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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9/20
    "슬픔이 흘러 당신들에게도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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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5/18
    비폭력 '직접 행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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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5/10
    '보헤미안' 박원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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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4/12/16
    전순옥-'시다의 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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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흘러 당신들에게도 평화가..."

슬픔은 흘러야 한다. 한 사람의 가슴에 있는 슬픔이 흐르지 않고 고이면 그 슬픔은 한 사람을 파괴한다. 미군에 의해 남편과 세 명의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한 이라크 여인처럼.
  
슬픔은 흘러야 한다. 한 사람의 가슴을 잠식한 슬픔이 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스며들지 않을 때 인간은 타인을 죽일 만큼 잔인해질 수 있다. 그래서 슬픔은 강물을 이뤄, 바다가 되어 흐르고, 또 흘러야 한다.
  
 "웃지 않는 아이들, 전쟁의 어떤 모습보다 슬프고 무서워"
  
지난 2004년 3월부터 106일 동안 이라크 바그다드에 머물렀던 윤정은씨가 자신이 경험한 전쟁에 대한 기록을 묶어 <슬픔은 흘러야 한다>(즐거운 상상)를 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 책은 그가 본 전쟁 속 이라크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다.
    
 


이라크에서도 먹고 입고 자고 살아 남아야 하는 고단한 일상, 서로가 무언가를 진심으로 이해했을 때 따뜻한 정서를 함께 느끼는 것은 똑같았다.
  
그러나 그 곳은 폭탄 소리에 잠에서 깨고, 세계에서 석유가 2번째로 많이 묻혀 있다지만 시도 때도 없이 전기가 끊긴다. 길에서 담배와 물을 팔던 소년이 어느날 갑자기 폭탄을 맞아 갈갈이 찢기고, 가족과 친구를 잃은 10대 소년이 무자헤딘이 되겠다며 총을 들고 집을 나가고, 어린 아이들조차 웃지 않는다. 그는 "웃지 않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전쟁의 어떤 모습보다 슬프고 무서운 장면"이라고 회고했다.
  
"아이들의 눈을 볼 때가 가장 슬프다. 전쟁을 목격하고 사막을 넘어 죽음을 본 그 영혼이 입었을 상처를 생각하면 너무도 슬프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너무나 맑아 그 아이러니한 풍경에 가끔 넋을 잃는다."
  
 "전쟁이 비참한 건 사람이 죽어서만이 아니다"
  
이라크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14일 하루 동안에만 이라크 곳곳에서 10여 건의 크고 작은 테러가 발생해 180여 명이 숨지고, 570여 명이 다쳤다. 미군과 이라크군의 수니파 저항세력 토벌 작전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뤄진 이날 테러를 외신들은 본격적인 내전의 시작이라고 분석했다. 사람들 마음에 쌓인 분노와 원한의 응어리가 다 풀어지기 전까지 이라크에서 전쟁은 끝난 게 아니다.
  
 "전쟁이 비참한 것은 사람이 죽어서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와 신뢰가 무너져 내리고, 살아 남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는 절망적인 사회가 되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오염된 물과 공기, 민가와 공공건물의 파괴, 약탈, 여성들에 대한 납치사건과 아이들의 유괴,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실업난, 의약품과 식량의 부족, 수도와 전기 통신시설의 파괴,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서 사람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속이고, 팔아 넘겼다. (…) 사람들의 마음과 인간관계, 사회 전반에 생긴 이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 앞으로 어떤 치유의 과정을 거쳐야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50여 년전 3년간의 전쟁 이후 분단 국가로 긴 휴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도 여전히 전쟁의 생채기로 신음하고 있지 않은가.
  

 "전쟁의 기록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윤정은 씨에게 106일간의 이라크 체류 경험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전쟁은 사람들이 죽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그러나 더 비극적인 것은 그 죽음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숫자가 아닌데, 언론은 전쟁 속 죽음과 관련해 숫자만 보도한다. 모두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들 인생의 역사와 이야기들이 있다.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있을까. 사람들이 죽는 전쟁에서 승패라는 것은 없다. 전쟁을 게임으로만 보는 사람들과 전쟁에서 이익을 챙기거나 잃는 권력자들이 승패를 논할 뿐이다."
  
