평가는 사랑과 평화의 축제인 1969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그대로 증명되는 듯 했다. 하지만 바로 몇 달 뒤 열린 알타몬트(Altamont) 페스티벌에서 우드스탁의 꿈은 악몽으로 변한다. 우드스탁의 열기를 재현하고 싶었던 롤링 스톤즈는 다른 유명한 사이키델릭 밴드들을 초청하여 콘서트를 연다. 그러나 롤링 스톤즈가 경호대로 불렀던 악명 높은 오토바이 폭주족 헬스 엔젤스(Hell's Angels)의 멤버가, 백인여성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한 흑인관객을 죽이는 비극이 벌어진다. 또한 약물과용으로 3명이 사망하고, 여러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는 등 온갖 끔찍한 사고들이 벌어져 가장 추악한 행사로 기록되었다. 공연장 밖에서도 알타몬트 페스티벌에서의 문제를 예외적인 일로 묻어버릴 수 없게 만드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집단생활을 하던 히피 찰스 맨슨이 비틀즈 곡 ‘Helter, Skelter’에서 영감을 얻어 여배우 샤론 데이트를 교살시키고, 히피들의 상징적인 장소 하이트 애쉬베리에서는 LSD에 만취한 여성이 집단강간을 당한 후 살해된 채 발견됐다. 사람들은 1960년대 젊은이들의 저항운동이 그 이면을 드러내며 막을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사랑’예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히피운동이 왜 실패한 시도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기 힘들다. 현실과 동떨어져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유토피아적 관념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어떤 저항적인 코드든지 기존 의미체계 속으로 끌어당겨 대량생산되는 상품의 형태로 전환시켜버리는 지배문화의 무차별적 힘이 이들의 순수함을 변질시킨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히피운동이 평화나 사랑, 자연과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외부의 권력관계를 그대로 번복했다는데 그 모순이 자리 잡고 있었다. 히피 그룹들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의식을 공유하긴 했지만, 그 반대의 구호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고, 대체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당시 베트남전과 함께 가장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였던 흑인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대부분 백인 중산층 자녀였던 이들은 그들의 부모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흑인들도 그들의 문제를 ‘사랑’에 대한 예찬만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히피운동이 사그라질 무렵 미디어에서는 히피 청년들에게 날마다 ‘집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이들의 중산층 부모들은 ‘여전히 너희를 사랑한다’는 피켓을 들고 다니면서 그들의 하얀 자녀들이 짧은 방랑을 끝마치고 안식처로 되돌아 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저항적인 흑인청년들에 대해서는 냉혹한 시선을 보냈다. 당시 FBI국장이었던 에드가 후버(Edgar Hoover)는 급진적인 흑인 학생집단인 블랙 팬더스당을 ‘국가 최대의 적’으로 규정짓고 폭력적인 탄압정책을 펼쳤다. 히피들이 그들의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흑인들은 그들의 집 안에서도 끌려 나와 폭행을 당했다. 히피공동체 그루피의 의미 히피운동은 당시 여성해방운동에 대해서는 보다 더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사이키델릭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밴드로 평가되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보컬이면서 히피들의 히로인이었던 그레이스 슬릭도 여성해방운동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다른 많은 중요한 사안들 앞에서 그건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이다. 왜 갑자기 요리를 못한다고 선언하고 그것에 대해 불평을 해 대는지. 여기 이 집에서 많은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아무도 나에게 요리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레이스 슬릭이 요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당시 제퍼슨 에어플레인 멤버들이 공동 거주하던 샌프란시스코의 집에서는 셀리 만(Sally Mann)이라는 나이 어린 그루피(groupie)가 요리와 세탁 등 모든 가사 일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루피들을 소개한 1969년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의 기사에 따르자면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멤버들은 셀리 만에게 고맙다고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레이스 슬릭은 자신이 여성이면서도 히피문화내의 여성의 문제, 그루피들의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열성 소녀팬들을 지칭하는 모멸적인 표현 ‘그루피’란 개념이 생긴 것이, 남성적이고 여성폄하적인 성격을 가진 파워풀한 남근 록(Cock Rock)이 주류가 된 1970년대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여성적 가치를 중시하고 성의 해방을 내세웠던 1960년대란 것은 얼핏 이상하게 여겨질 지 모른다. 