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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퍼블릭액세스 운동, 민중들의 미디어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민중들의 마당을 투기판으로 전락시킬 자본의 음모에 저항하라

당신들은 자신도 모르게 민중들의 미디어참여권리를 죽입니다.

KBS 17기 시청자 위원회에 드리는 글


                                          2007년 7월 9일 꿈이 (닫힌채널 활동가)


1 ‘이의신청 기각’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철회하십시오.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두 프로그램의 이의제기에 대한  의 답변서가 제작자들에게 왔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 열린채널> 이의신청 기각(문서번호: 시청자서비180-070704) - 시민제작 프로그램<주권으로서의 에너지>의 불선정 조치에 대한 이의신청기각’과 ‘<열린채널> 이의신청 기각(문서번호 시청자서비180-070705)- <우리학보사 사장님은 총장님>의 불선정 조치에 대한 이의 신청의 기각’라는 두 개의 문서입니다.


(지 난 수년동안 ‘불선정 조치’와 관련하여, 수많은 제작자들로부터의 항의와 질의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개별제작자에게 ‘문서’로 답하기는 3년 만에 처음인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 시청자위원회의 답변을 시민제작자가 듣기는 이렇게 어려운 일이군요.)


이 공문들을 읽으면서 이런 고사가 생각났습니다.


‘귤이 회수를 넘어서 탱자가 되었다.’

‘퍼블릭액세스가 KBS에 갇혀서, 전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KBS하청 제작 프로그램으로 전락했다’


저 는 KBS시청자위원회명의로 작성된 위 문서의 내용들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 <시청자 위원회>의 [퍼블릭액세스]에 대한 생각이 정말 겨우 이 정도인가?’ 라는 의아함을 넘어서, 이 분들은 사실은, ‘소신과 양심에 따른 시민의 소리가 KBS에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KBS 편성팀이 파견한 분견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지나친 생각이라고요? 그러면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먼저 이 문서들에 대한 본격적인 해부에 들어가기 전에, 최근 벌어진 [열린채널]을 둘러싼 쟁점들에 각 주체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했는지 분석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2. KBS 시청자위원회는 어느 편에 서있나?


(1)[열린채널] 운영과 관련한 시청자위원회의 견해는 KBS의 견해와 별로 다르지 않다.

- ‘KBS시청자위원회’의 최근 회의록은 ‘이상하게도(!)’ [열린채널]에 별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잘되고 있다’고 적고 있다.


(2)그에 비해, <시민제작자들>과 <시청자위원회>는 견해차이는 (최소한 4개의 중요쟁점에서) 1년내내 평행선을 긋고 있다. 아니, 그 차이는 오히려 벌어지고 있다.


-‘2006 년 가을 <시청협>이  <제17기 KBS시청자위원회 시청자참여프로그램소위> 구성 직후 전달한 의견서/ 11월 <닫힌채널>이 위 <참여프로그램소위>에 제출한 ‘운영개선 요구서’, / 2007년 2월, <시청협>이 <참여프로그램 소위>에 제출한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운영지침 개선안’ 등에 적시한 운영개선 요구들은 모두 기각(?)되었고, 딱 한 가지, 이 프로그램 초기부터 당연히 이루어졌어야 할 ‘송출용 베타테잎(이는 KBS의 재산입니다)을 KBS 스스로 만들기로 한 것’만 개선되었다.


(3)평행선을 긋고 있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1>편성시간의 확대

2>열린채널 운영단위의 확장

3>‘묻지마!’식 선정 - ‘불선정 이유’는 아무도 묻지마!

4>치사하게 운영되는 보증보험문제


(4) KBS의 모든 프로그램의 편성은 KBS가 갖고, 독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유일한 예외(!)는[열린채널](년간 20시간)이다. 이 프로그램의 운영의 법적인 책임단위는 이다. 그런데, 명백히 그 운영주체가 다른 두 조직이 관장하는 프로그램의 운영원칙의 차이는 발견되지 않는다.


(5)프로그램 선정기준의 차이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선정원칙과 방향은 KBS 프로그램이나, <열린채널>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혹은 결코 제시되는 법이 없다. )


(6)‘지원조직’에 불과한 KBS 직원은 ‘시민제작자의 신원을 캐묻는 짓’을 하고도 아무런 성찰의 기색도 없고,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다.


3. <이의신청 기각> 사유들의 근거없음


자 이제 위 공문들이 밝히고 있는 허약한 논리들을 분석해볼까요?  저는 그 분석을 위해서 제작자들이 <닫힌채널>카페와 <인터넷 방송>에 올려놓은 동영상들을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1) 시청자 서비180-070704 가 드러낸 문제

이 문건은 < 주권으로서의 에너지>의 이의 신청을 기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평가’ 때문에 ‘불선정’을 하지는 않았을테니, ‘부정적인 평가’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불선정’의 주요 근거일테니 말입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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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부정적인 평가

 1) ...자신들의 주장만을 드러내고 있어..., 설득력이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봄.

 2) ...단조로운 구성임.

 3) ...민영화가 가져올 수 있는 효율성과 고품질의 서비스 효과 등에 대해서는 조금도 다루어지지 않았음.

 4) ..,균형감각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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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건이 ‘불선정 사유’로 이야기하는 것은 ‘설득력 줄어듬’, ‘단조로운 구성’,‘민영화의 긍정적 측면을 말하지 않음’, ‘균형감각없음.’등 입니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이러한 이유로   ‘<시청자 위원회>란 곳에서 시민의 발언을 막는 것이 합당한가?’ 입니다.


