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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의 일본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37건

  1. 2009/03/22 끝의 시작 (1)
  2. 2009/03/19 平成21年3月19日 赤口 (1)
  3. 2009/03/18 느리게 걸어 출근한 아침에 드는 생각 (4)
  4. 2009/03/17 [스크랩] 한섬 이야기
  5. 2009/03/14 화이트데이, 토요일, 오후 3시 반 (3)
  6. 2009/03/12 [스크랩] 이들 청춘에 얼마든지 머물라
  7. 2009/03/10 배고픈 김에 (2)
  8. 2009/03/06 そろそろしようかな。 (1)
  9. 2009/02/21 [お祝い] 일찍 출근하다 (1)
  10. 2009/02/20 [お祝い] 빵이 말을 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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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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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유채향기를 풀어놓은 욕조에 앉아 팔삭(*)을 먹고

책을 들고 침대에 기댄채로 잠들었다 새벽에 체온이 너무 내려가 눈이 떠졌다

주섬주섬 전기담요를 켜고 온풍기를 켜고 다시 누웠지만 따듯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쿠바에서 온 Lulu는 간호사 함께 나온 남편은 US Navy

3년 뒤엔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어디든 갈 수 있어서 좋다고, 지금은 일본이 좋다고 했다

하라주쿠에서 비를 맞으며 크레페를 먹는 왼손 약지엔 문신으로 새긴 반지

역시 외국인과 얘기하는 건 몇 시간 지나면 피곤해

..라고 생각하며 돌아왔었다



1주일에 한번은 과일을 사먹으려고 하는데

세일할 때 딸기연유를 냉큼 사두었으나 딸기가 영 7000원 아래로 안내려가는 관계로

눈물을 머금고 귤종류만 먹고 있다 (귤만은 돈주고 안사먹으리라 다짐했건만 ㅜㅠ)

귤도 종류가 참 많아서 그중 반값밖에 안하는 놈이 있어 -4개에 3000원- 냉큼 집었으나

껍질을 까보니 팔삭 -_-;

 

비파와 양애와 함께 제주도에서는 집 앞 마당에서도 구할 수 있다는 팔삭

서울보낼 천혜향을 고르던 중 시장에서 한봉지 가득 1000원주고 받아서 처음 먹었었다

껍질이 두껍고 쓴 속껍질도 뻣뻣해서 벗기고 먹어야 한다 

천혜향이며 진지향같은 신품종은 제주도 선생님들도 잘 몰라서

봄마다 선물거리를 찾아 다니는 나를 보며 씁쓸하고 시원한 맛의 팔삭이 최고라고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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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2 23:52 2009/03/22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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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成21年3月19日 赤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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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 당신의 달콤한 사랑을 더럽히는 네슬레와 크래프트푸드 초콜릿

 

트랙백이란 건 알다가도 모르겠다가도..

 

그래도 오늘은 좋은 날

장학금도 (드디어=일본 도착 65일만에) 받고

일본어로 우체국하고도 통화하고 폰뱅킹까지 성공하고 (사실 이건 영어 섞어서 -_-)

올해 발렌타인과 화이트데이를 안 챙긴게 의미있는 일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고 -_-

그리고, 국경없는 의사회 설명회에 드디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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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9 16:56 2009/03/1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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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걸어 출근한 아침에 드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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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내가 외국어에 집착하는 건

소통하고 싶어서

제대로 소통할 줄 몰라서 인 것 같다

 

나의 말로도 소통이 안 되는데 

몇 나라의 말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랴

 

 

*

사람마다 외국어의 의미가 다를 것이다

그에 따라서 외국어를 배우는 법도 다르다

 

출입국관리소에 한 4시간 앉아 각국에서 비자를 받기위해 온 사람들을 보면 금방 알수 있다

사실은 우리 일본어 교실에 와서 2시간만 앉아 있어도 보이지만

편견을 실어 말하면 일본보다 못난 나라와 잘난 나라의 일본어 배우는 법이 다르고

어린아이와 어른의 언어 배우는 법이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에선 직장 앞뒤 시간을 쪼개어 돈을 들여가며 영어를 못 배워 난리지만

학교 한 번 못 가봤다는 안나푸르나 산골짝의 매점 언니도 유창하게 할 수 있는 게 영어다

 

나에게 외국어는 흉내내기였던 것 같다

상대방과의 소통을 통해, 자기 표현을 통해 외국어를 익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영어도 불어도 책보고 생각하는 걸 흉내내고 영화보고 말하는 걸 흉내내는 거였다

그래서 과외하고 학원다닌 친구들처럼 외국인을 만날 기회가 없어 대화가 될까 궁금하다가도

막상 외국에 나와 보면 생각보다 대화는 문제없고, 근데 생각보다 이게 불편한거다

첨에 몇 마디 하고 맘이 맞아 술 한잔 하면 신이 나지만 곧 줄곧 외국어로 떠드는데 지치고

집에가서 보던 책이나 마저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고나면 외국어로 거절을 해야 하는 훨씬 불편한 상황이 되고 만다)

 

소통하기 위해서 배우려던 거 아니었나?

 

 

*

의국에서 다들 한일전 보고있다

오후 2시반인데 말이지

우리나라 병원은 왜그렇게 바쁜걸까

 

분위기 험악해지기 전에 도망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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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10:02 2009/03/1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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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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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남자 못 찾고 떠난 명기 한섬 [2009.03.13 제751호]
[안대회의 조선의 비주류 인생]
이정보 묘 앞에서 통음한 의리의 예인, 숱한 호걸들 버리고 쓸쓸한 말년
18세기에는 명성이 자자한 기생들이 아주 많다. 제각기 뛰어난 가무와 인물로 명성을 남겼으나 그들 모두가 후대까지 명성을 전하지는 못했다. 특별한 그 무엇이 있는 자만이 운 좋게 존재를 뒤에 남겼다.

