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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01
    동생에게
    공돌
  2. 2007/01/31
    노동자계급
    공돌
  3. 2007/01/30
    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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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1/30
    P와 K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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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1/25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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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1/22
    선(禪)과 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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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1/22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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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1/18
    광고인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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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1/09
    민주노총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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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1/04
    쪽팔린 일들
    공돌

동생에게

어제 먹은 술은 거의 독약과 같았다. 최근에 이렇게 힘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그래도 지금은 나쁘지 않다.


어제 너의 모습. 그리고 말. 그리고 생각. 그리고 나의 생각. 물론 애정으로 하는 충고니 니가 새기든지 말든지는 니 몫이다. 오히려 충고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말마따나 공부하는 사람은 두 가지 경계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욕구이고 또 하나는 오만함이다. 일단 과거부터 떠올려 보자. 너를 보면 과거의 내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 다닐 때 그 모습 그대로라서 심하게 비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니가 그런 모습은 안닮았으면 한다.

안좋은 모습을 닮지 않으려면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만 그렇게 하고 늘 제자리를 맴돌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를 바꾸는 일, 때로는 심하게 매질하고 깎고 깎이는 일에 익숙해야 한다.


따라서 욕구를 조절하고, 오만함을 다스리는게 중요한 일이다. 먼저 욕구는 절제가 부족해서 생긴다. 끊고 맺는 장단을 조절하지 못하는데 그 문제가 있다. 식욕, 성욕, 주욕 등 모든 게 일정한 절제 속에서 쾌락이 극대화되는데 그것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자기 삶의 일부가 파괴된다. 제대로 된 판단력과 기억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오만함도 그렇다. 특히 공부를 하게 되면 오만함이 머리칼 끝에까지 미친다. 이건 경험이다.

자기가 몰랐다고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가르치려 드는 것이 '덜' 공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공부는 사실 공부는 해도해도 끝이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공부라는 건 주장으로 끝나는게 아니다. 또한 토론을 통해 타인을 설득한다고 그게 공부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채근하는 일, 보충하는 일이 더욱 훌륭한 공부이다. 더군다나 짧은 지식에 자웅을 다투는 일은 자신에게 오히려 독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마라. 늘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는 "배우는"데 있다. 배우는 자세가 바로 공부하는 일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는 사회적 등대로서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지 싸움닭이 되기 위한 것은 아님을 명심하자.


공부에 정진하는 것은 칼을 가는 일과 같다. 날은 세우되, 날이 아닌 곳까지 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칼등은 무뎌야 제대로 된 칼이 되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 늘 반복하고 반성하고 확인하고 점검하며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몇 번씩 곱씹어보아야 한다. 따라서 공부에 정진하는 일은 반복되고, 또한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자기성찰의 과정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이 겸손하면 오히려 그 덕망이나 지식의 깊이가 더욱 빛을 발한다. 니가 나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옳은 일이다. 그러나 공부나 인격을 쌓는 일에 대해서 친절함을 바라기 이전에 자신의 공부나 인격을 철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실 너도 그러면서”라고 남탓하는 것은 잘못된 자신의 상태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나 태도는 너와 주변 사람들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여줄지는 몰라도, 평생 구멍가게 주인 수준이나 노인정 수준의 우주 정도만을 공유할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우주에서는 벗어나고 싶다. 특히 지금 우리 나이 정도되면 사물이든 사람이든 조심할 수 밖에 없고 처신에도 신중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서로 좋은 것은 배우되, 좋지 않은 것은 배우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말고, 때로는 가혹하게 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용서받을 일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또한 용서를 구걸하지 않게 된다. 결국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결코 용서치 말고 가혹하게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그렇게 훈련된 사람들은 연장자나 오만한 지식을 폼내는 사람들을 무식하게 공격하지 않는다. 부끄럽게 만들 뿐이다. 나는 이것이 더 효과적인 공격이자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쉽게 흥분하고 쉽게 즐거워하지 마라. 그것 또한 쉽게 중독된다. 습관화된다는 것이다. 나도 이걸 버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걸 안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깊은 우물 속에 물을 퍼내는 일과 다를게 없다. 채우기도 급급한데 퍼내면 결국 그 샘은 마를 수 밖에 없다. 물이 마르면 사람들이 그 샘을 찾게될까. 오히려 있던 사람들이 떠나게 된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아 샘을 찾는다.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인격과 공부가 깊이 있다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최대한 감추고 버려야 한다. 저 쪽 우물은 꽉 차있었는데, 여기는 반밖에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물을 먹을 자격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우물과 자신의 우물을 함부러 비교하는 일은 자칫 자신의 우물에 사람들이 침을 뱉도록 방치하는 것과 같다. 타인을 존경하고, 인정하는 것도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공부는 목적적으로 학위를 따거나 합격을 위해서 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평가의 척도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못난 짓을 하면 ‘못배워서 그렇다’고 하거나 ‘배운 놈이 더하다’고 한다. 이 두 가지에서 빗겨가는 일은 쉽지 않다.


