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미래를> 2006년 11월호
"사회주의는 노동해방의 사회주의에서 노동, 환경, 여성을 포괄하는 복합적 사회주의로 확대되어야한다. 사회주의는 정치경제적 사회주의와 문화적 사회주의를 포괄하는 삶의 총체적 해방을 사유하는 사회주의로 확대되어야 한다."
구좌파, 신좌파 해서 한쪽 구석이 영 정리안되고 넘어가는 느낌이었는데 뭔가 크게 정리되는 느낌...
네오모더니즘과 사회주의
이성백 / 연구원, 서울시립대 철학과 교수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독일 이데올로기」, 선집, 1. 215)
1. 사회주의를 사고하는 시각의 조정
현존사회주의가 붕괴되고 동서 냉전에서 자본주의체제가 승리하면서, 이는 한편으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에서와 같이 자본주의의 역사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대대적으로 선전되고, 다른 한편으로 좌파 진영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구성체적 대안으로서 사회주의가 진정 실현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회의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서구 공산당도 소련사회주의체제를 평가하면서 내부적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소련체제의 붕괴의 여파로 크게 지지기반을 상실하였다. 남한에서도 서구와 다른 역사적 시간 경로를 따라 질적, 양적으로 성장해오던 민주노동운동도 그 기세가 꺾여버리게 되었다. 이렇게 사회주의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회의주의가 만연하고 있고, 사회세력으로서 좌파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시대에 사회주의를 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일 그래도 논할 수 있거나 논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나?
나는 이 글의 주안점을 사회주의의 이념과 이론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이 사고해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시각에 두고자 한다. 21세기의 시점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논한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 먼저 묻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오늘날에도 맑스와 레닌 시절에 논의했던 것과 동일한 수준에서 사회주의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해 왔으며, 오늘날 디지털 혁명을 통해 창출된 새로운 생산력을 토대로 하여 신자유주의의 단계에 도달하였다. 19세기 산업자본주의의 단계에서 사유된 맑스의 사회주의 이념이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해온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에도 그대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자본주의가 역사적 단계를 거쳐 발전하듯, 사회주의에 대한 사고도 새로운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맑스는 사회주의는 현실과 유리된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 운동이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독일 이데올로기」, 선집, 1. 215) 맑스는 사회주의의 상을 구체화하는 일의 기본원칙을 현실운동 속에서 사회주의의 현실적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현실운동의 지평 속에 들어오지 않는 사회주의 논의는 공상으로 거리를 두었다. 맑스와 레닌에게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역사적 다음 단계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자본주의의 현재의 상태, 자본주의의 현재의 사회적 모순들을 지양해 나가는 운동이며, 이 현재의 구체적인 모순으로부터 도출되는 구체적 대안이 사회주의의 구체적 내용이다.
자본주의의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 운동으로서의 맑스의 사회주의 규정을 이제 달리 표현하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 변화에 따라,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자본주의의 단계에 따라 이에 조응하여 다른 수준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자본의 이윤실현이란 목적은 늘 동일하지만, 이 이윤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식, 즉 자본의 축적체제는 역사적으로 변화하여 왔다. 각 역사적 단계에 따라 생산력의 형태, 지배적인 자본의 유형, 노동 양식과 정치적 지배 양식 등이 변화하여 왔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응 논리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사고는 자본주의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그 축적체제의 구체적 구조와 운동 형태에 대한 분석, 여기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특성과 모순에 주목하여 이로부터 사회주의 이념의 구체적 내용을 이끌어 내는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2. 맑스의 사회주의의 역사적 위상
