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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
@ 내용
일본의 도심에서 아버지가 각기 다른 4명의 아이들이 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아이가 많으면 집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첫째 아키라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집 안에서 조용히 숨죽여가며 살아간다. 이들은 학교도 다니지 않으며, 심지어 빨래를 해야하는 둘째 쿄코를 빼고는 베란다에도 나오질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집 안에서 놀이도 하고 집안일도 하며 재밌게 살아간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일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시던 어머니 마저도 아이들을 버리고 결혼을 하여 떠나간다. 이제 아이들은 첫째 아키라에 의지해서 살아가야한다. 하지만 간혹 보내져오는 어머니의 돈은 네 아이가 살아가기에 턱없이 모자라다. 물, 전기, 가스가 모두 끊긴 채 아이들은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공원에서 물을 떠다가 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목숨만 유지한 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불행이 찾아온다. 막내 유카가 의자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불행에 익숙한 아이들은 유카의 죽음 역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 감상
<아무도 모른다>는 고도의 경재성장을 이룩한 일본의 아이들을 추모하는 영화 같다. 여기에는 여러 모습의 어린 피해자들이 등장한다. 부모 모두에게 버림받은 아이들과 이지메에 지쳐 학교를 가지 않는 아이, 원조교제를 통해서 돈을 구하는 아이, 집에 쳐박혀 게임에만 집착하는 아이, 또래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물건을 훔치는 아이. 이 모든 슬픈 군상이 경제 대국 일본의 현주소이며 실상이다. <아무도 모른다>가 실제 사건은 극화 시켰다는 점이 더욱 현재의 일본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이 아이들을 피해자로 만든 건 어른들의 무관심이다. 어른들은 돈을 벌기에 급급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아이들을 보살펴야한다는 도덕적 의무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아이들을 이용하지 않음 그것으로 다행이다. 이 영화에서는 원조교제를 하는 어른. 13살 꼬마에게 ‘난 네 엄마와 sex할 때 콘돔을 꼈다’라고 변명하는 어른. 4명의 아이를 두고 도망가는 어른들만 존재할 뿐이다. 이들은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의 생각과 생활, 그들이 받는 고통을. 집을 구하기 위해서 큰 트렁크 속에 담겨져 이사를 왔던 아이들의 존재를 집밖(사회)에서는 아무도 모르듯이, 일본의 아이들의 실상을 어른들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는 슬픈 현실을 매우 건조하고 담담하게 담았기에 매력적이다. 감독은 ‘가족주의’ 나 ‘온정주의’, ‘연민’등에 빠지지 않고, 항상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다. 만약 감독이 경계를 풀고 아이들의 심정에 동화 되었다면, 아마 <아무도 모른다>는 최루성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되었다면 아마 관객은 펑펑 울었겠지만, 극에서 그리는 아이들은 그저 불쌍하고 애처로운 존재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는 사실을 왜곡한다. 아이들은 단순히 불쌍한 처지가 아니라 피해받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거리두기는 영화 곳곳에 등장한다. 거리두기는 아이들의 슬픈 모습을 역설적으로 가볍고 경쾌하게 그려내기도 한다. 베란다에 나갈 수 없는 셋째 시게루는 실수로 장난감을 베란다에 떨어뜨리게 된다. 이미 어머니는 집을 나간 상황이지만 시게루에게 베란다(밖, 세상)는 금역의 공간이다. 그렇기에 시게루는 베란다 문턱에 엎드려 슬리퍼를 들고 팔을 뻗어 장난감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이런 시게루의 행동을 보면서 나오는 건 눈물이 아니라, 귀여운 모습에 대한 웃음과 현실적 고통에 대한 한숨이다. 또 4명의 아이들이 어머니가 없는 집 안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집 밖으로 살금살금 세상구경 나가는 장면은 즐겁고 통쾌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영화는 아이들의 어려운 상황을 애처롭고 불쌍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인 웃음과 이에 따른 한숨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모습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한국적 정서로는 ‘때려죽여야 마땅한’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친근하게 묘사된다. 아이들은 어머니를 좋아하고, 어머니 역시 아이들과 재밌게 논다. 첫째 아키라와는 마치 고민을 털어놓는 둘도 없는 친구 같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크리스마스에 오겠다는 작별의 인사를 한다. 한 방울의 눈물과 망설임도 없이. 그래서 이별도 가볍고 담담하다.
이처럼 <아무도 모른다>에서 감독은 카메라를 인물로부터 거리 두었으며, 매우 객관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감독은 매우 영리하다. 감독은 슬픈 소재의 최루성 영화가 가져다주는 눈물 뒤의 허망함과 기운빠짐의 폐해를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슬픈 톤으로 갔을 때 아이들의 모습이 불쌍함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음 역시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시선과 감정의 거리를 둠으로써 일본 현실 속에서 아이들이 받는 피해를 충실히 그리고 지치지 않게 보여줄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에 많이 웃음 지었다. 그리고 그 웃음의 곱절만큼 한숨 지었다. 하지만 한 방울의 눈물도 나지 않았다. 흘리지 않은 눈물은 아마 세 곱절의 오랜 여운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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