이제 하나하나 따져보죠.


1) ‘설득력’이 란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KBS에서 보는 수많은 오락 프로그램들은 ‘설득력’이 있습니까? 그 ‘설득력’이란 것을 판단할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과 얼마나 공감하게 될 때’,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까? KBS가 가진 거의 유일한 시준, 소위 ‘시청률’입니까?


2) ‘균형감각’이 란 것도 그렇습니다. 무엇이 균형감각인가요? 시민제작자가 ‘매우 은밀하게 추진되는 전력민영화’의 숨은 주체들을 찾아내어, (그들이 누구일까요? 한전 간부들일까요? 산자부나 재경부의 고급관리일까요?) 그분들로부터 ‘민영화를 찬양하는 인터뷰’를 붙여서 병치해야만 ‘균형감각’이 있는 것일까요?  그 ‘균형감각’은 KBS의 수많은 다른 쑈, 드라마, 교양 프로그램들에 얼마나 ‘강요되고’ 있나요?  ‘음식점’과 ‘맛집’ ‘연예인의 사생활’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의 제작자들에게 시청자위원들께서는 ‘균형감각’ 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시나요?

또 한가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무엇에 대해 상대적인가요?  또,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액세스’를 못할 사유가 되나요?


3) ‘특정한 사람과의 인터뷰를 반복적으로 소개하여 단조로운 구성’ 이 라고 합니다. 만일 어떤 주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분이 극소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구 온난화문제를 가지고 ‘앨 고어’가 반복적으로 말한 강의 장면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두고 ‘구성이 단순하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요?  ‘화자 역할을 하는 어떤 유명인사(김용옥교수나 소설가 장정일, 유명개그맨)들이 시종일관 진행하는 수많은 TV와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매일, 매주, 1시간이건 2시간이건 반복적으로 진행되는데, 이에 대해서 시청자 위원들은 ‘구성이 단조롭다’고 평가하나요?

많이 양보하여 아주 극단적인 1Shot의 구성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불선정’ 사유가 될 수 있나요?  그럼 KTV나 ‘국회방송’에서 나오는 정치가들의 ‘장시간 발표’는 어떻게 봐야하나요?


4) 위 문건은, ‘(전력산업)민영화의 효율성과 고품질 써비스 효과에 대해서 시민제작자가 다루지 않은 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시청자 위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걸 왜 시민제작자에게 말하라고 요구합니까?  시민제작자가 ‘아직 단 한번도 가시화되지 않은 국가 기간산업의 민영화’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그리고 그것도 ‘20여분의 시간 안에’ 민영화의 장점을 꼭 언급해야하는 것입니까?


만일 그와 같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전력산업 민영화의 장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다른 시민이 퍼블릭액세스를 통해서 주장을 하도록 유도하던가, 책임있는 해당 국가기관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의도를 국민들에게 홍보해야할 일입니다. 또 막강한 자료접근력을 가지고 있는 공영방송사 직원들이야 말로, 소신있는 판단을 가지고 그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즉, 굳이 따지자면, ‘전력산업 민영화의 계획 및 장점 등’을 알릴 의무는 ‘해당 국가기관’이나 ‘공영방송사 기자들’의 것이지, ‘시민제작자’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시청자 위원회>는 시민에게 그이야기를 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게 하지않았다며 그 시민의 발언 전부를 막고 있습니다. 


잘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말할 기회가 없던 사람들, 말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존재이유인데, <시청자위원회>는 ‘특정한 견해를 반드시 반영할 것’을 ‘불선정’이라는 조치를 통해서, 시민제작자에게 강요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무리 <시청자 위원회>라도, 시민들에게 ‘자신의 견해와 다른 견해를 언급해야만 공영방송사에 접근할 수 있다’ 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헌법적 기본권인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입니다.


(2) 시청자 서비180-070705 가 드러낸 문제

이 문건은 <우리학보사 사장님은 총장님>의 이의신청을 기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역시 ‘부정적인 평가’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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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부정적인 평가

1),학생만이 대학신문의 주체라는 주장도 옳지 않음.... 객관적인 원인상황을 제대로 드러내 보이지 못했음.  

2), 전개상 산만하고 그 심각성이 떨어짐.... 처음에 의도한 작가의 뜻이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못함.

3) 학교신문의 편집권은... 더 다양한 논의가 필요함. 기구의 통폐합은 학교의 재량권이라고 볼 수 있음.

4) 특정 대학신문의 문제를 열린 채널을 통해 논하는 것은 열린 채널의 취지에 맞지 않다고 보며,  또한 주장과 논조가 시비에 휩싸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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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건에 제시된 ‘불선정의 근거’들 또한 매우 적절하지 못합니다.