하지만 1960년대 중후반 히피운동에서 예찬한 여성성이 단지 자연으로서의 어머니, 즉 현대사회에서 벗어나 자궁으로 퇴행하고 싶어하는 소년들을 위한 개념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히피운동이 주장했던 자유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집에서 벗어나 남성들처럼 저항의 길을 가고 싶어했던 여성들에게 허용되었던 것은 오직 ‘프리섹스로의 길’뿐이었다. 모든 가치를 전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웠던 급진적인 뮤지션 프랭크 자파(Frank Zappa)는 그루피들을 ‘성 해방의 자유의 전사’로 묘사하며 모멸적인 예찬론을 폈다. “결국 그녀(그루피)들의 대부분은 사무직 노동자나 공장 노동자 같은 평범한 남자들과 결혼하겠지. 남자들은 화려한 성적모험을 거친 (성적으로) 기술이 뛰어난 소녀들을 얻게 되니 행운이 되겠고, 이건 나라 전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남자들은 더 행복해지고, 그들은 자기 일을 더 잘하게 될 테니까.”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추앙받는 지미 헨드릭스 역시 “나는 (내가 연주를 했던) 도시를 오직 그곳의 여자들에 의해서만 기억한다. 너를 둘러싸고 네 양말을 빨아주고 네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무엇이든 하는 여자들 말이야”라고 말하며 그의 여정에 그루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했다. 가사노동, 히피여성들에게 주어진 의무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1970년대 펑크 무브먼트에서 여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등장하기 이전에 록음악에 여성은 부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한다. 1960년대 록음악에서 여성이 어떤 의미로든 존재한 흔적을 찾는다면 그것은 그루피에게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제니스 조플린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그나마도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고 약물 중독으로 사라지지 않았는가) 여성이 그 시대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착실히 타이프 치는 것을 배워 비서로서 사회에 진출하는 것보다는 그루피가 되어 그 자신이 추앙하는 뮤지션의 삶의 태도를 흡수해 버리는 것이 여성에게는 매우 급진적인 선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선택의 대가로 그루피들은 자신들이 혐오했던 평범한 가사일들을 자신의 영웅을 위해서는 불평 없이 해내야 했다. 가사를 돌보는 역할은 그루피들에게만 부여된 것이 아니라 히피공동체 전체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공동의 의무였다. 남성히피들이 대지의 어머니, 태고의 공간을 꿈꾸며 그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는 동안 여성들은 이 모험의 현실적인 필요들을 충족시켜주면서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 했다. 공동체에서 바느질, 요리, 세탁, 아이 돌보기는 당연히 여성의 몫이었고, 자연친화적 이념 때문에 전기나 냉장고, 세탁기 같은 문명의 기기들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알로 거스리(프로테스탄트 포크음악의 대부로 평가 받는 우디 거스리의 아들)의 노래 ‘Alice's Restaurant’(1969)는 “쓰레기를 버려 벌금 50달러를 문 것이 전과자로 처리되어 베트남 전쟁의 징병결격자가 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담은 반전 송으로도 유명하지만, 저항문화집단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노래이기도 하다. 