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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이민자는 '여성'만이 아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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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과 골프'의 역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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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1/23
    삐뽀삐뽀...노대통령 긴급기자회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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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민자는 '여성'만이 아니다

정부가 26일 혼혈인 및 결혼이주자에 대한 지원대책을 마련했다.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위원장 이혜경)는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국무총리,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법무부 등 관계부처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정과제회의를 열고 '혼혈인 및 이주자의 사회통합 기본방향'과 '여성결혼이민자 가족의 사회통합 지원대책'을 확정했다.
 
  최근 미국 슈퍼볼 MVP를 수상한 한국계 미국인 하인즈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혼혈인의 사회적 차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증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이번 대책은 그간 우리 사회가 혼혈인 및 이주자 문제에 대해 무관심과 냉대로 일관해 왔다는 점에서 비약적 발전이다.
 
  하지만 결혼이민자에 대한 기본적인 통계조차 없을 정도로 전무했던 정책을 이주 과정부터 정착 후 적응 단계까지 갑자기 완비하려다 보니 적잖은 진통이 예상된다. 당장 차별시정위가 이날 제시한 안에 대해 천정배 법무장관은 "눈에 보이는 불법체류자들을 허용하자는 것인데 국가 권력이 그렇게 하긴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관계 부처간 의견 조율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혼이민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 vs '이주노동자에 대한 싸늘한 시선'
 
  또 이날 차별시정위에서 발표한 정책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이주자 및 외국인에 대한 이중적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
 
  결혼을 통한 이주는 지구화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별에 따라 다른 이주의 한 방식이다. 중국, 필리핀, 몽골, 베트남 등 저개발국가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 이주한다. 역방향의 이주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결혼'과 '이주'는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위장결혼'이라는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노동자로 한국에 올 수 없는 여성들 중 일부가 결혼을 통한 이주를 선택한다. 외국인 노동력 유입에 대한 강력한 통제 정책과 남녀 간 서로 다른 자원의 교환을 의미하는 가부장적 결혼 제도가 맞아 떨어져 1990년대 이후 한국 남성과 저개발국 출신 여성의 결혼이 급속히 증가했다.
 
  그러나 '농촌 총각과 결혼해 사는 필리핀 새댁'으로 이미지화 돼 있는 여성 결혼이민자에게 쏟아지는 온정적 시선이 이주노동자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여성 결혼이주자는 한국 여성과는 결혼하기 힘든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 가족제도를 유지시켜주는 고마운 존재지만 이주노동자는 불법 체류까지 하면서 우리나라의 부를 갉아 먹으려는 귀찮은 존재로 인식된다.
 
  이날 발표된 '혼혈인 및 이주자의 사회통합 기본 방향'에서도 국내 이주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식조차 되지 않는 남성 결혼이민자
 
  또 이날 발표된 정책은 '한국인 남성'의 관점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결혼 자체를 매개로 한 이동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일 수 있겠지만 결혼이민자는 여성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주노동자로 일하다가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들도 엄연한 결혼이민자다.
 
  이들 외국인 남성들은 여성 결혼이민자와 마찬가지로 혼인 후 2년이 지나야 한국 국적을 획득할 수 있다. 2005년 말 현재 한국인과 사실혼 관계에 있는 외국인 배우자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7만5011명(여성 6만6659명, 남성 8352명)에 달한다.
 
  하지만 '부계 혈통주의'가 공고한 한국 사회에서 이들 남성 결혼이민자들이 한국에 적응해서 사는 것은 여성 결혼이민자들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일 수밖에 없다.
 
  또 아버지가 한국인이어야만 자녀가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던 국적법이 지난 1998년 어머니만 한국인일 경우에도 자녀가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개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한국인 여성과 외국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양육 및 교육 문제는 심각하다.
 
