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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영화'만들기에 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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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12
    날갯죽지에 힘붙는 새들-명박산성 깃발의 내맘대로 해석
    꿈이
  2. 2007/01/28
    어떤 영화를 만들거야?(2)
    꿈이

날갯죽지에 힘붙는 새들-명박산성 깃발의 내맘대로 해석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0&articleId=491827

 

어제,  명박산성의 깃발들을 보면서 느꼈어요.

 

명박산성 - 둥지의 울타리에 올라선 청년 새들...

 

100만 시민들의 촛불시위가 있었던 다음날, 11일 새벽, 명박산성 앞에서, 밤새도록 죽어라고 토론하고 나서는 기어이 명박산성에 올라서 자신들의 의지를 깃발들에 모아 천명한 사람들을 보았어요.

이 밤은 ‘공화국’ 혹은 ‘민주 공화국’에 대해, 또 ‘대의 민주주의의 치명적 결함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학교였던 것 같아요. 시민들의 어떤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자율적 반란의 가능성... 그리고, '대안 지도세력'의 탈을 쓴(혹은 그것을 자처하면서 실은 현재의 집권자들과  공화국에 대한 철학이 별로 다르지 않은)또 다른 권력에 쉽게 속지 않을 지혜와 열정들이 폭발적으로 교류하며 소통하는 것 말이지요.

저도 아고라의 많은 사람들처럼,
명박산성에 올라설 계단을 만드는 시민들의 우여곡절을 가슴졸인 마음으로 지켜봤습니다.  

‘명박산성과 같은 높이의 시민의 연단을 별도로 쌓아 명박일당의 유치한 통치철학을 상징적으로 무력화시킬것인가? 아니면, 그것으로 계단을 만들어 명박산성에 올라설 것이냐? 더 나아가 그것을 넘어서 청와대로 갈 것이냐? 아니면, 보수언론에 빌미를 줄 위험한 행동을 하지말고 지금까지와 같은 평화시위를 계속할 것인가?’ 를 논쟁하느라고 벌인 장장 7시간의 치열한 논쟁 말이지요.

그 치열한 논쟁을, 인터넷 생중계로 보며 날을 세웠어요. 
그동안 아고라에는  그것이 매우 휘험한 행동이며,  프락치들, 과격한 시민들의 선동이라며,  여기서 벌어질 돌발적인 사태가,  그간의 수백만 주민들의 비폭력 저항이 만들어낸 성과들을 물거품으로 만들까봐 걱정하면서,  명박산성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막으려고 했어요.     
동이틀 무렵, 결국 광장에서의 직접민주주의는 어떤 합의에 도달했나 봐요.
‘명박이 세워놓은 장벽위에 올라서서 깃발을 보여줍시다’  

그리고, 깃발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차례로 그의 산성에 올랐어요 그리고 광장에 모인 이들의 염원을 담아 깃발을 흔들었어요.

그곳은 기름칠이 되어 있는, 미끄러울 수도 있는 곳이었어요.
깃발이 된 촛불들은, 그 장벽위에서(넘어서는데 많은 고민과 논쟁의 피로감을 안겨줬던 그 울타리 위에서)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것을 소중한 날갯짓이라고 느꼈어요.
첫 비상을 위해, 
수천키로미터 밖의 미지의 곳을 향해 날아야 할 어린철새들이, 둥지 안에서 치열한 준비의 시간을 가지고,  드디어 그 둥지의 울타리에 올라서 처녀비행을 시도하는 수만은 철새들 말이지요.   
 
그러면서, 그 직전에 산성밑에서 벌어졌던 어린 새들 간의 지난한 논쟁의 과정들이, 둥지 안에서 벌어진, 털갈이, 깃털 가다듬기, 뒤뚱거리는 날갯짓과 같은, 결국은 ‘대양을 횡단해야만할 운명을 지닌’ 새들의 예행연습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한동안이나마 어리석은 집권자가 쳐놓은 그 장벽위의 깃발들이 점점 더 활기차게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아...,  날갯죽지에 힘이 붙어버린, 다부지고 여유있는 눈매를 가진 청년새들의 모습을 봐요.

이런 생각이 제게 들었다고 한다면,  너무 오만한걸까요?  한가한 걸까요?  이제 중년을 바라보는 제 어깨도 근질근질한 것 같아요.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어쩌면 시작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공동체에 어떤 희망을 가져봅니다.

대양을 건너는데,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그것은, 함께 날면서 배우면서 해결해 나가야지요.  

 

* 직접민주정치의 실험장에서 수십일 동안 고생하시고, 어느새 스스로에게, 그리고 공동체의 다른이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희망을 던지고 계신 거리의 촛불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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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를 만들거야?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라고 가끔가다, 나를 친근하게 여기는 이들이 물어온다.

 

명색이 '다큐멘터리 감독'이니, 그런 질문을 할만도 하다.  솔직히 별 답이 없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생각을 하게된다.

이런저런 토론을 곁들여 대답을 하기는 했다.

