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1월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역사(1987∼1998)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87년 한여름에 전국을 뒤흔든 이 외침은 그동안 한낱 기계의 부속품으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이었고, 더 이상 임금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주인선언'이었다.
87년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불붙기 시작한 파업투쟁은 울산에서 부산, 마산, 창원, 거제로, 구미와 수도권으로, 강원, 경북, 전남의 탄전지대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대공장에서 중소공장, 마찌꼬바로, 금속에서 화학, 신발, 섬유, 광산, 버스와 택시, 호텔, 병원, 백화점으로 뻗어나간 파업투쟁은 두달동안 3,300개가 넘는 공장에서 전체의 1/3이 넘는 노동자를 투쟁의 불길로 몰아넣었다.
두달 사이에 1,361개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새로 만들어졌다. 박사들도 노동자라며 노동조합을 만들고 연예인들조차 직업별 노조를 만들만큼 87년 7∼8월 대투쟁은 한국 사회에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운동을 보편화시켰다.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의 노동자들이 기계에서 인간으로, 임금노예에서 주인으로 거듭나는 되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이자 출발점이었다. 지난 10년동안 이루어진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투쟁과 이념, 조직의 발전은 이 투쟁이 일으킨 힘찬 파장에 다름 아니다.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세갈래로 나뉘어 발전해왔다. 민주노조 사수투쟁(88년 2월 현대엔진 민주노조 사수투쟁)과 노조민주화투쟁으로부터 출발한 대공장은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87.8.8)를 시작으로 그룹별로 단결해갔고, 일반 제조업 노동조합들은 [마산·창원 노동조합총연합](87.12.14)을 시작으로 [지역노조협의회]로, 사무전문직 노동조합들은 [사무전문직 노동조합협의회](87.11.27)를 시작으로 [업종노조협의회]로 단결해갔다.
건설! 전노협!
88년 11월 13일,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조합 특별위원회](88.6)와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88.8)가 함께 조직한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88.8)는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를 치러냈다. 전국에서 모여든 5만명 넘는 노동자들이 서울 신촌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노동법 개정"과 "독점재벌 해체"를 요구하며 행진했다. 이 투쟁의 성과로 88년 12월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가 만들어졌다.
88년 12월 28일, 노태우 정권은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지시'라는 체제수호 선언을 했다. 이 선언에 정면으로 맞선 것은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었다. 해고자 복직과 서태수 집행부 퇴진, 그리고 노조민주화를 요구하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89년 1.8 테러와 2.21 식칼 테러사건을 거치면서 '공권력'과의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두차례에 걸친 상경결사대의 서울투쟁과 89년 3월 30일 공권력 투입 이후 열흘동안 벌어진 거리 바리케이트전은 128일동안의 이 투쟁이 얼마나 끈질기고 완강했는지를 잘 보여줬다. 또한 대공장에서 민주노조를 세워내고 이를 사수하는 것 자체가 공권력과의 전면 투쟁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자각하게끔 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128일 파업투쟁은 89년 4월, 임수경 학생과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 뒤이은 '공안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한 부천지역 4.15 동맹파업투쟁, 5월 1일 '세계노동절 100주년 기념 한국노동자대회',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조]의 결성, 5월 29일 대우조선 박진석, 이상모 열사 분신투쟁으로 이어지면서 전국 민주노조운동의 힘을 "건설! 전노협"의 기치로 모아내는 추동력이 되었다.
