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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철학없는 자전거는 녹색이 아니다

오랜만의 인터뷰.

지난 초록아고라 때 토론문을 보고 연락을 주셨다고 했다.

 

메신저든 빈집이든, 미디어에 대한 피로가 누적된 탓에,

결코 친절한 인터뷰이가 되지는 못했지만,

기자의 인내와 진지함 덕에 즐거운 대화가 될 수 있었다.

 

덕분에 최근에 좀 쳐져있던 생각의 페달도 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저 즐거운 상상에 그쳤었던...

이른바 '자전거 메신저 100인 양병설'도...

다듬어서 현실적인 정책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기자 덕에 좋은 사진도 몇 장 얻었고...

인터뷰 후에 얻어먹었던 곤드레밥도 맛있었고...

이래저래 소득이 많은 인터뷰였다. ^^

메트로신문 박태정 기자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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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없는 자전거는 ‘녹색’이 아니다
 
인터뷰가 있던 날 아침 비가 제법 내렸다. 약속을 미룰까 하다 얄밉게도 일부러 강행했다. 인터뷰이의 요청도 없었다.

만나기로 한 시각 정확히 오전 10시, 지음(35)씨는 광화문 인근 커피숍 문을 열고 성큼 다가왔다. 남산 3호터널 넘어 용산 집에서 ‘자전거’로 오는 길이었다.

오는 길 험난하진 않았나. “15분 걸렸다. 버스 타면 30분 넘게 걸린다. 좀 젖긴 했지만 괜찮다.”

왜 자전거를 타나. “서울은 넓으니까 걸어다닐 순 없지 않나. 돈도 없고 재미도 없고. 양심도 없는 것 같아서…….”

대중교통 타면 되지 않나. “자동차를 포기하고 대중교통 타라는 건 설득력이 없다. 가고 싶을 때 가고, 서고 싶을 때 서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자전거를 타면 석유든 제도든 타인의 의지든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고 내 의지대로 충분히 넓은 거리를 다닐 수 있다.”

 

◆ 평정심과 배려심 정도면 ‘OK’

지음씨는 ‘자전거 메신저’다. 쉽게 말해 오토바이가 아닌 ‘자전거퀵’이다. 직업형 자전거 라이더다.

그를 만난 건 자전거 예찬론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자전거를 일상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이 필요했다. ‘왜’라는 이유까지.

그는 ‘동네’부터 정의하기 시작했다. “보통 동네의 기준이 ‘차를 타지 않아도 되는 거리’라고 들었다. 자전거로 30분 정도 가면 반경 10㎞다. 서울 전체가 동네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자동차를 타면 정확히 주차장까지가 동네다.”

하지만 자전거를 탈 만한 안전한 도로가 없지 않나. “그냥 자동차처럼 달리면 된다. 자동차 전용도로 빼고 다 된다. 필요한 건 평정심과 배려심 정도. 바보 같은 차들이 빵빵거리면 ‘내가 날씬하니까 먼저 가세요’라는. 하하.”

그래서 자전거 도로를 만드는 거 아닌가. “길이라는 게 이어져야 하는데 어딘가에선 끊길 수밖에 없다. 그러면 교통수단으론 의미가 없다. 자전거 길만 달려 ‘아, 오늘 재밌게 놀았다’ 할 수는 있지만 예를 들어 우리 집에서 광화문까지 2시간 걸리면 안 되는 거다.”

 

◆ 자전거 타기는 새 삶의 방식

그가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타기 시작한 건 2002년부터다. 이유는 “대중교통이 너무 짜증나서”였다. 당시 다니던 회사까지 집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 하지만 두 번의 환승에 역까지 한참 걸어야 해 무려 50분이나 걸렸다.

그러다 누가 사무실에 버려놓은 자전거를 오랜만에 탔다. 상쾌하긴 했는데 집까지 1시간 걸렸다. 차도를 피해 인도로만 가려니까 시간이 되레 늘었다. 그래서 차도로 내려섰고 4일 만에 높은 언덕도 거뜬히 올랐다. 출퇴근시간은 15분으로 단축됐다. 보름 새 벌어진 일이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1년간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 2008년 10월부터 자전거 메신저를 시작했다.

거리에 자전거가 늘었다. “주말 한강공원에 나오는 자전거는 많아졌다. 하지만 2004∼2005년 자전거 붐이 일면서 늘었던 ‘자출족’은 이후 그대로다. 사양도 올라가 가격도 비싸졌음에도 자전거 판매량은 되레 늘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거리에 자전거가 많아지면 뭐가 좋을까. 매연과 이산화탄소 발생량 줄여 ‘녹색 서울’ 만들려고, 아님 ‘웰빙’ 누리고 ‘몸짱’ 되려고. (이 부분에서 지음씨는 말을 끊고 오래 뜸을 들였다.)

