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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09
    철밥통
    공돌
  2. 2006/08/06
    유언
    공돌
  3. 2006/08/05
    오늘의 말씀Dr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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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8/02
    서울대 총학생회장 탄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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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8/02
    주제를 한정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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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8/02
    에릭홈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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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8/02
    교권침해...엄마들이 학교를 찾아가다
    공돌
  8. 2006/08/02
    깨달음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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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8/02
    디카와 사진관
    공돌
  10. 2006/08/02
    내가 쓴 글 모음
    공돌

씨발.

세상에 자유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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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밥통

철밥통을 욕하면서도 철밥통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http://blog.jinbo.net/gimche/?pid=176
 

블로그 대문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고 고민지점도 명확하다. 나는 그런 면에서 둔하고 느리다. 그러면서도 모순되게 즉흥적인 부분이 많아 글쓰기는 평생에 나를 성찰하는 훈련의 과정 이상으로 의미는 없을 듯 하다. (띄어쓰기도 많이 틀리고, 적합한 용어나 논리의 흐름도 술을 먹으나 안먹으나 같다.)
 

윗글, 출처는 밝혔다. 재미있게 읽었다.  
 

1. 재미있는 성찰(경험)과 분석은 "나 또한 과거 공무원이 되고자 했지만, 공무원직이 가진 안정적인 면만이 강조되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안정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정방향이 아님은 분명하다."라고 하는 부분.
 

(말장난을 좋아하는 선생들은 주로 "과거"에 방점을 찍기도 한다. 무슨 과거에는 안정적이지 않고 다른 이유로 공무원을 하려고 한 것이냐는 졸렬한 비판. 나는 그들의 비판방식과 수사법이 씨발 누구를 위해 적대적인지 묻고싶다. 공무원들이 공직사회의 개혁을 위해 노동조합을 통해서 그걸 촉구하러 동, 구, 시청에 다니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안다.)

 

2. 그러면서 "철밥통을 욕하면서도 철밥통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재벌을 욕하면서도 자신도 기회가 되면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돈을 왕창 벌고자 하는 사람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 라고 하면서 진보적인, 그것이 매혹적인지는 몰라도 해법을 못찾고 있다고 한다. 
 

생각의 흐름이 진실하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가 어떤 노동을 하는지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그의 일일 뿐이고 내가 평가할 생각은 없다. 더욱더 솔직하면 정답이 나올 듯하다.
 

인용에 대한 생각. 1번은 두 문장 간에 "모순"이다. 인식의 모순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본질은 "안정성"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첫 문장은 안정성에 대한 비판이나 뒷 문장은 안정성에 대한 긍정이다. 그이가 왜 공무원이 되려고 했을까.


2번 인용에 대한 생각. 앞의 두 문장 간에 "비약"이다. 첫 문장은 안정성에 대한 문제이고, 뒷 문장은 돈에 대한 물신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말, 자본주의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공무원이면 돈을 왕창 벌지는 않는다. 특히 "무슨 수단을 써서". 나는 믿는다. 공무원들도 무슨 수단을 써서 공무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정성이 항상 '돈을 왕창 벌게'해주지는 않는다고 본다. 변칙과 편법이 주로 그렇고. 원칙으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꽤 있다.

 

그래서 솔직하지 않다는 느낌.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성찰이 잘못되어 있어 해법을 못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들을 많이 본다. 갑자기 '공공성' 문제가 튀어나오는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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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45갑바 형님이 죽었다. 그 형님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내 나이 45살. 그래 든든한 배우자 없이, 이 낡은 골방에서 오늘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이 방에서 나 홀로 나와 함께 그득히 깊은 술잔을 들이키고 있다. 내 옆에는 나와 함께 하던 의자와 내 키 길이의 나일론 끈을 하나 두고 잇다. 그리고 이 글을 쓴다. 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러한 모습이 나를 더이상 지켜주지 못함에, 나의 부모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모두 지구를 떠났음에, 나도 함께 떠날려고 한다."

 

그 형님은 아쉽게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리하려고 한다. 말릴 여유도 시간도, 단서도 없어 그냥 그는 그렇게 글을 잇고 있었다.

 

"과거는 묻고 싶지 않다. 미래가 보이기에 나는 지금의 선택을 믿는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선택에 대해 어떠한 평가도 없었으면 한다. 그 평가가 나를 평가절하하는 것이든 아니면 나의 인생에 불구한 모습을 반영하듯 이 같은 똘아이를 요절이라는 낭떠러지로 모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나는 결혼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의 연속적 결정, 다시말하면 오래동안 그와 함께 사랑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진지하게 언약했다면 나는 그것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그러질 못했고, 나 또한 나의 이기와 연약한 세상살이의 아픔으로 더 이상 한 발걸음도 나아가질 못해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다. 결혼이 죽음에 대해 일시적으로 혹은 장기간 삶에 대한 끈기를 제공하지는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러한 조건과 상황이 아니고 그러한 조건과 상황에 대해 후회도, 절망도 하지 않는다."

