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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7/11
    역시..(11)
    은수
  2. 2007/07/09
    불가(능)한 상상(10)
    은수
  3. 2007/07/06
    100분 토론(7)
    은수
  4. 2007/07/04
    성폭력의 개념화
    은수
  5. 2007/06/27
    '사회주의 여성'과 연애(1)(7)
    은수
  6. 2007/06/24
    하우스 키퍼 제도(6)
    은수
  7. 2007/06/19
    폭력과 욕망 사이(7)
    은수
  8. 2007/04/20
    공장이여 잘 있거라
    은수
  9. 2007/04/19
    버지니아 총기난사, 무엇을 말할 것인가?(3)
    은수
  10. 2007/03/26
    사랑은(2)
    은수

역시..

imaginaire님의 [정신질환자가진단표] 에 관련된 글.

 



예상은 했지만 정말 상태 심각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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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상상

 

..다른 누군가의 노동에 기생함으로써 살아가고 세상의 일부인 자신조차 바꾸지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자고 한다.             

 

..현실 속 철의 노동자들은 단명하게 될 것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24시간 활동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흔들리지 않고 투쟁하는 자'로서만 규정지으며 이상화하지말고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인정하며 성찰할 때이다.

 

..프리섹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남성들은 진정한 프리섹스를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리섹스주의자라고 말하는 여성들의 욕망은 여전히 남성들의 욕망으로 치환되기 쉽다.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

 

..남성활동가들은 정세분석과 투쟁방침을 말할때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한번의 성관계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신경하고 무지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어떠한 조직도 공개토론회 또는 교육의 장에서 섬세하게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나 피임지식 따위를 주제로 교육하고 토론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사에는 노동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수많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갈등, 모순된 욕구와 정체성이 배제되어 있다. 여성노동자들의 일상을 지배하던 계층상승욕구, 생존전략으로서의 결혼에 대한 욕망, 결혼을 가능하게 하는 연애에 대한 욕망은 찾아보기 힘들고, 오로지 투사로서의 정체성만 드러나 있다. 따라서 한국 여성노동운동사와 그 기록에는 여성노동자를 둘러싼 일상의 욕망과 저항자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위의 구절들은 조주은의 책,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중에서 따온 것이다.

 

며칠전에, 정확하게는 지난 토요일에, 아이공에서 하는 섹슈얼 파티에 다녀왔다.

린다 벤글리스와 바바라 해머의 작품에 대한 얘기도 있었지만.

'음담여설'이란 이름에서처럼, 본격적인 화두는 자기 욕망, sex..그런 것들이었다.

사실은 '잘 모르는 사람'들과 '그런' 얘기를 나눈다는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홍대거리에서나 마주친다면 조금은 얼굴이 빨개질 것 같다. *^^*)

그 중에 한 분이 홈에버 파업현장에 갔다오신 분이었는데 그 곳의 긴장감 돌고, 팍팍한 분위기와 달리, 이 곳의 편안하고도 '촉촉한'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나도, 그날의 그런 끈적끈적하고도 야시시하면서 촉촉한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주제는 없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그런 고민이 들었다.

왜, 파업현장에서는 '촉촉한' 얘기들을 해서는 안되는 걸까.

노동조합은 촉촉하고 끈적끈적하면 안되는건가.

물론 나도 파업현장이라는게 특히 점거투쟁의 경우,

언제 용역깡패들이, 혹은 공권력이 투입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점거투쟁을 하면서 지난 번 내가 홈에버에 갔을 때도,

집회 이외의 시간들을 활용하여 여러가지 교육들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단 한꼭지도,

관계의 문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욕망하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을까.

 

그건 불가능한 상상인가.

아니면 해서는 안될(불가), 상상인가.

 

홈에버만 하더라도 점거농성중인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어떤 여성노동자는 불편한 잠자리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일 것이다.

어떤 여성노동자는 공권력이 투입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을 뒤척일 것이다.

한편에서는,

어떤 여성노동자는 남편이 애들을 밥 먹여서 제때 학교에 보내고 있는지 걱정으로 몸을 뒤척일 것이고

어떤 여성노동자는 파업이 끝나고 돌아가면 집안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을 거라고 한숨쉬며 몸을 뒤척일 수 있다.

 

그리고 또 어떤 여성노동자는 sex를 못한지가 벌써 며칠째야, 하면서 끓어오르는 자위욕구를 애써 참으며 몸을 뒤척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상상들이 가능,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어떤 상상들은 정당한 것으로, 어떤 상상들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일까.

 

어떤 운동도 개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는 방식으로는 결코 '확대'할 수 없다.

운동이 희생이 아닌 이상,

누구나 특정한 자기의 욕망을 운동을 통해 실현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자기 만족감을 얻는다. 

 

더군다나 그것이 성적욕망이라해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분명히 그 욕망을 억누르는 사회적 규제, 각자에게 다르게 구성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들,

그와 같은 연결고리들을 찾을 수 있을텐데.

 

그런데 왜,

여성노동자들과 그녀들이 모인 노동조합과 그녀들이 싸우는 투쟁안에서

그녀들이 원하는 것, 혹은 불편하게 느끼는 것들은 이야기될 수 없는 걸까.

왜 그 모든 것들은 항상 '계급의식'과는 무관한 것으로 읽혀버리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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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 토론

100분 토론 "한국의 노동운동, 위기인가" 하고 있다.

 

비정규직법 나오면서부터는 완전 난장판이다.

정작 대답해야될 문제에 대해서는 둘 다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말이다.

 

이용득 사회개혁적 조합주의는 하루 걸러 하루로 언론에 나오는 것 같다. 

 

 

노동운동의 위기론에 대해서 노동운동 내부의 패널을 세운건 참신한데

(물론 많은 시청자들은 자기들끼리 물고뜯고 한다고 그 자체를 위기로 보겠지만 말이다.)

결국은 양대노총, 지도부 간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거잖아.

 

그리고 또,

100분 토론의 이분법적 구도가 마치 민주노총이 대단히 전투적인 듯한 느낌을 주는 듯하다.

