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전선] 98년 11월
현대로 낙찰된 기아와 한국자동차산업의 재편
98년 10월 19일 기아·아시아자동차 3차 국제입찰에서 현대자동차가 낙찰자로 선정됐다. 이로써 97년 7월 15일 부도유예협약 적용 이후 혼미를 거듭해온 이른바 '기아사태'가 일단락됐다. 물론 '낙찰=인수'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 몇가지 절차가 남아 있다. 현대자동차는 재무·법무·상용·공장·기술·자재·판매·마케팅·정비·정보·인사 등 11개 부문으로 나눠 11월 17일까지 기아 실사를 벌이고 채권단과 협의하여 회사정리계획안을 수정,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12월 1일 기아·아시아 신주인수계약이 체결되고 회사정리계획에 대한 법원 인가가 나는 12월 15일로부터 3개월 후 주식인수대금을 납부해야 현대의 기아 인수는 법적으로 최종 마무리된다. 변수 또한 만만치 않다. 전체 채권단회의에서 현대가 제시한 7조3천억원의 부채 탕감 요구를 받아들일지 불확실하다. 98년 3월말 기준 무담보 대출 1조2천8백81억원, 보증채권 8천4백2억원 등 총 2조 1천억원이 넘는 돈을 기아에 빌려준 11개 종금사들이 기아부채 탕감으로 발생하는 손실금을 3년 이상으로 나눠 회계처리해주든가 성업공사가 기아 채권을 적절한 가격에 사줘 채권 보전이 이뤄지도록 하든가 정부가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회사정리절차 개시를 위해 필요한 채권단의 동의(정리담보권-담보가 있는 채권은 채권단의 4/5, 정리채권-무담보채권은 2/3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지 불투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기아 인수는 지금 거의 확정적이다.
현대의 기아 인수가 이른바 빅딜로 표현되는 사업구조조정과 한국자동차산업의 재편,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용과 생존권에 미칠 영향은 매우 크다. 현대는 기아를 인수하기 위해서 발전설비와 철도차량부문을 포기했다. 반도체 또한 현대와 LG가 7대 3이든 반반이든 지분을 나눠갖는 방안으로 빅딜(?)이 추진되고 있다. 정부는 구조조정과정에서 빅딜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결과를 내오기 위해 삼성자동차 정리 방안을 흘리고 있다. 박태준 자민련 총재가 10월 21일 베이징에서 "국내 자동차산업을 현대와 대우 중심의 이원화체제로 재편하는 방향으로 삼성차의 처리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한 발언은 정부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케 한다. 정몽규 현대자동차 회장의 얘기처럼 "4조원을 넘는 부채규모를 감안할 때 지금 차 한대에 1억원 이상은 받아야 채산이 맞을 것"이라는 삼성자동차로서는 독자경영의 의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결국엔 어떤 식으로든 자동차사업을 정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의 기아 인수로 한국자동차산업은 크게 현대-대우라는 양사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커졌다. 연간 생산규모가 188만대인 현대가 기아를 인수하면 연산규모 2백93만대로 생산능력 기준 세계 13위에서 10위권 안으로 들어가 이른바 'GT-10'을 달성하게 된다. 연산 1백20만9천대 규모의 대우 또한 아시아자동차와 기아의 일부 라인을 인수하면 최소한 1백40만대 이상의 규모로 커진다. 현재 연간 생산규모가 총 4백22만3천대, 여기에 해외 생산설비까지 합치면 약 6백6십만대 규모로 세계 5위의 자동차 대국인 한국자동차산업은 150만대 수준의 내수 판매량, IMF 사태와 내수 급감에 따라 40%대로 떨어진 가동율, 99년 6월 일본차 수입 등으로 자본축적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현재 40%대로 떨어진 가동율을 최소 적정선인 70%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총생산규모를 3백만대선으로 축소하고 나머지 설비를 해외로 이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자동차산업 안에서만 최소 3만여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현대자동차 3만6천여명, 기아·아시아자동차 2만3천여명, 기아자판·아시아자판 1만여명을 합친 총 6만9천여명의 노동자들은 합쳐지자마자 또다시 대규모 '고용조정'이라는 태풍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판국이다.
현대자동차는 오는 2005년 세계 5대 자동차메이커로 도약한다는 계획 아래 인사조직, 생산, 개발, 자재조달, 판매 등 5개 부문으로 나눠 자동차산업연구소에서 장기계획을 입안중이다. 인사조직과 생산부문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들은 인건비 삭감, 고령근로자 감축, 정식사원을 대상으로 한 계약제 추진, 연공서열식 인사제도 폐지, 노후공장 폐쇄, 중복라인 통폐합, 생산효율성이 높은 공장으로의 생산 집중 등이다. 이미 현대자동차는 과장급 이상에 대해 연봉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해놓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기아 인수는 이렇듯 또다른 임금삭감과 직무직능급으로의 임금체계 개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98년 현대자동차에서 1만여명이 '정리'된 것은 마무리가 아니라 시작인 셈이다. 연봉제다 직능급이다 하면서 임금체계를 개악하려는 시도 또한 거세질 것이 뻔하다. 자본의 새로운 공격에 맞서 고용안정과 생존권을 지켜내려면 그만큼 더 크고 완강한 투쟁이 요구된다. 현대 자본이 하나의 회사 법인으로 기아를 흡수할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노동자들로서는 6만9천명의 조합원을 갖는 국내 최대 단일노조를 갖게 되는 셈이다. 거세게 몰아칠 또다른 대규모 고용조정과 임금체계 개악이라는 태풍에 맞서 현대와 기아, 아시아로 나뉘어져 있던 노동자들이 그야말로 한몸이 되어 투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투쟁은 지금부터 준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투쟁이 정리해고 반대나 임금체계 개악 반대라는 방어적 투쟁을 넘어서서 한국자동차산업의 재편과 고용안정에 대한 노동자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법정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유지와 창출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요구로까지 발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