1) 먼저, <시청자위원회>는 ‘학생만이 대학신문의 주체라는 주장도 옳지 않음...’ 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프로그램이 실제로 ‘학생만이 대학신문의 주체’라고 주장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주장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안 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


2) ‘처음에 의도한 작가의 뜻이 잘 전달되지 않음.’ 이라는 의견 또한 ‘불선정’의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첫째, 우선 시민제작자의 소위 ‘처음 의도’라는 것을 시청자위원들께서 예단하시는게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을 심사하는 데 적절한 일인지 의문이 듭니다. (KBS의 다른 쇼/오락/드라마/교양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도 그 제작자들의 ‘처음의도’에 대해서 예단하십니까?) 둘째, 결국 ‘작가의 처음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시청자위원께서 기대하는 것이 표현되지 않은 것’이 맞는 말이지요. 셋째, 그래서 이는 ‘불선정’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3) ‘학교신문의 편집권은... 더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다. ’ 는 의견 또한 ‘불선정’의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 시청자 위원회>의 견해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해서, 시민제작자의 주장에 대해 ‘불선정’ 조치를 취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더 다양한 논의가 필요한...’ 문제라면, ‘일단 발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쌍방이 충분히 자기의견을 제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 아닐까요? 따라서 ‘...기구의 통폐합은 학교의 재량권이라고 볼 수 있다.’ 라는 의견은 <선정위원>들의 의견일 수는 있으나 이를 ‘불선정’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4)‘특정 대학신문의 문제를 열린 채널을 통해 논하는 것은 열린 채널의 취지에 맞지 않다’는 <시청자 위원회>의 인식은 억지이며, 시청자 주권을 심대하게 위협하는 판단입니다. 거의 모든 시청각 표현물들은, (논픽션 뿐 아니라, 드라마나 오락물 조차도), ‘특정한 사람(들), 특정한 지역, 특정한 동식물, 특정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사’를 갖고 있는 모든 시청각물들은 (‘서사’ 자체를 부정하는 극도의 실험적인 영화를 빼고는) ‘특정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상업적 방송프로그램들은, 주로 특정 유명인, 특정 생물, 특정 연예인, 특정 스포츠 경기, 특정 음식점, 특정 정치가를 카메라 앞에 세우고 있죠. 그런데 왜 시민제작자는 ‘특정 대학신문을 언급하면 안됩’니까?  (저의 추측이지만) ‘힘쎈 대학총장님들이 싫어하기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열린채널]의 취지에 맞는 주제는 과연 무엇인가요?


결국 시청자위원회는 ‘주장과 논조가 시비에 휩싸일 수 있음.’ 이라는 의견을 통해 ‘퍼블릭액세스’와 ‘미디어 민주주의’에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열린채널]은 ‘시비에 휩싸이지 않을 이야기만 방영하는 곳’인가요?  앞으로 시민제작자들은 ‘시비가 없을 것이 확실한’ 내용만 주제로 삼아야 하나요?  이는 다양한 의견과 가치관의 소통되어야할 민주주의사회의 기본정신을 부정하는 논리이기도 합니다.


이 와 같은 판단은 ‘퍼블릭액세스’의 근본취지를 훼손하는 판단입니다. ‘소수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말하도록 하는 것’이 퍼블릭액세스의 취지인데, <시청자 위원회>는 오히려 ‘(항의할지도 모를) 강력한 상대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고 말하는 셈이되어 ‘미디어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미디어구조’라는 이 프로그램의 기본절학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4. 현재 [열린채널]의 운영의 권리침해적 요소들


(1)[시청자위원회]는 ‘재판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민제작자의 양심과 소신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고, 별 기준없이 ‘자의적’인 판단으로 시민들의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는 것.


(2)[헌법재판소]나 [법원]들도 쉽게 하지 않는 ‘예단’을 통해 시민들의 권리제한조치를 과감하게(!)하고 있다는 것.


(3) ‘시민의 발언권에 근거가 애매한 제한’을 가하고 결과적으로, KBS의 낡은 철학에 시민제작자들을 맞추도록 강요하는 점.


(4) 나아가 KBS가 생산하는 엄청나게 많은 프로그램에도 적용되지 않는, 이상한 잣대들을 들어 시청자 제작물이 거기에 맞아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


(5)여전히, ‘2007년 시청자 참여프로그램 운영지침’은, 시청자들의 의무로만 채워져 있을뿐, 시청자위의 권한과 책임에 대해서, 그리고 KBS의 의무에 대해서는 전혀 적고 있지 않다.


(6) 이와 같은 잘못된 조치들은, 나쁜 전례를 확산함으로, 수많은 작은 채널들에서 어려운 조건에서도 ‘퍼블릭액세스 정신’, ‘시민주권 강화’를 위해 분투하는 미디어운동가들과 잠재적인 시민제작자들의 기운을 죽이는 조치라는 것.


5. 퍼블릭액세스 구조에서의 [심사행위]의 의미


KBS는 대외적으로 [열린채널] 이야기만 나오면, ‘세계 유일/최초의 지상파 퍼블릭액세스’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BBC가 ‘비디오 다이어리’라는 이름으로 액세스 프로그램을 프라임 시간대에 할애했었고, 남미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에서도 이를 진행한다고 하니, 그런 수사는 이제 그만두어야합니다.

그런데, 제가 추정하기로 현재의 [열린채널]운영에서 진짜로 ‘세계 유일’ 이라 할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방송사 사장이 임명한 선정위원들만으로 ‘제작자의 의도에 대해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불선정 조치를 취하는 세계 유일의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이고,


둘째, ‘심사기준이 추상적이며, 공개되지 않는’ (아마도) 세계유일의 퍼플릭액세스프로그램 이고,


셋째, 운영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방송사 직원(KBS시청자 써비스팀장)이 ‘시민들은 품질을 갖고 경쟁해야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세계유일의 퍼플릭액세스 프로그램이구요


넷째, 시민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방송사를 위한 보험료를 선납해야하는’ 세계유일의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입니다.


