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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질라 아이젠슈타인이 편집한 논문 모음집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Monthly Review Press, New York and London, 1979) 중에서 질라 아이젠슈타인의 논문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해석한 것이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와의 상관관계를 공부하는 중인데, 이러한 상관관계를 내 나름대로 명쾌하게 밝혀보고자 하는 욕심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잘 될라나 모르겠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정리한 글을 이 해가 가기 전에 써 보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욕심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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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 #
- Zillah R. Eisenstein -
@ 1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
** 들어가며
급진 페미니스트들과 남자 좌파들은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을 혼동하면서 여성으로 됨과 페미니스트로 됨 사이의 정치적 구별을 잘 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급진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차이 또한 연결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자 여성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가부장제로부터 나타난 권력 시스템을 이해하고자 한다. 나는 자본주의 계급 구조와 위계적인 성적 구조 사이의 관계가 서로 강제하는 변증법적 관계임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라는 말을 선택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상호의존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정치적 분석의 본질에 해당한다. (남성 지배권으로서의) 가부장제가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현재 관계는 억압 구조가 바뀌려고 할 때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단일적인 맑스주의 분석이나 고립된 급진적 페미니즘 이론을 넘어서게 된다.
권력은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취급된다. 권력은 경제적 계급 지위 또는 성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생물학적 남성/여성 구별에 기초한 권력 비판은 대부분 가부장제에 초점을 맞춘다. 부르주아지/프롤레타리아트 구별에 기초한 권력 비판은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들은 사회적 생산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사회적 재생산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가사노동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임금 노동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사적 영역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공적 영역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가족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경제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이데올로기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또는 물질적 조건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성적인 노동 분업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또는 자본주의 계급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성들의 상황이 이러한 이분법의 양 측면에 다 속해 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된다. 여성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면서 개념화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분법이 현실을 이기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변증법적 사고로 접근하고자 한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맑스주의 분석을 종합하는 것은 일관된 사회주의 페미니즘 정치 이론을 정식화하는 첫 단계로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정치이론은 단순히 권력에 대한 이 두 가지 이론을 서로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이론이 성별 노동 분업을 통하여 서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본다.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이러한 문제의 근원으로 정의하는 것은 동시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답이라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나는 맑스주의 계급 분석을 테제로 사용하고, 급진적 페미니즘의 가부장제적 분석을 안티테제로 사용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가면서, 이 둘로부터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종합으로 이끌어낼 것이다.
테제 : 계급으로서의 여성
1. 맑스 : 혁명적 존재론과 여성 해방
여성 억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맑스주의 분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맑스주의 분석은 권력 연구를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계급 분석을 내놓는다. 둘째, 맑스주의 분석은 역사적이며 변증법적인 분석 방법을 제공한다. (방법으로서) 변증법은 거의 대체로 계급과 계급투쟁을 연구하는 맑스주의에 의해 사용되고 있지만, 또한 여성의 현존을 지배하는 가부장제적 관계들과 이로부터 나타나는 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을 분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맑스주의 분석이 모든 권력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렇게 할 수 있다.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은 계급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나는 계급투쟁에 관한 맑스의 분석을 사용할 것이지만, 또한 그의 분석 방법을 끌어내서 그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몇몇 권력관계 차원에 적용시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맑스의 방법을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관계에 대한 오늘날 우리의 이해를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물질적 관계들로 확장시켜 사용하고자 한다.
이런 관계들은 맑스의 착취와 소외 이론을 통해 해명된다. 여성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 착취 이론이 중요하다는 것이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이에서 이미 많이 논의돼 왔기 때문에, 나는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나는 맑스의 소외 이론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변증법적이고 혁명적인 존재론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소외에 관한 그의 논의가 노동력을 가진 여성 노동자들에게 적용되고, 전혀 다르게 가정주부와 같은 비임금 가사노동자에게도 적용되지만, 이와는 별개로 나는 그의 분석 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착취 이론 속에 나타난 것으로서 계급과 계급투쟁으로 환원시키지 않음으로써, 소외 이론 속에 나타난 변증법적 방법을 여성의 특별한 혁명적 잠재 능력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소외 이론이 착취 이론에 포함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착취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외이론과 그 이론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유적 삶”으로 넘기는 일은 인간 존재의 혁명적 능력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유적 존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간 잠재성을 창조적 노동, 사회적 의식,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투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삶의 과정에 도달시키기 위해 애쓰는 존재이다. 또한 이러한 능력들을 공산주의 사회에서 완전히 내면화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존재론적 구조는 그 존재의 본질과 현존을 규정한다. 맑스에게서 현실은 따라서 단순한 현존을 넘어서는 것이다. 현존재는 현실 속에서 인간 본질을 향한 운동을 구체화시킨다. 이것은 완전히 추상적인 인간 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역사적 문맥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본질이다. “유적 존재”는 소외되지 않는 사회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념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로지 본질로서만 존재한다.
