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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5/30
    촛불소녀를 지키는 예비군오빠들?(130)
    은수
  2. 2008/01/31
    페미니스트 자격(12)
    은수
  3. 2008/01/30
    따라쟁이(2)
    은수
  4. 2008/01/29
    엄마의 뽀뽀
    은수
  5. 2008/01/22
    그르바비차(5)
    은수
  6. 2008/01/21
    마음을 열어야 들리는 것(2)
    은수
  7. 2008/01/14
    경계없는 페미니즘(8)
    은수
  8. 2008/01/13
    춥다
    은수
  9. 2007/12/26
    성당(4)
    은수
  10. 2007/12/24
    2007/12/24(2)
    은수

촛불소녀를 지키는 예비군오빠들?

촛불문화제가 거리시위로 이어진지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 가고 있다.

거리시위에 참여하면서 좀 희한하다 생각한 광경이 있다.

 

그건 바로 예비군복을 입은 젊은 남성들이 출몰하고 있다는 사실.

 

 

처음에는 다음 아고라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서일거라고, 아주아주아주 좋게 순진하게

생각해보려고도 했음.

(흥, 하지만 "선영아 모여라" 피켓 들고 있는 여성들도 있는걸!)

 

하지만 이들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고 있는 듯함.

 

TV를 보는데 이런 멘트가 나왔다.

"청소년 보호를 위한 자경대를 조직하고"...
멘트:  예비군복장 시민 " 우리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복을 입었다"

 이들의 실체는 바로....자경대??? 란다.

자경대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안전과 재산을 스스로 경계하여 보호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건지.

 

촛불집회가 '소녀'로 상징화 되면서

군복 입은 오빠들이 어린 소녀들을 지키는.

이 그림 번뜩.

 

너무나 젠더화된 이 그림.

 

그런데 이 기사제목들 좀 보세요.

 

 

'촛불' 지키러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80530121909784&cp=ohmynews

 

촛불시위대 보호하는 예비군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839899

 

시민 도우미, 예비군 '촛불 보디가드'

거리 시위, 시민보호 앞장서, 시민들 "사랑해요 예비군"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8892

 

[사진]촛불집회에 나타난 형님부대(사진화보)

 

 

 

 

 

우아...

이를 어쩌면 좋나. 정말 골치가 아프다.

 

 

얘네들은 사수대보다도 훨씬 노골적이고 대담하게 자신들의 남성성을 드러내고

우리를 보호하겠다 한다.

 

 

어제는 닭장차 앞을 얼쩡거리는데

왠 아저씨가 와서는

"여자들은 채증당하면 위험하니까 닭장차 앞으로도 오면 안된다"고 말한다.

 

꽃가마라도 타고 촛불시위 나갈가보다 콱!

 

뭔가 효과적이고 재기발랄한 대응책이 필요하다.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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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자격

글을 쓰고 있는 게 있는데,

쓰다보니 이 대목이 참  흥미롭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여성학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으며 여성학을 공부할만한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페미니즘을 공부할만한 이상적인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결론은 정해져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로 살기엔 부족한 인간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라 말할 자격이 없다."

와 같이 자신을 질책하고

중도에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포기한다.

 

도대체 그 자격이란게 뭘까?

<페미 자격증>이라도 줘야 되는 것인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사람들조차도 "나는 페미니스트 될 자격이 없다"니.

 

많은 사람들이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하기를 두려워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꼴통 페미년'에 대한 무시무시한 낙인과 배제 때문이겠지만.

분명히 어떤 부분에서 "나는 페미니스트" 라고 하는 자기 선언에

엄청난 책임감과 중압감이 따르기 때문인 것 같다.

 

말하자면 이런 것 같다.

페미니스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투철한 페미니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는 일상이 전쟁이다. 검열, 검열, 자기검열 사소한 행동하나부터 페미니즘적인가를 검열한다.

이 때 무엇이 페미니즘인가는 정말 실체가 없다.