생디칼리즘을 넘어 정치투쟁까지도 하고 있는데, 외부의 공격이 문제다- 뭐 이런 느낌?

 

 

 

뭐 어찌됐든, 제일 코미디 같은 상황은 그거였다.

 

홈에버 투쟁을 하고 있는 여성조합원이 나와서 비정규직 보호법은 보호의 의미가 없고,

오히려 기간제노동자들을 합법적으로 해고하는 수단이 된다는 비판을 했다.

 

 

 

이용득 위원장. 말을 더듬으며.

 

"에버,,,,홈에버인가요?"

 

 

 

 

(한국노총 사업장이 아니라 정말 잘 모르시나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이랜드 사장이 워낙 노사관계에 악명높은 인간이라 들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런 부당해고는 없었을거라는, 법 자체는 문제 없다는 의미였다.

 

 

위기는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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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개념화

...(기존의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을 법 담론 안의 범죄로 입증해야 했고 성폭력 사건을 '폭력행위', '사실'로 가시화시키는 데 역점을 두면서 여성의 특수한 맥락과 경험을 소홀히 하게 된다. 피해 여성의 다양한 목소리의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다음 단계인 치유와 회복, 법적절차에서의 한계와 싸우는데 주력한다. 주관적인 피해자의 관점이라서 성폭력을 주장하는 여성을 신뢰할 수 없다는 남성 중심적 지배담론에 대한 부담 때문에 반성폭력운동 측은 본의 아니게 지배담론의 흐름을 비판하면서도 '폭력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가시화시키는데 주력한 것이다. 또한 성폭력 고소에 대한 지배권력 측의 명예훼손, 역고소 등의 반격은 반성폭력운동단체로 하여금 더더욱 성폭력이 성관계가 아닌 '강간/성폭력'임을 입증하게 만들었다. 왜 그것이 여성에게 성폭력일수밖에 없는가를 분석하여 성폭력이 구성된다는 것을 보이기보다, 그 사실(fact)의 존재함을 강조(증명)해야만 했다.

....특히 강간을 성관계로 만들 수 있는 남성권력 앞에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주체를 '투명하게' 만들수밖에 없었다. 남성의 공격으로서의 폭력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대상을 무력하게 만들수록 그 효과는 커진다.....따라서 반성폭력 운동이 전제한 여성은 동질적인 피해자 여성이었다.

 

...모든 여성이 잠재적 피해자로 구성된다. 그래서 성적 쾌락을 추구한 여성은 피해자일수 없으며 피해여성은 성적주체일수 없는 이분화된 논리속에 여성들은 갇히게 된다.

 

...성적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이론에서의 강간에 대한 설명은..여성을 개인으로 간주하여 그녀의 성관계 안할 권리를 부정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성별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며 개별적인 인간으로서의 남녀는 자연적인 성 역할을 부여받은 자율적인 존재라고 가정하는 지배담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법 담론은 강간과 성관계의 구분을 '동의'의 문제로 놓고 몸의 결정권에 의미를 부여하는 듯 하나 여성과 남성의 관계, 특히 섹슈얼리티와 성별 권력의 문제를 간과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동의의 문제로만 판단할 수 없는, 여성의 특수한 맥락적인 요소를 전혀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성폭력/강간은 몰성적인 개인간의 권리 침해의 문제로 환원된다.

 

....여성의 삶의 맥락에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별히 거부할 필요가 없는 상대방의 성적 요구에 대해 셔성들은 다양한 의미로서 그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다른 계기로 인해 그 관계의 변화가 생겼을 때 그동안 참았던 여러 행위에 성폭력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관계안의 고통을 언어화하는 순간이다. 이처럼 여성들이 성폭력을 말하는 경우는 여성의 맥락에 따라 다르다. 또한 그 의미도 다를 수 있다.

 

....여성들이 성폭력을 문제화하는 것은 자율적이며 관계적인 여성됨, 성적인 통합성, 자존감의 침해를 언어화하는 것이다. 성별화된 관습에 의한 불편한/소통되지 않는/대상화된 느낌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자존감 침해는 없어진 것을 발견할 때의 느낌처럼 즉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 부착된/여성이 소유한 섹슈얼리티를 도둑질한 것, 그 결과가 성폭력의 피해가 아니다. 피해란 성별, 나이, 경제적인 요소 등과 어린 시절의 성교육, 성규범, 여성에 대한 가치 등으로 구성되는 주체가 그 행위의 지속여부, 그 남자와의 관계, 그 행위로 인한 수혜여부 등의 현재의 조건을 협상해서 구성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여성들에게 큰 피해/트라우마를 가져준다는 전제는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경험이 성폭력인가 아닌가의 질문을 가져오게 한다. 그것과는 다른 경험을 하는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면서 모든 성폭력 경험자는 피해자화된다...이것은 결국 성폭력의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심각한 죽음과 같은 고통과 피해를 강조하면서, 여성의 입장에서 고통의 피해가 없거나 쾌락이 존재하거나 아직도 상대방을 사랑하거나 등등 '성관계 같아 보이는' 성폭력은 성폭력으로 문제화하기에 어렵게 했다....그러나 성폭력을 말하는 여성들은 이렇게 단일한 피해자가 아니며 고통받는 피해자로서만 살아가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떤 행위성(자율성, 선택, 권력, 공모, 협상, 저항 등)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보다 오히려 성적 위계의 맥락에 다양한 여성의 행위성을 새롭게 위치시키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여성의 제한된 위치와 조건 안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위치가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그렇게 한계적이거나 제한적이지는 않다. 물론 여성 행위성의 인정이나 다양한 맥락의 제시가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는데 역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고통이 적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인정되지 않는, 다양한 방식으로 말해지는 여성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그 관계 내의 여성의 저항방식인 공모, 협상 때로는 무시 등의 행위성은 역의 개념이 아니다.

 

...인식주체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며 여성이 그렇게 해석하는 판단의 기준을 드러낼 때, 남성에 의해 재현되는 하나의 여성성이 아닌 여성 주체성의 다양한 고통들이 드러날 것이며 이는 성폭력 개념을 다시 구성할 수 있게 한다.

