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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읽기 2차 모임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바로 후기를 올리려 했었는데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로 늦어져 버렸네요...ㅎㅎ
여튼
드디어 책읽기를 시작했답니다.
일시는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늦은 6시
장소는 마을까페 "이따" 에서....
주 택스트는 들뢰즈의 [시네마1 : 운동-이미지]
참석은 저랑 이빈쌤과 영재쌤...이렇게 조촐하게 3명이 진행했답니다.
다들 시간대가 저녁시간대라서
주린 배를 움켜지고 들뢰즈를 양분삼아 ...?.....진행하려했지만......헤헤헤..?
고맙게도 씨네오딧세이 대표이신 김주영님게서 제과점 빵을 선물해 주시고 가셔서
맛나게 야금야금 먹으면서 들뢰즈를 읽어 갔답니다....ㅎㅎ
발제는 원래 약속대로 저와 이빈쌤 모두 준비했었는데
발제라기 보다는 편하게 책을 요약 정리하는 것으로 하였기 때문인지
발제문은 두개지만 신기하게도..?...한개나 마찬가지의 발제문이 되었답니다...ㅎㅎ
여튼
발제문을 중심으로 책을 살펴보는 것으로 전체 진행이 이루어졌고
서로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나 꼭 필요한 개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하는 점검(?)들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였답니다.
전체적으로 텍스트의 내용이 어렵기도 하였지만 생각보다는 이야기들이 수월하게 진행되어서
준비하면서 많은 긴장을 했던 것에 비해 재미난 책읽기 모임이 되었습니다......ㅎ..
.......(나만 그런지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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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1 : 운동-에너지]
1장은 [1. 운동에 관한 논제들: 베르그송에 대한 첫번째 주석]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들뢰즈가 주석을 단 베르그송의 운동에 대한 세가지 논제에 대하여
들뢰즈의 생각을 밝히는 장으로
어쩌면 이 전체 텍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부분인것 같은데
들뢰즈 자체가 우리가 이미 베르그송을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서술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읽는 내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조금만 참고 읽다보면 의외로 어렵지 않아 보인다는..?....ㅎㅎ
여튼 하고픈 이야기는
운동은 분할되지 않는 지속의 전체라는 ...?...것이지요...ㅎㅎ
우선 첫번째 논제는 운동은 분할되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주되게는 우리가 흔히 집합이라는 닫힌 체계로 사고하는 것들에 대하여
진정한 운동은 분할되지 않을뿐 아니라 항상 새롭게 재생성된다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번째 논제인 특수한 순간과 불특정한 순간의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는지
베르그송의 이야기로 보면 어떻게 기억하고 인식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고
마지막으로 운동의 변화 즉, 운동의 지속적 개방성으로써의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책읽기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 부분이기도 하고
어쩌면 내가 혹은 우리가 "운동"이라는 것..."활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어떻게 삶을 재구성하는지에 대한 다른 시각들을 얻을 수 있을것 같아서
자꾸자꾸 읽게된 부분이기도 하답니다.
보통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이라는 텍스트의 제 1장을 설명하는 단락이라는 들뢰즈의 설명처럼
이 장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이라는 텍스트의 1장을 충분히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들뢰즈의 이 텍스트를 음이(?)하는 식으로 좀더 생각들을 깊게하면
이 장이 갖는 풍부한 이야기들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ㅎㅎ
저 스스로는 이 텍스트를 가지고
제가 기존에 해왔던 활동들에 대한 나의 인식 혹은 판단의 방식들에 대해서
아니면 기존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인식의 방식들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보고
그런 것들을 정리하여 공룡들과 공유해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은 욕망이 들기도 하더군요....ㅎㅎ
실은 첫번째 모임이라서 그런지
지나치게 책....텍스트의 내용들을 가지고 이야기 한듯 싶어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조금더 우리들 자신들의 생각하는 방식 혹은 삶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이야기 해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했더랍니다.