만일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자본주의 관계들 속에서 착취 당하는 자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자신의 잠재적인 혁명적 능력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외 이론에서 착취 개념이 포함돼 있지 않다면, 우리는 착취 당하는 사람으로 방치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별 노동자의 유적 삶의 잠재적 능력 때문에, 바로 착취 당하는 노동자는 잠재적인 혁명적 존재가 된다. 유적 삶의 잠재적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맑스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한 노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잠재적 능력은 계급 구조 또는 착취 관계 내에서의 지위와 상관없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존재한다. 이러한 잠재적 능력의 실현은, 그러나 계급 별로 차이가 난다.
자신의 소외 이론에 따라 맑스는 자본주의의 본성을 비판적으로 규명해 간다. 자본주의에 관해서, 맑스와 엥겔스는 상품생산의 전 과정을 언급하였다. 이 과정 안에 내재해 있는 착취를 고찰하면서, 맑스는 자신의 권력 이론을 발전시켰다. 권력 또는 권력 없음은 한 개인의 계급 위치로부터 도출된다. 따라서 억압은 자본주의 조직의 결과물이며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없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생산적 노동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는 부르주아지를 위해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자를 착취한다. 이윤 속에 내재해 있는 잉여 노동은 노동자의 실질적인 노동시간과 필요 노동시간 사이의 차이로부터 나타난다.
자본주의 생산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생산적 노동은 가변 자본 부분(임금의 형태로 소비되는 자본 부분)과 교환되는 임금노동인데, 이러한 가변 자본 부분(또는 노동력의 가치)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이에 덧붙여서 자본가를 위한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 그러한 임금노동만이 자본을 생산하는 생산일 뿐이다.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형태로 나타나는 계급 구조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다. 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양분된다. 이 둘 사이의 분리와 갈등의 기초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이다. 잉여가치가 자신의 생산적 노동으로부터 뽑히면서 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당하는 억압이다.
자본주의 관계에 대한 맑스주의의 이러한 비난은 사회적인 인간 현존재의 혁명적 존재론으로 포괄된다. 혁명적 존재론은 사회에서 혁명적 의식으로 나타나는 본질과 현존재 사이의 변증법이 각 개인들 내에 있음을 단정한다. 소외 당하고 착취 당하는 계급 현존재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런 계급 현존재에 관한 이론 내의 혁명적 존재론 둘 다 맑스주의 분석으로 하여금 계급의식 이론을 추가하면서도 그 이론을 넘어서 나아가는 페미니즘 이론이 발전해 나가는 데 비판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다.