  한국 국적법, 속인주의 버리고 속지주의 택할 수 있을까
 
  결혼이민자, 이주자, 혼혈인 문제는 궁극적으로 국적법과 연관된 사안이다. 한국 국적법은 자국 영토에서 태어났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 '속지주의'가 아니라 부모의 국적을 기준으로 삼는 '속인주의'를 택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국가의 경계가 약화되고 노동자, 국제결혼 등으로 국가간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는 세계화 시대에 혈통에 근거한 '속인주의' 원칙만을 고수하기는 힘들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주 노동자가 국내로 유입되기 시작한 역사가 20년이 넘으면서 한국에서 태어난 이주노동자 2세들의 국적 문제는 이미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말을 쓰지만 이주노동자의 자녀는 영원히 한국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국적법에 속지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이를 거부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지난해 12월 ▲대한민국에서 출생한 사람은 부 또는 모의 국적에 관계없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며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자를 둔 외국 국적의 부 또는 모 역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적법 개정안을 제출하려 했으나 포기했다. 네티즌 등의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하인즈 워드의 영향으로 일시적 변화가 있을 수 있겠지만 국민들의 배타적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날 차별시정위원회에서 발표한 정책들도 실효성을 갖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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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골프'의 역사

골프는 참 여러모로 신기한 운동이다.  

 

틈만 나면 으르렁 대던 여야 의원들도

골프장에서 만나면 '허허실실'해 대는 걸보면

골프장 공기는 여는 곳과는 다른것 같다. 

 

또 골프장 벽엔 맥주병으로 맞추는 다트판이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쩌다 한번 하면 무조건 욕 먹는 것 알면서도

'레임덕'이라는 소리에 토다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현 시국에도

구력도 5년 밖에 안 됐다는 노무현 대통령 꾸준히 치는 걸 보면

 

분명 골프장엔 뭔가가 있나 보다.



지난 18일 노 대통령이 윤광웅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와 골프를 쳐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이해찬 총리의 '노 대통령 허리 이상설'이 나온 직후인 지난달 29일 이 총리, 김원기 국회의장, 최종영 대법원장 등 3부요인과 라운딩한지 3주만이다. 

 

우리 국민 정서상, 더군다나 '서민 대통령'을 자처해온 노 대통령에게 골프가 여론상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는 건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틈틈이 '골프 정치'를 해왔다. 아마 상류층의 문화 이미 그러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측면도 있겠으나, '최고 권력자'라는 그의 위치를 고려할 때 이런 변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평범한 국민들은 '대통령이 골프를 무쟈게 좋아하는구만'에 넘어서 국민 여론에 반하는 대통령의 '골프 정치'에 분노를 느낀다.이제는 냉소를 보낼만 하다. "대통령님 나이스샷"~~

 

노 대통령이 취임 후 골프회동을 언론에 공개했던 건 지난 2003년 5월4일이 아니었나 싶다.  노 대통령 내외는 이날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 컨트리 클럽(18홀)에서 오전 5시30분부터 5시간 동안 골프를 쳤다. 당시 청와대 유인태 정무수석, 이해성 홍보수석, 반기문 외교보좌관, 김희상 국방보좌관, 김진표 경제부총리, 김화중 복지장관 등 12명이 동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보좌진들만 치려다가 골프를 치지 않는 문희상 비서실장, 문재인 민정수석 등이 빠지자 팀 구성이 안돼  김 부총리와 김 장관을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이날 처음으로 버디를 잡았다고 한다.


이날 골프회동에 대해 청와대 측은 "그동안 '돈있는 사람들은 골프도 치고 하면서 소비를 해야 경기가 살아난다'는 주변의 지적에 따라 대통령이 골프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주문을 받아왔다"며 소비 진작 차원에서 계획된 일이라고 밝혔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골프를 2000년에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승은 먼저 골프를 배운 권양숙 여사. 1988년에 국회의원 배지를 처음 달았던 것을 생각해보면(물론 그가 13대 국회의원 이후 15대때 보궐선거로 당시 당선됐다가 이후 계속 선거에 떨어지는 등 줄곧 야인 생활을 해오기 했지만) 그의 골프 경력은 비교적 짧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권 여사의 골프 실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졌다. 