<추재기이>에는 그런 기생이 3명 등장하는데 제주도 기생 만덕과 정인을 따라 죽은 기생 금성월, 그리고 한섬(寒蟾)이다. 만덕과 금성월은 이미 소개했다. 한섬 역시 저 두 기생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명성이 있었다. 과연 어떤 행적을 보인 인물일까? 먼저 <추재기이>부터 살펴보자.

 
 
» 진정한 남자 못 찾고 떠난 명기 한섬.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한섬은 전주 기생인데 황교(黃橋) 이판서(李判書)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 가무를 가르쳐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한섬이 나이가 들어 집으로 돌아간 지 한 해 남짓 지나 판서가 세상을 떴다. 한섬이 즉시 말을 달려 판서의 묘에 이르러 한 번 곡하고 술 한 잔 따르고 술 한 잔 마시고 노래 한 곡 불렀다. 다시 두 번째 곡하고 두 번째 잔을 따르고 두 번째 잔을 마시고 두 번째 노래를 불렀다. 이렇듯이 하루 종일 돌려가며 한 뒤 자리를 떴다.”

 

아주 간단한 기록이다. 나이가 든 전주 기생 한섬이 자신을 뛰어난 예인으로 길러준 후원자가 죽자 극진한 예를 다해 추모했다는 사연이다. 아무리 큰 은혜를 입었어도 배반하는 자 많은 것이 세상 형편이고 더욱이 사망한 뒤에는 못 들은 척하면 그만일 것을, 한섬은 지극 정성으로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것도 평범한 유교적 예법이 아니라 예인들의 독특한 방법으로 말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낸 것은 망자를 애도한 가기(歌妓)의 독특한 애도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사연만으로 한 시대 명사의 틈에 끼일 수 있을까? 디테일을 생략한 조수삼의 이야기 전개 때문에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 줄거리에 비밀이 있다.

 

 소실로 데려가 대가 없이 인정 베풀어

 

<시필>(試筆)이란 책에 실린 비슷한 사연을 보면 왜 그런지 다소 의문이 풀린다. 그 전문을 보자.

“전주 기생 한섬은 침선비(針線婢)로 뽑혀 서울에서 노닐었다. 뒷날 용모도 추레해지고 의지할 데가 없어지자 이정보 판서께서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살게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관계를 맺지 않고 잘 대우했다가 만년에 재물을 많이 딸려서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이 판서가 죽은 뒤 소식을 들은 기생이 술을 싣고 판서의 무덤을 찾아갔다. 무덤에 이르러 술을 따라 무덤에 뿌리고 다시 큰 술잔에 술을 따라 스스로 마시고는 ‘대감께서 평생 술을 즐기시고 노래를 즐기셨지요!’라고 말한 뒤 마침내 노래를 길게 뽑았다. 노래를 마치고 통곡하고 곡을 마치고서 다시 술을 따라 무덤에 뿌렸다. 술이 다 떨어지자 애통해하다 기절하여 묘 앞에 거꾸러졌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바로 떠나갔다.”

한섬의 동일한 사연을 다룬 기록으로 전하는 이에 따라 디테일이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조수삼의 건조한 기록보다는 인과관계가 훨씬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이 사연이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이유를 수긍케 한다. 여기서는 나이가 든 한섬을 소실로 데려다가 대가 없이 인정을 베푼 측면과 한섬이 애통해하다가 기절하는 장면까지 등장하여 훨씬 더 감성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어쨌든 서로 다른 두 종의 기록에 등장할 만큼 이 사연은 유명세를 탄 이야기였다. 하지만 단순히 이 에피소드가 특이해서 이렇게 기록에 전해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만큼 화제의 당사자인 한섬이 나라 안에 명성이 자자한 대중적 인기인이었고, 그 상대역인 이 판서 역시 매우 유명했기에 그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조차도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한섬을 키웠다는 황교 이판서는 대체 누구일까? 그는 영조 때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이정보(李鼎輔·1693~1766)다. 서울 종묘 동쪽에 있는 황교 다리 부근에 살았기에 조수삼은 그를 ‘황교 이판서’라고 불렀다. 이정구(李廷龜)·이명한(李明漢) 집안의 후손으로 대표적인 경화세족(京華世族) 출신이다. 특히 음악에 뛰어난 실력이 있어서 스스로 곡을 만들어 지금도 시조집에 그가 지은 시조가 80수 가까이 전한다. 그런 실력으로 고관을 지내는 중에도 가객과 가기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시조를 유행시킨 당사자로 유명한 이세춘(李世春)과 거문고의 김철석(金哲石), 그리고 추월(秋月)·계섬(桂蟾)·매월(梅月) 등의 가기가 그 문하에 출인한 당대 최고의 음악인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청구야담>에 ‘기생 추월이 늘그막에 옛일을 말하다’와 이옥(李鈺)의 ‘가객 송귀뚜라미 전기’에 문학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이정보는 곧 당대 최고 음악가들이 모여드는 살롱의 주도자였고, 한섬은 그에 의해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기로 양성된 셈이다. 한섬은 그런 이정보에게 끝까지 제자로서 신의와 도리를 다했기에 여성의 의리와 예인의 의리를 한꺼번에 보여준 ‘기특한’ 존재였다.

 

전주 출신 기생 한섬의 사연은 두 종의 기록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 말한 <청구야담>에 이정보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하나로 나오는 계섬(桂蟾)이 바로 한섬(寒蟾)과 동일인이라고 추정된다. 계섬을 심로숭(沈魯崇)은 계섬(桂纖)으로 썼다. 그런 추정의 이유는 이정보가 키운 대표적 제자로서 그 행적과 이름이 매우 유사한 데 있다. 그에 관한 사연이 기록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이름과 행적이 기록자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있으나 큰 줄거리는 비슷하다.

 

 심로숭이 전한 ‘계섬’과 동일인물 추정

  

대표적인 기록이 심로숭이 쓴 <계섬전>(桂纖傳)이다. 그는 늙은 계섬을 직접 만나 사연을 듣고 상세하게 전기를 썼다. 여기에도 앞서 한섬의 존재를 부각시킨 처신이 다시 등장한다. 이정보가 죽자 계섬은 아버지를 잃은 듯 날마다 곡을 했다. 마침 나라 잔치를 준비하느라 날마다 관아에 모여 연습해야 했지만 그는 아침저녁으로 상가에 가서 상식을 올렸다. 담당자가 곡하다 목이 쉴까 염려했기에 계섬은 곡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드디어 장례를 마쳤을 때 계섬은 이렇게 행동했다.