 

그는 참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나 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내가 볼 때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을 발견할 새로운 것도, 자신을 통해 타인을 보는 것도, 타인을 통해 자신과 교감하는 것도 자신이 없었나 보다.

 

"나는 오늘 여기를 떠난다. 아름답게 떠나고 싶다. 그것이 남들의 환송을 받으면 가는 것이 항상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비록 오늘 떠나는 것이 외로울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삶에서 내가 나의 우주를 소멸시키는 거대한 자유를 내가 온전히 가져갈 수 있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다. 그것이 이기적이든 어떻든 간에 나는 내 우주의 한계와 소멸의 정점을 내 스스로 규정짓고 간다. 아쉽게도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나의 모든 신체장기는 여기에 두고 간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 쓰일 수 있는, 가동력있는 물건이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나는 모든 신체와 장기를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한다. 그리고 나는 떠난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야기 했다.

 

"나를 생각치 마라. 생각한다고 나는 너희들이 어떤지 모른다. 그냥 생업에 충실해라. 나는 즐거웠고 또한 즐거워해준 너희들을 사랑한다. 잠시 여기 들렀다가는 사람처럼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그게 내가 편해. 나는 잠든다. 잠든 나를 깨우는 것은 실례다. 너희들이 아름다움 삶에 내가 방해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냥 나는 갈 뿐이다. 모두들 마지막까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말기를. 나는 모든 것이 한가롭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떠났다. 아무말도 없이. 그러나 많은 말을 남기고.

 

뱀발: 픽션입니다.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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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Drei

한 여자아이와의 짧은 종교에 대한 대화 중,

 

"사람의 무지로 하느님을 정의하지 마라."

 

씨발, 그럼 왜 너희들은 하느님을 증명할려고해? 상식적으로 그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증명을 하냐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어쨋든 그 아이의 말은 거의 '명언'에 가깝다. 그러나 이미 '광신', 아니면 '빠'수준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무슨 논리가 있겠는가. 그냥 싫은 거지뭐. 맑스를, 로자를, 루신을 그냥 대놓고 씹어 재끼면 그리 좋을리는 없겠지만(물론 정확하고 날카로운 비판은 언제나 나를 깨어있게 한다. 그들은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내 생각을 알고 싶다는 그이의 주문에 그대로 나는 답을 했을 뿐이다. 답의 내용?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나는 기쁠때는 무신론자이고, 슬플때는 불가지론자이다. 그 사이에서 논다고 보면된다.(나중에 한 번 정리하자.)

 

짧막하게 나마 휘갈겨 본다. 김홍도라는 목사가 있다. 그 목사는 '쓰나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충의 내용은 이렇다.

 

`쓰나미에 희생된 사람들은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는 자들이다'

 

쓰나미가 비교적 따뜻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뒤엎어 버린 것을 보고 한 목사님께서는 하느님 안믿어서 그렇단다. 재수없다고 하기에는 사태는 좀 심각하게 느껴진다. 물론 논리적으로 대응하고 싶지 않다.나는 개인적으로 볼 때, 모든 문제의 책임은 목사님이 아니라 그들이 신주단지처럼 받을어 모시는 하느님 때문이라고 본다.

 

그가 말하는 하느님은 항상 불의 심판을 내리시고, 물로 쓸어버리는 하느님이다. 과격하신 분이다. 얄전없다. 걸리면 쥐뿔도 안남는다. 인도네시아, 그곳에 이슬람이 87%다. 그외 그리스도교를 가진 사람이 9%다. 쓰나미에 9% 중 하나도 죽지 않았다면 일단 하느님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 필요까지도 없다.

 

자기를 믿지 않으면 다 쓸어버리는 자기들의 하느님. 그건 신통력과 전지전능을 가진 조폭두목에 불과하다. 왜 신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늘 그런 식일까. 위협하고 두려움을 주고(갑자기 부시가 생각나는 이유). 그 중에 자기를 믿는 사람이 과연 없었을까. 믿음의 정도가 견고하지 않아서 쓸어버렸을까. 일단 하느님 책임. 있다.

 

두번째, 하느님이 책임져야 할 것 중에 또 하나가 있다. 바로 자식교육이다. 목사든 누구든 간에 전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한다. 그래 좋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해두자. 구닥다리 쉰냄새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인 시오니즘같은 느낌이 들지만 일단 제쳐둔다.  

