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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7/25
    <페이퍼>7월호 중에서...
    흑점
  2. 2006/07/21
    [시]힘을 주는 시 두편
    흑점
  3. 2006/07/21
    변증법(4)
    흑점
  4. 2006/07/20
    (1)
    흑점
  5. 2006/07/20
    안습.
    흑점
  6. 2006/07/06
    I'm so fine.(4)
    흑점

<페이퍼>7월호 중에서...

흑점님의 [[책]혁명을 팝니다.] 에 관련된 글.

-

(중략)...그런데 이 책의 결론은 놀랍다. 위반과 일탈을 일삼는 반문화에 대해 ‘규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엽기적인 상상력과 MTV가 판치는 지금 세상에서 ‘상상력에 권력을!’이라는 유럽 68혁명의 구호나 위반과 일탈은 식상한 감이 없지 않다. 더 이상 구별화와 차이만으로는 주류사회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 반문화를 흡수하는 주류문화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저자들은 잊고 있다. 위반과 일탈을 수용하려면 기존의 체제도 변해야 가능하다.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주류문화는 실제로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다. 시스템은 그렇게 변화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문화를 규제해야 한다는 저자들의 입장은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그들은 중도주의를 내세우지만, 중도는 어느 것도 아니고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반문화가 먼저 치고 달리면 시스템은 나중에 따라오게 된다. 그 중간쯤에 무엇이 있단 말일까? 들뢰즈와 가따리에 따르면 진짜 정신분열증 환자는 더 이상 분열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발생한다. 계속 분열을 진행하는 한 환자가 되지 않는다. 커트코베인의 자살? 아마도 그는 더 이상 분열을 감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병에 걸린 것이리라. 그것을 실패라고만 단정 지을 수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생태계속의 생명은 구별화와 차이화에 의한 분열을 통해 진화해간다는 점이다. 그것이 욕망을 가진 생명의 숙명이다.

 

- 이성문, 7월호 중에서, 책 <혁명을 팝니다>에 관한 짧은 서평.

  (강조는 내가..)

 

 

처음엔 이 책에 대한 반박을 통쾌하게 잘해 놓은 것 같아서 퍼왔는데, 몇번 다시 읽어보니 뒷부분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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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힘을 주는 시 두편

긴장시키는 메모

 

-신현림

 

보봐르의 <처녀시절>과

<회색인>에서 최인훈의 말이 집중시킨다.

 

-

순간순간을 유효하게 사용했다 잠을 덜 잤다 몸치장도 대강대강 거울 들여다보는 일도 없어졌다 이닦기도 겨우 했다 손톱소제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경박한 독서, 무의미한 수다, 모든 오락을 끊었다

-

알 수 없는 우주 속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없이 노력하는 것뿐

-

 

자물쇠를 여는 열쇠처럼 힘을 부르고

나를 끌고 다니는 슬픔을 한방에 날려 버린다

 

나의 부족함과 아픔을 네가 이해해주듯

나날의 관두껑을 열어 나를 불러세우듯

 

작은 메모가 네게도 긴장을 주리라

오래된 메모가 나를 강하게 해주었듯

네게도 각성과 눈부신 정열을 주리라

 

*

 

이제 가야만 한다

 

-최승자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메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동사(動詞)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 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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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어쩌면 이 블로그에 나보다 더 자주 들락거리는 듯한 군대 간 친구 한 녀석과 싸이로 쪽지질을 하다가, (그 과정과 양태는 완전히 다를지라도 결과적으로 봐서는) 내가 1년 전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쩌면 인생이란 이러한 싸이클의 연속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나의 위치를 지탱하며 버티고 살아남는 것. 그게 바로 살아간다는 것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첫째로 앞으로 또 다시 다가올 지나간 과정들이 두렵고 무서웠고, 둘째로 아 그것도 이렇게 지나가고 나면 별거 아니겠구나 하는 안심이 들었다. 셋째로는 절대 그래선 안되겠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이런 인생을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하라고? 아무리 니체식으로 니힐리즘을 극복하고 디오니소스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렇다, 나에게는  인식론적 단절, 즉 혁명이 필요하다. 그런데...혁명? 무엇을 위한?(What for?)