“공의 장례가 끝난 뒤 계섬은 제수와 술을 장만해서 공의 묘로 달려갔다. 한 잔 올리고 한 번 노래하고 한 번 곡하기를 하루 종일하고 돌아갔다. 그런 사연을 들은 공의 자제들이 묘지기를 책망하자 계섬은 몹시 한스럽게 여기고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량들과 노닐다가 술이 거나해져 노래를 하고 나면 왕왕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다소 차이가 나지만 줄거리는 비슷하다. 이정보의 묘는 지금 경기 이천시 율면 신추리에 잘 보전되고 있다. 계섬과 한섬이 혼동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동일한 행위를 다른 제자가 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심로숭은 이 계섬의 인생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계섬은 전주 출신이 아니라 황해도 송화(松禾)의 노비 출신이다. 심로숭이 글을 쓴 1797년에 나이가 62살이라고 했으므로 1736생이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해 한양 귀족들의 잔치 자리와 한량패의 술판에 계섬이 없으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참판 원의손(元義孫)이 그 명성을 흠모하여 계섬을 데리고 10년을 살았으나 말 한마디 어긋나자 바로 그 곁을 떠나버렸다. 그 이후 당대의 이름난 가객이 모여든 이정보 문하에 들어가 노래를 익혔다. 이정보는 계섬을 가장 아꼈는데 사적 호감에서가 아니라 재능을 아꼈기 때문이다. 악보에 맞춰 몇 년을 배운 뒤로 계섬은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이 그로부터 노래를 배울 정도였다.

1766년 이정보가 죽었을 때 계섬의 나이 31살이었다. 기생의 나이로는 늙었다고 할 때이다. 다른 기록에 ‘계섬이 나이가 들었다’고 할 법하다. 그 뒤로 한양의 큰 부자 상인 한상찬(韓尙贊)과 살았으나 그도 마음에 차지 않아 버리고 떠났다. 40살 무렵 불도에 귀의하여 정선군 산중에 전답과 집을 마련하여 떠났다. 산에 들어간 뒤로는 짧은 베치마를 걷어붙이고 광주리를 끼고 나물과 버섯을 따러 산이며 강을 오갔다. 그런 생활을 하며 밤낮으로 불경을 외우며 살았다.

 

 “홍국영은 귀신도 모르게 죽을 것”

 

 그 뒤에 다시 세상에 나왔다가 당대의 풍류남아 심용(沈鏞·1711∼88)과 어울렸다. 경기 파주군 시곡촌(柴谷村)에 있는 심용의 시골집 뒤에 거처를 정해 살았다. 거처가 심로숭이 사는 미륵산과 5리밖에 떨어지지 않아 어울려 지냈다. 산중에 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삼고, 바위를 깎아 섬돌을 만들었다. 대여섯 칸 되는 초가에 둥근 창을 냈고, 병풍·서안·술동이·그릇 등이 가지런히 놓여 화사하면서도 깔끔했다. 집 앞에 작은 밭을 가꿔 채소를 심었고, 논 몇 마지기를 소작을 맡겨 먹고살았다. 날마다 불경을 송독하며 보살로 살아갔다. 그런 노년 생활을 심로숭은 제법 상세하게 그렸다.

한편, 정선으로 은퇴했던 계섬이 잠깐 다시 세상으로 나온 일도 언급했다. 정조가 등극하고 난 뒤 홍국영(洪國榮·1748~81)이 권력을 잡았다가 지나치게 극성하자 정조가 물러가게 했다. 그때 정조는 그에게 많은 노비를 하사했는데 계섬도 그중에 끼어 있었다. 홍국영이 부르자 할 수 없이 산중에서 나온 계섬은 고관들의 잔치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곧이어 홍국영이 완전히 실각하자 계섬은 기생명부에서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명성을 유지한 계섬의 행적이 약간 보인다.

하지만 심로숭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으나 계섬과 홍국영 사이에는 제법 복잡한 인연이 있다. 친아들이 일찍 죽은 이정보는 이건원(李建源)을 양자로 들였고, 이 무렵 그 친동생 이관원(李觀源)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1777년 홍계희(洪啓禧)의 손자 홍상범(洪相範)이 강용휘(姜龍輝) 등을 사주하여 막 등극한 정조를 시해하려고 궁궐 담을 넘은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이관원의 장인 홍계능(洪啓能)이 그 주모자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관원도 연루되어 처형되어야 했으나 “아비가 왕가의 신하였으니 살려두어 후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애걸하여 겨우 살아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홍국영은 이정보와도 가까운 인척 관계가 있어 어릴 적부터 그 집을 왕래했다. 홍국영에게 계섬이 노비로 하사되었다는 기록이 올바른 정보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면 이러한 사유 때문이리라.

<계서야담>에 이 사건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이정보의 첩은 전주 기생으로서 홍국영이 어렸을 때 이 기생이 머리를 빗기고 세수를 시켜주었다. 이관원 집안이 풍비박산되었을 때 그의 집에 머물던 기생이 홍국영을 찾아가 이관원을 살려달라고 빌려 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아침을 기다려 입궐하는 수레를 막고서 “우리 대감 집안을 왜 멸망시키느냐?”고 하소연했으나 그대로 쫓겨났다. 기생은 통곡하며 “하늘이 아시리라. 홍국영은 귀신도 모르게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관원이라면 앞서 무덤에서 통곡하는 계섬을 쫓아낸 자제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그를 도우려 한 의기를 보인 전주 기생이라면 아무래도 한섬 또는 계섬일 것이다. 심로숭의 기록과 <계서야담>이 서로 차이가 나지만 홍국영과 계섬의 이야기라는 점을 놓고 보면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계섬은 이정보 집안과 밀접하게 이어진다. 이렇게 사후에도 계섬은 이정보 집안과 사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모두 계섬의 의리와 관련된다.

