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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02
    내가 쓴 글 모음
    공돌
  2. 2006/08/02
    내가 생각하는 "관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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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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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 그리고 강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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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8/02
    정치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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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 모음

노사저널

http://www.nosanews.com/Nosa_WebZine/WebZine_Detail.asp?w_id=231&t_seq=4937

 

오마이뉴스

[사회] [주장] 피살 동영상 네티즌이 엠바고 해야

2004-06-24 오후 11:24:35

[사회] '산재법'을 바꾼 한 택시노동자

2003-01-09 오후 1:14:03

[사회] 한국 가톨릭은 병원파업의 분쟁해결에 앞서야

2002-09-15 오전 1:34:02

[사회] 갱년기에 들어선 우리 어머니들을 위해

2001-11-16 오후 7:12:09

[사회] 노레보가 입성하기를 기다리며(2)

2001-08-16 오전 1:47:29

[사회] '노레보'가 입성하기를 기다리며 (1)

2001-08-14 오전 1:46:33

[사회] 택시강도 당한것도 억울한데

2001-01-20 오후 7:42:19

[사회] 횡단보도 앞에서는 모두 다 전력질주

2001-01-13 오전 2:48:29

그냥 모아서 이렇게 보관하는 편이 낫다. 보관할 필요까지 있을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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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관계론"

관계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교각사이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교각이 절단되면 결국 관계는 파괴된다. 우리가 만나도 만나도 일정한 사람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는 대상이 있다. 특히 가족. 동생이건 오빠건 형님이든 간에 항상 싸우거나 티격태격하는 사이라면 그런 관계와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관계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태도의 문제는 일정한 계기가 형성되지 않으면 변화하지 어렵다. 그게 소위 선입관이라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관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미 형성된 관계는 익숙해진터라 그것이 쉬이 변화되거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든 구조로 변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예수가 고향인 나자렛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거의 돌맞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성경구절에는 "어디서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쓰여져 있다(마르코 6장 4절). 결국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목수집 꼬마아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냥 목수집 아이로 본 것이다. 이런 관점과 태도는 개선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변화해도 상대방이 그러한 변화을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관계는 기존의 관계를 더욱 고착화하게 한다.

 

결국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지기 바란다면 예수처럼 기적을 행하거나 인류를 위해 죽는 길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수 있다. 다만 상대의 인식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계기로 부터이다. 그런 계기의 형성, 계기의 형성은 간접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경험(experience)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한 경험도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보통 우리는 선생을 요구하게 된다. 스승이라고 칭할 수 있는 좋은 선생.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 경험을 극대화하고 경험 속의 깨달음을 그 범위 내에서 국한 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확장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스승의 존재가 바로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간 관계에 있어 상대의 변화된 태도를 바란다면 스스로의 계기 형성과 그리고 행동, 자신 스스로의 태도변화. 그러한 과정을 극대화 하는 스승의 존재. 이로써 상대방이 나의 계기와 경험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그러한 경험치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이 행동과 결부될 때 상대방은 한 개인의 변화를 인지하고 이에 대한 태도를 달리할 수 있다......아~어렵다..무슨 말인지...내가 써도써도~~~

 

200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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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놓고 니네들 가소롭다

부산이 서울보다 살기가 않좋다. 사투리쓰면 촌스럽다. 지방대출신이 서울에 와서 출세했다. 등등등.

 

이런 개소리들은 수차 들어봤다. 물론 그들은 표면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보다 한발 앞서기만 하면 이렇게 공격한다. 설사 앞설 것 같아도 이렇게 경계한다. 

