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10월 24일 울산노동뉴스 월례토론회 발제문

 

노동자 대안문화를 찾아서

 

송경동(시인)

 

1. 노동자 대안문화는 열매를 맺는 일이 아니라 씨앗을 심는 일이다.

 

참, 오래된 질문이면서도 풀리지 않는 질문이다.
먼저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은 도대체 자본주의가 실제적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장악하고 있는 현 시대에 노동자 독자적으로 대안 문화의 형성과 향유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 가능치 않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교육과 각종 매스미디어와 산업과 법과 공권력 등 이 사회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자본과 그 하수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 처지상 임금노예의 신분을 절대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노동자들이 독자적으로 대안 문화를 만든다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상상일 것이다.

 

가능한 것이라곤 실제 조건상 노동자민중이 좀더 직접민주주의적이고 평등하며, 평화로운 대안문화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게끔 현실을 폭로하고, 다른 꿈을 꾸도록 유인하는 선전선동의 대항문화운동의 틀이 될 것이다. 일제하 사회주의 문화운동가들 그룹이었던 카프도 대략 이런 노선을 따랐다. 자본주의를 철폐하지 않고 그 안에서 안온한 대안적 삶을 꿈꾼다는 것은 그들이 볼 때 모두 거짓이거나 불철저한 삶이거나 무지몽매한 자들이었다. 대안의 향유는 구 사회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후 비로소 실험해 볼 수 있는 요원한 것들이다. 그 전 단계의 구체제에 사는 전위들과 노동자대중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부르조아의 모든 의식 형태와 투쟁하며 그들의 본색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 전선에 서서 싸우는 전위들의 삶을 선전 선동하는 것이었다. 다른 세계도 가능함을 선전 선동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구체제의 대중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미래의 대안을 위해 오늘 투쟁하며 외롭게 죽어가는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밖에 없었다. 남는 건 육신을 넘어 내 안에 구현된 사회역사적 생명이다. 그 험난한 길 위에서 내 안에 우리 안에 구현된 ‘먼저 온 인간다움’을 맛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너무도 가혹한 길이어서 선택할 수 없다면 다른 길을 걸으면 되었다. 기성체제에 복종하는 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기성체제를 옹호하는 일.    

 