맑스의 사유는 직접적으로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기의 자본주의의 형태인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중세 사회를 해체해 가면서 발전해 온 현대시민사회는 산업자본주의 단계에 도달하면서 그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다. 중상주의적인 상업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산업자본주의 이전의 현대시민사회는 아직 ‘현대’사회로서 전형적인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 미성숙한 형태였으며, 이에 따라 현대시민사회에 고유한 사회적 모순 또한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 홉스, 로크, 루소 등 사회계약론과 스미스의 경제학 그리고 헤겔 철학 등 맑스 이전의 현대시민사회를 해명하는 사회이론들은 현대시민사회가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한 시기의 이론화로서 현대시민사회가 제대로 이론화되고 있지 못하다.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 사상들도 마찬가지이다. 산업자본주의의 시기에 들어서면서 현대시민사회가 전형적인 고전적 형태를 갖추게 되고, 이 고전적 형태가 리카도 경제학과 이에 의거한 공리주의 그리고 맑스에 이르러서 -물론 양자간에 다른 방식으로- 이론화된다. 현대시민사회는 그 성립 초기부터 개인들간의 경쟁과 충돌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을 기본 모순으로 하는 사회였다. 산업자본주의에 이르러 현대시민사회의 전형적 형태가 갖추어지면서 그것에 고유한 사회적 모순도 전형적인 형태를 드러내게 된다. 노동과 자본의 모순·대립이 그것이다. 맑스의 사유는 산업자본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의 이론화이다. 한편으로 산업자본주의가 현대시민사회의 전형적인 형태인 점에서,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론은 전형적 형태를 갖춘 자본주의 분석으로서 자본주의 본질적인 구조를 밝힌 것으로, 이 부분은 산업자본주의를 넘어서 이후의 자본주의의 형태들에 대해서도 일반이론으로서 그 이론적 가치를 계속해서 견지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의 많은 부분은 자본주의의 한 단계인 산업자본주의의 분석으로서 산업자본주의의 특수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 전체가 모든 자본주의의 단계와 형태에 적용될 수 없다. 물론 그의 이론이 산업자본주의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그의 논의 여기저기에서 산업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이후 자본주의의 변화 경향에 대해 예측하는 언급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 중에서(특히, 그룬트리세) 요즈음의 세계화에 대해 미리 예견하고 있는 언급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가치법칙 작동의 역사적 한계와 정보사회를 예견하는 언급들도 있다. 어쨌든 맑스 이론의 많은 부분은 산업자본주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다른 단계와 형태들은 그것의 특수성이 맑스의 논의를 넘어서 새로이 해명되어야 한다.
맑스의 사회주의 논의도 산업자본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자본과 임금노동의 대립 속에서 노동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사적 소유의 철폐와 사회적 소유로의 이행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사회주의는 경제적 해방(그리고 이와 연관한 정치적 해방)의 측면에서 사고되었고, 경제적 해방도 특히 소유관계의 측면에서 사고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에서 반성할 때, 사회주의에 대한 사고는 경제적 해방도 소유관계의 측면을 넘어서 확장될 필요가 있고, 또한 (정치) 경제적 해방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문화적 차원을 포괄하는 인간 삶의 총체적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현재의 단계인 신자유주의의 발전 경향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억압과 해방의 구체적 측면들을 찾아내어 이를 사회주의의 새로운 요소로 사유하여야 한다.
3. 맑스 이후 20세기 현대 시민사회 모순의 심화와 확장
“인간에게 있어서는 인간이 최고의 존재이다. … 인간이 천대받고, 노예화되고, 버림받으며, 경멸받는 존재로 되는 모든 관계들을 전복시켜야 한다.”(「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선집, 1권, 9) 이 표현은 맑스가 제시하고 있는 추상적이지만 사회주의의 최고의 일반 원리라 할 수 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인간이 천대받고, 노예화되고, 버림받으며, 경멸받는 존재로 되는 모든 관계들을 전복”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맑스 당시에 그 관계의 구체적인 형태는 자본과 임노동이었다. 그런데 20세기 현대시민사회의 발전은 자본과 임노동의 모순만이 아니라, 현대시민사회는 훨씬 더 심층적인 내재적 모순들을 안고 있다는 인식의 심화가 일어난다. 양차대전, 나치즘, 유대인 학살, 원자폭탄 투하, 환경 파괴, 여성 억압 등의 여러 사회적, 문명적 폐해를 체험하면서, 현대시민사회는 자본과 임노동의 모순뿐만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로 인식된다.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사유는 현대시민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이러한 다양한 모순들을 극복하는 사유로 심화, 확장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이 이러한 현대시민사회의 모순들로 사유를 확장한 최초의 시도이다. 이들은 맑스주의를 자본과 노동의 관계의 사유로부터 현대시민사회의 모순들에 대한 비판적 사유로 확장하고 있다. 이제 20세기 현대시민사회 발전의 많은 부분, 특히 전반기는 생략하고, 20세기 후반의 복지국가 자본주의 단계와 자본주의의 현재의 단계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로 옮아가도록 한다.