90년 1월 22일, 성균관대학교 수원 캠퍼스에서 경찰의 원천봉쇄를 피해 전국에서 모인 400명 넘는 노동자들이 뒤늦게 들이닥친 전투경찰들이 쏘아대는 최루탄 가스 속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을 선포했다. "평등세상 앞당기는 전노협"은 14개의 [지역노조협의회]와 2개의 [업종노조협의회], 600여개의 단위 민주노조와 20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전국조직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업종노조 대부분이 전노협 가입을 미룬 채 따로 [업종회의](90.5)를 꾸리고 대공장 노조들이 단위 현장 내부 문제로 당장 전노협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던 터라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구심 전노협'은 아직 미완인 상태에서 지노협을 중심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전노협은 산별노조로 가기 위한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전국 구심으로서, 대공장 노조와 결합함으로써 업종노조를 견인하여 민주노조총단결대오를 강화하고 이 힘을 바탕으로 한국노총 산하 중간노조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과제와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산업별 단결을 촉진하고 강화하는 산별노조 건설의 교두보이자 참모부로서의 역할, 그리고 민중연대투쟁의 선봉대로 나서야 할 임무를 안고 있었다. 전노협이 출발부터 안고 있던 이 과제의 막중함은 그만큼 가혹한 시련을 요구했다. 이제 "건설! 전노협!"의 기치는 "사수! 전노협!"의 절박한 외침으로 대치되었다.
90년 골리앗투쟁과 전국총파업투쟁
90년 4월, "서기원 사장 퇴진"과 "방송민주화"를 요구하며 KBS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4월 12일 공권력이 투입되었지만 투쟁은 MBC 노동자들의 동맹 제작거부투쟁, CBS 노동자들의 지지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면서 90년 상반기 투쟁전선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지도부에 대한 재판에 참가하기 위해 조합원을 동원했다는 이유로 어렵게 탄생한 신임 민주집행부의 이영현 위원장과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이 구속되자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이갑용 사무국장을 의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90년 4월 25일 파업투쟁에 들어갔다. 4월 28일 새벽, 전국 각지에서 동원된 만여명의 전투경찰병력이 파업 현장에 투입되었다. 노동자들은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투쟁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으로, 마창노련의 동맹 총파업으로, 전노협의 5월 1일, 5월 3일, 5월 4일 전국총파업투쟁으로, 한국노총 산하 중간노조들의 광범위한 파업 동참으로, [국민연합]의 5월 9일 반민자당 전국동시다발투쟁과 5월 18일의 국민대회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 과정은 한국사회 노동자 대중투쟁이 어떻게 발전하는가에 대한 합법칙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줬다. 골리앗투쟁으로 전노협은 사수되었다.
91년 5월 투쟁과 92년의 논쟁
91년 2월 10일, 의정부 다락원에서 대우조선 투쟁 지원방안을 논의하던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90.12.9) 소속 위원장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4월 26일 강경대 학생이 시위도중 살해되고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마저 옥중에서 의문사하자 5월 6일 전노협과 업종회의, 노동운동단체들은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노동운동 탄압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또다시 전국총파업투쟁을 벌여냈다. 5월 7∼8일의 거리투쟁, 5월 9일의 시한부 파업투쟁, 5월 11일의 대규모 거리투쟁은 5월 18일, 16개 지역에서의 총파업투쟁으로 발전했다. 5월 투쟁은 단위사업장의 이해관계가 당장 걸려 있지 않더라도 노동자들이 특정한 정세에서 민주주의투쟁전선의 전면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5월 투쟁의 성과로 91년 10월, 전노협과 업종회의, 노동운동단체는 함께 [ILO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92년 1월, 현대자동차 상여금투쟁이 패배하면서 노동운동위기론을 둘러싼 광범위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논쟁은 한국 노동조합운동을 둘러싼 주·객관 조건의 변화를 규명하고 이에 걸맞는 대안을 제출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비판하는 사회발전적 노동조합운동론, 진보적 노동조합운동론 들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 논쟁은 87년 이후 발전해온 민주노조운동의 투쟁, 조직노선과 이념에 대한 전면 재검토와 재정비를 요구했다.
92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위기론을 둘러싼 논쟁은 조직발전 전망을 둘러싼 논쟁으로 구체화되었다. '민주노조총단결'의 강화를 통해 '천만노동자총단결'로 나아가고자 했던 조직발전 전망에 대한 공유는 92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전노협 중심성'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전노협 조발소위안과 전노대를 주장하는 안 사이의 대립은 93년 말 전노협 위원장 선거로까지 이어졌다.