그러나 이것과는 상관 없이,

하나라도 잘못된 것이 발각된다면,

넌 out ! 자격박탈!

페미니스트가 아닌게야.

그렇다면 페미니스트의 삶은 진짜 팍팍하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삶을 정말 불행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지나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상/ 규범에 스스로의 존재/행위를 일치시키려 하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가능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왜

페미니스트는 온몸으로 페미니즘을 입증하기를 요구받을까?

내가 페미니스트 대표도 아닌데, 왜 내가 잘못하면 페미니즘이 원래 잘못된 것마냥 비난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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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쟁이

당신의 고양이님의 [2008 나만의 카드] 에 관련된 글.

 

당고 글을 보고 나도 갑자기 확- 땡겼다.

나는야 따라쟁이 양쪽귀 팔랑팔랑녀이다.

 

 

 



 

이름은 기적이다만..영어로 Strength이니..뭔가 정신적인 힘이 강해질려나..?

 

"타인을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좋아좋아.

솔로생활을 버텨내고 있는 나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문구가 있을 수가.

 

 

또 따라...포츈쿠키 해보았다.

 

 

앗.....방금까지 능동적이어야 한다했는데...급좌절했다..

그래서 한 번 더 했다.

 

 

훗...역시 나에게 필요한 것 이것이었군.

그래. 좋게좋게 생각하자, 뭐든지.

 

필요한 사람에게 기대되 의존하지 말며

능동적이되 공격적인 인간이 되지 않도록 하는거야.

 

이상.

 

역시 꿈보다 해몽이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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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뽀뽀

어제 아침 자고 있는데 엄마가 출근하기 전 내 방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이구~우리 딸" 하면서

갑자기 온 얼굴에 뽀뽀 세례를 퍼붓는 것이 아닌가.

 

어제는 집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날이었고

그렇게 엄마와의 아침인사는 헤어짐인사가 되었다.

 

잠귀가 밝은 내가,

심지어 살갗이 닿는 느낌을 모를 리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 상황이 쑥스럽고 어색하여

그냥 눈을 감고  "엄마 안녕"하고 말았다.

 

왠지 참 어색했다.

본래 무뚝뚝하고 살갑지 못한 내 성격 때문인가

표현을 잘 안하는 경상도 집안의 분위기 때문인가

한 살 더 먹은 내 나이 때문인가

뭔가 어색한, 영 어색한 느낌.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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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바비차

어제, <그르바비차>를 보았다.

아는 이가 소개해주었는데, 덕분에 오랜만에 시네큐브도 갔다왔네.

 

그르바비차는, 참 우울한 영화다.

우울했다.

 

보스니아의 '씨'를 말리겠다고 시작된 집단강간과

그로 인해 태어난 딸 사라.

영화는 출생의 비밀,을 숨긴채

살아가는 엄마 에스마와 딸 사라의 이야기.

 

하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울한 영화, 였어야만 했을까.

의문이 든다.

 

처음, 그 문제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을때, 궁금했다.

보스니아 출신의 여성감독은 어떻게 이 이야기를 풀 것인가.

 

 

 

내가 <그르바비차>를 보며 우울했던건

에스마가 겪었던 '피해와 고통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그 피해와 고통의 기억을 갖고 있는 자,에 대한 재현방식 때문이었다.

 

그래, 사실 그렇다. 피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전사증명서를 제출한 자녀는 수학여행비를 면제해주지만

그 전쟁으로 인해 가장 끔찍한 피해를 입었던 여자들의 아이들은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다. 꼭꼭 숨겨져 있으니까.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나 민족의 기표가 되는 여성들은

결코 민족을 위해 목숨바친 전쟁영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피해자 여성은 꼭 이런 방식으로 재현되어야만 하는가.