 

 이상적인 남성상은 이정보였을까?

  

언젠가 계섬은 심로숭에게 지나온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이 있다. 소싯적부터 명성이 나서 당대의 영웅호걸을 수없이 만났다. 그들은 호화스런 저택과 휘황찬란한 비단으로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고 화려한 생활이 이어질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속은 채워지지 않았다. 세상이 우러러보는 영웅호걸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채워줄 진정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계섬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언젠가 이정보가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세상에는 너만 한 남자가 없으므로 너는 끝내 그런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노년의 삶을 보면 계섬은 진정한 지기를 만나지 못한 회한을 쓸쓸히 지니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의 전기를 내가 써주었으니 내가 당신의 진정한 남자가 아니냐”고 심로숭은 농담을 던졌다.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인에게 진정한 지기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일 듯하다. 그 쓸쓸한 바람을 계섬은 분명 알았을 것만 같다. 그런 진정한 남자까지는 아니라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키워준 이정보를 그런 남자에 가깝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한 시대의 이름난 가기 계섬은 오로지 한 수의 시조를 남겼다. 그의 본색과 직접 연결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쓸쓸한 마음자리는 보여주는 듯하다. 그 시조는 이렇다.

 

 

청춘은 언제 가며 백발은 언제 온고

오고 가는 길을 알았다면 막을 것을

알고도 못 막는 길이니 그를 슬퍼하노라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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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대학에 막 입학했을 때 과방에서 몰려가곤 했던 전통주점의 벽화를 보면서 부터였을 거다

현실이 나를 옭아매어 오도가도 못한다고 느낄때 마다 난 지금이 조선시대라면 어떨까 상상하곤 했다

필경 나는 중인이나 시골 양반의 규방규수로 자라 바느질이며 살림을 공부삼았을 거다

지금 나를 초조하게 하는 일들은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이번 제사상은 잘 차릴까, 시부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결국 족보에 아버지의 성 한글자 남기고 운좋으면 이황이나 이문열같은 아들낳아 (둘다 웩) 좀 기억될까 말까 하는

그런 삶인 거다

그 시대에 자기 삶을 온전히 사는 여성은 내가 담장 밖으로도 보기 힘들었던 그녀들, 기생들 뿐이 아닐까

지금 이 시대를 진짜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지금 내가 생각도 상상도 못하는 어느 곳인가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내 눈에 두껍게 씌인 겹겹의 색안경을 벗고 주변을 다시 돌아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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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7 13:53 2009/03/17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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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데이, 토요일, 오후 3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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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院

의국 -_-

 

上野는 미국 가기 전에 마칠 새 실험 계획서 쓰고있고

난 4시간째 탐구생활 보다 유키방 뭉방 문방 번갈아 들락거리는 중

 

飲みすぎちゃった

수바악~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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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4 15:29 2009/03/1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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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들 청춘에 얼마든지 머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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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09.03.13 제751호]

[레드 기획] 스무 살 먹은 기형도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그의 시집을 ‘초침 부러진 여름밤’처럼 암송하는 사람들

 

신윤동욱 기자

3월이면 그리운 남자

 

 

 기형도, 3월의 사나이. 봄날에 와서 봄날에 갔다. 1960년 봄날이 오는 3월에 세상에 와서 1989년 아직 바람이 차가운 3월에 세상을 떠났다. 3월7일 만 서른 살 생일을 엿새 앞둔 날이었고,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이었다. 새벽의 극장, 그의 가방엔 원고뭉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뒤 원고뭉치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으로 세상에 나왔다.

 

 
 
» 기형도, 3월의 사나이.
 
 
 

기형도의 책들도 3월에 세상에 왔다. 1989년 3월에 발간된 시집에 이어 1주기 즈음인 1990년 3월엔 그의 여행기·일기·단상 등을 모은 <기형도 산문집-짧은 여행의 기록>이 나왔고, 10주기인 1999년 3월엔 시인의 시·산문·소설 등을 한데 모은 <기형도 전집>이 발간됐다. 그리고 2009년 3월3일엔 기형도 20주기 추모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가 나왔다. 여기엔 유고시집이 나온 뒤에 등단한 ‘포스트 기형도’ 세대 시인인 심보선, 김행숙, 김경주 등의 대담이 실렸다. 조병준, 김훈 같은 생전에 지인과 가까이 지냈던 이들의 산문도 담겼다. 독자들은 그의 시에서 우울을 읽지만, 지인들은 그를 명랑한 청년으로 기억한다. 여전히 여기서 우리는 저마다의 ‘기형도들’을 발견하고 있다.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 나라의 달”(‘비가 2’)

올해로 지천명. 1960년생인 그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 나이로 쉰 살이 되었다. 어느새 스무 해. 1989년 기형도 시인이 세상을 떠나 “하늘 나라의 달”이 된 지 3월7일로 20년이 되었다. 그가 숨지고 두 달여 지나서 발간된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도 그렇게 스무 살을 먹었다. 그는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비가 2’)이라고 단정했지만, 떠난 사람은 떠나지 않은 시로 여기에 남았다. 그리고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 그대”(‘비가 2’)가 되어 스무 해 동안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비가 2’)을 밝혔다. 아니 밝히고 있다.

