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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를 만들거야?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라고 가끔가다, 나를 친근하게 여기는 이들이 물어온다.

 

명색이 '다큐멘터리 감독'이니, 그런 질문을 할만도 하다.  솔직히 별 답이 없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생각을 하게된다.

이런저런 토론을 곁들여 대답을 하기는 했다.

 

내가 만들려는 영화

 

1. 몇몇의 사람들, 백명(?) 혹은 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당신이 만든 것을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했어요. 그 것에 관해서 심각하게 같이 토론해 봐요.'라고 말하는 영화

 

2. '영화제작 행위'에 관계했던 사람들이 소외된 노동을 하지 않는 것 

    - 이때, '관계자'라하면, 극영화의 경우,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이 되겠고,  다큐멘터리라면, 소수의 스태프와 소위 사회적 배우(social actor=출연자) 가 되겠다.   

   -영화제작이라는 협력적 노동이 참여한 스태프들에게,  소통의 즐거움, 성찰의 계기, 화두의 발견,  새로운 감성, 시선의 확장,  영감 , 새로운 착상  등 '이윤' 을 넘어선 선물나누기가 될 것.

   - 특히 다큐멘터리에서,  '찍히는 사람들에 대한 카메라의 절대적 우위'라는 구조적 위험성을  명심하고 그것을 극복할 세심한 대안들을 마련할 것.    

   

3. 스스로 생각할 때, 쪽팔린 영화적 장치 (술수)를  사용하지 않는 것

   - 영화를 제작하다보면,  더많은 관객으로부터 더 빨리 시선을 끌기위해, 또는 연출자인 나자신의 숙련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것을 경험한다.  '이렇게 표현하면 사람들이 너무 같잖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렇게 표현하면 더 극적이지 않을까? 이렇게 해야 나의 무지나 무신경이 좀 더 감춰지지 않을까? 등등'

 

4. 소망 : 죽기 전에, 100년 쯤 후에 몇몇 사람들이, 어느 공공 아카이브에서인가 내가 만든 영화를 빼보곤,   '음, 100년 전의 사람들중에 이렇게 생각하고 느꼈구나...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싶어.'  라고 생각하는 영화 5 편 정도 만들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1.  현재의 미디어 구조에서 주류의 '상영 및 방영(보여주기-보기)' 시스템은  '제작자의 인기확장과 이를 통한 이윤확보'라는 써클에 결박되어 있어서,  '소통'과 '교감' 이라는 영화제작-보급활동의 본래의 의미를 죽이고 있다는 점이다.  

-  현재의 대자본이 주도하는 상영시스템은  '수백만을 일거에 감동시키는 그런 영화'에 대한 열망을 부추기며 조장한다.  자본의 이윤확보 써클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주로 '투자비를 회수해야한다.' 라는 명목이 대중들의 비판적인 의식을 무마하는 논리로 사용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혹은 그의 정신이) 일거에 동시대의 다수의 공동체  사람들의 정서를 쥐락펴락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뿐 아니라,  특히 요즘들어서는 자본의 요구에 의해 의제화된 욕망이다. 

- 나는 나의 영화를 보아준 사람들이  수십명이든, 수백명이든,  '대안적 상영운동'이  발달하여 '수천명이 되든,   그들간에, 혹은 그들과 내가,  오손도손, 왈가왈부, 속삭이며 논쟁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  영화제작과정은 그 자체가  삶, 노동, 소통의 과정이다.  

 

- 영화제작은 나 외에 누군가와 협력작업을 해야하는 작업이다.   즉 만드는 이들의  공동의 열의와 창의적 노동이 수반되는 활동이다.  

- 그리고 그 협력노동과정은  참여한 사람들의  '삶(생활)'이기도 하다. (그동안 그들은 호흡을 하고, 정신적,감성적 육체적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조금 늙는다.)

- 자본주의는 '자아실현' 따위가 아니라, ' 지위 = 돈 = 편하고 폼나는 삶'을 위하여 '노동'을 하라고한다.   그러니 '돈을 벌기위해 노동을 하라' 고 강제한다.    

-   우선, 나는 지금의 사회시스템에서, 생존에 불가피한 만큼의 돈을 벌기위해 노력하기는 하겠지만,  '돈'을 벌기위한 이윤활동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영화제작'이라는 노동을 하고싶진 않다.  혐력하는 사람들도 '돈을 위하여'  활동에 동참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3.  설득력을 강화하는 장르적 장치에 기대는 일은  '낯간지럽다'

    - 출연자를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욱 더  '순수하게, 불쌍하게, 매력적이게' 그려내거나

    - 사건들을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욱 더  ' 극적이게, 아니러니컬하게,  역설적이게, 환상적이게, 정교한 인과관계를 암시하여'  재현하는 것 등은  시간이 조금 흐른후에 보면, 참 낮간지러운 일이다.  

    - 만드는 이와  감상하는 이 간의  '보다 친밀하고, 보다 의미있으며 소중한 소통' 은  그런 잡스러운 장치와는 별로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 아닐까?   

    

 4. 이거 지나친 욕망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100년 후에도 지금과 같이,  자본에 의한 계급구분, 소수 인간들의 타 계급과 대지에 대한 착취가 계속되는 사회라면 어쩌지?

      그 전에 자본주의가 전쟁으로 지구의 생명들을 멸종시키는 짓거리라도 하면, 100년 후의 사람들과 소통해보고 싶다는 나의 욕망도 도루묵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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