 

자기가 하는 일, 자신의 주변 사람들, 저기의 부모, 자기의 출신대학, 자기의 정신과 생각, 주위에서의 인정. 요런 것들을 무기로 사람을 조지기 시작한다. 특히 오늘은 학벌에 대한 얘기다. 나도 대가리에 똥만 차서 지방대 밖에 못갔는데, 서울에 돈2000만원을 갖다바치면서 소위 명문대 간판을 하나 달기는 했다. 그게 사실은 좆같은 거다. 얄량하게 노무사라는 자격증에 공부좀 했다고 학위를 얹으면 장사가 잘될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고, 3학기부터 심각하게 나는 다른 학교로 옮길 것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쨋든 간에 나는 이 대학을 잘 왔고, 본교생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나는 간신히 이 대학을 버티면서 졸업까지 할 것으로 예상은 되지만 짧지만 긴 2년 반의 시간을 깡그리 개무시때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 때 내가 우리 대학원에서 똥폼잡고 무시때린 일은 없나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대학에서 간판따고 간 사람의 경우에는 이런 비난을 많이 듣는 편이다. 나는 그런 비난따위에 개의치 않는다. 문제가 있으면 안오면 되는 것이고, 오면 열심히 하면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니는 사람도 실망하고, 밖에 있는 사람들도 이러하니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대학에 다니는 사람의 잘반이 이 대학의 문턱을 넘는 대학을 다닌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모르겠다.

 

서울대, 연고대, 이대 등등 내노라하는 대학에서 우리 대학원에 와서 공부하는데 나는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다니는지 궁금하지고 않으며, 관심도 없다. 그런데 꼭 밖에 있는, 우리 대학원을 다니지 않는 서울대, 연고대, 이대 등의 출신들이 우리 대학원을 밟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조간부입장에서는 우리 대학원이 개량화된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그것도 우리 대학원에 와서 개량화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노무사들 중 학벌이 좀 된다는 사람은 학벌컴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이 가는 대학원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일단 경력이 좀 되면 시험치고 돈만 알뜰히 부으면 다닐 수 있는 대학원으로 생각하니깐 그러하다.

 

모두 자기가 잘난 맛에 살고 싶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비난 받지 않고 싶어서 사회의 일정한 틀 속에서 형성된 고정관념을 자기는 벗어난 듯이 이야기 한다. 나는 그게 웃기다는 것이다. 한 서울대 출신이 나는 학벌에 대해서 그런 우월감 이런 것이 없다고 하면서도 말하는 족족히, 그리고 풍기는 냄새가 그런 우월감을 느낄 수 밖에 없으면 그건 나만의 컴플렉스 때문인가?

 

재차 말하건데, 나는 누가 서울대건, 연대건, 고대건, 이대건 간에 이 따위 생각을 하는 작자들에 대한 실력을 인정하기 앞서 인간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비판하고 싶은 것이다. 지방대에 시골출신이라고 얏보는 관념들이 있는 한은, 또한 그들이 그것을 부인하면서도 행동과 말 속에서 나타나는 못된 습성을 버리지 않는 한은 그들과 내가 함께 이 세상에서 같은 지향을 바라며 살 수 없다.

 

머리가 나쁘고 수능이나 학력고사 잘 못친 것이, 공부를 좀 덜한 것이 죄가 된다면 일단 우리 부모부터 죽어야 한다. 자기들 부모가 얼마나 잘났는지 몰라도 이렇게 죽을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똑똑히 새겨야 할 것이다. 학벌이라는 것은 결국 조금 안다는 것을 가지고 소소한 권위에서 시작하여 말단의 권력으로, 그리고 뭉치면 집단적 이기주의로 똘똘말린 권력의 중앙부로 진입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제발 좀 착하게 좀 살아보자. 내가 누군가를 밟으면 언젠가는 나도 밟히기 마련이다. 밟히면 결국 누군가는 일어선다. 많이 밟을 수로 언제가는 밟은 사람은 영원히 일어나지 못한다. 이 광대무한한 우주에는 자기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나로 인해 고통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할 수 있다는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우주의 징검다리를 왕래해야 한다.

 

200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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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있습니다 - 최춘천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단절된 모든 사실처럼 느끼는 것들을 이어 붙이려는 시도없이는 모든 일과 사람과 행동과 사건은 찰라에 불과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거나 미친 것이 되어버린다.