 

한 해에 1만부, 베스트에서 내려오지 않아

 

  

기형도 20주기를 맞아도 여전히 ‘기형도 현상’은 그치지 않는다. 20년에 24만 부.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판매된 숫자다. 아직도 한 해에 1만 부 이상이 팔리는 그의 시집은 오늘도 대형서점 시 부문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기형도 시인은 오래전에 숨졌지만, ‘기형도 세대’는 아직도 태어나고 있다. 마흔의 여성에서 스무 살 청년까지, 그들의 가슴에 ‘내 청춘의 영원한 기형도’가 남았다. 그의 “못생긴 입술”(‘그 집 앞’)은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엄마 걱정’)으로 찾아와 눈물을 닦아주었고, 때로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진눈깨비’)를 했던 어깨를 보듬어주었고, 때때로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질투는 나의 힘’)는 손목을 잡아주었다. 그렇게 스무 해 동안에 누군가의 인생 굽이에서 그는 불현듯 위로가 되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미안한 희망’은 벌써 스무 해가 흘렀다. 이주연(41)씨는 1989년 여름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기형도 시인의 ‘정거장에서의 충고’ 한 구절을 듣고 “몸은 소금기둥처럼 굳었고, 머리는 진공처럼 비었다”고 돌이켰다. 다음날 아침에 서둘려 서점에 달려가 <입 속의 검은 잎>을 품 안에 넣었다. 어느새 20대 청춘은 40대 중년이 되었다. 20년을 간직해온 시집에는 회색 연필, 검은 볼펜, 초록 펜으로 그은 밑줄이 겹치고 겹쳐 세월의 더께를 더했다. 10년 전 그는 기형도 시인의 10주기를 맞아 “나만이 알고 있는 내 안의 상처들을 조심스레 두드리고 핥아준다”고 썼다. 또다시 10년, 여전히 그는 “옷 입는 취향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시에 대한 느낌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금도 낡은 표지의 시집을 꺼내볼 때마다 20대 초반의 나이로 돌아간다.

 

 
 
» 기형도 시인의 20주기를 이틀 앞둔 3월5일, 서울 홍익대 앞 이리까페에서 ‘기형도 시를 읽는 밤’ 행사가 열렸다. 음악가이기도 한 성기완 시인은 이날 행사의 사회를 보았고, 기형도의 시 ‘가수는 입을 다무네’에 곡을 붙여 불렀다. 소설가 성석제, 시인 이문재씨 등 고인의 지인들은 고인의 시를 낭독했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그도 지나온 스무 해를 돌아보며 시인처럼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쥐불놀이-겨울 版畵 5’)라고 탄식했다. 그의 추억도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클래식 동아리 연주회에 선 남자친구에게 꽃다발 대신 시인의 시집을 건넸다가 “왜 나한테 이런 시집을 줬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른을 넘어서까지 치렀던 기나긴 사춘기의 홍역도 기형도 시인의 시집을 붙잡고 견뎠다. 그리고 불현듯 갔던 기형도 순례길. 2003년께 한번은 시인이 숨졌던 서울 낙원동 파고다극장에 갔다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주위만 배회했다. 그동안 누군가 붙잡고 시인의 얘기를 나누고 싶어도 주변엔 공감할 사람이 없었다. 20년 동안의 고독을 비로소 올해 풀었다. 지난 3월5일 서울 홍익대 앞 이리까페에서 열린 ‘기형도 시를 읽는 밤’에서 영혼의 동지들을 만났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출판사에 다니는 윤김은주(36)씨도 기형도를 “퇴폐적으로 살고 싶었던 20대에 처음 만났던 시인”으로 기억한다. 그도 혼자만의 방에서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빈집’)를 따라 읽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는 “그렇게 조로하고 싶었던 철부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 불로(不老)할 시인을 동경했다”고 돌이켰다. 물론 연애의 추억도 얽혔다. 서른 살 무렵에 만났던 애인이 유난히 기형도를 좋아해 시를 밤마다 전화로 읽어주거나 메일로 보내줬다. 그는 “‘엄마 걱정’을 적어 보내면서 가족 이야기를 한다든지, 기형도 시인의 일기에 나오는 ‘나에게 파카를 벗어준 머리가 길고 담배를 즐겨 피우던 키 큰 여자’를 인용하며 말을 건네는 식이었다”고 돌이켰다.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시인의 시는 그의 삶에 스며들어 의미가 깊어졌다.

 

우울은 맡기고 ‘출근의 힘’을 얻다

 

 

김효정(32)씨는 23살에 기형도를 만나 이제는 32살이 되었다. 2000년 서점에서 본 시집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암호 같은 ‘기형도’라는 이름이나 표지의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캐리커처를 보는 순간, 손은 이미 시집을 뒤적이고 있었다”고 돌이켰다. 그리고 그는 “인생의 혼돈기였던 23살부터 28살까지 그의 시를 끼고 살았다”고 돌이켰다. 그 무렵에 그는 인디밴드 멤버였다. 게다가 그들은 사이키델릭한 음악을 했다. 어떤 클럽 주인은 “그런 음악은 벽 보고 해! 사람들이 아는 카피곡도 하란 말이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더구나 음악뿐 아니라 말로도 누군가와 통하지 않던 때였다. 그는 최승자 시인의 ‘내 청춘의 영원한’처럼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었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오직 기형도의 시가 굳이 대화하지 않아도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청춘의 열병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에서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만 되새겼지 바로 뒤에 왔던 귀절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를 놓쳤다는 사실을. 그리고 기형도 시집에 먼지가 앉을 무렵에 그의 삶도 정돈돼갔다. 그는 “결국엔 기형도 시인의 ‘변화하지 않는 건 변화뿐’이라는 말이 가슴에 남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32살 최현찬씨도 시간이 갈수록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읽는 눈이 변했다. 2006년 스물아홉의 여름, 그의 회사 책상엔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가을에 1’)가 붙어 있었다. 당시에 그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다. 요즘엔 보편적인 삶을 노래한 구절에 눈길이 간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비가 2’). 그는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라서”라고 말했다.

 

그의 우울은 나의 우울을 대신하는 무엇이었다. 김소영(33)씨는 기형도의 시에서 ‘출근할 힘’을 얻었다. 김씨는 대학 새내기 시절에 기형도를 읽었지만 오히려 졸업할 무렵에 기형도를 재발견했다. 때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 그도 남들처럼 등 떠밀려 취업했다. 대학문을 나서며 이미 청춘은 끝나버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진눈깨비’)를 되뇌고 되뇌었다. 그에게 <입 속의 검은 잎>은 “직장에서 사람들과 섞여 일하고 싸우고 술 마시고 떠들고 집으로 돌아와 마음껏 고독하고 싶어서 읽은 시집”이었다. 시인의 언어는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웠지만 오히려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오래된 書籍’). 이런 환멸과 체념을 담은 구절이 오히려 다음날 출근할 힘을 주었다. 퇴근길에도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진눈깨비’)를 떠올리며 묘한 위로를 받았다. 그는 “누군가 이렇게 살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위안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위안을 받은 시집이 서점에서 눈에 보이면 안쓰러워 한권한권 사모으고 선물했다. 그래서 집에, 회사에, 가방에 한 권씩 세 권의 <입 속의 검은 잎>이 있다.