 

'여자 캐디' 원조 만든 박정희 전 대통령

 

우리나라 대통령이 골프를 치기 시작한 역사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 때로 올라간다. 이 전 대통령은 정부 수립 1주년 기념일인 1949년 8월15일, 주한 외교관들과 군 고위층 등 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미군 장성들이 골프를 즐길 공간이 없어 일본 오끼나와로 간다는 얘기를 듣고 골프 코스 건립을 지시해 국내 골프장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군자리 골프장을 만들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골프를 아주 즐겼다고 한다. 특히 골프장에서 올라가면 딱 한 번만 퍼팅을 하고 끝냈는데, 고개를 숙이고  홀에 공을 넣으려고 하는게 국가원수로서 품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당시에는 대부분 남자들이 캐디를 했으나, 67년부터 군 골프장인 태릉CC에 처음으로 여자 캐디가 등장했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이 방문하면 가장 예쁜 캐디를 뽑아 내보냈다는 후문이다. 

 

'대통령 골프' 신조어 만든 전두환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골프를 가장 좋아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전 전 대통령은 그의 성격에 걸맞게 앞뒤 홀을 하나씩 비우게 한 뒤 라운드를 해 '대통령 골프'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고 한다.  법정에선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그는 지금도 골프를 즐긴다고 한다.  

 

반면 노태우 전대통령은 골프를 상당히 즐겼으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조용히 골프를 친 편이라고 한다. 특히 청남대 골프장에 가면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애용했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골프를 통해 얻어냈으나 집권 후에는 공직자 골프 금지령을 내렸다.  재임 기간 중 골프를 안치겠다고 선언했고 청와대 경내에 설치된 골프연습장까지 철거시켰다. 

 

한편 김대중 전대통령은 다리가 불편해 골프를 치지 않았다.

 

(네이버 카페 '골프 이야기'에 게재된 글을 참조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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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정상회담과 로비스트

로비스트(lobbyist)는 특정 이익단체를 대표해 정책이나 입법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정책 입안자나 정당, 의원을 상대로 활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말은 19세기 미국에서 유래된 것인데,  당시 워싱턴 D.C의 윌라드 호텔(Willard Hotel)의 로비(lobby)에 각 이익 집단들의 대표가 그 호텔에 주로 숙박하는 의원들을 만나기 위해 모이곤 했다는데서 비롯됐다. 윌라드 호텔은 미국 백악관과 의회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미국에서 로비스트는 합법적인 '직업'이다. 당국에 등록을 한 로비스트들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활동하는지 등 활동 내역에 대해 보고할 의무가 있지만 동시에 '청원권의 보장'에 근거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로비 활동은 불법이다. YS 정부 때 국방부 통신감청용 정찰기 도입 사업인 백두사업과 관련된 '린다 김 사건'을 통해 로비스트라는 직업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명품 옷에 명품 선그라스를 낀 신비에 가득찬 미모의 여성 로비스트 이미지....한때 '린다김 패션'은 한국 강남 중년 여성들을 휘어잡기도 했다.

 


 

(로비스트라는 말이 유래된 윌라드 호텔 복도. 이 긴 복도를 따라 가면 나오는 로비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란다.)



뜬금없이 웬 로비스트 타령이냐고?

 

지난 주말 '1박3일'이라는 초미니 일정, 그렇지만 "최근 10년간 가장 중요한 회담"이라는 한미정상회담 취재를 위해 워싱턴 D.C를 찾았고, 기자들이 머물렀던 곳이 바로 윌라드 호텔이었다.

 

짐 풀고 기사 쓰고 다시 짐싸서 출발하기 바쁜 일정 속에 로비스트의 어원을 확실히 알게 된 게 개인적으로 거둔 몇 안 되는 성과 중 하나다. ㅡ..ㅡ;;;

 

취재 후기는 기사(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50610210202&s_menu=정치)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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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해변가의 버려진 공동묘지

하와이 오하우섬의 노스 쇼어(North shore) 부근 해안가에 주인 모를 버려진 묘지들이 있다고 한다.

 

1903년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와 이 곳에 몸을 뉘게된 재미한인 1세들의 공동묘지는 돌보는 사람 없이 언제 쓸려갈지 모르는 채로 버려져 있다.

