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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9/06
    그녀와 대화중
    공돌
  2. 2007/08/29
    문국현
    공돌
  3. 2007/07/23
    비정규
    공돌
  4. 2007/07/02
    장미꽃밭
    공돌
  5. 2007/06/20
    자살
    공돌
  6. 2007/06/12
    알량함
    공돌
  7. 2007/04/24
    The Pursuit of Happyness
    공돌
  8. 2007/04/13
    노조혐오증 그리고 자기만족
    공돌
  9. 2007/04/12
    운동선수
    공돌
  10. 2007/04/12
    활동가
    공돌

그녀와 대화중

시간 개념으로 사랑의 깊이를 이해하는 태도는 몰지각할 뿐더러 유치하기 짝이 없다.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배려, 관심, 사랑하는 훈련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100일, 1000일이 지났네하면서 사랑의 깊이를 시간단위를 끊어내는 태도, 바람직하지 않다.

 

'당신과 나는 얼마나 이해하는가', '우린 언제 행복한가'라는 질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시간은 누구에게든 흘러가는 것이고, 결혼까지 해버리면 시간을 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하루하루 버텨내는 시간이 우리를, 혹은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 내에 가장 확신에 찬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사랑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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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현

http://blog.jinbo.net/jium/?pid=595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어느 블로그에서 고수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했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1. 먼저 못박아 둘 것이 있다. 나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이 신앙 차원이 아닌 그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방향을 지탱하고자 하는 정책이 제대로 된 것일 때 더욱 강력한 지지를 하게 되고, 그것이 설사 당장에 실현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인 지지를 계속할 예정이다. 물론 그러한 입장에서 난 당원이 아님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지만, 당원이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수 있다.

 

2. 문국현, 좌파들의 비판이 매섭다. 물론 문국현의 사회적 약자 옹호와 친노동적 발언들이 쏟아내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효과들이 좌파에게는 상당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또한 여권에서 마뜩지 않은, 난립한 대선후보간의 경쟁 속에서 문국현이 신선한 인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좌파들은 당연히 문국현은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자유주의자로 몰아세울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도 사실 경계심의 다른 형태일 뿐 설득력은 없다고 본다.

 

3. 문국현이 가지고 있는 선량한 사용자의 이미지와 그의 행보, 그리고 삶의 태도에서 묻어나는 서민적 혹은 친서민적 발언과 행태가 가지고 있는 잠재된 힘은 상당히 크다고 평가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도 판단할 수 있다. 결국 깨봐야 하는 것이고, 언론이 어떤 식으로 조명을 하느냐, 그가 어떤 식의 이슈파이팅을 할 것인가에 따라 상황은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문국현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이다.

 

4. 민주노동당의 경제정책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실현가능한 대안인가라는 근본적 질문 부터 던져봐야 한다. 아울러 그것이 쉽게 전달되고, 대중으로부터 지지가 가능한 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 내재된 힘이 있는지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경제정책, 탐탁치 않다. 때로는 '선언'을 읽는 것 같은, 혹은 기존 진보적 성향의 자유주의자들과의 어떤 차별지점이 있고, 어떤 실현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지 상당한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이러한 상황이라면, 민주노동당의 언저리에 걸쳐 있는 민주노동당 어중간한 지지자들은 문국현으로 옮아갈 가능성이 있고, 또한 현재 민주신당의 어중간한 지지자들과 함께 문국현 지지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따라서 처음 장벽인 지지율 5%대를 돌파하게 될 때에는 민주노동당과 민주신당의 지지자들로 하여금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으며, 대선판세를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

 

5. 설사 당선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문국현으로 옮아가는 지지율을 차단하거나 방어해내는 시점이 오면 문국현은 앉아서 올라가는 지지율만 계산하면 된다. 결국 민주노동당과 문국현, 민주신당과 문국현 이라는 이원방정식에서 당선가능성이 미진해도 문국현의 인지도는 상승하게 된다는 말씀.