 

....이 지점에 성폭력 피해 개념의 어려움이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의 요구에 투명하게, 행위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위치하고 있다면 반성폭력 운동은 정말로 쉬울 것이다.

 

 

 변혜정(2004), "성폭력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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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여성'과 연애(1)

마감에 맞추어 허겁지겁 쓰기도 했고....여러가지로 부족한 글이지만...

내놓음으로써 비판받고 더 좋은 고민들을 하게 되겠지....^^

분량이 많아서 조금 나누어서 올려볼까 합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문제제기 및 기존 논의 검토, 허정숙에 대한 소개, 연애스토리이고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입장들, '사회주의 여성'의 연애가 이야기되는 방식, 범주화와 경계의 문제..

대략 소개하자면 그렇습니다. '계속보기'를 누르세요-

 

 

들어가며

 

   제일 처음 내가 ‘사회주의 여성’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막연한 호기심이었다. 신여성에 대한 책을 읽게 되면서, 이름조차 몰랐던 조선의 ‘사회주의 여성’들을 하나, 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신여성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소위 ‘사회주의 여성’으로 분류되는 이들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다. 사회주의가 당시 일제 식민지 시대와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나의 흐름임에도,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다고 불리는 이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가시화되어 있지 않은 ‘사회주의 여성’들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물론 거기에는 그 여성들을 ‘가시화’시킴으로써 내가 현재 얻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히 개입되어 있었던 점을 부인 할 수 없다. 지금까지 허정숙을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들에 대한 연구 흐름들 정리해보면, 처음에는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주로 곁다리로, 보조적인 역할로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허정숙이 활동했던 근우회의 경우 남성들이 중심이 되었던 신간회의 여성단체격으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설명 속에서 여성들은 그 자신의 활동보다는 ‘누구누구의 처’로, 예를 들어 주세죽의 경우 독립적인 존재이기보다는 박헌영의 아내로 유명한 식이었다. 물론 이런 점들을 비판하며 ‘여성들’ 자체에 주목한 연구들도 있다. 특히, 허정숙의 경우 그나마 잘 알려진 여성이라 연구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허정숙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데 그치거나(서형실 1992,신영숙 2006), 조금 더 깊이 들어간 경우에도 주로 공식적인 활동, 사회주의 단체 활동(송진희 2004)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많은 ‘사회주의 여성’들, 그 중에서도 허정숙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화려한’ 연애경력 때문이었다. 허정숙은 ‘조선의 콜론타이’로 불리며, 상대적으로 다른 여성들에 비해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특히 그녀에게 네 명의 남자애인이 있었던 까닭에, 붉은 연애의 실천으로 연애스캔들로 유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북한으로 간 이후에는 고위급 인사가 되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허정숙은 주목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논란이 되는 인물이었다. 나는 허정숙에 대해 알게 되면서, 허정숙의 연애에 대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그런 생각들이 당시의 조선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갈등과 마찰이 있었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 허정숙의 연애경험은 ‘화려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않았다. 그녀의 연애는 “여성운동가로서 그녀에 대한 평가가 그것과(연애경력) 무관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점을 부각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무시할 필요는 없는” 정도로 언급되거나, “너무 독특해 그의 활동을 여성운동가의 전형적인 활동 모델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서형실 1992: 287), 혹은 “사상적 방황을 반영하는 것”(박석분 1994: 139)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 연애 경험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에 입각하여(신영숙 2006) “붉은 연애를 실천했던”(최혜실 2006)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고, 이와 같이 모순되는 평가들이 허정숙을 따라다녔다. 

  한편, ‘사회주의 여성’과 연애에 대한 연구 경향은 주로 콜론타이즘과 붉은 연애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이들은 콜론타이의 『삼대의 사랑』,『붉은 사랑』과 같은 소설로부터 촉발된 논의를 소개하거나(이태숙 2006, 서정자 2004, 김경일 2005 외), 특히 연애사조의 변화와 함께 엘렌 케이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연애사상과 대립되는 지점 속에서 논의하였다. (김경일 2004, 홍창수 2004)

  이렇게 허정숙에 관한 자료를 찾고 그녀의 삶의 단편들을 하나하나 읽게 되면서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붉은 연애’를 실천했다고 말해지는 실제 인물들의 삶은 어땠을까? 그것은 ‘자유연애’와는 어떻게 달랐나? 허정숙이 보수적인 담론과 남성적 시선 속에서도 ‘조선의 콜론타이’로 기억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녀를 설명하기 위해 붙은 ‘사회주의’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김미지(2004)의 글은 ‘여성 사회주의자’와 연애라는 문제를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내가 제기한 의문들에 ‘사회주의의 시대’였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답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와 같은 것들이 가능했는지, 다른 여성들과의 공통점 혹은 차이점은 무엇이었는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나는 특히 관심을 가졌던 허정숙의 삶을 통해 ‘사회주의 여성’과 연애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 싶다. 허정숙에게 연애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는 세간의 말대로 정말 붉은 연애를 실천한 것인가? 그녀의 연애는 당대에 어떻게 받아들여진 것일까? 허정숙의 연애와 나혜석의 연애는 어떻게 같았고 또 어떻게 달랐기에?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독립투사화' 되어 있는 허정숙이란 여성이 갖고 있었던 균열과 갈등들을 보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다른 남성들과 함께 아무런 의심도 없이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에,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자유주의’ 혹은 ‘급진주의’ 여성이 대립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과연 연애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 속에서 ‘사회주의’와 같은 경계는 어떻게 움직이는 것일까? 만약 그렇게 경계를 짓는다면 그것은 누가 경계를 만드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나는 허정숙의 연애를 통해 일반적으로 많이 통용되는 신여성에 대한 범주화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허정숙에게 ‘사회주의’ 여성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가 무엇인지, 범주화의 욕구가 무엇인지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허정숙의 삶의 궤적1)

  허정숙은 1903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라 1902년, 1903년, 1906년, 1908년 등으로 출생연도조차 정확하지는 않은데, 북한으로 간 이후에 40대 중반의 나이가 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출생연도를 늦추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송진희 2004:3) 허정숙의 아버지 허헌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사상가들과 항일 운동가들의 재판을 변호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딸을 나라의 인재로 키우겠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고, 이런 덕분에 허정숙은 배화여고보를 졸업 한 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보수적이었던 아버지가 택한 관서학원은 수녀원 같이 엄격한 규율로 유명한 곳이었고, 그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허정숙은 3.1 운동 이후 귀국하였다. 그리고 배화여고보 시절 자신의 스승이었던 차미리사의 권유로 당시 기독교 계열의 여성들이 만든 ‘조선여자교육협회’에서 활동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그 자신도 배움의 욕구를 느꼈는지 1921년 중국 상해로 유학을 떠난다.