 

"예수부활 영생극락"

 

이 말을 수십 번 외치는 할아버지(최춘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미스터 코리아? Why two kerea?"라고 외치며 지하철을 맨발로 걸어다녔다고 한다. 그는 통일이 되면 신발을 신으리라고 하면서 진정한 미스코리아는 유관순이고, 진정한 미스터 코리아는 안중근이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할아버지의 말씀들....우리는 대부분 이러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노망 들었군."

 

그러나 모든 사실과 삶의 연속관계를 완전히 무시한 상태에서는 이러한 얘기가 어려운 게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러한 판단을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뭔까 짧은 시간 '예수믿으라'와 '안중근과 유관순'을 말한다. 도대체 무엇인가?

 

짧게 나마 그 할아버지의 인생은 과거 독립운동을 하였던 시절로 돌아간다. 유복한 자녀로 태어나 동경에서 유학을 했고, 그 당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에게 상속된 모든 땅을 이북에 피난 온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게 된다. 그는 그 당시 김교신 선생, 우치무라 간조 등 무교회주의자들에게서 자유와 평화, 영생의 삶을 배우고, 결국 가가와 도요히코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 이후 그의 인생은 이러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고, 그 속에서 이 땅의 진정한 평화가 통일에 있음을 그는 아주 압축된 언어로 소개하고 말했던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분 또한 "특정 종파나 계파에 속하지 않으시면서 저렇게 활동하고 계시니 외로울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무교회주의의 평화사상과 함께 김구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뒤 귀국하였다던 그의 얘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고아들을 많이 키우셨고, 노숙자들에게 빵과 밥을 주는 일을 죽기까지 계속하였다.

 

너무나 자명한 과정이 있고 모든 것은 이유가 있다. 그의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 그의 진실이 증명한 "발"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그 미친 노인네인 최춘천 할아버지는 세상 모든 것에 이유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진리는 고독해도 날로 담대합니다."

 

힘들지 않느냐에 대해서 할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 이후 리포터는 얼마후 할아버지를 다시만납니다. 그리고 리포터에게 마지막으로 지하철에서 손을 번쩍 들며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 이후 돌아가셨다고 한다.

 

우리는 영혼 속까지 깊이 헤아리는 심안을 가지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가까운 관계 속에서 그러한 심안을 통해 작은 인내와 배려를 해 본적이 있는가? 오늘도 작은 깨달음이 내일로 이어지기 위하여 내 속에 있는 위선과 자만의 거적데기를 벗어버리고 싶다. 그것이 설사 고통스러울지라도!

 

최춘천 할아버지 동영상

 http://www.godpeople.com/?GO=palbok_2

 

 

2005.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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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위기 - 둘

아래 글에서 말했듯이 노동조합, 이 네글자가, 이 네글자가 어려우면, 노조가, 이 두 글자가 우리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존재가 되기 위한 과정을 우리가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50억의 기금으로 박사 100명만 만들어 보는 프로젝트! 그러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지 보자. 또한 현실은 어떤지도 생각해보자. 현실을 뒤에 생각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 같다. 그래도 할 수 있다는 열정이 있는 것 아니겠나?

 

 

1. 텔레비에 초등학생 꼬마가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OOO노조위원장"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가 뭔지를 물어보니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우시고, 또한 정의로운 일을 하시잖아요."이런 대답이 판치는 사회. 그러나 이 사회는 아직도 삼성을 욕하면서 삼성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더 많다.

 

 2. 단전단수에 벌벌떠는 우리 민중을 위해 발전노조, 전력노조, 한수원노조가 함께 조합비의 10%와 특별 조합비를 모금하여 그들의 전력과 상수도를 공급하게 되면서 전력공사 사장에는 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OOO 노조위원장이 물망에 오르게된다. 아쉽지만 전력회사가 먼저 촛불에 타죽은 어린 영혼을 위해 전력을 공급한단다.