“그건 자동차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 자전거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계속 그렇게 살 거냐’는 문제다. 자전거를 타면 바뀌는 건 몸만이 아니다. 삶의 습관과 생활 패턴이 자전거를 따라간다. 자동차를 사서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벌고 타고 멀리 가기 위해 또 벌어야 하고, 자동차 끌고 마트에 가서 소비하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 “자전거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

우리는 부단히 이동한다. 빠르게 더 멀리,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이동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삶의 공간에서 행복하고 이동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백번 동감한다. 그래서 4대문 안에 대중교통과 물류차량을 빼고 차량 진입을 막을 필요가 있다. 자전거와 함께할 수 있도록 운행 속도를 제한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전거는 녹색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자전거 생산에도 에너지는 필요하고 자전거 전용도로와 편의시설 같은 꼭 필요하지 않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서다.

“자전거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선전용 행정은 예산만 축낸다. 자전거를 통한 정책적 목표가 있는지 달성을 확인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이 검토된 상황에서 집행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전거도로가 폼 나서인지 따져야 한다. 그 돈으로 아이들 ‘무상급식’이 먼저인 건 아닌지도.”

전국에 걸쳐 자전거도로가 만들어지고 있다. 무엇을 위해 자전거를 노래하는지 따져봐야 할 때다. 철학 없는 ‘녹색’이 난무하는 시대가 아닌가.
 

2010-04-05
박태정 ptj@metr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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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예산

문득 자전거 관련 예산이 얼마나 되나 궁금해서 조사해봤다.

 

1. 한강 자전거 도로 13.5km 에 70억

    강변 자전거도로, 13.5km 31일 개통

    1km 당 5.2억

 

2. 국가 자전거도로 네트워크 178km 에 1004억

    자전거도로가 애물단지?

    1km 당 5.6억

 

3. 경복궁 주변 1.4km 에 3.3억

    끊기고 막히고 '아슬아슬' 자전거 도로

    1km 당 2.4억

 

4. 광주 자전거도로 정비 2.2km 에 7.2억

    자전거/보도 겸용 도로 허실

    1km 당 3.2억

 

5. 인천 부평구 15km 에 60억

    인천시 자전거도로 예산 조기집행

    1km 당 4억

 

6. 서울시 자전거 이용활성화 예산 426억원

    서울 내년 예산 21조2853억… 1.2%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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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에서 구로까지.

아침 먹고, 사과도 한알 먹고 대문을 나서려는데 주문이 왔다.

 

구로중앙유통단지에서 구로구청사거리. 총 1.8km

구로에서 구로로 가는 주문이다. 보내는 물건은 핸드폰.

 

사람들에게 자전거메신저를 설명할 땐 서울시내 전지역 커버한다 말하면서 막상 이런 주문이 오면 갈등한다.

갈것인가 말것인가. 1.8km를 배달하기 위해 17.9km를 달려가야 한다.

하루의 첫 주문, 한 주의 첫 주문. 가기로 했다. 중간중간 버스와 지하철의 유혹을 견뎌내며 쉬엄쉬엄 달렸다.

다행히 가는 길 내내 허벅지에 힘 들어갈만한 오르내림이 없다.

화전-수색-모래내-가좌-망원-홍대-합정-양화대교-영등포구청-문래동사거리-구로역-구로유통단지 도착.

구로유통단지에서 구로구청사거리는 눈 깜짝할 거리. 시내 안이었다면 기본요금에서 할인이 들어갈 거리.

첫 주문이라는 손님이 주는 요구르트를 마시며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거리는 짧지만, 짧은 동안이지만 기분좋은 만남 앞에서 잠시나마 오기를 주저했던 게 미안하다.

 

시내로 복귀하는 도중 가까운 곳에서 주문이 하나 더 와 픽업하러 가는데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합정에서 픽업, 신촌까지 배달을 마치고 나니 온몸이 흠뻑 젖었다.

바지는 물솜바지, 구멍난 신발 안은 이미 물이 철퍽. 안경에는 물방울이 또록또록 맺혔다.

비었을 줄 알고 잠시 들른 언니집에 언니가 있었고, 이런날 황사비 맞으며 꼭 일해야했냐는 걱정과 잔소리 잔뜩 듣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깥부터 속 깊은 곳까지 젖은 것들을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하나하나 조물조물 빨아 널고 나니

정신이 든다. 슬슬 배가 고파온다.

그새 비가 눈으로 바뀌어 내리고 있다. 춘분도 지난 3월의 끝자락에 날리는 눈발. 낯설다.

 

어제 집 뒷켠에서 캔 냉이보따리를 풀어 손가락을 다섯바늘 꼬매 손쓰임이 불편한 언니와 마주앉아

냉이무침과 냉이된장국을 끓여 오랜만에 한솥밥을 먹었다.

 

그렇게 오늘 하루가 갔다. 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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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티라이더_자전거, 도시에서 즐겁게 타기

왜 아름다운 것은 둥근가.

