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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25
    양순이와 이별
    봄밤
  2. 2007/01/23
    사랑이의 언니-양순이
    봄밤
  3. 2007/01/08
    작은 점이...
    봄밤

양순이와 이별

양순이가 우리 집에 함께 살면서 이제 내게는 또다른 집착의 대상이 존재하게 됐다.

양순이는 너무 어려서 사료를 불려서 이유식처럼 만들어먹였는데

멸치, 버섯가루를 내서 섞어 주면 잘 먹었다.

어디를 가든 양순이를 데리고 다니고 언제든 부비며 살았다.

단, 그건 주말휴일이나 저녁시간에.

양순이는 외로웠나보다.

우리가 없을 때 혼자 남겨진 양순이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우리집 옆을 지날 때마다

엄청 짖고 누군가 오기만 하면 크아~앙 이빨을 드러내며 적의를 드러냈다.

 

때로는 남편이, 때로는 내가 사는게 힘이 든다고 술을 마시고 와서는

양순이를 붙잡고 울곤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내게 우울증이 시작된 듯하다.

그땐 남편이 내 술마시는 모양을 수상히 여겨 술먹지 말라고 고작 닥달을 해대었다.

 

성명서를 쓰거나 피켓을 만들거나 선전전에 나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게

대부분인 일이 끝나기 무섭게 집에 들어온 나는, 집 앞 수퍼에서

소주 한병 또는 두병을 사들고 와서 컵에 따라 단숨에 마시고 나서 저녁을 지었다.

괜히 무서웠고 괜히 슬펐고 눈물이 났고 가슴이 아렸다.

 

그때 양순이는 나의 이 우울한 모습을 모두 보았고

순전히 나의 생각이겠지만 나를 어느 정도 동정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가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순이는 나보다는 남편을 아주 잘 따랐다.

그게 참 서운했다.

내가 술독과 우울의 늪에 빠져있을 때 남편은 노동조합 일로

내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는 나를 더욱 지치게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는 못살겠다, 싶어 일을 그만두고 영성수련원을 가고

결혼을 하자고 맘을 먹었고...결혼을 하고 이젠 다르게 활동을 해보자

그렇게 다짐하면서 살아가다가...

사건이 터졌다.

그 전부터 진행되던 재판이 거의 일년을 끌었는데

내가 법정구속된 거였다.

남편과 양순이는 뭘 먹고 사는지, 똥오줌은 잘 치우고 사는지,

그 모든 잡스러운, 생의 대부분인 것들에 대해

걱정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때로 남편보다 양순이가 더 눈에 밟혔다. 작고 힘없으니까.

그렇게 우리가 길들였으니까...

마당에서 노는 양순이의 사진을 독방 한면에 붙여놓고..

우리가 함께 있던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양순이와 남편, 내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살지는 않았구나, 느꼈다.

만약에 자식이 생긴다면 대략 이런 모습이겠구나...생각했다.

 

만기 일주일을 남겨놓고 가석방으로 나와서 만난 양순이는 누구보다 더 반가웠고

양순이도 나를 바로 아침에 만난 듯이 그저 좋아했다.

보드라운 털과 커다란 눈, 가냘픈 다리..

역시나 예전처럼 내 손을 잘근잘근 아프게 깨무는 양순이..

 

남편은 내 출소와 함께 회사를 정리했다.

동시에 그의 노동운동도 그렇게 정리되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그걸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피하고 싶었던걸까)

삶에서, 운동에서 커다란 성벽을 쌓아갔다.

 

우리 셋은 날마다 낚시터로 휴양림으로 바다로 도시락을 싸서 놀러다녔다.

그렇게 다닌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낚시터에서 만난 발바리와 양순이는 눈이 맞았다.

2004년 가을 내내 우리는 지치도록, 돈이 떨어질때까지 놀았고 양순이는

임신을 하고 강아지를 낳았다.

 

행운과 행복이 가득하라고 운이 복이 그렇게 이름지었다.

전세 기간이 다되고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서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양순이는 더 신경질적이게 되었다. 내 우울증이 깊어갈수록 양순이는

더욱 신경질적이었다.