 

3. 우리의 꿈나무들이 노동조합에서 제공하는 공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님이 되고, 박사가 된 뒤에도 자발적으로 5년간은 노조의 정책연구소에서 일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사회. 그러나 민주노총의 정책연구소에는 박사가 없다.

 

4. 지친 노조활동가들이 미래와 생계에 대한 계획을 하고,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시골의 작은 쉼터에서 6개월이고 1년이고 쉴 수도 있고, 아예 눌러 박혀 노동공동체운동의 귀감을 보여 주기도 할 수도 있는 환경. 이러한 환경을 제안하면 욕만 먹는 게 현실이고, 강수돌 선생처럼 혼자만 하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는다.

 

내가 스쳐가면서 생각한 것이 이런데...이게 몽상이면 결국 나는 노조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 궁굼하기 그지없다.^^

 

200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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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죽음으로 하는 경고

죽음이라는 것은 다시 회귀하지 않는 단절이다. 윤회라는 것도, 저승세계라는 것도, 천국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창작에 불과하다.

 

죽으면 그의 세계는, 그의 우주는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우리가 개미나 거미를 죽였을 때, 그것에 대해 깊은 반성이나 괴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아닐지라도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 그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소중하다. 또한 가치가 있는 법이다. 나와 연관이 있을 때,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죽으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눈물이 난다.

 

노동자가 점점 죽어가면서도, 절박함을 죽음으로 대응해도 더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연관성이 멀어지기 때문일까? 그러나 예전 사람들의 죽음은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 과연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음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 밀려드는 것일까?

 

노동자들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분신을 하고, 자결을 하는 마지막 이유는 내 생각으로 '뭔가에 이길 수 없을 직시한 마지막 저항'이라는 것이다. 죽은 이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이것을 다시 돌려서 생각해 보면 뭔가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가 싸워야 하는데 싸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마지막 저항이라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개인에게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일 것이다. 나아가 집단이나 그 조직은 그가 내리는 마지막 경고, 행동에 대한 마지막 경고를 의미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노동운동판이 점점 책임감없이 달려든다. 싫은 소리는 듣지 않으려고 한다. 모두들 빠꿈이들이고, 대안은 다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누구도 선뜻 실천하자고 말 못한다. 같이 해야 행동이 되는 건데, 혼자하는 것은 발광 밖에 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다. 우울하지만, 노동자 '김동윤' 의 마지막 경고이자 마지막 외침을 기억하자.

 

더이상 소중한 생명으로 외치는, 경고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200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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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차타고 가는 기분 좋지만 그대 두고 가야 하는 이내맘 안타까워 그러나 이젠 떠나가야 하는 길위에 서서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누구는 외국에 가서 신나게 외국문물과 문명을 탐닉한다. 나는 외국 코끝도 못가봤다. 그런데 전혀 부럽지 않다. 왜냐면 그 만큼의 정신이 국제적인가? 시샘나기 보다는 가소롭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기풍을 느끼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되고, 적어도 러시아 현실에 눈물 쯤은 흘려주는 센스는 있어야 한다. 미국에 가서는 자본주의의 극단적 문명이나 다양한 인종들에 대한 생각들또한 거대 조각상이나 마뉴멘트들에 놀랄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가 아직도 부시가 먹고자는 백악관에 돌이라도 하나 던지고 와야 국제적인 여행이다.

 

중국에 가면 하염없이 만리장성을 걷기 보다는 텐안문에 서서 민주주의 만세 삼창은 해주는게 도리다. 물론 티벳에 가면 가능하면 인간이 손발이 닫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안가는게 예의다. 술쳐먹고 하면 신이 노여워 하시니깐.

 

국제적인 여행은 정신적인 교감과 연대를 의미한다. 그런 여행을 해야지 독일가서 누구 묘지가고, 맥주가 뭐 맛이 밍숭맹숭하다느니, 그 거리가 아름답다느니. 화폐가 아깝다.