 

어떻게 자식새끼하나 제대로 관리 못하나. 그 책임의 내용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그런 똘아이 망발을 하는 그런 하느님의 자녀. 부모의 가정교육이 잘못된 탓이라고 본다. 그 목사님을 똘아이로 만든 것이 하느님이다. 하느님. 이 타임에서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자녀분, 최근에 공금횡령으로 대법원까지 가서 유죄판결 받았다. 또한 교회를 세습하다 주변 동료 목사들에게 진탕 맞고 있다. 슬프기 그지없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하느님. 해명하셔야 한다. 당신을 안믿는 놈이 하느님을 배반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믿는 자식이 저렇게 방방뜨고 법원에서 유죄판결까지 받고 있는 현실. 하느님. 쪽팔리지 않는가.

 

스티븐 호킹이 말했듯이 신이 있든 없든 간에 우주는 대체로 잘 운영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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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총학생회장 탄핵

서울대 총학생회장. 탄핵.

 

전체 학생들의 투표. 그리고 대의원들의 탄핵.

근거는 허위이력, 독단적 한총련 탈퇴 등등

 

가잖다. 난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두둔할 이유도 없다. 그가 잘못한 일은 있으나 이것은 결국 그가 비난받으면 그뿐이다. 다만 더욱 논쟁을 했어야 했다. 그 사람을 찍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에 논쟁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의원을 중심으로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경계에서 쇳조각이 튀기는 일만 있었을 뿐이다.

 

도덕적으로 학생 대의원들이 얼마나 더 우월한지 모르겠다. 비운동권이라고 불리는는 학생들이 학생회를 '점령'하게 되면 결국 이러한 말로를 겪게되는 구나 하고. 물론 아닌 놈도 있었으나, 항상 선거때 좌파와 자주파는 대립했지만, 비권의 등장에는 항상 쫄면서 물밑으로든 수면위로든 연합하기도 했다. 쪽팔린 일이다. 언제는 서로 졸라게 씹으면서 말이다.

 

한총련 가입 탈퇴.

 

언제는 한총련 가입을 학우들의 의사를 들어보고 했는가. 공안사건에서 기수마다 정체성이 다름을 주장한 그들이, 매년 학생회 선거 이후 한총련 가입에 대해서는 따로 절차를 왜 밟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난 한총련이라는 조직을 싫어한다. 그러나 더 싫어하는 궁극적 이휴는 그들의 시스템 자체가 대단히 비민주적이고, 독선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사상의 다름을 떠나서라도 나는 그들이 싫다.

 

탄핵당한 전 총학생회장이 성인 오락실에서 얼마를 지원해서 받아쳐먹었는지는 몰라도 운동권도 똑같이 기업체든, 판검사 등 출세한 선배들에게 돈을 구걸하면서 행사비 명목으로 돈 타 먹은 놈이 한 둘은 아닐 것이다. 난 다 싫다. 학생운동이라는 하는 인간들 자체가 오늘은 너무나 싫다.

 

항상 사람은 자기 발 밑을 유심히 관찰하고 조심해야 한다.

 

2006.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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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를 한정하는 능력

tommy emmanuel의 연주곡을 듣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해질 수 밖에 없을 거 같다. 논문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하니 식당에서 밥나오기 전에 이 집이 잘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것과 같다. 아직 쓰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먼저 주제선정의 문제가 있다. 근로감시장비도입에 따른 근로자의 인격권과 관련된 주제가 내 주제다. 물론 이 주제는 내가 작년 2학기에 개별법 수업시간 주제발표를 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주제의 범위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포괄적이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굉장히 협소하다. 전자도입의 종류는 불문하고 기본적으로는 도입의 의도나 실태는 새로운 데이터가 아직까지 없고 사례만 무수히 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감시장비의 도입의 의도를 정확하게 집어내서 그 법적 문제와 대응 방안에 대해서 쓴 다는 것은 탁상공론이 될 수 밖에 없다.

 

둘째로 갑갑한 것은 이 문제는 결과적으로 조화를 통해서 풀어야 하는데, 사용자의 권리남용이 근로자에게 어떤 영량을 미치는지는 제껴두더라도 실제 권리침해의 주체가 근로자다. 그러니깐 사용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방식과 노동자의 인격권을 보호하는 방안 이 양자가 동시에 구사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로자의 인격권이라는 것은 침해당하고 있거나 침해당할 가능성이 있는데, 사용자의 권리는 침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가 좁혀지냐 마냐의 문제이므로 결국 사용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방법으로 가게 된다. 쉽게말하면 사용자의 시설관리권과 노무지휘권을 일정한 방법과 절차에 따라 제한하는 것인데 의도는 둘째치고 사용자의 감시장비 도입은 자연스럽게 합법화된다.