 

자전거를 타고 행복해지는 것은 자전거 때문이 아니다. 사이클링은 고도의 정신적, 육체적 활동이 필요한 운동이다.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사람은 바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하늘에 툭 터져 있기 때문에, 어떤 날씨든 느낄 수가 있다. 이 드러남은 두려움과 어려움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기쁨의 원천이다. 그로 인해서 자전거의 주행이 다채롭고 강렬한 경험이 되는 것이다. 일상의 주행마저 추억이 된다. 여행이 길어지더라도 자전거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다. 여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나의 친구들, 그것은 오롯한 삶이다.

... 한밤 응접실 벽에 조용히 기대고 있는 자전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숨쉬고 있다.

자전거가 좋다. 자동차 안에서 보내기에 삶은 너무 소중하다.

 

 

1. 프랑켄슈타인 몬스터

 

(59쪽) ... 줄리어스 시저는 제일 분주한 시간에 바퀴 달린 교통수단이 로마 중심가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시킨 바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그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많은 공간을 독차지하는 탈것으로 인한 공간의 부족, 그것이 이유였다.

 

(61쪽) .....그런 도시의 지역에서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거의 모든 시간에 다양한 이유로 걸어서 드나든다고 한다. 이렇게 들고 나가니 이웃과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 얼굴과 얼굴이 대면하는 접촉이 생긴다. 제이콥스에 따르면, 겉으로는 사소하게 보이는 사회적 접촉이 안전하고 활기찬 도시를 만드는 초석이다.

 

(63쪽)... 자동차화된 대도시, 차에 지배당하는 사회에서 당연히 라이더는 물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다. 때때로 라이더는 욕을 먹어야 하는 타인처럼 느껴진다. 교통수단으로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이 나라가 딛고 선 많은 원칙들, 몇 개만 들자면 상식과 자립, 땅과의 밀착성 등에 대한 찬사인 반면에, 그것은 또한 많은 면에서 현시대 미국문화에 대한 모멸이다.

 

 

2. 도시의 노면에는 무엇이 있나

 

(72쪽) ... 거리에 팬 구멍, 갈라진 곳, 맨홀, 너울이, 도랑, 심지어 움푹 파인 곳에 부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철로, 점박이 요철, 올록볼록이, 로드킬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도시와 시골 도로의 길바닥에는 수많은 구멍이 나 있다. 갈라진 곳이나 울퉁불퉁한 곳은 현실이다. 손상이 정상이다...

 

(84쪽) .. 도시의 어떤 평범한 지역이라도 토핑만 올바르게 알려주면 얼마든지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경험이 많은 라이더들은 거의 모두 모래가 깔린 도로에서 넘어진 적이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시멘트가 젖으면 마른 것보다 두 배는 더 미끄럽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배우기도 한다.

도로의 토핑은  대부분 약간만 주의하면 아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간단히 긴장을 풀고 이들 문제의 지역을 타고 넘으면 된다. 단 회전을 하거나 브레이크를 잡지 말고.

 

 

3. 도시에서 자전거 즐기기

 

(93쪽) 차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관점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간단히 분류하자면 "첫째, 차도에서 자동차를 몰아내자. 둘째, 차도에서 자동차와 똑같이 행동하자. 셋째, 차도만으로는 안 되고 자전거 전용도로도 많이 만들어 편하게 타자." 첫째는 환경주의들의 주장이며, 둘째는 자전거를 차량으로 인정해 달라는 "차량주의자 Vehicularist" 노선이며, 셋째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부족한 현실에서는 차도며 인도며 자전거가 안전하게 달릴 수 있으면 어디든 괜찮다는 중도 노선이다.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홍은택, 한겨레 신문 2006. 11.3일자 인용.)

 

(94쪽) 차량주의 노선 또는 도심주행의 원칙이 가진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그 노선이 복잡하고 위치마다 다른, 혼잡한 도심에서는 적절한 설명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패한 증거는 노련한 라이더들, 심지어 차량주의 교의를 열렬히 찬성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일상적인 주행에서 이를 일관되게 지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들 목적에 부합하면 이 노선을 지키고 부합하지 못하면 따르지 않는다. 방향만 맞으면 뒷골목 자전거길을 이용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다. 또한 일단 멈춤도 무시하고 빨간불을 파란불처럼 이용하며, 교통정체와 교차로에서 멈춘 차들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렇다면 차량주의자가 아니다. 그것이 오늘날 도시에서 자전거 타기의 현실이다. 라이더가 갑자기 모든 상황에서 차량주의 노선을 지키기 시작한다면, 수십 년 동안 자기들을 위해서 만든 특권과 사실상의 법률을 버린다면, 도시에서 자전거를 타는 이점은 깡그리 없어지게 된다.

 

(96쪽) 차량주의 노선에 따라 뒷길을 포기하고 자동차 흐름속에 과감히 자기위치를 점한 전례가 있지만, 융통성은 우리들 몫일 것이다. 우리는 가장 안전하고 용이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스트레스가 제일 적은 대안을 찾을 것이다. 우리 모든 권리를 행사해서 아무리 분주한 도심도 주행하며, 우리의 권리와 실력으로 한적한 도로와 뒷길도 이용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멋진 곳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원칙과 규율을 가장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도시생활의 혼란에 적응할 것이다. 우리는 저항이 제일 적은 길을 찾을 것이며, 교통의 흐름을 강조하기보다 우리가 교통의 흐름이 되고 그것이 우리가 되게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재미를 찾고 무사히 집에 닿을 것이다.