93년 현총련 공동임투
93년 6월, 민주노조운동진영은 한국노총과 경영자총연합이 합의한 93년 노-경총 임금합의 거부투쟁을 공동으로 조직하면서 지금까지 사안별 공동투쟁체에 머물러 있었던 ILO공대위를 해소하고, 민주노조진영의 공동사업추진체로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를 건설했다. 전노대에는 전노협, 업종회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90.1),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90.5)에 소속된 1,145개 노조 40만7천명이 결합했다. 전노대에 이르러 87년 이후 지금까지 대공장(그룹별 노조협의회), 일반 제조업(지노협), 사무전문직(업종별 노조협의회)으로 나뉘어 발전해온 민주노조운동은 비로소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나 90년 전국노동자대회, 91년 박창수노대위와 ILO공대위, 92년 전국노동자대회를 공동으로 추진해왔던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와 [전국노동단체연합] 등의 노동운동단체는 전노대에서 배제되었다.
93년 6월 4일, 김동섭 현대정공 위원장의 직권조인에 대한 분노로부터 촉발된 현총련 공동임투는 6월 30일 울산 일산해수욕장에서의 대규모 집회와 7월 7일 10개 노조 63,000여 조합원의 연대총파업투쟁으로 발전했다. 이 투쟁은 김영삼정권의 '신노동정책'과 '고통분담론'을 내세운 '문민개혁'이 '공장 문 앞에서' 어떻게 멈춰지고 변질되어가는지를 분명하게 폭로했다. 뿐만 아니라 "김영삼 정부 내의 개혁파를 돕기 위해 파업을 자제해야 한다"는 노동운동진영 내 타협 세력의 기회주의성도 남김없이 폭로해냈다.
94년 전지협 연대파업투쟁
94년 6월, [전국기관사협의회]와 지하철 노조가 연대하여 파업투쟁을 벌였다.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94.3)의 연대파업투쟁은 업종별 공동투쟁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었다. 전지협 노동자들의 투쟁은 부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LNG 선상파업투쟁, 광주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대구 대우기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 각 지역별 신규 대공장 민주노조들의 파업투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전지협 연대투쟁은 한국통신 노동조합의 민주화, 조폐공사 노조의 파업투쟁으로 이어져 민주노조운동이 공공부문에까지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94년 11월 4일, 142개 노조, 21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공공부문 노조 대표자회의]를 건설하여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전노대로 결집한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민간부문에서 새롭게 대공장 민주노조들이 합류하고 공공부문으로까지 외연이 넓혀짐과 동시에 94년 6월 [원진레이온 살인기계 중국이전 반대 대책위원회], 95년 1월 12일 [외국인 취업연수생 인권실태 개선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결성으로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폭넓은 연대의식을 개척해갔다. 전노대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94년 11월 13일, [민주노총준비위원회]를 공식 발족함으로써 재편되었다.
95년 한국통신 노동자 투쟁과 신경영전략에 맞선 분신투쟁
95년 5월 16일, 한국통신 회사는 유덕상 위원장 등 노조간부 60여명을 파면했다. 5월 19일, 김영삼대통령은 한국통신 노조의 준법투쟁을 '국가전복 저의를 가진 불법행위'로 몰아붙였다. "임금가이드라인 철폐", "통신개방 반대", "재벌특혜 민영화 반대"를 요구로 내건 한국통신 노동자들은 주요 간부들의 구속과 수배에 맞서 서울 명동성당과 조계사에서 농성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공권력을 투입하여 농성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한국통신 노조는 7월 24일, 파업을 결의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엄청난 투쟁열기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한국통신 노조의 투쟁은 7월 30일, 국가기간산업에서의 파업의 벽을 결국 뛰어넘지 못하고 노동조합이 단체행동 중단을 선언함으로써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그동안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 섰던 대공장 노동조합들은 90년 초반 이후 본격화된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맞서 극한투쟁으로 내몰렸다. 울산 현대자동차 해고 노동자인 양봉수 동지는 신경영전략이 가져온 노동강도 강화와 이른바 실리주의 노조에 반대하여 분신으로 저항했다. 현대자동차 민주세력들은 집행부와 별도로 대책위를 꾸리고 5월 15일, 전공장 파업투쟁을 감행했다. 현총련이 이를 받아 연대투쟁에 들어갔다. 거제 대우조선에서도 박삼훈 조합원이 분신했고 대전 철도 공작창 서전근 동지도 분신으로 항거함으로써 삭막해진 현장과 노동강도 강화, 고용불안, 산업재해 증가를 가져온 자본의 신경영전략이 노동자들을 얼마나 끔찍한 벼랑으로 밀어넣고 있는지를 죽음으로 폭로했다.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무쟁의 타결'은 바로 이 신경영전략의 '위력'을 거꾸로 보여준 예였다.