 

문제는 불법적인 감시장비의 문제이다. 불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인 근로자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면 감시장비 자체뿐 만이 아니라 도입행위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양방향으로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데...

 

2005.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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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홈스봄

“공산주의를 비롯해서 대의를 주장하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갖는 최악의 문제는,

 너무나 고결한 나머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희생까지도 정당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적은 그르지 않다.

 또한 세상에 대해 적당한 기대감을 갖는 사람만이 끔찍한 해악을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는 지적도 그르지 않다. 그러나 나는 원대한 희망과 절대적인 열정이 없다면 인간이 인간 본래의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비록 그런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말이다.” (1999, 에릭 홉스봄)

 

홉스봄. 요즘에는 밴디트(Bandit)를 읽고 있다. 집중해서 읽을 시간은 없지만, 가끔씩 읽고 있다. 그이의 학문적 성과물 속에는 학문적 성찰외에도 인간에 대한 내면적 성찰의 깊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런 책은 잘 없다. 최근에 그런 책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전순옥 선생님의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나의 노동학과 관련된 지식 뿐만 아니라 노동철학과 인생철학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남성노동자들이 많이 읽어야 할 책으로 생각한다.

 

위의 홈스봄이 말한 것을 씹어 보면서 또 하나의 느낌이 들었다. 원문이 어떤지는 몰라도 말이다.

 

세상에 대한 적당한 기대감. 그러나 인간 본래 구실. 나는 이 사이의 벽을 '공정함'으로 풀고 싶다. 공정함이 있다면 끔찍한 해악과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고, 인간의 본래 구실이라는 "평등"이라는 가치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말은 지금은 노망든 할매인 오리아나 팔라치(얼마전 내가 본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을 읽고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가 한 말과 겹쳐진다. 그래서 공정함이 생각났나 부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어온 이들이 보통사람과 달랐던 점은 그들의 지성도 힘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상도 아니며, 오직 보다 원대한 야망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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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침해...엄마들이 학교를 찾아가다

먼저 학교와 학생과의 관계를 규명해본다. 쉬운 예로 미국을 보자. 1965년 틴커 판결 전후에 나왔던 논의로 학교와 학생과의 관계를 특권이론, 부모대위이론, 계약이론, 행정작용의 재량권통제이론 등으로 각자 보는 시각이 달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지 모르지만 약 7-8년전만 해도 행정작용의 재량권통제이론이 통설이다.

 

각 학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특권이론은 전통적으로 재학관계를 학교가 학생에 대해 가지는 특권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초헌법적 특권을 서당의 훈장에게 부여한다. 말이 안되는 이론이다. 다음으로 부모대위이론은 학생에 대해 부모의 지위를 대위하여 거의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견해다. 이번 사건에 비추어보거나 개정 사학법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은 이야기다.

 

학생과 학교는 계약관계라는 입장 또한 의무교육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곤란한 측면이 있다. 물론 의무교육 외에 비상식적인 부분도 이해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여하간 학교가 학생에서 일련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일정한 행정작용과 비슷하게 보는 것이 설명하기에도 학생의 권리를 보호하는데도 쉽다. 왜냐하면 사법적인 구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학교와 학생의 소송상의 대립. 이건 뭔가가 좀 어색하다.

 

이런 어색함은 '교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움에 있어 기본적인 전제는 선생과 학생간의 신뢰와 존경,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의 흐름은 이와같지 않다.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통제와 규율, 지배와 공포에 있다. 이건 학교도 산재되어 있는 권력기구에 불과하다는 미셀푸코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학교는 당연히 아이들의 신체일부까지도 간섭하고, 또한 폭력을 행사한다. 교사의 폭력은 사실상 국가폭력과 다르지 않는 미시적 권력의 폭력이라고 본다. 여하간 이러한 이론의 밑바탕으로 가지고 이번 교권침해 논쟁에서 빠져있는 것을 살펴보자. 생각해보니 위의 이론은 그냥 재미삼이 써 놓았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히 든다. 지울까 말까.

 

1. 본질

 

교사가 무릎을 꿇다, 요게 굴욕적이고 교권침해라는 이야기인데, 부모들이 굴욕적으로 한 것이 무엇일까. 전후좌우를 살펴봐도 나는 부모의 입장을 먼저 이해할 수 있다. 아이가 10분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에 밥을 먹어야 하고, 어느 놈은 마늘쫑을 제대로 씹지못해 마늘쫑을 그대로 토하기까지 하니 부모의 마음에 마늘쫑이 아니라 마늘이 다발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다.