 

6. 다시 민주노동당으로. 민주노동당이 가지는 몇 가지 대선전략상의 문제. 알만큼은 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권영길' 캠프로 돌아갈 가능성이 큰 현실에서(물론 누가 그를 밀었느냐는 이제 별 의미도 없다.), 그가 기존의 대선정국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어떤 이슈파이팅을 할 것인가,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가 가장 큰 난제이다. 더군다나 알만큼 권영길을 알고 있으며, '살림살이'는 별반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보여줄 정치적 '쇼'가 제대로 먹혀들지도 의문이다.  

 

7. 민주노동당. 선전 좀 하자. 현재 시점에서는 차별화를 위한 차별화가 아닌, 아젠다를 만들고 공격적으로 대중들에게 다가설 전략이 필요하다. 선명성, 별 필요없다. 이미 재산 별로 없는 거 알고 있고, 있다고 하더라도 많지 않다는 거 안다(물론 민주노동당의 3후보 중 노출된 만큼 공격할 꺼리도 많은 것이 권영길이다.).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대중선전, 미디어 전략, 그리고 그 전략의 프레임 속에서 어떤 내용을 담아 쉽게 전달할 것인지가 문제다.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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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

홈에버 문제는 결국 정치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고,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혹은 집단)의 몫으로 넘어갔다. 부산지하철 매표용역 문제가 그랬고, KTX 여승무원 문제가 그랬다.

 

물론 노동과 자본의 대치국면에서 전선이 형성되고 그러한 문제는 결국 정치적으로 전화된다. 부정할 수 없는 문제다. 이미 벌어진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꼭지점은 그리 자주 오지 않는다.

 

문제는 봉합이냐 명분이냐다. 봉합이 결과적으로 타협의 결과로 비난을 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길고 긴 KTX 싸움을 함께한 그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가고 지금 남은 사람들은 당사자들 뿐이다. 당사자의 의지와 투쟁력으로 그렇게 큰 정치적 문제로 비화된 노동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봉합이라는 타협의 결과가 아무리 쓰라린 자존심의 멍에가 될 진 모르지만 무엇보다 당사자의 고통을 어느 정점에서 타협했어야 했다. 봉합이라는 것은 언젠가 터져버릴 수 있지만,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면서 시한부 선고를 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낫다는 차악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교섭의 과정이 내셔날센터격인 민주노총 차원에서 이뤄지는 상황 속에서 이미 몇 번의 교섭 기회를 놓친 상태라 노사 모두는 교섭상태에 따른 감정의 골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패여있다. 아무리 새로운 안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노조의 요구안이 관철되지 않는 한 교섭의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비정규직법의 폐지가 홈에버를 통해서 시작될 수도 없거나,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희생으로 비정규직 폐지를 논하는 건 극단적으로 말하면 전체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장에 결합해 싸우는 연대조직들을 비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민주노총이 지금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 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대로 두면 단위노조의 조직 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망가지는 일은 보고싶지 않다. 답답하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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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꽃밭

먼저 사물이나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부정적 결과를 낳는 경우에는 그것을 하지말라고 만류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측된 일이라도 다른 가능성 때문에 그 일을 선택하거나 그 사물을 취한다. 결국 부정적 결과를 맞이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잘 굽히지 않는다.

 

장미꽃이 무성한 꽃밭이 멀리서는 아름답고, 그 꽃밭 뒤에 세상을 궁금해한다. 그리고 장미꽃밭으로 들어가면 장시가시의 날카로움에 한 보의 전진도 어렵게 된다. 결국 장미꽃밭의 언저리에서 오가지도 못하면서 적당히 가시를 멀리할 수 있는 공간만 확보한 채, 약간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자, 가시를 밀어내고 밀어내도 그 자리 이상일 수 없다. 그저 장미꽃밭 내일 뿐이다.