여성으로 확장되었을 때, 이 혁명적 존재론은 자유의 가능성이 착취와 억압과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여성이 현재의 그녀 모습보다 더 잠재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오늘날 그녀의 모습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고, 이는 내일의 실제적 가능성을 규정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녀의 모습이 그녀의 능력 또는 잠재성의 객관적 한계를 결정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소외된 노동자에 대해서는 참이다. 어떤 노동자가 그의/그녀의(자신의-옮긴이)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그는 여전히 잠재적으로 창조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본질과 현존 사이의 이러한 모순은 혁명적 여성뿐만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저변에 깔려 있다. 맑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계급적 위치는 의식을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적 존재론을 사용한다면, 이러한 것(계급적 위치-옮긴이)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여성이 그녀의 성과 관련하여 규정된다고 말하고 싶을 때, 가부장적 관계들은 그녀의 의식을 규정하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혁명적 잠재력을 함축하게 된다. 사람들의 현실적 조건들(현존)과 가능성들(본질)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혁명적 잠재력을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가부장제적 관계들이 어떻게 인간 본질의 발전을 막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유적 삶이라는 개념은 남성과 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을 지시하고 있다. 여성의 혁명적 의식의 잠재력을 규정하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은 맑스가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맑스는 결코 성적인 사회 위계 질서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훨씬 더 복잡해진 일련의 관계들이 여성으로 하여금 유적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따라서 유적 삶의 현실화가 계급 체계 하나만을 해체시킨다고 해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성에 관한 그의 저작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가 유적 삶과 남녀 모두의 사회적 경험의 자본주의적 소외 형태들 사이의 긴장들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철학 수고』, 『공산당 선언』, 『독일 이데올로기』, 『자본』에는 가족과 여성의 착취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것들이 있다. 맑스는 가족 관계를 단순한 화폐관계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 가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아내를 단순한 생산도구로 여기고 있다. 현대 가족, 즉 부르주아 가족의 기초는 무엇인가? 자본, 즉 사적 이익이다. ……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르주아의 허풍, 부모와 자식 간의 상호관계에 관한 부르주의 허풍은 모두 근대 산업 활동으로 인해 점점 더 정나미 떨어지는 것으로 변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가족 관계는 산산이 부서져서 아이들은 단순한 상업 물품으로 그리고 노동도구로 변하게 된다.
사적 소유의 관계는 교환양식이 된다. 이러한 부르주아 우위의 확장은 사회적 관계를 가족 내로 한정시킨다. 그리고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아주 진정한 사회적 관계로만 보이는 가족은 부차적인 욕구가 된다. 사유재산과 사적 소유라는 이해관계는 여성-남성 관계에 침투해 들어간다.
「유대인의 문제에 관하여」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적 관계 자체, 즉 여성과 남성 사이의 관계 등은 상업의 대상이 된다. 여성은 구매되기도 하고 판매되기도 한다.” “가진다”라는 성향은 유적 관계를 소유와 지배의 관계로 탈바꿈시키고, 결혼을 매춘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래서 맑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끝으로, 사적 소유를 보편적인 사적 소유에 대립시키는 이러한 운동은 (확실히 배타적인 사적 소유 형태의 하나인) 결혼을 여성이 공동체의 공동 소유가 되는 여성들의 공동체에 대립시키는 동물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 여성이 (11쪽)결혼으로부터 보편적인 매춘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부의 전체 세계(즉, 남성이 지배하는 자산의 전체 세계)는 사적 소유주와의 배타적 결혼 관계로부터 공동체와의 보편적 매춘 상태로 나아간다.
맑스는 여성의 문제를 단순한 재생산 도구로서 취급되는 그녀들의 지위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봄으로써, 사회주의 혁명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선언』에서 그는 “현재 생산 체계의 폐지는 이 체계로부터 나타난 여성들의 공동체, 즉 공적이고 사적인 매춘 모두를 포함하는 매춘의 공동체 폐지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라고 썼다. 맑스의 저작에서 부르주아 가족은 그 자체 특별한 의미도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한 도구로서 나타난다. 여성의 억압은 결혼과 가족을 통해서 나타나는 계급 사회에서의 억압이다. 여성은 프롤레타리아트 일반과 구별되지 않는 희생자, 즉 유해한 계급(프롤레타리아트-옮긴이)의 노동 분업의 단순한 또 다른 희생자로 인지된다. 성별 역할, 목적, 활동 등등과 마찬가지로 성별 노동 분업은 맑스에게 독자적인 존재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는 여성의 생물학적 재생산 또는 가족 내에서 노동 분업을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것으로서 모성 역할에 거의 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맑스는 여성과 남성의 착취를 똑같은 근원지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았으며, 그들의 억압이 동일한 구조적 용어들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가정하였다. 혁명적 의식은 착취에 대한 계급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만 한정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유적 삶을 살아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삶은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삶을 선택하도록 하는 성별 노동 분업에 의해 구조화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 역할은 끊임없이 소외와 고립을 피할 길 없는 일을 여성에게 미리 부과할 것이다. 본질과 현존은 여전히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있다. 맑스는 사회에서의 성별 노동 분업이 비창조적이고 고립되는 노동을 특히 여성들이 담당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착취의 해체는 그 자체 현실적인 유적 삶, 즉 여성의 창조적 노동, 사회 공동체, 그리고 비판적 의식을 보장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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