그간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은 노동운동가들과 노동자문예운동가들이 그 길 위에서 번민하다 말을 갈아 타거나 조금은 덜 험난한 길로 가는 기차로 몸을 옮겨 싣기도 했다. 그 까닭을 생계 탓이라고도 하고, 자식들 때문이라기도 하고, 동지와 조직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 탓이라기도 하고, 과학의 패배(근세의 경우 현실사회주의권의 타락과 붕괴)에 따른 전망의 상실 탓이라기도 하고, 혹은 87년에 혁명을 못해서, 2000년이 되었는데도 혁명이 요원해서라고 말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의 얘기 주제인 과연 ‘노동자는 자기 스스로 이 사회에서 대안의 문화를 생산해 내고 향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 탓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남는 것은 눈 앞의 권력과 명예가 아니라 지난한 세월 속에서 끝까지 분투하다 쓸쓸히 죽어갈 수도 있는 사회역사적 생명 뿐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그들은 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그들은 스스로 계급관을 담지했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도덕적 열정을 넘어선 계급관의 단계까지 이르지 못했다. 계급관은 기본적으로 자본가계급을 두고 다른 민주적 사회 건설이 가능치 않음을, 새로운 인간 관계의 형성이 가능치 않음을 뼈저리게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적개심으로 계급해방을 향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개발하는 정신이다. 그 역사적 패배감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험난한 역사적 길 위에서 한낱 선로를 떠받치는 침목 하나로 눕는다 해도 그 일을 기꺼이, 즐거이, 무엇과도 바꾸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가 더더욱 대중을 넘어, 전위를 자처한다면 더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노동자 주체의 대안문화 생산과 향유를 이야기할 때, 분명히 할 것은 우리는 끊임없이 대항의 문화, 대안의 문화를 만들어 실험하고, 향유하려 하겠지만 그 모든 것은 패퇴할 수 있다는 이 자명한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투명하게 응시하는 것이다. 이 패퇴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는 끊임없이 부화뇌동할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즐겁지 않지? 왜 나만, 우리만 계속해서 희생해야 하지, 이럴 바엔 나도 우리도 즐기면서 해야 하지 않을까? 좀 다르게 하면 성과도 좀 남지 않을까? 왜 우리는 이렇게 대중성이 없지? 등등의 가볍고 단순한 질문 앞에서도 금세 자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딜레마에 빠지거나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대다수가 오히려 계급성을 희석시켜 나가게 된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좌절에 빠져 계급관 없는 시민, 계급관 없는 진보대중, 계급관 없는 민족과 국민으로 차츰 나아감을 우리는 그간 보아 왔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노동자 대안문화운동은 처음부터 막연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운동이어서는 곤란하다. 막연한 흥미와 막연한 성과를 주다보면 막연한 대중의 생산이 결국 자기 발목을 잡게 됨을 느낄 수 있다. 실패하더라도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며 가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노동자 대안문화운동이라면 일상적 패배가 일상적 씨앗심기, 남기기라는 발상의 전환을 이룰 필요가 있다. 막강한 자본의 공세에 밀려 우리의 작은 문화실험들은 늘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자본의 언어대로 패배라는 말로 쓸 까닭이 없다. 우리는 우리대로 끊임없이 새 씨앗들을 남기며 쉬지 않고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며 가는 것이다.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사로잡혀 그것을 ‘패배’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흔히 달과 강물의 비유를 든다. 강물은 쉬지 않고 흘러가지만 강물에 뜬 달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문다. 달과 같은 강인한 계급성의 견지와 강물처럼 쉬지 않고 흐르는 대중적 실천의 결합이 필요하다. 강물과 함께 달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 버린다면 그것이 어디 저 하늘에 뜬 달이겠는가. 강물이 흘러가 버렸다고, 강물 따라 나도 흘러가 버려 내가 어디 있는지조차 찾지를 못하겠다고 한탄이나 하는 게 어디 만인이 등대 삼아 걸어야 할 달이겠는가.)

 

2. 노동자 되기와 노동자 넘어서기 문화운동

 

해방 이후 그간 남한 사회 변혁운동의 핵심은 노동자 만들기였다. 근로자, 근로역군이 아닌 노동자되기였다. 노동자 문화운동 역시 여기에 헌신 복무했다. 일벌레의 문화에 맞서 파업의 문화를 만들고, 개인이기주의 문화에 맞서 집단의 문화, 연대의 문화를 만들고, 노사협조(사에 대한 노의 일방적 굴종의 다른 말)문화에 맞서 투쟁의 문화를 만들었다. 노동자 문화운동은 그것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를, 그래서 어떻게 싸웠는가를 형상화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주로 고발과 폭로, 풍자의 모습을 띠었다. 고발과 폭로를 넘어서서 승리감에 대한 과도한 전망 제시 역시 그 가능성을 고양하기 위한 선전 선동의 한 표현이었다. 그 수많은 투쟁과 무수한 이들의 헌신의 결과 현재 80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만들어졌고, 그 힘을 바탕으로 10명의 국회의원들까지 배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간신히 현장권력의 일부분을 점유할 동안 자본의 운동 역시 부단히 자기 갱신을 해 왔다는 사실을 잊어 버려서는 안 된다. 그들은 부단히 노동자 내부의 단결을 깨기 위한 다양한 전술들을 개발해 왔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를 이간질하고, 노사정위 등의 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해 노동운동을 개량화하려 한다. 자동화 정보화라는 인류의 진보를 자본의 진보로 각색해 새로운 착취의 수단으로 삼는다. 시장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삶 전체를 사유화 노예화함으로서 노동시간에 대한 착취를 넘어 삶의 시간 전체로 그 착취의 아가리를 넓히고 있다. 실상은 자본의 위기겠지만 그 모든 자본의 위기는 노동자민중의 위기로 전환된다. 위기감에 빠진 노동자민중은 혁명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이고 패배적인 세계관에 침윤되어 간다. 세계적 차원에서는 자본의 약탈적 세계화가 세계경찰을 표방하는 미군국주의자들의 물리력을 앞세워 거세지고 있다. 모든 장벽을 무장해제시키는 신자유주의 침탈이 가속화된다. 세계인의 수평적 연대와 교류는 실상 전세계 인민의 꿈과 희망,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이 역시 신자유주의자들의 약탈을 위한 수단이 되버리고 만다. 세계 시민의 수평적 연대와 교류를 막고, 세계의 시민들을 착취가능한 각계의 노동력으로 재편하고, 세계의 광활한 시민사회를 통째로 자본시장화하는 거대한 자본의 플랜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거대한 움직임과 아직도 여전히 우세인 자본의 침탈에 맞서 새롭게 노동자 대안문화를 꿈꾼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연스레 ‘새롭게’의 반대편에 놓이게 될 ‘예전의’는 어떤 평가 위에 놓이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버려야 할 ‘예전’은 어떤 것이며, 새롭게 조직되어야 할 ‘대안’의 것은 어떤 것일까?