 

(99쪽) 자동차 대 자전거 사고는 두 명의 당사자가 필요하다.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과 약이 오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 어느 모로 보나 서툰 짓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 둘이 사고를 내는 것이다. ... 당신의 운명을 경찰, 도시계획자, 보행자 또는 의사에게 맡기지 마라. 당신의 운명을 별이나 운에 두지 마라. 당신의 운명을 결코 운전자에게 맡기지 마라.

 

(105쪽) 루트 선택은 안전만큼이나 혼잡과 스트레스 최소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서, 단순히 교통량만 고려하기보다는 차선 분쟁과 회전, 교차 분쟁이 적은 곳을 찾아야 한다. 교통 집중도가 낮은 도로를 찾아라. 필자가 지금 막 만들어낸 공식용어처럼 들리는 교통 집중도란 교통량, 속도, 회전, 교차빈도, 차선 너비가 함수인 일종의 흥분도를 말한다..

 

(111쪽) 자전거는 차일까 차가 아닐까? 달구지가 우마차에 해당하듯이 자전거도 법률상으로는 차에 해당한다. 그러므로법률상으로는 자전차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휠체어나 유모차는 차가 아니다. 오토바이중에 125cc 이상은 이륜자동차, 미만은 원동기장치자전거로 분류하듯이 도로교통법 제2조 제16호 가목 4번에 자전거는 '차'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일반 도로에서든 차도에서든 일반 자동차처럼 교통법규를 준수하고 보행자의 안전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역주)

 

(115쪽) 라이더는 도로의 우측 가장자리에서 통행해야만 한다. 이 법률의 목적은 라이더의 안전을 증가시켜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교통흐름을 촉진하는 데, 즉 교통을 방해하지 말라는 데 있다. 빠른 차량 속에서 느린 차량을 속아내는 데 있는 것이다....

 

(118쪽) 협조와 타협이란 라이더가 조금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운전자가 조금 왼쪽으로 움직여서 모두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중략) 가능하면 차선을 공유하라. 그렇게 할 때 이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씨티라이더_자전거, 도시에서 즐겁게 타기> 로버트 허스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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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문제에 대한 상황주의자들의 입장

교통문제에 대한 Situationist들의 입장

(Positions situationistes sur la circulutim)

 

- 기 드보르(Guy Debord)

 

1. 모든 도시 생활자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자가용(오토바이와 같은 그것의 부산물까지도)을 본질적인 운송의 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발전된 자본주의는 사회 전체로 확산되려고 한다'는 행복에 관한 그릇된 개념의 주된 표현이다. 자동차는 이와 같이 소외된 삶의 최상의 선(善)으로서, 또 동시에 자본주의 시장의 핵심적 상품으로서 일반적 선전물의 중심에 존대한다.

사람들은 올해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국 경제의 전망은 "한 가족당 두 대의 자동차"라는 표어의 성공에 좌우된 것이라고.

 

2.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정확히 지적한대로 출퇴근 시간은 '여가' 시간의 양을 그만큼 감소시키는 초과노동이다.

 

3. 우리는 일에 부과된 것으로서의 여행을 즐거움으로서의 여행으로 대체해야 한다.

 

4. 현재와 같이 묵직하면서도 기생적 존재인 자가용에 대한 요구와 조화를 맞추기 위해 건축을 재 계획하고자하는 것은 진짜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얼마나 실재와는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극명히 보여준다. 사회의 전반적 발전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 구제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우선 그 첫번째가 가족)의 형태와 연결된 모든 덧없는 가치들을 비판하면서 건축의 형태를 변형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5. 비록 변화하는 시기에 일시적으로 노동 지역과 주거 지역이 엄격한 분리를 받아들였더라도, 우리는 최소한 제 3의 지역-삶 자체의 지역(자유와 여가라는 진정한 삶의 지역)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통합 도시 계획(unitarian urbanism)은 어떠한 경계선도 인정하지 않는다. : 그것은 노동/여가 혹은 공/사와 같은 분리들이 마침내 사라지게 된 통합된 인간환경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통합 도시 계획의 최소한의 방침은 놀이의 영역을 모든 바람직한 건설의 현장에 늘려가는 것이다. 이러한 영역은 옛 도시와 같은 복잡한 구성과 같은 수준이 될 것이다.

 

6. 자동차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쳐부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은 아니다.

문제는 그 자신의 역할을 부정하기에 이른 도시들에 자동차들이 극단적으로 집중되고 있는 현상이다. 도시 계획을 세울 때 결코 자동차를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것을 도시 계획 자체의 중심 테마로서 받아들이려 해서도 안된다.