 

2007.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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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없는 노조

내가 개인적으로 재수없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 중 자신의 존재와 위치를 정확하게 잘 모르는 사람이 그에 속한다. 얼마전 친구와 같이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친구는 사실 친구만 아니었어도 영원히 쫑낼 수 있었다. 부모자식 관계가 소 힘줄과 같다면 친구와의 관계는 기다란 까만 고무줄 같다. 이 둘은 강도는 다르지만 본질은 잘 안끊어진다는데 있다.

 

친구의 개떡같이 말씀을 들어보자.

 

"XX공사에 초봉이 4,100만원이야. 그 정도 받으면 충분한 것 아니야? 사실 그 공사 직원들 거의 놀아. 우리 아버지도 거기서 일했잖아. 근데 임금인상? 노조도 쓰레기 노조야. 개념이 없어. 개념이."

 

거의 빠짐없이 기억해서 적었다. 이럴 때는 거의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 수준으로 기억한다.

여하간 본론으로. 좀 어려운 이야기부터 꺼내보자.

'자신의 존재'와 현재 '사회적 위치'를 알면 스스로의 행동반경을 인식하고, 그 인식은 조금씩 확장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쓸데없는 기대를 할 필요가 없이 행동하는 그 자체가 인식이 되기 때문에 결국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삶의 형태를 찾아나서게 된다는 말이다.

 

친구의 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초봉이 4,100만원이라는 사실. 둘째로 그런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거의 논다는 사실. 일단 반박은 얼러가면서 해야 하지만 그렇게 얼러도 돈많이 받는 인간은 밉게 보이는 법이다.

 

요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 친구는 먼저 자신의 아버지의 임금에 대해서도 더 이상의 임금인상을 긍정해서는 안된다. 근데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지금쯤이면 퇴사했을테니깐.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도 그 회사에서 놀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근데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직위가 높았기 때문에 일반 직원과 달리 격무에 시달렸을 거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노동연구원에 찾아 물어도 입사초봉이 4,100만원 되는 회사는 아직 보도 듣고 못했다. 오바다. 그 친구가 말한 회사. 공사다. 하후상박의 임금구조다. 이런 건 모른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15년 근속 노동자가 얼마 받는지는 말 안했다.

 

자, 위의 반박은 이성적이도 않고, 대화를 계속 진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케하고 다음 술자리에 대한 기대를 희박하게 한다. 그렇다면 아주 논리적으로? 사실 그건 다 큰 어른들 사이에서 잘 통하지도 않는다. 안들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먼저 초봉이든, 연봉이 높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격무에 시달려야 하는가? 꼭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임금체계나 구조면에서, 다른 나라와 비교해봐도 우리나라 노동자의 임금수준이 유독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면 대부분 낮은데다가 일부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이 높다고 하는 학습효과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높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 중소기업과 비교해보자. 어떤 중소기업이 대기업 만큼이나 일을 한다고 치자. 그런데 임금은 대기업의 70%수준이라고 치자. 그러면 그 중소기업에게 30%만큼 노동자에게 주라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대기업에서 30%이상의 임금을 중소기업보다 더 받는다고 해서 그 비율대로 더 일해야 할 이유는 없다. 소위 좋은 회사는 가는 이유. 이유있다.

 

이런 생각의 저반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깔려있다.

 

"우리집 식구가 많이 받고 적게 일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남의 식구나 나보다 일도 적게하면서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은 속 쓰려서 못보겠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결국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단 유식하게 좀 떠들어 보자. 대기업이라도 같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회사마다 똑같은 임금을 받지 않는다. 기업마다 임금의 지불에 대한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임금지불과 관련된 체계나 구성, 그 수준을 회사가 미리 정할 수도 있지만 노조가 있는 경우에는 노조가 단체교섭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결국 임금교섭에 의해서 임금이 결정된다. 자, 위의 전제가 이렇게 배치될 때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1) 나는 100만원 받는 노동자다. 그리고 하루에 10시간씩 일한다. 그래서 만땅 챙겨도 한달에 150만원을 못넘는다. 그런데 김씨네는 일단 하루 8시간에 잔업수당 등은 우리보다 당연히 많다. 그리고 한달에 약 350만원 정도 받는다. 김씨네 노조는 이번에 임금 10%인상을 내걸었다.