영화 초반부터 시작된 복선,은 나에게 하나의 공식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팔을 누르며 장난치던 딸에게 화를 내고

버스 옆자리에 서있는 남자의 가슴에 놀라 버스를 내리고

가슴의 단추를 하나라도 더 잠그는 그, "순수한" 여자.

그녀와 약간의 로맨스를 보이는 남자는 영화 내내 말한다. 당신은, 역시 순수하군요.

 

생각해보았다.

만약, 피해자가 피해자답게 재현되지 않았다면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 우울함에 <여자, 정혜>가 겹쳤다.

어린 시절 강간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신혼여행에서 돌아와버린 정혜는

내내 우울했지만 끝내 손에 쥔 칼로 그 놈을 죽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꽉 막힌, 갑갑한 느낌이다.

 

딸아이의 수학여행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술집에서 에스마는

가슴을 부비며 군인과 춤을 추는 동료를 보고 또다시 훌쩍인다.

엉덩이를 내어놓고 남자들 앞에서 춤을 추는 댄서들과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고도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에스마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처럼 느껴진다. 왜.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위안부' 문제가 우리에게 재현되고 기억되는 방식.

 

같이 보았던 이는 <귀향>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래, 똑같지는 않지만,

귀향의 여자들이 주었던 삶의 에너지들을, 삶을 살아가는 힘들을 

<그르바비차>에서는 느낄 수가 없었다. 

 

딸 사라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고 둘 사이는 서먹서먹한 채 수학여행을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 마지막 손인사가, 어떤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면.

차라리 이 영화는 딸이 그 비밀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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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야 들리는 것

작년 봄이었나,

어느 워크샵에서 모둠 프로그램을 하면서

질문 중의 하나가 있었다.

 

"지구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듣고 말해보세요"

 

다른 많은 질문들에는 답을 했지만

이 마지막 질문에 나는

"평소에 지구와 자연에 대해 잘 몰라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요."

라고 성의없게 답해버렸다.

 

그래, 생각해보니 "잘 모른다"는 말은 종종  "관심 없다"는 말을 면피하기 위해 쓰인다.

예를 들면, "난 여성문제를 잘 몰라" 뒤에 숨겨진 말,

(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중요하다 생각하지도 않아. 그건 내 문제가 아니거든.)

 

....

 

지난 토요일에, 충남 보령에 있는 작은 섬 녹도에 다녀왔다.

 

한명의 자원봉사자가 되기까지, 많은 고민들이 내 머릿속을 오고 간 것 같다.

어떤 힘이 나를 움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두 분이 목숨을 잃고 또 한분이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 때문인지

그저 실제로 어떠한가 보려는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바닷가에서 자라 바다가 좋아서 그랬는지 알수 없지만.

 

한 군데에 앉아 돌을 닦는데, 친구와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돌은 무생물이라지만, 검은 기름 속에...돌들은 숨을 쉴수가 없었고 죽어있었다.

미안해......정말 미안해...

이렇게 마음을 다해 내가 대신 사과할테니, 돌들이 내 마음을 들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앉았던 그 한 곳조차 제대로 닦지 못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또 올께..."

 

 

주저했던 이유.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사실들을, 나만 안다고 생각하는 건 참 오만한 일인 것 같다.

사고를 낸 당사자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데,

그저 국민들에게 호소해서 해결하려는 정부와 기업에 분노하는 것,

새벽에 대천항을 출발하는 수백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그 사실을 몰라서, 혹은 덮어주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그렇게도 아파하는 바다 앞에서 나의 오만함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아름다운 섬, 녹도.

방제작업이 계속 있었던 덕분에 겉보기에는 그래도 깨끗한..

 

 

하지만, 가까이에 가보면...정말로 끔찍하다.. 

내가 있었던 곳...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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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없는 페미니즘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경계 없는 페미니즘

 

흥미로운 책이다..

연구해보고 싶은 주제들과 고민들을 던져주는 좋은 글을 읽었네..

몇가지 메모.. 