모든 것이 문제이지만, 제가 특별히 언급하고자하는 것은, 세번째 관념, 즉, ‘품질 경쟁론’입 니다. 이 논리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으로 보아도, 매우 불합리한 것입니다. 무릇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경쟁’을 해야 한다면, 그 경쟁자들의 조건들을 가능한한 같거나 비슷해야합니다. 그런데, ‘퍼블릭액세스’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에 처한 모든 시민들, 즉 성별, 연령, 직업, 경제능력, 교육수준, 외모, 주건환경, 영상제작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차별없이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지만 영상을 통한 자기표현의 기회와 그 인프라는 지역과 생활환경에 따라 매우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섬에 살고 있는 분과, 대도시의 중심에 살고 있는 사람, 미디어 교육을 쉽게 접할 수 있고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은 분과, 삶의 많은 시간을 강도 높은 생산직 노동에 쏟아야하는 사람들의 영상물제작 환경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분들이 제작하는 액세스물들에 대해, ‘(상대적인) 품질평가’ 를 하여 등수를 매기고, 점수가 낮은 제작물의 발언권을 차단하는 것은 퍼블릭액세스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입니다. 이는 지극히 안이하고, 관료적인 발상이며, 이 프로그램의 근본취지를 해칠뿐 아니라  모든 시민을 원치 않는 경쟁속으로 몰아넣는 발상입니다.


5. ‘시청자 위원회’에 드리는 권고


(1)[열린채널]을 책임있게 운영하시려면, ‘불선정 사유’를 빨리 정하시길 바랍니다.

- ‘그때 그때’ 다른 불선정의 기준들은 시민제작자들을 힘들게 합니다. 나아가 상업적으로만 치닫고 있는 미디어구조 전반에 걸쳐, ‘시민참여’를 위축시킵니다.

- 시민들은 전업적인 저널리스트가 아닙니다. 공권력을 가진 수사기관이나, 탐정도 아닙니다. 주류미디어 종사자들이나 국가기관들이 해야 할 일, 그리고 그들조차 잘 못하는 일을 시민제작자가 하지 않은 것을 ‘불선정 사유’로 삼지 마십시오.

- 그 불선정 사유는, ‘객관성’, ‘균형감각’, ‘설득력’ 과 같은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공기관이라도 시민의 권리에 제한을 가하는데는, 매우 엄격한 요건에 따라야하는 것이 민주적인 법치국가입니다.

-불선정 사유는 최소화 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성 차별의 노골적 주장, 인종 차별의 노골적 주장, 생명학대 조장’, ‘경제적 이윤을 목적으로 한 간접광고’ 등과 같이 ‘공동체의 기본질서’와 ‘공공성’에 반하는 최소한의 내용으로 한정하여야 합니다.

-불선정 사유는 가능한 한 빨리,그리고 널리 ‘공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엄격히 정한 그 사유에 의해서만, ‘불선정’결정을 하셔야합니다. 이를 넘어서서 시민들의 가치관과 철학에 대해서까지 문제를 삼는 것은 검열이고, 인권침해입니다.


(2) [열린채널]의 시간확장을 위해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 (위원들께서도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 결국 위의 두 공문에서 ‘불선정’의 근거로 제시된 내용들이 ‘자의적’이거나 별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선정’조치의 근거로 제시된 데는, ‘편성시간의 제약’이라는 측면이 큰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래서 매월 10-20편의 편성신청자들 중에 1/3 혹은1/4 정도의 제작물만 선정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 그런데, ‘퍼블릭 액세스’는 보편적인 권리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구성이 단조롭다’는 식의 시청자위원들의 판단에 의해서, 다수의 시민제작자들이 발언을 못하게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이나 권리에 등급을 매길 수가 있습니까? 사안에 등급을 메길 수가 있습니까? 또 시민제작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서로 경쟁을 하는 것’이 맞는 일입니까?


- 그래서, ‘시간확장’이 그런 권리침해를 줄일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 시청자 위원들께서, KBS의 ‘오늘까지의 관행’보다, ‘시청자 주권의 강화’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면, ‘시민참여’가 공영방송의 ‘공공성 강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열린채널]의 편성시간을 확장하여, 공영방송에의 시민접근을 통해 더 많은 미디어약자들의 의견들이 소통될 수 있도록 힘써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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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들의 합창

미디어를 쥔자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자신보다 약해보이는 생명들이 있으면 무시하거나  자연스레 짓밟는거죠.   그래서...

부모님  쌀농사  도우러 가서  일도 하고 영화도 찍고...
흙냄새 풍기는 뮤직비디오 한 편 준비했어요.
배경음악의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샘의 물과 같아요.  그렇게... 그렇게...
 당신은... 당신은....
 하나의  약속처럼
 당신은... 당신은...
 여름날의 아침과 같이...
엷은 미소...

당신은 당신은...

한밤에 울리는 기타소리...
나의 아궁이의 불꽃
나의 빵의 밀...




음악이 좀 거시기 하지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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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와 수정과 쐐기와 프리즘과 거울

‘[닫힌채널]과 같은 활동으로, 철옹성 KBS의 독선적 운영으로부터, [열린채널]을 구출할 수 있을까 ?’ 하고 생각하는 분들께


 

영어 관용표현 중에, ‘더 엣지 오브 더 웻지 (The Edge of the Wedge)’ 라는 표현이 있답니다. 발음이 재미있으니 관용표현이 되었겠지요. (아마, 잘은 모르지만 제가 모르는 언어들 중에도, 그와 유사한 표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이 말을 직역하자면, '쐐기의 끝' 정도가 되겠는데요.