민주노총 출범과 공공 5사 연대투쟁
95년 11월 11일, 866개 노조, 41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전국 중앙조직으로 민주노총이 출범했다. 민주노총은 전노협에서 전노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온 민간부문 '민주노조총단결조직'의 일단락이며, 공공부문 민주노조운동의 합류와 전체 민주노조운동의 산업별 단결이 전진함에 따라 산별노조의 전국 중앙조직으로 발전해갈 과도 구심이자, 한국노총에 반대하는 소수파운동에서 한국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하는 다수파운동으로 전환해갈 교두보라는 지위를 갖고 탄생했다.
민주노총 원년인 1996년은 95년 12월 15일 새벽 민주당 서울지부당사 전해투 농성장, 화물칸 엘리베이터 옆 5∼6층 사이 비상계단에서 스스로 목을 매고 숨진 대우정밀 병역특례 해고 노동자 조수원 동지의 장례식(96.1.5)과 1월 12일 경주 보문단지 안에 있는 교육문화회관 앞에서 최태일 어용집행부의 부당징계에 항의하며 자기 몸을 태워 노조민주화를 요구한 한국전력노조 한일병원지부 위원장 김시자 동지의 주검을 마주하고 비통과 분노 속에 그렇게 열렸다.
3월 14일부터 4월 6일까지 강성구 사장 연임 반대와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 분쇄를 요구하며 전면파업을 벌인 MBC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96년 임투가 시작되었다. 4월 11일부터 5월 5일 이진권, 서상준 동지가 분신을 감행하면서까지 결사항전의 태세로 한달 넘게 전면파업을 벌인 구미 한국합섬 노동자들의 투쟁은 울산 태광산업·대한화섬 노동자들의 6∼7월 파업투쟁과 더불어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일어난 민주노조운동의 파장이 '실 만드는 노동자'들의 투쟁으로까지 넓혀졌음을 보여줬다.
한편 [공노대]는 3월 23일 '노조탄압 저지 및 96 임단투 완전승리를 위한 공공부문 노동자 결의대회', 6월 2일 4만여명이 모인 '공공부문 노동조합 조합원총회'를 거쳐 서울지하철, 한국통신, 전국지역의보, 부산지하철, 조폐공사노조 등 공공 5사의 공동투쟁을 벌여냄으로써 96년 전체 임투전선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6월 20일 서울지하철과 한국통신에서 쟁점이 되었던 해고자 복직 문제가 부분 복직으로 타결되고 부산지하철과 의보노조도 잇따라 타결되면서 전임자 축소 저지를 핵심 요구로 내건 조폐공사노조가 고립되는 모습으로 공공 5사 투쟁은 마무리되었다. 공공 5사의 공동투쟁이 이렇게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4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의 '신노사관계 구상' 발표 이후 5월 9일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구성되자, '참여와 투쟁'이라는 전술을 갖고 노개위에 참여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6월 20일을 전후한 시점에서 '전면 투쟁'이냐 '평화 조기타결'이냐를 놓고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탓도 컸다. 곧이어 자동차연맹 사업장들이 줄줄이 타결되고 그 잠정합의안들이 또 줄줄이 부결되는 사태가 이어지면서 96년 임투 전체가 마무리되었다.