  중국유학 길에서 그녀는 첫 남편인 임원근을 만난다. 그리고 임원근을 비롯하여 박헌영, 주세죽, 그리고 김단야 등의 활동가들과 만나고 사회주의 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임원근과 허정숙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부친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한다. 1924년 귀국한 허정숙은 임원근과 결혼했으며, 1924년 말 첫 아들 표(일명 경한)를 출산한다. 이후 허정숙은 ‘신사상 연구회’(후의 화요회)를 거쳐 1924년 5월 창립된 ‘조선여성동우회’에 참가하였다. 또한 당시 허정숙은 남편 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의 최초의 여기자로 입사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와중 일명 신의주 사건으로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이 세상에 폭로되면서 임원근과 함께 검거되고, 허정숙은 곧 풀려났으나 임원근은 감옥에서 형을 살게 된다.

  이 때, 허정숙은 북풍회에서 활동하던 송봉우를 만나게 되고 세간에는 그들의 동거설이 떠돈다. 허정숙에게는 둘째 아들 길한이 있었다. 그녀를 비방하는 여론에 지친 상태에서, 결국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1년 반의 유학을 마치고 1927년 말 귀국한 그녀는 근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30년에 일어난 경성 제 2차 학생시위에 가담하면서 감옥에 수감된다. 이후 감옥에서 배운 의학지식을 활용해 태양광선 치료소라는 병원을 경영하기도 했다. 송봉우와의 동거는 미국유학을 갔다 온 직후까지 계속되다가, 송봉우가 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된 이후 전향하자 관계를 끊어버린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세 번째로 만난 이가『조선일보』기자이자 사회평론가 신일용이며, 셋째 아들 영한은 이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정숙은 193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어려운 조건이 되자, 훗날 연안파의 거두가 되는 최창익과 함께 중국으로 향한다. 중국에서 조선독립동맥과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등에서 활동했던 허정숙은 해방 이후 북으로 가서 활동하였으며, 이때에는 이미 최창익과의 연애가 끝난 상태였다. 최창익은 1946년 북에 가서 곧 결혼을 하였는데, 허정숙이 결혼식장에서 축사를 읽어주는 관계였다고 한다. 1957년 최창익이 연안파와 관련된 종파사건으로 숙청되었으나 북에서 허정숙은 줄곧 친김일성계로 있으면서 문화선전부장,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1991년 아흔 살이 넘은 나이로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허정숙의 연애를 들여다보기

-송봉우와의 연애를 중심으로


연애의 시대

  허정숙의 연애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전에, 당시 1920-30년대 조선사회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연애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연애’가 본격화되고 유행하였다. 사실 연애는 초기에는 ‘love’와 같은 외국단어를 번역하기 위해 계발된 단어였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오면서 ‘연애’라는 단어는 다양한 관계의 사랑 중에 남녀 사이의 사랑만을 번역했다. 이와 함께 오랫동안 우리말에서 ‘생각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었던 단어 ‘사랑’ 역시 남녀 간의 감정으로 의미변화를 겪는다. 그런 면에서 연애는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한 상품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1920년대에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연애라는 신상품은 등장하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팔려나가며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와 같은 언설들을 낳았다. (권보드래 2003) 특히 당시의 다양한 매체의 대중화는 연애를 대중적인 현상으로, 유행으로 만들었다. 1920년대 소위 ‘문화통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선사회에는 신문과 잡지의 창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교육을 통해 일정한 독자층과 필자 층이 형성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의 담론 장에는 신여자, 신여성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으며, 특히『신여성』을 비롯한 여성잡지는 신여성 담론을 생산하는 장이 되었다. (김수진 2006) 그리고 여기에서 신여성과 연애, 결혼,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공식적인 지면을 통해 논의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허정숙의 연애는 어떻게 알려졌을까? 송봉우와의 연애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조선공산당 내분의 주동자로 지목되다

  허정숙은 1926년 봄 둘째 아들 길한을 출산한 후, 1926년 12월 제 2차 조선공산당 대회에서 허정숙과 송봉우의 교제사실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 된다. 당시 조선공산당을 주도했던 화요계는 북풍회를 포섭하려다가 실패하게 된다. 허정숙은 화요계, 송봉우는 북풍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조선공산당에서는 북풍회원인 송봉우가 당의 정보를 얻기 위해 허정숙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규정하고, 이 둘을 조선공산당을 내분으로 빠지게 한 반역행위의 장본인으로 지목했다는 점이다. 2차 조선공산당을 주도했던 화요회계의 책임자였던 강달영은 코민테른에 이들의 관계까지도 모두 보고하였다고 한다.2) 더군다나 허정숙의 남편인 임원근은 제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당시 아버지 허헌은 사위인 임원근을 비롯한 제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수감된 이들의 변론을 맡고 있었는데, 이 일로 상당한 심적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집에는 온후하든 아버지 허헌을 비롯하여 싸늘하고 떼리케잇트한 공기가 떠도는 것을 엇절길이 업섯다.”3) 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미국으로 떠나는 허정숙