 

 
 
» 기형도 시인에 관련된 책들은 그의 기일이 있는 3월에 모두 나왔다. 20주기 추모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10주기에 나온 <기형도 전집>(왼쪽부터). 바탕에 깔린 것은 기형도 시인의 육필원고.
 
 
 

‘거리의 상상력’이 닿은 시민기자

 

 

그리고 문득문득 거리에서 기형도를 마주친다. <입 속의 검은 잎> 뒷면의 시작 메모는 시인의 시만큼 애송됐다. 김소영씨도 친구를 만나러 나갔던 종로에서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는 시인의 메모를 떠올렸다. 때로는 내리는 눈을 보며 “지상으로 곤두박질”쳐졌지만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결국엔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눈발과 같은 시인의 운명을 생각했다. 오래된 거리를 걷기를 좋아하는 신영수(28)씨도 곳곳에서 기형도 시인을 만났다. 문학을 좋아하는 법학도란 ‘형용모순’을 달고 살았던 그는 2000년대 중반 두어 해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살았다. 그는 “신림동 골방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시가 큰 위로가 되었다”고 돌이켰다. 이따금 동네 거리를 거닐며 신림중학교를 졸업한 시인의 이력도 떠올렸다. 지금은 기형도 시인이 일했던 <중앙일보> 근처의 회사에 다녀 공간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그는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오후 4시의 희망’)고 시인이 노래한 곳에서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기억할 만한 지나침’)가 쌓인 대기업 종합상사 법무팀에서 일하지만 여전히 기형도를 기억하고 문학을 꿈꾼다.

 

오승주씨는 2008년 촛불집회 거리에서 기형도 시인을 생각했다. 오씨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촛불집회 기사를 썼다. 촛불집회가 계속될수록 기사에 담지 못하는 진실이 보였고 그것을 문학으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 떠오른 시인의 시작 메모.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가 ‘거리의 상상력’을 위해 지불한 고통이 새삼 가슴에 와닿았다. 그리고 기형도의 시를 처음 만난 시절도 떠올랐다. 1997년 대학에 들어간 오씨는 이른바 IMF 학번이다. 그는 “토익 서적이 도서관을 점령했고, 학생운동 하는 선배들과는 맞지 않았으며, 실직 가장의 자식들이 대학 등록금이 없어 군대에 간 시절이었다”며 “심사가 복잡하고 회의가 밀려들던 당시 분위기와 기형도 시의 정서가 맞았다”고 돌이켰다.

한승미(30)씨가 기형도 시를 가슴으로 읽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IMF 한파는 대학으로 가는 길마저 막았다. 그는 대입에 실패했지만 재수를 할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건설현장 소장으로 일하던 아버지의 일감이 떨어졌다. 집안 형편을 원망하며 6개월을 방황했다. 그래서 유년의 가난을 시에 담아낸 ‘위험한 家系·1969’ 같은 시가 마음을 울렸다. 그는 “남에게 말하지 못했던 나의 어려운 상황을 시인이 대신해 말해줘 위로가 되었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기형도는 문학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기형도에서 황동규를 거쳐 랭보까지, 지금도 틈틈이 시를 찾아 읽는다. 나중엔 대학에 들어가 문학 수업도 들었다.

 

스무 살 청년의 눈매 ‘살아 있는’ 친구

 

 

그처럼 ‘위험한 家系·1969’의 첫 줄,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같은 구절을 읽으며 가족의 가난과 유년의 추억을 떠올린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기형도 시를 읽으며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엄마 걱정’)를 떠올리고, 해진 빨간 내복을 입은 누이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힌 이들이 적잖다. 이정희(26)씨도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의 풍경은 제가 살았던 그곳과 닮았고, 바람병을 앓으신 아버지는 젊은 날에 쓰러진 내 언니의 이야기였다”고 돌이켰다. 또 한승미씨는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대학시절’)고 썼던, 고뇌하는 80년대 대학생 기형도를 2008년에 이해했다. 한씨는 지난해 난생처음 집회에 나갔다. 그는 “갈수록 촛불집회에 대한 전경들의 압박이 점점 심해져 집회에 나가지 못했다”며 “시대에 몸을 던지지도 외면하지도 못한 채 경계인으로 있었던 시인의 고민이 절절히 와닿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다시 마음의 겨울에 한씨는 기형도를 읽는다. 한씨는 “기형도 10주기 무렵엔 IMF로 어려웠고, 20주기엔 또다시 경제위기가 닥쳤다”며 “이렇게 어려움이 닥치면 새삼 그의 시집에 손길이 간다”고 말했다.

 

올해 대학에 들어간 스무 살 문학청년 기다빈씨에게도 기형도는 각별하다. 기씨는 중학교 국어 참고서에서 ‘엄마 걱정’을 처음 읽었다. 그는 “성이 같다는 별것 아닌 이유로 시집을 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일찍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커가면서 기형도 시의 의미도 달라졌다. 그는 “처음엔 그냥 멋있었고, 문학상을 타면서 글쓰기에 자신이 붙었던 고교 2~3학년엔 ‘포도밭 묘지 1’ 같은 새로운 형식의 산문시가 좋았다”며 “지금은 시가 솔직해서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나의 아픔을 드러내는 솔직함, 그러나 엄살이 아닌”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기형도 시를 읽으면 “술자리에 그가 옆에 앉아 단둘이 얘기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스무 해 전에 천국으로 떠났지만 그의 시는 오늘도 스무 살 청년의 “눈매가 살아 있는” 친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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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길지만