96∼97년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
12월 26일,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 154명은 새벽 6시에 자기들만으로 임시국회를 열어 7분만에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비롯한 11개 법안을 날치기 기습 통과시켰다. 노개위 공익위원 안보다도 훨씬 후퇴한 노동법 개악이 '노사관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법제화된 것이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투쟁에 들어갔다. 12월 26일 83개 노조 14만, 12월 27일 165개 노조 20만이 총파업투쟁과 지역집회투쟁을 전개했다. 12월 27일에는 한국노총까지 가세하여 총 658개 노조 36만5천여명의 노동자가 총파업에 동참했다. 12월 28일 민주노총 175개 노조 21만8천여명과 한국노총 533개 노조 15만6천여명이 총파업투쟁을 벌임으로써 1단계 총파업투쟁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해를 넘기면서 수그러들 줄 알았던 총파업의 열기는 97년 1월 6일 민주노총 150개 노조 19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대오에 복귀함으로써 되살아났다. 2단계 총파업투쟁은 1월 15일 민주노총 431개 노조 37만여명의 3단계 총파업투쟁과 한국노총의 시한부 파업동참으로 이어져 사상 최대규모를 기록했다. 전선은 전면 총파업투쟁에 이은 범국민항쟁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1월 17일, 제10차 투본대표자회의에서 전면파업을 중단하고 수요파업으로 후퇴함으로써 20일 넘게 진행된 정치총파업투쟁은 마지막 순간에 완전승리를 거머쥐지 못한 채 사실상 막을 내렸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인간선언'이었다면 96∼97년 총파업투쟁은 한국 노동자들의 '정치선언'이었다. 민주노총은 이 투쟁으로 합법화를 뛰어넘는 지위를 얻어냈고 우리나라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총파업투쟁으로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들의 한국노총 탈퇴와 민주노총 가입이 늘어났으며 이름만 있고 활동이 없던 '휴면노조'들이 상당수 정상화되었다. 미조직 노동자들 또한 이 투쟁으로 노동조합 결성의 필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세계 노동자들에게 자본의 유연화공세와 정권의 신보수주의공세에 대한 투쟁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투쟁으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이 국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3김을 누른 권영길'이라는 주간신문의 표제에서 보듯 여야 할 것 없이 제도권 정치가 제 할 일을 못찾고 헤매는 동안에 민주노총은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과 힘을 보여줬다. 국민들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힘있는 세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그만큼 보수정당들의 거짓 정치를 투쟁으로 제압하고 청와대와 직접 '정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치'는 겨우 싹을 틔웠을 뿐이고 가능성만을 보여줬을 뿐이다. 민주노총 투본 대표자회의가 1월 17일 제도정치권으로 공을 넘겨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것은 이 새로운 정치의 싹을 좀더 풍부하게 키울 수 있는 길을 너무 빨리 막아버렸다. 뿐만 아니라 97년말 대선에서 보여준 국민승리21의 "일어나라 코리아" 류의 '정치'는 노동자 정치의 싹을 왜곡시키면서 참담한 패배로 귀결되고 말았다.
결과를 놓고 보면 96∼97년 총파업투쟁으로 민주노총은 내용적으로 합법성을 부여받았지만 자본의 유연화공세가 법제화됨으로써 노동자대중은 심각한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 모순된 현실은 한국 민주노조운동이 총자본의 동반자로 체제내화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 사회 구조개혁의 대안주체로 스스로를 세워낼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지난 10년의 투쟁이 물거품이 되느냐 새로운 삶의 희망을 일굴 밑거름이 되느냐가 판가름나게 되었다.