  그리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허정숙은 아버지 허헌과 함께 1926년 5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조선 땅을 떠났을까? 신문기사의 제목처럼 서양 시찰, 세계일주여행을 떠난 것일까? 당시 신문에는 “그동안 세상에 여론이 많고 여러 가지 변동이 많았던 (허정숙) 여사는 모든 것을 다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본연히 삼십일에 경성역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4)라고 보도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당시 세상의 여론이 그녀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추측해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허정숙 스스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 당시 그녀가 쓴 글에는 직접적으로 여기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우연한 일기회로 위대한 포부나 아름다운 동경을 가짐도 없이 기계적도 아니오 의식적도 아인 먼 길을 떠난거시였슴다. 더욱이 내가 본국을 떠나던 때는 본국의 사회는 내외의 큰 타격으로 동요상태에 잇섯고 일본에 잇는 우리 사회에는 상애회의 무리한 습격으로 대혼란상태에 잇는 때이엿슴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떠나가는 나의게는 양행의 깃븜이나 외국유람의 즐거움이라는 거슨 업섯슴니다. 그저 돌(석)에 마즌 듯 한 묵어운 머리와 수습할 수 업는 혼탁한 정신을 가지고 여정에 올은 거시엿슴니다.”5)


  물론 이 북미 인상기는 허정숙이 발달된 자본주의인 미국을 시찰하면서 느낀 바들에 대한 비판적 감상들이 대부분이다. (우미영 2004) 여기에서 그녀는 자신이 유학을 간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조선의 동요상태’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명망 있던 여성운동가가 ‘우연한 기회에’ ‘위대한 포부도 없이’ 미국행을 택했다 말하면서 ‘돌에 맞은 듯 한 무거운 머리’라 표현할 정도라는 것은 또 다른 근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은 아닐까. 그리고 그 근심이란 송봉우와의 연애설로 인해 비롯된 비난의 여론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또, 그녀가 1926년 10월 미국 콜롬비아 대학으로 유학하면서 서울로 보낸 편지6)에서도 “먼 곳으로 오고 보니 무엇이나 답답한 생각뿐입니다. 난마 같이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려 여기까지 와서 애쓰나 용이히 수습되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하여집니다.”라고 밝히고 있어, 미국으로 유학을 간 목적이 도피적인 성격이 짙음을 간접적으로 볼 수가 있다.


세상의 주목, 계속되는 논란

  한편, 허정숙이 떠나고 언론에는 허정숙의 남편이었던 임원근이 “옥중기”7)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감옥생활을 회고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여기에서 임원근은 “사랑의 결정체인 귀엽은 아들 『표』를 안아 주고” 싶지만 “모든 것은 환상이엇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허정숙은 당시 미국으로 떠났고 아들은 조선에 남겨져 이별했기 때문이었다.


만날 때 감정으론 한 평생 이별이란 모를 너니 호사한 건 사람 마암 엇지엇지 하노라다 그대와의 구든 맹서 모도 다 일케 됏네. 만날 때 감정으론 한 평생 이별이란 모를너니 사랑으로 맛낫던 님 사랑 식어 사라지니 낡은 도덕과 거즛 형식 두 사람을 매여둘 힘이 업서 감각 업는 손길가치 스르르 푸너젓네.


  이와 같이 임원근은 자신의 심경을 담은 시를 글 속에 남기기도 했다. 아내가 떠난 임원근의 심경글이 당시 잡지에 실렸다는 것은, 세간에서 허정숙, 임원근, 송봉우의 이야기가 이미 잘 알려진 것이며, 이들에 대한 관심도 지속되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1년 뒤에 ‘정신상의 모든 실겅키를 청산하고 새사람이 되어 귀국’8) 하였다고 말해지는 허정숙은 송봉우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허정숙씨와 송봉우군과의 관계는 이미 세상이 잘 아는 터이니 이제 새삼스럽게 다시 말할 필요가 업지만은 최근의 새 소식을 드르면 송씨는 아주 공연하게 허씨의 집에 드러가 동거를 한다고 한다. 수박 것 할는 격으로 서로 떠러져 허송세월(許宋歲月)을 하는 것보다는 증거품의 아들까지 있스니.9)


  이 색상자의 성격이 주로 사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재미거리로 이야기하는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10), 이 기사는 그들의 연애에 대한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이 귀국 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는 일 없이 세월만 헛되이 보낸다는 뜻의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허송세월(許宋歲月, 허씨와 송씨가 달을 센다, 몰래 만난다)라고 바꿔씀으로써 그들이 공공연하게 동거함을 비꼬고 있다. 1925년 11월에 임원근이 체포되었고, 1926년 12월 송봉우와의 스캔들이 터졌고, 그 사이에 1926년 봄 둘째 아들 길한이 태어났으니, 누구의 자식인가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색상자는 ‘증거품인 아들’까지 낳았다며 이들의 관계를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1) 송진희 2004, 박석분 외 1994, 서형실 1992, 신영숙 2006, 홍정자 1994, 허근욱 1994 참고.

2) 서대숙 1985:82

3) 초사, “현대여류사상가들(3)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 『삼천리』, 제17호, 1931년 7월 1일.

4) “허정숙 여사 아버지 허헌을 따라 서양관광, 시찰, 수학여행을 떠남”,『동아일보』1926년 5월 30일.

5) 허정숙, “울 줄 아는 인형의 여자국, 북미 인상기”,『별건곤』제 10호, 1927년 12월 10일.

6) 박석분 1994:139에서 재인용

7) 임원근, “옥중기 (2)”,『삼천리』, 제9호, 1930년 10월 1일.

8) 초사, “현대여류사상가들(3)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 『삼천리』 제17호, 1931년 7월 1일.

9) “색상자”, 『신여성』 7권 8호, 1933년 8월

10) 연구공간 수유+너머 근대매체연구팀, 20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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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키퍼 제도

요즈음 글쓰기 위해

1920-30년대 사회주의와 붉은 연애에 대한 자료들을 뒤적이는 중.

 

 

예전에 경성 트로이카를 보면서 궁금했었는데

언제 한번 '하우스 키퍼' 제도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고 싶다.

 

 

..