결론은

그의 시와 함께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

나의 본과 1학년 때처럼

다시 입속의 검은 잎이 읽고 싶군  지선이도 보고싶고  기숙사 1층 휴게실의 술자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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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2 21:01 2009/03/1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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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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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먹거리가 참 비싸다

 

학교식당이나 병원식당에서 한끼가 350~550엔이니 5000~8000원꼴이다

병원 앞 밥집에 가서 점심(할인)세트를 먹으려면 750~950엔인데

50엔 아낀다고 (난 20엔 아끼기 위해 말도안되는 선택을 할 때가 흔하다) 젤 싼거만 시켰다간

대학식당에서 밥먹기 전에 나오는 약 8가지 반찬 중 하나와 밥, 단무지 2개 받을 확률이 높다

(어딜 가든 모국과 비교하는 건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숙주나물 한접시와 밥이 왔을 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만화를 보고 아무리 많은 상상을 했다해도 그걸 넘어서는 일본 라면은 750~1050엔

그렇다고해도 우리나라에서 먹는 라면과는 비교불가다 (제주도 고기국수와는 비교가능하다)

워낙도 좋아했지만 철따라 나오는 다양한 풍미에(지금은 유자칩에서 사쿠라칩으로 바뀌는 중)

맛있는 맥주까지 있으니 매일 하나씩 먹게되는 감자칩은 작은 봉지가 150~200엔

 

먹거리재료도 물론 비싸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게 양배추 하나도 1/4, 1/8쪽씩 잘라서 팔고

사과, 오이, 양파등은 물론 하나씩 살 수 있어서 자취생 같은 경우 오히려 편리한 편이다

음식물 쓰레기는 거의 없다 -라기 보단 있을 수 없다

샐러리 이파리, 브로컬리 기둥, 연어 껍질, 배 속(..은 아직 제페토할아버지가 없어서 안먹지만)

다 먹는다 -라기 보단 먹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원산지-라기 보단 나온 동네-와 채취일이 다 적혀있고 대부분 기한 안으로 다 팔린다

큰 슈퍼 외에도 단일 품목만 오래 팔아온 쌀집, 야채집, 생선집 등이 동네마다 있는데

우리 집 앞 쌀집에는 쌀이 나올 때 그 쌀을 만든 농부가족과 논의 사진이 쌀마다 함께 걸린다

미국산 소고기, 호주산 소고기 물론 있다

하지만 20개월령 이하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위기 상 그다지 인기가 있진 않아 보인다

와규는 물론 물론 비싸지만 100g씩 묶어서 팔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1kg에 얼마차이!!

하고 눈에 띄는 차이가 나지 않기도 하고 (나도 일주일 술 안마시면 질러볼만한 가격)

그보단 일본 각지의 이름을 단 다양한 와규앞에 서서 몇십엔 싼걸 열심히 고르는 분위기다

슈퍼에서 계산기(내 건 사실 전자사전이지만)를 들고 몇번씩 눌러보는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해산물이 굉장히 싸서 나의 사랑 연어는 특별세일을 노리면 한조각에 77엔에도 살 수있다!

또 아직 감히 사보진 못했지만 제주도에서도 귀하게 일식집에 모셔놓고 먹는 나마마구로가

한덩이에 700~800엔짜리 가격표를 달고 수퍼에서 굴러다닌다  

 

전통과자는 물론 비싸다

하지만 한장에 150~200엔하는 몇십년째 하나하나 손으로 굽는 센베는 따듯하고 고소하고

역시 메이지때부터 이어온다는 10개에 100엔짜리 꼬마만쥬같이 싸고 맛있는 보물도 있다

빗속에 찾아갔음에도 (점심때 였는데) 문을닫아 먹지 못했지만 

아침에 삶은 팥 한솥만 팔면 문을 닫는다는 하나 180~250엔하는 붕어빵은 먹어보고 평가예정

 

어떤 회장가족과 식사할 일이 생겨 5명이 데판야키를 먹고 100만원 정도 나왔었는데

아빠는 계속 말도 안된다고 웃었지만

얼마전 도쿄의 하이소(High society -_-)거리에서 의국사람과 먹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둘이 전채,파스타,요리,디저트 1인분씩 시켜서 나눠먹고 술 2잔씩에 27만원이 나왔다

예약없이도 갈 수 있는 곳이었고 그사람이 가고싶어한 프랑스 레스토랑은 2배가격이라니까

5명이 호텔에서 100만원 먹는게 말도 안되는 건 아니었던 거다  그땐 와인도 2병 마셨으니..

Y나가 F미가 '사랑이 없어도 먹고살 수 있습니다'에서 소개한 2000~7000엔 짜리 집들은

결코 비싼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물론 그래도 나는 갈 수 없겠지만

 

먹거리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참 다른 건 재밌다

'밥알 하나를 흘리면 눈알 하나를 흘린 것과 같다'는 일본 속담을 엽기라고 웃엇었는데

일본 온 후로 밥알 하나를 남긴 적이 없다 -몇번 씩 말하지만 남길 수가 '도저히' 없다

'밥맛'이라는 우리나라 말을 가르쳐주면 밥에 나쁜 의미가 담긴다는 데 굉장히 놀란다

유통과정에 차이가 있는 거겠지만 저녁이 되면 야채나 고기, 생선 매대는 대부분 텅텅 빈다

얼마 남아있던 것도 마감 1시간 세일가격표를 붙이면 기다리던 사람들 손에 실려간다

세일가격은 계속 붙지만 끝까지 매대를 꽉 채우고 있던 제주도 이마트와 뭐가 다른 걸까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며 먹거리를 사고 요리를 하고

한끼 한끼를 먹을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며 맛있게 밥을 먹지만

얼마전 처음으로 가본 도쿄의 한국이라는 신오오쿠보에서 떡볶이, 오뎅, 떡꼬치 속에서

한상자에 500엔 하는 (어디서 나온 재료로 어디서 만들었는지 모를) 쵸코파이를 보고는

먹고싶다! 고 생각했다 -순간 거의 살 뻔..