그는 "전쟁의 기록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며,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록자는 힘과 폭력에 저항하며, 자본과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투쟁하고 기록해야 한다. 전쟁은 타인의 죽음과 피해와 이후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될 고통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을 힘과 돈에 의해 왜곡하거나 수단화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기존의 전쟁에 대한 언론 보도를 비판했다.
  
 
그의 가슴 속에 스며든 전쟁 속 이라크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의 그림과 글을 통해 내 가슴에 흘러들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것을 지속적으로 뺏기 위해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이 전지구화된 경제구조를 지탱하고, 그래서 또 세계 어느 곳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의 무관심일 수 있다고 윤정은씨는 지적했다. 그의 책이 발원지가 돼 슬픔이 강물이 되기를 바란다.
  
살람 알레이쿰!(평화가 당신에게!) 

 

덧붙이는 말 : 이 책의 필자 윤정은은 내 친구다. 내게 이 책인 더 소중한 이유는 그가 이라크에 머무르는 106일동안 난 한국에서 함께 가슴 졸였기 때문이다. 멀리서 어렴풋이나마 전해듣는 전쟁 소식도 그토록 가슴 아픈데 그 땅에서 직접 전쟁을 경험하는 이들의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윤정은의 지적처럼 "그저 그들의 고통의 가장자리에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 우리가 해야할 최선일 것이다. 

 

윤정은이란 친구가 있어 내 삶이 조금이나마 겸손해질 수 있을 것 같아, 난 참 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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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직접 행동'

'비폭력 직접 행동'은 마하트마 간디의 저항 방식에서 구체화됐다.

 

'비폭력 직접 행동'에선 전자인 비폭력적 저항에 방점이 찍힌다고들 흔히 생각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불의에 맞서는 '직접 행동'이다.

 

간디는 "이 땅에서는 직접적인 행동 없이는 그 무엇도 행해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비폭력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지적했었다.


(데이빗 핫소오 NP 창설자)



지난 금요일 '비폭력 평화연대'(Nonviolent Peaceforce)의 한국지부 성격을 띠는 '비폭력 평화물결'는 NP 창설자인 데이빗 핫소오(David Hartsough) 초청 강연을 열었다.

 

핫소오는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목사였던 자신의 아버지와 열다섯살인 1956년 만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꼽았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인종차별철폐 운동은 '비폭력 직접 행동'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이에 영향을 받아 핫소오는 워싱턴에 있는 흑인들의 입학도 허용했던 하워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 2학년 때 그는 버지니아주 알링톤에서 흑백분리 정책에 '비폭력 직접 행동'으로 맞섰던 경험을 들려줬다. 그를 포함한 12명의 대학생들(백인 1명, 흑인 11명)은 백인들만 출입이 가능했던 식당을 방문해 음식을 주문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들은 식당에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튿날도 똑같은 식당을 찾았고, 또 다음날도, 그렇게 일주일을 똑같은 식당을 방문해 이른바 '점거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물론 '점거시위'를 벌이는 동안 유일한 백인 동조자였던 그는 폭력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한 백인 남성은 그에게 칼을 들이대며 "2초 안에 사라지라"고 위협했으나 핫소오는 "나는 계속 당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라"고 답했다. 그 남성은 아무 일도 저지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의 '점거시위'는 버지니아주의 식당에서 흑인들의 출입 규제를 없애는 계기가 됐다.

 

NP는 1978년부터 미국의 지원으로 군부독재정치가 계속돼던 과테말라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활동도 했다. 과테말라 정부는 10만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한 운동가들은 어느날 실종돼 죽임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85년 3월과 4월에도 연달아 반정부 활동가들이 죽었고, 과테말라 활동가들은 국제적 지원을 요청하게 됐다. NP는 당시 핵심적인 활동가였던 여성 두명을 보호하기 위해 NP 활동가들을 콰테말라로 파견했고, 이들 NP 활동가들은 24시간 내내 여성 활동가와 동행하며 이들을 보호했다. 이 두 여성은 결국 죽지 않았고 많은 과테말라인들에게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줬다고 핫소오는 회고했다.

 

NP는 스리랑카에 지난 2002년 4월부터 25명의 활동가를 파견해 무력충돌을 막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스리랑카를 비롯한 90여개국에 NP 활동가를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고 이는 1년에 1백7십만 달러의 비용 밖에 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군이 2분 동안 쓰는 돈에 불과하다.