 

"작년 처음 이민 와서 결혼도 못하고 죽은 분들의 공동묘지를 치웠습니다. 어림잡아 2백명도 넘는 것 같은데, 해변가에 있다보니 파도에 쓸려내려가기도 하고, 나무 비석을 세워 비석이 썩어 없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 무덤들을 치우면서 우리 선조들이 이 낯선 땅에 와 얼마나 서럽게 살았는지 절실히 느꼈다."(Rex K.C. Kim, 변호사, 재미한인 2세)

 

1903년 1월 13일 101명의 한국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계약 노동자'로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게 공식적인 미국 이민의 시작이다. 그후 1905년까지 7천2백여명의 한국인(남자 6천48명, 여자 6백37명, 아이들 5백41명)이 노동자로 미국에 왔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하와이 섬.)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도록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를 모집해 농장을 운영했다. '노동자 분리 정책'으로 각국의 여러 민족의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해 이들의 노동력을 저임으로 착취했다. 한국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하게 된 동기도 일본인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 이주한 한인들은 부산 제물포 항구를 출발해 일본을 거쳐 배로 약 40-70일의 길고도 험한 항해를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고 한다.

 

물론 하와이에서의 생활은 모집 때의 선전과 달리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고통스런 생활이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 10시간의 중노동에 하루 품삯은 남자 67센트, 여자와 아동 50센트에 불과했다. 한달 평균 25일 일하고 이들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16달러로, 하와이까지 오는 뱃삯 을 갚고, 고향에 조금 송금하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으로 기본 생활도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 이들은 마치 죄수처럼 이민국에 등록된 번호로 불렸으며,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반항하면 당장 쫓겨나기 때문에 노예 생활에 가까운 생활을 견뎌야 했다.

 

초기 이민의 대다수가 젋은 남성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신부감으로 젊은 여성들이 '사진 신부'(사진 교환을 통해 결혼이 성사돼 이렇게 불렸다)로 이민을 오게 됐다. 당시에는 동양인과 미국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법'이 있었기 때문에 현지 여성과의 결혼은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사진 신부'를 맞이할 형편도 안되는 초기 이주 한인들은 낯선 타국 땅에서 거둬주는 사람 없이 쓸쓸히 생의 마지막을 맞았다.

 

그렇게 1백년이 지나 그들의 버려진 무덤이 파도에 쓸려 사라지듯 그들의 고단했던 삶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채 영원히 잊혀지고 있었다.

 

현재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은 공식적으로 3만5천-4만명, 그러나 한국인의 피가 조금이라고 섞인 혼혈은 2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하와이 한인들은 지난 2003년 이민 1백년(centenial)을 맞아 자체 행사를 벌였고, 이 행사 이후 남은 기금으로 코리언 아메리컨 재단(Korean American Foundation)을 만들려고 한다.

 

 


 

(3주간 미국 방문의 마지막 도시였던 하와이에서 우리가 만난 최고위층은 하와이 주대법원장인 Ronald T.Y. Moon이었다. 재미한인 3세인 그는 무척이나 우리를 반갑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소위 꽤나 성공한 그였지만 그가 전해준 가족사에서 재미한인, 아니 더 나아가 이주자들의 진한 삶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다. 평양이 고향인 그의 할아버지는 1903년 사탕수수 노동자가 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왔다. 그의 서울 출생인 할머니 역시 '사진 신부'로 이민온 케이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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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페퍼


 

3주간 미국 방문의 가장 큰 수확은 역시 '사람들' 이었다.

 

특히 인상깊은 몇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존 페퍼(John Feffer)다.

 

미국친구봉사회(American Freinds Service Communuties) 멤버로 한국에서 3년 정도 살았던 그는 보기 드물게 진보적 시각으로 한반도 문제를 분석하는 젊은 미국 학자다.

 

워싱턴 D.C에 위치한 Institute for Polocy Studies(IPS)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한국말로 더듬더듬 "죄송해요. 제가 한국말 좀 알았는데 많이 잊어먹었어요"라며 " 한국에 머무르면서 참여연대, 여성단체연합,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등 시민단체들과 같이 일했다"고 밝혔다. 