석유나 석탄을 태우는 동력장치들이 생겨나기 전에, 석공들은 거대한 바위를 쪼갤 때, 나무 쐐기를 사용했답니다.


나무토막으로 바위를 쪼갠다니 말이 안 된다구요?

말이 됩니다.


석공들은 바위의 떼어낼 자리에 금을 긋고 일정한 간격으로 정으로 쪼아서 작은 구멍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작은 구멍들에 나무로 만든 쐐기를 박습니다.  그리고는..., 그 나무토막(쐐기)에 날마다 조금씩 물을 주는 거죠. 그러면 나무는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물을 머금어 팽창을 합니다.


그렇게 몇 날 몇 밤, 혹은 몇 개월 동안, 나무쐐기들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합니다.

석공들은 기다립니다. 중간에 비바람에 쓸려나가거나 햇볕에 말라 부스러져버리는 쐐기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또 다른 쐐기를 갖다 박고, 때때로 물을 줍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쐐기들의 미세한 숨쉬기 운동은, 완고한 바위조직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러던 어느 날 ,

바위는 예고없이, 쩍 ~ 하며 쪼개집니다.


저는, 열린채널 도입 육년 째, 2006년 9월12일, 국회의 토론회에서, 방송위와 KBS시청자 서비스팀 실무자들의 '육성'을 처음으로 들으면서,  ' 앗! 그들은 거대한 바위로구나 ! 우리의 열린채널(수정)이 그 단단한 바위 속에 갇혀 있구나 !'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린채널이 숨이 막힐만하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그 단단한 바위로부터 떼어내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위를 완전히 쪼개는 것이 무모하다면, 또 그럴만한 연장도 힘도 없다면 무엇을 이용하여 열린채널을 구출하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쐐기'라는 관념이 제 머릿속을 떠돌았나 봅니다.

무모하게 파괴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소중한 것을 떼어내는데 사용되는 도구 !

조용히 숨쉬는 나무토막 !

쐐기! 


<닫힌채널>은, 이제 생긴지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뭐 힘이 쎈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곳의 사람들은, 무모하게도,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에 갇혀 있는 석영을 잘라내려 합니다. 

그 걸 잘 다듬어, 우리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거울과 프리즘을 만들려고 합니다. 

 

프리즘은 우리에게, 그냥 보아서는 하나로만 느껴지는 빛의 세세한 결을 보여줍니다.

‘음... 거기에 보랏빛이 있었구나.  그래 너는 초록빛이었어... 너는 우리가 겨우  일곱 빛깔로만 이름붙인 것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고운 빛깔을 가지고 있구나...’

 

거울은 우리에게 성찰의 시간을 줍니다.

‘그래, 나의 모습이 이렇구나. 나의 뒷모습이 이랬었구나. 내가 사는 동네가 이런 곳이었구나. 내 옆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구나.’


<닫힌채널>의 사람들에겐 다소 조급한 마음도 있습니다. 빨리 <열린채널>을 구출하여 우리 공동체의 세세한 결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프리즘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기왕의 방송물들이 거의 반영하고 있지 못한 보통사람과 작은 공동체들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택 대추리에서 멀쩡한 집을 부수려고 국방부가 사용하고 있는, 거대한 쇳덩이 기계들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막강한 힘을 가진 연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거대한 기계팔과 쇳덩이 해머를 이용하여 무지막지하게 때려대거나 쪼아대는 크레인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구요. 우리는 그럼 무엇을 가지고 <열린채널>을 구해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끝이 뾰족한, 숨쉬는 작은 나무토막' , '쐐기'가 이런 때 필요합니다.

' 작은 정! 숨쉬는 나무토막 ! 물 ! 그리고 기다림! ' - 이것으로 바위를 떼어낼 수 있습니다.


속도, 그리고 경제적 성과에만 취한 사람들은 바위에 박힌 쐐기의 끝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지 모릅니다. 그 것이 무슨 힘을 가지고 바위를 쪼개느냐고 비웃을 수도 있구요.

하지만 그 작은 나무의 끝은, 장차 벌어질 거대한 균열과 변화의 발단이 되는 것입니다.


쐐기의 끝 !


저는 <닫힌채널>에 참여하는 분들이 KBS와 방송위원회라는 거대한 바위에 박힌 작은 쐐기의 끄트머리라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해머나 포클레인같이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런 존재는 결코 아니지요.  그리고 <닫힌채널>의 사람들은 그 동안의 활동을 통하여, ‘바위를 깨는데, 쐐기들의 존재와 그들의 인내는 불가피’하단 점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다 정의로운 미디어를 꿈꾸며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다음과 같이 생각하자고 권유합니다.


‘와! 신난다!’

‘우리가 물을 머금어 숨을 쉬고, 지치면 오그라들기도 하다가... 다시 물을 머금고... 다른 구멍에 또 다른 쐐기가 되고... 뭐 그런 일이 꾸준히 계속되면, 어느 순간 바위가 쩍하고 깨지는 거야! ’

‘돌 속에 갇혀있는 열린채널을 구출하는 거야. 그리고 그것으로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과 서로의 마음의 스펙트럼까지 보여줄 프리즘을 만드는 거야.  정말 신나는 일이야.’   


자! 이제, 이 쐐기들의 운동에 흥미를 느끼는 분들은 [닫힌채널]로 오세요. 그게 많으면, 바위를 깨는 것이 좀 더 쉬워지겠죠?