도시계획은 자동차의 점진적 퇴장을 기대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몇 안 되는 옛 도시 뿐만 아니라 특정한 새 복합 지역의 중심부가 자동차 교통에 근접해질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7. 자동차가 영원할 것임을 믿는 사람들은 엄격히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미래에 있을 운송의 다른 형태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예를들어 미군이 현재 시험하고 있는 1인 탑승 헬리콥터와 같은 모델들은 아마도 20년 이내에 일반인에게도 보편적인 것이 될 것이다.

 

8. 자동차 편에 서서 인간 환경의 변증법을 해체하는 것은 (파리의 계획 고속도로들은 주택 문제가 끊임없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주택과 아파트의 철거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거짓 실용적 합리화 정책이라는 이름하에 그 비합리성을 감추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특수한 사회 환경 설정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만이 필요한 것이다. 그 문제의 세부사항들이 영속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사실 현 사회의 영속성을 믿고 있는 것이다.

 

9. 혁명적 도시 생활자들은 그들의 관심을 사물의 세계라는 덫에 걸린 인간과 사물의 순환 구조에 한정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험성으로 인간들의 진정한 삶을 향한 여정에의 길을 준비하며 이러한 지정학적 연결고리를 제거하려 할 것이다. 

 

- <파문 1호> 1997.12  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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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에딜리아, 교통

 

다른 예를 들어보자. 자유 운송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군대에 의해 고안된 효과적이며 생태적으로 양호한 운송체계는 세계 어디서든 교환과 이동의 편리를 위해 이용되었다.

국지적으로 소형 전자차량(한 시간에 20마일(약 32km) 이상을 운행할 수 없도록 고안된)과 자전거는 모든 '이웃'(neighborhood, 대략 10개 정도의 거주 기본단위(하스, hearth)로 구성되는 에딜리아의 구성요소)의 구석구석에 있다. 키카드의 삽입으로 성인들은 어떤 차량도 움직이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도로 뽑아두면 된다(핵심적인 키카드는 만족스러운 재연결에서만 풀려지고, 어떤 장비의 남용은 재빨리 추적할 수 있다.)

교통기관은 느리고 제한되지만 성(sex)처럼 자유롭고 안전하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속도를 높여가기보다는 낮추어 간다. 또한 교통기관은 점점더 조용하게 된다. 당신의 시대에 대단한 재난이었던 무자비한 소음 공해는 대체로 사라진다. 물론 많은 다른 것에서처럼 상당한 다양성이 이웃과 에딜리아들 사이에 존재한다. - 젊은 세대에 의해서 사랑받는 일부 에딜리아는 미친 듯한 생활 양식과 시끄러운 페스티발의 특징을 가진다. 일부 젊은이는 또한 놀랄만한(때로는 치명적이라고 하는) 속도의 롤러블레이드에 의한 이동을 좋아한다.   

 

당신의 시대에 기술혁신은 누구를 위해서 노동의 짐을 덜어주거나 삶을 쉽게 해준 적이 결코 없었다. 그것은 이윤을 얻기 위함이었고 모든 사람을 사이보그(직장과 보다 사악하게는 가정에서 기계의 인간부속품)와 같은 행동을 하게 하였다. 그러한 기술 혁신은 스트레스의 정도를 속도와 집중의 무차별적 추구를 통하여 극도로 높여갔다. 희구, 압박 필요로부터 해방이 그 목적이 아니었다. 기술관계의 인간화의 전망은 사전에 차단되었다. 그 점이 우리가 그것을 지금 조망하는 방식이다. 기술은 삶을 복잡하게 하기 보다는 단순하게 해야 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 데이비드 하비, <에딜리아 혹은 "당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라">, <<희망의 공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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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所乘之

 

김기섭(두레생협), <지역자립의 경제학을 위하여> 중

 

노자 도덕경 불사편(不徙篇)

 

小國寡民에 使有什伯之器而不用하고 使民重死而不遠徙하여
雖有舟車나 無所乘之하고 雖有甲兵이나 無所陳之하며
使民復結繩而用之하여 甘其食하고 美其服하며 安其居하고 樂其俗하여
隣國相望하며 鷄犬之音이 相聞하되 民之老死하더라도 不相往來니라.
 

그렇게 많지 않은 생활인들이 살아가는 조그만 지역사회에서는,
문명의 혜택들은 많이 있어도 그것이 별 도움을 주지는 않고,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소중히 여겨 멀리 헤매고 다니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빠른 교통수단이 있어도 별로 타는 일이 없고,

무기와 군대가 있어도 쓸 일이 없으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인격적 신뢰에 기초한다.
사람들은 그 음식이 맛있다 하고, 그 옷이 아름답다 하며, 기거하는 곳이 편안하다 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닭과 개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웃한 나라가 가까이에 있어도
천수를 다하여 늙어 죽을 때까지 필요없이 서로 왕래하는 법이 없다.