 

급식 3교대. 요게 문제다. 급식체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고 부모들은 먼저 선생과 교장에서 일단 이성적으로 급식의 문제를 이야기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사태의 흐름은 이렇게 가지 않았다. 부모들은 선생의 집으로 가서 항의를 했고, 선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둘다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있었고,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다 외면하고 있었다.

 

근데 급식지연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밥을 빨리먹으라는 종용이 반성문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너무 간과하고 있다. 밥을 늦게 먹은 것이 죄인가. 아이들이 밥을 늦게 먹는다는 이유로 채근하는 것이 교육인가. 행정상 다음 교육일정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선생의 책임이니, 책임을 벗고자 밥을 빨리 먹게 하고, 늦게 먹은 아이들에게는 반성문을 쓰게 해서 다음부터는 화이팅해서 더 빨리 먹으라는 것인가.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게, 반성문의 내용이 과연 어떠했을까가 문제다. 틀리지 않은 것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적어도 밥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선생이 시간을 벌어주어 밥먹는 시간을 확보해주었어야 했고, 선생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관련 학교회의나 교사의 신분으로 교감, 교장에게 이런 문제를 건의했어야 했다. 그래서 일단 교사가 옳지 못했다.

 

 

2. 학교측과 교원단체의 반응, 심지어 전교조까지.

 

절망이다. 실망이 여러 개 모여도 절망까지 잘 안간다. 그냥 실망이 많을 뿐이다. 그러나 절망은 단 한개만 다가와도 숨쉴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학교측은 대책이 없었다. 교원단체는 화났고, 전교조도 뿔다구났다. 근데 문제는 교육적 대책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다. 뭐가 문제인지에 대해서 말이 없고, 그냥 부모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학교에서 선생을 몰아세우고 결국 선생이 무릎을 꿇은 사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이게 자칫 자기 family챙기기로 가면 결국 이기적인 모습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철밥통이야기 나올 수 있다.

 

문제는 전교조의 대응도 문제이다. 이게 절망으로 간 결정타이다. "무릎꿇린 것은 심각한 교권침해"...신문의 제호들은 그랬다. 전교조의 논평을 담아낸 언론의 문제는 제껴둔다고 하더라도, 이건 씨팔 믿었던 도끼에 대가리를 찍힌 기분이다. 진상조사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정작 밥 늦게 먹는 아이들이 사실 수업을 받기 싫어 태업을 하는 건지, 준법투쟁을 하는 건지, 아니면 실제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자질 없는 선생들에게 받은 굴욕과 상처가 일순간 떠오르면서, 정수리에 철밥통으로 한 대 맞는 기분이다. 극복해야 하는데...떠오르는 걸 어쩌겠나?

 

3. 언론의 태도

 

요건 간단하게 해 논평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방송사들은 과연 기사를 보도하는 건지, 영화를 만드는 건지 구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중심이 무릎 꿇는 극단적 모습만을 여러 차례 방영하면서 선생에 대한 애처로움을 극대화시켰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로 묘사했다. 그러면서 한 쪽에서는 학생들이 선생에게 맞는 사건을 보도하면서 말이다. 이해가지 않는 대목이다. 이 두가지 상반된 기사를 해석하고 내놓는 대책이 일관성을 가져야 언론의 시각에 대해 시청자와 독자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다.

정말 무식한 작자들이 아닐 수 없다. 자기들은 아이들이 없는지 모르겠다. 오바이트 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4. 부모들

 

부모들의 문제는 다음과 압축할 수 있다. 먼저 부모들이 떼거지로 몰려가 선생을 위압적인 분위기로 몰고 간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선생 옆에는 최고 책임자인 교장이 있었다. 교장은 말이 없었다. 나비처럼 날아서 어디론가 가고 싶었을 뿐이다.

 

부모들이 적절한 대책을 제안하고 그에 대해 일정한 요구를 제안하는 하는 수준이 아닌 선생의 사직을 종용했다. 좋은 선생들이 많다. 짤렸다가 구사일생으로 다시 복직한 선생들 생각하면 선생들이 외압에 의해 짤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선생에 대한 일말의 양심과 도덕적 태도에 실망을 하게 될 때가 문제이다. 폭행, 성추행 등 아이들에 대한 반교육적이고, 반인륜적인 작태에 대해서는 지탄받아 마땅하고, 오히려 이러한 부분에 교권의 정화를 위해 학교당국의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부모들의 이러한 문제는 문제일 뿐, 잘못은 아니라고 본다. 아쉬울 뿐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문제는 이성적으로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선생들이 왜 인식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5. 무릎을 꿇다

 

