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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2

나는 그 순간에 떠오른 엄마의 얼굴에 의아했다. 그리고 덩달아 떠오른 그 언니의 얼굴에 더 의아했다. 초등학교때부터 쭉 같은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얼굴을 봤던 그 언니.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예전보다는 분노가 많이 사그라든 것 같다. 사실 더 이상 그들을 붙들고 싸우며 매달리고 싶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

 

그 언니는 목격자이면서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이후에도 같은 초,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엘리베이터에서 수없이 마주치며 왠지 모를 죄책감과 부끄러움, 껄끄러움을 느꼈다. 발가벗고 그 사람 앞에 서 있는 기분을 김해를 떠날 때까지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나한테 엄마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는가?

 

어렸을 때 엄마는 내가 기억하기로 한,두번 정도 폭발적으로 나에게 분노를 표출했던 적이 있어 미워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항상 집에 없고 한달에 한두번 볼까 말까 해서 사실 별로 기억에 없다. 일상적으로 나를 키워 잔소리를 하는 할머니보다, 무서운 아빠, 오빠 보다 자상하고 다정한 엄마가 좋았다.

나를 데리고 외갓집으로 가고 아빠가 빌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일년에 한 번쯤은 반복되어서 그러려니 한 기억이 한 자리 차지.

 

고등학교 때 입원했을 때는 이혼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빠는 또다시 약속을 했었다. 

그러다 19살 때는 사라진 엄마를 원망했었다. 할머니와 나는 약자축에 속했었으니까. 경주에서 비오는 밤 빛을 비추던 그 무덤들과 추위때문에 돋았던 소름, 사진, 가게 아주머니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세포에 꽂혔었다. 낮에는 밤이 오지 않기를 미치도록 기도했었다. 겁 났었다. 엄마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현실이. 그리고 사건 후에도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해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현실도 엄마가 있었으면 나았을 거라고 책임을 전가했다.

 

그래도 돌아와줬으니까 날 찾아줬으니까 괜찮다 괜찮아졌다

 

그리고 나도 비겁했으니까

말리는 척 하다가 결국 무서워서 내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궈버리는 것 밖에 못 했으니까

경찰에 신고할 수 있었는데도 안 했으니까

더 적극적으로 이혼하라고 안 했으니까

나도 공범이다. 침묵하는 가족 속에 내가 있다.

 

그래서 싸이코 드라마를 하고 싶지 않다. 엄마가 나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무섭다. 아직은 무서운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지금 억누르고 있는 그 무엇이 폭발하는 것이 견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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