 

2) 나는 100만원 받는 노동자다. 그리고 하루에 10시간씩 일한다. 그래서 만땅 챙겨도 한달에 150만원을 못넘는다. 그런데 김씨네는 일단 하루 8시간에 잔업수당 등은 우리보다 당연히 많다. 그리고 한달에 약 350만원 정도 받는다. 김씨 회사는 노조가 없다. 사장님이 너무 좋은 분이라 이번에 임금을 10%나 인상해 주었다고 한다.

 

1)과 2)사이에서 당신들은 어느 것을 비난할 것인가. 그 친구는 당연히 1)이다. 왜냐면 노조가 맘에 안들기 때문이다. 그 친구를 탓할 수 없다. 노조가 싫은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캐나다에 있는 내 동생도 캐나다 친구들이 대부분 계약직인데, 대공장 노조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면 그렇게 달갑게 보지 않는단다. 이걸 가지고 "당신들은 몸은 비정규직에 대기업 이사의 정신머리를 탑재한 기형아"라고 이야기할 수만은 없다.

 

양극화 문제. 결국 돈 많이 버는 놈을 적대시 한다.

 

그러나 자신이 많이 벌면 그렇지 않다. 보통 이런 주장을 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회사는 노조가 없는 회사이다. 노조가 있다고 하더라도 별 힘을 못쓰는 회사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경험이기 때문에 반증이 있다면 뒤집어 질 수는 있다.

 

위의 예와 같이 2)의 경우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1)의 경우라도 회사가 지불능력이 되지도 않는데 무리한 요구를 노조가 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비판하는 친구는 그 회사를 다니지 않으니깐. 사실 심정적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이니깐.

 

사장이 임금을 많이준다면 욕할 문제는 아닐 건데, 노조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니깐 그 노조 탓을 하고 있다. 회사가 많이 주면 개념이 있고, 노조가 요구하면 개념이 없는 것인가. 그러면 노조는 임금인상을 자제하여야 하는가. 친구의 생각은 그럴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도 않는데, 돈 갉아먹는 벌레처럼 임금이나 요구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자신도 그만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노조가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임금수준을 유지한다고 해서 그 친구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 아니 간접적인 피해도 주지 않는다. 반복해서 이야기 하건데,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 뭔가가 바로 자신의 상태와 관련된 문제이다.

 

노조가 연대를 하고, 사회적 요구를 하는 노조로 거듭난다고 해도 그러한 친구들이 노조에 호의적일까? 아니라고 본다. 젖소에게 딸기를 먹인다고 딸기우유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젖소가 생산하는 우유의 본질적 색은 흰색이다. 뭘 먹여도 바뀌지 않는다.

 

결국 자신도 공사직원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해야만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자. 웃기고 자빠진 것은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프롤레타리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회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는 말. 지겹다. 그래서 회사가 임금을 덜 주게 되면 그 덜 주게된 임금은 다 어디로 가는가. 그건 기업의 속성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상대적 박탈감.

 

물론 과도한 임금인상이 양극화의 문제나 기업 내부적인 지불능력을 흔드는 문제 등의 우려를 낳을 수도 있다. 조금 다듬어서 표현하면 개별기업마다 임금수준이 편차가 심하고, 이에 따른 상대적인 박탈감이 그 원인이다. 또한 이러한 원인은 경험적으로  IMF 외환위기를 통해 기업위기를 학습한 결과이다. 

