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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아찾기(3)

(이 머리말은 '만약'을 위해 매번 똑같이 붙이는 것이다. 한번 읽으신 분은 그냥 넘어갈 것.) 

 

이글의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허구다. 최근 전 남편이 소설 연재를 금지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내서 화제를 모았던 공지영 씨의 새 소설 '즐거운 나의 집'처럼 말이다. 아마 그래서 남편도 공지영 씨의 전 남편과 마찬가지로 "이 글 속의 남편이 나로 인식돼 프라이버시권이 침해됐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쓴다. 난 공지영 씨처럼 유명하지 않으니까. 또 (내 블로그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내 블로그 주소를 모르는 남편은 이 글을 읽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가처분 신청 따위를 내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가 이 글을 읽고 분노하게 된다면 이혼한 상태도 아니니 그 댓가가 어떤 것이든 달게 받으리라. 사뭇 비장해지는듯 한데 사실 시시껄렁한 잡문이다.

 

요즘 <외도, 그 후>라는 책을 읽고 있다. 회사 상사가 장난 삼아 결혼 선물이라고 던져 준 책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꺼내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책에는 여러가지 외도의 원인과 유형, 또 파트너의 외도를 접했을 때의 대처법, 이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고려해야할 점 등 어느 한 쪽이 외도를 한 커플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심리상담서다. 물론  더 큰 사랑(?)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가장 바람직한 결론으로 깔고 있기는 하지만 무작정 참고 살라는 류의 책은 아니다.

 

여하튼 내가 이 책을 꺼내든 이유는 외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딱히 외도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도의 필요성은 느낀다.

 

무슨 소리냐고? 이 책에는 외도의 한 유형으로 '삼발이형 외도'를 소개하고 있다.  책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불행한 결혼생활을 그대로 유지한다. 경제적인 이유, 자녀들에게 미칠 악영향에 대한 두려움, 이혼으로 인한 사회적 불이익, 부모를 비롯한 친지들의 걱정 등등. 그런데 무작정 참고 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불행한 결혼생활에서 얻지 못하는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한다. 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결혼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제3자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이때 제3자는 우정과 성적인 만족, 사랑, 그리고 모험까지 제공해준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유형의 부부들 중에는 배우자의 외도 사실을 알거나, 혹은 의심하면서도 굳이 꺼내거나 따지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외도를 일종의 은신처로 삼거나, 결혼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공공연하게 합의한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남편과 소위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남편이 퇴근해 있다는 메시지를 받고 집에 돌아가는데, 내 스스로 '집에 가기 싫다'는 마음에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집에 들어간 이후 잠들기 전까지 서너 시간이 어떨지가 머리 속에 선하게 그려지면서 '차리라 들어오지 말지'라는 마음이 불끈불끈 솟는 것이었다.

 

 '잘 왔어요?'라는 인사를 나눈 뒤, 남편은 인터넷으로 다운 받은 만화나 영화를 볼 것이고 나는 TV를 보거나 책을 좀 읽다가 금새 잠이 들 것이다. 그리고 남편은 새벽 3-4시쯤 잠자리에 들 것이다. 

 

내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남편은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자기가 하던 일에 빠져 들었고, 나는 왔다갔다 하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 치솟아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영화에 빠져 있는 남편에게 말을 걸고야 말았다! 물론 아주 차분한 말이 오간 것은 아니지만 그닥 과격한 말을 던진 것도 아니었다. 그 놈의 한가닥 남은 자존심 때문에.

 

남편의 반응은 놀람과 이후 긴 침묵이었다. 남편은 화가 나면 그 이후 절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내가 주저리주저리 불만을 얘기하는 싸구려 짓을 계속하는 동안 남편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시간이 지나고 나서 남편이 한 말은 자기가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 혼자 내버려두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난 스트레스 받는 남편을 괴롭히는 속좁은 아내가 돼 버렸다. 이날 이후 난 남편과 관계 개선을 상당부분 포기했다. 지금 상태가 남편에겐 가장 좋은 상태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쓸데없이 괴롭히는 일이 없다면 좀 더 좋을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나아질 필요가 없는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내가 이 관계에서부터 서서히 빠져나와야한다. 이게 내게 외도가 필요한 이유다. 어쩌면 그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을 위한 것, 그리고 우리 관계의 유지를 위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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