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비폭력 '직접 행동'

'비폭력 직접 행동'은 마하트마 간디의 저항 방식에서 구체화됐다.

 

'비폭력 직접 행동'에선 전자인 비폭력적 저항에 방점이 찍힌다고들 흔히 생각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불의에 맞서는 '직접 행동'이다.

 

간디는 "이 땅에서는 직접적인 행동 없이는 그 무엇도 행해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비폭력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지적했었다.


(데이빗 핫소오 NP 창설자)



지난 금요일 '비폭력 평화연대'(Nonviolent Peaceforce)의 한국지부 성격을 띠는 '비폭력 평화물결'는 NP 창설자인 데이빗 핫소오(David Hartsough) 초청 강연을 열었다.

 

핫소오는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목사였던 자신의 아버지와 열다섯살인 1956년 만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꼽았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인종차별철폐 운동은 '비폭력 직접 행동'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이에 영향을 받아 핫소오는 워싱턴에 있는 흑인들의 입학도 허용했던 하워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 2학년 때 그는 버지니아주 알링톤에서 흑백분리 정책에 '비폭력 직접 행동'으로 맞섰던 경험을 들려줬다. 그를 포함한 12명의 대학생들(백인 1명, 흑인 11명)은 백인들만 출입이 가능했던 식당을 방문해 음식을 주문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들은 식당에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튿날도 똑같은 식당을 찾았고, 또 다음날도, 그렇게 일주일을 똑같은 식당을 방문해 이른바 '점거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물론 '점거시위'를 벌이는 동안 유일한 백인 동조자였던 그는 폭력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한 백인 남성은 그에게 칼을 들이대며 "2초 안에 사라지라"고 위협했으나 핫소오는 "나는 계속 당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라"고 답했다. 그 남성은 아무 일도 저지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의 '점거시위'는 버지니아주의 식당에서 흑인들의 출입 규제를 없애는 계기가 됐다.

 

NP는 1978년부터 미국의 지원으로 군부독재정치가 계속돼던 과테말라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활동도 했다. 과테말라 정부는 10만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한 운동가들은 어느날 실종돼 죽임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85년 3월과 4월에도 연달아 반정부 활동가들이 죽었고, 과테말라 활동가들은 국제적 지원을 요청하게 됐다. NP는 당시 핵심적인 활동가였던 여성 두명을 보호하기 위해 NP 활동가들을 콰테말라로 파견했고, 이들 NP 활동가들은 24시간 내내 여성 활동가와 동행하며 이들을 보호했다. 이 두 여성은 결국 죽지 않았고 많은 과테말라인들에게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줬다고 핫소오는 회고했다.

 

NP는 스리랑카에 지난 2002년 4월부터 25명의 활동가를 파견해 무력충돌을 막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스리랑카를 비롯한 90여개국에 NP 활동가를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고 이는 1년에 1백7십만 달러의 비용 밖에 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군이 2분 동안 쓰는 돈에 불과하다.

 

핫소우가 주장하는 '비폭력 직접행동'이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상존하고 있는 한반도에선 이상적이고 유약하고 소극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현실적으로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비폭력 직접행동'의 정신과 원칙은 그 어떤 운동보다 강하며 적극적이다. 

 

"비폭력은 결코 현실에서 악의와 맞서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결 능동적인 투쟁 형태이다. 악의를 늘릴 뿐인 폭력적인 반격보다 훨씬 현실적인 투쟁 형태이다."

 

"힘이란 물리적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굴의 의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임무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 의지 굳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도 간디의 말을 인용했다. 

 

참고: 스리랑카 

 

싱할라족이 지배하는 스리랑카는 65년부터 타밀족이 분리독립을 추진하면서 충돌이 잇따랐다. 특히 83년 타밀족 본거지 자프나에서 정부군 몇명이 사망하면서 싱할라족이 타밀족 1천여명을 살해했다. 이를 계기로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가 결성돼 본격적인 내전이 전개됐다. 80년대 LTTE는 소련의 지원도 받고 조직력과 자금력을 무기로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스리랑카는 인도에 지원을 요청 87년 평화유지군 성격의 인도군이 파견된다. 그러나 인도군은 89년까지 2천5백명의 희생자를 낸 채 철수했다.1990-2000년대 들어서도 정부군과 LTTE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인도와 미국, 스리랑카가 LTTE를 불법단체로 규정했고, 정부와 반군간에 협상도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다. 30여년에 걸친 오랜 내전으로 6만5천여명이 죽고, 1백60여만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라나싱헤 프레마다사 총리 등 정치지도자 10여명이 사망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