 

그 이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한 박탈감의 문제를 노조의 임금인상 자체를 무력화하는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노사가 알아서 할 일이다. 임금까지도 여론에 따라, 국민의 사회적 감정에 따라 책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XX공사가 초봉을 4,100만원을 받든, 조종사들이 억대 연봉을 받든지 간에 임금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노사다. 회사가 어렵다고 해서 그 친구가 그 회사를 도와줄 것도 아니다. 만약 그 친구가 사재를 털어서 그 회사를 도울 정도의 또라이라면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에 아무런 토도 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가 어렵게 되면 노조와 협의를 하든 대립을 하든 그들이 결정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산업의 문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면 정부가 개입할 수도 있지만 그 폭은 굉장히 한정적이어야 한다. 임금결정을 국가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국가가 개입하여 임금구조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임금가이드라인(wage guideline).

 

문제는 임금구조의 변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적용, 그리고 직장에서의 차별 철폐 등이 핵심적인 문제로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바탕에는 사회 내의 저소득층의 문제, 소외된 사회적 약자의 사회안전망과 관련된 논의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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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그리고 강유원

요즘에 김규항의 글을 읽었다. 그이의 블로그(http://gyuhang.net/)에서 본 글들이 묶어져 나왔다.

"나는 왜 불온한가".

 

김규항. 글 잘 쓰고 나름대로 성찰하는 지식인이다.

 

그이의 글 '진리는 쉽다'라는 글에서는 추기(追記)로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하방(下放)을 기억한다. 하방은 중국에서 1942년 모택동의 연안문예강화 이후 바로 지식인들의 그런 희한한 행태를 뜯어고치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상산하향(上山下鄕), 말하자면 산간벽지와 북방의 광활한 황무지에 보내 노동하게 한 일이다. 오늘 한국에서, 우리는 하방을 기억한다.(22쪽)"

 

갑자기 아오지가 생각난다. 그리고 일제때의 민족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인 '박영'이 떠오른다. 박영의 형제(근만, 근수)들도 항일 혁명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박근수는 '하이루펑(소비에트' 전투에도 참가할 만큼 열성적인 운동가였다. 그러나 그는 1960년대 말 문화혁명때 '하방'을 당하고 결국 투옥돼 사망한다.

 

(자세한 것은 http://www.hani.com/kisa/section-002001000/2005/08/002001000200508081913546.html

 

김규항의 뜻은 무언지 알지만, 하방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논하기 이전에 왜 하방을 이야기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논해야 할 것이다. 인세수입으로 일정한 생활이 가능한 진보적 지식인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다름아닌 그런 방안이다. 하방이 원래 가졌던 의미를 담은 새로운 운동. 이것을 내놓아야 한다. 무작정 하방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글쓰기의 똥폼잡기가 아닌가 싶다. 이런 문장이 마음에 걸려 김규항을 멀리하게 될까봐 걱정이다. 사실 오바지만.

 

여튼 나는 이런 하방의 논리가 만약 자본주의가 더욱 강고하게 자리잡게 될 때, 아니면 옛날 우리들이 처했던 독재시절(이상호기자 말대로라면 지금은 삼성독재지뭐~)같은 시기로 돌아가게 될 때, 적들이 나를 하방보낼 것이 무섭다. 너무나 짜증나고 무섭다. 내가 아무리 공병대 출신이라고 해도.

 

(사실 하방이 나는 경제논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본다. 1980년대 다시 하방이 도입된 것을 보면 1960년대의 하방도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리라고 본다. 결국 정신개조는 스스로 하는 것이지 국가 동원논리로 해결해서는 안된다. 그건 세뇌다. 좀 엇나가는 이야기지만 세뇌는 영어로 brainwashing이다. 뇌를 씻으면 이미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이런 불편한 심정이 강유원의 사이트에서 조금 풀렸다. 강유원의 홈페이지(http://armarius.net/)에서 다음과 같은 토막글을 읽었다.

 

"앞으로 300년은 더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절망할 게 무어란 말인가?"

 

나는 '하방'보내기 보다는 300년 싸우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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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이야기

유시민이 좀 뜨기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자유주의자의 양심상 진보주의가 탄압받는 건 볼 수가 없다.”

 

그가 예전에 맑시스트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예전에 쓴 책에서 맑시즘에 호의적이었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내가 어릴 적에는 그가 맑시스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가 '불온한 자유주의자'라고 하였다.