반대로 우리가 그래도 고수해야 할 예전의 것은 어떤 것이며, 대안의 것들 중 어떤 것은 심사숙고되어야 할까?

예전의 것도 잘 연결되지 않고, 새로운 것은 잘 출현하지 않는 이 노동자 대안문화운동의 딜레마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의 수세는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라는 신호이며, 새롭게 무엇으로 거듭나라는 신호일까?

우리의 문화운동은 도대체 어떤 주체들의 출현에 복무해야 하는 것일까?

공장 안의 노동자들을 대상과 주체로 하는 문화 활동에서 조금 벗어나 시민이라는 사회적 정체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 활동을 펼치면 해소되는 것일까?

주로 공장 밖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항하고 싸워 나가면 해소되는 것일까?

노동자라는 빨간색에 생태라는 녹색과 소수자라는, 평화라는 여린 색을 조금씩 첨가하면, 아니면 같은 비율로 섞어놓으면 온전한 대안이 마련되는 것일까?

일상 속으로 들어가 미세하게 노동자들을 규율하고 통제하고 있는 자본의 마수들과 보이지 않는 전면전을 치루는 게 방향인가, 아니면 너무도 선명한 적 군대의 본질을 폭로하고 장렬히 전사해 나가는 것이 방향인가?

어느 옛 시인의 고리타분한 청유형 어법을 따서 “도처가 자본이니 싸움도 도처에 널려 있구나.”라고 읊으면 될까?
 
이 모든 질문에 맥이 될만한 답을 나 역시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한 가지 그간의 활동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정리되는 것은 형식적인 노동자되기 프로그램을 넘어 이젠 노동자됨이 곧 인간됨으로 나아가는 고양된 단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곧’은 아닐지언정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인간됨으로 나아가는 실천과 참여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경제적 권리 보장을 위해 많은 수가 근로자를 넘어 노동자가 된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경제적 권리를 보장받는 노동자에서, 개인적 희생까지를 각오하고 새로운 사회를 예비하는 성숙한 사회계급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건너야 할 강이 꽤나 많다.

 