1) 프레데릭 제임슨의 자본주의 단계론
제임슨은 에른스트 만델의 후기자본주의의 의거하여 서구의 문화이론을 자본주의의 각 단계에 조응시켜 평가하고 있다. 이 단계론적인 분석 방법을 통해서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에 상응하는 문화 논리로 비판한다.
제임슨은 자본주의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자본주의는 세 가지의 근본적인 단계를 밟아 왔다. 시장자본주의 단계, 독점 또는, 제국주의 자본주의 단계, 그리고 탈산업주의라고 잘못 불리고 있는, 차라리 다국적 자본주의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은 현단계 자본주의이다.” 이 각 단계에 제임슨은 기술 수준을 상응시킨다. 시장자본주의는 증기, 독점자본주의는 전기와 자동차, 다국적 자본주의는 컴퓨터와 원자력을 상응시킨다. 그리고 그가 ‘문화적 지배소’라 부른 문화이론도 각 단계에 조응시킨다. 시장자본주의에는 리얼리즘, 제국주의에는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다국적 자본주의에 상응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자본주의의 세 번째 단계, 즉 ‘후기 또는 다국적 또는 소비자본주의, 여지껏 출현한 것 중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 지금까지 상품화되지 않았던 지역까지 거대 자본이 팽창하는 상황과 조응한다.”
그런데 제임슨의 단계론에 신자유주의의 단계가 더 부가되어야 한다. 그는 세계화와 정보화 등의 신경향에 대해서 이미 포착하고 있으나, 그의 후기자본주의는 복지국가 자본주의에 주로 해당되고, 복지국가와 구별되는 새로운 축적체제로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아직 뚜렷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렇게 복지국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구분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더 정확히 말해서 복지국가 자본주의 단계에 조응하는 문화논리로서 복지국가 단계에서의 해방적 사유이다.
2) 복지국가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런데 이제 더 정확히 복지국가 자본주의 단계를 의미하는 후기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그것의 문화적 논리로 연결시키는 제임슨의 분석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제 이 연관성을 들여다보기 위해 우선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전체적인 성격을 고찰해 보도록 한다.
포드주의-케인즈주의 축적체제에 근거한 복지국가 자본주의를 가능케 한 생산적 동력은 대량생산 방식의 실현이었다. 대량생산 방식은 경제적 생산성의 막대한 향상을 가져오는데, 같은 시간에 이전에 비해 수십 배, 수백 배에 달하는 상품들이 생산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엄청난 양의 상품이 생산되면서 문제는 이 상품들을 구매할 수 있는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들을 어디에서 찾느냐이다. 대량생산은 상품 가격을 하락시키는데, 상품 가격의 대폭적인 하락은 이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구매자의 사회적 폭을 그 만큼 확장시켰다. 상품 가격의 하락은 사회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노동자들이 생산된 막대한 양의 제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될 수 있게 하였다. 이전에는 자신들이 생산하면서도 쳐다만 보아야 했던 각종 내구적 소비재들, 냉장고, 오디오, 텔레비전, 자동차들이 노동자들도 실제로 가질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이른바 ‘마이카 시대’의 도래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와 더불어 포드주의-케인즈주의 축적체제의 또 다른 축은 국가의 역할이다. 