 

맑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자신의 주장은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유시민"이라는 진보적 이미지만은 남아있었던 것 같았다. 실망한 바는 없었다. 잘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테레비 토론에서 사회자와 논객 사이의 적당히 유영하는 강호의 무인같았다. 어쨋든 강호의 자유주의자라 하니 자유주의잔갑다 하고 생각한다.

 

그런 유시민이 나라의 녹봉받는 일을 하기 전까지는 예전에 자신이 가진 신념, 그리고 그 이후 연이어 계속된 공부들. 이런 것들로 인해 진보진영이 탄압받는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고종석같은 진짜배기 자유주의자도 따옴표 같은 주장을 입에서 단내 날 정도로 하니 일단 여기서 그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말자.

 

 

“민주노동당을 찍는 건 사표다.”

 

그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그의 수사적 행태가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다시말하면 개혁당에서 열린우리당이라는 집권당에 진입하기 시계열적으로 보면 더욱 그랬다. 그의 빽바지가 "바리케이트", "화염병"으로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때에는 구국의 눈물을 흘렸다. 찔찔거리며 말이다. 나쁜 뜻은 아니니 오해 말기를. 줄줄 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탄핵에 대해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이가 대통령에게 들이댄 "왕의 귀환" 등의 패러디 사진을 액자에 박아서 대통령에게 보여주는 장면. 이 장면을 보면서 내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김어준씨가 정치인중에 유시민만이 유일하게 대통령 출마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단언을 했다는 말을 생각해보면서 한 생각이 스쳐갔다.

 

차라리 스스로의 정치적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강준만의 말대로 '후안무치'를 최고지도자의 소양으로 든다면 그이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생각이다. 여하간 무슨 똥개마냥 감옥나온 형님께 두부대신 액자를 갖다바치는 일은 조금 오바라고 생각했다. 아부라고 보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대통령도 인터넷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인데. 또 액자는 어디다 걸어두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민주노동당 사표논쟁. 위에 말한 유시민의 행태는 급기야 자유주의자의 양심과 무관하게 정치공학적인 계산과 언술을 무기로 '선거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깃발을 들기 시작한다. 호영남에서는 구걸하고, 약자의 약점은 가장 적절히 이용하는 전술. 대선에서도, 총선에서도, 지방선거에서도. 나는 열린우리당이 잘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어느 당이라도 영국의 노동당 꼴 안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할 수 있는 한, 그들은 목숨걸고 거짓말을 하든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민주노동당에 대한 이념공세가 차라리 고마울 껄, 이게 뭔가. 그 표는 사표다. 진보정당이 거대정당에 눌려 '표'마저 쓰레기로 전락해버리는 상황. 이건 반칙이다.

 

 

나와 친구들과의 이야기

 

이야기가 길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굵은 따옴표를 친 유시민의 두가지 발언을 두고 친구들과의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유시민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설명이 길고, 또한 대답또한 길었다. 물론 나는 듣기만 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다.

 

"니네들 참 인생 힘들게 산다. 두 가지 끼워다 붙인다고 고생하는 구나."

 

두 개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정치는 사람을 변하게 한다. 그들은 자신의 강함을 내공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오직 세치 혀로 조진다. 이게 정치다. 집단을 벗어날 수 없는 사무라이가 있는 반면, 집단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사무라이도 있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다. 이게 정치인이다.

 

세치 혀 끝에서 녹는 정치적 수사. 논리를 떠나서 설득력은 없다. 그러나 각종 지지자들은 이들의 언술과 수사를 신주받들어 모시듯하고, 술자리를 어디든 써먹지 않는 곳이 없다. 급기야 응용문제에 달하면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지 못하고 별로 맞지도 않는 이야기를 억지로 갖다붙인다. 쇠와 플라스틱을 용접하면 당연히 안붙는다. 결국 떨어지기 마련이다. 오히려 용접부위는 더욱 지저분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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