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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2/25
    [상호부조론]을 봐야지(2)
    꿈이

[상호부조론]을 봐야지

우리영농조합법인
cafe.naver.com/woorinong
  퍼왔음

 

 

 

테러리즘 비판 : 실행을 통한 전선

 

 

상호부조의 원리를 윤리의 차원에서 접근했던 크로포트킨은 다가올 새로운 사회가 민주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런 사회로 가는 방법도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봤다. 크로포트킨은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이 혁명이후에 세워질 사회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인민들이 혁명의 주체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혁명은 그 당사자인 노동자, 농민, 학생의 비폭력 직접행동을 통해서만 참된 길을 걸을 수 있다) 그 방법 역시 가능하면 폭력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예컨대 고귀한 방식으로 이뤄질 때에만 고귀한 목적이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 크로포트킨의 주장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권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것은 비밀결사나 혁명조직이 아니다. 비밀 결사와 혁명조직의

      임무와 역사적 사명은 혁명에 정신을 불어 넣는 것이다. 그리고(외부의 상황도 허락되고)

      혁명의 정신이 준비됐을 때 최후의 박차를 가하는 것은 선도적인 그룹이 아니라 사회의

      하부조직 바깥에 머물러 있는 대중이다.

 

  실제로 크로포트킨은 한때 바쿠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음모주의자 네차예프를 강력히 비판했고, 지도자에 대한 복종이나 비밀조직을 완강히 거부했다. 크로포트킨이 바쿠닌과 달리 어떤 비밀조직도 만들려 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조직에 대한 거부는 자연스럽게 테러리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사실 러시아가 혁명가들(특히 인민주의자들) 중에는 테러리스트라고 불릴 만한 인물들이 많았다. 특히 크로포트킨은 1905년 러시아혁명 이후 인민들과 동떨어진 소규모 비밀모임들이 조직적으로 테러를 일으키고 다니던 것을 우려했다.

  물론 러시아 혁명가들 사이에 테러리스트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들이 선천적으로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차르와 오크라나(Okhrana)라 불렸던 비밀경찰이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반란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오크라나는 심지어 유럽 각국으로 첩자들을 보내 러시아의 망명 혁명가들을 감시하고 본국으로 잡아들였다.

  이처럼 차르를 반대하는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쿠닌이 테러를 혁명의 도구로 인정한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크로포트킨 역시 활동 초기에는 차르 암살을 포함한 여러 방식의 테러를 지지했다. 물론 차르에 대한 증오보다는 억압을 당하는 인민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크로포트킨은 점점 더 폭력과 멀어졌다. 사실 크로포트킨은 1880년 『반란자』에 기고한 글 「반란의 정신」을 통해 이미 테르리즘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크로포트킨은 이 글에서 "며칠에 걸친 단일한 행동이 수천 개의 팸플릿보다 선전에 더욱 효과적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훗날 '실행을 통한 선전'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이 주장에는 인민들의 반항적인 본능을 말과 글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도 일깨워야 한다는 아니키스트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다른 아나키스트들처럼 크로포트킨 역시 말로만 떠들어대는 '종이 위의 혁명', 즉 이론상의 혁명을 비판했다. 요컨대 아나키스트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는 방식은 곧 행동이었다.

  이런 면에서 실행을 통한 선전도 테러만큼이나 반혁명 세력과의 물리적 충돌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행이 곧 테러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행동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가? 모든 형태. 실제의 상황, 분위기, 가용수단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익살맞게, 그러나 항상 대담하게.

      때로는 집단적으로, 때로는 순전히 개별적으로.   ...... 무엇보다도 이런 행동은 인민들의

      용기를 일깨우고 반란의 정신을 부채질하는 가장 현실적인 본보기를 통해 수행된다

      (「반란의 정신」).

 

  모든 형태가 가능하다고 했으니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테러도 배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기 없는 무차별 테러, 즉 부르주아지와 반동분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폭탄을 던지는 테러는 크로포트킨이 강조하는 "가장 현실적인 본보기"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형태였다. 결코 목적과 수단을 분리하지 않았던 크로포트킨이 보기에 테러는 인민들의 용기를 일깨우기보다는 인민들이 아나키즘을 신뢰하지 않게 만드는 잘못된 행동일 뿐이었다.

 

 

                                         - 冊,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그린비- 中에서

 

# 이 책의 '책머리에' 보면

 

아나키즘은 매혹적이다. 아나키즘에는 푸른 초원을 힘차게 질주하는 야생마의 자유로움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자유로움,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것들로부터의 자유로움이. 아나키즘의 어원이 되는 단어인 그리스어 아나르코스(anarchos)는 "지도자가 없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들"을 뜻했다. 이것은 흔히 생각되듯이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도자나 선장이 없다는 없음(無)의 실재보다 누구라도 지도자나 선장이 될 수 있다는 있음(有)의 여백이 바로 아나키의 질서이다. 고정된 질서를 억지로 강요하면 곧바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순수한 혼돈, 그것이 곧 아나키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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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브리치는 『상호부조론』이 인기를 끈 이유를 두 가지로 꼽는다. 첫번째 이유는 『상호부조론』이 당시 운동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아나키즘에 과학적 토대를 마련해 준 가장 성공적인 최초의 연구였다는 점이다. 『상호부조론』을 계기로 아나키즘은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로 불리던 맑스주의에 맞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됐다.

  두번째 이유는 『상호부조론』이 아나키즘에 윤리적인원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은 진화뿐만 아니라 윤리의 관점에서 상호부조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했다. 크로포트킨에게 상호부조란 "인간 존재 한 사람 한 사람과 자신이 하나라는 인식을 통해서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 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이런 윤리의 문제를 죽을 때까지 고민했는데, 끝내 완성시키지 못한 채 후세에 남긴 그의 유작도 『윤리학』이었다("위대한 인본주의자이자 혁명적 아나키스트의 마지막 노래"인 이 책은 1922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애브리치가 지적하지 않고 넘어간 세번째 이유도 생각할 수 있다. 크로포트킨은 애초의 헉슬리와의 논쟁을 목적으로 집필했던 『상호부조론』의 논의를 확장시키며, 훗날 '아나코-코뮨주의'라고 불리게 될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었다. 크로포트킨의 또 다른 걸작 『빵의 쟁취』(1892)와 『들판, 공장, 작업장』(1898)은 바로 그 성과물이었다. 『반란자』와 『19세기』에 기고한 논문들을 모은 이 두 권의 책은 『상호부조론』이 책으로 출판되기 전에 이미 크로포트킨의 명성을 높이고 있었다. 요컨데 『상호부조론』의 인기는 이 앞선 책들의 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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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를 간략히 올려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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