 

그는 약속했던 시간을 훌쩍 넘겨 2시간 가량 북핵문제, 한미관계, 남북관계 등에 대한 우리 질문에 성실히 답했으며, 자신이 편집한 이란 책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이 책 속표지에 그는 서툰 솜씨로 "평화, 통일, 연대"라고 한글을 써줬다. 



최근 그의 저서 <남한 북한>(정세채 옮김.모색)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고, '문화일보'에서도 그의 순발력있고 빼어난 분석력이 돋보이는 칼럼을 읽을 수 있다. 또 그의 홈페이지(www.johnfeffer.com)에서도 그의 글을 찾아볼 수 있다.

 

페퍼와 나눴던 대담 내용을 보고 싶으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된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50404090259&s_menu=세계)


 

(페퍼도 한국에서 나름 진보적인 인터넷 매체 기자들과의 대담을 즐겼다. 시종일관 그는 진지하고 친절했다. 사진은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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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와 비데

청와대 기자실인 춘추관의 화장실에 지난 13일 비데가 설치됐다.

 

참여정부 들어 지난해 비서동을 신축하면서 비서동에도 설치됐던 비데가 드디어(?) 춘추관에 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청와대에서 오랫동안 관리직으로 근무해온 A모씨는 이와 관련, "15년 전에는 대통령 화장실에만 비데가 있었는데 세상 참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에는 청와대 중 유일하게 대통령 집무실 내 화장실에만 비데가 설치됐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에는 국내에서 비데가 생산되기 전이라 수입 비데가 설치돼,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관리담당자들이 청소하면서 비데를 오작동시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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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선군정치의 나라(?)

 지난 3주간 팔자에 없는 미국 여행을 다녀오느라 블로그에 글을 한달 넘게 올리지 못했다.

 

몸은 진작 귀국했는데, 구름 위를 헤매고 다니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한동안 고생했다.

 

이제 어느정도 정신을 차리고 슬슬 귀국 보고 대회를 하고자 합니다.^^

 

미국, 선군정치의 나라(?)

 

"이제 우리 미국의 진정한 영웅들을 불러보고자 합니다. 2차대전 참전 용사들 일어나 주세요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환호성),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환호성), 이라크전 참전용사들(환호성), 육군(환호성), 해군(환호성), 공군(환호성), 해병대(환호성), 그들의 아내, 아들, 딸, 부모, 모두 일어서주십시오.(환호성)"

 

지난 3주간의 미국 방문 동안 내게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마지막 여행지였던 하와이에서 한 호텔에서 있었던 디너쇼 형식의 하와이 민속춤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랐을때 사회자는 그렇게 '미국의 영웅'들을 호명했고, 그 행사에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한번씩은 일어났다.

 

나중에 얘기를 듣고 보니 그 호텔이 군 관련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유독 군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겐 섬뜩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워싱턴 D.C에 있는 2차 세계대전기념관의 성조기)

 

어느 사회에서나 전쟁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일상의 조직적인 파괴,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잔혹성, 더 나아가 악마성, 또 전통적ㆍ공동체적 규범이 급속히 무너지면서 경험하게 되는 기존 가치체계의 혼란. 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가족과 예기치 않은 이별이나 상실, 신체의 부분적 상실, 극도의 굶주림과 가난, 예측 불가능한 미래...



  이처럼 인간의 잠재적 광기를 총동원하는 전쟁은 인간의 집단적 기억 속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로 각인된다. 따라서 전쟁 이후의 역사는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사회도 반세기전 일어났던 한국전쟁과 그 결과인 분단체제로 전쟁의 비극성과 잔인성을 경험하고 있다.
  
3주간의 짧은 방문이었지만 한국보다 훨씬 많은 전쟁을 수행한, 그리고 지난 2001년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 아래 실체가 불분명한 위협세력과 전쟁 중인 미국 사회 곳곳에서 그 상처를 엿볼 수 있었다. 또 이런 상처를 직면하는 방식의 차이는 적잖은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집집마다 나부끼는 성조기, 일상화된 검문검색
  

"9.11 이후 옷에 성조기 배지를 달고 다녔다.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9.11 테러 이후 전사회적인 애도의 물결에 동참하고 싶었다."
  