국가는 기간산업의 국유화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여, 자본가 내지 기업가로서 경제주체의 역할을 담당하고, (시장) 경제 과정 전체를 관리하고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국가는 실업, 교육, 보건 등 국민 후생을 위한 복지 정책을 수행한다.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시기에 서구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누렸으며, 근로자들의 실질 소득도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고용도 거의 완전고용의 수준에 이르렀다. 대량생산 방식은 규모의 경제와 연관되어 기업이 확장하게 되면, 그만큼 고용도 확대되어야 했다. 이른바 성장과 고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동반성장이 가능했다. 노동자의 고용안정과 실질소득 증가는 자본주의가 그 고질병인 부익부 빈익빈, 대중의 빈곤화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수정한 ‘수정’ 자본주의로 주장되었다. 솔제니친의 ‘굴락’이 발표되고, 소련이 강제수용소에 불과하다는 사회주의의 실패 외에도 노동자 계급의 실질 소득의 향상이 기본적으로 이 시기에 ‘맑스주의의 위기’를 초래하는 동인이 되었다. 맑스가 주장한 자본주의의 빈곤화 테제가 반증된 것으로 주장되었다. 노동자 계급의 실질적 소득 향상은 자본주의 체제에 노동자 계급이 포섭되는 경제적 조건이 되었고, 이른바 ‘중산층 강화론’이 대두되어, 이 시기 사회통합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역사상 가장 안정을 누린 시기였다. 그래서 혹자는 이 시기를 체코에서 사회주의 개혁을 지칭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빗대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부르기도 하였다.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에 힘입어 노동자 계급을 체제내부로 견인해 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경제적 성장과 사회적 안정을 동시에 달성한 자본주의의 전성기가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이러한 복지국가 자본주의 단계라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출현한 해방적 사유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68혁명은 복지국가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해 있던 시기의 혁명으로 노동자 계급의 적지 않은 부분이 ‘중산층’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되고, 혁명의 성격은 노동해방을 목표로 하는 정치경제적 혁명에서 사회문화적 혁명으로 이동한다. 68혁명은 이전의 혁명과 전혀 다른 성격의 혁명이다. 프랑스 시민혁명과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은 계급적 대립관계에 의해 추동된 정치경제적인 성격의 혁명이다. 노동자계급과 맑스주의자들의 계급혁명적 주장들이 68혁명의 한 축을 구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있어서 68혁명의 주력은 환경, 여성, 소수자, 반전평화 등 좌파의 새로운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사회문화적 병폐와 억압에 대한 변혁적 요구의 분출이다.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노동해방이란 의제는 기각되고, 다른 한편 여성, 환경, 소수자 등으로 의제가 확장되고, 문화적 해방으로 해방의 지평이 넓어진다.
3) 신자유주의와 해방이론의 재구성: “포스트모던적 조건”으로부터 “네오모던적 조건”으로
오늘날 세계는 복지국가 자본주의를 넘어 신자유주의의 단계에 도달해 있다. 이제 복지국가 단계를 넘어서 신자유주의 단계에서는 이에 상응하여 좌파의 이론이 당연히 재구성되어야 한다.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조건 속에서 구성된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외의 여러 사회이론들은 더 이상 그대로 신자유주의의 조건에 적용될 수 없다. 우선 신자유주의의 전체적인 성격을 보도록 한다.