 

그렇게 사람들을 옳아매는 자본주의가 장미꽃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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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자살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자살을 찬성하는 친구의 요지는 거두절미하고 "자기결정권"이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선택"하에서 이뤄진 것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한 마디로 개소리다.

 

 

태어난 것도 자신의 선택이 아닌 한 죽음도 스스로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죽음 뿐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전개되거나 강요되고 있다.  그런 것들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진다고 우리의 삶이나 생각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그건 그저 "가정"일 뿐이다. "내가 그것을 할 수만 있다면"같은 이야기란 말이다. 

 

세상에 선택할 것이 그리 많은데도 하필이면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거니와 선택할 것이 없어 오직 죽음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열사의 죽음이라는 것도 사실 열사를 둘러싼, 이타적 죽음을 선택한 자의 가족을 생각할 때, 그 죽음이 한 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 선택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죽음으로 항변하고, 죽음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외눈박이 집단인 사회도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기형적 사회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개인의 죽음으로가  아니라 집단적 저항으로 가능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에 대해 개인이 초개같이 산화하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수만개 실핏줄로 엮어 낳은, 자신과도 다를 바 없는 저 자식을 갖다버리는 일도 선택가능한 문제가 될 수 있는지의 논쟁도 "선택"과 "자기결정권"으로 설명은 가능하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면 뭐하는가. 나는 이런 자체가 상상력을 떠나서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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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량함

내 속에 아직도 알량함들이 남아 있더라.

 

자기점검이 아직도 너무나 필요하다.

 

그래서 리영희 선생의 몇 마디 말씀이 귀에 꽂힌다.

 

- 한국의 젊은이들이 점차 보수화되어간다고 합니다. 사회과학서적을 읽는 학생들을 보기 어려운 것은 물론, 대학가의 서점도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오래전부터 한국사회에 제기되어 온 '인문학의 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이들의 보수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것 역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지난날 치열하게 진보와 개혁을 위해서 싸웠던 우리들의 처지에서 보면,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우리가 바라던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그처럼 자유분방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으니까.

인간의 욕구와 창의력을 마음껏 발현하고, 심지어 '버릇이 없다'는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을 우리가 과거 언제 해 봤나요? 시간이 흐르면서 도덕과 관습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젊은이들의 보수화가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가운데에서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는 한국사회의 도덕적 파탄에 대해서는 깊은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검소한 생활, 고귀한 사고(Simple life, high thinking)',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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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ursuit of Happyness

 

행복을 찾아서...

 

윌스미스가 주연인 그 영화..오늘은 너무 우울해서 그 영화를 봤다. 50분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확 꺼버릴까 생각했다. 너무 불행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영화가 예상하는 미국식의 행복의 결말도 싫었다.

 

그러나 그러나 영화가 손짓하는 대로 따라 갔다. 그 영화에서 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내용이고, 하나는 생각하기 싫은 것이다.

 

1. 행복을 찾아서...극중 크리스 가드너(윌스미스)의 린다(마누라, 이름 모름)가 자길 떠나겠다는 마지막 인사를 비오는 날 전화부스에서 듣게 되는 장면. 그리고 제퍼슨이 그려진 동전을 본다. 그가 초안했던 "행복추구권". 그렇다. 행복은 누구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일 뿐.

 

행복은 빼앗아 가기도 하지만, 쉽게 주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행운이라는 것과 달라서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얻게 되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정신이다. 그냥 자신의 삶에 안주하는 것을 자위하면서 살아도 행복이 될 수도는 있지만, 그건 착각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을 최대한 활용할 때, 그 이상의 가치가 주어질 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다.