 

핫소우가 주장하는 '비폭력 직접행동'이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상존하고 있는 한반도에선 이상적이고 유약하고 소극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현실적으로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비폭력 직접행동'의 정신과 원칙은 그 어떤 운동보다 강하며 적극적이다. 

 

"비폭력은 결코 현실에서 악의와 맞서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결 능동적인 투쟁 형태이다. 악의를 늘릴 뿐인 폭력적인 반격보다 훨씬 현실적인 투쟁 형태이다."

 

"힘이란 물리적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굴의 의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임무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 의지 굳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도 간디의 말을 인용했다. 

 

참고: 스리랑카 

 

싱할라족이 지배하는 스리랑카는 65년부터 타밀족이 분리독립을 추진하면서 충돌이 잇따랐다. 특히 83년 타밀족 본거지 자프나에서 정부군 몇명이 사망하면서 싱할라족이 타밀족 1천여명을 살해했다. 이를 계기로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가 결성돼 본격적인 내전이 전개됐다. 80년대 LTTE는 소련의 지원도 받고 조직력과 자금력을 무기로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스리랑카는 인도에 지원을 요청 87년 평화유지군 성격의 인도군이 파견된다. 그러나 인도군은 89년까지 2천5백명의 희생자를 낸 채 철수했다.1990-2000년대 들어서도 정부군과 LTTE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인도와 미국, 스리랑카가 LTTE를 불법단체로 규정했고, 정부와 반군간에 협상도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다. 30여년에 걸친 오랜 내전으로 6만5천여명이 죽고, 1백60여만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라나싱헤 프레마다사 총리 등 정치지도자 10여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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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박원순

기자질을 한지 5년 가까이 되다 보니 가끔 내가 과거에 썼던 글조차 기억 못 할 때가 있다.

 

오늘 박원순 변호사의 새 책 <독일사회를 인터뷰하다 : 박원순 변호사의 독일 시민사회 기행>(논형)에 대한 서평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50510163711&s_menu=문화) 을 쓴 뒤 2002년 초 그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쓴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보헤미안'이란 박 변호사의 고백을 그 인터뷰에서 들은 것이었다. 난 박 변호사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사석에서 들은 얘기로 기억하고 뿌듯해 했건만...


 

당시 인터뷰 기사 중 일부를 옮겨왔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국무총리, 교육부총리, 법무부 장관, 공정거래위원장, 인권위원장 등 가장 많이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박 변호사의 모습을 비교적 잘 묘사한 글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 그때 당시 인터뷰 제목은 "삼성도 망할 수 있다"는 도발적인 것으로, 최근 이건희 회장 사태로 다시 한번 '삼성'을 둘러싼 논란이 일기도 했으니까. 

 

난 도대체 노무현 정권에서 박 변호사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계속 '러브콜'을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지독한 '몽상가'다.



다음은 당시 인터뷰 중 일부.

 

도대체 사람이 어쩜 그럴 수 있을까? 돈벌이도 못하고 바쁘긴 엄청 바쁘면서도 입만 열면 '신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 참여연대의 박원순 사무처장 말이다. 혹시 거짓말 아닐까?
  
그래서 오늘(1월 3일)의 주제는 시비걸기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더 나아가 존경하는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47)에게 그가 삼성에, 부패한 정치인에 그랬듯 사정없이 ‘딴지걸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딴지걸기’를 통해 우리는 그의 치명적인 약점들을 찾아냈다.
  
우선 그는 실정법(선거법)까지 어겨가며 낙천ㆍ낙선운동을 벌인 ‘범법자’다(총선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이었던 그는 지난달 26일 항소심에서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부지런함으로 아랫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교묘한 독재자’다. 참여연대가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불독’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도 그의 ‘똥고집’ 때문이다.
  
권력과 명예, 게다가 부까지 보장되는 검사와 변호사 자리도 박차고 나올 만큼 지독한 '몽상가'에다 ‘보헤미안’ 기질까지 농후하다. 다들 보수와 안정을 희구하는 21세기 한국에서 '혁명적 개혁'을 이뤄야 한다며 초조해 하는 '혁명가'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국내 제일의 기업인 “삼성이 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지독한 ‘독설가’다.
  

 '교묘한 독재자'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실 아래층인 느티나무 카페에 박원순 처장은 약속시간보다 10여분 늦은 10시 40분경에 나타났다. 정관용 에디터는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맞이하며 대뜸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지금 내복 입으셨어요?”
 “안 입었어요.”
 “환경단체에서 하는 내복입기운동에 동참 안 하십니까?”
  