무엇보다 연대의 문화가 시급하다. 경제적 가치 이외의 자신의 정신적 역사적 문화적 삶을 스스로 찾아가고 개발해 갈 수 있는 성숙한 노동자 일상문화가 필요하다. 거푸집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을 채울 유기적 생명체이다. 누에고치를 벗고 자유로운 나비로 거듭날 수 있는 생명을 그 안에 심는 일이다. 지도부들과 소수의 활동가들이 결의하지 않으면 가능치 않는 산별전환, 자기 대중을 기만한 민주노조 간부들의 부정, 중요한 사회적 의제 싸움일수록 소수 간부나 활동가들만의 투쟁이 되는 현상 등은 모두 노동자되기, 노동자만들기가 모두 형식에 갇혀 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당나라 때 임제선사는 자신의 수제자들에게 역설적으로 수행의 과정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마저 죽이고 가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장 노동자 교육을 그렇게 시키고 있나. 혹, 내 정파의 똘만이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주체적인 인간이기보다는 조합에, 간부들에게 의존적인 수동형 노동자들을 생산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편의 진실은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한편의 진실만을 도드라지게 전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결과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 노동자되기, 노동자만들기를 가장 간절히 원하고 실제 조직에 나서는 주된 세력이 자본이다. 그들은 속성상 절대적으로 노동자들을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 자체가 노동자계급을 상정하지 않고는 설 수 없는 기생의 체제, 반면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수적으로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있는 아량 정도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 전투적 노동운동 정도를 필요악으로 거느려야 함을 거부하려 하면서도 운명적으로 알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멍청한 노동자들을 근로자라는 징검다리위에 세워두고 흔들지만, 노동자들의 의식이 명민해짐에 따라 현장권력의 일부를, 사회권력의 일부를 그들의 대표자들에게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의 대표자들 대부분은 그런 협조의 틀 내에서 결국 그들(노동자)을 배신하고, 그들(자본)의 편으로 곧잘 넘어오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라 한 시대의 운영 정보를 독점하고, 착취의 원리와 압제의 무기들을 개발하고 선점한 희대의 머리들이다. 너무나도 근면하고 성실한 독재자들이다. 단지 인간성을 상실한 흠만이 그들의 약점일 뿐이다. 좀더 조화롭고 만인이 평화로운 세계가 이만큼 와 있음에도 자신들의 사리사욕에 눈멀어 인간의 시간을 지연시키고 있는 죄가 그들의 죄다.

 

여기에 맞선 해방의 이데올로기는 그럼으로 노동자되기, 만들기 플랜만 가지고는 가능치 않다. 노동자 선점 경쟁만으로는 가능치 않다. 자본의 호명에 사로잡힌 노동계급의 이름만으로는 가능치 않다. 1987년 이후로 그토록 무수히 많이 출현했던 ‘전투적 노동자’들이 대부분 ‘전투적’이라는 계급장을 자진반납하고 철저히 체제 재생산에 봉사하는 성실한 정규직노동자의 자리로 돌아간 사실도 이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노동계급의 이름을 뿌리치고 인간선언에 나설 새로운 인류들의 씨앗을 만들지 않고는 가능치 않다. 스스로 그러하겠금 하지 않는 조직운동, 문화운동은 이제 더 이상 가능치 않다. 스스로 그러하겠금 예비하지 못하고, 전위 스스로(전위)가 스스로(대중 스스로)를 대신해 버리는 대리주의 조직운동, 문화운동으로는 가능치 않다. 전위 스스로는 전위 스스로의 운동이 있다. 대중을 선도해 전위 스스로가 스스로(대중 스스로)를 대신한다고 강변하다 스스로 스르륵 자빠져 버리는 운동은 전위의 운동이 아니다. 만약 자신을 전위로 위치짓고자 한다면 대중 스스로의 운동과는 다른 전위의 운동을 개발해야 한다. 다른 조직을 건설하고 다른 실천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대중운동의 질적 양적 발전에 비해 형편없이 쪼그라든 전위들의 운동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전위들의 운동은 만들지 못한 채 대중운동의 태생적 한계와 퇴보만을 논평자처럼 탓해 보았자, 남는 건 회의와 좌절의 핑계, 자신의 쓸쓸한 무덤뿐이다.

 

이제 다시 노동자되기 문화운동을 넘어 인간되기 문화운동의 질과 내용, 그 형식의 거푸집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고민해 보자.

 

3. 공장 안에서 문화운동 하기

 

신 어용은 따로 있지 않다. 계급해방의 꿈을 닫고 내 공장 안의 문제, 우리 공장 안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의 문제 해결만을 전부인 양 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아무리 공장 안의 비정규직 문제를 얘기하고, 사측에 맞서는 조합의 자율권과 권리를 주장하고, 조합원들의 경제적 권리 획득을 이야기하더라도 해방을 꿈꾸는 진정한 노동계급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신 어용이다. 산별전환을 소극적으로 대처해 부결시키고, 사내 비정규직의 투쟁에 노조규약을 들어 민주적 절차를 따지고, 형식적 연대와 형식적 언사를 되풀이하는 자들이 신 어용이다.
이런 ‘민주어용’의 모습을 폭로할 수 있는 현장 안의 문화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조직에 대한 항명이 아니라 조직에 대한 숭고한 자세다.