결국 선생은 부모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중에 비티 인터뷰에서 사건의 진정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고 하였다. 무릎, 함부러 꿇는 것이 아니다. 선생의 입장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대책을 내놓고 부모들에게 사과를 했었더라면 사건은 쉽게 해결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미 선생과 부모들은 한바탕 싸웠고, 이에 분이 안풀린 아지매들은 결국 학교로 달렸갔다. 당연히 선생의 입장에서는 이런 부모들의 태도에 대항할 정당성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무릎을 꿇는가. 교육자의 태도는 정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진정이나 봉합을 위해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옳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건 다분히 쑈라고 보이는 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뱀발: 일단 생각만 갈무리. 비정규직 교사를 이야기하면 더더욱 골때리다. 비정규직 교사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공격받을 대상은 학교, 부모, 정규직 교사. 그들은 자신들만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더 치열해야 한다. 더욱더 철저해야 한다. 그러나 글에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다음 기회로 미룬다.

 

2006.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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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뭘까.

한 몇 일 동안 계속 "깨달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명상도 잠시 했다. 내면에 있는 것들은 살펴보는 시간.

 

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할까?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은 깨달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교철학과 노장철학의 공통점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양자의 극단적인 약점은 그 철학의 "무기능성"에 있다.

 

부처의 "깨달음",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다라는 말이나 노자의 "무위"나 사실 별 현실에서 냉정하게 평가하면 적당히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wellbeing(넉넉살이)의 한 방편에 다름아니다. 물론 절박한 심정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선방에 앉아서!

 

결과적으로 이와 관련된 이야기나 말씀을 들으면 그 때는 좋은 것이다. 평안하고 행복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물론 지속적으로 자기가 그러한 질문을 통해 절차탁마하고 삼매에 빠져들면 또 어떠한 경지에 도달하는지 모르겠으나, 그 경지는 결국 도가 "튼" 놈과 아닌 놈 사이에 차별의 간극으로 존재한다. 이것을 잘 이용하면 왠간한 사이비 종교하나는 너끈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어나갔는데, 결과적으로 예수를 추종하는 이든, 부처가 될려고 하는 이든, 마호메트나 노자, 장자, 문선명, 여호와의 증인 등등 그들을 믿는 말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꼴깝을 떨고 사는 건 매한가지다.

 

물론 깨달음의 경지는 나와 타인의 구분, 즉 경계가 사라지는 어딘가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은데 어떠한 자신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소위 대통령이든 노동부장관이든 성철 스님이든 간에 진정코 깨달음을 얻은 이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인가)받게된 공인된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부처는 거리낌과 걸림이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유인이다. 

 

근데 그것이 어떠한 자유를 주는지는 모르겠다.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가 "대자유인"이라고 떠벌이고 다녔는지는 몰라도 일단 그러한 깨달음이 진정한 이 사회의 자유를 줄 거라고 생각치 않는다. 물론 개인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자유, 자기세상의 구축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점은 인생살아가면서 필요하다고 본다.

 

자유라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자기의 통제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을 얻을 때 그게 자유라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백날 가져봐야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하면 그게 또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는 자기통제라는 등식도 한참 생각 후에 던져 버렸다. "사회"라는 문제가 개입되는 한 그러한 등식은 웃끼고 자빠진 소리에 불과하다.

 

아직도 깨달음에 대해서 미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계속 생각은 이렇게 흘러간다. 탄압과 불의에 항거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열반으로 보는 것이 맞는지, 수십년간 수행 끝에 납자들과 신도들의 추앙을 받으며 박정희의 서슬파란 칼 앞에서는 별 말이 없었던 성철 스님의 열반을 진정한 해탈로 보는 것이 맞는지.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고도의 경지는 전태일과 성철이 유사하나 문제는 그 모양새가 좌탈입망이냐 아니냐가 아닌, 누구를 위해 열반의 길을 갔는가가 핵심이다. 아직도 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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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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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와 사진관

2년전인가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 신림동에 있는 사진관에 갔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포토샵으로 얼굴에 있는 점을 빼고, 잡티제거 하고. 그런 후에 즉석에서 프린터기로 사진을 뽑은 다음 사진을 절단하는 칼로 여러조각의 사진을 자른 후 종이봉투에 담아가기까지 약 15분정도. 금방 끝난다. 현상시간이 그만큼 단축되기 때문일 것이다.


난 아직도 증명사진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이 동네 사진관으로 간다. 사진관은 늙수구레한 아저씨께서 운영하신다. 요즘은 거의 일흔을 넘기시는 분이 많으니 아저씨라고 하는게 나을 듯하다. 사진찍고 현상하는데만도 반나절은 걸린다. 대충 몸만가면 돌려입는 양복입고, 빗질하고, 넥타이 고무를 확 조으면 사진촬영 준비끝.