하와이에서 만난 40대 미국 시민은 지난 2001년 9월 11일 이후 3년 넘게 성조기 배지를 달고 다녔다고 밝혔다.
  

워싱턴, 뉴욕 등 도심 주택가로 들어서면 집집마다 성조기를 걸어놓은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미국인들이 성조기를 워낙에 좋아했지만 일년 내내 성조기를 걸어놓는 풍경은 9.11 테러 이후 비롯된 것이라고 미국 정부 관계자가 설명했다.
  
또 9.11 테러 이후 크게 달라진 점 중 하나가 검문검색이 일상화 됐다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미국 입국시 모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지문 채취와 사진 촬영을 기본적으로 한다. 또 국방부, 국무부 등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정도 규모의 빌딩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신원조회, 가방검사 등을 거쳐야만 했다.
  
특히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은 4차례의 검문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우선 건물 바깥에서 군인들에게 신분증 및 가방 검사를 마친 뒤 건물 입구에 마련된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두 가지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면 안내데스크로 가서 신분증을 제출하고 방문 목적 등을 확인받아야 한다. 방문 일정이 확인되면 안내요원이 사진촬영을 한 뒤 사진이 인쇄된 방문증을 만들어준다. 이 방문증을 가지고 다시 줄을 서서 방문증 뒷면에 찍힌 바코드를 인식하는 기계가 달린 출입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펜타곤 건물에 진입한 것이다.
  
펜타곤 건물 내에선 기본적으로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사진기는 얼마든지 테러용 폭탄으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펜타곤 내에서도 브리핑룸 외에 사진 촬영이 자유로운 곳이 있다. 지난 9.11 테러 당시 여객기 테러로 희생된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당시 비행기 충돌로 탑승자를 포함해 모두 1백89명이 숨졌다. 이 기념관에는 희생자 명단이 새겨진 대리석 비석, 희생자들의 사연이 소개된 책자 등이 있다. 한 옆에 작은 예배당도 딸렸다.

 

새로운 관광명소가 된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붕괴된 지점. 원래는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 등 핵무기가 폭발한 지점 또는 피폭 중심지를 뜻하는 군사용어)에서도 9.11 테러가 미국인들에게 준 충격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Freedom is not Free"
  
미국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이라크전쟁이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 D.C 한복판에는 제2차 세계대전기념관, 한국전쟁기념관, 베트남전쟁기념관이 이웃해 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전쟁기념관들을 찾은 관광객들이 꽤 많았다.
  
국민들에게 아이디어를 공모해 만들어졌다는 베트남전쟁기념관은 기념관 입구에 사망자 이름이 알파벳 순으로 정리된 책자가 몇권 배치돼 있었다. 그 책에는 사망자 이름 옆에 기념관 벽에 그 이름이 새겨진 위치가 기록돼 있어 추모객들이 찾아갈 수 있게 했다. 기념관의 검은 대리석 벽면에는 날짜순으로 사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국전쟁기념관은 당시 군인들의 모습을 형상해 놓았다. 기념관 한쪽 벽면에 새겨져 있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글귀는 의미심장했다.
  
바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는 경고가 어쩌면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 1950년대 반공법을 연상케하는 '애국법'(Patriot Act)이 통과되는 등 일련의 민주주의적 퇴행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아닌가 싶었다. 9.11 테러가 발생한지 6주만에 만들어진 이 법은 수사당국에 이메일과 전화 도·감청, 의료·도서관 기록 검열 등 개인정보에 대한 무제한적인 접근과 비밀영장·체포를 허용하고 있다. 이런 내용 때문에 애국법은 숱한 인권 침해 논란과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지난해말 '북한인권법'(North Korean Human Rights Act)이 입안된데 이어 공교롭게도 기자가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인 3월초 미국이 2025년까지 전세계 독재국가를 민주화시키는 등 민주주의와 자유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 증진법'(Advance democracy act of 2005)이 의회에 상정됐다. 부시 제2기 행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을 대표하는 이 법안에 대해 '미국의 패권주의'라는 반발이 거세다.