 

*

 

헌책방에서 산 ‘아이히 호른’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책 제일 뒷장에는

-
*해방통일진군 48년 6월 26일 금요일,
<열린 글방>에서.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고,
변증법적으로 살자!
-

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헌책방에서 주로 책을 사는 나는 <사.사.방.(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 이진경)> 사이에 끼여 있던 결혼사진부터 시작해서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뒷장에 쓰여진 식상했던 소설 습작,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저자와 거의 대결해보자는 식으로 밑줄을 긋고 거기에 대한 반론을 적어놓은 <쇼펜하우어 인생론> 등등 많은 재미난 것들을 보았지만, 이 짧고 단순한 메모의 주인이 가장 기억에 남고 또 궁금하다. 앞장에는 이름도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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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90303-022 박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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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학번이면 지금쯤 30대 중후반 정도 되었을 텐데. 아직도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고, 변증법적으로 살고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정-반-합'의 과정을 거듭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비닐로 정성들여 책꺼풀까지 씌운 손때묻은 이 책을 헌책방에 헐값으로 넘기면서 그 과정도 끝이 난것일까... 혹시 아는 사람 있으면 좀 알려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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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비가 오는 탓인지 왠지 센치해져서는 사촌이 독일로 돌아가면서 나에게 주고 갔던 커피포트를 꺼내 물을 올리고, 이런 상황에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얼마 전 헌책방에서 2000원을 주고 산 <상실의 시대>를 펼쳤다. 어차피 이 책은 너무 뻔해서 쪽팔리게 들고 다니면서는 읽지 못한다는 것도 있었고, 내 책장에 꽂힌 책 중에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책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 책을 선택하는 데에 일조했다. 내가 중3때인가 한창 tv광고에 나와서 주가를 올릴 즈음에 친구 집에서 그 친구의 형이 읽던 것을 호기심 반 겉 멋 반으로 빌려서 읽게 되었는데, 그때는 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나름 진지하게 읽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그때 나로서는 ‘젖었다’, ‘펠라티오’ 등등의 성적인 용어들을 잘 이해 할 수 없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 당시 나에겐 그저 소설 초반부 ‘나’와 나오코가 초원을 걸어가며 얘기했던 깊은 우물의 이미지만이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나름대로 센치하게 저녁을 해먹고 다시 책을 펼쳐서 새벽 5시 즈음까지 단숨에 일독했다. 중간 중간에 남아있던 담배 몇 까치를 다 피웠고, 비틀즈의 를 내가 좋아하는 <미쉘>과 <헤이 쥬드>를 곁들여 몇 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여전히 이 소설이 왜 그러한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때는 전혜린이 혹은 헤세의 <데미안>이나 까뮈와 니체가, 또 어떤 의미에서는 체게바라 평전이 ‘유행’했던 맥락을 생각해보니 아 그렇구나 싶기도 했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그저 작년에 들었던 철학수업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교수의 말장난과 논의 수준의 유치한 현학성으로 수업시간 내내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해야만 했던-에서 누군가가 이 책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정의해보겠다던, 주제는 거창했으나 그 내용은 차마 참고 봐주기 힘들었던 발표가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

 

비가 멈추질 않는다. 네이버에서 수재피해 뉴스를 보면서 문득, ‘계급투쟁’이라는 것도 이러한 종류의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이 비 또한 누군가에게는 재앙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조금의 귀찮음이거나 혹은 멜랑꼴리한 배경으로 다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수재민들은 매년 이 지역이 침수가 된다는 걸 알아도 돈이 없어서 이사를 못가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이것도 계급투쟁이군 싶기도 하다만은.