박처장은 다소 머쓱해 하며 "원래 잘 안 입어요. 건강하니까 내복 안 입어도 춥지 않아요"라고 대꾸했다.
  
우리는 이어 불룩한 그의 배낭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양복에 자주색 배낭. 다소 안 어울리는 차림새지만 그는 ‘공식행사가 없으면’ 배낭을 즐겨 맨다. 책도 많이 들어가고 겨울에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가방에 책을 많이 들고 다니는 것이 ‘지나친 욕심 아니냐’, ‘과시용 아니냐’ 등 다소 억지스런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어 박원순 처장은 자진해서 자신의 ‘초기 치매현상’까지 실토했다.
 

 “인상적으로 본 것은 오래 기억하지만 오늘 내가 누구를 만났더라, 이러면 기억이 안 나거든요. 그래서 연구 끝에 수첩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바쁜 사람에게 안성맞춤인 한국 리더십 센터에서 제작한 수첩엔 하루하루 해야 할 일/ 약속/ 실제 한 일,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몇 장 뒤적여 보니 거의 매일 6,7개의 약속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기자는 학교 다닐 때 외엔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는 ‘새해 소망’도 끼워져 있었다.
  

 새벽 2-3시에 잠자리에 드는 그는 잠이 늘 부족하다. 모자란 잠은 차 속에서, 심지어 회의 시간에 보충한다. 참여연대 사무처장 7년 만에 반쯤 자면서 회의 내용을 듣는 득음(得音)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부지런함에 대해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려 있는 것 같다”며 애써 부정했다.
  
그러나 박 처장은 피곤한 지도자 유형중 하나인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간사급 사무처장’이라고 인정하는 그는 근면과 성실로 매번 간사들의 기를 죽이는 ‘교묘한 독재자’다.
  
불독’ 참여연대에 물린 삼성
  
이 ‘교묘한 독재자’가 이끄는 참여연대의 별명은 ‘불독’이다. 한번 물면 끝장을 볼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기 때문이다.
  
초일류기업 삼성도 '불독' 참여연대에 물려 곤욕을 치르고 있다. 참여연대는 작년 말 소액주주운동의 일환으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과 이사들을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9백77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4년여를 끌어온 싸움의 1라운드 승리는 참여연대에게 돌아갔다. ‘왜 그렇게 삼성을 못 살게 구느냐’는 질문에 박 처장은 삼성에 대한 ‘충정’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로 가면 삼성도 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우도 망하고 현대도 자동차와 중공업 빼고는 망했습니다. 5년전만 해도 현대가 망하리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전근대적인 경영형태와 관행들이 자기 살을 갉아먹었기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삼성자동차의 실패는 삼성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삼성이 ‘세계 일류’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마치 참여연대와 ‘오기 싸움하듯’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세계 일류 기업답지 않다는 지적이다.
  
“앞으로도 삼성에 대해서는 소액주주 운동을 계속할 것입니까.”
 “참여연대는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합니다.”
  
정말 그와 참여연대는 징그러울 정도로 ‘똥고집’이다.
  
'보헤미안+혁명가' 박원순
  
그만큼 그와 참여연대는 닮은꼴이다. 그런데 그가 지난해부터 후임 사무처장을 물색하고 있다. 스스로 “영원한 실무자”라고 말하는 그는 이제 사무처장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현업’에 복귀하기를 바란다. 올해 참여연대에 재활용 사업을 하는 대안 사업국이 생겼는데 그 일을 해보고 싶다는 것.

그는 사무처장에서 물러나고 싶은 또 한가지 이유로 자신의 ‘보헤미안’적 기질을 들었다. 그는 결혼생활 이외에는 십여년 넘게 꾸준히 해온 일이 없었다.
  
정선 등기소장 1년, 사법고시 합격 후 검사 생활 1년, 9년 동안 변호사 일을 하면서도 임헌영, 원경선, 이호웅, 김성동씨 등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를 만들었다. 1991년부터 2년간 미국 하버드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있었다. 그런 그가 7년 동안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해왔으니...
  
