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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년 3월 12일부터 4월 3일까지 3주간 '친미언론인 양성 프로그램'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 미국 국무부 초청 프로그램으로 미국을 다녀왔다. 이 분류에 실린 글들은 그때 보고 느낀 기록.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4/28
    하와이 해변가의 버려진 공동묘지
    onscar
  2. 2005/04/20
    존 페퍼(5)
    onscar
  3. 2005/04/11
    미국, 선군정치의 나라(?)(5)
    onscar

하와이 해변가의 버려진 공동묘지

하와이 오하우섬의 노스 쇼어(North shore) 부근 해안가에 주인 모를 버려진 묘지들이 있다고 한다.

 

1903년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와 이 곳에 몸을 뉘게된 재미한인 1세들의 공동묘지는 돌보는 사람 없이 언제 쓸려갈지 모르는 채로 버려져 있다.

 

"작년 처음 이민 와서 결혼도 못하고 죽은 분들의 공동묘지를 치웠습니다. 어림잡아 2백명도 넘는 것 같은데, 해변가에 있다보니 파도에 쓸려내려가기도 하고, 나무 비석을 세워 비석이 썩어 없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 무덤들을 치우면서 우리 선조들이 이 낯선 땅에 와 얼마나 서럽게 살았는지 절실히 느꼈다."(Rex K.C. Kim, 변호사, 재미한인 2세)

 

1903년 1월 13일 101명의 한국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계약 노동자'로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게 공식적인 미국 이민의 시작이다. 그후 1905년까지 7천2백여명의 한국인(남자 6천48명, 여자 6백37명, 아이들 5백41명)이 노동자로 미국에 왔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하와이 섬.)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도록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를 모집해 농장을 운영했다. '노동자 분리 정책'으로 각국의 여러 민족의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해 이들의 노동력을 저임으로 착취했다. 한국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하게 된 동기도 일본인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 이주한 한인들은 부산 제물포 항구를 출발해 일본을 거쳐 배로 약 40-70일의 길고도 험한 항해를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고 한다.

 

물론 하와이에서의 생활은 모집 때의 선전과 달리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고통스런 생활이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 10시간의 중노동에 하루 품삯은 남자 67센트, 여자와 아동 50센트에 불과했다. 한달 평균 25일 일하고 이들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16달러로, 하와이까지 오는 뱃삯 을 갚고, 고향에 조금 송금하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으로 기본 생활도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 이들은 마치 죄수처럼 이민국에 등록된 번호로 불렸으며,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반항하면 당장 쫓겨나기 때문에 노예 생활에 가까운 생활을 견뎌야 했다.

 

초기 이민의 대다수가 젋은 남성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신부감으로 젊은 여성들이 '사진 신부'(사진 교환을 통해 결혼이 성사돼 이렇게 불렸다)로 이민을 오게 됐다. 당시에는 동양인과 미국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법'이 있었기 때문에 현지 여성과의 결혼은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사진 신부'를 맞이할 형편도 안되는 초기 이주 한인들은 낯선 타국 땅에서 거둬주는 사람 없이 쓸쓸히 생의 마지막을 맞았다.

 

그렇게 1백년이 지나 그들의 버려진 무덤이 파도에 쓸려 사라지듯 그들의 고단했던 삶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채 영원히 잊혀지고 있었다.

 

현재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은 공식적으로 3만5천-4만명, 그러나 한국인의 피가 조금이라고 섞인 혼혈은 2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하와이 한인들은 지난 2003년 이민 1백년(centenial)을 맞아 자체 행사를 벌였고, 이 행사 이후 남은 기금으로 코리언 아메리컨 재단(Korean American Foundation)을 만들려고 한다.

 

 


 

(3주간 미국 방문의 마지막 도시였던 하와이에서 우리가 만난 최고위층은 하와이 주대법원장인 Ronald T.Y. Moon이었다. 재미한인 3세인 그는 무척이나 우리를 반갑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소위 꽤나 성공한 그였지만 그가 전해준 가족사에서 재미한인, 아니 더 나아가 이주자들의 진한 삶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다. 평양이 고향인 그의 할아버지는 1903년 사탕수수 노동자가 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왔다. 그의 서울 출생인 할머니 역시 '사진 신부'로 이민온 케이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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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페퍼


 

3주간 미국 방문의 가장 큰 수확은 역시 '사람들' 이었다.

 

특히 인상깊은 몇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존 페퍼(John Feffer)다.