 

 

앙드레 고르, <자동차의 사회적 이데올로기>, <<에콜로지카>> 중

자동차의 대안은 전 지구적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 자동차를 단념할 수 있으려면 그들에게 좀 더 편한 집단 대중교통수단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전혀 교통기관에 의지해 이동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는 동네나 마을이나 도시에 있어도 아주 편하게 느낄 테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직장에서 집으로 기꺼이 걸어서 퇴근하면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걸어서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면서 말이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도시에 산다는 불행, 그리고 어디 있어도 편안하지 못하고 오직 일하기 위해서 아니면 고립되어 잠을 자기 위해서만 도시를 잠시 지나쳐가는 불행을 제아무리 빠른 교통수단이나 도피수단도 보상해주지 못한다.

 

동네나 마을이 다시 예전처럼 모든 인간활동에 의해, 인간활동을 위해 설계된 소우주가 되어 거기서 사람들이 일하고 긴장을 풀고 학습하고 소통하고 움직이고 모듬 살이의 환경을 다 함께 관리해가야 한다. 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낭비가 철폐되고 난 뒤에 사람들이 여유시간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마르쿠제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대도시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도시들을 다시 세울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만큼은 소일거리가 되겠지요."

 

노자와 고르.

김기섭씨의 절묘한 해설의 덕이 크지만...

지역과 교통에 대한 입장에서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는 게 재밌다.

 

생각해보니, 위의 노자의 유토피아[小國寡民] 서술에서 처럼...

고르도 <에콜로지스트선언>에서 유토피아를 묘사하면서...

첫머리에 교통수단(자전거!)에 대한 언급을 하기도 했었다.  ㅎㅎ

 

아무튼 결론은...

자고로 자동차는... 無所乘之... 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 ㅎㅎ

 

 

이어지는 김기섭씨의 해설을 좀 더 인용하자면...

 

  2,000여 년이 지난 옛날, 수많은 나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피터지게 싸움질하는 난세 속에서, 시골마을의 한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말 한마디이다. 노자사상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지만 이 글을 경제적 시각에서 나름대로 이해해 볼 때 두 가지 중요한 초점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멀리 떠돌지 않는다[不遠徙]’이다. 앞귀절인 수많은 문명의 이기[什伯之器]란 백성으로 하여금 멀리 떠돌게 하는 이기이며, 그 구체적 예가 뒤 구절에 나오는 배와 수레[舟車] 같은 것이다. ‘멀리 간다[遠行]’와 ‘멀리 떠돈다[遠徙]’는 분명히 다르다. 경제적 시각에서 볼 때, 꼭 필요한 사람이나 지역에게 나와 우리 지역이 생산한 재화와 용역을 건네주러 가는 것은 가는[行] 것이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나와 우리 지역이 생산한 결과물을 팔러가는 것은 떠도는[徙] 것이다. 어디에 누가 얼마만큼을 살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지역내보다는 지역 외부를 위해 생산이 이루어지고, 그 생산 결과물이 배나 수레에 실려 잘 뚫린 길을 통해 타지역으로 수송되지만, 그 기은 단지 물자의 교역만이 아닌 무기와 병사의 진군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노자 할아버지의 불원사(不遠徙)를 현대의 경제적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생산과 소비의 익명성, 생산지와 소비지의 원거리성의 극복을 의미한다. 
 

 

  두 번째 초점은 복결승(複結繩)이다. 결승이란 새끼를 묶는다는 뜻으로, 문자가 없고 계약관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표식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자가 이미 존재하여 사용되었던 당시에 결승으로 되돌아가자 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문자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문자로 인해 발생한 인간관계의 변화에 대해 문제제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자는 인간의 뜻을 알리고 관계성을 확인시켜 주는 매체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문자라 함은 경제상의 계약관계를 맺게 하는 매체이다. 따라서 문자를 버리자 함은, 비인격화된 계약관계를 버리자 함이며, 결승으로의 복귀는 인격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계약관계로 되돌아가자는 뜻일 것이다. 소자(蘇子)가 주석하기를 ‘사소민박(事少民樸)에 수결승(雖結繩)이라도 가의(可矣)’라 한 것은 이러한 의미 때문이다. 즉, 자신과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생태적, 사회적 제관계를 무시하고 행하는 경제행위[=有爲의 경제행위]가 적고 따라서 그러한 경제활동을 행하는 백성이 순박할 수 밖에 없는 사회에서는 결승이라는 간단한 표식만으로도 모든 경제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별 부족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자 할아버지가 이야기하는 복결승이란, 현대의 경제적 시각으로 볼 때, 경제관계의 인격화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원사(不遠徙)와  복결승(複結繩)의 경제활동, 그것은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명확하고 그  교역의 범위가 넓지 않으며 모든 경제관계가 인격적 관계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제가 실현 가능한 곳은 적은 백성으로 구성된 작은 나라, 즉 지역사회일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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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밀린 일기쓰기

하루하루 밀리고 빼먹어 차곡차곡 쌓인 메신저 다이어리.

쓰리라 마음먹은 건 지난 겨울 초였는데 그새 해가 바뀌고 벌써 입춘이 지났다.