 

내가 만들려는 영화

 

1. 몇몇의 사람들, 백명(?) 혹은 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당신이 만든 것을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했어요. 그 것에 관해서 심각하게 같이 토론해 봐요.'라고 말하는 영화

 

2. '영화제작 행위'에 관계했던 사람들이 소외된 노동을 하지 않는 것 

    - 이때, '관계자'라하면, 극영화의 경우,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이 되겠고,  다큐멘터리라면, 소수의 스태프와 소위 사회적 배우(social actor=출연자) 가 되겠다.   

   -영화제작이라는 협력적 노동이 참여한 스태프들에게,  소통의 즐거움, 성찰의 계기, 화두의 발견,  새로운 감성, 시선의 확장,  영감 , 새로운 착상  등 '이윤' 을 넘어선 선물나누기가 될 것.

   - 특히 다큐멘터리에서,  '찍히는 사람들에 대한 카메라의 절대적 우위'라는 구조적 위험성을  명심하고 그것을 극복할 세심한 대안들을 마련할 것.    

   

3. 스스로 생각할 때, 쪽팔린 영화적 장치 (술수)를  사용하지 않는 것

   - 영화를 제작하다보면,  더많은 관객으로부터 더 빨리 시선을 끌기위해, 또는 연출자인 나자신의 숙련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것을 경험한다.  '이렇게 표현하면 사람들이 너무 같잖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렇게 표현하면 더 극적이지 않을까? 이렇게 해야 나의 무지나 무신경이 좀 더 감춰지지 않을까? 등등'

 

4. 소망 : 죽기 전에, 100년 쯤 후에 몇몇 사람들이, 어느 공공 아카이브에서인가 내가 만든 영화를 빼보곤,   '음, 100년 전의 사람들중에 이렇게 생각하고 느꼈구나...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싶어.'  라고 생각하는 영화 5 편 정도 만들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1.  현재의 미디어 구조에서 주류의 '상영 및 방영(보여주기-보기)' 시스템은  '제작자의 인기확장과 이를 통한 이윤확보'라는 써클에 결박되어 있어서,  '소통'과 '교감' 이라는 영화제작-보급활동의 본래의 의미를 죽이고 있다는 점이다.  

-  현재의 대자본이 주도하는 상영시스템은  '수백만을 일거에 감동시키는 그런 영화'에 대한 열망을 부추기며 조장한다.  자본의 이윤확보 써클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주로 '투자비를 회수해야한다.' 라는 명목이 대중들의 비판적인 의식을 무마하는 논리로 사용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혹은 그의 정신이) 일거에 동시대의 다수의 공동체  사람들의 정서를 쥐락펴락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뿐 아니라,  특히 요즘들어서는 자본의 요구에 의해 의제화된 욕망이다. 

- 나는 나의 영화를 보아준 사람들이  수십명이든, 수백명이든,  '대안적 상영운동'이  발달하여 '수천명이 되든,   그들간에, 혹은 그들과 내가,  오손도손, 왈가왈부, 속삭이며 논쟁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  영화제작과정은 그 자체가  삶, 노동, 소통의 과정이다.  

 

- 영화제작은 나 외에 누군가와 협력작업을 해야하는 작업이다.   즉 만드는 이들의  공동의 열의와 창의적 노동이 수반되는 활동이다.  

- 그리고 그 협력노동과정은  참여한 사람들의  '삶(생활)'이기도 하다. (그동안 그들은 호흡을 하고, 정신적,감성적 육체적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조금 늙는다.)

- 자본주의는 '자아실현' 따위가 아니라, ' 지위 = 돈 = 편하고 폼나는 삶'을 위하여 '노동'을 하라고한다.   그러니 '돈을 벌기위해 노동을 하라' 고 강제한다.    

-   우선, 나는 지금의 사회시스템에서, 생존에 불가피한 만큼의 돈을 벌기위해 노력하기는 하겠지만,  '돈'을 벌기위한 이윤활동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영화제작'이라는 노동을 하고싶진 않다.  혐력하는 사람들도 '돈을 위하여'  활동에 동참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3.  설득력을 강화하는 장르적 장치에 기대는 일은  '낯간지럽다'

    - 출연자를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욱 더  '순수하게, 불쌍하게, 매력적이게' 그려내거나

    - 사건들을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욱 더  ' 극적이게, 아니러니컬하게,  역설적이게, 환상적이게, 정교한 인과관계를 암시하여'  재현하는 것 등은  시간이 조금 흐른후에 보면, 참 낮간지러운 일이다.  

    - 만드는 이와  감상하는 이 간의  '보다 친밀하고, 보다 의미있으며 소중한 소통' 은  그런 잡스러운 장치와는 별로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 아닐까?   

    

 4. 이거 지나친 욕망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100년 후에도 지금과 같이,  자본에 의한 계급구분, 소수 인간들의 타 계급과 대지에 대한 착취가 계속되는 사회라면 어쩌지?

      그 전에 자본주의가 전쟁으로 지구의 생명들을 멸종시키는 짓거리라도 하면, 100년 후의 사람들과 소통해보고 싶다는 나의 욕망도 도루묵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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