여기에 한번 가보세요. (http://cafe.naver.com/shutchannel.cafe)

으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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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짓거리라고? - 그 것부터 할란다.

 

‘닫힌채널’ 활동이 지나치게 ‘순진한 짓거리’ 아니냐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2006.12.22.          꿈돌이



닫힌 채널 운동이 혹시 ‘철벽에 발길질 하는 격 아니냐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외부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조금 더 KBS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빨리 쇼부를 봐야되는 것 아냐? ’ 라고 조언하는 이들도 있어.


이러한 의문, 혹은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 같아.

KBS측의 ‘비겁한 태도’, 시청자 위원회의 ‘어정쩡한 반응’ 등에 당연히 화가 나고, 화를 내야겠지.  이것은, 지금까지의 닫힌채널의 열정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KBS라는 거대한 성안에 사는 한 두 사람에 의해서조차  쉽게 조롱되는 상황에서 오는 황당함때문일 거야.


나는 전에 우리가 ‘거대한 바위에 나무 쐐기를 박아 열린채널을 구출하려고 한다’ 는 말을 한 적이 있어. 분노뿐 아니라 인내와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일이겠구나 생각하고, 이를 즐기며 운동하자는 것이지.  


금년 12월 14일에 KBS앞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쐐기를 하나 더 박으려 갔는데, 나쁜 놈들이 와서 막 지랄을 떤 거지. ‘왜 남의 바위에 와서 자꾸 찝적대는거야? 니들 동네로 가!’ 라면서...


하지만, 화를 내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무력함, 혹은 비겁함의 원인을 성찰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어.

‘닫힌채널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지 ?’ 하고 고민하는 많은 친구들과 함께, 고민해 보고 싶어.  그래서 여기에 글을 쓰니, 친구들도 의문, 반론, 감정, 생각 들을 담아 소통하였으면 좋겠어.  


오늘은 우선

‘KBS를 비롯한 주류미디어와 그 언저리에 빌붙어 있는 나쁜 담론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해보겠어.   


성급하게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열린채널의 문제를 '사회정의/ 미디어정의/ 민중의 이익' 이란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바라보기가 겁이 나고, 결단력있게 행동하지 못하는 거야.  그들이 탄 배가 서서히 난파하고 있는데도 말이지.  [닫힌채널]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싱싱한 영혼들은 짧은 삶의 경험 속에서도, 이미, [열린채널]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황당한 일들은 단지 [열린채널]의 문제가 아니고,  미디어 전반의 '공공성 약화' 의 경향 속에 있는 문제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어. 우리들은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을, 그들은 몰라.  이미 ‘상업주의의 악령’에 사로잡혀서 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하고, ‘이익집단 간의 이익다툼’ 이라는 시각에서 한 발짝도 더 못 떼고 있는 거야.  아니면 우리의 의견을 철저히 씹고 있는 건가?  


그런데 왜,왜, 그렇게 되었을까?


10년 전만 해도, 비선형 편집이란게 없었어. DV 라는 (지금은 범용화된) 손쉬운 매체도 없었고, 방송사 외부의 사람들에겐 편집이란 것이 불가능했어. 그래서 시민들이 영상미디어를 다루고 이를 통해 다른 이들과 소통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할 수가 있지...  그래서,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독점적으로 영상미디어를 다루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각되었고...  그때는 영향력 있는 채널이란 게 지상파 밖에 없었잖아. 그래서 방송사들은 거대한 범선처럼 적당히 정치권력의 바람을 타면서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를 즐기게 된 것이지.  민중들은 여전히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조각배에 매달려  힘겨워하거나, 조그만 섬에 고립되어 있거나 했지만,   큰 배를 몰면서 즐기는 것은 자신들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거야. 

  

  내 생각엔, 방송사 선원들이  의식이 아직 성장을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거야.  큰 배에 타고 있으니,  많은 다른 사람들이 나무판자를 타고 있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건, 그게 별로 안 보이는 거지.  그리고 거대한 배를 타고 즐기는 것은, 자신들을 포함한 몇몇 힘있는 사람들만의 일이라 생각하게 된 거야.


그런데 이미 미디어의 바다에 변화는 일어나고 있었어.

돈을 엄청 가진 그룹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방송사를 갖고 싶어했고,  또  방송이란 걸  사고팔기  좋게 만들면, 엄청난 돈벌이가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린거지.  이들은 호화 유람선을 만들어 장사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몸은 날렵하고 돈벌이에는 능한 쾌속정들이 여기저기 만들어 놓았어.   이 때, 그 거대한 범선의 선원들은,  아직 배를 타지 못한 대다수 민중들의 삶에 대해 돌아보고, 폐쇄적인 자기 배를 열어, 어떻게 다양한 서민들이 모여서 건강한 의견들을 나누는 광장으로 개조할까를 고민했어야 해.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무지랭이들에게 빼앗기는 것’ 이라고 생각했나봐.  그래서 그들은 배가 없는 사람들에게서 거둬들인 시청료를 가지고 엉뚱한 방향으로 열을 올렸어.   ‘우리도 다른 유람선에 못지않게 장사 잘 해.  왠지 알아?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아마추어들이 감히 덤비면 안 돼. 배 밖에 있는 놈들은 감히 우리 배를 넘 보지마. 돈버는 데 지장이 있단 말야...’  이런 식으로...