 

 

100회 발바리 오랜만에 100대 넘는 자전거가 차선 하나를 꽉꽉- 쭉쭉- 채우고 달렸다. 2009.8.15.

 

 

strida 오토바이는 최대 300kg까지, 지음도 한 80kg까진 싣는데 비해 스트라이다는 10kg 정도가 최대치.

게다가 짐받이도 앙증맞아 작은 라면박스 크기를 넘어서는 물건은 배송불가. 그래서 요즘은 메신저백 대신

조금 큰 등산배낭을 맨다. 그래도 소화할 수 없는 물건은 다른 메신저에게 패스. (미안.. +_+)

나는 언제까지 이 삼각형 미니벨로를 고집하려나.. 첫 자전거의 애틋함, 착착접어 대중교통과 연계할 수 있는

트랜스포머, 탈탈탈 달리면 노는 기분을 안겨주는 이런저런 매력 때문에 아마 2010년도 함께할 듯.

또 모르지.. 누군가 가볍고 산뜻한 큰 바퀴 자전거를 내게 버려주신다면야. :)

 

 

배달물들  일반적인 업무관련 배송이 주를 이루지만 때론 사랑의 메신저, 선물 메신저가 되기도. ^-^

 

 

자전거는 차도를 달리는 것.  셋 이상 함께 달리거나 발바리 떼잔차질 할 때가 아니면 대체로 맨 가엣 차선과 갓길

을 달린다. 그것조차 운전에 방해되거나 거슬리는 운전자들의 반응은 자전거를 차선 바깥으로 밀어붙이거나, 빵빵대거나, 수고스럽게 창문까지 내리고서 욕을 하거나, 인도로 올라가라고 고함지르기.

이날 함께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필요 이상으로 몰아붙였던 버스 아저씨. 화난 지음은 차를 세워 자전거는

도로를 달리는 거라고 주지시켰지만 알아들었을까... 나도 화날 때 침묵 않고 싶지만 화낼 자신이 없다. 겁이 난다.

 

 

속도와 효율의 지향이 때론 죽음과 맞닿아 있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없애고(자전거 전용도로도 필요없다

제한속도를 낮춰라.  사람을 배제시키는 길. 생명을 위협하는 자동차. 우리가 만든 괴물들..

 

 

홍대나 망원 근처에서 끝난 날은 운수 좋은 날. 이런 날은 문턱없는 밥집에서 비빔밥을 먹는다. (1000원 이상이란

가격에서 늘 고민하지만 대개 2000원으로 나자신과 합의를 본다.)  집 밖에서 밥 한끼 부담없이 먹기가 어려운 세상.

메신저는 월급제가 아니라 일급제라 대기만 하다 주문 없는 날은 소비심리가 꽁꽁. 주문이 많은 날은 때를 놓쳐,

주문이 없는 날은 마음이 쫄아붙어 끼니를 자주 거른다. 이제 슬슬 날도 풀리니 주먹밥 도시락을 챙겨야지.

 

 

 

내 마음속의 자전거 자전거 만화의 명작을 읽다. 처음보다 뒤로 갈수록 재미가 쏠쏠.

핸드폰, 이메일, 자동차, ktx, 비행기, 디카 등등.. 편리함을 주고 기다림, 설레임을 앗아간 물건들.

조금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사람냄새 나는, 아날로그적인 것들이 나는 좋다.

자전거도, 자전거메신저도, 나도 그러했으면.  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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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녹색이 아니다

아래 행사를 위해서 여기 저기 썼던 글들을 짜깁기하고 조금 첨언해서 급조한 토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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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8 [5회 초록아고라 : 실효성있는 자전거 정책과 방안에 대해]

 

[토론문] 자전거 메신저

나은, 라봉, 지음 (자전거 메신저 네트워크)

070-8226-1968, http://blog.jinbo.net/messenger

자전거는 녹색이 아니다.

자전거의 생산은 노동과 자원과 에너지를 소비한다. 자전거의 구매는 그것을 위한 화폐를 필요로하며 화폐를 위한 별도의 노동과 자원과 에너지의 소비가 필요하다. 고가의 자전거일수록 그 소비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자전거 역시 유지관리를 위해 기름과 재생불가능한 폐기물을 소비한다. 생명을 마친 자전거는 그 자체가 하나의 폐기물이며 재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자전거는 녹색이 아니다. 걷는 것을 대신하는 자전거, 운동을 대신하는 자전거, 취미를 대신하는 자전거가 녹색이라고? 산과 들과 강을 뒤엎어 자전거 도로를 만드는 것이 생태적이라고? 얼마안가 망가져 버리는 자전거를 보급하고, 고급 자전거 생산 단지를 만드는 것이 친환경적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자전거가 녹색이 되는 경우는 오직 단 한가지 경우다. 바로 자동차를 대신하는 것. 자동차가 아니면 가지 못했던 곳을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 자동차가 아니면 나르지 못했던 짐을 자전거로 나르는 것, 자동차가 아니면 다니지 못했던 길로 자전거로 다니는 것, 그러기 위해서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생산하는 것,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자전거를 손질해서 다시 타고 다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외면하고 마치 자전거가 그자체로 녹색인 양, 자전거 정책은 모두 녹색인 양 떠벌리는 것은 거짓이다.