게니아식 사랑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조차 '물 한잔 마시는 것처럼 성을 가볍게 여긴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는 '하우스 키퍼'제도와 겹치면서 일제가 당시 사회주의 여성 활동가들을 대중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

하우스 키퍼란 일본에서 심한 탄압을 받았던 공산당이 권력과 감시의 눈을 피하고 속이기 위해서 여성당원으로 하여금 아지트를 관리하게 한 제도 혹은 풍습을 가리킨다. 통상 당 상층 간부에게 젊은 여성당원이 짝지워진다. 그녀는 레포(운동원)나 아지트 유지, 문서의 관리 등을 맡고 세간에서 격리된 생활을 강요받는다. 게다가 당에의 '충성심'을 악용하여 '성적 봉사'까지 강요받는 경우도 있었다.

..

이순금이나 이경선 그리고 박진홍 같은 여성들은 1930년대 초 학생운동을 거쳐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과 당 재건 운동에 투신하고 일제 말까지 운동에 헌신했다. 그런데 이순금과 박진홍은 이재유를 사이에 둔 삼각 관계로 저널리즘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지하 운동에 몸담고 있던 이들 여성활동가들의 사상이나 내면의 성장을 읽을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이들은 직접글을 쓰지 않았다. 운동선상의 많은 지식인 남성들이 운동을 하면서 글도 쓴데 반해, 여성들은 '하우스 키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

일제의 검거를 피해 지하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이재유는 1933년 이순금과 동거하다가 1934년 1월 이순금이 체호된 후 1934년 8월부터는 박진홍과 검거하면서 일제의 검거를 피했다. 박진홍이 검거된 뒤에 이재유는 유순희와도 동거했다고 한다. 박진홍은 1935년 1월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이재유와의 관계에서 임신한 아기를 출산한 뒤 친정어머니에게 맡겼다. 이런 박진홍의 특별한 처지에 대해 당시 신문은 선정적인 투로 보도했다. 이순금과 박진홍은 감옥에서 마주쳤고 이재유와의 관계 때문에 약간의 갈등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재유가 1936년 12월 체포된 후, 일제의 조사를 받으면서 대중들의 신망을 잃을것을 두려워하여 이순금이나 박진홍과의 연애관계를 부인하자 '연적'관계였던 두 여성은 이재유의 반여성적 태도에 대해서는 함께 비판적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이순금은 1937년 5월에 박진홍은 7월에 석방되어 나온 뒤, 이재유와의 관계를 청산하고자 노력했다. 이순금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면 박진홍도 이재유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는 것, 이순금이 결혼을 하게 되면 이순금의 결혼 지참금을 운동 자금으로 쓸 수 있다는 것, 두 가지 이유로 박진홍은 적극적으로 이순금의 중매에 나섰고 이순금이 약혼까지 했으나 모두 다시 검거되고 만다.

 

-이상경(2004) "1930년대의 신여성과 여성작가의 계보연구"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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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욕망 사이

결코, 쉽지 않은 문제.

고민의 시작은 ** 공장에 내려가 여성노동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부터.

 

여성주의를 접하면서, 책을 읽던가 혹은 교육을 받던가(주로 후자의 영향이겠지만)

그러면서 그 여성노동자들이 가장 스스로가 변화되었고 생각하는 지점은.

"말 한마디도 조심하게 되었다."는 것-

 

별명이 '음란 사이트'였다는 분도 있었다.

"아줌마들끼리 있으면 못할 얘기가 없었는데,

(여성주의를 알고 보니)

내가 하는 말들도 성폭력일수 있고,

때로는 여자가 남자들보다 더 한 것도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배웠으니)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겠다."

는 요지.

 

왜 자꾸 그 말이 마음에 걸리는 건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발전이라 여긴다"는 그 말-

 

처음 들을때는 그저 "아-" 그렇군요, 하고 듣고 넘겼다.

나 역시도 긍정적 변화의 어떤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곱씹어볼수록 걸린다.

 

1)여성주의자와 非여성주의자 사이의 이분법적인 경계만큼이나

단선적이고 진화론적인 여성주의적 인식의 발전경로를 설정하는 건 문제다.

뭐가 발전이지? 그 발전은 여성주의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

그 길은 누가 제시하고 누가 이끌어주는 것?

그런 교과서적인 해답이 있는 것이 여성주의이던가.

이렇게 하면 여성주의 아니고, 저렇게 하면 여성주의적이고?

교육의 문제..

 

2)사오십대의 여성노동자들이 모여 남자들 얘기하고 sex얘기하고 노는게

왜 이제는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야 할 것,  성폭력으로 인식이 되어야 하는 걸까?

이것이야말로 여성을 수동화하고 피해자화하는 것이 아닐까?

여성주의는 도덕적 금욕주의가 아니다.

 

그러면서 결국 고민은 다시 폭력과 욕망 사이로 돌아옴.

 

폭력과 욕망은 얇은 종이 한 장 차이 같다는 극단적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의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 동의와 강제 사이.

 

성폭력을 논의할때, 그것이 곧 욕망을 거세시키는 방식으로 곧잘 연결된다.

자기 욕망을 부인하지 않고, 고통스러움(피해자임)을 입증하지 않고,

성폭력을 문제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맥락성. 주관성. 상대성....

 

그러나 여전히 그 얇은 종이 한 장 차이가, 영원히 뛰어넘지 못할 벽일거라는 생각도 든다.