나는 화가 나면 양순이를 때리다가 또 화가 가라앉으면 미안하다고 했다가

남편이 보기 싫으면 또 양순이를 째려보다가 저것들이 똑같아 똑같아...

그렇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운이 복이는 낚시터 자기 아빠의 집에 다시 보내졌고, 그 뒤로 누군가의 집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그 눈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사랑스러운 새끼들을...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새해가 오고

남편은 막노동을 하고 나는 새로운 일을 찾아보기 위해

여기 저기 어슬렁댔다. 그러다 미술치료를 공부하게 되었다.

평생교육원과 연구실을 다니며 정말 신나게 공부했다.

그러면서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 왜 이렇게 알 수 없는 기운에 휘말려 살고 있는지

조금씩 보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기운차리지 못했다.

 

익산에 있는 한 단체에서 이주여성의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에서

잠깐 자원봉사도 했다. 애초 그 일을 '일'로 하고 싶었지만

그 곳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나를 받아들이기 껄끄러워해서

잠깐 아이들 공부를 봐주고 미술지도를 해주고(사실 두세차례밖에 못했으니

지도를 해줬다는 것은 참 미안하고 어정쩡한 말이다.)

같이 놀아주었다.

남편은 전국 이곳 저곳으로 일을 하러 다녔고

나는 낮에는 그나마 인간답게 살았지만

저녁이 되면 철저히 혼자가 되었고 술에 만취하면 아파트 복도에서 저 아래

1층을 보며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까, 한 십층은 넘어야 되겠구나'

날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술김에 몇번은 죽을 뻔 했다.

 

그러다가 덜컥,

아기가 생겼다.

양순이와 우리들의 행복하고 슬프고 가여운 시간은 여기까지 였다.

아기가 생기자마자 나는 그동안 양순이와의 모든 시간은 뒤로한 채

양순이를 시댁에 보내자고 남편에게 제안했다.

시댁에서는 양순이를 싫어했고 양순이를 키울 누군가에게 보낸다고 했다.

 

아기도 생명이고 양순이도 생명인데...

아기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양순이를 그렇게 버렸다.

 

나중에 시아버지에게 들으니 양순이는 모악산 뒷자락에 사는

어떤 농부의 집에 보내져서 다른 숫컷 발바리 두마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고 했다.

 

핸드폰에 찍힌 양순이의 사진을 지울 수가 없다.

핸드폰 화면이 고장나서 폴더를 열면 화면이 어두워지지만

핸드폰을 바꿀 수가 없다.

아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울한, 잊고 싶은, 가엽고 불쌍한 내 기억을

그렇게 버리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위안이 된다.

 

피부병때문에 비싼 사료를 먹고 특이한 샴푸를 썼다.

귓속에 약을 발라야 해서 목도리처럼 넓게 두르는 챙(?)과 입마개와

약, 샴푸, 가위, 임신했을 때 먹었던 칼슘제, 양순이가 좋아했던

과자 ... 아직도 서랍에 그냥 있다.

고물고물 기어다니고 뽈짝뽈짝 뛰는 사랑이를 보면

양순이 생각이 더욱 난다.

이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억들..

 

양순이가 살아있다면 아프지 않고 잘 먹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서

넓고 넓은 산에서 맘껏 자유롭게 다니며 살기를.

죽었다면 다시 우리가 어디에선가,  꼭 이세상 아니어도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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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의 언니-양순이

딸 사랑이 전에 또다른 딸이 하나 있었다.

 

세살 된 발바리인데 남편과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우리 셋은 같이 살았다.

2003년 봄에 남편(당시는 동거남)네 집에 갔다가 아침산책을 하던 중

새 파는 가게를 우연히 지나다가 구경이나 하자고 들어갔다.

그런데 주인 아저씨 친구가 맡겨놓았다는 강아지들이 종이상자 안에 있었다.

꼬물거리는 강아지들 대여섯마리는 우리 눈길을 쏙 잡아끌었다.