그래서 그들은 줄곧 자기들이 ‘국민의 방송’ 이라고 떠들어 왔지만, 지금 거기에서 발언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강남출신, 빵빵한(?) 대학교 출신, 고액 연봉자, 부자들, 예쁜 여자들’이 거의 다인 방송사가 되어버렸어.   그들의 표현을 인정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국민’이 아니라고 봐야지... ‘양심적 병역거부자, 성소수자, 이주자, 인간이 아닌 생명, 청소하는 아줌마, 대추리 주민’ 은 그들이 말하는 ‘국민’이 더더욱 아닌 거야.


그렇게 그들이 시청료를 받아, 다른 이들의 참여를 기를 쓰고 막으면서, 돈벌이에만 열을 올리는 동안에 자본들은 서서히 미디어의 바다를 배회하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어.  이미 그런 경향이 농후하지만,  앞으로는 상업적인 미디어 권력의 힘이 훨씬 막강해질 거야.   10여전 전 미디어를 지배하던 힘이 정치권력이었다면, 이제부턴 재벌들 판이 되어가는 것이지. 그런 상태인데도,  KBS직원들은 그러한 추세를 모르고 (혹은 그런 속에서 자신의 이익 지키는데만 급급해서 - 이런 것들 ‘맹목’이라고 부르지, 눈이 먼 것 말이야) 아직까지도 자기 것 챙기기에 바쁜 거야...


'열린채널'이 웬만한 외부의 힘이 넘볼 수 없도록 '시민의 것'이 되는 것, 그 시간도 빵빵하게 확장되고, 그래서 이 곳을 ‘우리 공동체 내부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민중들이 서로의 생각과 삶을 소개하고 소통하는 광장으로 만들어 내야’  시민들의 건강한 목소리가 지켜질 거라는 생각을 못하는 거야.   KBS의 직원들은 ‘열린채널’을 ‘자기 것’으로 가지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그것이 진짜로 자기 것이 될 줄로 착각하고 있어. 이것은 마치 ‘달’이나 ‘태양’을 자기만 소유하려고 생각하는 것처럼 아주 못되고 어리석은 짓이야. 


시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더욱 더 심각한 것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들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어.  [열린채널]과 같은 프로그램이 시민들의 공유자산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면,  그것은 많은 시민들의 힘으로 지킬 수 있어.  그렇지만 그것이 생각없는 KBS의 것이 된다면,  더 많은 돈을 가진 자본들에 쉽게 빼앗기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야.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영혼을 나누어야 할 공간이  ‘돈벌기 위해 장사하는 곳’으로 쉽게 전락해 버리는 거지. 누구에게?  돈많은 자들에게...  


거짓말 같냐구? 

하나의 사례를 이야기 해볼께.


얼마 전, KBS에서 5년 동안 지속되었던 ‘독립영화관’ 이란 프로그램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어.  속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것은  KBS라는 회사의 편성전략에 따라 벌어진 일이 결코 아니래.  그것은 방송사 내의 한 PD가 누군가의 청탁을 받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고자, 그 프로그램을 끼워넣기 위해 그냥 생각없이 ‘독립영화관’을 자른거래.  즉, 이곳은 (매우 좁긴하지만) 시민들이 우리 사회의 다른 사람의 감성과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창이었는데, 그것이 지녔던 문화적, 공공적 가치는 깡그리 무시된 채,  한사람의 직원이 쉽게 팔아 넘겨버린 거라고 할 수 있지.   KBS시청자 써비스 팀장이란 사람의 말을 떠 올려보면,  이 것이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들의 손에 맡겨질 때, ‘열린채널’ 또한 비슷한 운명 속에 있는 거야. 


다들 알다시피, ‘방송 통신’ 판은 이미 ‘신자유주의’ 라는 돌풍에 휩싸여, 크고 작은 자본들의 이윤각축장으로 변해버린 상황이고, 돈벌이의 안개 속에 둘러싸여 있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게 되겠지만, 막강한 초국적 미디어 자본들이 ‘공공성 파괴’라는 거대한 빙산을 몰고 올 거야.  ‘공영방송’이라는 허울을 반쯤 쓴 채, 배타적이고 관료적인 구조 속에서,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열심히 돈벌이에만 매진하는 KBS도 곧 그 빙산에 맞닥뜨릴거야.    


불행하게도 거대한 범선의 선원들은  요즘 자기 자신의 개혁과 우리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무지한 채,  자본가들의 흉내를 내고 있어.

‘돈 안 벌리는 것 갖고 컨텐츠를 만들거나 방송하지 마!’ 

‘더 효율적으로 더 잘 팔아먹기 위해,  더 선정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어...’


이렇게 KBS는, 시민의 광장이어야 할 곳에서 시민들을 몰아내고, ‘잘나가는 상품의 공급자와  돈있는 고객’들만 열심히 모으고 있는 중이야.  결국 위기에 처할 때 누가 자신들을 지켜줄 줄도 모르고...  아니, 뭐, 좀 더 돈에만 눈이 먼 자들은, 공공의 이익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빵빵한 재벌에게 KBS가 통째로 팔려, 자신의 더 두툼해진 월급봉투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열린채널’은 앞으로의 미디어 전반의 공공성 확보 투쟁에서 의미심장한 거야. 

지금은 비록, KBS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몇몇 직원들에 의해서조차 휘둘리고 유린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어쨌든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곳이고, 저들도 함부로 하다간 다친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니까... 그래서 ‘열린채널’을 좀 더 확고하게 시민의 품으로 돌려놓아야 해. 더 늦기 전에 말이야.