복지국가 자본주의는 60년대의 절정기를 뒤로 하고 70년대로 들어서면서 뚜렷한 불황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여기에 1973년 오일위기까지 일어나면서, 더 이상 포드주의 축적 체제는 지속될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서구 자본주의는 조절학파의 개념상 “포스트포드주의 축적체제”의 시기로 넘어간다. 케인즈주의에 대신해서 밀턴 프리드만 등의 통화주의에 입각한 신자유주의 내지 신보수주의가 강력하게 대두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기업 활동의 장애물로 간주된 국가의 경제개입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시장원리에 맡기도록 해야 한다는 경제 정책을 표방했다. 이때부터 한편으로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비효율성이 공격의 대상이 되고, 국가의 규제를 풀어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을 하도록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조정이 강력하게 추진된다. 정보 통신 분야를 위시하여 국가 경제 부문이 민영화되고, 그동안 자랑거리로 삼아왔던 사회복지제도가 대폭적으로 축소되는 등 케인즈주의의 국가주의적 요소들이 청산된다. 구조조정의 기술혁신적 축으로 등장한 것이 정보화, 정보기술혁명이다. 정보산업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주력산업으로 부상하고, 모든 기업들이 경쟁력의 확보를 위해 정보기술을 도입하여 생산과 사무에서의 구조조정(공장자동화와 사무자동화)을 추진한다.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양극화를 초래하는 원인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서 밝혀진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기업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구조조정의 기본 성격은 생산과 사무 현장에 자동화된 기계들을 도입하여 인간 노동력을 대체하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은행의 창구 업무 중 예금, 출금, 이체와 같은 기본 업무들이 현금자동인출기로 이관되고, 창구에서의 일손은 줄어든다. 헤드폰을 머리에 낀 채 전화 안내업무를 하던 전화국의 전화교환원들의 광경은 사라지고, 음성 인식과 통화 능력을 갖춘 컴퓨터에 의해 대신된다. 자동차 공장에서 자동차 조립이 로봇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기업 구조조정이 노동자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일자리의 상실, 즉 정리해고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7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서서히 진행되어 왔으며, 거의 완전고용 상태에 있던 실업은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여 1990년대에 들어서서 거의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의 실업률은 10%를 상회하는 대량실업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이 내재적으로 담고 있는 실업의 증가를 목도하면서 이 경향을 우려하는 경고 메시지로 등장한 것이 ‘노동의 종말’이나 ‘20 대 80의 사회’이다. 이 경고들은 단지 근거 없는 우려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본질적인 내적 논리에 의해 초래되고 있는 새로운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의 정보혁명이 수많은 블루 칼라와 화이트 칼라를 메탈 칼라로 대체하면서, 이들을 실업자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노동의 구조조정은 해고, 청년실업, 비정규직 증가, 변형근로제의 운용, 실질 임금의 삭감 등 유연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오고 있다.
복지국가 자본주의가 노동계급 포섭적 성격을 지녔다면, 신자유주의는 노동계급 배제적 성격을 지녔다. 이로 인하여 ‘중산층론’이 위기에 처하고, 그 대신 ‘빈곤층론’이 담론의 전면에 부상한다. 복지국가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기각되었던 노동해방, 정치경제적 거시담론이 다시 해방의 의제로 복귀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복지국가 자본주의 단계에 상응한다면, 이제 신자유주의 단계에 상응하는 해방적 사유의 방법론적 기초를 나는 일단 “네오모더니즘”이라 부르고자 한다. 네오모더니즘은 맑스의 사유에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해방적 사유를 역사적으로 반성하면서, 신자유주의의 단계에 필요한 새로운 해방적 사유를 모색하려는 이론적 시도이다.
직접적으로 네오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이론적 대결 속에서 생성된 개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방법론적으로 몇 가지 한계점을 안고 있다.
①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을 총체적으로 거부하고, 이에 대해 욕망 등 이성의 타자들에 기댄다. 그러나 문제는 이성이냐 욕망이냐의 양자택일에 있지 않다. 이것은 비현실적인 방법론적 설정이다. “이성에 대한 편집증적 공포”가 아니라, 이성과 욕망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 점에서 네오모더니즘은 욕망과 이성의 관계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설정을 넘어서는 논의의 진전이다.
② 탈현대주의는 철저한 개인주의의 지반에 서 있으며, 이 개인주의가 탈현대주의의 이론적 공간 전체를 횡단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유주의보다 더 극단적인 거의 절대적 개인주의의 길을 택한다. 이에 따라 사회 자체가 억압적으로 설정된다. 사회는 개인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반사회적인 경향은 “수목”과 “근경”의 대립, “국가”와 “유목민”의 대립으로 표출된다. 들뢰즈의 탈현대주의 사회론은 사회와 개인을 대립시키고, 사회로부터 개인의 해방을 추구하고 있는 무정부주의의 입장이다. 사회 자체를 적대적으로 보는 이런 무정부주의적 입장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이에 대해 인간은 사회적 존재, “사회적 관계의 앙상불”이라는 존재론에서 출발하고 있는 맑스주의의 방법론이 더 현실적인 견해이다. 이 점에서 네오모더니즘은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모색하는 맑스의 현실적인 길을 따른다.