 

미국친구봉사회(American Freinds Service Communuties) 멤버로 한국에서 3년 정도 살았던 그는 보기 드물게 진보적 시각으로 한반도 문제를 분석하는 젊은 미국 학자다.

 

워싱턴 D.C에 위치한 Institute for Polocy Studies(IPS)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한국말로 더듬더듬 "죄송해요. 제가 한국말 좀 알았는데 많이 잊어먹었어요"라며 " 한국에 머무르면서 참여연대, 여성단체연합,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등 시민단체들과 같이 일했다"고 밝혔다. 

 

그는 약속했던 시간을 훌쩍 넘겨 2시간 가량 북핵문제, 한미관계, 남북관계 등에 대한 우리 질문에 성실히 답했으며, 자신이 편집한 이란 책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이 책 속표지에 그는 서툰 솜씨로 "평화, 통일, 연대"라고 한글을 써줬다. 



최근 그의 저서 <남한 북한>(정세채 옮김.모색)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고, '문화일보'에서도 그의 순발력있고 빼어난 분석력이 돋보이는 칼럼을 읽을 수 있다. 또 그의 홈페이지(www.johnfeffer.com)에서도 그의 글을 찾아볼 수 있다.

 

페퍼와 나눴던 대담 내용을 보고 싶으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된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50404090259&s_menu=세계)


 

(페퍼도 한국에서 나름 진보적인 인터넷 매체 기자들과의 대담을 즐겼다. 시종일관 그는 진지하고 친절했다. 사진은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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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선군정치의 나라(?)

 지난 3주간 팔자에 없는 미국 여행을 다녀오느라 블로그에 글을 한달 넘게 올리지 못했다.

 

몸은 진작 귀국했는데, 구름 위를 헤매고 다니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한동안 고생했다.

 

이제 어느정도 정신을 차리고 슬슬 귀국 보고 대회를 하고자 합니다.^^

 

미국, 선군정치의 나라(?)

 

"이제 우리 미국의 진정한 영웅들을 불러보고자 합니다. 2차대전 참전 용사들 일어나 주세요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환호성),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환호성), 이라크전 참전용사들(환호성), 육군(환호성), 해군(환호성), 공군(환호성), 해병대(환호성), 그들의 아내, 아들, 딸, 부모, 모두 일어서주십시오.(환호성)"

 

지난 3주간의 미국 방문 동안 내게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마지막 여행지였던 하와이에서 한 호텔에서 있었던 디너쇼 형식의 하와이 민속춤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랐을때 사회자는 그렇게 '미국의 영웅'들을 호명했고, 그 행사에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한번씩은 일어났다.

 

나중에 얘기를 듣고 보니 그 호텔이 군 관련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유독 군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겐 섬뜩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워싱턴 D.C에 있는 2차 세계대전기념관의 성조기)

 

어느 사회에서나 전쟁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일상의 조직적인 파괴,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잔혹성, 더 나아가 악마성, 또 전통적ㆍ공동체적 규범이 급속히 무너지면서 경험하게 되는 기존 가치체계의 혼란. 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가족과 예기치 않은 이별이나 상실, 신체의 부분적 상실, 극도의 굶주림과 가난, 예측 불가능한 미래...



  이처럼 인간의 잠재적 광기를 총동원하는 전쟁은 인간의 집단적 기억 속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로 각인된다. 따라서 전쟁 이후의 역사는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사회도 반세기전 일어났던 한국전쟁과 그 결과인 분단체제로 전쟁의 비극성과 잔인성을 경험하고 있다.
  
3주간의 짧은 방문이었지만 한국보다 훨씬 많은 전쟁을 수행한, 그리고 지난 2001년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 아래 실체가 불분명한 위협세력과 전쟁 중인 미국 사회 곳곳에서 그 상처를 엿볼 수 있었다. 또 이런 상처를 직면하는 방식의 차이는 적잖은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집집마다 나부끼는 성조기, 일상화된 검문검색
  

"9.11 이후 옷에 성조기 배지를 달고 다녔다.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9.11 테러 이후 전사회적인 애도의 물결에 동참하고 싶었다."
  
하와이에서 만난 40대 미국 시민은 지난 2001년 9월 11일 이후 3년 넘게 성조기 배지를 달고 다녔다고 밝혔다.
  