교회를 개조해서 만든 공동체 ‘엘리스의 레스토랑’에서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꿈꾸는 남편은 늘 취해 있고, 모험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오고 가지만 엘리스는 이 모험가들의 지렛대가 되기 위해 거기 머물러 끊임없이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 ‘엘리스의 레스토랑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후렴은 여성을 모든 반문화적인 모험의 디딤돌, 혹은 반문화의 영웅들에게 수유를 해주는 만인의 어머니 위치에 묶어두었던 남성들의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중적 잣대 속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분열증 이러한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은 히피운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히피운동에 모태가 된 1950년대의 반문화 비트닉의 영웅인 잭 캐루악(Jack Kerouack)은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방랑적 여행을 떠나는 내용의 책 <길 위에서 On the Road>에서 ‘대지의 어머니’인 자연과 직접 대면하기 위해 땅에 구멍을 뚫고 자위를 한다. 이는 남성이 자연을 찾아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이 여성이 가야 할 과정과는 일치할 수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여성이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주변부로 물러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실제로 잭 캐루악은 작가 지망생이었으며 이 여행에 동참하고 싶어했던 부인(조이스 존슨)의 요청을 방해가 된다면서 거절했으며, 자신의 남성친구와 함께 길을 떠났다. 여성은 언제나 ‘아이나 원하므로’ 진정한 방랑의 길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런 그가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뒤, 어머니의 돈과 보호를 받으면서 글을 쓰고 평생 살아갔다는 것은 아이러니 한 일이다. 여성은 방해가 되는 한은 부르주아적인 가치를 추종하는 세력이며,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한에서는 모성적인 안식처를 제공하는 자연적 공간이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정치적인 학생조직 SDS(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를 탈퇴한 마지 피어스(Marge Percy)는 급진적인 학생운동 안에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여성에 대한 관념은 인습적이고 가부장적이었다. 그들은 총을 멘 베트남 여성이 그려진 포스터를 가리키며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이 진짜 해방된 여성이지. 만약 당신이 저런 역할을 한다면 그때 나는 당신이 혁명가라고 믿을 거야.’ (중략) 여성은 패배자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여성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부르주아적인 주관성에 머물며, 게다가 그 사고가 선천적으로 반혁명적이라는 것이다.” 1960년대의 히피문화 안에서 여성들은 기존 가치에 반기를 둔 저항에 동참했으나 그 저항에서 배제된 것은 너무도 많았다. 남성들의 혁명이 성공을 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노예상태에 두는 것과도 같았다. 여성들은 방랑의 길에서도 여성적인 역할을 다하도록 요구받았고 또 그것 때문에 비난 받기도 했다. 여기에서 분열증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히피들이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지금 2000년대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그 모순 속에서 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
피겨스케이팅은 인종적 텃세를 극복한 것일까 |
흑인선수 쉬르야 보날리의 ‘백플립’ |
최근 들어 국제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는 김연아 선수의 인기로 국내에서도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피겨 종목 중 특히 여성 싱글 부문은 아시아계 선수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트리플 악셀’로 유명한 일본의 이토 미도리라는 선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피겨스케이팅은 백인들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이후 크리스티 야마구치, 미쉘 콴 등 아시아계 미국 선수들이 이름을 떨치게 되고, 일본이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피겨 강국으로 발돋움하면서 피겨스케이팅의 중심은 동양계 선수들에게로 옮겨졌다. 피겨스케이팅은 이제 백인 중심의 인종적 텃세를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피겨 팬들은 종종 ‘왜 피겨스케이팅 계에서 흑인 선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 의문을 제기한다. 그 이유가 꼭 피부색에 대한 차별 때문만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그러나 피부색이 장벽 요소 중 하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비운의 선수로 기억되는 쉬르야 보날리 1994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롱프로그램 경기 중, 한 선수가 심판들 앞에서 아마추어 경기에는 금지된 기술인 백플립(뒤로 공중제비를 돌아 착지하는 것)을 보란 듯이 해버린다. 