 

반동은 순식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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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0 15:16 2009/03/1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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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ろそろしようか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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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野가 올해 ITI scholar로 선발되었다

ITI center라고는 하지만 research는 전무한 이곳에서 혼자 실험하고 교수를 설득(교육?)하고

미국에 가기 위해 쯔루미에 왔다고 (일반적인 일본인의 영어로) 말하던 GP 

동경의과치과대학에 낙방후 어떤(들었으나 곧 잊어버리고 마는 대학들중 하나) 곳을 졸업하고

쯔루미대학 임플란트과에 들어와 수련받지 않은점을 살려 각 과 교수들에게 하나씩 배워가며

GP로 ITI scholar가 되어 (가능한지 처음 알았다) 미국에 입성하게 된 거다

당일 열린 조촐한 축하연에서 메일을 보고 몇년만에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다시한번 びっくり

 

모두가 (특히 신임교수가 된 젊은 유학파 선생은 직접 의국으로 내려와) 축하하는 가운데

영어 학원을 끊고 환자를 정리하고 1달쯤 미리 출국할 계획을 세우는 그를 보면서

지금은 작은 대학출신으로 작은 병원의 시간제 의사지만

앞날은 지금 여기서 볼 수 없는 곳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지금 내 자리가 쉽게 얻을 수 없는 좋은 기회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준비할 시간도 없이 일만 하다 와서 여기선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지금 상황은 그만큼 꿈꾸고 애쓰지 않은 (사실 지금이라도 그러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내 탓이라고도 생각한다

 

ITI 장학금이란 걸 받아서 외국에 갈 수 있다, 부쉬가 있는 미국은 싫다

(사실 이것도 내생각도 아니고, 박노자의 글을 읽은 후 빅에게 자극받은 거...)

새로 독일어까지 배우고 싶지도 않다  이미 손 댄 프랑스어나 일어를 제대로 해볼까

머 이 정도 생각 뿐이었으니 막상 와서 보고

얼마나 좋은 기회를 얼마나 낭비하고 있는지 알았다한들

부실한 쯔루미를 탓할 것인가 이곳으로 나를 뽑아준 교수를 탓할 것인가

 

그래도 새로운 미래를 열어보겠다는 생각 하나로 유학원에 속아서 출국해

바이트로 반나절을 보내가며 일본어를 배우는 신오오쿠보의 어학연수생들을 생각하며

뭐라도 열심히 해볼까, 라고 생각하며

 

역시 질투는 나의 힘이구나

느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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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6 16:34 2009/03/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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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祝い] 일찍 출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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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해뜨기 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평소보다 특별히 일찍 잔 건 아니고 'OL진화론' 작가의 '35세 아직 독신

..이지만 나름 즐거워 (..정도?)'를 읽다가 '오 사랑'을 틀어놓고 잔 것도 평소랑 똑같은데

무슨 꿈인가 꾸다가 눈을 뜨니 창 밖이 이제 밝아오려는 5시 45분

朝寝坊 기분을 즐기며 따듯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나와도 해가 떠오르는 6시

하루가 길어지는 기분은 좋구나

 

커피를 내리고 빵을 다시 굽고(태우고), 느긋하게 빈둥대다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나섰다

부지런한 아줌마들이 생(生)쓰레기와 생활쓰레기를 버리면 청소차가 바로바로 치우는 토요일

오래된 나무가 우거진 總持寺를 지나 아직 조용한 병원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어제 처음으로 과일을 사먹었네 (사과 한알에 1600원)  그 덕인가?

 

오늘은 '까페 뤼미에르'에서 주인공이 홋또미루꾸를 마시던 에리카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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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1 08:50 2009/02/2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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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祝い] 빵이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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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들 출근하는 시간보다 빨리 (실은 제시간에라도) 오기

아무도 감독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아도 여기 소속된 이상은 얘네랑 같이 일하기

진료시간중엔 인터넷 하지 않기 도서관에 주구장창 앉아있지 않기

하지만 굶고 일하는 애들 사이에 적당한때 빠져나와 끼니는 챙겨먹기  그리고 딴길로 새지않기

짧게라도 매일 글써서 남기기  자기 전에 오늘 새로 들은 단어들 찾아보기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늘어나는 약속들

돌아보니 두달 전까지 생각도 못했던 곳에 혼자 나와있으면서도 온갖 '하기'에 묶여 있었다

대학 6년, 구강외과 5년, 허술한 연애 7년, 나를 묶었던 건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을 지도

(아직은 인정 못하겠지만)

 

ゆき냥의 조금 슬픈 햄버거에 감화되어 모스버거를 먹으러 나온 오후 3시

하지만 적디적은 일식은 햄버거에도 예외가 없어 슬픔이고 여유고 느낄 새 없이 사라져버리고

찾는 이 없을 병원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나름 유명한 병원 앞 빵집의 그야말로 근사한 냄새에 이끌려 메론빵이나 살까 들어갔다가

'지금 구웠어요'라는 명찰을 단 애들의 목소리를 이어폰 너머로 듣고 말았다

처음엔 아이리버의 잡음인 줄 알았는데

막 구워진 단단한 껍질의 빵(뭉아.. 용어가 딸린다..)은 한동안 타각거리며 껍질이 갈라지더군

평소엔 감히 집어보지 못한 럭셔리한 모양새에 럭셔리한 가격의 빵이었으나

왠지 나를 위로하는 것 같은 따듯한 그 소리에 집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20엔 아낀다고 돌아돌아 다니지만 (늘) 왠만한 정식 한끼보다 많이 나온 780엔짜리 점심

제목을 일본식으로 하자면 ’私はパンから話かけられた(빵한테말걸음을받다)' 정도가 될까 

왠지 의미도 그 쪽에 좀 더 가까운 듯

(게다가 놀라운 건 선생님들이 모두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빵의 얘기를 들어야 어른이 된다며, 아직 못들은 선생한테는 아직 어린이라고 놀리기까지, 일본 빵은 모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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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16:13 2009/02/20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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