98년 전국금속산업연맹의 출범과 민주노총 2기 지도부의 탄생
98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공식 출범하기도 전에 IMF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이른바 '사회적 합의'를 적극 추진하였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여 2월 6일 새벽 정리해고제를 받아들이는 노사정 합의안에 동의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2월 9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직권조인'된 노사정 합의안을 부결하고 상근임원 전체의 퇴진과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2월 10일 비상대책위원회는 2월 13∼14일의 총파업투쟁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67개 사업장 12∼14만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투쟁을 결의했다. 그러나 2월 12일 비상대책위원회는 8시간의 회의 끝에 다시 총파업을 철회해버렸다. 바로 이날 대우조선 최대림 조합원은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투쟁에 전조합원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분신했다.
2월 15일,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 철회라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이 창립되었다. 20만 '철의 노동자'가 드디어 한 몸이 되었다. 금속산업연맹은 현총련, 자동차연맹, 금속연맹추진위 들로 갈라졌던 민주노총 20만 '철의 노동자 총단결체'이자 '전노협의 적자(嫡子)'이며 미완에 그쳤던 '대공장과 전노협의 완성된 결합체'로서 중간노조와 한국노총 금속연맹 산하 노조 민주화를 추동·견인하며 미조직 금속노동자를 획기적으로 조직하여 명실상부한 '철의 노동자 총단결'로 전진해나갈 교두보로서의 지위를 갖고 탄생했다. 그러나 노사정 합의와 부결, 총파업 선언과 철회로 이어지는 과정은 금속산업연맹의 1기 지도부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게끔 하였다.
3월 31일 민주노총 2기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이갑용 신임 위원장은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과 2기 지도부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고 민주노총 임원선거 직선제 등을 약속하였다.
98년 정리해고 철폐투쟁
5월 1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3만여명의 조합원, 학생, 빈민, 사회단체 등이 참가한 가운데 제108주년 세계 노동절 기념 집회가 열렸다. 민주노총 2기 지도부는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철폐 및 부당노동행위 근절, 고용안정과 생존권 보장, 고용·실업 대책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해체·노동3권 보장·노동자 경영참가, IMF 재협상' 등 5대 요구를 중심으로 5월말∼6월초의 총력투쟁을 선포했다. 이날 행진과정에서 격렬한 거리투쟁이 벌어졌다.
5월 27∼28일 민주노총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틀동안 49개 노조 7만7천명이 참여했다. 5월 29일 기아자동차의 송인도 조합원이 분신했다.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6월 1일 '체불임금 지급과 고용안정 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6월 5일 2차 6.10 총파업을 철회하고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투쟁은 전국 총파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고립된 채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6.10 총파업 철회 이후 정부와 자본은 6.5 노정 합의사항을 전혀 이행하지 않으면서 6월 18일 55개 퇴출기업 발표, 6월 29일 5개 퇴출은행 발표, 6월 30일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신고, 7월 3일 11개 공기업 민영화 계획안 발표 등 강제적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공세를 가속화해왔다. 이에 맞서 7월 14일 금속산업연맹을 시작으로 15∼16일 총 68개 노조 15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총파업이 벌어졌다. 7월 22일에는 금속산업연맹 15개 노조 6만8천여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7월 23일 민주노총 산별대표자회의는 총파업 방침을 철회하고 말았다. 이후 전국적 공동투쟁 전선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7월 20일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무기한 천막농성과 파업투쟁에 들어갔다. 이 투쟁은 8월 24일 잠정합의 때까지 36일 동안 계속되었다. 전국 전선이 와해된 조건에서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 철폐투쟁은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리·대표전의 성격을 띠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투쟁은 김광식 집행부가 정리해고를 수용함으로써 패배로 끝났고 이후 정리해고 최소화냐 정리해고 철폐냐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은 사회적 조합주의, 산별만능론, 계급적 노동운동 사이의 노선 논쟁으로 확대·발전되었고 이러한 대립은 99년 2월 6일 금속산업연맹 2기 임원선거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8월 17일 만도기계 노동조합은 사측의 정리해고 공세에 맞서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8월 24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잠정합의를 하면서 정부의 공권력 개입이 노골화되고 위원장 및 주요 간부가 체포·구속되면서 전국연대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9월 3일 무자비한 공권력 침탈로 각개격파 당하고 말았다.