 

(펜타곤 내 9.11 당시 여객기 테러로 희생된 이들을 위한 기념관. 9.11테러를 포함한 각종 전쟁 희생자들을 미국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세력들로부터 미국을 지켜낸 'American Heroes'라 칭한다.)


 

(뉴욕 그라운드 제로. 뉴욕시는 이 자리에 새로운 건물과 9.11 테러를 기념하는 기념관 등을 지을 계획이지만 아직은 무역센터 빌딩이 철거된 상태로 남아 있어 당시 참상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다.)


 

(워싱턴 D.C의 한국전쟁기념관. "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진 대리석에 기대 어린이 관광객들이 장난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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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희와 오정희, 엇갈린 운명

"난 공직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용기라고 본다. 사실 96년 효산 사건 터트리기까지 무척 많은 고민을 했다. 솔직히 터트리면 뻔하거든. '이문옥 꼴 난다'고 생각했었지. 이문옥 감사관도 양심선언으로 감옥가고 파면된 상태였으니까.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했는데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지."

 

지난 96년 4월 "효산종합개발 콘도사업 특혜의혹에 대한 감사를 당시 감사원 남모국장이 뚜렷한 이유없이 중단시켰다"고 내부 고발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현준희씨.  
  
그의 양심선언을 전후해 효산그룹이 장학로 청와대 부속실장에게 떡값으로 6천만원을 줬고, 김영삼 대통령의 중학교 동창 김경배씨가 고문으로 있으며, 김현철씨의 대리인이던 박태중씨가 효산콘도 분양권 24억원 어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은 더욱 증폭됐고, 일부 언론에선 이 사건의 배후로 김현철씨를 지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은 효산이 제일은행으로부터 1천1백50억원을 불법대출한 점을 적발해, 이철수 제일은행장과 장장손 효산그룹 회장을 구속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 했다.

 

현씨는 감사원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그해 6월 파면됐고, 감사원으로부터 고발 당해 감옥에 가기도 했다. 또 1심과 2심에선 명예훼손 부분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났으나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뒤집고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새로운 증거가 포착되지 않는 한 대법원 판결이 뒤집어 지기를 기대하긴 힘든 상황이다. 지난 9년간 겪어온 개인적 고초는 말로 다할 수 없다. 

 

당시 감사원, 검찰, 은행, 건교부, 경기도 등을 떡 주무르듯이 해 불법 승인을 받은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던  '효산 사건'은 아직도 감사원을 괴롭히고 있다. 

 

지난해 10월 감사원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효산콘도 비리 문제와 관련된 질의를 통해 이 문제를 다시 쟁점화시키기도 했다. 감사원은 이 의원이 요청한 자료에 허위 답변서를 보냈다가 전윤철 감사원장이 잘못을 시인하는 일도 있었다.

 

또 전국공무원노조도 지난해 11월부터 이 사건을 둘러싼 의혹 제기를 하고 있다.

 

그 의혹의 핵심엔 최근 감사원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오정희씨가 있다.

 

오정희 총장이 당시 5국2과로 효산콘도 비리 정보를 은폐.축소하는 것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오 총장은 이 같은 주장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는 "감사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감사가 부절적하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을 현준희씨 본인만 사안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라며 "내가 정보보고를 검토했을 땐 이미 감사가 끝난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을 대하는 참여정부의 태도를 보건데, 아마 오 총장 건도 '의혹 제기' 수준에서 끝날 것으로 보인다.

 

'효산콘도 비리 감사 중단 사건'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 현준희씨와 오정희 총장의 엇갈린 운명에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오정희 총장이 지난달 25일 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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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딸. 노무현 아들

흠..아마 나를 '꼴통'으로 지목한 연세대 유석춘 교수가 이 글을 보면 "네가 그러니까 꼴통이지" 할 듯 싶다.

 

오늘 1급이상 고위 공직자 재산등록 자료가 언론에 공개됐다. 이 자료는 25일 관보를 통해 게재된다.    