나중에, 미디어판에서 상업적 압력이 거세어질 때,  KBS 직원들은 과연 무엇으로 ‘공공성 사수’를 외치며 싸울 수 있을까?  무엇으로 ‘시민들의 광장이어야 할 곳이 재벌들의 쇼핑센터로 전락하는 상황에 맞설 수 있을까?’  이미 스스로의 손으로 ‘시민들의 광장’을 ‘슬럼’으로 전락시킨 그들이, 이윤에만 눈이 먼 상업자본들에 맞서 ‘시민들의 쉼터를 큰 손들의 투기판으로 만들지 말라!’라고 과연 맞설 수 있겠어?  그 광장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소중한 공간으로 생각하는 시민들을 다 쫒아버리고 나서, 그들은 또 어떤 궁색한 변명을 할지 참 궁금해. 

 

왜 우리의 소중한 광장을 갈아엎어 대형 쇼핑몰을 만들려는거야?’ 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다수의 시민들의 저항이 없다면, ‘열린채널’뿐 아니라  KBS 전반의 공공성을 지켜내는 것도 전혀 희망이 없는 일이야.  그래서 [열린채널]을 지켜내는 운동은, 향후 kbs에 닥쳐올 위기에 맞서 시민들의 힘을 모으는 운동이기도 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은 해.  그런 일들은 거액의 연봉을 받는 지들이 해야지 왜 우리가 하는 거냐구?) 

  

하지만 그들은, 그들 앞에 거대한 빙산이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당장의 경제적 이익에 눈이 멀어 질주를 하고 있는 타이타닉 호의 선원들 같아.  


이런 상황을 볼 때, 지금의 [닫힌채널]의 운동은,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 뗏목을 타고 나침반과 직관에 의존해 나아가고 있는 상태이지만, 단지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사회 미디어 전반의 공공적 혁신을 위한 하나의 불씨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 


우린 지금 당장  '방송은 재벌들의 돈벌이가 아니라, 민중의 것이어야 한다' 라는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고 있지만, 적어도 그 사실을 끊임없이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지.

'KBS는 KBS 직원들 것이 아니야. 그것은 모든 민중들의 것이야. 지금부터라도 전파를 보다 공정하게 나눠 써야 해.  열린채널을 다른 많은 쓰잘 데없는 외주프로그램처럼 전락시키는 것은 범죄야.  이는, 향후 공공성 쟁취 투쟁에서 (프로그램 영역에서) 최후의 보루가 될지도 모르는데, 이를 알아서 뭉개버리는 미친 짓이야. ' 


지금 우리는 이런 암시와 주장을 계속하고 있는 거여.


방송사에서  근무하는 어떤 진보적인 사람의 말에 따르면, 2-3년 후면, 방송통신 융합국면에서 통신 재벌들이 전 미디어 판을 장악하게 되고, 방송사 내에서  미약하게나마 존재해왔던 비판적/진보적 목소리는 종적을 감출거래. (정말 그럴 것 같아. 지난해인가 한겨레신문에서 읽었는데,  KBS 직원들 내부 설문조사를 했더니, 가장 KBS에 해로운 프로그램이 '인물 현대사'였대. - 맙소사 !!... 내가 생각할 때, 이 프로그램은 점점 더 상업화되어가는 KBS프로그램 중에서 정말 몇 안되는 괜찮은 프로그램이었어...)


좌우지간 힘이 세진 방송통신 재벌들은, KBS의 독점적 지위(이 요상한 공영방송사는 연간 5000억의 수신료를 걷어 쓰고 있으면서도, 내부개혁을 할 생각은 도통 안 해. 그러면서 광고 주에 잘보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에 대해 왜 차별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누리느냐고 계속 압박할 것이고, 채널들의 폭증에 따라 엄청난 변동이 일어날 거라는 거야.


이런 상황인데, 즉, 빙산과의 충돌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인데, 이를 대비하며 저항하는 그룹은 거의 보이지 않아.


이런 와중에 닫힌 채널의 활동이 있는 거야.


우리들은 아직 사람도 많지 않고, 돈도 없고, 사회적 발언권도 작은 사람들이지. 사회운동 전체로 볼 때 매우 미미한 흐름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내 생각엔, 미디어 영역에서는, 우리만큼 '당당하게, 자신의 경제적인 이익에 묶이지 않고, 발랄하게, 새롭고 젊은 감성으로, 기존의 어떤 권위들에도 주눅들거나 눈치보지 않고' 저항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그룹은 없는 것 같아.  그래서 소중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앞으론 이런 방식의 저항이 더욱 의미있어질 거라고 생각해. 아직 영향력이 미약하고 분절적이고, 공백과 실수가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저기서 미디어로 저항하고자 하는 새로운 쐐기들이 생겨나고 있잖아. 이 사람들이 앞으로 맞설 큰 변동기를 대비하면서 저항의 훈련을 쌓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중요한 것은,

‘관성적이고 소모적이지 않게 운동하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해.

좀 더 '문화적' 이고, 좀 더 '미디어적'이고, '좀 더 원초적'이고, ‘좀 더 뻔뻔하고(당당하고)’, '좀 더 발랄한' 방식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그런데 그게 뭘까?


오늘은, 돈벌이에 눈이 먼 거대한 배의 선원들의 이야기를 했어. 

다음번엔 우리들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 이야기를 해 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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