실제로 들뢰즈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던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의 첫장은
언젠가 함게 읽고 이야기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 텍스트인데
우리들 스스로는 너무 들뢰즈라는 틀에 얽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더랍니다...ㅎㅎ
뭐 여튼 아직까지는
들뢰즈의 텍스트 이외의 것들을 함께 읽기에는
조금 벅차해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우선 욕심부리지 말고
현 [시네마]텍스트에 집중하는 것도 좋을듯...싶기도 해서.....ㅎㅎ
여튼 조금 서툴기도 하고 재미난 책읽기 첫 모임을 어찌어찌 ....ㅎㅎ...했다는 소식...히히힛
<< 책 내용 욕약본 >>
Ⅰ. 운동에 관한 논제들 : 베르그송에 관한 첫번째 주석
1. 첫번째 논제 : 운동과 순간
가로질러진 공간은 과거이고 운동은 현재이면서 가로지름의 행위인 것이다. 지나온 공간은 그냥 나누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무한히 분할 가능하다. 반면에 운동은 나누어 지지 않거나 매번 나뉠대마다 그 속성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이는 이미 더욱 복잡한 관념을 함축하는 것이다 : 운동이 가로지른 공간들은 모두 하나의 균질적인 공간에 속하지만 운동들은 이질적이고 서로 환원될 수 없다.
-공간 속의 위치들이나 시간속의 여러 순간들, 즉 '부동적인 단면들'을 가지고는 운동을 재구성할 수 없다. 이러한 재구성을 가능케하려면 [공간적] 위치와 [시간적]순간들에 연속성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기계적이고 균일하며 보편적인, 공간의 전사(轉寫)이며 모든 운동들에 대해 동일한 시간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결합시켜야 한다.
=> 두가지 방식으로 놓치게 되는 운동
a) 아무리 두 개의 [공간적] 위치 또는 두 개의 [시간적] 순간들을 서로 접근 시키려 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운동들은 항상 이 둘 사이의 틈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그러므로 파악되지 않는다.
b) 아무리 시간을 나누고 또 재분할하여도 소용없다. 운동은 항상 구체적 지속속에서 이루어지며 개개의 운동은 자신의 고유한 질적 지속을 갖게 될 것이다.
=. 이로써 두개의 환원 불가능한 공식을 대립시킬 수 있다.
[실제운동 --> 구체적 지속] 과 부동적 단면들 + 추상적 시간
베르그송 : 영화적 환영 (부동적 단면들을 가지고 운동을 재구성하는 공식)
영화는 실상 두개의 상보적 소여물들과 함께 작용
-'이미지들'라 부르는 즉각적인 단면들
-장치(카메라 혹은 영사기) '안'에 있으며, (카메라 혹은 영사기)와 '더불어' 이미지들을 차례로 지나가게 하는 비인격적이고 단일하며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인 또는 지각 불가능한 운동 혹은 시간
=> 따라서 영화는 우리에게 가짜 운동을 가져다주며, 그 자체가 가짜 운동의 전형적 예이다.
사실상 영화가 운동을 부정적 단면들로써 재구성할 때, 영화는 다름아닌 가장 고대적 사유(제논의 역설)가 이미했던, 혹은 자연적 지각이 행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하고 있다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영화가 단지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환영의 투사, 재생산일 따름이다.
들뢰즈
환영의 재생산이란 어떤 의미에서 환영의 교정일 수 있지 않을까 ?
수단이 인위적이라고 해서 결과가 인위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
영화는 사진소들 즉, 초당 24개의 이미지들이라고 하는 부동적 단면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진소가 아니라 운동이 덧붙거나 추가되지 않은 평균적 이미지이다. 반대로 운동은 소여의 형태로 평균적 이미지이다.
(소여 : 주어진 바 혹은 부여된 바
[논리]연구 따위의 출발점으로서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나 원리.
[철학]사유에 의하여 가공되지 아니한 직접적인 의식 내용.