 

-경계없는 페미니즘Feminism without borders

  경계는 봉쇄와 안전을 동시에 제공한다. 우리는 여성으로서 몸과 생활공간에 대한 완전함, 안정감, 안전함을 감히 주장한다는 이유로 종종 그 대가를 치르곤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경계없는 페미니즘"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대한으로 확장, 포괄하는 페미니즘 비전은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배워야 하는 만큼이나 경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다. 경계없는 페미니즘은 "경계를 상정하지 않는borderless" 페미니즘과는 다르다. 경계없는 페미니즘은 그 경계가 재현하는 단층선, 갈등, 차이, 두려움, 봉쇄를 인식하는 페미니즘이다. 경계없는 페미니즘은 단 하나의 의미를 띠는 경계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페미니즘이며 국가,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종교, 장애를 통과하며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선들이 실재함을 인식하는 페미니즘이다. 그러므로 경계없는 페미니즘은 설정되어 있는 경계나 구획선을 넘나들면서 변혁과 사회정의에 대한 상상을 제공해야 한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 페미니즘, 배타적이지 않은 페미니즘을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다차원적이면서 동시에 편협함을 드러내는 경계들 간의 긴장에 주목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경계들을 통과하며 경계들과 더불어 그리고 경계들을 극복하는 해방의 잠재력을 지닌 페미니즘을 말하고 싶었다. (14)

 

경계들과, 경계들의 상호의존성, 단순한 합이 아니다..

구조와 행위성..그것을 드러내는 분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됨..

 

-비판..

  나는 미국에 기반을 둔 내 입장에서 페미니즘에 문제가 되는 지점을 세 가지 정도로 지적하려고 한다. 첫째, 생기발랄한 여성운동과 미국학계에서 페미니즘을 이론화 하는 것 사이에 놓인 전적으로 계급-기반적인 간극이 점점 커져 학력을 중시하는 강단 페미니즘을 형성했다. ..둘째, 점점 기업화되는 미국문화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당연시하는 경향에 깊은 영향을 받아, 기업이나 민족국가의 사다리에서 "여성의 출세"에 관심을 기울이는 신자유주의 혹은 소비주의(친자본주의) 페미니즘이 생겨났다. ..셋째, 일상의 현실에서는 정체성에 대한 배타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이해만 통용되어 (인종, 계급, 성, 국적 등등의) 정체성이 불안한, 따라서 단순한 "전략"으로만 비춰지는 상황에서, 본질주의적인 정체성의 정치학 비평과 정체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회의주의의 헤게모니는 페미니즘 정치학과 이론을 협소하게 만들고 있다.(21)

 

-정체성에 대하여

내가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여성이니까 아니면 가난하니까 아니면 흑인이나 남미인이니까 하는 식으로, 존재 자체가 정치화된 대항적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충분하다고 전제하는 바로 그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정체성이라는 문제는 정말 중요하지만, 이것이 정치적인(혹은 페미니즘적인) 주체성이라는 자아준거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생각으로 결코 자동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120)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전지구적 경제속에서 여성들은 노동자이며 어머니이며 소비자이며, 또한 이 역할들을 동시에 맡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 담론 속에서 여성을 단일하고 획일적으로 범주화하면 경험, 주체, 투쟁에 관한 생각들도 제약을 받게 된다. (367)

 

여성들에게, 노동자 정체성...혼종적인..나의 욕망대로 획일화하지 않을 것.

모순과 균열, 차이들..을 드러내는 작업...

