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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해변가의 버려진 공동묘지

하와이 오하우섬의 노스 쇼어(North shore) 부근 해안가에 주인 모를 버려진 묘지들이 있다고 한다.

 

1903년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와 이 곳에 몸을 뉘게된 재미한인 1세들의 공동묘지는 돌보는 사람 없이 언제 쓸려갈지 모르는 채로 버려져 있다.

 

"작년 처음 이민 와서 결혼도 못하고 죽은 분들의 공동묘지를 치웠습니다. 어림잡아 2백명도 넘는 것 같은데, 해변가에 있다보니 파도에 쓸려내려가기도 하고, 나무 비석을 세워 비석이 썩어 없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 무덤들을 치우면서 우리 선조들이 이 낯선 땅에 와 얼마나 서럽게 살았는지 절실히 느꼈다."(Rex K.C. Kim, 변호사, 재미한인 2세)

 

1903년 1월 13일 101명의 한국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계약 노동자'로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게 공식적인 미국 이민의 시작이다. 그후 1905년까지 7천2백여명의 한국인(남자 6천48명, 여자 6백37명, 아이들 5백41명)이 노동자로 미국에 왔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하와이 섬.)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도록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를 모집해 농장을 운영했다. '노동자 분리 정책'으로 각국의 여러 민족의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해 이들의 노동력을 저임으로 착취했다. 한국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하게 된 동기도 일본인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 이주한 한인들은 부산 제물포 항구를 출발해 일본을 거쳐 배로 약 40-70일의 길고도 험한 항해를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고 한다.

 

물론 하와이에서의 생활은 모집 때의 선전과 달리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고통스런 생활이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 10시간의 중노동에 하루 품삯은 남자 67센트, 여자와 아동 50센트에 불과했다. 한달 평균 25일 일하고 이들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16달러로, 하와이까지 오는 뱃삯 을 갚고, 고향에 조금 송금하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으로 기본 생활도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 이들은 마치 죄수처럼 이민국에 등록된 번호로 불렸으며,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반항하면 당장 쫓겨나기 때문에 노예 생활에 가까운 생활을 견뎌야 했다.

 

초기 이민의 대다수가 젋은 남성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신부감으로 젊은 여성들이 '사진 신부'(사진 교환을 통해 결혼이 성사돼 이렇게 불렸다)로 이민을 오게 됐다. 당시에는 동양인과 미국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법'이 있었기 때문에 현지 여성과의 결혼은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사진 신부'를 맞이할 형편도 안되는 초기 이주 한인들은 낯선 타국 땅에서 거둬주는 사람 없이 쓸쓸히 생의 마지막을 맞았다.

 

그렇게 1백년이 지나 그들의 버려진 무덤이 파도에 쓸려 사라지듯 그들의 고단했던 삶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채 영원히 잊혀지고 있었다.

 

현재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은 공식적으로 3만5천-4만명, 그러나 한국인의 피가 조금이라고 섞인 혼혈은 2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하와이 한인들은 지난 2003년 이민 1백년(centenial)을 맞아 자체 행사를 벌였고, 이 행사 이후 남은 기금으로 코리언 아메리컨 재단(Korean American Foundation)을 만들려고 한다.

 

 


 

(3주간 미국 방문의 마지막 도시였던 하와이에서 우리가 만난 최고위층은 하와이 주대법원장인 Ronald T.Y. Moon이었다. 재미한인 3세인 그는 무척이나 우리를 반갑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소위 꽤나 성공한 그였지만 그가 전해준 가족사에서 재미한인, 아니 더 나아가 이주자들의 진한 삶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다. 평양이 고향인 그의 할아버지는 1903년 사탕수수 노동자가 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왔다. 그의 서울 출생인 할머니 역시 '사진 신부'로 이민온 케이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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