 

똑같은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을 전복적인 의미로 읽어내느냐, 아니면 폭력으로 읽어내느냐 하는것은

결국 그 사이의 뿌리깊은 권력관계를 고려했을때만이 가능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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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여 잘 있거라

 

Ruth Milkman(1997), Farewell to the Fac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이종인 옮김,『공장이여 잘 있거라』, 황금가지, 1998

 

 루스 밀크만의『공장이여 잘 있거라』

-방법론적 검토를 중심으로 


 Ruth Milkman에 대하여

  루스 밀크만의 책은『젠더와 노동』이후 두 번째로 읽는 것이다. 산업관계와 노동연구자인 루스 밀크만은  젠더 사회학을 연구하고, ‘사회주의’를 곧잘 이론적 틀로서 사용하는 진보적 성향의 학자이다. 그녀는 ‘새로운 노동사’(new labor history)의 대표적인 학자로 거론되며, 신좌파(new left)로 분류되기도 한다. 자료를 검색하다가 나는 ‘Organizing the Unorganizable'3)이라는 글을 읽을 수 있었는데, 미국으로 온 이주노동자들의 관점에서 조직화와 노동운동의 부흥을 조망한 글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는 그녀가 쓴『공장이여 잘 있거라』는 상당한 논란을 일으킬 만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3) Ruth Milkman(2006), "Organizing the Unorganizable : The Unlikely Spark for a Rebirth of Labor", L,A Story: Immigrant Workers and the Future of the U.S Labor History, New York: Russel Sage Foundation, 2006, 오민규 번역, “조직화가 불가능해보였던 대중들을 조직하기 : 거의 불가능해보였던 ‘노동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 월간『비정규노동』, 2007년 1월호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과 노동자들

 『공장이여 잘 있거라』는 1980년대 이후 불어 닥친 미국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을 뉴저지 주의 GM-린든 공장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그녀는 “노동자들의 관점에서”(Milkman 1997:14) 구조조정과 명예퇴직이라는 상황을 보고자 했다. 10년의 연구를 통해 그녀는 노동자들을 크게 두 부류-명예퇴직자와 잔류자-로 나누어 비교 분석한다.

  기존의 연구들은 탈산업화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주로 다루어왔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영화 ‘로저와 나’를 떠올려 보았다. ‘로저와 나’는 미국의 진보적 다큐멘터리 감독인 마이클 무어의 1989년 작품이다.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고향인 미시간 주의 플린트 시의 GM이 11개의 공장을 폐쇄 결정하여, 어떻게 한 도시가 완전히 파산 상태가 되는지를 담아낸다. 지금까지 주로 접해왔던 탈산업화 혹은 구조조정에 대한 연구들과 그에 대한 이미지들은 마치 ‘로저와 나’에서 보여주는 것과 거의 동일하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 말 구조조정 시기에 노동자들의 극심한 반대투쟁이 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탈산업화와 명예퇴직이 노동자들을 주변화시키고, 노동자들의 소외와 불안을 가중시킨다고 생각해온 것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루스 밀크만은 자신이 직접 노동자들을 만나고 인터뷰해본 결과, 이와 같은 일방적인 가설들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그녀가 관찰한 결과들은 기존의 가설들을 완전히 뒤집을 만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떠난 것을 행복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명예퇴직을 선택해서 “공장이여 잘 있거라”를 외치며 떠나갔다. 남아있는 노동자들(잔류자들)은 일본식 ‘다품종 소량방식’을 모방한 적기체제의 도입과 노동자 참여라는 새로운 회사 정책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그들의 불만은 지속되고 있었다.


왜 노동자들은 “공장이여 잘 있거라”를 외쳤는가

  그렇다면 왜 이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떠나는 것을 행복으로 느꼈는가? 공장폐쇄가 노동자들에게는 축복이었다고? 탈산업화는 노동자들에게 불행이 아닌 행복을 가져다주었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지배적인 자본가들의 논리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밀크만의 관찰 결과에 적지 않은 미국의 좌파 지식인 혹은 사회주의자들을 당황시켰다. 밀크만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역설적 발견사항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는 조사연구방법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노동자들에게서 찾아야 한다.”(Milkman 1997:243) 즉, 밀크만이 보고 들은 것들이 잘못되었다, 아니다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노동자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조립라인의 일이 일부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매혹적일지 몰라도 노동자 자신은 결코 그것을 낭만적인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은 무자비하게 비인간적인 작업 리듬으로부터 도망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Milkman 1997:32) 즉, 노동자들에게 GM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었다. 높은 임금과 훌륭한 사내 복지 시스템은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노동현장과 권위주의적 감독 시스템은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공장과 조립라인의 처참함을 ‘노동공장’ ‘포로수용소’ ‘노예집합소’ ‘강제수용소’로 (Milkman 1997:80) 표현할 정도로 공장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예퇴직을 선택한 노동자들은 전자를 포기하면서 까지도 후자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이것은 포기한 것보다 선택하는 것이 가져다주는 만족이 더 크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회비용’인 셈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결단’으로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물론 밀크만은 자신이 관찰한 이런 결과들을 결코 ‘일반론’으로 만들어버리지는 않는다. 아니, 밀크만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탈산업화가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말해버리는 것은 잘못된 결론일 수 있다.”(Milkman 1997:244) 다만, “명예퇴직자들의 경험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는 산업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옮겨가는 것이 비교적 고통도 없고 때로는 이득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Milkman 1997:174, 강조는 본인) 즉, GM-린든 노동자들의 이러한 반응을 고려할 때는 당시 현지의 상황과 명퇴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연공이 낮으며 비교적 쉽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젊은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한 조건’ 과 ‘전제’ 없이, 밀크만의 관찰결과를 ‘어떤 상황에서든’ 통하는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밀크만의 작업들은 나에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준다. 유선 ‘무엇을 볼 것인가’의 측면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관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밀크만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예를 들어 공장 내 팀제 도입에 대해서도 기존의 연구들은 “말단 연구자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Milkman 1997:35)에 주목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노동자 계급의 의식에 대한 어떤 식의 가정이 미리 전제되어 있는 것일 뿐, 실제로 그 당사자들에 대한 연구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들이 없이 책상에서 만들어내는 지식이란 필연적으로 현실과 괴리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또, 어떤 연구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와 가설을 설정하는 단계에서부터 관찰하고 결과를 도출하기까지의 전체 연구과정에 있어서 실증주의 방법론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주관’을 배제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들과 한계들을 인식하고 출발하는 것과 모르고 출발하는 것, 또 알고도 눈감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연구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자신의 한계와 자신이 가진 특정한 가치관들을 인식하고 출발하는 사람들은 ‘연구자 본인을’ 거리 두고 객관화해서 성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오류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며, 그럼으로써 ‘진실’에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러한 한계를 알면서도 눈을 감는다.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영향력, 자신이 속한 학파 혹은 지지집단과의 관계에서부터 이전의 자기 자신의 가정을 뒤집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까지 말이다. 그리하여 방법론 시간에 라카토스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다른’ 관찰 결과들은 기존의 핵을 더욱 더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비록 ‘보고 싶지 않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은 어떠한 현상을 ‘진공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이념과 가설을 떠나 다른 각도에서 관찰해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밀크만이 보고 들은 것을 눈감았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밀크만 역시 연구를 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명예퇴직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 현상을 나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이것을 말했을 때 어떤 사회적 비난이 쏟아질까?” 등등. 그녀가 놀라운 것은 자신이 보고 들은 관찰을 정직하게 받아들인 진심어린 태도이며, 또한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관찰 결과에 대해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구체적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동일한 상황을 놓고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관점’과 겉으로 드러나는 표피 이면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다. 마치 밀크만이 공장을 떠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통해, 대공장 노동의 끔찍한 인간소외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처럼 말이다.