‘보헤미안’ 박원순 처장이 꾸준히 시민운동을 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내면에 흐르는 ‘혁명가’적 기질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나도 한때는 정치를 생각했었다"는 의외의 말을 던졌다. 지난 85년 전직 국회의원 등 고향선배들이 출마를 권유했던 것. 지역주민들한테 때 되면 편지도 보냈다. 그러다 '젊음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뒀다고. 지금은 정치보다는 시민운동에서 자신이 할일이 훨씬 큰 것 같아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시민운동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그는 미국과 일본을 돌아보며 “나라는 개판이고 사회는 엉망이지만 할 일도, 바뀔 여지도 많아서 한국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16대 총선에서 낙선운동이 의외의 성과를 거두면서 ‘가능성’과 ‘희망’을 절감한 그는 “지금은 혁명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자족적인 운동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하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하다.
  
우리는 한시간 반가량의 시비걸기를 통해 인간 박원순의 몇 가지 약점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들이 지난 7년간 참여연대를 가장 신뢰받는 시민단체로 성장하게 만든 중요한 밑거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우리의 시비 걸기는 ‘실패’로 끝났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올해 참여연대에서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참여연대 1년 사업은 매년 2월말에 있는 총회를 통해 결정된다고 한다. 아직 금년에 있을 지방선거와 대선 전략도 구체화되지 않았다. 확정된 것은 6월 지방선거에 낙선운동은 벌이지 않는다는 사실 뿐.
  
그밖에 금년 1년의 화두랄까 가장 역점을 둘 일이 뭐냐고 물었지만, "우리가 1년 단위로 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정부기관처럼 신년 역점사업 1, 2, 3.. 해 가며 액자에 걸어두는 사람들이 아니쟎아요"라고 되묻는다.
  
박 처장은 인터뷰를 시작한지 한 시간 반이 지나자 시계를 보기 시작했다. “저희 대표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서...” 오전 8시부터 약속이 있어 늦었다던 그는 그 날도 예외없이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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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옥-'시다의 꿈'

최근 박노해씨 시집 '노동의 새벽' 20돌 헌정앨범이 제작돼 발매를 시작했다.

 

한 기자는 "2004년 대중음악계는 김민기씨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이 새로운 음반으로 제작됐다는 것과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이 노래 앨범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두 가지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문화일보).

 

'노동의 새벽' 앨범에서 발견한 정말 뜻밖이자 반가운 이름. 전순옥.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자 국내에서 드물게 여성 노동자의 삶을 연구하는 학자인 그가 '시다의 꿈'을 불렀다.

 

내가 전순옥씨를 만난건 지난 5월. <대화>라는 대담을 기획하면서 첫 번째 손님으로 그를 모셨다. 

 

여전히 종로구 창신 2동, 동대문 시장 골목을 떠나지 않은 그는 말도 많고 잘 웃는 사람이었다.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웠다.




기자란 인간들이 늘 그러하듯 바쁘다는 핑계로 '단물'만 쏙 빼먹고 연락도 못 드리고 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동대문 시장통에서 그의 소개로 찾은 막걸리집에서 먹은 부침개와 막걸리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말도 못하게 싸다.)  전순옥씨가 남편 크리스의 전화로 약간 술이 오른 나, 강양구 기자, 조주은씨(이대 여성학과 박사과정.<현대가족이야기> 저자)를 남겨두고 먼저 가서 더 아쉬웠다.

 

해가 가기 전에 다시 동대문을 찾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막걸리 한잔 할 수 있을까.    

 

다음은 <대화>에 실렸던 전순옥씨 소개글.

 

동대문 창신동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장인 전순옥(50)씨에게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전순옥씨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16살이었던 그녀는 어머니 이소선씨와 함께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전씨는 22세까지 봉제의류 공장에서 일했고 그 후 노동조합 활동, 지역운동을 했다. 그녀는 35세의 늦은 나이에 영국 유학길에 올라 지난 2001년 런던 워릭대에서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을 다룬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They are not machines)>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그해 워릭대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최근 출간된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한겨레신문사 펴냄)는 이 논문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동일방직노조·청계피복노조 등 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 1백여명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 또 그녀들의 삶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전씨는 유학을 떠나기 전 바로 그 자리로 돌아왔다. 영국 대학과 성공회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있는 동대문에서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사회에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내가 할일"이라고 생각하며 "저소득층 여성노동자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전씨는 또 지난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A Single Spark)을 영어로 옮긴 데 이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의문사진상위원회 등의 한국 민주화운동사 영문 번역 작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 작업에는 뒤늦게 그녀의 인생의 반려자가 된 남편 크리스 조엘(61)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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