③ 복지국가 자본주의적 조건에서 거시적인 정치경제적 분석이 기각되고, 의식, 언어, 욕망, 문화, 일상생활 등의 미시 분석이 강조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정치경제적 분석의 필요성을 복귀시켰다. 이런 점에서 네오모더니즘은 거시 분석과 미시 분석의 포괄적 분석을 주장한다.
4. 사회주의 개념의 확장
① 맑스의 사회주의는 고전적 산업자본주의 단계에서 사유된 사회주의였다. “인간이 천대받고, 노예화되고, 버림받으며, 경멸받는 존재로 되는 모든 관계들”의 구체적 형태가 노동착취로 현상하였으며, 이에 조응하여 노동해방의 기획으로 사회주의가 사유되었다. 맑스의 사회주의는 정치경제적 사회주의였으며, 그것도 소유 관계 중심으로 사유되었다. 그러나 사적 소유의 폐지는 정치경제적 사회주의의 일부일 뿐, 그것의 전체나 완성이 아니다.
② 복지국가 자본주의 단계에서 노동해방을 넘어, 사회적 해방의 의제가 환경, 여성, 소수자 등으로 확대되었다. 의제의 다원화와 아울러 정치경제적 차원으로부터 사회문화적 차원으로 해방의 지평이 확대되었다. 사회주의는 노동해방의 사회주의에서 노동, 환경, 여성을 포괄하는 복합적 사회주의로 확대되어야한다. 사회주의는 정치경제적 사회주의와 문화적 사회주의를 포괄하는 삶의 총체적 해방을 사유하는 사회주의로 확대되어야 한다.
③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신자유주의는 사적 소유의 철폐와 다른 정치경제적 해방의 측면을 현대시민사회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구체적인 일정에 올려놓고 있다. 바로 노동시간의 단축이다. 칼 맑스는 사회주의와 노동해방에 대해 다른 언급들도 하였다. “자유의 왕국은 실제로는 필요와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상 본래적인 물질적 생산의 영역 너머에 존재한다. … 이것은 여전히 필연성의 왕국일 뿐이다. 이 필연성의 왕국 너머에서 자기 목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계발, 즉 참된 자유의 왕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은 필연성의 왕국 위에서 이것을 기초로 하여서만 번성할 수 있다. 노동시간의 단축이 기본조건이다.” “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자들의 삶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며, 노동자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직접적인 이해와 관계되어 있는 공산주의의 실질적인 내용에 속하는 것이다.
노동시간이 단축된다고 해서 바로 이 시간이 노동자들이 자신의 주체적인 능력계발을 하는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간은 그것을 위한 문화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을 경우, 도리어 노동자들을 일차원적이고 소모적인 생활방식에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자들의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문화를 창출하는 문화운동을 좌파의 실천적 과제로 제기한다.
노동시간의 단축, 달리 말해 일 안하고 먹고 사는 것은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적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 신자유주의 단계에서 정보기술은 대량실업을 초래하는 기술적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 보면 정보기술 자체는 드림 테크놀로지이다. 바로 일 안하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염원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기술의 출현이다. 정보기술은 인간노동력을 대체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직접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이미 예견하였듯이, “노동은 더 이상 생산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생산 과정 자체에 감시자와 조절자로서 관계한다. ……노동자는 생산과정의 주행위자가 아니라 생산 과정 옆에 서 있기만 하면 된다.”(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Ⅱ 권, 380) 이런 정보기술이 현재는 노동자를 실업자로 전락시키는 기술로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필요노동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전화시켜 나가는 일이 앞으로 사회진보의 역사적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