 

자전거는 위험하지 않다.

위험한 것은 자동차다. 위험을 피하길 원한다면 타지 말아야 할 것은 결코 자전거가 아니라 자동차다. 길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어린아이, 걷는 사람, 자전거가 아니라 다름 아닌 자동차다. 잊어서는 안 된다. 반대가 아니다. 우리는 어느샌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고하게 되어 버렸다. 자신을 엄습하는 위험의 원인이 자전거가 아니라 자동차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자전거는 사실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사실 도로가 그렇게 두렵고 위험한 것만도 아니다. 실제로 자전거를 혼자서 탈 때는 위협적인 경우가 종종 있지만, 둘이서만 같이 가도 상당한 안도감이 생기고, 셋이면 가끔 장난칠 여유마저 생긴다. 한 달에 한 번 도심 한복판을 떼지어 달리는 자전거들의 무리 발바리 떼잔차질을 아는가? 수십 수백 대의 자전거가 차선 하나를 통째로 누비며 달리는 이들에게 도로가 위험하다는 건 이미 딴 세상 이야기다.

우리는 자전거가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타는 것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전거가 집 앞과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무엇보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 자동차에 점령당한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동차를 타지 않는 것, 길에서 걷고, 뛰놀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자전거 길은 충분하다.

자전거가 갈 수 없는 곳은 없다. 자전거가 도로를 달리는 일은 완전히 합법적이다.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도 이미 지나치게 도로가 많은 나라다. 도로를 달리기만 하면 된다.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나가는 건 분명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가야 한다. 하나가 나가지 않으면 무리도 지을 수도 없다. 다른 방법을 우리는 모른다. 좋은 자전거도로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릴 것인가? 당신이 도로를 나가지 않는다면 그런 행운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어떤 도시교통 전문가가 자전거가 다니지 않는 길에 좋은 자전거 도로를 만들 수 있겠는가? 다니다보면 길이 생기는 것이지, 길이 생긴다고 다닐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도 도로가 두려웠다. 그러던 우리에게 용기를 준 것은 그냥 우리 옆을 스쳐지나가던 한 대의 허름한 자전거였다. 우리는 그 자전거를 따라서, 그 자전거와 함께 달렸고, 어느새 혼자서도 어떤 길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자전거가 되고 싶다. 서울 한복판에서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기억해주면 좋겠다. 용기를 내고 페달을 밟아라. 도로를 달려라. 자동차의 경적 따위는 무시해라. 필요하다면 차선 하나를 접수해라. 방금 차선 하나가 자전거 길이 되었다. 당신을 뒤따르는 사람은 이제 자동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고맙다. 당신 덕분에 우리의 길은 그만큼 더 안전해졌고, 우리의 도시는 그만큼 더 살 만한 곳이 되었다.

 

모든 사람은 메신저다.

메신저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달리는 사람이다. 멀리 떨어진 사람과 사람을 잇고, 물건이 마땅히 있어야할 적절한 곳으로 물건을 움직인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사람과 물건으로 이루어진 환경을 만들고 세상을 만든다. 사실 모든 사람은 일종의 메신저다.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는가,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직업적으로 하느냐가 다를 뿐.

우리는 자전거를 선택했다. 자전거를 타는 것이 가장 즐겁기 때문이다. 어떤 교통수단보다도 자전거 메신저가 만드는 세상이 가장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도로를 달리면 도로는 자전거 길이 된다. 자전거 메신저들이 늘어나고, 메신저와 함께 달리는 자전거들이 늘어날수록, 우리의 길은 더 안전해지고 우리의 도시는 더 살 만한 곳이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토바이와 자동차에 점령당한 길을 되찾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골목길과 이웃들이 오며가며 얘기 나누는 마을길을 다시 만들것이고, 동물들이 지나다니는 숲길과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물길을 지켜낼 것이다.

자전거 메신저 서비스는 단지 물건을 빠르게 배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돈을 받고 하는 당연한 일에 불과하다. 우리의 진정한 ‘서비스’는 돈으로 헤아려지지 않을 것이다. 교통 사고로 인해 찰라에 목숨을 잃는 무수한 생명들, 자동차로 대표되는 경쟁과 위험, 낭비와 고립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생명들, 화석 연료에서 비롯된 온갖 공해와 기후 변화로 인해 위기에 처한 하나뿐인 지구의 생명, 그리고 이 생명들을 사랑하고 함께 아파하는 당신의 살아 숨쉬는 마음, 그 가치의 크기를 돈으로는 어림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자전거 메신저는 당신의 바로 그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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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효성있는 자전거정책과 방안에 대해

 

나은, 라봉, 지음이 참가합니다.

관심있으면 놀러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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