장내는 술렁이고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던 세계 팬들도 놀라움에 휩싸였다. 피겨 팬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이 사건의 주인공은 프랑스 출신의 쉬르야 보날리(Surya Bonaly)선수. 그는 1973년 프랑스 태생으로, 피겨 팬들에게는 탄력 있는 스핀과 뛰어난 점프 실력으로 주목 받았지만 실력에 비해 ‘흑인’이라는 이유로 평가 받지 못한 비운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1988년부터 9번 연속 프랑스 챔피언, 1991년도 주니어 월드 챔피언, 1991년도부터 5회 연속 유럽챔피언, 거기에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만 3번이라는 이력이 말해주듯 쉬르야 보날리는 톱랭커에 이름을 올릴 충분한 자격을 가진 선수였다. 여자선수로서 4회전 점프를 시도할 만큼 점프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기술의 여왕으로 불린 보날리지만, 유독 예술성 점수에 있어서 만큼은 그에 걸맞은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해 세계 정상의 문턱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빙판은 미끄럽고 메달의 색깔에는 어느 정도 ‘운’이라는 요소도 따르긴 하지만 보날리가 예술 점수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은 예술적 표현의 부족함이라기보다 외모에서 온 차별이라는 견해가 더 설득력 있다. 피겨스케이팅이나 체조 등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겨루는 스포츠의 경우, 특히 외모에 대한 편견이 선수에 대한 평가와 동일시 되는 일이 종종 목격된다. 아테네 올림픽 리듬체조 경기를 중계하던 KBS의 한 해설위원은 흑인선수가 나오자 ‘피부색은 검지만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보날리와 같은 흑인이지만 세계선수권 우승을 거머쥔 데비 토마스는 ‘갈색’의 피부에 가녀린 몸매를 지녀 백인들 취향의 외모였던 데 반해, 쉬르야 보날리는 ‘여성스럽지 않은’ 근육질 몸매에 그야말로 ‘검은’ 피부색을 지녔고, 이런 점이 아름답지 않다고 받아들여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스포츠 무대의 외모, 인종차별 조롱한 ‘퍼포먼스’ 피겨에서 예술 점수는 심판의 재량에 의해 매겨진다. 따라서 국가나 선수의 명성, 인종에 따른 편견이 개입된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현재 각 요소 별 점수를 합산해 총점으로 겨루는 신채점제에 비해, 6점이라는 만점을 기준으로 두고 상대적으로 점수를 매겼던 구채점제는 이런 비판에 더욱 취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김연아 선수를 두고 신채점제의 수혜자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기술이나 예술적 수행력을 가지고도 실력 외적인 이유로 저평가될 가능성이 구채점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의미이다. 보날리 선수는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월등한 기술력을 가지고도 세계선수권이나 올림픽에서 납득하기 힘든 판정을 받은 것에 대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항의했던 선수다. 1994 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홈 코트의 이점을 등에 업은 사토 유카 선수에게 금메달을 뺏긴 보날리는 시상대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시상대 옆에 서서 메달을 받았다. 그는 은메달을 목에 걸자마자 벗어 들고 눈물을 쏟았다. 세 번의 올림픽 참가 중 마지막 대회였던 나가노 올림픽에서 선보인 ‘백플립’은 아마추어 시절의 종지부를 찍는 시점에서 ‘한풀이’를 위한 퍼포먼스로 보였다. 당시 올림픽에서 보날리는 마지막 그룹 중 3회전-3회전의 고난이도 콤비 점프를 넣은 유일한 선수였음에도 쇼트 프로그램에서 6위를 기록했다. 이어진 프리 프로그램 경기에서 초반에 삼회전 살코 점프에서 실수를 하면서 메달권에서 벗어나자,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부상위험이 높다는 이유로 금지된 기술인 '백플립'을 심판들 코 앞에서 선보였다. 모든 점프는 한쪽 발로 착지해야 한다는 규정에 맞춰 ‘한 발로 착지’하면서. 인종도 국경도 초월한다는 스포츠 무대가 사실은 더 차별적이었다는 점을 통렬하게 조롱한 한 판 ‘시위’였다. |
2008/03/21 [02:32] ⓒ www.ildar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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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진심으로.부가 정보
내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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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ㅎ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