워싱턴, 뉴욕 등 도심 주택가로 들어서면 집집마다 성조기를 걸어놓은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미국인들이 성조기를 워낙에 좋아했지만 일년 내내 성조기를 걸어놓는 풍경은 9.11 테러 이후 비롯된 것이라고 미국 정부 관계자가 설명했다.
  
또 9.11 테러 이후 크게 달라진 점 중 하나가 검문검색이 일상화 됐다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미국 입국시 모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지문 채취와 사진 촬영을 기본적으로 한다. 또 국방부, 국무부 등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정도 규모의 빌딩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신원조회, 가방검사 등을 거쳐야만 했다.
  
특히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은 4차례의 검문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우선 건물 바깥에서 군인들에게 신분증 및 가방 검사를 마친 뒤 건물 입구에 마련된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두 가지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면 안내데스크로 가서 신분증을 제출하고 방문 목적 등을 확인받아야 한다. 방문 일정이 확인되면 안내요원이 사진촬영을 한 뒤 사진이 인쇄된 방문증을 만들어준다. 이 방문증을 가지고 다시 줄을 서서 방문증 뒷면에 찍힌 바코드를 인식하는 기계가 달린 출입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펜타곤 건물에 진입한 것이다.
  
펜타곤 건물 내에선 기본적으로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사진기는 얼마든지 테러용 폭탄으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펜타곤 내에서도 브리핑룸 외에 사진 촬영이 자유로운 곳이 있다. 지난 9.11 테러 당시 여객기 테러로 희생된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당시 비행기 충돌로 탑승자를 포함해 모두 1백89명이 숨졌다. 이 기념관에는 희생자 명단이 새겨진 대리석 비석, 희생자들의 사연이 소개된 책자 등이 있다. 한 옆에 작은 예배당도 딸렸다.

 

새로운 관광명소가 된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붕괴된 지점. 원래는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 등 핵무기가 폭발한 지점 또는 피폭 중심지를 뜻하는 군사용어)에서도 9.11 테러가 미국인들에게 준 충격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Freedom is not Free"
  
미국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이라크전쟁이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 D.C 한복판에는 제2차 세계대전기념관, 한국전쟁기념관, 베트남전쟁기념관이 이웃해 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전쟁기념관들을 찾은 관광객들이 꽤 많았다.
  
국민들에게 아이디어를 공모해 만들어졌다는 베트남전쟁기념관은 기념관 입구에 사망자 이름이 알파벳 순으로 정리된 책자가 몇권 배치돼 있었다. 그 책에는 사망자 이름 옆에 기념관 벽에 그 이름이 새겨진 위치가 기록돼 있어 추모객들이 찾아갈 수 있게 했다. 기념관의 검은 대리석 벽면에는 날짜순으로 사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국전쟁기념관은 당시 군인들의 모습을 형상해 놓았다. 기념관 한쪽 벽면에 새겨져 있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글귀는 의미심장했다.
  
바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는 경고가 어쩌면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 1950년대 반공법을 연상케하는 '애국법'(Patriot Act)이 통과되는 등 일련의 민주주의적 퇴행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아닌가 싶었다. 9.11 테러가 발생한지 6주만에 만들어진 이 법은 수사당국에 이메일과 전화 도·감청, 의료·도서관 기록 검열 등 개인정보에 대한 무제한적인 접근과 비밀영장·체포를 허용하고 있다. 이런 내용 때문에 애국법은 숱한 인권 침해 논란과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지난해말 '북한인권법'(North Korean Human Rights Act)이 입안된데 이어 공교롭게도 기자가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인 3월초 미국이 2025년까지 전세계 독재국가를 민주화시키는 등 민주주의와 자유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 증진법'(Advance democracy act of 2005)이 의회에 상정됐다. 부시 제2기 행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을 대표하는 이 법안에 대해 '미국의 패권주의'라는 반발이 거세다.


 

(펜타곤 내 9.11 당시 여객기 테러로 희생된 이들을 위한 기념관. 9.11테러를 포함한 각종 전쟁 희생자들을 미국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세력들로부터 미국을 지켜낸 'American Heroes'라 칭한다.)


 

(뉴욕 그라운드 제로. 뉴욕시는 이 자리에 새로운 건물과 9.11 테러를 기념하는 기념관 등을 지을 계획이지만 아직은 무역센터 빌딩이 철거된 상태로 남아 있어 당시 참상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다.)


 

(워싱턴 D.C의 한국전쟁기념관. "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진 대리석에 기대 어린이 관광객들이 장난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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