 

생각이 달라져야, 행복도 온다. 한대수의 책을 읽으며 느꼈다. 음악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이는 뭔가가 부족했기 때문에 음악을 통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레논도 엄마없는 설움이, 한대수도 옆에 아빠가 없었던 기억 때문에....그래서 행복은 느리게 찾아온다. 아주 느리게. 노력하며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2. 진보도 마찬가지다. 서두를 때, 과오를 범하고 서로 싸우게 된다. 정말 말하고 싶지 않다. 김주익 열사 이후, 난 내 부모님의 집인 영도의 한진중공업이라는 회사만 보면 오금이 저린다. 아직도 그의 육성과 그이를 추모하는 음성을 들으면 이성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눈구멍에서 눈물이 흐른다.

얼마전 허세욱씨도 마찬가지다. 난 그의 진보를 믿는다. 원래 진보는 느리고 천천히 가는 것이다. 짜증날 정도로 천천히 가면서 갑자기 뒤로 밀려나기도 한다. 그러나 진보는 앞으로 간다는 믿음으로 간다. 그러나 허세욱씨는 왜 혼자만 빨리가려고 했는지...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 이들을 이제는 막아야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막고 싶다. 신영복은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고 했다. 진보의 씨앗이 살아야 진보가 성장한다. 마지막 남은 씨앗까지 태울 때 남는 것은 재밖에 없다. 타버린 재 속에는 생명이 없다. 그들이 가버리면 나 같은 사람은 부끄러워서, 못견뎌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그래도 마지막에 그가 거친 숨을, 전태일이 거친 숨을, 김주익이 거친 숨을 내 쉬며 마지막 한 숨을 내쉴 때 마지막으로 가진 한 알의 씨앗을 건네고 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나는  그런 건 이제는 싫다. 살아라. 살아라. 한 알씩 살아남는 진보의 씨앗이 아니라 풍성하게 민들레처럼, 억세처럼, 수만개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라.

 

나와 나의 동지들을 위해, 그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뿌린 그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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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혐오증 그리고 자기만족

이력서 따위에 해고경력까지 써넣으라는 이야기는 입사를 포기하고, 장난삼아 입사지원해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회사와 법원은 그 까지도 요구하고 있다.

 

이해가 가지 않으나, 심증으로는 충분히 왜 그런지 추적할 수 있을 듯하다. 이력서, 그거 별거 없다. 법원은 신뢰관계의 징표로 보지만 사실 그것도 개소리다. 사장이 이력서를 제본해서 형광펜으로 그어가는 이력서의 고고학자가 아닌 이상, 이력서는 입사시 제출하면 끝이다. 그러나 이력서를 제 아무리 쪼대로 휘갈겨도 결국 그의 행동이 노조와 관련이 있을 때에야 제 위력을 가진다. 대학졸업을 빼버린, 최종학력을 기재하지 않은 이력서는 '사칭'이라는 이유로 그의 발목을 붙들고, 공장 담너머로 멀리 던져버린다.

 

결국 이력서에서 최종학력을 빼버린 노동자, 소위 위장취업자들을 검색하고 회사 밖으로 쫓아내는 일이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회사와 법원의 이러한 의식 근간에는 노조혐오증이라는 똬리가 봄 철 뱀새끼들이 동면에서 깨어낼 때 처럼 뒤엉켜있다.

 

아직도 회사와 법원은 "노조혐오증"이라는 반공주의의 적자를 안고 젖을 먹이고 있다.

 

그러나 한편, 학생운동 물 좀 드셨다는 분들이 '노동해방'이니 하면서 공장에 들어가려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10년전에는 불가피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현장에는 아직도 의견이 많고, 그 의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 충분하다. 하나의 의견을 보태는 일은 공장 안의 노동이 아니더라도 집에서도, 사무실에서도, 1달에 한 번 이주노동자의 집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학생운동의 열정과 이상만으로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다. 머리 속에는 계몽으로 가득찬 채, 몸만 회사잠바와 노조조끼를 걸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그건 자기만족의 또다른 표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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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202430.html

 

그들이 금빛 메달을 손에 쥐었다는 사실로 남들보다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노점상을 한다는 자체도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한겨레의 기사를 보면서 무엇보다 착찹한 것은,  운동을 업으로 삼아온 이들의 미래가 보장되지 못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들이 늘 '사기'와 '강박'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메달 한 번 걸어본 사람 치고 무난하게 사는 사람 몇이나 있을까. 마누라 도망가고, 돈 떼이고, 여기저기 돈 빌려 갚지 못하다 다시 늙은 몸을 이끌고 거리의 링으로, 삶의 격투장으로 전전하는 이들을 생각해봐야 되지 않겠는가.