 

다양한 문화써클 만들기 운동이 있어야 한다. 인터넷 상을 떠도는 그 무수한 까페들의 사용자들이 모두 노동자들이다. 공장 안은 이미 경제적 공간만으로 인식된다. 그것이 자본의 의도이다. 그들은 공장 안이 철저히 경제적 가치만을 따르는 노동기계들만의 집합장이 되기를 바란다. 오로지 노동력을 팔고 약간의 임금을 쥐어가는 교환시장이 되기만을 바란다. 밖에 나가서야 시민이 되던 국민이 되던, 아버지가 되던 어머니가 되던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물론 공장 밖에는 다른 자본이 알아서 이데올로기 공작을 수행해 주기 때문에 공장 안의 자본이 거기까지 책임질 일이 아니다. 그들은 공장 안에서 노동자들을 기계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 이런 흐름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서면 조합에서도 알아서 적당히 경제적 문제 해결의 일주체로만 자신의 역할을 한정짓게 된다. 조합원들이 따라오지 않는데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다 하면 그만이다. 노동자 대안 문화운동은 결국 이런 현장의 문화를 인간의 문화로 바꾸어내야 한다. 다양한 문화적 시도와 계기를 통해 공장 안에 기계들만이 사는 게 아니라 인간들이 살고 있음을 인식하게끔 해야 한다.

 

한때 노동문화운동 진영은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라는 모토를 내걸고 다양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이때 필자의 경우 그 ‘일상’에서 가장 긴 시간이 머무는 공장 안의 시간이 갖는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부차화되는 것을 종종 느꼈다. 주로 현장 안의 문화운동에 주력을 두던 그간의 활동의 틀을 넘어보고자 하는 당시 주체들의 선의의 표현으로 읽었다. 하지만 결국 그 주체의 상당수가 새로운 활동의 장과 전형의 개발에 실패하고, 결국 활동을 접거나 다른 활동의 장으로 몸을 옮기게 됨을 느끼면서 당시의 기우가 단지 기우가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개의 경우 노동자의 일상은 일터에서 보내는 8시간과 삶터에서 보내는 8시간 사이에 이루어진다. 아니 사실은 출퇴근 시간과 변형근로, 잔업, 철야, 특근 등으로 노동자는 훨씬 많은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게 된다. 이 일상의 시간을 재점유하는 활동을 생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은 임금을 미끼로 자본에게 포섭되고, 사용되어지는 시간이 주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곳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무수한 관계의 수를, 실험을 우리 스스로가 포기할 까닭은 없다. 관계의 질이 문제다. 우리는 현장 안의 사람들과 어떤 관계맺기를 하고 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단순한 직장동료를 넘어서, 단순한 동일노조의 조합원이라는 관계를 넘어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다중의 관계를 열 수 있다. 그래서 기계의 시간만을 원하는 공장 안의 문화를 다양한 삶의 문화, 사람들의 문화로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 6년을 함께 한 초교동창회보다, 3년을 함께 한 중학교동창회보다, 다시 3년을, 4년을 함께 한 고등학교동창회와 대학교동문회보다 성인이 되어 10년을 20년을 함께 한 직장동료들 사이의 문화가 더 소원한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당연시 해왔던 것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우리 공장은 남성 일색일까? 여성 일색일까? 과연 꼭 그래야 하는가, 따져 물어 보아야 한다. 노동자가 일상의 모든 것과 싸운다는 의미는 그러할 때 더 적실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질문들과 실천들 속에서 자본이 원하는 공장의 문화와 다른 노동이 원하는 공장의 문화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단협에 퇴직하거나, 중도에 나가게 된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무노동 무임금을 부르짖는 자본의 법에 따르면 황당하겠지만, 과다 착취를 용인할 수 없는 노동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자본의 법이 아닌 노동의 법을 개발하고 적용시켜 나가야 한다. 공장 안에 일정 비율의 녹지와 노동자 휴게공간을 설치하도록 해야 한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 안된다면 머지않은 산별의 시대에 이루어야 할 일일 것이다. 이런 상상력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다양하고 진보적인 공장 내 문화활동들이 필요하다. 문화부장 혼자 기를 쓰며 노래, 풍물 등 몇 연행 단위만 앞세워 늘 평균적으로 꾸리는 문화제가 아니라 ‘현장을 축으로’ 하되 다양한 삶의 문화를 실천해 온 현장 문화네트워크들이 다양하게 자신들의 깊은 사회적 철학을 표현해내는 문화의 마당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투쟁 자체가 새로운 문화의 단초가 될 것이다. 질낮은 문선이 자기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해 발 붙일 틈이 없게 될 것이다.