소여성[所與性] 사실이나 대상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주어진 경험의 내용 범주.)
우리는 자연적 지각에서 환영은 주체 안에서 지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 조건들에 의해 지각의 전단계에서 교정된다. 반면에 영화에서는, 여하한 조건 하에도 놓이지 않은 관객에게 이미지가 출현함과 동시에 환영의 교정이 이루어진다. 요컨대 영화는 우리에게 운동이 부가된 이미지를 주는 대신, 즉각 운동-이미지를 준다. 영화가 주는 것은 단면이지만, 그것은 동적인 단면이지 '부동적 단면+추상적 운동'이 아닌 것이다.
베르그송에 대한 평가 : 사물의 본질은 애초에는 결코 드러나지 않다가 중간쯤에서, 그 전개의 와중에서 그것의 힘이 견고해질때 드러난다. 영원성의 문제 대신 '새로움'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새로운 무엇인가의 생산이나 출현이 어떻게 가능한가 ?) 철학을 변화시킴...들뢰즈의 평가
-우리는 사물이나 사람들이 막 무언가를 시작할때 항상 스스로를 은폐하도록 강요되며, 또 그렇게 하도록 운명지어져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컨대 그는 생(生)의 새로움이 초기에는 나타날 수 없는 이유를 처음에는 생이 물질을 모방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2. 두번째 논제 : 특수한 시간들과 불특정한 순간
오류는 항상 운동을 시간적 순간들 혹은 공간적 위치들로써 재구성하려는데 있는데, 그렇게 하는데는 고대/근대 방식 두 가지가 있다.
고대 방식
-고대에 운동은 인지할 수 있는 요소들, 스스로 영원하고도 고정적인 '형태' 혹은 '관념'에 준거
-운동은 형태들의 '변증성' 즉, 운동에 질서와 척도를 부여하는 관념적 종합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의도된 운동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다듬어진 이행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무용에서 보듯 포즈 혹은 특수한 순간들의 질서이다. "형태와 관념들은 한 시기를 특징지으면서 그것의 정수를 표현한다. 이 시기의 나머지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관심사도 되지 못하는,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이행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최종항이나 극점에 주목하고 그것을 본질적 순간으로 삼는다. 사실들의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가 취했던 이런 순간은 과학에 있어서도 역시 그것 (사실 전체)을 특징짓는 데 충분한 것이 된다."
근대방식
-근대 과학혁명은 운동을 더 이상 특수한 순간들이 아닌 불특정한 순간과 연관시킴으로써 이루어 졌다. 운동의 재구성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형식적이고 초월적인 요소들(포즈)로써가 아니라 물직적이고 내재적인 요소들(단면)로 이루어졌다.
- 모든 곳에서 불특정 공간이 갖는 기계적 연속성은 포즈들이 갖는 변증법적 질서를 대체하였다.
"근대과학은 무엇보다도 시간을 독립적인 변수로 보고자 하는 열망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 영화란 불특정한 순간에 의거해서, 다시 말해 연속성의 인상을 부여하기 위해 선택한 등간격의 순간들에 의거해서 운동을 재생산하는 체계이다.
- 특수한 순간들이라 함은 운동속에 속하는 비범한 또는 독특한 점이라서이지, 초월적 형태를 실현하는 순간이라서가 아니다.....다만 불특정한 순간은 규칙적이거나 또는 독특한 것일 수도 있고, 평범하거나 또는 비범한 것일 수도 있다.