그리고 그 가운데 공통의 이해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차이를 넘어서는 대화

차이를 넘어서는 대화는 긴장과 경쟁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하다. 매우 불평등하며 식민화된 이 세상에서 급진적이거나 비판적인 다문화주의가 서로 다른 문화간의 총합이나 공존으로 단순히 치환될 수 없는 것처럼, 대화를 위한 공정하고 윤리적인 기반을 특화시키지 않고서도 다문화적 페미니즘이 서로 다른 공동체의 페미니스트들 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전제해서는 안된다.(191)

 

-페다고지

 그러나 경험의 중심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배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경험"이 지배계급의 경험인 경우, 종종 그 경험은 침묵되기도 한다. 경험에 대해 '너보다 내가 더 진짜라는'  태도는 교사들에게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보자. 제 3세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제 3세계 사람들"을 위해" 말하려는 경향을 끊임없이 감시해야 한다....그러니까 종종 좌파자유주의 백인 학생들이 모든 유색인들을 그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학생들은 나를 토착민 정보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급에서 유색여성 한 명의(인간성, 자세, 태도 등에 대한) 특별한 "차이"가 그 집단 전체의 차이로 대표될 때 분명히 드러나며, 집단의 목소리가 개인의 목소리를 대체하는 것으로 전제될 때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차이에 대한 특정한 페다고지의 코드화에 따른 어떤 특별한 문제는 인종과 젠더를 개인적이고 개별화된 경험의 측면에서 개념화하는 데서 생겨난다. 학생들은 종종 자신들이 제 3세계 사람들에 대해 "보다 감수성을 지녀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렇게 개별화된 개인의 태도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지식의 공식화와 정치학은, 차이에 대한 가르침이나 배움에 포괄되어 있는 바로 그 지식의 정치학을 사장시켜버리고 만다.(305)

 

교육의 의미. 목적. 내용. 방법. 

결론이 이미 내려진 지식을 단순히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할까?

타자의 경험을 접할때 경계해야되는 태도...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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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다시 추워졌다.

이제는 익숙해질만도 한 서울의 겨울바람은..여전히 매섭게 느껴진다.

그렇게 피부로 느낄 때면, 나는 내가 여전히 이 곳의 이방인 같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가 시려.

세번째 사랑니가 계속해서 신경쓰이게 한다.

얘는 또 언제 뽑아야 하나.

대학교 2학년때 처음으로 뽑고 혼자 죽쒀먹으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름은 또 왜 '사랑'니, 여가지고.

 

 

에잇, 다 마음에 안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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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성당에 가기 시작한지...이제 두달쯤 되었다.

일주일에 한번, 한 시간을 들여 미사에 가는 것이 고작이지만

이제는 의례들이 조금씩 익숙해지는 중이다.

낯선 이들에게 웃고 웃음을 받고 평화인사도 나눈다.

모두들, 평화를 빕니다.

 

어제는 성탄절이라고 특별한 행사들을 많이 했다.

청년단이 나와 찬양 드리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왜 문선하는게 생각이 나는거지?

나만 그런가, 좀 비슷하다는 생각.

 

하여간 친한 친구에게 성당에 나간다 했더니,

눈이 정말 땡그래져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니가?"라며 뜨악해한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계속...

뭐 그래 그럴만도 하지.

한번도 종교같은 걸 믿어본 적이 없는데다

늘 입에 거품을 물고 예수쟁이들,,하면서 욕을 했으니까.

이것만큼은 안될 것 같다던 영역이다.

성모와 성녀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면 안되냐고 했다가

옆에 있던 친구한테 사이비 소리 듣는다고 욕먹고

복되신 동정마리아와 외아들예수그리스도 쯤에선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 말하지 못할 거슬림,들에도 불구하고

성당에 가는 건, 내 마음을 위한 일이다.

이렇게라도 시간을 내지 않으면

정말 난 내 마음을 돌볼 방법을 모를지도 몰라.

자리 잡고 앉아야 공부하는 아이처럼

마음 공부,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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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4

이렇게 한 학기가 또 지나갔다.

이번 학기엔 성매매(성노동)문제에 꽂혀서 페이퍼를 죄다 그걸로 썼다,

는 것만 남는다.

 

그리고 연말이구나.

 

작년 이맘때쯤엔 뭐했었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력 정말 제로..

 

방학인데 왜 이렇게 신나지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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