 

열광할 때는 언제이고, 길바닥에 주저앉으면 혀를 차대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 덕분에 뭔가 열광했다면, 그들이 제대로 살 수 있는 제도를 보장할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마린 보이'도 평생 물 속에서 명예만 찾을 수 없고, '봉달이'도 아스팔트 바닥에만 몸을 올려둘 수는 없을 것이다. 국민과 국가가 열광했다면 그 댓가를 치루는 것이 옳다. 노동자도 산업의 역군이니 뭐니 하지만, 제도적 보장없이는 이 현실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웠다는 점, 운동선수도 자신의 노동력으로 열광이라는 산물을 생산해냈다는 것. 기억하자.

 

아래 글은 예전에 잡지사에 넘기려다 그만 둔 글인데, 생각이 나서 갈무리해 둔다.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

먼저 살펴볼 영화.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2005)’.

아마도 류승완 감독의 영화 중에 유일하게 ‘발차기’가 없는 영화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 물론 권투는 하지만 권투영화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권투경기 장면이 썩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최민식의 몸이 무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올드보이’에서 만두를 15년간 먹어서 그런가.

 

여하간 이 영화는 신인왕전이라는 계기를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삼고 새로운 인생역전을 꿈꾸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태식(최민식)과 상환(류승범). 영화가 끝나도 그들의 인생에는 몇 번의 터닝 포인트가 더 있을지 모른다. 영화 속 134분의 삶은 끝을 맺지만 현실의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영상언어가 현실의 삶에 던져주는 메시지. 이 영화에서는 관객의 아가미를 끝까지 틀어쥐고 호흡을 곤란케 하기도 한다.   

 


강태식

43살 태식이는 북경아시안게임 복싱 은메달리스트다. 허나 도박 좋아해서 돈 다잃고 무허가 부지에 세운 공장마저 불나서 빈털터리 신세가 된 강태식. 결국 길거리에서 자영업자로 나선다. 태식의 사업아이템.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만원에 ‘남자는 1분, 여자는 2분’ 동안 인간샌드백 되기. 자기 실력 믿고서 하는 건 말릴 수 없다. 그러나 말려야 한다. 실연당한 ‘최홍만’같은 이가 태식에게 만원을 건네는 순간 사업은 자동적으로 접히게 마련이다. 물론 인생도 자연스레 접힐 수 있다. 더군다나 남의 집 가게 앞에서 그런 장사하면 누가 좋아하겠나. 자, 여기서부터 영화 속의 인물을 현실로 끄집어 내보자. 나의 친구라고 생각하고 영화 속의 인물을 만나보자.

 

태식은 일단 빚으로 인해 압류를 당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빚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정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파산신청’을 할 수도 있다. 돈 안드는 법률구조공단에 가서 일단 상담을 좀 받을 필요가 있다. 특히 도박빚. 요거요거 문제다. 그러나 걱정말라. 도박빚이야 민법 제746조에 의해 ‘불법원인급여’로 인정될 수 있기 때문에 잃은 돈을 받을 수는 없지만 진 빚을 갚을 필요도 없다.

 

다음으로 태식이 고용보험에 가입을 했더라면 실업급여라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보아하니 실업급여는 물건너 간 것 같다.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퇴직전 18개월 중에 180일 이상 고용보험에 가입했어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실업급여는 물건너 간 것 같고.