날카로움과 번뜩이는 비판정신은 내가 너에게서 배울 것이다. 그러나 남을 힐난하거나 사소한 일에 분노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더 나는 가혹하게 대할 것이다. 그리고 웃자란 보리마냥 오만하면, 꼭꼭 밟아줄 것이다. 그게 제대로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적어도 3년 동안은 열심히 밟히면서 배우는 자세만 익히는데도 이 정도로 시간이 걸렸고, 또한 이 정도 수준밖에 안되고 있다. 그런 형의 모습을, 선배의 모습을 보고 니가 니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 지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다. 좀 더 변증적인 관계를 위해서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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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

내일부터 다시 노동자계급으로 진입한다.

 

한동안 놀아보니 좋았다.

 

제대로 놀면 미래가 걱정없다.

 

그러나 다시 일터로 돌아가게 되니

 

분명히 각오는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여하간....

 

찢어진 깃발이라도

 

설령 깃발을 탈취당했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깃대"라도 남아있다면

 

내 살을 이어붙여서라도

 

깃발 아래 모이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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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

“요즘 나는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네. 늘 초과근무에 시달리고 있지. 동료 과학자들은 내 이론에 흠집을 내려하거나 나보다 먼저 연구를 완성시키기 위해 경쟁하는 등 밉살스럽게 행 동한다네.”

 

1915년 아인슈타인이 친지에 보낸 편지 중에서.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1300103273207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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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와 K의 대화

세상은 전쟁터인가.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세렝게티라고 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의 개념으로 세상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은 두 개로 쪼개져 있다. 관점에 따라서 두 개로 쪼개는 기준은 다양한다. 지리적으로 남반구와 북반구로 나눌 수도 있고, 경제적 관점에서 부자와 빈자로 나눌 수도 있다. 물론 성적인 기준에 따라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 있고, 물리학적 관점에서 작용과 반작용처럼 때리는 자와 맞는 자가 있다.

 

이런 이분법적인 관점이 양면에 맞닿아 있는 공간에 대한 설명을 무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본질을 설명하기에는 이분법이 가장 쉽고, 편리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분법은 양면에 닿아 있는 각각의 입장을 대립적으로 설명하는데 적합하다. 따라서 양면 사이에 끼어있는 공간의 문제는 다른 관점과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가령 적도 근처에 사는 사람을, 중산층이라는 계층집단을, 자웅동체와 같이 암수의 모든 성기를 가진 자를, 서로 맞아터지는 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분법이 적당하지 않다.

 

여하간 세상이 전쟁터, 아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삶이 전쟁터'라는 말. 한 편에는 전쟁터 너머에는 평화로운 곳도 있을 것이다.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싸우고, 버텨내면서 살기위해서 혹은 죽지않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다. 삶이 전쟁터라고 말하는 사람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한 전쟁을 즐기고 게임으로 생각하는 부류가 있는 반면 삶의 참혹한 현장에서 오직 몸뚱아리 하나를 무기와 방패로 삼아 처철한 강호에서 연명하는 부류도 있다.

 

P가 말한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장기의 말처럼 조정하는 자에게 반역하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장기의 말이 장기판을 떠날 때 비로소 반역이,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는 것이라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런 장기판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결과적으로 장기말들은 장기판에서는 어떠한 자유도, 심지어는 어떠한 가치도 용납되거나 인정될 수 없다. 장기말들 서로가 아무리 착해도, 부지런해도, 고운 빛깔을 드러내도 장기판의 조정자에게는 그런 가치는 사실 의미가 없다. 본질은 승리하는데 있다. 승리한다는 것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다시 P가 말한다.

 

" 그러한 게임에 동참하겠다는 의사와 무관하게 대부분이 그러한 장기판에 올라서는 순간 더 이상의 자신은 없어요. 다만 장기말의 등짝에 새겨진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역할과 진로를 결정할 뿐이다. 가라고 하면 가고, 빠지라고 하면 빠져야 하지 않은가. 죽여야 하면 죽여야 하고, 죽어야 하면 죽어야 하오. 최종적인 승리자가 절대 장기말이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장기판을 내려올 수 없는 운명때문이오."

 

운명이라는 말은 결국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일 게다. 무엇보다 전쟁터가 되어버린 삶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결정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기말의 걱정은 승리하는데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장기판의 조정자가 선한 의지로 장기판을 접고 장기말들의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K는 한참을 생각한다. 그리고 전쟁터가 된 상황과 이유에 집중하게 된다.