태어난 이,삼주일 정도 지났다는데 보송보송하고 작은 것들이

얼마나 이쁜지 헤벌레 바라봤다.

한참 고물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정많은 남편은 그 중 한마리를 돈을 주고 데려왔다.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마트 앞에서 나는 물건을 사고 나왔는데 나를 기다리던

남편이 이름을 지었단다.

그 당시에 시골소녀상경기? 뭐 그런 드라마가 유행했는데 장나라와 장혁이 주인공인

드라마였다. 가난하고 배운것없는 양순이(장나라)가 돈많고 거만한 장혁과 만나

잘~된다는 뭐 그런거였는데 마트 앞에서 어떤 애완견(말그대로... 염색과 치장, 옷으로 감은)

을 데리고 가던 아줌마가 "그 강아지 품종이 뭐예요?" 그러더란다.

남편은 "발바리래요~"대답했는데 아줌마는 말이 끝나기 전에 총총 사라졌다.

이름있는 애완견이 아니어서 서러움 받지 말고 양순이처럼 힘차게 잘 살아라~는

뜻으로 그 강아지는 양순이가 된 거였다.

집에 오는 길에 양순이의 집과 밥그릇, 샴푸, 빗, 사료 등 한살림 사왔다.

 

그때에는 마당과 옥상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을 때여서 이 녀석 엄청 신났다.

개 한마리 키우는게 아이 하나 키우는 것 못지않다는 걸 강조했고

똥오줌은 누가 치우냐, 목욕은 어떻게 하냐 뭐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남편은

그저 자기가 다 한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아무튼 양순이는 그 가게에서 엄청 얌전한 강아지였는데 형제들에 치인 탓이었는지

우리와 함께 살면서는 온갖 말썽을 다 부렸다.

 

(그런데 밖에서 키울 생각은 왜 못했을까. 곰곰...)

 

오늘은 여기까지만..히히

울 애기 사고치려고 한다...뭘 해도 예쁜 내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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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점이...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잘도 가는 시간.

컴이 고장났다. 바이러스 몽땅 먹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것을 2주나 방치하다가

몇일 전에 치료했다.

미안타..부려먹을 때는 마구 부려먹고는...

 

딸 사랑이가 어느새 40주가 지났다. 나와 만난 지 벌써 80주.

몇년 전 원치않는 임신으로 두 번의 수술을 했던 나는 아기가 덜컥 생기자

두려움에 몸둘바를 몰랐다.

이번에는 잘 키우자 뭐 그런 생각과 아기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뒤죽박죽 되었다.

 

초음파로 본 5주의 아기는 아주 작은 점이었는데 이전에 수술하기 위해 찾은 병원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더이상 작은 점이 귀찮은 혹처럼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한 때 내 몸에 깃들었던 작은 아이..예리한 쇳덩어리에 잘려나갔을 작은 것.

이번에는 안돼...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임신 사실을 모른 채 전날까지 술을 잔뜩 마셨던 나는 아기가 배 밖으로

나올 때까지 죄책감에 시달렸다.

임신 당시 나는 무기력과 절망속에 빠져 있었고 날마다 술로 시간을 보냈다.

낮에는 공부방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이 돌아간 뒤에는 혼자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밤 9시나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서 필름이 끊긴채 잠이 들었다.

남편은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있어서 내가 이렇게 망가져 살고 있는지 몰랐다.

날마다 기억을 잃고 살다보니 혹시나 내가 술취해 있어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해

임신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착란 증세까지 있었다.

 

그것은 아이가 태어난 후 혈액형 검사 순간까지 불안감으로 나를 잠식했다.

임신과 출산, 사랑이 성폭행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 세상에서

섹스와 성폭행이 동일시되는 이 세상에서 성폭행의 경험을 갖고 있는

내게는 그 불안감이 공허한 것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아무튼 작은 점만한 아기가 내게 오면서 내게는 커다란 변화들이 찾아왔다.

(계속)

참, 41주(10개월)에 접어든 지금 사랑이는 11kg, 76cm의 건강한 아기로 자라고 있다.

손가락 발가락 모두 정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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