내부의 시스템도 복잡하다. 조명빨을 잘받게 은색 우산같은게 걸려있고, 사진기는 측량기처럼 세워놓고 커다란 렌즈구멍에 눈을 갖다대놓고 찍으신다. 고개를 이렇게 저렇게, 몸을 약간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이렇게 모델은 작가의 지시에 따라 최고의 포즈를 만든다.


물론 사진관 내부의 냄새도 정겹다. 아저씨는 금방 식사를 하시다가 사진을 찍으시기 때문이다. 그윽한 된장 냄새가 사진관을 진동한다. 약 10분간 이리저리 하다보면 사진촬영이 끝나고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기고 사진관을 떠난다. 이 사진관이 그나마 첨단화된 것은 사진현상이 끝나면 핸드폰으로 전화를 때려준다는데 있다.

 

그런데 사진의 호감도는 그렇다. 우리가 머리정돈하러 가는 미용실이 아무리 비싸도 잘하면 싼 곳보다 그곳을 선택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 인격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괜찮을 곳을 찾기 때문이다. 사진은 더욱더 그렇다. 내 사진에 누가 칼이라도 꽂아봐라. 그만큼 사진은 인간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이다.


 

 

디지털 카메라.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 찍지 못하는 슬픔이 있지만 일단 증명사진에 관해서는 우리동네 사진관 아저씨를 능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사진관은 어렵기 그지없다. 제레미 리프킨이 말했듯이 일자리는 점점 소멸된다. 기계, 기술의 변화를 동반한 의식의 변화가 이렇게 생계를 유지했던 밥통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결과를 목도한다.

 

그러나 이것을 막을 수만은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가능하면 빨리, 그리고 싸게, 독점적인 기술을 가져야 한다.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현재에는 집에서도 사진을 프린터로 현상할 수 있으니, 이제 사진관의 시대는 막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옛날 큰 행사나 결혼식이 있을 때 터트리던 마그네슘 사진기는 더 이상 남한 사회에서는 구경할 수도 없다. 또한 현재에는 의미도 없는 추억거리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결혼식은 캠코더로 아예 영상을 남기니 사진사 아저씨가 찍는 사진은 필요한 만큼만 찍는다. 나머지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디카로 찍어준다. 그리고 메일로 날려주거나 홈페이지에 올려준다. 퍼가면 된다.


 

사람들은 사진관에서 사진 찍고 현상하는 것이 돈 아깝다고 한다. 얼마전 포털사이트에 증명사진을 '60원'에 현상하는 법이라는 '뜨는 이야기'가 게시되었다. 읽어보니 사진관 아저씨들 머리에 빨간띠를 맬 수 밖에 없겠더라. 아줌마는 이 때까지 증명사진 몇 장을 뽑으면 거의 만원인데, 집에서 디카로 찍어 포토샵으로 얼굴을 여러게 나열해서 뽑으면 굉장히 경제적이라고 소개했다. 더 노골적으로 단적으로 사진관에서 현상하는 것은 "돈아깝다"고 했다.


 

 

언뜻 보니 그러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밑에 있는 댓글이 종래와는 달리 '강추', '붐업'이런 게 아니었다는 말씀이다. 시일야 방성대곡을 방불케 하는 장문의 글. 사진관을 하는 사람, 그를 옹호하는 사람, 사진관의 딸....여하간 곡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인격의 표상인 얼굴을 찍는데, 싼 맛으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면 곤란하다.


 

디카로 찍은 사진과 사진사의 사진은 일단 차이가 있다. 동네 사진관이 가지는 의미.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정확하게 짚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가끔씩 신문지상에 영정사진을 공짜로 찍어주는 분들이 있는데, 그 분들이 밥통만한 사진기로 어르신들을 찍는 모습은 아름답다. 사실 디카로 찍어도 무방하지만, 그건 좀 그렇지 않다.

 

갈 길을 천천히 준비하고 싶은데 디카로 찍어서 프린터로 뽑아주면 그건 좀 그렇다. 디카는 보통 인스턴트의 상황에서 인스턴트식으로 찍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의 부모님께는 그렇게 하겠다고 화끈하게 그런다면 말리고 싶지는 않다. 안봐도 비디오다. 괜히 그 일로 싸우지는 말았으면 한다.