 

"전쟁은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거요. 그것이 설사 자신이 된다고 해도 말이오. 자신이 또 다른 자신을 대면하면서 서로다른 이유와 결론에 도달할 때  그것이 서로 부딪히면서 마찰음을 내게 마련이오. 그러나 상대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소?"

 

P는 그러한 K의 문제제기에 대해 집게 손가락으로 턱밑을 받치고 있다가 허공에 두 개의 원을 그렸다. 그리고는 K에게 이렇게 말했다.

 

"허공에 두 개의 원. 이게 보입니까?"

 

K가 물끄러미 P를 바라본다. 그리고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까딱까딱이며 설명을 재촉하는 시늉을 한다.

 

"상대가 없어도 전쟁은 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소. 그게 본질은 아니란 말이오. 허공의 두 개의 원. 내가 그린 두 개의 원이 같은 크기가 될 수 없소. 게다가 그 안에는 무엇도 담을 수도 없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소."

 

K가 말을 이어받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의 이야기는 허공에 원을 그린 후에는 그 허공에 그려진 원은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다는 말이군요."

 

P가 말을 이어었다.

 

"그렇소. 그린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소. 그 의도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내가 그린 두 개의 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아무 곳에도 쓸 수가 없소. 당신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있소. 따라서 상대방이 없다고 해서 의도가 없는 것이 아니오. 의도가 있는 한 상대방은 계속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소. 의도를 제거하지 않는 한은 결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게임에 속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 속세를 완전히 등진다고 하더라도 게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한 사람의 수도 많지 않을 뿐더러 많은 인내와 훈련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가족까지 줄줄이 엉켜있는 상태에서 자기 하나 편하자고 모든 것을 내팽개피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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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천사가 있기는 있는갑다.

 

요즘 술에 절어 집에 들어오면 들어올 때까지 아무 생각이 안난다.

그런데 집에는 들어와서 말끔하게 옷을 벗고 단정한 자세로 자고 있다.

천사가 나를 집에까지 데려다 준 것일까.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끔씩 술을 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집에 들어와서 자고 난 다음날 보면

천사가 해준 여러 흔적들이 남아있다.

 

라면을 끓여주었다던가, 삼각김밥 따위를 사준 흔적들 말이다.

전혀 기억은 없는데 말이다.

 

이즈음에서 천사가 있다는 확신이 강해진다.

 

가끔식 생각이 안난다는 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굳이 생각해도 별반 지금 상황에 도움이 안될 수 있다. 그냥 매사에 진실하고,

조심스럽게 술자리에 임하면 기억할 문제는 별로 없을 것 같다.

 

생각나는 이야기.

 

한대수의 이야기로 알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자신의 부인을 보고 "내 마누라는 천사야"라고 자랑을 하니깐

그 말을 들은 그 남자의 친구가 몹시 부러워하면서 표정이 침울해졌다.

 

"왜 자네는 침울하게 있어?"

  

그 남자의 친구가 하는 말.

 

"내 마누라는 아직 살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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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과 분배...

- 선승이 백명있어도 결국 그 절에는 돈이 있어야 살림이 되는 법임.

- 결국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날 수 없고, 보시를 바라는 것도 연대의 형태에서 금전적인 분배를 사적으로 행하는 것에 불과

- 높은 경지의 깨달음이 결국 분배의 형태를 새롭게 하지도 않으며 분배의 중요성만 설파.

- 결국 작은 소유에 머무르게 함.

- 이미 작은 소유에 불과한 이들에게 또다른 평등은 없으며 이미 잉여가 있는 가정이나 사람은 이러한 무소유의 법칙에 더욱 매력을 느낄 수 있음.

- 왜냐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도 최소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 깨달음은 그 자체가 아니라 실천에 의미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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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

다른 쪽지에 갈무리한 글을 옮기고 있다. 귀찮지만 짧은 시간에 우연히, 혹은 필요해서 잘라둔 글들이라 나중에 찾기에 귀찮을 듯하다.

 

그래서 모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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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인 전태일

할 말이 없다. 어떻게 수정을 요구하지?

 

http://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C0%FC%C5%C2%C0%CF&sm=tab_h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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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선거

매일노동뉴스에 양경규, 이석행, 조희주씨가 나왔다.

 

기사만 놓고 보면 이석행씨의 생각이 가장 옳다고 본다.

민주노총의 현재 상태와 위기를 가장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파를 놓고 보는 것은 이제 나에게 의미가 없다.

 

9. 11 야합이라고 주장하는 양경규와 조희주의 생각에서 빠진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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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팔린 일들

그저 쪽팔린 일이 아니라

 

가끔씩 연상케 될 일이 있으면 혼자서 더욱 쪽팔려 한다.

 

그럴 때 혼자인데도 딴청을 피우거나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직 과거를 탈출하지 못한 것일까.

 

이론에 약해서 인가.

 

올드보이 "오대수"의 가상훈련이 효과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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