-에이젠슈타인이 추구하는 현대적 변증성과 낡은 변증성 사이의 차이다. 후자가 운동안에서 실현되는 초월적 형태들의 질서라면, 전자는 운동에 내재하는 독특한 점들의 생산 및 그것들의 대립이다. 그런데 이 독특함의 생산(즉 질적도약)은 평범한 것들의 집적(양적 도약)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독특한 것은 불특정성에서 추출되며, 독특한 것 자체도 비-평범하거나 불-규칙적일 뿐인 불특정한 것이다. 에이젠슈타인 자신도 '비장함'은 단면들이 거쳐 지나가야 하는 불특정한 순간들의 조직된 집합으로서의 '유기성'을 가정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더 이상 가장 오래된 환영을 이룰 완벽한 장치가 아니라 반대로 새로운 현실을 완성시킬 기관이 될것이라는 관점
3. 세 번째 논제 : 운동과 변화
-순간이 운동의 부동적 단면인 것처럼, 운동은 지속, 즉 전체 혹은 어떤 전체의 동적인 단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이 훨씬 더 심오한 그 무엇, 즉 지속 혹은 전체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동적 단면들 동적인 단면으로서의 운동
----------- = ----------------------
운동 질적인 변화
(환영) (현실)
-베르그송 "전체는 주어지지도 않고 주어질수도 없다(고대과학과 마찬가지로 현대과학의 오류는 두가지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 전체를 주어진 것이라고 상정한 것이다)"
->전체가 주어질 수 없는 것인 이유는 전체가 '개방성'이며 그 속성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계속 새로운 것을 솟아나게 하는, 다시 말해 지속하기때문이다
-베르그송 "무언가가 살아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든, 어딘가가 열려있는, 시간이 기재되는 '장소'가 존재한다"
-전체를 정의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관계라고 정의할 것이다. 관계는 사물들의 속성이 아니며 관계항들의 바깥에 있다. 또한 관계는 개방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영적 또는 정신적 실존을 나타낸다.
-집합들은 단혀 있으며 단혀있는 모든 것은 인위적으로 닫혀 있다. 집합들은 항상 부분들의 집합들이다. 그러나 하나의 전체는 닫혀 있지 않다. 그것은 열려 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부분들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란 분할의 매 단계마다 자신의 성질을 바꾸지 않고는 결코 분할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적 전체란 나뉘지 않는 연속성일 것이다."
-전체는 스스로를 창조한다. 그리고 하나의 질적인 상태의 집합을 또 다른 집합으로 이끌어가는 그 무엇처럼, 도는 이 상태들을 거쳐가는, 정지하지 않는 순수한 생성처럼 전체는 부분들이 없는 또 다른 차원 속에서 끊임없이 창조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영적이거나 정신적이다.
-'부동적 단면들+추상적 시간'은 사실상 부동적인 단면들을 부분으로 갖는, 그리고 어느 하나의 추상적 시간에 입각해 계산된 연속적 상태들을 부분으로 갖는 폐쇄집합들을 가리킨다. 반면에 '실제적 운동-->구체적인 지속'이란 지속하는 어느 한 전체의 열림을 가리킨다. 이때 이 전체의 운동들이란 닫힌 체계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동적인 단면들이다.
세 단계
1) 판별될 수 있는 대상들이나 구분되는 부분들로서 정의되는 페쇄집합들 또는 체계들
2) 이 대상들 사이에 성립하며 그 각각의 위치를 변경시키는 이동 운동
3) 자체의 고유한 관계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적 정신적 현실로서의 지속 또는 전체
=> 그러므로 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대상이나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 또는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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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리글 잘 읽었습니다아~ㅎㅎ 정리하시랴 발제하시랴 강독(..ㅎㅎ) 하시랴 몸이 두개여도 부족하실듯요. 2장은 제 생각보다 너무 잘 마무리 된 듯 해요. 매순간이 아주 즐겁습니다~(저번에도 동의한 부분이었지만)ㅋㅋㅋ 담주 토요일에 뵐게요. 공부도 더 해올게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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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오!!! 들뢰즈 책읽기 모임, 진짜 열공열공이라는! 멋져요^^ 다음 주 모임 전에도 종종 놀러오세요~ 저희 까페에 모카포트 생겼어요! 카푸치노 만들어 드릴께요~ 호호호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