 

일반적으로 운동선수들이 세계대회 등을 출전해서 메달을 목에 걸게 되면 대회의 규모와 메달색깔에 따라서 연금액이 달라진다. 휴, 태식이는 지질이도 복이 없다. 올림픽 동메달이면 20점으로 간주해서 한 달에 약 30만 정도의 연금이 지급된다. 근데 아시안 게임의 경우 동메달이면 1점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연금혜택 없다.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만 20개는 따야 겨우 한 달에 30만원 받는다. 인생,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이냐.

 

태식은 직장을 구해야 한다. 물론 신인왕전 끝나고 좀 쉬어야 된다. 쥐어 터진 얼굴하고 일터로 나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선 실업자 태식은 가까운 ‘고용지원센터’에 가서 상담을 받고 직업훈련을 받아야 하겠다. 기술이 있어야 뭐든 먹고 산다. 주변의 친구들은 태식과 같은 친구를 돕기 위해 소주 한 잔 사주는 것보다 고용지원센터에 데려가는 편이 낫다. 몸뚱아리 하나 잘 보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려주자. 매맞고 돈버는 것, 태식이를 인권의 사각지대에 몰아넣는 것임을 명심하자.

 


유상환

소년원 화장실에서 우유와 빵을 허겁지겁 입 속에다 쑤셔넣으며 아버지(기주봉)의 편지를 든 장면. “애비 군대있을 때 생각나서 단 것 좀 보낸다”는 편지의 한 구절. 그리고 눈치보며 빵과 우유를 먹을 것을 예언이라도 한 듯이 ‘소화제’까지 보낸 아비의 사랑. 부모의 사랑이 이런 것일까. 천방지축 날 뛰는 자식를 제대로 교육시키는 것이 우선해야 할 사랑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소년원까지 내몬 부모의 왜곡된 사랑도 가슴을 휘젓는다. 그리고 상환의 아비는 건설현장에서 거푸집널 덩이에 압사당해 목숨을 잃는다.

 

상환이도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신인왕전이 죽은 아비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에게 권투는 하나의 돌파구이자 자기치료의 과정이지 않을까. ‘투사(projection)’의 과정일 것이다. 프로이드(Freud)의 말을 빌려보면 공격성이 강한 사람을 권투를 통해 그 공격성을 합법적으로 완화한다던가, 관음증이 있는 사람에게 누드그림을 그리게 하여 관음증을 다른 욕구로 승화시키는 등을 ‘투사’라고 한다. 상환이의 신인왕전 등장에 대해 한 스포츠 신문에서도 ‘링 위에서 쓴 참회록’이라는 헤드라인은 굵게 뽑아낸 이유도 이런 의미가 아닌가 싶다.

 

게다가 쓰러지셔서 수술비까지 마련해야하는 할머니를 생각한다면 우선 아버지의 산재처리를 고려해야 한다. 말은 선뜻 꺼내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감방에 있는 몸이라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행형법 제44조에 의해 직계존속이 사망한 경우에는 외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참, 이 영화에서는 상환은 19세이므로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다. 그래도 외출이 가능하다. 소년원법 제19조에서도 직계존속이 위독하거나 사망한 경우에는 외출이 허락된다. 다만 외출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빠르게 사건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구비서류는 유족보상청구서, 사망진단서 또는 사체검안서, 사체부검소견서(사인 미상인 경우), 주민등록등본 1통, 호적등본 1통 등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또 시간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상환의 아버지는 산재사망이 명확하므로 공인노무사의 도움을 얻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 한국공인노무사회 홈페이지(www.kcplaa.or.kr)에는 당직노무사가 정해져 있으니 상담을 받아서 일을 처리하자. 그리고 상환아, 이번 신인왕전이 끝나고 출소하면 제발 사고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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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

이미 내 친구는 담배와 술을 끊었다.

 

이 모든 건 결혼 덕분인 것 같다. 김규항의 글에서 읽었던 구절.

활동가라는 제목의 글,

 

"활동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업"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5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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