 

*

 

대구에 있는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전화는 물론이고, 꼭 필요한 용건 말고는 대화가 거의 없는 아버지와 나 사이이기에 어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요즈음 뉴스 보니까 비 때문에 난리라고, 저번에 보았을 때 나의 집 뒤편에 있는 축대의 경사가 꽤 높으니, 혹시 이번 비로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비가 많이 오면 근처 친구 집에서 자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순간 훗 하면서도, 진지하게 꼭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물론, 절대 그러진 않겠지만ㅋ) 김규항이었나, 부모가 늙으면 그저 자식 걱정만 하며 남은 인생을 버티는 도인이 된다고 얘기 했었던게...

 

“...잘 지내니?”

 

“네...

 

...아버지도 건강하시죠?”

 

“응...

 

...끊을께"

 

"네..."

 

 어색한 대화들과 더 어색한 공백들로 채워진 짧은 전화통화가 끝나고, 나는 아버지가 늙었구나...생각했다. 예전엔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했던,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진 않겠노라고 그의 얼굴을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나에게서 보았을 때 그 밀려오는 자기혐오들... 지금은 그저 미안함만이 남아있다. 통화하느라 몇 번 빨지도 못한 채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비벼 끄면서, 더 이상 이 사람에게 상처주지는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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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습.

 더 이상 찌질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그 다짐을 반복하고 있는 지금 나는 여전히 찌질하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오로지 그 사람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안고 싶고,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심지어 그 누군가와 같이 있어도,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으면 하는 못된 상상을 하고는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일년 동안은, 아니 어쩌면 평생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절대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를 막고 있는 것은 미국과 한국 사이의 거리도 아니고, 바다를 건너기 위해 필요한 비행기값 백만원도 아니고, 설사 거기까지 간다고 해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도 아니다. 그것들은 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나를 막고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나의 자리가 없다는 것, 라깡 식으로 말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행위는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나 자신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나는 그저 방구석에 틀어 박혀서 이 시간이 아주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때때로 그 사람과 마주 보고 있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그 사람의 미소 짓는 얼굴과 그 미소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고 있는 내 모습이다. 울어본지 너무 오래 되어서 눈물이란게 남아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나이기에 과연 그럴까하는 의심이 들지만, 확인하게 되는 그날까지는 절대로 눈물 보이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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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so fine.

 얼마 전의 글에서 ‘이제 말을 좀 줄여야 겠다’라고 했지만, 요즈음의 나는 전혀 그렇지 않고 있다. 이전 같았으면 나의 뿌리자체가 흔들렸을 법한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실실 웃고 있다가 실없는 농담 따위를 던진다거나, 이미 오래전에 했던 과거완료형시점 고민들의 찌끄러기들을 아무런 우러나옴 없이 현재진행형 시점으로 꾸며 잘도 술술 지껄여대곤 한다. 또, 전혀 나의 문제의식으로 다가오지 않는 주제들에 대해 알량한 지식들을 동원해서 젠 척하며 떠벌이는 식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보면 진심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한다. 모든 상황들이 내가 이해 가능한 수준에서 돌아간다. 설사 그렇지 못한 상황이 있더라도 그건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간단하게 경계선을 그어버리면 그만이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언젠가는 곧 산산조각 나고야말 이 평온함을 그럴듯하게 즐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즈음 어떤 이의 고민에 대해서 알지만 공감하지 못하고, 공감했다하더라도 공명하지 못한다.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그 사람을 도와 줄 수도, 진심으로 말을 걸 수조차 없다. 그 누군가를 위해서도, 또 나 자신을  위해서도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걸 알지만 그래도 확실한건 이편이 건강에는 훠얼씬 좋다는 거다.
 
*이렇게 나름 심각하고 진지하고 솔직하게(나름!) 글을 쓰면서도 뭔가가 답답하게 막혀있어서 풀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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