 

질문은 새로움을 줄 수 있다. 간단할 수 있는 질문 하나, 너무도 당연시 해 왔던 것에 대한 질문 하나가 전혀 새로운 활동의 장을 열어 줄 수 있다. 우리가 부르조아 문화예술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부르조아 문화예술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계급적 상상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장 내의 작은 문화활동과 관련해서는 죽자사자 싸우지만 정작 노동자의 영혼을 빼먹고 있는 도박산업(바다이야기류, 경마류, 복권류, 주식 등)이 문화사업으로 치장되어 노동자민중의 일상을 파고 들어도 단 한마디 사회적 문제제기조차 없는 총연맹의 문화미디어실은 정작 변혁적 사회를 지향한다지만 노동자이기주의에서 한발자욱도 나아가지 못한 기능주의 문선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과거 노동자 정체성 형성기에는 ‘노동자’라는 말을 내뱉는 것만에도 큰 용기가 따랐다. 당연히 문화적 충격도 컸다. 하지만 지금은 그 조직률을 떠나 사회적으로 형성된 노동자층이 어떤 사회적 실력과 도덕성과 헌신성을 보여줄 수 있는가를 평가받아야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선진이었던 사고가 지금에 와서도 그대로 재현된다면 후진으로 평가받고, 퇴행으로, 반동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런 큰 운동을 외면하고, 작은 현장 권력의 이합집산에나 관심이 가 있는 여러 정치조직들이 대중적으로 큰 신뢰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노동자 대안문화운동은 이런 노동자운동의 퇴행조차 꼬집을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는 늘 선이고, 자본가는 늘 악인 이분법만으로는 우리 내부도 이젠 설득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내부가 가진 진정한 힘조차를 무시하는 퇴행이다. 노동자의 일반적 무지나 퇴행적 사고를 말하지 않고 어떻게 자본의 승리를 얘기할 수 있겠는가.
한편 이 경우 한 가지 고민되어야 할 지점은 도대체 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와 투쟁을 이야기하는 지금 문화운동은 어떻게 그 주체들과 만나서 함께 그들의 문화실천을 도와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불안정한 일터의 조건과 삶의 조건 탓에 그들은 영영 문화와는 담을 쌓고 가끔 목숨을 거는 투쟁만으로 분출되어 나와야 하는 것일까? 850만이 비정규직이라는 이 때 실천적으로 해명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일 것이다. 개별 사업장 단위로 묶일 수 없다면 일명 비정규직 문화센터와 같은 지원 및 표현 단체 활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들(비정규직)의 삶이 가진 기괴함을 보고하고 폭로해 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화실천이 될 것이다. 그것은 돌이켜 이 시대 자본이 가진 모순과 폭력성, 그 기괴함을 폭로해 내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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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5 12:53 2006/10/25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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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 2006/10/25 20:31 | DEL
plus님의 [[송경동] 노동자 대안문화를 찾아서] 에 관련된 글. 읽어 보고 또 읽어 본다..
Tracked from | 2007/01/17 22:40 | DEL
plus님의 [[송경동] 노동자 대안문화를 찾아서] 에 관련된 글. 하루 8시간, 10시간, 12시간을 공장에서 생활하면서 절실히 느낍니다. 폭력이 판치는 공간... 어거지 말빨로 힘센넘이 약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