1년동안 81억1천여만원의 재산을 불린 홍석현 주미대사 동생인 홍석주 인천지검장도 놀랍고, 국무위원중 재산이 가장 적은 김근태 의원의 재산이 4억여원에 이를 정도로 다들 억대의 재산을 모았다는 것도 놀라웠다.

 

어쨌든 이날 나의 배배 꼬인 심사를 자극했던 것은 우선 노무현 대통령 아들 건호씨가 지난 한해 봉급을 저축해 1천9백64만4천원의 재산을 불렸다는 것이었다.

 

지난 2002년 LG전자에 입사했고, 결혼 4년차, 딸을 하나 둔 가장인(맞벌이 부부도 아니다) 장남 건호씨의 예금액 증가부분에 대해 김종민 대변인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한 정도로 특별히 큰 금액은 아니라고 본다"며 "봉급을 착실히 저축할 경우 이 정도 저축액은 가능하지 않냐"고 밝혔다.

 

근데 오후 늦게 발표된 자료를 보다가 노건호씨보다 더 착실히 저금을 잘한 이를 발견했다.

 

바로 이해찬 총리의 외동딸이다. 이 총리의 외동딸은 용돈을 모아 1년 동안 1천2백24만4천원의 재산을 불렸다. 98학번인 딸의 재산 증가 부분에 대해 용돈 저축이라고 밝힌 것을 보아 직업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총리 딸은 지난해 외국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리는 지난해 6월 총리에 취임하고 재산등록을 하면서 딸의 재산은 은행예금 1천2백4만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상당수의 공직자가 공직자윤리법상의 허점(?)을 이용해 자녀나 부모 등 직계 존비속의 재산 고지를 거부해왔던 것과 비교해 보면 여러모로 개선된 것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전총재는 장남 정연씨의 재산 공개를 거부했었다.)

 

또 이들 VIP 급 자녀의 재산이 1천만원대 밖에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칭찬받아야할 일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불리진 않았다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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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뽀삐뽀...노대통령 긴급기자회견

삐뽀삐뽀....1월23일 '일요일' 오전 11시 노무현 대통령이 긴급기자회견을 가졌다. 정말 '긴급' 기자회견이었다. 기자들에게 사전 연락이 간 게 오전 10시20분이니 말이다. (오늘이 휴무였던 한 언론사 1진 기자는 차 위에 삐뽀삐뽀 경보등을 켜고 달려왔다고 한다. 기자회견은 조금 늦춰져 11시20분께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이 마련된 춘추관 1층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선의로 한 일인데 교육부총리 인사를 두고 이런 저런 오해들이 있는 것 같아 그 문제에 관해 여러분들이 국민을 대신해 궁금해 하는 부분들이 있을 거 같아 해명 좀 해 드러려 왔다"고 '김효석 파문'에 대해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요즘 좀 뜸해졌지만 노 대통령의 긴급기자회견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국회의 탄핵안 통과를 앞둔 지난해 3월10일에 긴급기자회견을 가졌고,  앞서 2003년 10월에도 재신임과 관련된 긴급기자회견을 가졌다.

 

지난해 6월 신행정수도 찬반 논란이 한창 일었을 때도 노 대통령은 예정에 없이 춘추관을 찾아 기자회견을 했다.

 

노 대통령이 긴급 기자회견을 하는 경우는 특정 중요 사안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지배적일 때, 특히 이와 관련된 각종 '음모론'이 창궐할 때다.

 

대통령 긴급 기자회견은 참모들보다 오히려 노 대통령이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다고 한다. 

 

이는 '직접 해명'을 좋아하는 노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이기도 하고,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만큼 무게가 실리는 한국 정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날 정말 예정에 없이 기자회견을 가진 건 '이기준 파문'에 이은 '김효석 파문'까지 교육부총리 인선을 둘러싼 '파문'을 정권 차원에서 그만큼 위협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이런 직접 해명이 등돌린 민심에 어느정도 효과적일지는 정말 미지수다.

 

노 대통령은 '오늘 설명이 야당에 해명이 될 거 같냐'는 질문에 "야당이 납득할지는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 평소 얼마만큼 신뢰할 것이냐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야당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또 노 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갈 수도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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