 

아까 결혼식 이야기를 했는데, 결혼식 당일에 남기는 사진은 몇 장에 불과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결혼식 입구에 들어설 때 보이는 것 중에 신분상승에 환장한 사람처럼 유럽식 복고 복장을 한 청년과 숙녀가 함께 찍은 '왕어색' 사진들이다. 비싸기도 완전 비싸다고 들었다. 물론 혹자는 집단 사기의 연속극이라고 했다. 거의 예술적으로 오해의 단계를 뛰어넘어 신원확인이 필요하게 되는 상황까지. 그건 사진관에 맡긴다. 일단 복장이 안되고, 그렇게 찍을 형편도 안되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런 사진이 사치인지, 아니면 인생에 한 번(혹은 두번?)밖에 없는 혼인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자기들끼리의 "쇼"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굳이 필요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집집마다 하나씩 걸어두는데 우리집에 하나 걸어두는 것도 좋고, 또한 부부싸움이나 집안에 우환이 겹치면 그런 사진은 심리적으로 좋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관이 계속 명멸하는 가운데, 사양산업이 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돌파구는 이런 사진을 찍거나 젊은 사람들의 구미에 맞도록 낮은 가격과 빠른 인하로 승부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포토샵 기술도 하나의 조건이다. 고급사진을 찍는 방법도 그 중 방법이라면 방법이다.그렇다면 이것만이 살 길인가.


 

 

말이 이리저리 튀었다. 무엇보다 사진관이 살아남는 건 추억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어릴 적 엄마손 잡고 증명사진 찍고 자장면 얻어먹고 집으로 오던 그 추억. 그렇다고 사진관에서 사진 찍으면 자장면을 공짜로 주는 티켓을 줄 수도 없는 노릇아닌가? 결국 새로운 활로를 찾는 것이 남은 일자리를 보존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사진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꿔버리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갑자기 여행스케치의 노래 중에 "꿈을 찍던 사진관 김씨 할아버지"라는 곡이 있다. 가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그런 꿈을 찍어주마 우~~
못생긴 마음 삐뚤어진 마음도
할아버지 앞에선 환한 웃음으로 바뀌네
난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라"

 

그렇다고 사진사에게 심리치료사나 영적 지도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사진사는 최고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진관에 틀어박혀 있을 필요가 없다. 먼저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 디카로 찍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디카로 더욱 잘 찍을 수 있는 사진촬영의 기술을 전수하는 것. 이것도 그리 돈 안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서비스 차원에서도 고려할 만 하다.


 

또한 최근에 아기 사진관, 무슨 사진관 하면서 특화된 사진관도 많다. 놀이방을 같이 운영하면서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비용상의 문제도 있겠지만 놀이방에 전속적으로 채용될 수도 있다. 그러면 일단 일자리 1개는 늘어난다. 물론 사진가격을 사진사가 독점으로 매길 수 없다는 공정거래의 기본원칙은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사진은 굉장히 잘 찍으면 된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과장되게 잘 나오면 더욱더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렇다면 또 한번 사진관에서 나오라. 그리고 우리집에서 일상적인 사진을 굉장히 멋지게 연출해보라. 가령 새집을 짓는다거나 입주한다거나 이럴 때 한 장의 사진을 찍어보자. 멋있는 집을 배경으로 가족이 집단적으로 찍는 것. 이거 의미있다. 사진은 기록이자 예술이고, 화합이자 찬라의 평화를 가져온다.


 

또한 사진관이 수동적으로 기다려서 될 일인가? 명절을 놓쳐서는 안된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인다. 이렇게 떼거지로 모이기는 쉽지 않다. 가끔씩 새로운 주인공도 나타난다. 조카, 사촌동생, 육촌동생들이 태어난다. 고향에서, 혹은 친정, 시댁에서 찍어둔 사진. 이것도 의미있다. 그냥 찾아가라. 발품을 팔아줘야 한다. 아니면 전단이래도 뿌려야 한다. 자본주의적 공세에서 사양산업의 쇠퇴일로를 점진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이건 의식운동이다.


 

 

모두가 시즌이 되면 찍는 사진말고, 동호회나 산악회 이런 건 무조건 가야한다. 사진사의 건강과 보람, 그리고 약간의 금전적 이익도 추구할 수 있다. 잘 찍은 사진. 멋진 액자에 담아서 줘봐라. 이건 감동된다. 남편이 이걸 가지고 집에 걸어두기 위해 못질하는 모습은 거의 거룩하기까지 할 것이다.


 

딱딱한 집단일수록 사진을 많이 찍으면 좋다. 가령 노동조합의 예를 들어보자. 집회때 왕창 모여있는 사진보다는 집회의 진정성이 담긴 인물사진을 찍는 것도 가치있다. 또한 단합대회때 공차는 모습만 찍지말고 재미있는 게임을 통해 좋은 사진을 연출하는 것도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데 작은 아이디어가 될 것이다. 기록의 가치와 동시에 집단의 모습을 순화할 수 있는 기능도 사진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글에서는 단지 사진관에 관련한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그렇지만 사라지는 일자리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것은 단순히 추억에 의존해서만, 동정심에 기대어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라지는 모든 직업에 대해 단결해야 한다. 그래야 추억도 지켜질 수 있는 법이니깐.


200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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