고민지점들

   밀크만의 책을 읽으며 한 가지 궁금했던 점은 여성노동자들의 반응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공장을 떠난 것을 후회했던 집단들은 대부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노동시장에 재진입하기가 매우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맥락에 있다고 판단되는 여성노동자들의 경우에 공장을 떠난 것을 후회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나는 이 점이 매우 특이하게 느껴졌는데, 밀크만은 이에 대해서 여성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감독자들로부터 더 지독한 대접을 받고 동료 (남성) 노동자들과의 이해부족과도 싸워야 했기 때문”에 “남성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GM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Milkman 1997:241)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구체적인 분석이 존재하거나 여성노동자들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 이런 부분들이 궁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밀크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른 고민들을 해보았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나는 이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진실일까?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자 하는 태도가, 곧이곧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졌을 때 또 다른 오류가 발생하지는 않을까? 예를 들어 공장을 떠난 노동자들이 GM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은 실제로 그들의 노동경험이 그러해서 일수도 있지만, 다른 식으로도 생각해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싫어서 그만둔 것일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만두게 되면서 부정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많은 경우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하고 자긍심을 느끼고자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과거를 부정하는 것보다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에. 그래서 바꾸어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어서, 별다른 희망이 없어서 명예퇴직을 선택한 노동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이미 떠나버린 곳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GM노동자들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합리화의 가능성이란 어떤 인간들에게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관찰대상자 ‘그들’이 말하는 것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라1), 말하는 이들(관찰대상자)조차도 어떠한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판단하고 이야기하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1) 이런 태도들을 성매매 논쟁 때 볼 수가 있었는데, 성매매/성노동을 주장하는 양쪽 모두 “이것이 ‘진짜’ 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라고 주장하는 방식은, 경합하는 여성의 목소리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옳고 그름의 이분법 속에 갇히게 만들어 버리는 한계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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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총기난사, 무엇을 말할 것인가?

 

 

 

[중앙일보] '당신들은 나를 피 흘리게하고 궁지로 몰았다'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7/04/19/2912810.html

 

[동아일보] 조승희, '선언문' 통해 '쾌락주의' '부자'에 복수 밝혀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4190236

 

[오마이뉴스] 8년전 '볼링 포 콜롬바인'을 기억한다

그래도 "총은 포기 못한다"는, 참 이상한 나라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5092

 

[중앙일보] 물의빚은 서울신문 만평 연재 중단키로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7/04/19/2912857.html

 

[뉴스툰] 미 총기사건과 한국의 왜곡된 쇼비니즘

주장 - 백무현 만평,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일인가?

http://newstoon.net/sub_read.html?uid=8622§ion=section4

 

 

나는 모든 것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이 청년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는 단지 광기어린 스토커 살인마였단 말인가?

그의 선언문은 자신의 테러를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일뿐일까.

아니면, 아니면 뭐지? 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진보'의 강박일까.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주범이 '한국계'로 밝혀진 순간

전혀 다른 식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비자발급부터 교민들에 대한 우려, FTA 협상에 대한 것까지.

 

서울신문의 백무현 만평은 또다른 시비거리가 되고 있다.

백무현, 그가 그간 그려왔던 진보적 성향의 만평들 때문에 그의 '편'을 들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백무현의 만평이 정말,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일인가?

사람들의 죽음, 을 두고 볼링 포 콜롬바인..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비인간적'인 건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 혹은 무엇을 말해야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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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랑. 사랑. 사랑이 뭘까?

 

한 눈에 반해버리는 사랑

미칠듯이 가슴뛰는 사랑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동안 규정해왔던 건,

알면 알수록 family같고

친구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것들도 애인에게는 말할 수 있는

그런 '편안함'의 제일 관계.

난 어쩌면 그런 사랑이야말로 '진짜'라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경계야말로 우습다.

생각할수록.

그 경계란 어느 누구도 아닌 내 스스로가

나를 합리화하고 상처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니까.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정치적 타당성을 떠나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는 거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The break up,에 이런 대사가 나왔다.

"중요한 건 내가 혹은 당신이 원하는 걸 하는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뭔가를 함께 한다는 거야"

어쩌면 가장 단순하고 고전적인 사랑의 정의를 난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의외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봄날은 간다'가 묘하게 겹쳐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에서 cool,이란 무엇일까. 

뭐가 쿨한거지. 어떻게 하면 쿨한거지. 아니, 왜 쿨해야 되는건데.

 

sex  and the city의 마지막 시즌에서인가

미란다가 애인에게 I love you를 말하지 못하다가, 

정말로 우연히 자기도 모르게

스티브에게 말해버리는(말한다기보다 내뱉어버리는) 그 장면.

그 장면을 떠올리면서 그건 '낭만적 사랑의 각본' 일뿐일까,

아니면 정말 그럴때가 있을까, 그 감정이란 무엇일까...

 

알수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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